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전은 그리스도교 복음이 불교화 된 문서
-민희식의 '법화경과 신약성서'에 대한 비판-
1〕서론
민희식의 저작들이 기독교와 불교도들 사이에 논쟁을 일으켰다. 이 논쟁을 불러일으킨 그의 책들은 성서의 뿌리-오리엔트 문명과 불교-(민희식, 1989, 도서출판 산방), 법화경과 신약성서(민희식, 도서출판 블루리본, 2007), 예수와 붓다(민희식, 도서출판 블루리본, 2007)이다.
첫 번째 책은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구약이 고대 신화로부터 편집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성서의 뿌리는 고대 오리엔트 문명이라고 말하였고, 2부에서는 주로 예수의 잃어버린 세월(13-29세 때까지)을 밝히는 것에 중심을 두었다. 그는 1부에서 먼저 구약 성경의 사건들 가운데 초기의 중요한 사건 몇 가지를 언급하고 이 사건들과 유사한 고대근동의 신화들을 말함으로 구약이 고대근동 신화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2부에서는 예수의 탄생을 전후한 시대에 동서양의 교류사를 언급한 후, 불교의 영향이 근동에 미쳤다고 말했다. 그가 이와 같은 역사의 배경을 말한 것은 예수의 인도와 티베트 그리고 페르시아의 여행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고 또한 그의 여정에서 힌두교와 불교 그리고 조로아스트교와의 조우, 특히 불교의 가르침과 수행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예수가 이처럼 여러 종교로부터 영향을 받은 후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종교로서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책에서 그는 예수의 티베트 여행과 그곳에서 불교를 배우고 수행한 것을 전제로 하고 신약성경 특히 복음서들이 불교의 법화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세 번째 책에서는 신약이 법화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신약과 법화경 가운데 유사한 내용들을 비교해 놓았다.
그는 이 책들로 인하여 불교계에서 '그리스도교를 뿌리째 흔든 세계적인 학자' '유럽에서 활동 중인 한국이 낳은 세계적 종교학자'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저서들에 대한 배경과 주장들에 대한 이해를 갖는 독자라면 다음과 같은 의문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가 참으로 세계적인 비교종교학자일까? 그리고 그리스도교를 뿌리째 흔들어 놓은 학자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저자 자신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만이 자신의 저서들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근동 문화와 그리스도교 역사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도 그의 저서들의 학적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만일 그의 저서들에 대하여 '연구서'라는 이름이 붙이지 않고, 문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불문학자)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했더라면 그런대로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실제로 민희식과 동일한 주제 '예수의 잃어버린 생애'를 다루고 있는 목영일은 자신의 저서 '예수의 마지막 오딧세이'를 소설이라고 밝혔다.
민희식은 '예수와 붓다'의 서문에서 자신의 저술에 대한 목적을 이와 같이 말했다. "종교간 갈등으로 세계 평화가 위협을 받고 있는 오늘날은 자신이 신앙하는 종교뿐만 아니라 타종교에 대해서도 이해와 존중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이에 본 저자는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비교를 통하여 상호 이해를 돕고 타종교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 편견과 아집에서 벗어나 모든 인류를 평화 공존의 장으로 이끄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 바람으로 예수와 붓다를 썼다" 그러나 그의 저서는 이와 같은 목적에서 벗어났다. 이해는 진실과 서로에 대한 존중이 있을 때만 가능한데 그는 일방적으로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인에게 무례를 범했다.
2〕본론
민희식의 논의는 독자적인 것이 아니다. 그 논의를 가져오게 한 것은 1894년 러시아의 언론인이었던 니콜라스 노토비치가 '예수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The lost years of Jesus)'를 발표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엘리자베스.c.프로펫트/황보석 옮김, 예수의 잃어버린 세월. 동대 출판사, P26). 그는 동방을 여행하던 중 물벡(물벡은 티베트불교의 세계에 이르는 통로다)에 있는 불교사원에 이르러 라마승으로부터 랏사에 있는 서가(書架)에 선지자 이사(Issa,예수에 대한 동방의 이름)의 생애를 기록한 수천 개의 고대 두루마리가 보존되었다는 말을 듣는다. 노토비치는 이 두루마리를 찾기로 결심하고 여러 사원을 방문하던 중에 라닥의 수도 레에서 25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히미스 대사원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지승과 대화하는 중에 이사전(傳)이 이 사원에도 보관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주지승은 이 수기(사본)의 원본은 팔리어로 기록되어 처음에 인도에서 네팔로, 네팔에서 다시 티베트로 가져온 것이라고 말했다. 노토비치는 이 사원에서 직접 이 사본들을 보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가 편집한 '예수의 잃어버린 세월'의 내용은 어떤 특정한 사본에 기록된 내용이 아니고 여러 개의 사본에 분산 기록된 것을 편집한 것이다. 그는 여러 사본들 가운데 제목도 없고 순서도 없이 기록되어 있는 것들을 통역의 도움으로 기록 보관하던 중 여행이 끝난 다음 이야기에 맞게 배열해서 1894년 불어판으로 '최고의 인자 성인 아사전'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이 책은 14장 244절로 적은 분량이다(같은 책, P28).
이 책이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예수님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13-29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고, 또한 이 기간 동안 예수가 인도와 티베트에 가서 불교를 연구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영어, 독일, 스페인 이태리에서 번역 되었고 세계적인 관심과 논의를 불러 일으켰다. 이와 같은 논쟁을 불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경전에 대립시킴으로 우리나라에서 다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민희식의 저서들이다(노토비치의 저서와 관련 된 것은 이미 1987년에 '엘리자베스.c.프로펫트/황보석 옮김, 예수의 잃어버린 세월'을 통하여 국내에 소개되었다).
그의 논제의 전개 과정을 보면, 그는 먼저 예수의 탄생 전후의 동서양의 교류사를 볼 때 당시 동양의 불교사상이 서구에 전파되었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불교의 한 교사를 갈릴리 나사렛에 등장시킨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예수의 인도 유학을 가능한 일로 만든다. 만일 그의 말대로 예수가 인도에 여행했다면 그곳에서 브라만과 만날 수 있고 또한 불교와 만남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은 논리를 전개함으로 예수의 잃어버린 생애를 인도와 티베트 그리고 페르시아의 여행으로 메우고 있다. 민희식은 이사전의 진술을 기반으로 하여 자신의 사상을 발전 시켰다. 그래서 그는 예수의 잃어버린 생애를 보다 더 구체화하였고, 또한 예수의 가르침이 기록된 복음서의 내용이 불교의 영향을 받아 쓴 산물임을 주장하였다. 특히 그는 '예수와 붓다'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신약의 복음서와 법화경의 내용을 비교함으로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려고 시도했다.
그의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주장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의 저서들을 통해 그가 주장하고 있는 다음의 세 가지에 대한 논의가 요청된다. 하나는 '성경이 고대 근동의 신화들에 대한 편집인지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가 어린 시절(13-29세까지의 삶) 인도와 티베트를 여행하며 불교를 배우고 수행했는지,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복음서들이 법화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이다.
1. 성경은 고대 근동의 문화와 불교의 영향을 받아 기록된 편집물인가? 언급한 것처럼 민희식은 그의 저서 '성서의 뿌리(오리엔트 문명과 불교)'의 1부에서 구약이 고대 근동 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기 위하여 구약의 창조의 이야기와 낙원의 이야기, 홍수의 이야기 등을 언급하고 이와 유사한 고대 근동의 여러 신화들을 언급했다. 또한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신명(神名)은 에블라 족의 천신(天神)의 이름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구약의 사건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했다. 실례로서 가인과 아벨의 사건을 유목민과 농경민들 사이의 투쟁으로, 아브라함의 시대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이스라엘이 유목 생활에서 농경 생활로 전환한 시기의 이야기들이라고 해석했다. 또한 그는 구약성경에 언급한 여러 기적들을 모두 자연의 이변으로 인하여 발생한 사건이라고 해석했다. 예를 들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자연의 이변으로, 출애굽과 관련 된 열 개의 재앙을 기상 변화가 몰고 온 전염병과 사회 혼란으로 인하여 기인한 것으로, 그리고 홍해의 사건을 화산으로 인하여 일어난 일시적인 해리(海離) 현상으로, 여리고성의 무너짐을 사해 단층의 지각변동으로 인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처럼 구약의 중요한 설화와 사건들을 자신의 입장에서 해석한 후, 1부의 마지막 부분에서 '히브리 왕국의 번영'과 '남왕국의 멸망'이라는 주제로 이스라엘 역사를 약술해 놓았다(6페지 정도의 분량으로). 그의 저서 '성서의 뿌리'에서 '성경의 뿌리는 고대 근동 문명'이라는 것을 논하기 위하여 그의 저서 중 52페이지 분량을 할애 했다(앞에서 인용한 책 P18-70). 민희식의 주장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몇 가지 물음에 대하여 대답해야 할 것이다.
1) 성경의 설화와 유사한 고대 근동 신화들이 존재한다고 하여 그것이 성경의 뿌리가 고대 근동 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가? 민희식은 구약의 창조설화, 낙원설화, 홍수설화 등이 수메르의 신화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수메르의 유사 신화들을 말할 때 구체적인 신화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실제로 수메르의 신화 중에는 동일한 주제를 말하고 있을지라도 서로 다른 내용의 것들이 많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신화를 밝힐 때만 그것에 대한 해석의 논의가 있을 수 있다.), 그가 언급한 대로 고대 근동 신화들 가운데는 성경의 설화들과 유사한 신화들이 있다. 예를 들면 성경의 창조설화와 유사한 신화로서는 에블라 서판, 에트루스칸의 서, 젠드 아배스타경, 산쿠니아톤 전설, 에누마 엘리쉬 등이 있고, 낙원설화와 유사한 신화로는 우트나피스팀의 낙토, 시두리와 코헬렛 등이 있고, 홍수설화와 유사한 신화로는 길가 메쉬 서사시가 있다.
민희식의 주장대로 구약의 설화나 의식들 또는 문학 형식과 유사한 고대 근동의 신화나 의식 등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성경의 뿌리가 고대 근동 문명에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면 그는 더 많은 증거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의 예배 의식이나 절기 또는 제사법 가운데는 고대 근동의 것과 유사한 것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우가릿 문서에 나오는 의식에 관한 것들과 구약 레위기에 기록된 의식에 관한 법들 간에는 유사한 것들이 많다. 의식법 뿐만 아니라 히브리 문학과 우가릿 문학 사이에는 더 많은 유사한 것들이 있다. 실례를 든다면 히브리와 우가릿 시문학 사이에는 시의 형식이나 음률 리듬 등에서 매우 유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희식은 성경의 설화와 유사한 고대 근동 신화들 가운데 몇 가지만 언급했다. 이것은 그의 연구가 성경 전반을 연구 대상으로 하지 않고 극히 제한 된 범위에 편중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민희식이 성경의 뿌리가 고대 근동 문명이라고 주장한 것에는 다음의 전제가 있다. 그것은 성경의 설화와 유사한 고대 근동의 신화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연대적으로 비교할 때 성경의 설화들보다 고대근동의 신화들이 앞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제에는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간과되었다.
하나는 기록 연대가 앞선다고 하여 그것이 반드시 후기에 기록된 동일한 내용을 가진 기록물들의 원형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고대의 기록물일 경우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고대의 기록물들은 먼저 구전 형태로 전해 내려오다가 외부 환경으로 인하여 구전 전승이 파괴될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그것을 보존하기 위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고대의 문헌에서 기록 연대는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문헌들 가운데 어느 것이 원형인지 판단하는 일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이와 같은 가설을 인정할 때 언급한 것처럼 기록물의 연대가 앞선다고 하여 그것이 후기의 기록물들에 대한 원형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현존하는 부족들 가운데는 지금도 그들의 역사와 전통 문학을 구전으로 전승 해 오고 있다. 만일 다른 부족이 이들의 구전 전승을 자신들의 것으로 기록화 했다면, 이들의 기록이 동일한 내용의 전승들 가운데 원형이 될 수 있겠는가? 성경의 이야기는 태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므로 태초부터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던 성경의 이야기들이 고대 근동의 사람들에 의하여 신화의 모습으로 기록화 되었다고 하여 그것들을 성경의 원형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민희식의 전제가 정당화되기 위하여 대답해야 할 또 다른 하나는 문화적인 문제다. 문화 전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는 서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보편적 이론이다. 민희식의 주장대로 한다면 고대 근동 문명은 일방적으로 성경에만 영향을 끼친 것이 된다. 그의 논리를 역으로는 적용할 수는 없을까? 그러면 '고대 근동 문명의 뿌리는 성경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성경에는 히브리인들이 고대 근동에 영향을 끼친 예들이 많이 있다. 이들 가운데 하나를 든다면 예수의 탄생을 알린 동방의 박사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학자들은 동방의 박사들을 바벨론의 제사장 계급 중에서 천문가에 속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이 어떻게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연구했을까? 성경학자들은 이들이 메시아 예언들 가운데 하나인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편에서 저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시리로다(민24:17)"라는 예언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소식이 누구를 통하여 이들에게 전해 졌을까? 이스라엘과 바벨론은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멀리는 족장들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BC.2000), 가까이는 유다의 바벨론 포로기까지 올라간다(BC.586.). 그렇다면 예언된 별을 발견하기까지 그들은 멀리는 2000년 동안, 가까이는 400년 동안 자손 대대로 이어가며 그 별에 대하여 연구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성경이 실제로 고대근동 세계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끼쳤는지 말해 준다.
이와는 달리 민희식의 전제대로 연대적으로 앞선 고대 근동의 신화들이 성경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할지라도 여기에는 언어학적인 문제가 선결되어야 한다. 언어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성경이 고대 근동의 신화와 유사하다고 하여 그것 자체가 고대 근동의 신화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대 근동이라는 동일한 문화권에서 사용하는 언어들 가운데는 언어 자체가 동일하거나 유사한 경우들이 많다. 그러나 동일한 언어를 쓴다고 하여 모두 동일한 메시지를 표현한다고는 말 할 수는 없다. 두 사람이 '어머니'라는 동일한 말을 사용한다고 하여 두 사람이 어머니를 통하여 동일한 내용의 말을 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두 사람에게 '어머니'라는 말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단어)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머니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언어학에서 기표와 기의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유일신 사상을 고대 근동 문학 즉 이집트 문학, 수메르 문학, 아카드 문학, 힛타이트 문학, 우가릿 문학 등과 같은 양식으로 표현했고, 자신들의 시문학을 가나안 원주민의 서사시와 같은 유형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의 설화들과 고대 근동의 신화들을 연구할 때 문학 형식은 유사하지만 그것들을 통하여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실례로서 낙원설화들을 보면 창세기의 에덴 동산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지어주신 동산인데 비하여 고대 근동의 낙원설화들은 대부분 신(神)들을 위하여 지은 곳이다. 이런 경우 두 설화는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각각의 신화는 ‘낙원'이라는 형식의 언어를 통하여 각각 자신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사람들이 읽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의 말씀을 그 시대의 언어(고대근동의 언어)들로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계시의 말씀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해 놓은 기록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 인간의 언어란 단어를 비롯하여 문학 형식, 신화 형식 등 모든 의사 표현의 수단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고대 근동 신화와 몇몇 유사한 코드를 공유한다고 해서 그것들과 궤를 같이하는 것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민희식의 논의(성서의 뿌리에 대한) 전제가 정당화 되기 위해서는 언급한 문제들 외에도 해결 되어야 할 한 가지가 더 있다. 그것은 한 문화권에 동일한 설화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그것들의 원형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 원형은 민희식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연의 현상으로부터 올 수도 있고, 또한 절대자로부터 올 수도 있다. 여기 원형이 어디로부터 온 것이냐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대답에 따라 논의의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민희식은 신화의 기원을 자연현상에서 찾는다. 그러므로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고대 근동의 신화들은 대부분 수메르의 자연 환경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설일 뿐이다. 누구도 창조 신화나 낙원 신화 또는 홍수 신화 등이 자연 환경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고대 근동 신화들이 하나님께 기원되었다는 가설을 어떤 사람도 베제할 수 없게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셨고 낙원을 창설하셨으며 또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다고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화들의 원형을 말할 때 민희식의 주장과는 달리 고대 근동의 여러 신화들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한 인간의 희미한 기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이와 같은 문제는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신학의 문제라는 의미다.
놀라운 사실은 성경에 기록된 중요한 설화들 즉 창조 설화나 낙원 설화 그리고 홍수 설화등은 고대근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 모든 곳에 있는 산재해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성경과 유사한 신화들이야말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한 인간의 전승으로부터 기원한 것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다만 계시의 말씀인 성경과 이와 유사한 신화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란 신화들은 인간의 기억을 통하여 전승되어 온 것이라는 점이고, 성경의 설화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통해 받은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기억을 통하여 전승되어 온 신화들은 대부분 오랜 세월을 통하여 왜곡된 형태로 변형되었고, 성경의 설화들은 하나님께서 계시로 주신 원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고찰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민희식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성경의 뿌리가 고대 근동 문명'이라는 논제는 쉽게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만큼이나 반론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견해와 다른 학자들의 주장을 무시하고 독단적인 결론을 내렸다(실제로 민희식은 성경 학자들 가운데서도 자신의 주장과 합한 고등 비평 학자들의 자료만 사용했다). 이것은 학자로서 객관성을 잃은 행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더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인간의 지적 능력을 초월하는 시원(始原)과 종교에 관한 논의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옳고 그름을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다만 그것의 진실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절대자가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말이 진리라는 것을 스스로 입증해 주는 것뿐이다. 성경과 관련하여 말한다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의 실존을 입증해 주고 또한 자신의 말이 진리라는 것을 입증해 줄 때 우리는 그의 모든 말을 진리로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종교에도 동일하게 적용 된다.
구약에 언급된 다음의 사건은 유한한 인간으로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 되는지 말해 준다. 이 사건은 갈멜산에서 선지자 엘리야와 바알선지자들 사이에 '어떤 신이 참신인지' 알기 위하여 대결한 바로 그 사건을 말한다. 아합 때 이스라엘은 바알 숭배에 빠졌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심으로 그들의 죄를 책망하시며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권고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듣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에게 이스라엘 왕 아합을 찾아가서 바알과 하나님 중에 누가 참신인지 확인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제시한 것은 갈멜산에 하나님을 위한 제단과 바알을 위한 제단을 쌓고 각각의 제단 위에 번제물을 놓은 후 선자자들이 자신의 신(神)을 불러 제단 위의 제물에 불을 내려 그것을 태우는 신이 바로 참신이라는 것이다. 바알 선지자 사백인이 온 종일 바알을 불렀지만 응답이 없었다. 그래서 다음은 선지자 엘리야가 하나님을 불렀다. 그는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기 전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 제물과 제단 주변에 물을 길어다 부었다. 그래서 제단 위의 제물과 제단 주변에는 물로 흥건했다. 이런 상태에서 그는 하나님께 하늘로부터 번제단에 불을 내려 번제물과 주변을 태움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신 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다. 그가 기도를 마쳤을 때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 번제물을 태웠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물까지 모두 태웠다. 이스라엘은 그 모습을 보고 자리에 엎드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고백했다(왕상18:20-40). 이 기사는 종교에 관한 문제는 이성적 논리나 논쟁의 문제가 아니고 실존의 문제이며 능력의 문제라는 것을 말해 준다. 즉 '어느 신이 참 하나님이신가'라는 논제를 하나님의 선지자와 바알의 선지자들 사이에 논쟁을 통하여 해결하고자 했다면 그 논쟁은 결론에 이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각각이 믿고 있는 신의 실존과 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 길을 택했기 때문에 그 논쟁은 더 이상 지속 될 수 없었다. 오랫동안 두 논쟁 가운데 방황하던 백성들은 더 이상 방황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어느 신이 참 하나님이신 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논쟁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하나님의 실존과 능력을 알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기사와 표적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성경에 기록된 기사와 표적들은 기록으로만 존재하는 죽은 것이 아니고 모든 시대 모든 곳에서 필요할 때 언제나 재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은 기적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실존을 믿을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능력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고 하였다(고전4:20).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종교나 시원과 관련된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이성적으로 논의 할 수는 있지만 그것에 의하여 결론에 이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희식의 '성서의 뿌리는 고대 근동 문명이다'라는 결론은 증명할 수 없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민희식은 이처럼 인간의 유한성으로 인하여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신적 권능(기적들)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신적 권능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는 시원과 종교에 관한 문제를 논의할 자격조차 없다.. 왜냐하면 이런 문제들은 절대자가 신적 권능을 통해 스스로의 실존을 입증하고 스스로의 말의 진리됨을 입증할 때만 해결 될 수 있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주제들은 신적 권능을 통하여 입증하는 길 외에 어떤 학적 견해를 가지고 논의할지라도 그것은 다만 언어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민희식은 구약에 기록된 기적들을 자연의 이변으로 설명함으로 신적 권능 자체를 부정했다. 실례로서 그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사해 남단의 지층에 축적된 유황이 지진과 더불어 폭발한 것으로, 출애굽과 관련 된 열 개의 재앙은 기상 변화가 몰고 온 전염병과 사회 혼란으로 인하여 기인한 것이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홍해의 사건도 화산으로 인하여 일어난 일시적인 해리 현상으로 설명했고 여리고성의 무너짐을 사해 단층의 지각변동으로 인한 것으로 해석했다.
그렇다면 민희식은 자연현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성경에는 자연현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기적들이 기록 되어 있다. 다니엘이 대적들의 시기와 음모로 인하여 굶주린 사자굴에 던짐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 주심으로 안전했다. 그러나 음모가 밝혀져서 그의 대적들이 동일한 굴에 던짐을 받았을 때 그들이 땅에 떨어지지도 전에 사자의 밥이 되었다. 또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의 친구들이 신앙의 이유로 풀무불에 던짐을 받았는데, 그 불은 그들을 조금도 상하게 할 수 없었다. 이런 기적들을 자연의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민희식은 불교인이다. 그가 불교인으로서 기적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한 사람의 불교 철학자는 될 수 있을지라도 대중적 의미에서 불교인은 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불교인들 가운데 대부분은 교리와 상관없이 자신의 종교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적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철학은 모두 궁극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와 철학이 구분되는 것은 기적에 대한 인정 여부로 인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동일하게 궁극의 문제를 다루고 있을지라도 기적을 인정하면 종교가 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철학이 된다는 의미다. 만일 민희식이 불교인으로서 자신의 신앙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을 인정한다면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을 기적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종교인으로서 정직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만일 성경에 기록하고 있는 기적이 사실이라면 그 자체가 권위가 되고 그리고 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것이 바로 진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희식이 주장하고 있는 논의의 본질은 성경과 고대근동의 유사성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실존과 능력에 있는 것이다. 즉 논의의 본질은 He is there, He is not silent'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논의에 대한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기적인 것이다.
물론 민희식이 주장한대로 성경에 기록된 기적을 자연현상으로 설명하거나 해석할지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다음의 이야기는 민희식의 주장의 모순을 말해 줄 것이다. 「어떤 청년이 성경을 읽으며 몹시 흥분하고 있었다. 그가 읽고 있던 성경은 출애굽기 중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명하심에 따라 지팡이로 홍해를 쳤을 때 바다가 갈라져서 이스라엘이 그곳을 통과하였고 다시 지팡이로 홍해를 쳤을 때 갈라졌던 바다의 물이 다시 합해져서 이스라엘을 추격해 오던 애굽의 군사들을 침몰시켰다는 내용이었다. 마침 성경의 고등비평 신학자 한 사람이 그 청년 곁을 지나다가 그가 흥분하여 있는 모습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다. '젊은이 무엇이 그토록 젊은이를 설레게 하는가?' 그 청년은 자신이 지금 읽고 있는 성경의 내용을 설명하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으로 인하여 이처럼 흥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때 그 신학자는 '젊은이 자네는 지금 무지에 빠져서 그토록 흥분하고 있다네. 고증(考證)을 통해 보면 홍해는 깊은 바다가 아니었고 얇은 늪이었네'라고 말해 주었다. 젊은이는 몹시 실망하였다. 신학자가 그의 곁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을 때 젊은이는 벌떡 일어나서 신학자를 향하여 뛰어갔다. 그리고 그에게 가서 또 다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나님은 참으로 위대하십니다. 어떻게 물이 무릎에도 차지 않는 얕은 물에서 애굽의 모든 마병(馬兵)을 침몰시킬 수 있습니까?'」신학자는 이 청년의 말을 듣고 어떻게 대답할 수 있었을까? 민희식처럼 성경의 기적을 모두 자연현상으로 설명한다면 다음의 물음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이스라엘이 가는 곳마다 그들에게만 유익한 자연 이변이 일어날 수 있는가?' 민희식은 성경의 기적을 자연현상으로 돌림으로 신학자처럼 스스로 모순에 빠졌다. 우리가 지금 기적의 유무를 논쟁하고 있는 중에도 세계 곳곳에는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안에서만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타종교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각각의 종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적들은 원천만 다를 뿐이다. 그래서 모든 시대에는 종교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세계는 보이는 세계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면 어째서 성경에는 수많은 기적들을 기록해 두었을까? 성경은 계시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적의 사건을 기록해 놓음으로 그 계시의 말씀을 보는 자들로 하여금 그 말씀이 계시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도록 기적을 증거로 주신 것이다. 즉 기적은 언제나 하나님의 실존과 그의 능력을 나타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을 읽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성경 속에 기록해 두신 기적과 동일한 기적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실존과 능력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이와 같은 체험이 없다면 관념적 그리스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 가운데서도 비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민희식의 성경의 기적에 대하여 비신화화하려는 시도는 종교학적인 의미에서 볼 때, 학문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근거가 있기 때문이 아니고 그의 학문적 전제로 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종교적인 문제에 접근하고자 할 때 두 가지 서로 다른 전제를 가지고 접근할 수 있다. 하나는 'God is no where'이고 다른 하나는 'God is now where'이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로서 출발한다면 모든 자료는 그것을 입증하고 해석하기 위한 도구가 된다. 그러나 동일한 자료일지라도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실존을 입증할 수 있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희식의 '성경의 뿌리가 고대근동 문명'이라는 주장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부정하려는 그의 전제에 기인한 것이다. 실제로 이런 주장은 그가 처음 시도했거나 또는 독자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와 같은 시도들은 18세기 이후 서구의 합리주의 사상이 전개되기 시작할 때 이미 성경의 고등비평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행하던 일반적인 논의들일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성경의 비신화화를 시도하던 신학자들조차 더 이상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는 일에 흥미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이 논의 자체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잃었기 때문이고, 또한 이와 같은 시도 자체가 자기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2. 두 번째 물음은 사람들이 말하는 예수의 잃어버린 생애(정확히 말하면 알려지지 않은 생애로서 13-29세까지의 예수의 삶)는 참으로 인도와 티베트 또는 페르시아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가? 민희식의 '성서의 뿌리(오리엔트 문명과 불교)' 2부는 먼저 예수의 탄생 전의 팔레스틴의 역사를 서술함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배경 가운데서 예수의 탄생과 어린 시절 복잡한 가정생활을 말한다. 다음으로 그는 예수가 어떻게 인도를 다녀온 그리스의 현인 해리를 만나 동양의 지혜를 배우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인도에 유학을 가기게 되었는지 말하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예수의 동양의 여행과 동양 종교의 수행은 그의 잃어버린 세월을 메우고 있다.
민희식은 예수의 탄생과 어린 시절을 복음서에 기록된 내용과는 완전히 다르게 재구성했다. 그는 예수의 탄생을 말하기 위하여 그의 외조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외조부 마리아의 부친은 어부였다. 그는 마리아를 낳은 후 바다에서 폭풍에 조난당해 죽었고 그의 아내도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졸도하여 죽었다. 그래서 어린 마리아는 외조모 제리타의 손에서 양육되었다. 마리아는 할머니의 영향으로 인하여 어려서부터 자연 속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았다. 할머니가 죽은 후 마리아는 이웃에 살고 있는 요셉과 그의 누이의 도움으로 마리아의 먼 친척이며 숙박업을 하는 키레스에게 보내졌고 그때부터 마리아는 그 집에서 일하며 생활했다. 이 여관은 나사렛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마리아는 오가는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가 들은 이야기들 가운데는 양치기들이 천사로부터 구주가 탄생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도 있었고, 또한 유프라테스 강 저쪽에서 온 돈 많은 유태인으로부터는 구세주가 탄생한 별을 보고 그가 베들레헴 어디에 태어났는지 묻기 위하여 헤롯왕을 만나러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마리아는 일이 없을 때는 언제나 어린 시절처럼 조용한 곳을 찾아가서 명상을 하며 보냈다. 이렇게 명상 중에 그는 천사로부터 자신이 구주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들은 다음 날 요셉과 그의 누이가 마리아를 찾아왔는데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들은 말을 요셉의 누이에게 말해 주었다. 요셉은 마리아가 여관에서 혹사당하는 것을 보고 자신과 함께 나사렛으로 돌아가서 결혼하자고 했다. 마리아가 다음날 그들과 헤어진 후 빨래를 하기 위하여 개울가로 갔을 때 한 줄기 빛이 내려와서 그의 몸으로 들어갔다. 이로서 영혼이라는 씨가 처녀의 땅에 뿌려진 것이다.
그해 마리아가 일하던 여관의 안주인이 죽었기 때문에 마리아의 생활을 더욱 고달파졌다. 그때 갈릴리 지방으로 여행하던 무리 가운데 미리암이라는 사람이 그 여관에서 하루를 묵었다. 그는 마리아의 옛 집 이웃에 살던 자로서 자신의 딸을 요셉과 결혼시키려 했지만 요셉이 마리아를 사랑하기 때문에 거절당했다. 그래서 그는 마리아를 미워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딸을 요셉과 결혼시키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혼에 방해되는 마리아를 없애 버리려고 했다. 그래서 미리암은 여관 주인을 매수하여 마리아에게 악마가 들렸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그를 때려서 내쫓으라고 했다. 이런 위기의 순간 요셉은 이상한 꿈을 꾸고 마리아를 찾아와서 그를 구해 주었다. 요셉은 마리아를 데리고 나사렛으로 갔다. 그 소식을 들은 미리암은 다시 요셉을 찾아와서 자기 딸과 결혼해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리고 요셉은 마리아와 결혼했고 곧 여행을 떠났다. 미리암은 질투심으로 이들에 대한 이상한 추문을 퍼트렸다.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결혼하자마자 나사렛을 떠나 여행을 하였는데 여행 중에 사내아이를 낳았다. 이처럼 결혼하자마자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이들은 추문이 두려워서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것이 민희식이 예수의 탄생에 대하여 말한 내용이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의 어린 시절을 말하였다. 그는 요셉이 언제 나사렛으로 돌아갔는지 밝히지도 않고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예수의 어린 시절을 말하기 시작했다. "마리아는 예수를 낳은 후 조금씩 기력을 회복하여 집안을 일으키기 위하여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미리암은 요셉을 불러 보수를 많이 주어 집에서 일을 시키고 하루 종일 굶긴 후 독한 술을 마시게 한다. 요셉은 속이 비어서 현기증을 느끼고 무의식적으로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의 약속에 의해 예수를 낳았다고 말한다. 그러자 미리암은 많은 사람 앞에서 그것을 말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서 요셉을 때리고 장로들은 그에게 신을 모독했다고 말하며 저주 하였다. 미리암은 요셉을 내쫓고 정신이 멍한 요셉은 비틀거리며 집에 돌아가는 중에 발을 헛디뎌서 우물에 빠져 버렸다. 상처투성이의 요셉은 심한 병이 들었고 그는 마을에서 직업을 잃게 되었다 누이 미리아 크로바스는 말을 함부로 한 요셉을 꾸짖고 위로하였으나 요셉은 예수에 대해서 불만을 갖게 되었다. 학교에서 예수의 한 살 아래 동생 토마스는 공부를 잘했지만 예수는 같은 나이의 소년과는 어울리지 않고 부랑자나 거지들과 어울리고 율법학자들을 우습게 여겼다(성서의 뿌리, P.106)"
민희식은 예수의 어린 시절을 이처럼 불행한 모습으로 말한 후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갔다. 예수의 어린 시절도 그의 모친 마리아처럼 자연 속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았다. 이때 예수는 갈릴리의 유대인 랍비 베나데르와 논쟁하기로 한 그리스인 해리를 알게 된다. 이후에 민희식은 예수는 헤리를 만난 일로 인하여 랍비 베나데르로부터 저주를 받은 일과 또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랍비들과 논쟁을 한 이야기를 하였다.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랍비들과 논쟁한 후 부모와 함께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갔다. 이후에 예수는 산에서 다시 해리를 만난다. 그때 해리는 종료나무 밑에 만든 오두막집에서 예수와 함께 생활하며 그에게 병을 고치는 약초 제조법과 영적인 병을 치료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민희식은 이후 예수와 동생 토마스와의 갈등 그리고 아버지 요셉과의 갈등을 이야기 했다. 결국 요셉은 예수의 불확실한 출생을 말함으로 예수는 나사렛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예수가 산으로 가서 방황하는 중 또 다시 해리를 만나 그와 함께 사막에서 살고 있는 유랑부족을 찾아가서 그들과 함께 거하며 사막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예수는 그 부족을 떠나 다시 사막에서 헤매던 중에 한 대상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대상과 사귀며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인도로 떠난다.
민희식을 장면을 바꾸어 또 다시 갈릴리 나사렛에서부터 예수의 인도 여행을 말하고 있다. 이야기는 앞 뒤가 연결되지 않는다. 이미 앞의 이야기는 대상을 만나 인도에 갔다고 말했는데 여기서는 또 다시 이야기가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학생이 이런 식으로 레포트(Report)를 교수에게 제출했다면 논리성의 결여나 또는 이야기 구성의 문제를 들어서 다시 쓰도록 요청받았을 것이다. 이것은 민희식이 예수의 생애를 연구함에 있어서 진지성을 상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조심스럽지만 독자로서 이런 가정을 해 본다. 그는 예수의 생애를 독자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보다는 여러 자료들(성경의 외경들 그리고 소설까지를 포함하여)에서 자신이 원하는 부분만 발췌하여 이야기를 구성하지 않았을까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한 사람의 생애를 진지하게 연구하고 서술하고 있는 학자로서 이처럼 논리성의 결여가 나타날 수 없을 것이다. 즉 인도에 있어야 할 예수가 동시에 갈릴리에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논리의 결여는 다음에 언급하기로 하고 이야기를 계속해간다면 이와 같다. 남부 인도 오릿사 주의 왕족 라바나는 일단의 승려를 이끌고 서방에 지혜를 구하러 왔다. 그는 유대의 제사에 참석하여 예수를 보고 그의 총명함에 놀라 제사장에게 그에 대하여 묻고 그를 만나러 갈릴리의 나사렛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는 예수에게 브라만교의 지혜를 배우기 위하여 인도에 가기를 제안했다. 예수와 그의 부모가 모두 이 제안을 승낙했기 때문에 일행은 예수를 데리고 라반나의 궁정에 이르렀다. 그는 그곳의 쟈간나스(크리슈나신)의 사원에서 베다성전과 마누법전을 배웠다. 그리고 예수는 갠지스 강변의 베나레스에서 인도의 의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우드라카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 예수는 4년간 쟈간나스 사원의 승려생활을 했다. 그러나 예수는 브라만교의 계급제도의 부당함을 말함으로 승려들에게 추방되어 히말리야의 카피파스에 이르렀다. 예수를 브라만의 승려들로부터 구해 준 사람들은 불교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예수는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예수는 또한 인도의 성자 피차바치의 소개로 당시 동양 제일의 현자 맹그스테를 만나 그로부터 불교 사본을 배울 수 있었다. 예수는 오랜 연구로 인하여 영계의 힘을 빌려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모든 비법을 완전히 익혔다. 이처럼 연구를 마친 후 그는 다시 서방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는 서방으로 향하는 동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통하여 도움을 주었다. 이때가 그의 나이 23세였다(같은 책, P.34).
민희식은 예수의 생애와 관련된 이야기는 잠시 여기에서 멈추고 예수가 인도 라디크의 지방에서 마니트라 스님의 지도 아래 반야심경을 익히고 오랜 명상을 통한 요가를 체득한 내용을 말하였고 또한 예수와 석가를 비교하며 같은 점을 말했다(같은 책, P135-170).
그는 또다시 예수의 티베트 생활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맹그스테의 지도로 불교의 고대 사본을 익힌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예수는 24세에 페르샤의 페르세로리스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티베트서 베운 불교와 조로아스터교의 철학을 재음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음을 말했다. 특별히 예수는 이곳에서 조로아스터교로부터 이론원을 배웠다. 예수는 이후 그리스와 애굽을 거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부처의 가르침을 본받아 사랑과 자비의 복음을 전했다. 이것이 민희식이 예수의 생애를 재구성해 놓은 것이다.
그가 이처럼 예수의 잃어버린 생애를 재구성한 목적은 예수가 전파한 복음이 불교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함이다. 그의 이와 같은 예수의 잃어버린 생애에 대한 제구성은 후에 쓴 '법회경과 신약성서'의 배경이 되고 있다.
이 책의 서론에 해당하는 1장에서 이와 같은 목적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다. 그는 먼저 예수의 탄생을 전후한 역사를 약술함으로 예수가 인도와 티베트 등을 여행하며 브라만교와 불교의 가르침을 받고 이들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의 이와 같은 주장을 보다 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서의 2부와 그의 또 다른 저서의 배경이 되고 있는 예수의 탄생 전후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그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는 역사적 배경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의 탄생을 전후 한 시대적 배경은 기원전 2세기로부터 시작된다. 기원전 2세기에 그리스인들이 서북 인도를 침략하여 약 2백 년간 지배했다. 실제로 기원전 2세기 후반에 활약한 메난드로스왕의 시대에는 샤카라(현재 시아르코트) 수도를 중심으로 동서사상을 교류했고 불교에 대한 대단한 관심을 보여 그것이 '미린다왕 문경'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은 왕과 대사가 불교 교리의 주요 논점들에 대하여 묻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역은 것이다. 이처럼 당시 많은 그리스인들이 샤카라로 이주하여 도시를 건설하고 문화를 크게 번성시켰다.
그는 이와 같은 역사의 배경에서 예수의 인도와 티베트 여행이 가능함을 밝히고 그의 잃어버린 생애(13-29세까지)를 인도와 티베트에서 재구성하고 있다. 그가 이처럼 예수의 생애를 재구성한 목적은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인 예수의 사상적 기반과 그 형성의 과정을 알려주는 중요한 시기인 16년 동안의 기록이 그리스도교 초기의 성경 편집과정에서 삭제되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삭제한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배타적 선민사상으로 일관된 유대교의 살벌한 환경과 토양 속에서 어떻게 그처럼 위대한 사랑을 부르짖는 그리스도교 가 생겨났는지 그 사상적 뿌리에 의문이 일어난다" 즉 그는 예수의 생애를 재구성함으로 예수의 사상적 기반이 인도의 브라만교 또는 불교에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을 입증해 줄 수 있는 자료로서 도마복음서, 유다복음서, 나그 하디마 문서들을 들었다. 그는 특별히 도마복음서들 가운데 한 예문 "천국 죽 하늘은 너희들 안에 있고 동시에 밖에 있다"를 들고 그것이 불교의 불성내재론(佛性內在論)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다음 계속되는 문장 "너희 자신을 알면 너희가 살아 있는 아버지의 자식임을 알게 도리일지니라'을 들고 그것이야말로 법화경 방편품의 여아등무이(如我等無異)라고 했다. 이처럼 법화경이 신약성서에 끼친 영향은 초기의 원 복음서들에 분명히 드러난다고 말하며 그리스도교가 신약을 정경화할 때 자신들의 의도와 맞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은 복음서들을 제외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희식의 예수 생애의 재구성은 신약의 뿌리가 법화경이라는 것 또는 불교 사상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주장에 대한 진위를 밝히기 위해서는 정말 예수가 인도와 티베트를 여행하며 브라만교와 불교를 수행했는지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주장하는 대로 법화경의 내용과 유사한 신약의 기록들이 유사하다는 이유만으로 불교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비판이다. 이를 위하여 다음의 몇 가지 사실들을 비판해 보고자 한다.
첫째 우리는 먼저 '어째서 예수의 잃어버린 생애(그들이 말하는)가 그토록 중요한지'에 대한 문제를 비판해야 한다. 민희식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예수의 잃어버린 생애가 어째서 그토록 중요한지 암시하고 있다. "배타적 선민사상으로 일관된 유대교의 살벌한 환경과 토양 속에서 어떻게 그처럼 위대한 사랑을 부르짖는 그리스도교가 생겨났는지 그 사상적 뿌리에 의문이 일어난다" 이것은 예수의 사랑에 대한 메시지는 불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예수가 잃어버린 생애 동안 티베트에 여행하며 불교를 수행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만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비판을 위해 먼저 민희식과 그와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제기하고 있는 "어째서 성경에 예수의 16년 동안의 생애가 누락되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이스라엘의 관습에 비춰 말할 수 있다. 성경에는 위대한 많은 인물들에 대한 기록들이 있다. 우리가 이들의 생애를 연구할 때 일반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탄생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부르심(소명: 신으로부터의 부르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전통과 관습에서 한 사람의 생애를 말할 때 다른 어떤 것보다 그의 육신의 탄생과 신으로부터의 부르심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은 그들이 위대한 사람의 생애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문학의 형식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관습에서 볼 때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잃어버린 생애'는 어떤 중요성도 갖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난 사건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예수의 탄생과 관계된 많은 이야기들이 기록된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때에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때가 바로 30세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때의 많은 사건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대한 한 사람의 생애를 기록할 때 이와 같은 문학적 형식을 사용했다면 여기에 대하여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어째서'라고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실제로 성경에 기록된 위대한 사람들 대부분의 생애는 예수처럼 잃어버린 생애를 가지고 있다.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제사장 멜기세덱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 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7:1-3)" 여기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라는 표현은 바로 이스라엘에서 위대한 사람을 기술하는 문학 형식의 전형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선지자들 가운데 대부분의 선지자는 모두 잃어버린 생애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가 누구의 아들로 태어났는지 그리고 언제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는지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유대인 관습을 안다면 우리는 예수의 잃어버린 생애라고 말하는 그 기간은 그가 가정에서 부모를 도우며 다른 가정의 아이들처럼 성장했을 것이라고 믿을 것이다. 월리엄 바클리는 예수의 나사렛에서의 생활(그들이 예수의 잃어버린 세월이라고 말하는 그 기간)은 공적 생애를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님은 또한 이곳에서 가정생활의 의미를 배우셨다. 하나님을 부르는데 가장 자연스럽게 주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버지’였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주기도문을 외우거나 하나님을 부를 때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주저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의 부친은 엄격하고 고집이 세며 무자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에게 아버지라는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신뢰할만한 이름이었고 또한 친밀한 이름이었다. 그는 나사렛에서 육신의 아버지 요셉을 통하여 아버지가 어떤 존재인지 배웠고. 그 이름은 하나님에게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배웠다. 또한 주님이 나사렛의 가정에서 들은 말로서 평생 마음에 남아 있던 말이 있다. 어느 날 주님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다 죽은 줄로 알고 있던 한 소녀에게 가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달리다굼(ταλιθακουμ)’하고 부르셨다. 이 말은 “어린양아 일어나라”라는 말이다(막5:41). 주님께서 아이들을 ‘어린 양’이라고 부르는 것을 어디에서 들으셨을까? 이 말은 분명히 어린 시절 그와 그의 동생들을 부르는 어머니의 음성이었을 것이다.
주님은 또한 이 침묵의 기간에 세계를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피조물 속에서 그리고 일상생활의 사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셨다. 주님은 팔레스틴의 가장 아름다운 지역에서 자라나셨다. 갈릴리 호수 주변에는 게네사렛 평야가 있다. 유대인들은 가끔 게네사렛을 ‘정원의 왕’이라는 뜻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들은 그 평야를 ‘하나님의 비길 데 없는 정원’이라고 불렀다. 유대인들이 속담처럼 되뇌는 말은 갈릴리에서 많은 올리브 나무를 재배하는 편이 팔레스틴의 다른 땅에서 아이 하나를 키우는 것보다 더 쉽다는 것이다. 갈릴리에서 자라는 나무는 포도, 올리브, 무화과, 참나무, 호두, 소나무 뽕나무, 월계수, 석류나무 등이라고 한다. 주님은 이와 같이 아름다운 지방에서 자라셨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는 것(마13:1-8)과 곡식밭이 하나님이 주시는 태양 빛을 받아 자라서 익어 가는 것(막4:26:29)과 공중의 새들이 그늘진 가지에 작고 검은 씨를 찾아 모여드는 겨자 나무(막4:30-32)와 빨간 양귀비나 아네모네가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조차도 차려 입지 못할 만큼 아름답게 단장한 것이 내일 아궁이에 던져 질 들풀이지만 오늘 하루를 위해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광경(마6:28,29)을 사랑하셨다. 그 여러 해 동안 주님은 이 세상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겉옷’으로 보는 것을 배우셨다.
그는 평범한 활동과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창으로 삼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와 영광의 섬광을 보는 법을 배우셨다. 그는 마리아가 빵을 구울 때 누룩을 사용하는 것을 보셨다(마13:33). 어떤 여자가 은화 한 개를 집안에서 잃어버리고 허둥지둥 찾고 있는 것을 주의 깊게 보셨다(눅15:8 이하). 그는 또 어떤 사람이 실수하여 새 포도주를 탄력성이 없는 낡은 가죽 부대에 넣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또 헌 옷에 새 헝겊을 대고 기우면 더 못쓰게 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마9:16). 그는 마을의 혼인 잔치의 기쁨이 어떤 곳인지를 알고 계셨다(마9:15). 그는 그물을 던지는 어부들을 눈여겨보셨다(마13:47). 그는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관심을 가지셨다(눅15:4-6). 그는 장터에서 아이들이 결혼식과 장례식 놀이를 하는 모습을 눈여겨보셨다(마11:6). 예수님만큼 이 땅에 꿋꿋하게 발을 디디고 선 위대한 교사도 드물다. 그의 소년 시절은 날마다 어떻게 ‘지금 여기’서 ‘그때 거기’로 도달할 수 있는가를 배우셨다.
이 기간 동안에 주님은 또한 원대한 꿈을 갖게 되셨다. 나사렛 동네는 언덕 아래 우묵하게 들어간 한적하고 작은 동네였다. 나사렛 동네는 아무데도 길이 트여 있지 않으나 갈릴리는 사방으로 길이 나 있다고 한다. 그것은 동방의 대로가 갈릴리를 통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이 컵의 밑바닥 같은 나사렛에서 언덕 위로 올라가면 발밑은 세계로 통해 있었다. 거기서 그는 지중해의 가장 큰길을 내려다보실 수 있었다. 그 길은 다메섹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길로서 상인들과 대상들이 지나 다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국도의 하나이기도 했다. 그 길은 지중해 연안에서 페르시아로 또한 로마 제국의 동부 국경으로 통하는 길인데 거기서 그는 아랍의 상인과 로마대군이 소음을 내며 달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거기서 서쪽을 바라보면 대해를 지나다니는 상선들과 화물선이 지중해의 푸른 물결을 헤치며 가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주님은 나사렛 동네 뒷산에 올라가 거기서 지구의 끝까지 뻗어 있는 길을 보실 수 있었다. 그가 미래에 대한 꿈을 꾸신 곳도 틀림없이 그 곳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인가 처음으로 그에게 들려온 장소도 그 곳이었을 것이다. 즉 “내가 땅에서부터 높이 들려 올라가게 될 때에 나는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 것이다(요12:32)”
주님은 이 기간 동안에 기도하는 훈련을 하셨다. 그가 사명을 완수하려 하셨을 때 그는 어느 때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셨다. 그는 몇 번이나 거듭 사람들에게 떠나 혼자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고통을 당하시면서 그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옵니다(눅23:46)”라고 기도하셨다. 이 말씀은 시31:5에서 인용하신 것으로 거기다가 ‘아버지’라는 한마디를 덧붙이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 말은 모든 유대인의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한자리에 눕힐 때 흑암이 오기 전에 어린아이들이 기도하도록 가르친 첫마디의 기도였다.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신 마지막 순간에 그리고 사명을 완수하신 그 마지막 순간에 그는 나사렛에서 배우신 기도를 드린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은 나사렛이라는 허락된 환경에서 그의 사역을 완수할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훈련하셨다.』(윌리암 바클레이, 예수의 생애와 사상, 대한기독교출판사, PP16-26요약)』
둘째 예수의 잃어버린 생애를 동양 여행과 동양 종교의 수행에 맞추기 위하여 그토록 예수의 생애를 왜곡해도 되는지에 대한 물음에 대답해야 한다. 민희식을 비롯하여 동일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볼 수 있는 공통점은 예수의 생애를 마음대로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예수의 생애는 하나의 픽션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성경에 언급된 예수의 생애와 전혀 다른 생애를 재구성하면서도 그것에 대한 권위 있는 참고 문헌(누구나 수긍이 가는)조차 제공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의 생애는 성경 외에도 외경들(야고보 원복음, 토마스의 유년기 복음 등)이나 또는 여러 픽션에서 언급하고 있다. 실제로 목영일도 그의 저서 '예수의 마지막 오딧세이'에서 민희식과 동일하게 예수의 잃어버린 생애를 재구성하지만 그는 자신의 저서를 소설이라고 밝혔다(이 책을 집필하면서에서). 이런 경우 예수의 생애가 왜곡되었을지라도 저자가 소설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그 내용의 수용여부는 독자의 몫이 된다. 그러나 민희식은 어떤 참고문헌도 제공하지 않고 애수의 생애를 재구성해 놓았다. 그런데 그가 재구성해 놓은 성가족사(聖家族史)는 투장과 갈등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성경은 예수의 어린 시절을 가장 복된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누가복음 2장 52절은 예수의 어린 시절의 모습에 대하여 이렇게 말해 주고 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이것은 정상적인 가정에서 정상적인 양육을 받고 성장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묘사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체불명의 자료들을 택하여 예수의 가정사(家庭史)와 어린 시절을 불행하게 재구성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이미 언급했지만 민희식의 저서 '성서의 뿌리'에서 예수의 생애를 재구성함에 있어서 이야기가 순차적으로 전개되지도 않고 있다. 예를 들면 마리아와 요셉이 결혼하여 여행을 떠났는데, 곧 바로 고향에서 요셉이 미리암의 집에서 목수 일을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라든지 또는 예수가 사막에서 대상(大商)을 만나 인도를 향하게 되었다고 언급한 후, 곧 이어서 서방의 지혜를 구하러 남부인도 오릿사주의 왕족 '라반나'의 제안에 의하여 예수가 인도로 유학을 떠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이야기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 만일 민희식이 예수의 생애를 외국 서적에서 번역한 것이라면 번역의 오류로 돌릴 수 있지만 모국의 학자인 그가 모국어로 쓴 저서에서 이런 오류가 발생했다면 이것은 그의 연구 자체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실제로 언급한 것처럼 예수의 생애에 대한 정체불명의 자료들이 많이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런 자료들 가운데 자신이 원하는 자료들만 발췌하여 이야기를 재구성한다면 민희식이 범한 것과 같은 오류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문제는 본질에서 벗어난 지엽적인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물을 평가하는 일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이런 일이 예수의 생애를 재구성하는 일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사소한 일이지만(그의 논의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메시아의 어원을 페르시아 태양신 미트라에서 찾는 것도 그의 연구의 성실성을 평가할 수 있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그의 저서 '법회경과 신약성서' 57쪽에 메시야의 어원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미트라에서 마이트라와 마이트리가 나왔고 이 두 가지 언어에서 메테야와 마이트레야가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마에트레아에서 불교의 구세주 미륵과 그리스도교의 구세주 메시야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그의 언급들이다. "메시아라는 말의 근원이 되는 바파리의 16제자 중 한 사람인 장로 티사 메티아의 이름은 숫타니파아타에 나오지만 미래불로서의 미륵보살은 등장하지 않는다(법화경과 신약성서, P.26)" "예수가 태어났을 때 유대인들은 로마의 혹독한 압제에 시달리고 있었던 시기니 만큼 미륵(彌勒, Maitreya/마이트레야: Messiah/메시아)이 나타나 세상을 바로 잡아주기를 갈구하고 있었다(같은 책, P.50)"
그러나 메시아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māša(기름을 붓다)의 명사형 masiah(기름부음을 받은 자)에서 온 말로서 그리스어로 번역할 때 Christos가 된다. 구약의 메시아 사상은 구약성경의 언급에 따르면 인류의 조상 아담과 이브가 범죄함으로 낙원에서 쫓겨났을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서 구약 성경에서 기름 부음을 받고 왕위에 오르는 이스라엘의 왕이나 또는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들로 상징 되었다. 이처럼 메시아라는 말의 어원이 히브리어에서 왔음이 언어학적으로나 구약의 사상으로도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의 태양신의 이름에서 왔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언어와 문화가 전혀 다른 불교의 미륵과 연관시키는 것은 억지다. 이와 같은 문제들은 저술에서 논의 하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은 그의 연구의 진지성을 의심하게 한다. 특별히 이 저서를 '한국 불교계의 보물로 일컬어지는 세기의 명저'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이 책이 명저가 되려만 먼저 기본적으로 명저로서 갖추어야 할 것들이 갖추어져야 한다. 물론 이러한 찬사는 출판사의 상업적 목적을 위한 수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평가가 불교 학계의 인식이라면 이것은 대단히 슬픈 일이다. 정말 이 책의 진정성에 대하여 사고하는 사람은 어째서 이 책에 ‘명저’ 또는 ‘불교의 보물’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부당한지 알 것이다.
3. 민희식의 주장대로 정말 예수의 가르침(신약의 복음서)이 법화경에서 온 것일까? 민희식은 ‘법화경과 신약성서’라는 저서에서 신약의 예수의 가르침들이 법화경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이것은 그의 또 다른 저서 '예수와 붓다'에서 보다 더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기 위하여 언급한 신약성경의 사상들(또는 구체적인 어록들)이 법화경에서 온 것이 아니고 구약에서 온 것이라는 논증을 한다면 그가 지금까지 논증한 모든 내용은 역으로 법화경은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에 대한 논증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예수의 가르침이 불교 또는 불경 중 특히 법화경의 사상에 기원한다고 주장한 근거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예수가 티베트에서 불경을 배우고 불교를 수행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불교(BC6)가 그리스도교(AD.1)보다 연대적으로 앞선다는 것이다. 여기 불교가 연대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교보다 앞선다는 것은 예수는 그리스도교를 창시하기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불교를 배우고 그 가르침에 기초하여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불교가 그리스도교보다 대략 6세기 앞선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불교가 아닌 유대교 전통을 전승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예수의 가르침이 어디로부터 왔느냐에 따라 민희식의 주장이 역으로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즉 그의 논리에 따른 다면 '예수의 가르침이 구약 성경으로부터 온 것임을 확증하면 그때 법화경은 구약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민희식의 주장대로라면 법화경과 예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신약은 동일한 근원에서 연유된 것이 되기 때문이며 또한 구약은 법화경보다 연대적으로 앞서기 때문이다.
예수의 가르침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는 주석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물론 민희식이 '예수와 붓다'라는 저서에서 인용하고 있는 모든 성경을 주석학적으로 해석할 때 예수의 가르침이 불경에서 온 것이 아니고 구약으로부터 온 것임을 확증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또 하나의 별도의 연구서가 필요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몇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하여 예수의 가르침이 구약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을 입증함으로 그의 주장의 부당함을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민희식의 오류는 주석학적 연구를 간과함으로 인한 것임을 밝히고자 한다. 다음은 예수와 붓다에서 발췌한 몇 가지 예이다.
예1.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만하고 동침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마야왕비는 여덟 가지 계행을 지키기 위해 남편과 동침하지 않은 채 석가모니를 잉태했다고 불경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와 붓다, P.16)
두 기록의 비교에서 먼저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예수의 동정녀 잉태는 구약시대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에 대한 성취라는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BC.740-700)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하여 이렇게 예언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이 비교에서 언급할 수 있는 또 다른 하나는 두 개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 자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고자 한 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이고 불경이 말하고자 한 것은 마야왕비는 수행이다. 이 두 가지 사실만 볼 때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기록이 불경에서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구약성경에 기록된 선지자의 예언으로부터 온 것으로 말할 수 있을까?
예2. 예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여행 중에 태어났다. 마태는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기 위해 방문하였다고 쓰고 있다
붓다는 어머니의 여행 중에 태어났다. 불경에는 서방의 성직자들이 아기 붓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방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자자들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예언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5:2)" 여기 선지자 미가는 B.C 740-687 사이에 활동한 선지자다. 그러므로 성경이 예수의 탄생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 것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여행 중에 그가 탄생했다는 것이 아니고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특별히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시 요셉과 마리아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상식대로라면 해산 달이 찬 여인이 특별한 일이 없다면 무리한 여행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토록 먼 거리인 베들레헴까지 여행했던 것은 그곳에 가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란 로마 황제의 명령이었다. 황제는 인구 조사를 위하여 모든 유대인들에게 고향으로 가서 자신의 이름을 등록하라고 명했던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해산할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까지 무리한 여행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환경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한다.
그러나 불경에서 석가의 탄생은 마야왕비가 출산일이 다가오자 수행원들과 함께 석가족의 수도인 카필라바스투를 떠나 데바다하에 있는 친정으로 가던 중에 룸바니라는 동산에서 석가모니를 출생했다고 말하고 있다. 마야왕비의 여행은 해산을 위해 친정으로 가기 위한 것이었고, 마리아의 여행은 타인의 의지에 의하여 강요된 여행이었다. 그리고 마야왕비의 여행은 신적 의지가 전혀 없는 해산을 위한 여행이었는데 반하여 마리아의 여행은 베들레헴의 탄생이라는 예언의 성취를 위한 신적 의지가 개입된 여행이었다. 이처럼 두 여행과 탄생은 내용적으로 전혀 다른데 어떻게 이 두 개의 여행이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두 이야기는 전혀 다른 출처로부터 온 것이다. 즉 예수의 탄생과 관련 된 것은 구약의 예언과 관련 된 것이지 결코 법화경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예3. 1) 팔복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5.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6.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7.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8.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2) 팔정도
정견-바른 견해: 사물의 진실을 바로 보는 마음의 눈 2. 정사유-바른 생각: 정견에 의해 편견없이 생각 하는 것 3. 정어-바른 말: 진실하고 남에게 이로움을 주는 말 4. 정업-바론 행동: 보시, 방생, 자비희사의 실천행 5. 정명-바른생활: 올바른 직업 6. 정정진-바른 노력: 올바른 이상을 향하여 꾸준히 노력함 7. 정념-바른 마음의 수행: 변화에 대처하여 흔들림이 없음 8. 정정-바른 집중: 번뇌, 망상이 없는 무념무상의 상태
위의 예는 예수의 가르침인 팔복과 붓다의 가르침인 8정도를 비교해 놓은 것이다. 두 가르침 역시 주석학적으로 말한다면 여덟 개라는 숫자 외에 어떤 관계없도 가르침들이다.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여덟 가지 언어(가난, 애통, 온유, 의에 대한 갈망, 긍휼, 청결, 화평, 의)들은 인간이 하나님께 지향하는 신앙의 표현인 반면 붓다의 가르침은 인간이 스스로를 수행하기 위한 목록이다. 즉 팔복의 사상은 인간의 수행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향하는 그 자체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반면 팔정도는 절대자에 대한 지향이 조금도 없는 인간이 수행 목록일 뿐이다. 어떻게 이 둘을 같은 근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더 실례를 든다면 민희식은 '예수와 붓다'에서 예수의 열두 제자와 붓다의 열 제자를 비교해 놓았다(앞의 책, P66-69) 그런데 이 비교는 단순한 비교일 뿐 이것이 어떻게 예수의 가르침과 법화경이 관계가 있는지 놓지 않았다. 붓다가 제자를 둔 것처럼 예수도 제자를 두었기 때문에 예수가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라고 주장한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위대한 교사들은 모두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위대한 교사들은 모두 제자들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몇 가지 예만 살펴보아도 민희식은 자신의 저서를 통하여 신약이 법화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논증하는 일에 실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교와 불교를 비교하여 두 경전이 각각 가지고 있는 사상들 가운데 유사한 것들과 다른 것들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면 비교종교학자로서 학문적 성과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신약 성경이 법화경으로부터 영향 받은 것이라는 것을 논증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의 저서는 이 목적에서 벗어났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언급한 것처럼 그의 저서는 신약 성경이 법화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것을 논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약과 법화경 사이에는 어떤 연관도 없다. 이것은 두 경전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두 경전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를 가져다주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수행이다. 즉 신약성경의 중심은 하나님의 주권에 있고, 법화경의 중심은 인간의 수행에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신약이 인간의 수행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법화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말하고 있는 구약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임을 말해 준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또한 신약과 법화경도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민희식이 이와 같은 오류를 범한 것은 그의 연구가 두 경전 사이에 존재하는 유형에만 관심을 두었고 주석학적인 측면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종교나 신화들 사이에는 형식적으로 유사한 유들이 많이 있다. 특별히 도덕적인 교훈일 경우 불교와 유교 그리스도교 기타의 고등 종교 간의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유사하다. 그러나 이처럼 유사하다는 것만으로 유사한 모든 것을 동일한 근원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독단일 뿐이다.
4. 마지막으로 이사전(傳)은 선교사들이 전파한 예수의 이야기들을 승려들이 불교화(토착화)한 것은 아닐까? 니콜라스 노토비치가 저술한 '예수의 잃어버린 세월' 중에 있는 이사전은 내용과 정황으로 볼 때 인도와 티베트에서 불교를 배우고 수행한 예수의 전기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교 초기 선교사들이 전파한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불교승들에 의하여 불교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왜냐하면 이사전에 기록된 13세부터 29세까지 인도와 티베트에서 브라만교와 불교를 배우고 특별히 불교를 수행하여 불교의 승려가 되었다는 예수에 대한 기록을 볼 때 거기 나타난 예수의 모습은 불교승의 모습을 전혀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불교의 승려가 된 예수가 전파했다는 불교의 메시지는 불경의 내용이 아니고 오히려 구약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그 외의 정황들도 이사전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전파한 예수의 이야기들이 티베트에서 불교화(토착화)된 것이라고 추측케 해 준다. 실제로 그리스도교 선교 역사와 티베트의 불교 역사를 고려할 때도 이와 같은 주장이 충분히 근거가 있음을 알 수 있다(후론). 논의에 앞서 노토비치의 이사전 내용을 대략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사(Issa)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부분은 1장에서 4장 중반부까지로 여기에선 이사의 강생과 출생 그리고 아주 어린 시절 등을 묘사하고 있으며, 둘째 부분은 4장에서 8장까지로 잃어버린 생애로 알려진 13세부터 29세까지 이사의 인도와 히말라야의 여행과 수행을 말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은 9장에서 14장까지로 이 부분은 이사가 고국으로 돌아가서 전도활동을 하는 동안 일어났던 사건들과 죽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첫째 부분은 이사의 강생과 출생 그리고 어린 시절을 말하고 있다. 1장은 사람들이 우주의 영이 거하는 이사를 죽였기 때문에 하늘이 눈물을 흘렸다고 말한다. 이사는 우주의 영이 거하는 자로서 인간을 악으로부터 구원하고 평화를 주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자이다. 1장은 "들으라 이스라엘에서 돌아온 상인이 이 말을 우리에게 전한 것이라"는 말로 마친다. 이것은 인도에서 이사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은 사람들(인도인, 또는 인도의 불교도들 또는 불교승)이 이사의 죽음을 유대와 통상(通商)을 하던 상인으로부터 들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이사전이 인도로부터 티베트에 전해졌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인도사람들이 처음 이사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2장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시대를 연상케 한다. 이스라엘이 죄로 인하여 이집트에 사로 잡혀 노예생활을 하였다. 이때 이스라엘 가운데 학식 있는 자들이 바로의 두 왕자 중의 하나인 모사를 가르쳤다. 모사는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을 믿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부탁을 받고 아버지이며 이집트의 왕인 바로에게 이스라엘의 노예들을 해방시켜 줄 것을 청원했다. 그러나 바로는 모사의 청원을 듣고 진노함으로 노예들에게 더 큰 고통을 주었다. 이때 하나님은 바로에게 진노하심으로 이집트에 재앙이 내리셨다. 모사는 바로에게 이 재앙이 이스라엘의 노예들을 학대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린 것이라고 말하였고, 바로는 모사의 말을 듣고 그에게 이스라엘을 데리고 이집트를 떠나 새로운 지역에 가서 그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들과 함께 살도록 해 주었다. 그래서 모사는 이스라엘을 이끌고 그들의 옛 땅 즉 그들이 죄로 인하여 잃어버렸던 땅으로 인도하여 그곳에서 그들을 위하여 법을 반포하고 그 법에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선하게 살도록 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모사가 죽은 후에도 법에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삶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 "이스라엘엘 왕국이 지상에서 가장 힘세고 그 왕들은 그들이 가진 보물로 유명해져 이스라엘인들에게 평화가 지속되더라(2:19)" 3장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축복 가운데 강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곧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다시 죄를 범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로마의 지배 아래 두심으로 그들의 죄를 심판하셨다. 정복자들은 성전을 부수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게 했다. 또한 로마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혹독하게 압제했다. 이스라엘은 이와 같은 압제를 받으며 또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 긍휼을 구했다. 4장은 예수의 탄생 사건을 연상케 한다. 절대 부동하고 지복이 거하시는 불멸의 영혼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이사라는 이름으로 오셨다. 사람들은 그에게 몰려와서 그의 말씀을 들었다. 그가 열세살이 되어 이스라엘의 관습에 따라 아내를 맞이해야 할 즈음 부자와 귀족들이 그를 사위로 삼고자 했지만 이사는 아버지 집을 은밀히 빠져나와 예루살렘을 떠나 상인들과 함께 신드로 향했다. 이사가 이렇게 한 목적에 대하여 이사전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스스로 자신을 완전히 하고 대붓다(the great Buddha)의 법을 연구하기 위함이다"
둘째 부분은 4장에서 8장까지의 내용인데 여기에서는 예수의 잃어버린 생애로 알려진 13세부터 29세까지 인도와 히말라야의 여행과 수행을 말하고 있다. 5장은 이사가 신드에서 아리아인들 사이에 정착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의 소문이 널리 전파 되어 그를 자기 나라로 초청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이사는 이들 가운데 오릿사 나라에 있는 주거나옷르로 갔다. 그곳에서 이사는 브라만 사제들로부터 베다를 배웠고 또한 기도의 힘으로 병을 치유하는 법을 배웠다. 이사는 이곳에서 6년 동안 살았다. 그러나 이사는 브라만교의 사성(四姓)제도의 불합리함을 보고 그것에 반대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설교 했다. 6장과 7장은 브라만교의 사제들이 브라만교의 사성제도를 반대하고 천민들을 가까이 하는 이사를 박해하는 내용을 말하고 있다. 이사는 천민들로부터 브라만의 사제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우타미국으로 피했다. 그리고 이사는 그곳에서 6년 동안 팔리어를 통달하고 수드라의 성전을 연구했다. 6년이 지나서야 이사는 성전(聖典)을 완전히 익히고 붓다의 전파자가 되었다. 이사는 네팔과 히말리야산맥을 떠나 라즈푸타골짜기로 내려와 서쪽으로 여행하며 인간의 숭고한 이상에 대하여 다양한 사람에게 설교 했다. 이때 그가 설교한 내용은 우상숭배를 금하고 오직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법에 따라 살라는 교훈들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것이었다. 8장은 이사의 설교에 대한 조르아스트교의 사제들의 방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내용은 마치 예수의 설교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반대를 연상케 한다. 이사는 조르아스트교의 사제들의 말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며, 그들에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설교를 듣는 자들을 해하지 말 것을 말했다. 조르아스토교 사제들은 결국 이사를 죽이려 하였으나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이사는 안전했다.
셋째 부분은 9장에서 14장까지로 이사가 고국으로 돌아가서 전도 활동을 하는 동안 일어났던 사건들과 그의 죽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9장은 이사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서 그곳에서 설교한 내용들이다. 이사가 이스라엘에 다시 돌아온 때는 29세였다. 이사가 이스라엘에 돌아왔을 때 이스라엘은 이교도들로부터 많은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사는 고통 받고 있는 이스라엘을 위로했고 죄로부터 떠나 하나님께 돌아갈 것을 권고하였다. 그때 이스라엘이 이사에게 돌아와서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지 물었고 이사는 그들의 물음에 대답해 주었다. 10장은 이사의 체포와 재판 내용을 말하고 있다. 마을의 통치자들이 아사의 설교가 백성들을 선동한다고 빌라도에게 고발했고 빌라도는 이사를 체포하여 제사장과 장로들에게 재판을 받도록 했다. 한편 이사는 예루살렘에 이르러 계속 설교했는데 제사장과 장로들이 그의 설교를 들었을 때 그의 설교 속에서 잘못을 찾을 수 없었다. 이사의 셜교는 세상의 정권에 대한 선동이 아니었고 하늘의 권세를 대항하는 자들에 대하여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11장은 10장 내용의 연장이다. 제사장과 장로들은 빌라도에게 이사의 무죄를 말하였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들의 말을 듣고 격노하여 자신의 밀사들을 이사에게 보내어 그의 설교를 감시하고 그것을 보고하도록 했다. 이사는 여러 지방을 여행하며 사람들에게 세상을 믿지 말고 하늘의 뜻에 순종하여 살도록 설교했다. 12장은 빌라도가 보낸 밀사들이 이사에게 나와 질문하고 이사가 대답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밀사들은 이사에게 가이사를 따라야 할 것인지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려야 할 것인지를 물었고 또한 가사이가 가지고 있는 권세도 하나님이 준 것이라면 그에게도 복종해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사는 이들의 물음에 대하여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점에서 동등하다고 말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권세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권세는 언제나 책임이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권세를 받은 사람이 그것을 남용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특별히 12장은 여성들을 존중할 것을 설교한 내용이 후반부를 차지하고 있다. 13장은 이후 삼년동안 계속 이사는 여러 곳을 여행하며 사람들에게 설교했고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그를 따랐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한편 빌라도가 보낸 밀사들은 이사로부터 백성을 선동하여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려는 어떤 의도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빌라도에게 보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사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두려워하여 자기의 군사들에게 이사를 체포하도록 명했다. 13장은 이사가 빌라도에게 재판 받는 과정을 말하고 있다. 빌라도는 이사에게 "네가 사람들을 선동하여 정권을 뒤덮고 스스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한게 사실인가"라고 물었고 아사는 빌라도에게 자신은 오직 하늘의 왕에 대해서만 이야기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결국 이사에게 사형을 선언했다.
14장은 이사가 십자가형을 받은 일과 묻힌 일 그리고 빌라도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무덤에서 이사의 시신을 다른 곳으로 옮긴 일 등을 말하고 있다 빌라도는 삼일이 지난 후 백성들의 반란을 두려워하여 이사의 시신을 다른 곳에 옮겨 묻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사의 무덤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천사들이 와서 그를 데려갔다고 말했고, 이 소문은 모든 사람에게 퍼졌다. 이사가 죽은 후에 그의 제자들은 이사를 통해 전해 들은 구원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계속 전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들은 자들은 우상을 버리고 창조주를 찬양했다. 이사전은 이렇게 마친다. "이교도들, 그들의 왕, 그들의 전사들이 이 설교를 듣고 그들의 우매한 신앙과 그들의 사제 그리고 그들이 우상들을 버리며 무한히 자비하시고 왕 중의 왕이시며 만사형통하신 우주의 창조주를 찬양하더라"
이사전의 내용과 구조로 볼 때 이사전은 성경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사전의 내용을 보면 성경에 언급된 이스라엘의 역사와 일치하고 또한 성경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 메시지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사전은 성경이 전해 주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메시아를 보내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게 하셨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사의 설교 내용도 성경의 내용과 일치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우상을 버리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만 섬길 것을 말하고 있다. 다만 내용 중에서 차이가 있다면 모세를 이스라엘인이 아닌 바로의 아들로 말한 것과 이사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 아니고 빌라도라고 말한 것뿐이다. 그리고 이사가 13세에서 29세까지 인도와 티베트에서 불교를 배우고 수행했다는 것뿐이다.
이와 같은 이사전의 내용을 생각할 때 민희식의 주장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을 갖게 한다. 가장 중요한 의문은 그들의 주장대로 예수가 학문적으로나 또는 한 인간으로서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 16년을 브라만교와 불교의 가르침을 받고 수행하였다면 더욱이 불교의 승려였다면 어째서 그의 가르침 가운데 불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까?이다. 불교는 의식을 중시(重視)한다. 그래서 불교가 전파되는 곳에는 탑이 세워지고 사원이 세워지고 그곳에서 불교의식이 행해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를 의식의 종교로 분리할 수 있다(물론 초기의 깨달음에 기초한 불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대중화 된 불교를 말하는 것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어째서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가? 오히려 그의 가르침은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가? 민희식이 재구성한 예수의 어린시절을 보면 그는 자기 종교의 신앙을 가르치는 교사들에 대하여 반감을 가졌고 이교도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래서 예수의 가르침은 더욱 우리에게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예수의 어린시절의 환경과 배움의 여정을 생각한다면 그의 모습은 불교승들 가운데 한 사람의 모습이어야 한다. 더욱 당황스런 것은 이사전에는 그가 불교의 전파자(불교승)가 되어 히말리야 지역을 순회하며 설교한 내용이 나오는데 이때에도 이사의 가르침은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고 성경의 가르침이었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가장 설득력 있는 해명은 이사전은 선교사들을 통하여 전파된 예수의 이야기가 불교도들에게 알려졌고 그들은 그것을 불교화(토착화)하여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티베트에서 노토비치가 편집한 것과 같은 내용의 이사전을 보았다는 네 명의 증언을 인정한다면 그들이 본 바로 그 이사전은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동양에 전파한 예수의 이야기 또는 성경의 이야기들을 불교식으로 토착화한 바로 그 문서일 것이다. 이와 같은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우선 민희식이 역사를 약술하고 고증한 것처럼 당시 동서양의 교류는 활발했다. 또한 그리스도교 선교의 역사를 볼 때 동양의 선교 역시 그리스도교 초기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때 동양 선교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은 네스토리안 선교사들이다 그들은 실크로드를 통하여 각 곳에 복음을 전했다. 하르낙은 2세기경 이미 페르시아에 360개의 교회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이장식, 아시아 고대 기독교사, 기독교문사, P.51). 이때 선교사들이 직접 티베트까지 이르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은 당시 동서양이 만날 수 있는 페르시아와 주변국들 가운데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역사를 고려할 때 티베트가 그리스도교와 접촉할 수 있는 가능성은 실크로드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중국을 통해서도 가능성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은 7세기 초에 그리스도교와 접촉하였다. 네스토리안 선교사들이 중국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한 것이 635년 이전으로 보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같은 책, 215). 한편 티베트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7세기 초다. 이것은 이사전은 7세기 이전에는 티베트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리스도교가 실크로드나 또는 인도 외에도 중국을 통하여 티베트에 전파 되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충분히 말해 준다. 어떤 면에서 노토비치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사전이 인도를 통하여 티베트에 전파 되었다는 것은 가장 가능성이 낮다. 왜냐하면 노토비치에 따르면 처음 팔리어로 기록된 이사전이 인도로부터 티베트에 전해지려면 번역이라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어려운 과정을 필요로 하는 번역물(이사전)들이 수천의 사본으로 만들어져서 티베트 여러 사원에 보관 되어 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생각할 때 그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그리고 이사전의 내용으로 볼 때 이 문서는 불교승들에게 호감이 가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왜냐하면 불교의 교리와 다른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어떻게 이와 같은 사본들이 수천권으로 만들어져서 여러 지역의 불교 사원에 보관 될 수 있겠는가? 노토비치와 그가 보았다는 동일한 문서를 보았다고 말하는 네명의 증인의 말대로 이사전의 실존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인도로부터 번역의 괴정을 거쳐 티베트에 온 것이라기 보다는 티베트 사람들이 어떤 경로(언급한 것처럼 그리스도교가 티베트에 전파될 수 있는 다양한 경로가 있었음)를 통해서든지 그리스도교와 접촉한 후 그것을 자신들의 언어로 자신들의 신앙에 맞게 토착화 한 것일 가능성이 더 높다.
우리는 세계의 종교사를 통하여 타종교의 가르침을 받아 자신의 종교에 수용함으로 전혀 다른 또 하나의 교리를 만든 예와 또한 자신의 종교를 타종교권에 전파하기 위하여 그 나라의 종교 또는 문화에 어느 정도 타협하는 예들을 흔치 않게 본다. 대표적인 예를 찾는다면 17세기 중국에 들어간 예수회 선교사 마태오릿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저서 천주실의를 보면 그가 그리스도교를 유교의 옷을 입혀 중국인들에게 전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생각할 때 어떤 경로로 그리스도교가 티베트에 들어갔든지 그곳에서 그리스도교가 불교화 되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이처럼 이사전이 조작된 것이 아니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전파한 그리스도교가 티베트에서 토착화 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사전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의문들이 남아 있다. 첫째 그 문서의 실존여부다. 왜냐하면 노토비치와 이사전을 목격했다는 네 명의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문헌학적으로 그 책의 실존을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들의 증언들 가운데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이사전이 하나의 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사본에 산재 되어 있다는 것이고, 또한 이와 같은 유의 사본들이 수천 개가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노토비치는 이런 유의 사본들은 불교사원을 중심으로 비전(秘傳)으로 전해내려 오는 것임으로 외부세계에 알리는 것이 금지 되었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목격자들의 증언과 노토비치의 말은 모순이 있다. 왜냐하면 이 사본의 목격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스위스의 카스파리 부인은 수도승들이 자원하여 사본을 보여 주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엘리자베스.C.프로펫트, 예수의 잃어버린 세월, 동국출판사, P.302). 그리고 다른 목격자들 가운데서도 동일한 중언을 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 문서는 비전이라고 할 수 없다. 불교의 승려들이 자유롭게 볼 수 있고, 자신이 보여주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비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문서들은 공개 되지 않았을까? 실제로 노토비치가 편집한 이사전의 내용을 생각한다면 비전이 될만한 요소가 없다(일반적으로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비전은 입교의식서와 같은 비밀스런 것들이다).
또한 문헌학적으로 볼 때 이사전의 실존과 내용을 고증할만한 증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소수가 이 사본을 보았다는 증언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의 증언도 신뢰할만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노토비치를 포함하여 사본을 보았다고 증언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만 제외하고는 팔리어나 티베트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사본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통역자 또는 승려들로부터 전해들은 대로 이야기했을 뿐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근래에 그리스도교와 관계된 문서들이 발견 되었을 경우 모두 공개되었다. 근세의 최대 발굴이라고 할 수 있는 쿰란사본과 그리고 그나 하마디의 사본들이 모두 공개되었기 때문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고대근동의 문서들이 모두 전사(inscription) 되어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다. 이처럼 사본이 공개 된 후에야 그 문서의 진위 여부를 논의할 수 있는데 민희식을 비롯하여 '예수의 잃어버린 생애'를 말하는 자들은 공개되지도 않은 사본, 즉 실존 자체에 의문이 가는 문서에 기초하여 예수의 생애를 제구성하고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본인들조차 문헌학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것임을 알 것이다.
3〕결론
학문적 논의는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고 또한 있어야 하지만 이 논의에 참여하는 자들에게는 성실성과 책임성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어떤 유의 논의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특별히 학자들은 다른 사람에 비하여 더 많은 기회와 혜택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그만큼 사회적 책임이 따를 수밖에 없다. '예수의 잃어버린 세월'의 논의야말로 성실과 책임이 따르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무책임한 행동을 할 때 가장 심하게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대중이다. 여기 대중이란 평범한 일반 시민을 말한다. 인터넷 등 매체들을 통해 민희식의 저서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논제 자체를 이해하려고 하거나 숙고해 보려고도 하지 않고, 선동에 휩쓸리거나 또는 일부 인터넷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자신의 선유성향만 강화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민희식의 저서는 학문적 논의로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의 저서들의 내용이 픽션이 아니고 종교 간에 중대한 문제들을 야기 시킬 수 있는 것들이므로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논제에 대하여 참고문헌조차 제시하지 않았다. 이것은 저자의 독자에 대한 무례이며 오만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성서의 뿌리'는 고대 근동 문화 문명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을 때 비로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얼마나 고대 근동 문화 문명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을까? 이런 이해가 없다면 독자는 저자를 의존할 수밖에 없고 저자가 정직하지 못하다면 독자는 기만당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불교도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민희식의 저서들이 마치 그리스도교의 기초가 흔들어 놓은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언급한 것처럼 민희식의 논의 자체가 독자적인 것이 아니고 이미 서구에서 오래전에 이미 논의된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이 논의 자체를 마치 새로운 것처럼 받아들인다면 여기에는 저자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민희식은 '법화경과 신약성서'의 6장 '불교성전과 신약성서의 유사점'에서 "기독교가 불교원전에서 차용한 내용들을 최대최다 집성하고 분석한 '예수와 붓다'에서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같은책 P105)"라고 말한 후,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이와 같은 사실로 오늘날 많은 성서문헌학자들은 신약성서 내용의 대부분을 하나의 개작으로 보고 있다(같은 책, P114)" 여기 '대부분의 성서문헌학자들'은 누구를 말하는가? 물론 이들이 성경의 '고등비평학자들'이라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그러나 고등비평학자들만 성서의 문헌학자들이 아니다. 수많은 본문비평학자들이 있다. 그러므로 민희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몰이해로 인한 것이다. 만일 저자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성경의 본문비평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면 결코 이와 같은 말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본래 책(성경)의 종교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비평은 외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내부에서 시작되었다. 성경의 본문비평은 어떤 면에서 성경의 원본이 생성된 시점에서부터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본문비평에서는 수많은 사본들을 비교하며 단어의 순서조차 비평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대부분의 성서문헌학자들'이 성서의 개작을 주장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저자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을 연구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민희식의 주장대로 신약성경이 법화경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고 구약성경의 신학적 사상을 전승 받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민희식의 '예수와 붓다'는 유사점에 대한 비교는 있지만 주석학적인 연구는 전혀 시도하지 않았다. 신화학적으로 볼지라도 두 문서 간의 유사점이 있다고 하여 동일한 문서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각각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전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주석학적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특별히 경전 간의 유사점은 주석학적으로만 해명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그의 주장대로라면 많은 학자들이 유교와 불교를 비교하여 유사점들을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불교의 뿌리가 유교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일방적으로 '그리스도교가 불교 원전을 차용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독단이다. 저자는 자신의 논리로 스스로 모순에 빠졌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논리라면 법화경은 연대가 앞선 구약을 차용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글은 마치며 다시 한 번 종교인들의 성실성을 되짚어 본다. 민희식의 저서들을 출판한 블루리본이 저서들의 소개를 위한 간지(簡紙)는 특별히 이와 같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블루리본이 상업만을 목적으로 하는 출판사라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지만 종교적 목적을 가진 출판사라면 본연의 목적에서 떠났다고 할 수 있다. '예수와 붓다'를 소개하는 글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목사 박옥래'의 추천의 글을 실었다. 박옥래는 한국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자가 아닐뿐만 아니라 실제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이 말은 그가 정말 목사인지 조차 알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한 교단이나 교회조차 소개하지 않고 목사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책을 홍보한 것은 한국교회에 대한 무례를 범한 것이다. 목영일의 저서 '예수의 마지막 오딧세이'를 소개하는 글에서도 동일한 무례를 범했다. 한국기자협회고문, 회장 김인수의 추천의 글에서 그를 '독실한 기독교인인 저자 목영일박사'라고 소개했다. 이것은 추천인이 어떤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하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독실한 기독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저자 자신을 떳떳치 못하게 하는 일일 될 것이다. '성서의 뿌리'를 소개하는 간지에 "기독교 측에서 제발 이 책만은 내지 말라고 간청했다가 저자에게 거절당한 숨은 사연으로 더욱 유명해진 바로 그 책"이라고 소개했는데 여기 '기독교 측'이라는 대표기관을 밝혀야 할 것이다. 민희식의 저서들의 자료들 대부분이 정체불명의 것이고(특히 예수의 생애를 재구성한 자료들), 또한 출판사의 저서를 소개하는 글조차 정체불명의 사람들의 글을 실었다면 저자와 출판사는 먼저 자료의 출처를 정확하게 밝히고 학문적 논의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을 마치며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다음의 물음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동일한 내용의 저서들이 민희식이 아닌 다른 사람이 저술했다면 그때에도 이 저서들이 지금처럼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까?" 종교인에게 요청되는 것은 진실과 성실이다. 만일 이것이 결여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힐 뿐만 아니라 자신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종교는 진실과 성실의 기초 위에서만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민희식의 저서 '예수와 붓다'의 서문이다. "…종교간 갈등으로 세계평화가 위협을 받고 있는 오늘날은 자신이 신봉하는 종교뿐만 아니라 타종교에 대해서도 이해와 존중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이에 본 저자는 기독교와 불교의 비교를 통하여 상호 이해를 돕고 타종교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 편견과 아집에서 벗어나 모든 인류의 평화공동존의 장으로 이끄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 바램으로 '예수와 붓다-그 놀랍도록 흡사한 생애와 가르침'를 썼다." 저자가 밝힌 대로 종교 간의 갈등을 극복하려면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요청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자신의 저서들에서 그리스도교를 마치 '피비린내 나는 투쟁의 장'으로 묘사했고, 성경을 투쟁에서 이긴 자들의 이데올로기로 묘사했다. 만일 저자가 한 사람의 불교인으로서 누군가가 정체불명의 자료들을 인용하여 불교의 경전을 픽션화했다면 이런 사람들과 함께 상호 이해와 존중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을까? 이글을 마치며 "달을 보라하니 손가락만 본다(標月指)"는 말을 다시 한 번 되집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