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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2:1
이 귀절과 다음 절은, 기독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행할 것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 곧, 이제부터 할 말씀은, 바울이 이때까지 말해 온 교리 전부를 받아서 내린 결론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산데이(Sanday)는, 이것이, 바로 위(11장)에 진술된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에 대한 결론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 이것은, 사도의 권면이 강요(强要)가 아니고 그저 하나님의 긍휼에 의하여 협의적(協議的)으로 유순히 권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긍휼이 저렇게 큰 줄 아는 로마의 신자들은, 으례 감격하여 하나님께 봉사할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향한 사도의 권면은, 저 크나 큰 하나님의 긍휼을 기억시킨다.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 여기서 "몸"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으니, 인격의 중심인 마음은 빼놓아도 된다는 말인가? 물론 그런 의미가 아니다. "몸"(쏘마)은, 여기서 인간의 생리적 신체(生理的身體)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서 영혼 없는 몸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이 여기서 가르치는 것은, 기독 신자가 이상(理想)으로만 하나님 봉사를 꿈꾸지 말고, "몸"으로 거룩되이 구체적 생활(具體的生活)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제사는, 그것이 이 아래 말씀과 같이 "거룩한 산 제사"인 점에서 성립된다. "거룩함"은 신자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동시에 도덕적 불결이 없음을 말함이고, "산제사"는 죄로 죽었던 자가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을 향하여 바로 삶을 가리킨다(9:1-3).
영적 예배니라 - "영적 예배"란 말은 헬라 원어로 '로기켄 라트레이안인데', 이에 대하여 두 가지 해석이 있다. (1)구약의 외부적인 의식적 예배(意識的禮拜)와 다르게 영적 예배(靈的禮拜)를 말함(요4:24). (2) 이것은 이성(理性)없는 짐승을 드리는 예배가 아니고 이성 있는 인간 자신이 제물이 되어지는 예배의 의미라고 한다.
롬 12:2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 여기 "본받는다"는 말은 헬라 원어로 '쉬스케마티제스데' 인데, 피상적(皮相的)으로 움직이는 생활을 말함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이 세상 표준에 맞추는, 깊이가 없고 생명이 없는 육체적 생활이다. 따라서 그것은 죄에 대한 근본적 회개는 없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생활 근거를 두지 않고, 이 세상에서나 살고 말려는 임시 봉합술(臨時縫合術)에 불과하다. 이것은 기독교 신자가 가질 생활이 아니다. 이런 피상적 행동 원리와 반대되는 것은,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음이다. "변화를 받아"라고 한 말은, 근본적이고 내부적(內部的)인 변화를 말함이다. 이것은, 윗말과 반대로 내세의 표준에 맞는 깊이 있는 생활이다. 리츠만(Lietzmann)은, 이 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곧, "너희는 이런 방식(근본적 변화 받은 행동 원리)으로 행하여라. 그 이유는, 너희는 내세에 있게 되는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이것은, 변화를 받은 생활의 결과이다. 인간이, 영적 생활의 심각성(深刻性)이 없이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한다. "선하다"함은, 도덕적으로 합당하다는 의미만 아니라, 구원 성취에 유익하다는 의미도 가진다(7:18, 8:28). "기뻐하시고"란 말은, 위에 나온"선"에 대한 설명이다. "선"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이다. "선"의 표준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온전하다"함은, 절대적으로 참되고 선한 것이기 때문에 변할 수도 없고 깨어질 수도 없는 것이다.
"분별하도록."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노력은, 그것을 순종하기 위한 것이다. 진심으로 순종할 마음이 없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알려지지도 않는다(요 7:17). 그 이유는, 하나님은, 그의 뜻을 맹목적으로 알고자 하는 자를 배척하시는 거룩하시고 살아 계신 심판주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학교라고도 할 수 있다(Moody).
롬 12:3
여기서부터 21절까지는, "교회"라는 단체 생활의 도덕률(道德律)들을 열거(列擧)한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 각각 자기가 받은 은혜의 분수에 넘지 말라는 교훈 초두에, 바울은 자신부터 모본을 보인다. 그는, 여기서 자기의 받은 은혜에 의하여 교훈한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 "믿음의 분량"이란 말 은, 신앙의 강약(强弱)을 말함이 아니고, 은사의 성질을 가리킨다(Greijdanus).다시 말하면, 각 개인이 받은 직능(職能)의 차이를 말함이다(H. Ridderbos). 겸손이란 것은, 자기의 분수를 지킴이다. 혹시 사람이 자기의 분수에서 물러가는 것도 참된 겸손이 아니고 무책임한 일이다.
지혜롭게 생각하라 - 이 말의 헬라 원어는, "정신 차려 생각하라"는 의미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바로 알지 못하는 자는, 정신 없는 자와 같다.
롬 12:4,5
한 몸에 많은 지체 - 기독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있어서 자기가 한개의 지체 밖에 못되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한 개의 지체라고 생각하는 자는, (1) 그 자신이 남들 없이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며, (2) 남들도 같은 몸에 붙은 지체들인 만큼, 그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롬 12:6
은사가 각각 다르니 - 하나님께서 지체들(각 개인 신자들)에게 은혜를 주시되 각각 다르게 하신 목적은, 서로 화합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신자들이 각기 딴 직능으로 각기 제 자리에 있어서 봉공(奉公)하면, 서로 충돌이 없고 도리어 아름다운 조화(調和)를 이룬다.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 "예언"은 무엇인가? 사도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들은, (1)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어떤 특별한 사건을 예고하였으며(행 11;28, 21:11). (2)그들도(혹은 그들 중 어떤 이들) 하나님 백성의 구원을 위한 교역(敎役)도 하였으며 (고전 14:3), (3) 그들의 사역도 사도들의 사역과 함께 신약 교회의 기초를 이루었다
(엡 2:20; 고전 12:28). 예언 사역은, 사도의 사역처럼 계시 시대(사도 시대)에만 있었던 단회적(單回的)인 것이다.
교회 시대에는, 예언의 후신(後身)으로서 설교가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양자(兩者)의 작용이 같기 때문이다. 예언이 건덕, 권면, 안위를 그 작용으로 한 것인 만큼(고전 14:3), 설교도 그러하다. 다만 에언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초자연적으로 그에게 찾아 왔으나, 설교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자신이 하나님 말씀(성경)으로 나아가야 한다. 곧, 설교자는, 말씀의 청지기란 말이다. 그는 사도와 선지자를 통하여 교회에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이다(고전 4:1-2; 딛1:7). 다시 말하면, 설교자는 기독교의 터를 닦는 자가 아니고, 사도와 선지자가 닦아 놓은 터(고전 3:10-11) 곧,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설명(성경)을 근거하여 교회를 세우는 자이다. 설교자는, (1) 맡겨진 터와 자재(資材) 곧, 성경을 그대로 보수할 책임이 있고, (2) 그 터와 그 자재를 가지고 집 지을(교회 세울) 책임도 있다. 그가 성경의 말씀을 전파하며 가르치는 것이, 바로 그 일이다. 그는, 말씀을 전파할 때에 자기의 구미에 맞는 것만 골라서 할 것이 아니고, 성경 말씀 전부를 전할 책임이 있다.
현대 교회에도 예언이 있다는 이들이 있다. 만일 예언같은 것이 오늘날도 나타난다면,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될 것인가? (1) 그 예언이 맞지 않을 경우에 그것을 배척하기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2) 그 예언이 사실과 부합할 때에는 우리로서 그것을 거부(拒否)하기가 곤란할 듯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우에도,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까) 그 예언이 맞아도, 그것이 거짓된 예언일 수 있으니(신 13:2), 하나님의 명령대로(요일 4:1) 착실히 영들을 시험하며 지나보아야 된다. 그것을 시험하며 지나보는 일에 오랜 세월이 걸릴 수도 있다. 신자가 미혹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영들을 시험하는 것이 오히려 경건한 행동이다. 신13:1-3에 말하기를,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고 하였다. (다) 사단의 사자도 복음을 높이는체 하며(행 16:16-17), 또한 도덕적으로 사람을 대할수도 있다 (고후 11:14, 15; 마 7:15). 우리가 이렇게 현대의 예언이란 것을 시험해 봄이, 우리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는 현대의 예언보다 성경이 권위(權威)있으며, 또한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롬 15:4).
믿음의 분수대로 - 이 말의 헬라 원어는 다음과 같이 개역 되어야 한다. 곧, "그 믿음의 추론(推論)에 의하여"라고 할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1) 예언자가 자기의 소유한 신앙에 맞도록 예언 행위를 해야 된다는 뜻 이라고 함(Th. Zahn, dass der Prophet in der Ausubung dieses Charisma das richtige Verhaltnis zu dem Glauben, den er hat, bewahre und nicht daruber hinausgeht. - Brief d. Paul. a.d. Romer, S. 544). (2) 예언을 하되 신앙과 관련있게 해야 된다는 뜻이라고 함(Luther). 이 해석은 "분수"란 말을 "관련" 혹은 유사(類似)의 뜻으로 보았다. 곧, 예언 형태가 사람의 사상이나 경험 정도의 것이 아니고, 믿음을 발생시키며 또 믿음으로야 받을 수 있는 초경험적(超經驗的) 성격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다(Vorlesung uber den Romerbrief pp. 380-382).
이 문구의 "믿음"이란 말에 "그"란 관사(冠詞)가 붙어 있어서, "그 믿음"이라고 한다. "그 믿음"이란 것은, 예언자 자신의 심리적 신앙(心理的信仰)을 뜻하지 않고, 신조(信條)와 같은 객관적 표준(客觀的標準)을 말함이다(Greijdanus).
롬 12: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 이 훈시(訓示)들에는, 특수 주의건(特殊注意件)이 부가되지 않은 듯이 보인다. 그러나 주의건이 전연 없는 것은 아니다. 일례를 들면, 여기 "섬기는 이는 섬기는 일로"란 말은, 이런일을 맡은 사람이 자기의 직무만을 담당하고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의미한다. "가르치는 자"는 선지자와 다르다. 선지자는 주로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받아 전하는 자요, "가르치는 자"는 선지자가 전한 진리를 해석하며 반포한다.
롬 12:8
권위하는 자 - 이 직분의 사역은, 사람의 양심과 감정 방면에 운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은, 목회자가 힘써 바로 잘 해야 될 일이다.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 "성실함"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하플로테스인데', "단순"을 의미한다. 가난한 자에게 무엇을 주는 자는, 그 주는 동기(動機)에 있어서 불순해지기 쉽다. 혹 인색한 마음으로, 혹 갚음을 받을 생각으로, 혹 명예심으로 구제하기 쉽다. 그런 순진하지 못한 구제 행위는 구제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 "다스리는 자"란 말의 어원적(語源的)의미는, "친절히 구는 자" 혹은 "보호자"이다. 다스리는 자는 남들에게 친절히 하는 능이 있어야 한다. 대중을 관리하는 자는 자기 한 개인의 짐만 지는 자가 아니고, 그 많은 사람의 짐을 지는 자이다. 높은 지위에 앉음이 지도자의 자격이 아니고, 그 많은 사람의 짐을 지는 자이다. 높은 지위에 앉음이 지도자의 자격이 아니고, 모든 짐을 지는 것이 지도자의 자격이다. 그러므로 이 일을 맡은 자는 근면해야 된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 남을 도와 주는 자가 일시적으로 열심을 내다가 중도에 불쾌한 기분을 보이면, 그것은 그 도움을 받는 상대방에게 불안과 불쾌를 준다. 모처럼 남을 도와 주다가 도리어 남을 불쾌하게 하면, 피차 간에 덕이 못된다. 그런 실수는 사람마다 하기 쉬운고로, 사도는 여기서 주의건을 특서(特書)한 것이다. 고후 9:7 참조.
롬 12: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 이와 같은 교훈은 성경에 많다. 고후 6:6; 딤전 1:5; 벧전 1:22 참조.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함"은, 거짓 없는 사랑의 실행 방법이다. 우리들은, 남을 사랑하노라고 하다가 그 사람의 죄악에도 타협하기 쉽다. 그런 사랑은 그 가치를 보아 사랑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 신자는, 사랑하는 자가 악을 행할 때에는 그를 충고하면서 도와준다.
롬 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 이것을 헬라 원어에서 직역하면, "형제애에 있어서 서로 우애하며, 존경에 있어서 서로 먼저 하며"이다. 형제애란 말은 헬라 원어로 필라델피아이다. 앞절의 "사랑"(아가페)은 법적인 것이고, 여기 말한 "형제 사랑"은 열정적이고 친화력(親和力)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가페가 있는 동시에 필라델피아도 있어야 된다. "우애"는 헬라 원어로 필로스톨고이인데, 한 가족과 같이 영적 인연에 서로 끌려 사모하는 사랑을 의미한다.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우리는 남에게 먼저 존경하기를 힘써야 된다. 그리해야 사랑도 계속된다. 서로 친한 사이라도 자주 무례히 하면 우애도 깨어진다. 그러므로 오래토록 친구를 존경함은, 사랑을 보호하고 양육시키는 성곽과 같다. 빌 2:3참조.
롬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 여기 이 문구에 대하여 생각할 만한 것 몇 가지가 있다. (1) 여기 말한 근면과 열심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주님을 위한 것이다. 기독 신자는 그의 사업이나 활동에서 주님만 위한다. 모든 죄악은 게으른 자의 마음 속에 발육되어 나타난다. 죄를 덜 지으려면 부지런히 일해야 된다. (2) "열심을 품고"란 말은 "끓는 심령으로"란 의미이니, 열중한 정신 상태이다. 그러나 끓는다고 해서 그것은 꼭 끊임 없는 심리적 긴장(心理的緊張)이 아니다. 끊임 없는 심리적 긴장은, 멀지 않아 그 심신(心身)에 파상(破傷)을 가져온다. 끓는 심령은 혹시 심리적 또는 생리적 휴식으로도 나타난다. 적당한 휴식은 선한 일을 하기 위한 준비인것 만큼, 그것도 방심이나 방종은 아니다.
여기 "주"란 말은 사본상 차이(寫本上差異)를 가진다. "주"라고한 것은 X,A,B,E,L,P 등의 사구(寫句)이다. 그 대신으로 "때"라고한 사구도 있으니 D,F,G 등의 것이다. 산데이(Sanday)는 이 둘째 것을 오사(誤寫)로 보았으나, 바르트(K. Barth)는 그것을 택하였다. 바르트(K. Barth)가 그 둘째 것을 택함은 그의 신학 사상에 잘 맞는 까닭인 듯하다. 그는 이 사구 아래에 다음과 같은 해석을 붙였다. 곧, "현재와 찰나(刹那 = "때"란 뜻)의 위기 속에 몸을 던져라, 거기 결정이 있다"고 하였다(Romerbrief, pp. 441-442). 이것은 위기 신학에서 항상 말하는 실존 사색(實存思索)이니, 우리가 받을 수 없는 신학 사상이다.
롬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란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 기독 신자는 "소망 중에 즐거움"을 가지는 자이다. 평시에도 성령으로부터 오는 기쁨이 그에게 있다.
그러나 환란 가운데서도, 그는 내세의 소망을 기억하고 기뻐한다. "환란 중에 참음"은, 위에 말한 "소망 중에 즐거워함"을 가능케 하고(5:3-4). "기도를 항상 힘씀"은,"환란 중에 참음"을 가능케 한다(약 5:13상반).
롬 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 곧, 그 때의 핍박이나 흉년으로 인하여 곤궁한 처지에 빠진 신자들을 친절히 대접하라는 뜻이다. "공급" 이란 말은 "의 좋게 융통하여 나눔"을 의미한다. 기독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한 지체니 만큼, 그 무슨 소유든지 다른 지체에 나눠 주어야 한다. 어떤 사본(D,F,G,L)에는, 여기 "쓸 것"이란 말이 "기념할 것"이라고 씌어 있다. 그러나 "쓸 것"이란 사구(寫句)가 모든 강한 사본들에 있다. "기념할 것"이란 사구는, 오사(誤寫)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곧, 이 사구는,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풍속이 생기게 된 후대(後代)에 잘못 베낀 것이겠다.
롬 12:14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 하나님의 복음은 사람들의 죄악을 공격하는 것인 만큼,복음이 바로 전파될수록 핍박이 일어나는 법이다. 그러므로 그 핍박은, 은혜가 임하는 길에 일어나는 파문(波紋)에 불과하다. 그것은 은혜의 권내(圈內)에 있다. 아니,그것은 은혜이다. 누구든지 그것을 잘 참고 나가면, 생명과(生命果)를 먹는 것 같은 기쁜 일을 당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사랑을 말함에 있어서, 성도 사랑으로부터 나그네 사랑, 그 다음에는 원수 사랑에 도달한다. 이렇게 사랑은 점층적(漸層的)으로 절정(絶頂)에 이른다. 기독 신자가 그 원수의 행위는 미워해야 되겠지만, 그 원수의 영혼은 우려하여 잘 되도록 축복해 주어야 한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윌리암.톤스(Sir William Tones)의 시(詩)를 기억한다. 곧, "저 동양의 진주에서 원수 사랑을 배워라, 네게 재앙을 가져오는 손에 진주를 뿌려 주어라. 저 바위 같은, 비열한 복수적 교만을 떠나고, 네 옆을 찌르는 손목에 보석을 단장해 주어라. 저 나무가 석벽(石壁)에서라도 단 맛 있는 열매와 향기 있는 꽃을 내어 주도다. 자연은 다 이렇게 외치는데, 인생치고 이보다 부족하랴! 너를 치는 자를 치료해 주고 욕하는 자를 축복할 뿐이다"(Learn from you Orient shell to love thy foe, and strew with pearls the hand that brings the woe. Free like your rock, from base vindicative pride. Enlace with gems the wist that rends thy side. Mark where your tree rewards the stony shower with fruit nectareous or the balmy flower. Al nature calls aloud. Shall man do less than heal the smiter and the railer bless!).
악으로 악을 갚는 것은, 악하여 악을 더 만드는 것이다. 우리 본문에 축복하라는 말이 두 번 있으니, 이 중복체(重複體)는, 원수를 축복해야 할 것을 역설하는 의미이다.
롬 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 이것은 동정(同情)의도덕이니, 무슨 물질적 형태로만 실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남을 동정하는 자가, 물질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라도 뜨거운 사랑만 나타낸다면, 상대방은 그것을 느끼는 동시에 큰 힘을 얻는다. (1) 우리가 그렇게 동정하면, 사랑을 증가(增加)시키는 동시에 하나님께 감사를 더 많이 하게 되며, (2) 특별히 우리가 다른 사람의 경건하고 의로운 즐거움에 동참하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즐거움이 되고 또한 하나님의 상급도 받는다.
롬 12: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 사람의 가치는, 그 재능에 달린 것이 아니고 영혼에 달렸다. 영혼 없는 사람이 없으며, 또 죄 없는 영혼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 신자는, 자기만은 의인(義人)이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지 않아야 된다. 그는 남들과 꼭 같은 죄인인 줄 알고, 그들과 합심하도록 힘써야 된다.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 이것은, 마음을 같이 하는 방법을 가르친 말씀이다. 이 말씀은, (1) 높은 소망, 곧, 하늘의 소망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2) 아직 알지 못하는 높은 진리를 알아 보려고 사모하지 말라는 의미도 아니며, (3) 세상이 높다고 생각하는 지위를 취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기독 신자도, 하나님의 뜻에 맞는 대로 높은 지위에서 봉사할 수도 있다. (4) 이 말씀의 뜻은, 그 지위가 어디 있는지 그 심령과 처신이 교만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 산데이(Sanday)는 말하기를, "네 육신을 미천한자들의 자리에로 끌어 넣고 그들과 같이 걸어라. 마음으로만 겸손하지 말고 실제로 그들을 도와라. 네 손을 그들에게 내어 밀어라"고 하였다. 그리고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말하기를, "진정한 사람은 누더기 가운데서 살면서라도 그것을 은혜로 안다. 그 이유는, 보석은 진흙 가운데서도 보석인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스스로 지혜 있는체 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지 않고 자율 사색(自律思索)을 가짐이니, 이는 실로 불신앙 사상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는 악한 사상이다. 복음을 믿는 자는, 마땅히 어린 아이와 같은 성품을 가져야 한다. 곧, 그는, 어린 아이가 자기의 무엇을 믿지 않고 오직 그 부모를 믿고 사는 것처럼, 하나님만 믿어야 한다.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 여기 "악에게 지지말고"란 문구를 주의해야된다. "악에게"라 하고, "악인에게"라고는 하지 않았다. 원수가 우리를 침해한 때에 우리 마음에는 복수 감정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악이다. 우리는, 그 때에 그 감정에게 삼키우거나 정복을 당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그 감정을 이길 때에, 그 원수의 악독이 역시 감손(減損)된다. 그 원수는 점점 친구가 되어질 수도 있다.
롬 12:17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 이것은 복수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벌써 내편에서 해를 받은 경우엔 보복하지 말지니, 그 이유는, (1)그것이 하나님의 행동 원리를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할 바가 아니기 때문임, 하나님은 원수라도 오래 참으시고 악인에게도 비를 주시며 빛을 주신다. (2) 원수 갚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임. (3) 우리가 억울한 것을 보복하려다가 과도한 폐단을 연출하기 때문임. 우리는, 똑바르게 보복할 수 있는 의롭고 능한 재판장이 아니다. (4) 원수 갚지 않는 것이, 악을 방지시키는 귀한 방편 중의 하나가 될수도 있기 때문임. (5) 원수를 갚지 아니하므로, 그 원수를 내 친구로 삼을 수도 있기 때문임. (6) 보복하는 행동을 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원수의 모욕을 유순으로 받으면, 마치, 던져진 돌이 솜 무더기에 떨어짐과 같이된다"(Matthew Henry). 그런 경우에, 그 원수가 감화를 받거나 혹은 권태를 느껴서 그 악행을 그만 두는 적도 있다.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곧, 기독 신자는 원수를 갚지 않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선한 일을 미리 생각하며 예비하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원수를 갚지 않는 정도만으로는 족한 것이 아니다. 그만한 정도로는, 아직 우리 속에 원수에 대한 원심(怨心)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위태한 벼랑에 붙은 사람은, 위로 올라가서 안전한 곳에 서도록 힘써야 된다. 그가 그리하지 않고 그 위태한 자리에 붙었다가는, 미끄러져 떨어지기 쉬운 것이다. 우리가 원수를 갚지 않으려면, 원수를 선대하는 방법을 미리 강구하고 또 힘써야 된다. 여기 "도모하라"함은, 나를 원수로 대하는 사람에게도 선을 행하려고 미리 예비하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무슨 일에나 예비가 없으면 실패하기 쉬우니, 예비 없이 원수 앞에서 선을 행하기가 용이하랴?
롬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 여기 "할 수 있거든"(에이 뒤나톤)이란 말에 대하여, 우리가 생각할 뜻이 몇 가지 있다. (1) 이 말은, 행위자(行爲者)의 가능성을 아끼라는 의미가 아니고, 그 가능성을 다하라는 의미이다. (2)이 말은, 진리를 거스리지 않는 한에 있어서 평화를 힘쓰라는 조건적 화목을 의미할것이다. 바울은, 진리를 그르치는 사람들에 대하여는 얼마든지 항의할 것이다. 하찌(Hodge)는 말하기를, "보다 큰 문제에 잘못될 것이 없는 한에 있어서, 우리는 평화를힘써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너희로서는"이란 말(토 엑스 휘몬)은, "너희가 관계할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문구의 의미는, 우리가 화목을 힘쓰되, 우리의 할 수 있는 일은 다 행하여 보도록 힘써야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 점에 몇 가지 기억할 것이 있다. (1) 우리가 평화를 힘쓰되 상대편에서 응하지 않아서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그 책임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 (2) 우리가 화목하기 위하여 인륜상 도의(人倫上道義)는 다 할 것이지만, 중대한 진리 문제에 위배된 상대방의 그릇된 주장 때문에 피차 화목이 안되어진다면, 그 책임은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피차간 화목을 이루도록 최대한도의 노력은 해야 된다. 러스킨(Ruskin)은 말하기를, "평화는 저절로, 호운(好運)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죄를 이기는 승리로만 얻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하기를 "화평함을 좇으라"고 하였으며 (히 12:14),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였다(엡 4:3).
롬 12:19
이 귀절의 뜻은, 원수 갚는 일(상선 벌악의 일)은 심판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인간으로서는 상관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원수의 패망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 이것은 헬라 원어로 '아가페토이'니,개역하면, "사랑을 입은 자들아"라고 함이 옳다. 사랑함을 입었다 함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주시는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다.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 여기 "진노하심에 맡기라" 고 하는 말을 직역(直譯)하면, "진노에게 자리를 주어라"(Give place to the wrath)이다. 곧,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심판 주재권(審判主宰權)을 침범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롬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 여기 "먹이고"란 말은 헬라 원어로 프소-미제인데, "조심하여 많이 먹이라"는 뜻이다. 기독 신자는, 상심(傷心)한 자에게 음식을 줄 때에 주의 깊이 친절히 주어야 할 것이다. 크랜머Cranmer)감독은, 자기에게 잘하는 자들을 좋은 친구로 만들었다고 한다.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 이것은 잠 25:21, 22에서 온 말씀이다.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후대하면, 그 원수는 불에 녹듯이 변하여 우리의 새로운 친구가 되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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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리스도인으로 실행의 지침 12:1-15:13
로마서 12:1
영적 예배를 드리는 실행에 대한부분에 대하여
성도가 받은 교리이후 첫 번째 몸의 생활을 실행하는 지침서의 내용이다.
1. 그러므로
그러므로는 1-8장의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믿음으로 거룩함에 이르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 영광을 받는 교리와 진리를 받았고 9-11장은 이 진리를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해 승리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통해서 진리를 알게 되었기에 그러므로 라는 뜻이다.
믿음으로 의를 얻고 거룩함에 이르고 영광을 받기 위하여 [그러므로] 이다.
그리스도인이 실행해야하는 지침으로의 말씀이 시작되는 것이 [그러므로] 다.
2. 하나님의 모든 자비로 권하노니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져야 하기에 사랑의 권고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베풀어 주신 은혜를 근거로 권면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그 분의 생명 안으로 이끄시어 주시는 것이다.
권하는 것은 권유의 의미도 있으나 더 강력한 의미는 강청과 같은 것이다.
3.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림이다.
6:12-16 몸을 죄에게 병기로 드리지 말고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 드리라했다.
주와 연합으로 죄에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았기에 영전에서 병기가 되는 것이다.
몸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 생활에 거룩한 희생 제물로 드리라 하고 있다.
연합하여 희생제물이 부활을 인하여 살아있기에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이다.
이미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의 상태가 되었기에 위치적으로 구별된 제물이다.
4. 이는 우리의 드릴 영적 예배이기 때문이다.
영이신 하나님은 영과 진리의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신다. 요한복음 4:23-24
차이는 구약의 제물은 여러 짐승이나 신약은 자신의 몸을 산 제물드림이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이다.
그러므로 몸의 생활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산 제물로 영적 봉사를 드림이다.
로마서 12:2-3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생활을 실행하는데 필요한 부분에 대하여
먼저는 몸이고 다음은 생각이 새로워지므로 인격을 드리는 것이다.
1. 이 시대를 본 받지 말아야 한다.
이 세대는 내가 살아가는 세상의 실제적인 부분을 나타내는 말이다.
한편으로는 사탄의 악한 체계로 사람들의 모든 일과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세속적인 일들과 종교적인 일들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어떠한 유형과 양식과 경향성을 가진 문화로 우리 앞에 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나타난 이 시대를 버리지 않고는 세상을 이길 수가 없다.
이 세대를 본받아 세상의 형상으로 동화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 생각이 새로워지므로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몸을 드린 후에 우리는 생각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이 새로워진다는 것은 생각을 영에 둔영의 결과를 말 한다 8:6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그러므로 영의 생각으로 변화되어야 영의 생각이 생명이며 평안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새로워져야 의지와 감정이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새로운 요소가 우리 안에 더하여 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풍성이 넘치므로 우리 타고난 것들이 배출되어 진다.
결과적으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것으로 변화 되는 것이다.
내적 신진대사가 변화되어 그리스도로 사는 몸의 교회생활이 된다는 것이다.
3.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이미 1-8장 9-11장에서 잘 알려주셨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거룩함에 이르고 영광을 받는 것이다.
선하신 뜻과 기뻐하시는 뜻과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라는 것이다.
분별이란 구분 즉 나눈다는 의미로 위의 세 가지로 잘 나누는 것이다.
이는 은혜의 권면으로 생각이상으로 자신을 높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로마서 12:4-8
받은 은사대로 실행하는 부분에 대하여
받은 은사들대로란? 영적인 선물로 받은 것으로 실행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1. 한 몸의 많은 지체가 다른 기능이 있다.
지체마다 각기 다른 고유한 기능들이 있다.
우리도 많은 믿는 사람들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나 각 지체들이 된다.
한 몸에는 다양한 지체로 몸을 구성하였고 각 지체는 각 기능을 가지고 있다.
2. 각기 다른 기능과 그 기능에 따른 실행에 관하여
이것은 은혜에 따른 하나님이 주셔서 받은 각 사람의 은사들이다.
예언이면 믿음의 정도에 맞게 예언해야한다.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하여야한다.
가르치는 일은 가르치는 일을 하면 된다.
권유하는 일은 권유하는 일에 신실하여야한다.
나누어 주는 사람은 단순하게 하여야한다.
인도하는 사람은 부지런히 하여야한다.
긍휼을 베푸는 사람은 즐거움으로 하여야 한다.
로마서 12:9-21
모든 것을 사랑으로 실행하는 부분에 대하여
가장 높은 미덕을 표현하는 사랑으로 생활을 해야 하는 기준이다.
1. 사랑은 가장 위대한 미덕이다.
사랑에는 위선이 없이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형제 사랑을 뜨겁게 사랑하고 서로 먼저 존경하십시오.
열심을 내어 게으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영안에서 불타서 주님을 섬기십시오.
2. 소망가운데 기뻐하십시오.
그래야 환란을 견딜 수 있습니다.
기도에 꾸준히 힘쓰십시오.
성도들의 필요를 공급하고 손 대접하기를 힘쓰십시오.
박해하는 사람을 축복하고 저주하지 마십시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우십시오.
서로 같은 것을 생각하고 교만한 생각을 품지 마십시오.
오히려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십시오.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마십시오.
3. 아무에게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이 보기에 존경할만한 일을 생각해 두십시오.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화평하십시오.
직접 원수를 갚는 것을 직접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원수 갚는 것은 나의 일이니 내가 갚겠다“ 하십니다.
오히려 원수를 먹이고 마시게 하므로 그의 머리에 숯불을 쌓게
될 것이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