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상
이 간결한 요약적인 말은 마가가 여기에서 기록한 단 하나의 비유를 소개하는 말이다. 예수는 그에 대해 음모를 꾸미고 있던 산헤드린을 대표하여 질문 해 온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것은 적의에 가득찬 그들의 의도를 폭로한 것이며 그 결과에 대하여 경고한 것이다.
=====12:1하
포도원 건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이사야 5:1 - 2에서 온 것으로서 포도원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 알려진 표상이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산 울을 두르고 - 포도즙을 짜서 모으기 위한 구유 자리를 파고 보호와 저장고 안전을 위해 망대를 세웠다. 이것은 좋은 상품을 만들려고 하는 주인의 욕망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소작농 즉 포도원 재배자들에게 포도원을 맡기고 타국에 나가 살기 위하여 여행을 떠났다.
=====12:2 - 5
주인은 추수 때가 되어 소작료로 그 과실을 받기 위해 종들을 차례로 그들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난폭한 행동으로 종들을 때렸고 마지막 종은 죽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개와 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몇 번이고 거듭 많은 선지자들을 보냈지만 그들은 능욕을 당하고 상처를 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12:6 - 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주인은 한 사람 즉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셨다. 소작농들은 자기 아들은 존경하리라고 기대하면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상속자인 것을 알고 음모를 꾸며 그를 죽여서 포도원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땅의 일부분이 어떤 기긴 내에 상속에 대한 요구가 없는 주인 없는 재산이 될 때에는 그것을 먼저 주장하는 자가 합법적으로 그 땅을 소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소작인들은 만약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여 버린다면 포도원을 자기네들이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12:9
예수의 수사적인 질문은 그 주인이 어떤 행동을 했겠는가를 결정하는 데 청중들을 함께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주인의 아들을 배척하는 것은 실제로 주인을 배척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인은 강한 권한을 갖고 와서 악한 소작인들을 죽인 후에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버릴 것이다. 예수에 대한 배척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배척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오게 되었고 그들의 특권을 다른 사람들에게 일시적으로나마 넘겨주게 되었다.
=====12:10 - 11
예수는 이 비유를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에게 적용시켰다. 그리고 그 비유를 확대시켰다. 소작인이 비유에서 시편에 나오는 돌과 건축자의 비유로 바뀌었고 그것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비유적으로 언급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건축자가 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돌은 거물에서 가장 중요한 돌로 간주되었다. 건축자들의 버림과 버림받은 돌의 귀히 쓰임은 하나님의 놀라운 주권적인 행동이었다.
=====12:12
산헤드린을 대표하던 그들은 예수께서 그 비유를 자기들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흥분하기 쉬운 유월절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홀로 버려두고 떠나갔다. 예수의 대적자들이 이 비유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은 하나의 새로운 발전이며 그의 진정한 정체의 비밀을 자신하여 공공연하게 선언하심으로써 예수의 주권 성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12:13
바로 전에 나오는 비유로 예수께서 산헤드린에게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리새인과 헤롯당 몇 사람을 보내어 그의 말을 책잡으려 하였다. 책잡는다 고 번역된 말은 덫을 가지고 짐승을 사로잡는 것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12:14 - 15상
예수를 선생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은 그들의 진정한 의도를 숨기면서도 예수께서 자기들의 어려운 질문을 피하지 못하도록 머리를 짜낸 질문을 조심스럽게 예수께 던졌다. 그들은 예수가 참되시며 편견이 없으시고 사람들의 외모에 따라 판단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는 그가 사람의 현재의 모습에 관심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은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라고 물었다. 세 는 인구조사를 의미하는 라틴어였다. 이것은 유대가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던 A. D. 6세기 이래로 모든 유대인들이 해마다 바치는 인두세를 말하는 것이었다. . 그 돈은 곧바로 로마 제국의 국고로 들어갔다. 이 세금은 유대인들이 로마에 정복되었다는 것을 상징했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못하였다. 이러한 질문을 예수께 한 것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정치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궁지에 몰아 넣기 위한 수단이었다.
=====12:15하 - 16
예수는 즉시 그들의 정직한 체 하는 질문의 이면에 그들의 위선이 가려져 있음을 간파하였다. 예수는 그들이 왜 자신을 책잡으려 하는지를 수사적인 질문으로 폭로하셨다.
=====12:17
가이사가 새겨진 화폐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것이 나타내고 있는 권위와 정부의 유익을 인정한다는 것이고 결국 세금을 내야 할 의무가 잇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고 선언하셨다. 이 세금은 가이사의 돈을 사용했다는 데 대한 빚이며 그가 통치함으로써 백성들이 유익을 보았음으로 내는 빚이었다. 예수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고 한 것은 성전 세를 언급한 것이기도 하지만 황제를 신성시하는 데 대한 저항이기도 하였다. 즉 황제가 신적인 영예와 숭배를 결코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만 영광과 예배를 드려야 한다.
=====12:18
사두개인들은 예수를 깎아 내리기 위하여 또 다른 질문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 왔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주로 제사장과 상류 계급 출신인 유대의 귀족 당이라고 믿어졌다. 그들은 산헤드린에서 영향력 있는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유대 최고의 법관이며 주로 로마 권력자들과 협력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부활의 진리, 미래의 심판, 천사와 영의 존재를 부인했다. 그들은 모세의 책만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 들였고 바리새인들이 수집하여 지키고 있는 구전은 거부하였다. 이것이 사두개인들에 대한 마가의 유일한 언급이다.
=====12:19 - 23
그들은 공식적으로 예수를 선생이라고 부르면서 형사 취수에 관한 모세의 규례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여기서 나오는 이야기는 가족의 혈통을 잊고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서 취해지던 전통이었다. 사두개인들은 자식 없이 죽어 버린 7형제에 관한 이야기를 꾸며냈다. 사두개인들은 분명히 불활 신앙을 믿고 있지 않으면서도 부활했을 때에 과연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느냐? 고 물었다.
=====12:24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두 가지 반문을 하시면서 예수는 왜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는지를 두 가지 이유로 말씀하셨다. 먼저 그들은 성경을 잘못 이해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그들은 죽음을 극복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 능력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먼저 두 번째 이유와 더불어 그 첫 번째 이유를 각각 보충 설명하였다.
=====12:25
사두개인들은 부활 후에도 결혼이 다시 시작되는 것으로 잘못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활한 사람들의 삶에는 정혼도 결혼도 없다. 다만 하늘에 잇는 천사들과 같이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불멸의 존재가 될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하나님께서 죽음 후에 전적인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실 것과 그와 관련된 눈에 보이는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실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의 질문은 부당한 것이다.
=====12:26 - 27
사두개인들은 알지 못하여 부활에 대한 이해가 오경에는 없는 것으로 단언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질문을 하시면서 모세의 책 즉 모세 오경에 호소하셨다. 그리고 불붙는 가시나무 떨기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출3:1 - 6) 이 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이라고 확언하시면서 모세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셨다. 그들은 비록 오래 전에 죽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으로서 그들과 계속적으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신 말씀이었다. 이것은 죽으면 끝이라고 이해한 사두개인들의 이해대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라고 예수는 결론을 내렸다. 만일 그들이 죽은 후에도 살아 있지 않거나 죽음이 끝이라면 그는 진실하지 못한 하나님일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 속의 신실함이 바로 육체적 부활을 보증해 준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예수의 대답은 분명히 죽음 이후의 살에 대한 사실을 확증한 것이었다. 이것은 육체적 부활도 있을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마가가 기록한 예수의 마지막 교훈은 그들이 부활과 죽음 후의 삶을 부인한 것이 얼마나 심각한 잘못 이었는가를 강조하신 것이다.
=====12: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의 사두개인과의 변론을 듣고 그들에 대한 그의 훌륭한 답변에 매우 감명을 받았다. 이것은 그가 바리새인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는 서기관들 사이에 토론되던 주제에 대해 예수의 답변하는 솜씨를 평가하기 위하여 어떤 적대감이나 숨겨진 저의 없이 찾아왔다. 전통적으로 서기관들은 모세의 율법에 관한 613가지의 개별적인 율법(365가지는 부정적인 것이요 248가지는 긍정적인 것이다. )에 대해 말했다. 그들은 모든 율법이 구속력 있는 것으로 믿으면서도 더 무거운 것과 가벼운 법령을 구분하여 생각하였고 전체의 율법을 단 하나의 계명으로 요약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논쟁의 견지에서 이 서기관은 이 모든 율법 주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냐고 물었던 것이다.
=====12:29 - 31
예수의 대답은 어느 것이 크냐 작으냐의 문제를 뛰어넘어 전체 율법을 요약해 주는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가는 것이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라는 계명은 인격적으로, 포괄적으로, 그리고 전심으로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헌신하여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마음, 뜻, 힘등 반복되어 사용된 말들이 이 계명을 강조하고 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뜻 이라는 말이 언급되어 있지 않고 70인역에서는 마음 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두 낱말을 모두 포함시켜서 계명의 본질을 포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다음으로 예수는 첫 번째의 계명과 분리 할 수 없는 그리고 첫째 계명에 보충이 되는 두 번째 계명을 인용함으로써 이웃에 대한 헌신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자신에 대한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똑같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 것이다. 이 두 가지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왜냐하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명령을 지키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지키는 것이다.
=====12:32 - 34상
이 구절은 마가에 독특한 것이다. 이 구절은 분명히 영적인 것과 예식 적인 예배 사이의 관계와 싸우는 그의 독자들을 훈계한 것이었다. 서기관은 예수의 답변이 정확함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예수를 뛰어난 선생으로 보았다. 신의 이름을 지나치게 존중하여 신의 이름을 불필요하게 사용하는 것을 피하는 전형적인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피하면서 예수의 대답을 다시 표현하였다.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는 말은 신명기 4:35에서 나온 말이다. 그는 또한 마음과 듯에 대하여 그가 이해한 말로 대신했다. 그는 대담한 말을 했는데 사랑의 두 가지 명령은 모든 번제나 기타 제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그는 현명하게 대답하였다. 그래서 예수는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라는 선언을 하심으로 그로 하여금 보다 더 깊은 생각을 하도록 유도하였다. 이 사람은 영적인 이해와 예수에 대한 개방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12:34하
예수는 그를 깎아 내리려는 모든 시도를 효과적으로 좌절시키고 적대자들의 악의에 찬 의도와 잘못을 능숙하게 드러내셨으므로 아무도 감히 그에게 더 이상 질문을 하지 못하였다.
=====12:35
그 후에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기다리던 메시야를 그리고도 즉 승리의 구원자가 될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할 때 그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고 서기관들에게 예수께서는 물으셨다.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은 구약 성경에 확고하게 그 기초를 둔 기본적인 유대인의 신앙이었다. 예수는 메시야가 다윗의 주라는 사실이 옳다고 덧붙였다. 서기관들의 견해도 옳은 것이었지만 불완전하였다. 성경의 견해는 바로 그들의 좁은 민족주의적인 희망보다 훨씬 더 넓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12:36 - 37상
메시야가 다윗의 주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성령에 이끌리어 다윗 자신이 시편에 선포해 놓은 것을 인용하셨다. 이것은 분명히 이 시편이 다윗의 저작이며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공격할 수 없는 것은 다윗이 메시야를 주 로 불렀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 시켰다. 그러면 어떻게 그는(메시야) 그의(다윗) 자손이 될 수 있는가? 예수의 수사적인 질문은 청중들로 하여금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인 동시에 주 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메시야가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라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는 이 지상에서 미래의 다윗 왕국을 회복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문제를 자기와 연관시켜서 이해할 수 있도록 이 문제를 신중하게 부각시켰다는 것은 분명하다.
=====12:37하
교묘한 질문으로 예수를 시험하고자 했던 유대 지도자들과는 달리 많은 유월절 군중들은 비록 다 이해하지는 못하였지만 기쁨으로 처음부터 그의 가르침을 듣고 있었다.
=====12:38 - 39
예수는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기를 원하고 또 그들의 특권을 남용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경고하셨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지만 많은 서기관들이 그렇게 행동하였다. 그들은 긴 옷 즉 제사장, 서기관, 레위인들이 입었던 길고 흔 술 달린 가운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했고, 공적인 명칭인 랍비, 주인, 아버지와 시장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들은 회당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좋아했고, 연회에서도 영예의 자를 차지하여 주인 다음의 좌석에 앉아 특별 대우를 받기를 원하였다.
=====12:40
1세기의 서기관들은 자기들의 직무에 대하여 급료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신앙심이 깊은 유대인들이 바치는 자선에 의존해야 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남용하는 면이 있었다. 과부의 밭을 삼킨다는 비난이 바로 한정된 재산을 가진 사람들 특히 과부들의 호의를 악용하고 있는데 대한 생생한 표현이다. 그들은 비윤리적으로 사람들의 재산을 착복하였다. 게다가 그들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그들의 신용을 얻기 위하여 장시간 기도를 드렸다. 예수는 그들의 화려한 행동, 탐욕, 위선을 꾸짖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은 강조하지 않고 경건한 척 하면서 자신들을 위해 그런 위선을 요구하였다.
=====12:41 - 42
예수께서 그의 공적인 가르침을 행하시던 이방인의 뜰로부터 여인의 뜰로 들어가셨다. 이 뜰 벽 맞은 편 벽에는 예배 자들의 자발적인 제물과 헌금을 거두기 위하여 나팔 모양을 새겨 놓은 13개의 연보궤들이 있었다. 맞은 편 유리한 위치에 자리하시고 예수께서는 무리들이 어떻게 성전 금고에 그들의 돈을 넣는가를 살피고 계셨다. 한 불쌍한 과부는 두 렙돈을 헌금궤에 넣었다. 한 렙돈은 팔레스틴에서 통용되던 가장 작은 유대인의 청동 동전이었다. 두 렙돈은 노동자들의 하루 임금이었던 로마 데나리온의 64분의 1읠 가치였다. 마가는 자기 로마인 독자들을 위하여 다시 로마 화폐 단위로 그 가치를 말했다.
=====12:43 - 44
엄숙한 서론적인 말씀으로 예수께서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이 여인이 더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과부는 어려운 중에서 모든 것을 넣었기 때문이다. 비례로 따지면 그 여인ㅇ 가장 많이 바쳤던 것이다. 그 여인은 희생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리라고 신뢰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위하여 동전 하나를 간직해 둘 수도 있었다. 예수께서는 전적인 헌신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그녀의 예를 사용하셨다.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헌신은 곧 시험 당할 것이다. 이 사건은 또한 예수께서 자신을 전적으로 죽음에 내어 주심을 예증하여 주는 것이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이후에 유대교 지도자들의 예수께 대한 음모와 살의는 절정에로 치닫게 된다는 점은 앞에서 언급하였다. 전장 마지막 단락과 마찬가지로 본장 또한 수난 주간 중 세째날(화요일)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을 보여 준다. 본장의 구체적 내용 구성을 분석하기에 앞서서 본장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핵심적인 주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대적들의 파상적(波狀的)인 공격. 예수를 올무에 빠드리려는 치밀한 계획들이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자(11:27-33등) 대적들은 다급해졌다. 더구나 불과 이틀 앞으로 다가온 유월절을 맞아 전국 각처로부터 백성들이 몰려들고 있었으며, 이들은 예수의 메시야적 권능을 직접. 간접으로 목격하거나 들었던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산헤드린 회원들은 예수께서 이 유월절을 기하여 대대적인 군중 선동을 꾀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온 것이라 속단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짜낼 수 있는 최선의 모략과 지혜를 다 동원하여 파상적인 공격을 가함으로 예수를 궁지에 몰아넣고자 하였다. 특히 본문에서는 당시 서로 간에 알력 관계에 있었던 유대 사회의 지도층들이 합심하여 예수제거 음모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이 주목을 끈다(13절). 그리고 지금까지의 계략과는 달리 미묘한 정치적 함정이 깔린 질문을 시도한 사실(14절) 또한 주목할만하다. 이는 예수께서 조만간 로마의 군병들에게 끌려가 십자가형을 당하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복선의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로마 당국의 힘을 빌어서라도 예수를 철저히 제거하고자 했던 유대교 지도자들의 강력한 적의를 시사한다. 이렇듯 살벌한 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도 예수는 몸을 사리거나 예루살렘을 떠나시기는 커녕 대적자들의 간교한 질문에 대해 초월적 지혜로써 답변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위선과 허위에 대해 정면으로 공
박하셨다.
(2) 예수의 관심사. 본문에는 예수께서 일촉 즉발의 숨가쁜 상황 중에서라도 한 서기관의 진지한 물음에 답하시며(28-34절) 또한 참된 헌신의 문제를 놓고 제자들을 찬찬히 가르치시는(41-44절) 광경이 묘사되어 있다. 이는 자기 목숨을 바쳐 양무리를 돌보시는 영혼의 목자(牧者)로서의 충성스러운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예라 하겠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또한 그리스도로서 이 땅에서 완수해야 할 사명을 갖고 계셨으며, 이 사명을 성취하고자 하는 당신의 열심을 그 누구도 제지할 수 없었다. 요컨대, 썩은 고기를 차지하기 위해 혼전 투구(混戰鬪歐)를 일삼았던 당시 유대 지도층들과는 달리 예수의 관심사는 오직 신령한 사명 완수에 있었기 때문에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실 따름이었던 것이다.
한편, 본장에 수록된 내용을 구체적으로 상고하기에 앞서서 개괄적으로 분석해 보기로 하자. 본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다. 먼저 1-27절은 11:27-33에 이어 예수와 유대교 지도층과의 충돌을 묘사한다. 이를 더욱 세분하면 1-12절은 예수께서 핍박자들을 악한 소작농에 빗대어 경고하신 말씀이고, 13-17절과 18-27절은 각각 정치적, 신학적 논쟁들이다. 1-27절이 본장의 서론 및 본론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한다면 38-44절은 결론에 해당한다. 이 결론부에서 예수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탐욕에 대한 심판을 선고하심과 아울러(38-40절)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진실되고 전폭적인 헌신을 보여 준 가난한 한 여인을 칭찬하셨다(41-44절). 그리고 28-37절은 본장에서 일종의 막간과도 같은 역할을 하며, 예수께서 대적들과의 숨가쁜 충돌 상황 가운데서도 한 서기관의 진지한 물음에 답하시며, 또한 메시야로서의 자신을 공공연하게 계시하시는 내용이다.
1. 악한 농부의 비유(12:1-12)
본문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권세의 출처 문제를 놓고 예수를 공격하는 내용인 11:27-33 내용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즉, 대적들의 음흉한 저의가 시시각각으로 표출되어가자 예수께서 그들을 정면으로 책망하고 경고하기 위해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소재 자체는 유대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었고, 여기 수록된 사건 또한 당시 팔레스틴 지방에 충분히 일어남직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팔레스틴 본토에 토지를 소유하고서 타지방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많았으며, 로마인으로서 팔레스틴에 투자한 자들도 있었다. 따라서 부재 지주로 말미암은 여러 문제들이 빈발하였던 것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핍박이 가속화되는 전후 문맥으로 미루어 볼 때 본 비유의 의미는 분명히 드러난다. 이 의미를 구체적으로 상고함에 있어 다음 몇 가지 주제에 초점을 맞추기로 하자.
(1) 농부들에 대한 경고. 여기 등장하는 농부들이 직접적으로는 방금 전에 예수를 대적한 바 있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일컫지만 보다 넓게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지칭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다고 하면 본문은 출애굽 이후로부터 A. 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유대 민족의 반역 역사를 함축하고 있다 하겠다. 또한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며(사 5:1), 산울, 구유 자리, 망대 등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율법과 언약등과 같은 모든 신령한 은혜들을 뜻한다. 이스라엘은 이렇듯 택하심 받은 선민으로서의 여러 특권들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선민다운 거룩하고 신령한 자태를 나타내기는 커녕 온갖 이방의 악습과 인간의 완악한 본성에 휩쓸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였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지자들을 보내어(3절의 '종') 백성들의 죄악과 완악함을 경책하셨지만 이스라엘 역사의 대부분은 불순종과 죄악으로 더럽게 얼룩져 있을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당신의 오래 참으시는 관용과 인내를 오히려 멸시하는(롬 2:4) 이스라엘에게 심판으로 징벌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주변 열강들을 도구로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여러 차례 응징하셨으며(왕상 14:15-28;왕하 15:37등), B. C. 722년의 사마리아 함락(왕하 17:6)에 이어 B. C. 586년에는 남왕국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마저 함락당함으로써 국권을 이방 민족에게 빼앗기는 굴욕을 당하게 하셨다(왕하 25:8-12).
한편 본문의 심판 경고는 일차적으로 A. D. 70의 예루살렘 멸망에서 성취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불신 세력이 멸망케 될 주님의 재림시에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
(2) 예수의 수난과 승리. 본 비유의 전면으로 부상한 주제는, (1) 항에서 설명한 바처럼 유대교 지도자들을 위시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선고이다. 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강조된 주제는 예수의 수난과 최후 승리에 관한 것이다. 본문에서 예수는 포도원 주인의 아들로 묘사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자기 계시라고도 볼 수 있다. 당시 유대의 지도층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닮으로써 승리를 자축하였겠지만, 예수께서는 부활. 승천하셨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에 심판주로서 다시 오심으로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승리를 드러내실 것이다.
(3) 이방인 구원에 관한 암시. 포도원 주인이 악한 농부들을 진멸하는 그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준다는 것은(9절), 이스라엘이 선민으로서의 특권을 상실하게 됨에 따라 은혜의 복음이 이방 민족에게로 전달된다는 사실에 대한 비유이다.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전개되어 갔지만, 이제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예수의 복음을 믿는 자들은 모두 다 새 이스라엘 곧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있게 된 것이다(마 8:1-17, 주제 강해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원 관계' 참조). 기타 본 비유의 배경과 주제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마태복음 평행 부분의 강해를 참조하라.
* 근동에서의 포도 지배. 팔레스틴은 날씨가 맑고 늦여름 밤에는 많은 이슬이 내리는 기후이기 때문에 포도나무를 재배하시기에 알맞은 곳이다. 따라서 팔레스틴에서는 매우 일찍부터 포도나무가 재배되어 왔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에 이미 그곳은 포도나무 재배지로 많이 사용되고 있었다.
(1) 포도원의 위치. 포도원은 대체로 산중턱에 만들어졌는데, 이는 그곳이 햇볕을 직접 받기에 가장 좋은 위치였기 때문이다(렘 31:5;암 9:13). 물론 그렇다고 모든 포도원들이 다 산중턱에 자리잡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몇몇 중요한 포도원들은 에스드렐론 평원이나 여리고 주변 같은 평원에 자리잡고 있기도 했다. 포도나무는 모래흙이나 푸석푸석한 흙에서 잘 자라며, 낮에는 햇빛과 공기를 필요로 하고, 밤에는 이슬을 필요로 한다. 성지에서 유명했던 포두 산지로는 산이 많은 헤브론 근처와 북족 레바논 산기슭 등을 들 수 있다.
(2) 포도원의 설치. 산중턱에 포도밭을 만들 때에는 작은 돌벽을 산허리를 따라 쌓아 흙이 밀려 내려오는 것을 막았다. 포도원 둘레에는 짐승이나 도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울타리를 쳤으며(시 80:12, 13;마 21:33), 이들은 경계하기 위해 중앙에 망대를 세웠다(사 5:2;마 21:33). 그리고 포도주를 만들기 위한 일종의 착즙기인 술틀을 짜 만들었다(사 5:2). 이술틀은 보통 단단한 바위를 깎은 후 거기다 역청을 바른 것이었다.
(3) 포도 재배 및 수확. 포도원은 다른 농경에 비해 비고적 더 힘들고 규칙적인 노동을 필요로 한다. 땅을 파고 돌을 제거하고 다시 땅을 고른 후에 보통 세 보(步) 간격으로 가지런히 줄을 지어 포도나무를 심었다. 포도 송이가 완전히 영글도록 자라나게 하려면 3년 정도가 경과되어야 하므로, 어린 나무는 가지를 쳐 손질해 줄 필요가 있었다. 또한 봄이 오기 전에 농부는 모든 필요 없는 가지, 병들거나 약한 가지를 제거하여 열매맺는 가지에만 영양이 공급되도록 세심한 배력를 해야 한다(요 15:1-3). 포도나무는 4, 5이 되면 꽃이 피는데, 향기가 매우 짙다. 그리고 보통 7월부터 열매를 맺기 시작하여, 8월에는 익기 시작하고, 9월에는 따게 된다. (4) 포도원의 소작. 포도원의 규모가 클 경우에는 소작을 주기도 했는데, 이 경우 소작인은 포도 수확의 절반 가량을 밭 주인에게 바쳤다. 그리고 수확 때가 되면 주인은 종을 보내여 포도 열매와 건포도 혹은 포도주 등을 거두어 오도록 했다. 본문에 수록된 예수의 비유 또한 이러한 풍습에서 착안된 것이다.
2. 납세와 부활에 관한 논쟁(12:13-27)
심판 경고를 담은 예수의 비유(1-12절)에 이어 유대교 지도자들의 음흉한 반격이 재차 시도되는 내용이다. 이미 앞에서 그들은 권세의 출처를 묻는 질문으로 예수를 올무에 빠뜨리려고 하다가 실패한 바 있거니와(11:27-33) 여기서는 더욱 교묘한 방법을 동원하여 예수를 진퇴양난의 긍지로 몰아넣으려고 시도한다. 본문에는 두 가지 시험적인 질문이 등장하는데, 첫번째 것은(13-17절) 정치적 딜레마(dilemma)를 내포하고 있으며, 두번째 것은(18-27절) 신학적 성격을 띤다. 이 중에서 후자 곧 부활에 관한 논쟁에 관해서는 마 22:23-33 강해를 참조하기 바라며, 여기서는 첫번째 논쟁에다 초점을 맞추어 보기로 하자.
*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 . . 13-17절의 전반적인 내용은 마태복음 평행 부분(마 22:15-22)의 해당 강해에서 다루었다. 따라서 좀더 범위를 축소하여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주님의 지혜로우신 대답을 집중적으로 분석해 보자. 이 대답 속에 내포된 의미를 보다 선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각도에서 상고하는 것이 좋겠다.
(1) 상황적 고찰. 이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께 질문을 들고 나온 당시 상황을고려한 고찰이다. 대적들이 납세에 관한 질문을 예수께 던진 저의는 너무도 명백했다. 그들의 질문에 대해 주께서 '바치라'고 대답하셨다면, 그들은 예수를 매국노라고 은근히 비방하고 나섰을 것이다. 특히 예수를 따라 다녔던 수많은 무리들은 예수를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줄 정치적 메시야로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적들은 예수의 매국적 발언이 추종자들의 불신과 나아가 배신을 초래하게 되리라고 계산하고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주께서 '바치지 말라'고 대답하셨다면, 대적들은 예수를 반역죄로 로마 정부에 고발할 참이었다.
이렇듯 악한 저의를 이미 간파하였기 때문에, 예수는 가부(可否) 간의 직접적 대답을 회피한 채 선뜻 이해하기 힘든 말씀으로 답하셨다. 이 대답이 난해한 이유는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에 관한 정의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적 의미에서 이 세상의 삼라만상은 다 하나님의 것이므로 가이사의 것이 따로 있지 않다. 따라서 예수는 이러한 우회적이고 완곡한 어법으로써 대적들의 음흉한 궤계를 따돌리는 한편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무지한 그들을 은근히 책망하고 계신 것이다.
(2) 원칙론적 고찰. (1) 항이 대적들의 음모가 진행되는 염두에 둔 고찰이라면, 본항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현실관 내지는 국가관에 관한 원칙론적 교훈이라는 측면에서의 고찰이다. 따라서 말씀의 대상이 (1) 항에서는 대적들인 반면 본항에서는 제자들과 나아가 모든 성도들인 셈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복속국이라고 하는 묘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이 말씀을 '국가관'과 접맥시키기가 약간 어색한 감도 있지만, 이 말씀을 다소 확대 해석하면 이러한 주제어로 자연히 연결되게 마련이다. 그리스도인은 천국 시민으로 택함받은 자들이다(빌 3:20).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현실 속의 한 국가의 시민이기도 하다. 이 점에 있어 세상의 국가가 하나님의 신령한 법의 지배를 받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이겠지만, 이 세상에는 별의별 체제가 다 존재하며,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악한 통치자들도 있다. 따라서 현실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있어 대(對)현실과 내지는 대국가관을 확립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에 하늘나라와 이 땅의 국가에 대한 의무를 동시에 부과받게 된 성도가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 살펴보자.
(가) 첫째로는, 우리는 국가 제도가 질서 유지와 공공 복리를 위해 필히 요구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하겠다. 하나님은 무정부의 혼란 상태보다는 그나마 국가라는 제도를 통해 일반 은총적 차원에서 역사를 진행시켜 가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에, 성도들은 법적 권세에 복종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롬 13:1-7, 주제 강해 '시민 복종과 불복종의 한계' 참조).
(나) 두번째로, 만일 국가 혹은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에는, 성도들이 합심하여 복종을 거부하거나 나아가 개혁을 위한 다각도의 노력에 앞장서야 한다. 예컨대,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이방 제국의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면서도 우상 숭배에는 목숨을 걸고 반대하였었다(단 3:8-30;6:16-28). 요컨대, 성도는 머리를 하늘에 두고 있으되 발은 땅에 대고 사는 자로서, 현실의 모든 상황 가운데서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깊이 헤아리는 지혜를 늘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다.
3. 가장 큰 계명(12:28-34)
정치적, 신학적 질문에 이어, 본문의 서기관은 율법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마태복음 평행 부분에 의하면 이 서기관도 역시 예수를 시험하고자 한 것으로 묘사되었으나(마 22:35), 본문상으로는 태도가 자못 진지하며 객관적이다. 당시 랍비들은 율법을 구체적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세부 조항들은 분류해 내었는데, 율법에 부정적 금지 명령 365가지와 긍정적 규정 248가지 등 도합 613개의 조항이 있다고 생각하는 랍비들이 많았다. 또한 그들은 이 많은 율법 조항들 중 보다 중하고 큰 것을 순서별로 구분하거나 거기로부터 보다 상세한 규례들을 도출해내기 위해 논쟁을 벌이는 일이 잦았다. 본문에서 서기관의 질문은 바로 이와 같은 실제적 고민 거리를 해결받고자 하는 심정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특별히 우리는 첫째되는 계명을 묻는 서기관의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 구약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겠다. 예수를 대적했던 유대교 지도자들은 율법 준수에 철처하다고 자처하는 자들이었으며, 본문의 서기관 또한 율법에 대단히 열심을 보이는 사람이었음에 분명하다. 따라서 예수는 대답을 율법 중에서 제시하심으로써, 당신의 가르침이 율법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연장선에서 그것을 완성하며 성취하는 것임을 밝히 주지시키고자 하신 것이다(마 5:17). 주께서 인용하신 구약 말씀은 경건한 유대인들에 의해 조석으로 암송되었던 '쉐마'의 일부(신 6:4, 5)와 레 19:18이다. 이 말씀들이 계명의 근본 원리와 율법의 지향 목표로서 사랑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마 22:34-40강해에서 설명하였다. 여기서는 예수의 대답이 시사하는 의미를 부가적으로 상고해 보기로 하자.
(1) 계명의 적극적 측면을 강조함. 예수는 '~하지 말라'는 투의 부정적 금지 명령 대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적극적 차원의 계명을 으뜸으로 제시하셨다.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에게 있어 율법 계명들은 억지로라도 준수해야 할 무거운 짐이었으며, 심지어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반면에 주께서 가르치신 이 사랑의 새 계명은(요 13:34) 율법의 모든 계명들의 근간(根幹)이 되는 것으로서, 예수께서 이 새로운 사랑의 계명을 제시하신 이유는 보다 완전한 의미에서의 율법을 능동적이며 창조적으로 준수함으로써 참된 가치 실현과 진정한 자유에 이르도록 하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2) 계명의 본질적 측면을 강조함.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배를 위한 형식적 의식 절차는 철저하게 지켰지만 정작 예배를 받으실 분인 하나님을 배제시켰으며, 온갖 잡다한 규례들에 얽매여 있으면서도 정작 사랑을 나누어야 할 이웃을 배제시키고 있었다. 반면에 예수의 이 말씀은 율법의 모든 계명들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껍데기 뿐인 형식주의와 위선에서 벗어나 율법 계명의 본질과 그 지향하는 바를 실천에 옮기도록 권면한다.
* 성경에 나타난 메시야의 칭호. 아담의 본죄 이후 인간들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무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구원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 결과 인간 구원을 위해서 무엇보다 중보자되시는 그리스도 곧 메시야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요청되었다. 성경은 바로 그러한 메시야의 도래를 누누이 예언해 왔으며(구약) 또한 그의 역사적인 초림을 증언해주고(신약) 있다. 여기서 그의 존재, 성품, 상태, 직책 등을 보여 주고 있는 메시야의 이름을 살펴봄으로써 인간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분의 거룩한 뜻과 성역(聖役)을 다시 한번 생각 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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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시야의 칭호 | 성경 구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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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지 | 사 11:1;렘 23:5;슥 3:8;6:12 |
| 감독 | 벧전 2:25 |
| 거룩하게 하시는 자 | 히 3:12 |
| 거룩하신 자 | 눅 4:34;행 3:14;요일 2:20 |
| 거룩한 아들 | 행 4:27 |
| 건축자의 버린 돌 | 시 118:2;벧전 2:7 |
| 겸손한 왕 | 슥 9:9 |
| 꽃 | 아 2:1 |
| 교회의 머리 | 엡 4:15;5:23 |
| 구원의 문 | 요 10:9 |
| 구원하실 자 | 사 59:20;롬 11:26 |
| 구주 | 욥 19:25;사 63:8;눅 2:11;행 13:23 |
| 그리스도 | 마 16:16;갈 3:16 |
| 그 왕 다윗 | 렘 23:5;호 3:5 |
| 기묘 | 사 9:6 |
| 길 | 요 14:6;히 10:20 |
| 남편 | 시 54:5 |
| 눈이 불꽃 같은 자 | 계 2:28 |
| 다윗의 뿌리 | 계 5:5;22:16 |
| 다윗의 열쇠를 가진 자 | 계 3:7 |
| 다윗의 자손 | 마 9:27;21:9;22:42,45 |
| 대언자 | 요일 2:1 |
| 대제사장 | 히 3:1;4:14;5:1;6:20;7:24 |
| 독생자 | 요 1:14, 18;3:16 |
| 돋는 해 | 눅 1:78 |
| 마지막 아담 | 고전 15:45 |
| 만물을 지으신 자 | 요 1:3;골 1:16;히 1:2,10 |
| 만왕의 왕 | 계 17:14;19:16 |
| 만유의 주 | 행 10:36 |
| 만주의 주 | 계 17:14;19:16 |
| 말씀 | 요 1:1;계19:13 |
| 메시야 | 요 1:41 |
| 모사 | 사 9:6 |
| 목자 | 벧전 2:25 |
| 미리 알게 하는 자 | 히 7:20 |
| 믿음의 주 | 히 12:2 |
| 반석 | 민 20:11;고전 10:4 |
| 보배로운 돌 | 벧전 2:4,8 |
| 본 되신 자 | 요 13:15;롬 15:5;벧전 2:21,23 |
| 부활 | 요 11:22 |
| 사도 | 히 3:1 |
| 산돌 | 벧전 2:4 |
| 산 소망 | 벧전 1:3 |
| 새벽별 | 계 22:6 |
| 샘 | 슥 13:1 |
| 생명 | 요 14:6;11:25;골 3:4 |
| 생명의 양식 | 요 6:35,38,51 |
| 생명의 주 | 행 3:15 |
| 선생(랍비) | 12:32;마 8:19;눅 10:25 |
| 선지자 | 신 18:15-18;눅 24:19 |
| 섭정자 | 단 9:25 |
| 세세토록 찬양 받을 자 | 롬 9:5 |
| 승천하신 자 | 히 4:14 |
| 시험하는 돌 | 사 28:16 |
| 신 | 고후 3:17,18 |
| 신실한 증거 | 계 1:5 |
| 아멘 | 계 1:7;3:14 |
| 안실일의 주인 | 요 10:7 |
| 알파와 오메가 | 히 7:22 |
| 양의 문 | 말 3:11 |
| 언약의 보증 | 사 42:1;마 3:17 |
| 언약의 사자 | 슥 13:7 |
| 여호와의 기뻐하시는 자 | 사 42:1,19;52:13 |
| 여호와의 짝된 자 | 슥 13:7 |
| 여호와의 종 | 사 42:1,19;52:13 |
| 여호와의 팔 | 사 53:1 |
| 영광의 왕 | 시 24:7,8 |
| 영광의 주 | 고전 2:8 |
| 영생하신 아버지 | 사 9:6 |
| 예수 | 마 1:21-25 |
| 오실 자 | 히 10:37 |
| 우리의 의 | 렘 23:6 |
| 유대왕 | 마 2:2;눅23:3 |
| 유대 지파의 사자 | 계 5:5 |
| 유월절 양 | 출 12:5;고전 5:7 |
| 의로운 해 | 말 4:2 |
| 이긴 자 | 히 2:15 |
| 이스라엘 왕 | 막 15:32;요 1:49 |
|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 미 5:2 |
| 인자 | 단 7:13;마 8:20;요 1:51 |
| 일곱 별과 일곱 등대를 주장하는 자 | 계 2:1 |
| 일곱 신과 일곱 별을 가진 자 | 계 3:1 |
| 임금 | 행 5:31 |
| 임마누엘 | 사 7:14;마 12:17 |
| 재판장 | 딤후 4:8 |
| 전능하신 하나님 | 사 9:6 |
| 좌우의 날선 검을 가진 자 | 계 2:12 |
| 주 | 1:3;마 3:3;눅 3:4 |
| 죽음에서 먼저 사신 자 | 계 1:5 |
| 중보자 | 딤전 2:5;히 12:24 |
| 지극히 높으신 자 | 단 7:25 |
| 진리 | 요 14:6 |
| 진실하신 이 | 계 3:14 |
| 집의 터 | 고전 3:11 |
| 집 모퉁이의 요긴한 돌 | 시 118:22;사 28:16;엡 2:20;벧전 2:6,7 |
| 착한 종 | 사 42:1;마 12:17 |
| 참빛 | 요 1:9;8:12 |
| 창조의 근원 | 계 3:14 |
| 처음과 나중 | 계 1:17;2:8;21:6;22:13 |
| 청결한 자 | 히 1:3 |
| 크신 하나님 | 딛 2:13 |
| 평강의 왕 | 사 9:6 |
| 포도나무 | 요 15:1 |
| 하나님 | 요 20:28;히 1:8 |
| 하나님의 아들 | 1:11;막 3:17;눅 3:22;요 1:49 |
|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 히 1:3 |
| 하나님의 어린양 | 요 1:29;계 5:6 |
| 하나님의 형상 | 고후 4:4;히 1:3 |
| 하늘에서 내려온 자 | 요 1:13 |
| 흘 | 창 49:10;민 2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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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윗의 주인이신 예수(12:35-37)
지금까지 유대교 지도자들의 난해한 질문 공세를 받았던 예수께서 이제부터는 역(逆)공세를 취하신다. 먼저 예수는 당신의 메시야적 신성을 계시하신 후(35-37절)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호되게 책망하시며(38-40절), 이어서 가난한 과부의 연보하는 모습을 통해 진정한 헌신이 무엇인지를 역설하셨다(41-44절). 본문은 예수께서 다윗과 자신을 비교하는 방법을 통해 당신의 탁월하신 신분을 적극적으로 계시하신 내용이다. 한편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의 유일무이한 탁월성을 명확히 부각시키기 위해 예수를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히 1:1-3), 천사들(히 1:4-14) 그리고 모세(히 3:1-6)와 각기 비교하고 있다.
다윗의 후손 중에서 메시야가 날 것이라는 예언은 구약성경 곳곳에서 발견되며,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사 9:2-7;11:1-9 렘23:5;30:9;33:15, 17, 22;겔 34:23, 24;37:24;호 3:5;암 9:11;마 9:27;12:23;15:22;21:9, 15 등). 하지만 문제는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이냐 아니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다윗의 후손이냐'라는 것이었다. 다윗보다 선재하시며, 또한 우월하신 메시야의 자기 계시인 본문 내용에 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마 22:41-46 강해를 참조하기 바란다.
5.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과부의 두 렙돈(12:38-44)
앞에서(35-37절) 예수는 다윗의 주이신 하나님이 다윗의 후손인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실을 도무지 알지 못했던 당시 사람들의 영적 무지 상태를 완곡하게 책망하셨거니와, 이제 본문에서는 두 가지 대조적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경고하는 내용은(38-40절) 마 23:13-36에서 '일곱 가지 화'로서 신랄하게 나열되므로 그 강해를 참조하기 바란다. 여기서는 41:44절에서 강조된 사항을 상고하는 데에 그치기로 하자.
(1) 전적 헌신에 관한 교훈. 가난한 과부가 바친 두 렙돈의 연보는 하루 품삯의 1/64정도에 불과한 아주 적은 액수였다. 하지만 그 과부에게 있어서는 전재산을 다 바친 것이었다. 하나님은 물량으로 나타나는 외면적 결과보다는 내면과 동기를 더 중요시하는 분이므로(삼상 16:7), 그 두 렙돈을 더 없이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이다. 여유 있고 풍족한 생활을 누리며, 남은 돈으로바치는 연보는 그 액수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생활이 전체에 해당하는 두 렙돈의 연보 만큼 귀하지 않다. 아마도 이 과부는 자신의 가장 귀한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며, 온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순종의 제사로 드리고자 하는 뜻의 표시로서 두 렙돈 곧 가진 바 전부를 바쳤을 것이다(롬 12:1).
이로 미루어 생각컨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봉사를 전폐해야 할 정도로 궁핍한 자란 없다 하겠다. 흔히 우리는 가진 바 달란트가 적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사업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그 달란트를 사장(死藏)시켜 버린다(마 25:18).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제사보다 순종하는 마음이며, 예물의 양보다는 예물을 바치는 자의 정성이다(삼상 15:22). 따라서 우리는 설사 상대적으로 보잘 것 없는 여건에 처해 있다고 하더라도 지레 낙심하거나 자포 자기에 빠질 것이 아니라, 작은 일에 충성함으로써 칭찬받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마 25:21).
(2) 예수의 십자가 희생이 암시됨. 문맥상으로 과부의 헌신적인 연보에 관한 이야기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위선, 탐욕 등과(38-40절) 현저한 대조를 이룸과 아울러, 주께서 인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시는 이야기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을 한다.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어떻게든 존경과 섬김을 받기 위해 온갖 위선적 권위를 다 내세웠던 반면에, 예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수난받는 종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전적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는 데에 할애했다. 13장 이후의 내용을 통해 시시각각으로 박두해 오는 고통스런 십자가를 앞두로서 당신의 일신상의 고통에 연연하기 보다는 오히려 제자들의 영적 깨달음을 위해 노심 초사하시는 예수의 깊고 넓은 배려를 목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