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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5:1,2
이스라엘 나라가 장차 하나님의 벌 받을 일에 대하여, 아모스는 슬퍼하는 의미에서 "애가"를 지어 말한다고 한다. 이스라엘을 "처녀"라고 한 것은, 하나의 시적 표현(詩的表現)이니 정치적(政治的)으로 다른 세력에 삼 키우지 않은 나라라는 뜻을 비유한다고, 벤 켈데렌(Van Gelderen)은 말하였다(Vrij, onbedwongen, niet afhankelijk van eene andere mogendheid. Dit pastougetwijfeld beter). 혹은, 이것이 그 나라의 연약성을 가리킨다고 한다. "엎드러졌음이여". - 불원한 장래에 이스라엘이 당할 환난이 확실하기 때문에, 여기서 이 말이 과거사(過去詞)로 표현된다.
암 5:3
이 귀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많이 죽고 10분의 1만 남을 것을 가리킨다. 그는 이렇게 말하여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비통(悲通)을 느끼게 한다. 강퍅한 자들에게는 위로가 소용없고 다만 그들이 받을 환난을 기억시킴이 필요하다. 이렇게 함이 그들의 회개심을 일으킬 소망이 있다.
암 5: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 여호와를 찾으면 살리라고 한 말씀은, 그들이 여호와를 찾을 때에 생(生)의 현상 유지만 가능하리라는 뜻이 아니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뜻이다(Van Gelderen). "찾"는다 함은 무엇인가? 이것은 전심으로 찾음을 의미한다. 대하 16:9에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 가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하였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다른 것들을 전심으로 찾는다. 월리암 피더의 말을 인용하면, "어떤 아이가 길 가다가 돈 5딸라를 얻은 적이 있었다. 그 아이는 그 후부터 죽을 때까지 길에 다닐 때에는 항상 목을 꾸부리고 땅을 내려다보면서 다녔다. 그 결과로 그는, 단추 29,516개와 바늘 54,172개와 돈 12전을 더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체격은 꾸부러지게 되었고 그의 성질은 인색하여졌다"라고 한다. 이 세상 사람은 이렇게 물질을 탐하여 밤낮 그것을 찾느라고 돌아다닌다. 어떤 섬의 여자들은 물속에 들어가서 해초류(海草類)를 찾기 위하여 물 가운데서 오래 견디는 습성이 생겼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음에 있어서, 이렇게 전심 전력하여 찾음으로 몸과 마음이 그 찾는 노력에 맞추어 영향을 받아 생활 습관이 생겨날 정도라야 한다. "나를 찾으라"함은, (1) 하나님 자신만을 똑바로 찾음이다. 이것은, 하나님 밖에는 아무 다른 것도 찾지 않아야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과 딴 것을 겸하여 찾음을 금한다. 그리고 이것은, (2) 하나님을 찾되 하나님 말씀대로 찾음이다. 또 이것은, (3) 사람이 행복에 이르려고 하나님을 방편으로 찾음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을 찾는 것으로 최후 목적을 삼는 찾음이다. 또 이것은, (4) 자아의식(自我意識)이 있는 자로서 우리 인생더러 자기를 "나"라고 하시면서 우리를 "너"라고 하시는 살아 게신 하나님을 찾음이다. 따라서 이 찾음은 무생 명하고 말 못 하는 우상이나 물질을 찾음이 아니다. 이것은 생명이신 그분을 찾음이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 5절에는 하나님을 잘못 찾는 길로 가지 말라고 금하는 말씀이 나온다. 곧,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부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하였다. 벧엘이나 길갈이나 브엘세바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우상을 위한 지방들이다. 그리고 우리 본문 6절은 또다시 "여호와를 찾으라"라고 하였으니, 그것 역시 하나님을 찾되 바로 찾아야 할 것을 가세(加勢)하여 말함이다. 곧, 계약하시며 계시하시는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이다.
암 5:5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 이것은, 하나님을 찾는데 반대되는 방법을 금지하는 말씀이다. 벧엘은 북쪽 이스라엘 나라에서 여호와를 공경한다는 명목(名目)으로 실상은 우상을 숭배한 곳이고, 길갈도 역시 북쪽 나라의 우상 숭배 처소였다. 부엘세바는 남쪽 나라 유다의 이름난 지방인데(창 21:33, 26:23, 24, 46:1), 후에 이곳도 우상 숭배의 처소가 되었다.
암 5:6
여기서 다시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말씀을 하게 된다. 그것은 4절의 그와 같은 말을 역설하기 위함이다. 4절 주석 참조. 인류 중에 대중은 무엇을 찾는가? 그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고, 모두 다 먹을 것을 찾고 있다. 이것은 아주 위태한 사상이다. 의리(義理)보다 먹을 것을 찾는 것이 결정적인 태도이다. 그들은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는 아모스의 말씀을 모른다(암 8:11). 그들은 자기들의 기갈(飢渴)의 원인조차 모른다. 그러면 여호와를 찾는다는 무리들은 어떠한가? 그들이 과연 여호와를 찾는 표준대로 맞추어 찾는가?
(1) 여호와를 찾음은 어떻게 함인가?
이 일에 있어서 우리는 성경 귀절들을 찾아보기로 하자. 욥 8:5, 6에 말하기를,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라고 하였다. 히 11:6에는,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하였다. 여기 "찾는다"는 말은 간절히 찾음을 의미한다.
사람이 자기의 귀중품을 잃고는 전심으로 찾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지는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하나님 답게 뜨거운 열심히 찾지 않는다. 이 세상 물건도, 그것을 잃은 자가 힘써 찾아야 얻을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잃었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섭섭히 여기신다. 그런데 이제 그가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면서 외식으로만 찾고 간절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또다시 섭섭케 함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가까이하시랴? 하나님을 찾는 이 세상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된다. 누구 14:26에 예수님께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하셨다. 이 말씀 가운데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면서 실상은 가족들 때문에 많은 방해를 받는 고로 다만 역설체(力設體)로 말씀하신 것뿐이다. 그러나 누가 하나님을 참되이 찾았는가?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면서 다 탈선적으로 찾는다.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면서, (1) 하나님만을 찾지 않고 다른 것도 그만큼 존중히 찾으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김이고, (2)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찾으며, (3) 하나님을 찾되 외식으로 찾는다.
(2) 하나님의 진리대로 하나님을 찾으라.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사도를 통하여 하나님 찾는 법을 가르쳐 주셨으니 그것은 곧, 성경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모든 것을 찾는다. 이 세상 모든 엉크러진 일에 있어서도 그 해결을 찾는 비결은, 하나님 말씀에 있다. 사울은, 자기 아버지의 암나귀를 찾아 에브라임 산지와 사알림 땅으로 두루 다녔으며 찾지 못하고 베냐민 땅으로 두루 다니면서도 못 찾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말씀의 사람 사무엘을 찾아갔다가 나귀도 찾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삼상 9:3-10:8).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잃은 모든 것을 찾도록 하여 주시는 동시에 특별히 하나님을 찾게 하여 준다. "저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 "불"은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를 비유한다. "요셉의 집"은 북쪽 나라 이스라엘을 가리킨 명칭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내릴 때에 우상 숭배의 처소인 벧엘은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우상은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
암 5:7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 여기 "인진"은 쓴 풀을 가리킨다. 공의는 감미(甘味) 있는 것이고, 불의를 쓴 것이다. 이 구절에서 아모스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죄악을 꾸짖는다. 그는 죄를 책망함에 있어서 위에서부터 시작한다. 지도자들이 불의를 행함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무서운 줄 모르는 우매(愚昧)이다.
암 5:8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며 백주로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를 찾으라 그 이름이 여호와시니라 - 별들을 지으신 하나님이라면 그의 위대(衛大)를 말함에 가장 적절(適切)하다. 그 이유는, 별들 자체도 거대(巨大)하지만 그것들의 규칙적(規則的)인 운행은 더욱이 놀랄만하다. 이런 일이 우연히 될 수 있으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일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된 것이다. "사망의 그늘"은 깊은 어두움을 이름인데 곧, 음침한 밤이다. 이것은 좋지 못한 시대의 비유이다(욥 10:21, 22, 38:17 ; 렘 13:16 ; 시 23:4).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며 백주로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신"다함은,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공의(公義)를 비유한다. 사망의 그늘과 같은 어둡고 음침한 시대라도, 그는 변환(變換)시켜서 아침과 같이 광명한 시대로 만들 수 있다.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신" 것은, 그가 옛날에 홍수로 심판하신 사실을 기억시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도 역시 심판하시는 능력 있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설혹 이 말씀이 옛날의 홍수 심판과 관련되지 않고, 다만 바다의 조수(潮水)의 물결이 육지에 부딪침을 가리켰다 할지라도,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 능력의 기세(氣勢)를 가리킨다. 조수의 물결이 육지에 넘치는 경우에는, 사람들이 모두 도망할 것 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자비의 덕에 의하여, 그렇게 조수가 육지에 넘어 들어오게까지는 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바다 조수의 움직임을 보아서 하나님의 능력을 알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연계(自然界)를 보고 하나님의 위엄을 깨닫는 것은, 성령과 함께 하는 심령이라야 할 수 있다.
암 5:9
저가 강한 자에게 홀연히 패망이 임하게 하신즉 그 패망이 산성에 미치느니라 - 여호와의 공격(攻擊)은, 강한 자들도 피하거나 막을 수 없으니, 저들이 가장 든든히 방비(防備)한 곳에까지 미친다. 그러므로 여호와 앞에서는 강한 사람이 어디 있으며 강한 나라가 어디 있느냐?
암 5:10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옳은 지도자들의 말을 순종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때에는 지도자들이나 재판자들이 성문에서 판결과 지령을 내렸다. 종교가 부패한 때에는 이렇게 도덕(道德)도 부패한다.
암 5:11,12
이 귀절들은 그때에 이스라엘 나라가 빈민들을 천대하며 착취한 죄와, 및 의인을 억울하게 한 죄를 꾸짖는 말씀이다. 약 2:9, 5:1-6 참조.
암 5:13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 - 여기 이른바 "지혜자"는, 관원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고 건전한 깨달음이 있는 사람을 이름이다(Van Gelderen). 그가 침묵하다 함은, 하나님의 심판이 올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이 침묵은 차라리 그가 저 불의한 자들의 불의에 항거(抗拒)하여 꾸짖기를 멈추었다는 뜻이다. 우리 주님도 원수들의 강퍅한 악행 앞에서 아무 답변도 없이 침묵하셨다(마 27:12-14).
암 5:14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 이것은 "선(善)" 자체가 생명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하나님은 악과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는 것만큼, 하나님을 모시기 위하여(하나님을 찾는데 도움이 되기 위하여) 선을 행하라는 뜻이가. 이 사실은 7-12절의 말씀 내용이 잘 보여준다. 곧, 모든 불의를 하나님이 벌하신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오늘날 신자들 중에 "주여 주여"하면서 거짓된 행위를 일삼는 자들이 어떻게 많은지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시 5:4에 말하기를,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잠 11:27에 말하기를,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라 했고, 잠 12:2에는 "선인은 여호와께 은총을 받으려니와"라고 하였다. 또 15:3에는,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라고 하였다. 선을 찾지 않는 자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 잠 15:29에 말하기를,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라고 하였고, 사 1:11-15에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라고 하였다.
암 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찌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 아모스가 그때 이스라엘 중에서 발견한 큰 죄악은, 재판을 공의롭게 하지 아니하여 백성을 억울하게 하는 죄악이었다. 12절 참조. 여기 이른바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라는 말씀이 그와 같은 죄악을 시정(是正)하라는 의미이다. "성문"이란 것은 재판정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렇게 재판상 선악을 바로 판단하기 위하여 먼저 필요한 것은,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심령상 준비이다. 이런 내부적 심령의 준비가 없으면 재판상 선악에 대한 판단을 바로 내릴만한 용단을 못가진다(J. Ridderbos).
"남은 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이 올 때에 망하지 아니하고 남아 있는 백성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명칭은 특별히 이사야서에 많다(사 6:13, 10:21-23). 욜 2:32 참조. 그런데 "요셉의 남은 자"라는 말은, 북국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의미한다. 여기서 요셉은 북국을 대표한 명칭이다. 하나님께서는 진노 중에도 긍휼을 기억하신다. 특별히 진노하에 있는 백성이 회개하고 바로 설 때에 하나님께서는 더욱 긍휼을 베푸신다.
암 5:16,17 이 귀절들은, 이스라엘이 받을 피할 수 없는 심판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 백성이 얼마나 비극에 빠질 것을 힘껏 말하여 준다.
"광장"(廣場)과 "거리에서"우는 것은 시가지(市街地)의 애곡을 이름이고,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 하게" 한다는 것, 또는 "포도원에서" 운다는 것은 농촌의 비애를 의미한다.
"울음군을 불러다가 울게" 한다는 것은, 그 때의 풍속이었다. 곧, 슬픔을 최대 한 도로 표시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삯을 주고 울게 하였던 것이다.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니라" - 이 말씀 뜻은, 여호와께서 염병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실 것을 가리킨다.
암 5:18-20
아모스는 여기서 외식하는 이스라엘에게는 여호와의 심판날이 재앙의 날임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외식하는 종교가 들은 생각하기를, 여호와의 심판날이 이방인들에게는 멸망을 가져와도 자기들은 구원을 받을 줄로 생각하고 사모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나 외식하는 종교가들의 심리다. 그들은 실생활에 있어서 진실한 신앙생활은 하지 않고, 다만 외부적인 종교적 특전(特典)을 의지하여 가지고 멸망의 심판을 면할 줄로 생각한다. 이와 같은 그릇된 사상을 세례 요한도 책망하였다. 마 3:7-10 참조. 아모스는 저런 외식자들에게 심판의 날을 어두움의 날이라고 외친다. 그뿐 아니라 그날에는, 저들이 멸망을 피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라고 외쳤다. 칼빈은 이 점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하나님의 참된 자녀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흐리운 날이 얼른 개일 것을 내다보면서 신앙으로 위로를 얻는다. 과연 주님께서 저들에게 잠깐 동안 이 세상 고난으로 벌하시나 필경은 그 진노를 해제시킨다. 그러나 외식자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이리 피하여 필경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줄 아나, 하나님의 위로가 없어서 필경은 더욱 어려운 지경에 빠진다"라고 하였다(抄譯). 외식자는 역정을 당할 때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줄 모르고 자기 힘으로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줄 알고 어디까지든지 자기의 재주를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재앙을 피할수록 또다시 다른 재앙에 걸린다. 그들이 외식을 회개하는 때에야 재앙이 그친다.
암 5:21-23
이 귀절들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외식하는 종교가들의 성대한 종교의식을 미워하신다. 그것은 이사야도 밝히 말하였다. 사 1:11-17 참조. 여기 "노래 소리......비파 소리"는, 성전에서 예배드릴 때에 취하였던 것이다(대상 16:4, 23:5, 25장). 하나님께서 제사와 절기를 제정하신 것은, 사람들이 신앙과 회개의 표현으로서 그것들을 가지도록 하신 것이다. 신앙과 회개의 표현이 아닌 종교의식이란 것은, 모두 다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것이다. 신앙과 회개는 하나님의 공법과 정의를 사모(思募)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다음 구절(24절)에 아모스는 말하기를,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지로다"라고 하였다.
암 5:24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 혹설에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범죄 한 이스라엘을 공법에 의하여 강한 세력으로 심판하시겠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보다도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더러 공의를 행하라는 권면이다. 종교의 형식만 가지는 것은 도리어 가증스러운 일이니(21-23) 공의를 소유하는 것이 진정한 종교의 생명이다(약 2:26). "물같이...... 하수 같이 흘릴지로다"라고 한 말씀은 공법으로 하여금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고 실현되도록 하라는 뜻이다(J. Ridderbos, De uitdrukking, datrecht en gerechtigheid moeten voortrollen als een krachtig stromende beek, will dan verder zeggen, dat zij hun vrijen loop moeten hebben, door niets gestuit ; in tegentelling met den bestaanden toestand, waarin ze vaak voor allerlei overwegingen op zij worden gezet. - De kleine Profeten, p. 222).
암 5:25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하나님에게 희생과 소제물을 형식상으로 드리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이 겸하여 우상을 섬기는 일이 있었던 만큼, 하나님께서 그들의 종교 행위를 참된 것으로 인정하시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구절과 같이 말씀하셨다.
암 5:26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 클라크(Clarke)에 의하면, "너희 왕 식굿"이라는 것은 실상 너희의 몰록(Molock)의 장막이란 뜻이니 곧, 몰록이라는 이방 신(異邦神)의 사당(祠堂)을 이름이고, "기윤"은 별을 섬기기 위한 신상(神像)이라고 한다. 이 구절에 대하여 나의 사도행전 주석 P. 172-173을 참조하여라. "지고 가리라"는 뜻은,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저런 우상들을 가지고 다닌 사실을 이름이다.
암 5:27
여기서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이 앗수르 나라에 사로 잡혀 갈 것을 예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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