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절공 정 양
영일정씨의 원류는 지백호(智伯虎)이나, 연대가 오래되고 또한 고중이 없으므로 세계(世系)를 상고할 수 없어, 지백호의 원손 정종은(鄭鍾殷)을 도시조(都始祖)로 하고 후손 의경(宜卿)이 영일호장을 지낸 뒤 영일현백(迎日縣伯)에 봉해졌으므로 그 후손들이 영일을 본관으로 하였다고 한다. 시조는 신라 때 간관(諫官) 정종은(鄭宗殷)이며 그 후손(後孫)인 고려 의종 때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을 중조(中祖)로 하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와 감무(監務) 정극유(鄭克儒)를 중조(中祖)로 하는 감무공파(監務公派)가 있다. 이 양파(兩派)는 시조(始祖)를 같이 하면서도 그 중간계보(中間系譜)를 잃어버려 서로 촌수(寸數)를 헤아리지 못한다.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에서는 정몽주(鄭夢周)가, 감무공파(監務公派)에서는 정철(鄭澈)이 잘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배출(輩出)한 상신(相臣) 5명과 대제학(大提學) 3명 가운데 정유성(鄭維成:현종 때의 우의정)만이 정몽주(鄭夢周)의 후손(後孫)일 뿐, 정홍명(鄭弘溟:인조 때 대제학)· 정호(鄭澔:영조 때 영의정)· 정우량(鄭羽良:영조 때 우의정) 등은 모두 정철(鄭澈)의 집안이다. 이 밖에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로는 정유성(鄭維成)의 손자(孫子)인 양명학(陽明學)의 거성(巨星) 정제두(鄭齊斗), 선조(宣祖)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맞아 의병(義兵)을 일으킨 정대임(鄭大任), 효종(孝宗) 때 학자(學者) 정극후(鄭克後), 고종(高宗) 때 산수화(山水畵)에 능했던 정문승(鄭文升) 등이 있고, 감무공파(監務公派)로는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때 오천군(烏川君)에 봉(封)해진 정사도(鄭思道) 등을 들 수 있다.본군(本郡)에느??? 선조(宣祖) 때 학자(學者)며 좌의정(左議政)을 역임(歷任)한 송강 정철(송강 鄭澈)과 그 아들 문절공 정양(문절공 鄭瀁)의 후손(後孫)과 방후손(傍後孫)이 상운설매(祥雲雪梅) 소천승부(小川乘府)에 살고잇고 또한 19대 정기문(鄭起門)은 난을 피하여 인조(仁祖12년에 강원도 양양(江原道 洋洋)에서 물야오전(物野梧田)흰돌바위으로 옮겨앉아 현제까지 12대를 살고있다. 정양(鄭瀁) 1602~1668 자(字)는 안숙(安淑) 호(號)는 우익(宇翼) 경외(敬畏) 포옹(抱翁)으로 송강 정철(송강 鄭澈)의 손자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화도(江華島)에 갔으나 성(城)이 함락(陷落)되니 자살(刺殺)하려다가 뜻을 못이루고 그후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기용(氣勇)되고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현창주부(縣倉主簿) 수군판관(水軍判官)등을 거치고 지방(地方) 수령(首領)을 나갔다가 치석을 올려 장렬에까지 이르렀다. 태백산(太白山)에 은거(隱居)한 오현(五賢)의 한분이다. 이조판서(吏曹判事)에 추증(追贈)되고 시호(諡號)는 문절이다. 저서(著書)로는 유고(遺誥)가 전한다. 정택기(鄭澤基) 1807~1892 자(字)는 국서(國瑞) 통정대부(通政大夫)를 하였다. 정필용(鄭弼鎔) 1823~1903 자(字)는 의청(意淸)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하였다. 정연철(鄭然哲) 1911년생(年生)으로 물야오전(物野梧田)에서 출생(出生)하여 만주간도공업중학교를 졸업(卒業)하고 동흥토건주식회사(土建株式會社) 사장(社長)을 역임(歷任)하고 있다 정연수(鄭然洙) 1922년생(年生)으로 상운구천(祥雲九泉)에서 출생(出生)하여 면장(面長)를 역임(歷任)하고 있다 정동원(鄭東元) 1932년생(年生)으로 법전소천(法田所天)에서 출생(出生)하여 서울대학교법대(大學校法大)를 졸업(卒業)하고 농촌진흥청공보관, 법무관, 농수산부유통과장, 국립수산물검사소장, 국립수산기술훈련소장을 역임(歷任)하고 있다. 정소성(鄭昭盛) 1944년생(年生)으로 상운하눌(祥雲下訥)에서 출생(出生)하여 서울대학교(大學校) 물리대학(物理大學) 대학원(大學院) 졸업(卒業)하고 물리박사학위(物理博士學位)를 취득(取得)하여 단국대학교(檀國大學校) 교수(敎授)를 역임(歷任)하고 있다. 정원교(鄭源敎) 1952년생(年生)으로 봉화도촌(奉化都村)에서 출생(出生)하여 한국외국어대학교(韓國外國語大學校)를 졸업(卒業)하고 선경직물 관리부장(선경織物 管理部長)을 역임(歷任)하고 있다.
영일정씨 문절공 포옹 정양 선생에 대하여>
문절공 포옹 정양은 송강 정철의 둘째 아들인 강릉공 정진명의 넷째 아들이다.
문절공 정양은 병자호란이후 세상을 등지고 태백산에 은거하였는데 이때 태백산 주변에 같이 운거했던 선비를 태백 5현이라고 한다. 그 이후 우암 송시열의 추천으로 제천 금성면 월림리에 세거하였는데 이때 부터 제천에 있는 영일 정씨를 월림 정씨라고 부르게 되었다. 따라서 제천의 영일 정씨는 이분으로 말미암아 충북 제천과 인연이 맺어진 것이다.
문절공 정양은 1637년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 끓고 절하는 치욕을 당하자 서울 출신 선비 5명이 봉화의 문수산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은둔의 삶을 살았다.
영의정 인재 홍섬의 증손인 손우당 홍석, 송강 정철의 손자인 포옹 정양, 청양군 심의겸의 손자인 각금당 심장세, 참판 강징의 현손인 잠은 강흡, 만전당 홍가신의 손자 두곡 홍우정이 그들이다. 이들을 테백산에 은거한 다섯명의 현인이라는 뜻에서 태백오현이라 한다.
태백오현은 춘양 노리, 도심, 모래골, 버정이, 뒤뜨물 등에 터를 잡아 정착했는데 서로 간에 거리는 멀어야 수십 리에 불과했다.
이들은 자연을 벗삼아 빈번하게 교류했는데 그 주된 만남의 장소가 사덕암과 그 위에 있는 와선대(臥仙臺)다. 학산리(鶴山里) 골띠마을의 와선대 아래로 폭포는 그들의 충절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처럼 정겹게 떨어지고 있다.
이들 태백오현의 후손들이 와선정계(契)를 결성하여 아직까지 이어가고 있는 모습은 영남 지역이 아니면 보기 어려운 끈끈한 유대이다. 다섯 사람의 그때 그 약속이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