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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스크랩 바른 신학을 위하여 / 총회신학교 제공
상록수 추천 0 조회 10 14.10.26 22: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바른 신학을 위하여 / 총회신학교 제공|♡ † ...신학 길잡이
JaxHopes | 조회 13 | 09.01.17 13:58 http://cafe.daum.net/jaxhopes/KOyN/3 
 
 
 

   바른 신학을 위하여....

 

 

 I. 하나님과 인간 - 목적의 문제

 

반 종교와 기독교를 구별할 때에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초월성}에 대한 것이다.


{기독교는 초월종교이고 다른 종교들은 자연종교이다. 다른 종교들은 사람이 만든 것이나 기독교는 신적인 것이다. 기독교는 신적인 개입 즉 기적이 있고 신적인 능력이 있고 다른 종교에는 그것이 없고 도(道) 뿐이다} 이것이 가장 일반적인 답변인데 이것마저도 맞지 않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종교일지라도 초월을 그 특징으로 갖는다. 그래서 아무리 낙후된 원시사회에도 종교가 있으며, 그 종교의 집행자는 무당일지라도 초월적인 능력이 있는 것이다. 기독교 외에는 초월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난센스이다.


출애굽에서 바로의 주술사들도 모세를 따라서 이적을 행하였다. 어느 순간에는 마귀가 더 초월적일 수도 있다. 따라서 초월이 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구별하는 차이점은 아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차이점은 바로 계시(啓示)이다.


계시란, 초월적인 하나님이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시는 방법이다. 그래서 계시를 가진 기독교를 {계시종교}라고 하는 것이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일을 미리 말하시고 그대로 이루시는 섭리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신다.


그러나 다른 종교는 뚜렷한 목적이 없다. 어떠한 것이라도 신이 될 수 있고 무엇을 섬겨도 위로를 받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다른 종교는 근본적으로 범신론이다. 범신론이란 각자가 신이 되는 것이다.


다른 모든 종교가 도를 깨우치는, 즉 인간을 극대화하고 그 자신 안에 부족한 것을 채워나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가장 많이 요구하는 것은 순종이며 자아의 부인(否認)이다. 얼마나 철저하게 전능자에게 의존하고 그 능력에 이끌림을 받느냐 하는 것이다.

 

 

 II. 의인과 죄인 - 편향의 문제

 

{우리는 의인일까? 아니면 죄인일까?} 『당신은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이 물음으로 구원 논쟁, 교리 논쟁을 벌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의인이나 죄인이라고 말할 때에 두 가지 면을 생각해야 한다. 법적인 신분으로서 의인과 죄인이 있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문제에서 완성과 미성숙을 나누는 죄인과 의인이라는 단어가 또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할 때에 그는 사도로 한창 활동하고 있는데도 죄인의 괴수라고 말한 것은 {성숙이라는 차원에서와 하나님 앞에서 완성되어야 하는 시점에서 볼 때, 푯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현주소로 자기를 인식하고 있을 때, 또 지나간 것은 잊어버리고 내가 아직 이른 줄로 여기지 아니한다라는 차원에서 {자신이 죄인이다}라는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와 주로 고백하고 믿는 사람을 법적으로 {의인}이라고 하나님께서 선포하셨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말해준다. 비록 현재 죄를 범하고 있어도 그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이다. 그러나 윤리적으로 의로운 일을 행하는 사람이라 해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의 은총을 받지 못한 사람은 타고난 죄인, 즉 천성적인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어느 한 부분만을 가지고 단원론적(單元論的)으로 하나의 가치 체계만을 말하면서 성경을 폐쇄적으로 체계화하면 편향적 독단에 빠질  위험이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폐쇄적이고 편향적으로 보느냐? 전체와 조화가 되었으며 정당한 해석을 하느냐? 하는 입장을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성경은 틀림없으나 성경 해석과 인용이 잘못되는 우를 범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창1:1부터 계22:11까지를 통관 대조하여 성경과 해석이 상호 충돌이 없는 조화 점을 발견하는 데서만 정당한 해석이 나오는 것이다.

 

 

 III. 이성과 성령의 조명 - 중심의 문제

 

성이 어떤 한계성을 가지고 어떤 특징을 가지느냐?  


이것을 제일 잘 정리한 사람이 칸트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란 책은 {우리가 하나님이 계시다고 해도 인식할 수 있는가? 부터 따져야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초월자(超越者)이시다. 시간과 공간을 절대적인 조건으로 삼아서 기능을 발휘하는 이성이 어떻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분을 포착할 수 있느냐? 이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그 유일한 인식기능인 이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포착하고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 순수이성 비판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조명, 성령의 역사 하심을 주목하게 된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다 위를 걸으신다. 홍해를 가르시고 지진이 나며 문둥병이 낫는다} 이것은 사실 일종의 공간 초월이다.


시간 초월은 어떻게 나타날까?


예언이 바로 시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렇게 해서 스스로 초월자라는 사실을 보이신다. 이성으로는 초월을 인식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 속에서 다시 하나님이 초월자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히 인식시키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을 사용하시지만 그 이성을 폐쇄성 체계로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이성이 개방체계가 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증거를 제시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디 있어?}라는 생각을 깨뜨리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간 초월과 시간 초월을 체험함으로써 폐쇄적인 체계(Closed mind)를 열린 마음(Open mind)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이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만 진리를 바르게 깨닫는 것이다.

 

 

         IV. 자유주의와 근본주의-이성의 문제

 

인간은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계시를 이해하고 신학의 원리를 추적한다. 그런데 이성이 존재 유무의 판정관으로, 재판관으로 서게 되면 신학은 존재할 수가 없게 된다. 이성이 포착할 수 있는 한계 속으로 신학이 들어오고, 계시된 내용들을 이성이 재단하고 잘라버리고 또 취사 선택의 권리를 가지게 된다면 더 이상 신학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흐름은 근본주의 신학사상과 자유주의 신학사상이다.

 

▶ 자유주의의 문제
이성이 수용할 것과 수용하지 못할 것을 선택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이 계시된 것을 수용하거나 거부하기를 선택할 수는 없다. 계시된 것은 다 받아야만 된다. 그런데 수용할 것과 수용하지 못할 것, 사용할 것과 사용하지 못할 것을 이성이 판단해서 선택권을 가질 때에 신학이 고도의 합리적 폐쇄성을 가지는 것이다.

 

▶ 근본주의의 문제
개혁주의에서 원래 부르짖었던 근본주의를 떠난 극단적 근본주의의 위험성을 주의해야 한다.  극단적 근본주의가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은 해석을 하지말고 이성은 내용물을 운반만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초월적인 내용을 한계 속에 넣은 것을 이제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는 신앙의 눈으로 그 안 보이는 부분, 이성으로서도 포착할 수 없는 부분을 {이제 봐야 한다}는 유혹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계시된 제일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는 것이다. 근본주의는 성경이 초월의 내용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어떤 형태와 모습으로 계시했을 때에 꼭 그 모습만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어떤 형태를 취한 것은 그 내용을 우리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입힌 옷일 뿐이다. 그래서 성령의 조명과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계시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근본주의는 성경해석과 이해를 곤란하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반면 자유주의는 인간의 이성으로 자유롭게 생각해도 된다는 사상이다. 그러한 사상에서는 하나님의 존재가 더 이상 하나님으로 역할을 하실 수 없는 것이다.  이 두 주의는 인간이성이 모두 제한하고 있거나, 인간 이성이 제한되고 있다는 점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V. 신비주의와 자연주의 - 신앙의 문제

 

리는 지금 신비주의와 자연주의, 이 두 가지 혼합과 극단을 경계해야 된다. 그것은 자연신론(Deism)으로 가자는 게 아니고 초자연주의의 본성과 자연주의가 우리에게 얼마나 만연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첫째 주의할 점은 초 자연성만이 신적인 것이고 자연적인 것은 신적이지 않다라는 구별을 갖게 하는 오류로서 함정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그것은 계시가 자연 속에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자연의 참된 가치를 놓치게 된다.


둘째의 주의할 점은 자연주의의 인과 신앙 사상이다. 자연주의는 하나님은 천지를 만들어 자체적으로 돌아가게 해 놓으시고 하나님이 어디로 가버리셨기 때문에 자연이 혼자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 순간도 이 역사와 이 우주의 모든 운행에 그 힘으로, 지혜로 관여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한대로 법칙을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연주의란 어떤 원인을 집어넣는 한 결과는 당연히 따라와야 된다는 사상이다. 이 원리를 따라서 성경을 많이 보면 신령한 사람이 된다느니,  좋은 일을 많이 하면 복을 받는다느니 하는 신앙이 뿌리 박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은혜가 자꾸 배제된다는 것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뜻밖에도 인간의 자유의지, 인간의 행위의 법칙이 하나님의 은혜를 밀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이 두 가지를 살펴보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초자연주의즉 신비주의와 자연주의가 충돌되지 않고 우리 마음속에 자연스레 공존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니까 은혜는 초자연에다가 요구하고, 방법론에 있어서는 분명한 자연주의를 외치는 자리에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신비주의와 자연주의 그 어느 것이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원리요,방법이요, 목적이 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VI. 세대주의의 문제

 

세대주의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고 그 뜻을 이루는 데 있어서 각 세대마다 독특한 방법으로 일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하나님이 일을 계속 변경해 나가신다는 것이다.  그들은 전천년주의자들로서 항상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고집하고, 인간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역사는 일곱의 다른 세대들의 역사라고 구도화 시키고, 대환란전 교회의 공중 휴거로 예수님 영접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많은 신자들이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 다르다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율법으로 일하시고, 신약에 들어와서는 은혜로 일하신다는 사고방식이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있는 것을 본다. 구약은 율법적이고 신약은 은혜적이라고 한다, 이러한 구별은 은혜 시대에 사는 사람들을 반 율법주의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고 실패가 없으신 분임을 안다. 변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구약에서도 은혜가 나타난다. 그것은 죄인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구약과 신약이라는 것은 대칭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이다. 그래서 구약시대 성도들이나 신약시대 성도들이나 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세대주의는 성경의 여자적(如字的) 해석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성경 자체가 때로는 다른 부분의 성경을 영적으로 해석함을 잊고 있으며, 율법과 은혜를 예리하게 구분하여 은혜의 영원성과 율법의 항구성을 무너뜨리고 있으며, 성경을 일곱세대로 나눔으로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는다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의 통일성을 무시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세대주의는 하나님 나라를 순전히 미래로 주장함으로서 하나님 나라가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도 현존한다는 사실을 무시함은 극단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 한가지 짚어 봐야 할 문제는 대 환난 전 교회 휴거설이 성경적이냐 하는 문제이다.

 


 
VII. 신학과 기독교 교육의 문제

 

교육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바로 동기 부여이다. 피교육자가 그것을 배울 이유를 납득해야 교육을 받기 때문이다. 받는 사람 쪽에서 {내가 이것을 왜 배워야 되느냐?} 말하자면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서 인식과 납득을 시키지 않는다면 교육은 불가능하다.
기독교의 신학과 교육의 내용은 바로 우리에게 닥쳐올 문제이고 지금도 현존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내세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거룩한 나라의 백성으로 부르신다는 사실을 가르치게 되는 것이다. 즉 납득할 만한 설명을 교리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누구시냐, 인간이 누구냐, 죄가 무엇이냐, 구원은 어떻게 받느냐, 내세에는 어떻게 되느냐?} 이러한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것이 교리이다. 그래서 우리는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 교리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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