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다시 태어난다면/한화갑
어떻게 하면 부모님께 효도를 해드릴 것인가를 생각해 본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효도를 하지 못했다. 그러니 나의 자식들 더러 효도하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그래서 나는 효도 받는 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더구나 나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국가 유공자이기 때문에 죽으면 5.18국립묘지에 묻히게 된다. 그래서 죽은 후 묘자리 걱정도 없다. 자식들에게 내 산소를 걱정하고 돌보아 달라고 부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불효자식이란 생각이 든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불효만 생각하면 가슴이 매어오고 찢어 질것만 같은 아픔과 후회가 치밀어와 잠을 설치고 만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기를 수없이 반복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고등학교 다닐 때 읽었던 시조 한수가 생각난다. 어버이 살아 실재 섬기기란 다 하여라. 돌아가신 후에는 애달파 어이하리 평생에 고처 못할 일이뿐인가 하노라. 나는 이 시조를 지금도 외우고 있지만 천만번 외우고 또 외워 보아도 나는 불효자라는 생각뿐이다.
나는 작은 섬에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지게 지고 일도하고 소를 먹이기 위해서 풀도 베어 왔다. 내가 첫째였기 때문에 부엌일도 많이 했었다.
어머님이 밭일 때문에 저녁 준비가 늦어질 때는 내가 보리쌀을 삶아서 퍼놓기도 하고 저녁밥을 지을 때도 있었다. 겨울에 길삼을 하기 때문에 어머님이 온종일 베틀에 앉아 계시면 점심을 위한 고구마 찌는 일은 모두 내 몫이었다. 고구마를 한바구니 삶아서 상위에 올려놓으면 동생들이 서로 맛있는 것을 차지하려고 우르르 몰려들곤 했던 추억도 나의 것이다.
목포에서 중학교 다닐 때도 혼자서 자취할 때가 있었다. 집에서 만들어 보내주신 반찬이며 어머님의 사랑이 듬뿍 담겨진 말린 바닷고기 생각만 해도 입맛이 다셔진다. 방학 때 집에 들렀다가 개학할 때 쯤 되면 꼬기작꼬기작 모아두었던 돈을 손에 쥐어 주시던 어머니 그 어머님의 모습도 이제는 두 번 다시 볼수가 없다.
잠자리에 누워서 생각날 때면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릴 때도 있다. 그러나 천 번 눈물 흘린다고 어머님에 대한 불효를 씻을 수는 없다. 어머님보다 훨씬 엄격하신 아버님이 무섭기까지 했었지만 그렇게 엄격하고 무서웠던 아버님도 지금은 안계시니 더욱더 마음이 아프고 슬퍼질 때가 있다. 시골에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도 도외지에 나가서 점원 노릇하다가 명절 때가 되면 소주병 사들고 부모님 찾아온다는 것이 시골 명절의 풍경인데 우리 부모님에게는 명절 때마다 술병 들고 찾아온 아들이 없었고 더구나 장남인 나는 소식이 두절되어 걱정만 끼쳐드렸으니 어떻게 변병하며 사죄할 것인가
대학까지 졸업했다는 장남이 몇 번씩 감옥이나 드나들면서 밥벌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을까를 생각하면 더욱더 죄송스럽기만 하다. 마음씨 좋지 않은 어떤 동네 사람은 비웃기라도 하듯이 나의 아버지를 기분 나쁘게 하려면 내 이름을 부르면서 그 사람 대학 나왔다고 해도 지금 감옥에 있지 않냐고 비아냥거릴 때 저희 아버지의 마음이 오죽이나 쓰리고 아팠을 것인가 끝내 아들이 활동하는 것을 보시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님의 한이 얼마나 컸을 것인가 내가 바로 죄인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탄과 탄식이 저절로 나오지만 돌아가신 아버님은 한마디 대답이 없다.
명절마다 어김없이 산소에 들러서 불효를 뉘우치고 용서를 빌어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내가 부모님을 향한 효도의 관념보다는 내가 속해 있던 조직의 보스를 위한 충성심이 훨씬 앞섰던 것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무슨 특별한 일도 없이 아침밥 먹고 나왔다가 밤12시 통행금지 시간 직전에 집에 들어오는 남편에게 아내가 물었다.
당신은 내가 중요합니까 당신의 보스가 중요합니까 나와 보스 중 한 명을 택하라고 추궁할 때도 나는 단연코 나의 보스를 택하겠다고 말했으니 말없이 눈물만 흘렸을 아내에게도 미안한 생각이 든다. 더구나 아이들이 한참 재롱을 부리고 무럭무럭 자라날 무렵에도 나는 세 번이나 감옥에 가서 햇수로 4년여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으니 남편으로서 구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아버지로서의 구실은 더더구나 제로 상태였다. 내가 이렇게 살아오면서 내 동생들에게도 큰 혜택을 주지 못했으니 형님 구실도 제대로 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아들 구실을 못해 부모에게 불효하고 남편구실 못해 아내의 가슴에 눈물을 고이게 했고 아버지로서의 도리를 못해서 아이들에게 행복한 가정을 마련해 주지도 못했고 동생들에게 형 구실도 못 다한 사람이고 보니 주위에 얼마나 많은 한을 만들어 주었는가를 생각하면 죄송하고 또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뿐이다.
이런 인생 역정 속에서도 내가 내세울 것이 있다면 초지일관 지조를 지키면서 양심대로 살아왔다는 것이고 한번 맺은 인연을 중시해서 보스에 대한 존경심과 충성심을 평생토록 지키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나는 수십 년간의 정치역정 속에서도 야당으로 출발해서 여당이 되었다가 다시 야당이 되었지만 내가 처음 몸담았던 정당을 이탈해 본적이 없다. 정치적으로 유리하냐 불리하냐를 따지지 않고 가야할 길이냐 아니냐를 따져서 가야할 길이면 따라갔다고 단언하고 싶다.
또 정치적으로 인연을 맺은 보스를 중심으로 그 계보를 떠나본적도 없다. 어떤 사람의 경우든 일생을 통해서 생애 부침과 성공과 실패의 역경을 경험 안 해 본 사람이 있으랴만 나의 경우는 그래도 한 때 고생이 보람이 있어서 여당의 경험을 가진 정치인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람들의 세계가 진정한 동지고 단체고 계보라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달라질 수도 있다. 이해관계, 기분, 장래 가능성, 현실적 이득 등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쌍리공생이고 양방통행이어야지 일방통행식 보스의 이익을 위한 것이 판단의 기준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작은 섬에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지게질이며 부엌일에 이르기까지 일을 하면서 자랐지만 그래도 그 어려움 속에서도 대학교육까지 받았다. 그러나 자식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 그러나 지조와 소신과 충성심은 평생을 통해서 지니고 살아오고 있다. 나는 내가 다시 태어나도 내가 살아온 길대로 살 것이다.
'청학동 예절교육'이 필요한 이유/김홍
초 중등 학생들의 여름방학이 시작됐다. 필자는 이럴 때마다 생각나는 곳이 있으니, 그 곳은 바로 지리산 청학동에 자리한 예절교육의 산실 '청학동 명심서당'이다.
'청학동 명심서당'은 자식은 바꾸어 가르쳐야 한다는 역자이교(易子而敎)의 정신을 실천하는 도장이다. 이곳에서는 세상살이에서 야기되는 옳고 그름의 시비와 선(善)과 악(惡), 인(仁) 의(義) 예(禮) 지(智)와 삼강오륜(三綱五倫)을 가르친다.
요즈음 학교교육과 학부모들을 보면, 오로지 학과성적 위주의 교육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 예절교육은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학부모들은 어떻게 하면 남보다 더 외국어를 잘 할 수 있게 하느냐에 초미의 관심을 두면서 자녀들의 해외연수에 신경을 더 쓰고 있는 실정이다.
며칠 전, 필자는 아내와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동네 메밀국수를 파는 음식점에 들른 적이 있었다. 30도를 웃도는 장마철 무더위를 피해 많은 사람들이 시원한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날따라 일요일이어서 가족단위의 손님들이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리저리 뛰면서 큰소리치는 4-5세 된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본 가족들의 합장소리가 음식점 분위기를 깨트리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 어떤 친구가 일본에서 본 자녀들의 예절교육에 대하여 전해 준 말이 떠올랐다. 기차 안에서 양손에 짐을 들고 정해진 좌석을 찾느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어떤 어머니가 아이를 큰소리로 꾸짖더란 것이었다.
'어른이 가는 길을 비켜드리지 않고 방해했다.' 면서 아이를 꾸짖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어렸을 때 잘못했을 경우 어머니로부터 맞았던 매는 대나무로 만든 옷감 재는 작은 '자'였다.
수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자'를 생각하면 몽둥이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필자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의 매'는 그 위력이 지금도 발휘되고 있다. 예를 들어, 지금도 친구끼리 화투놀이를 하게 되면 옛날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맞았던 대나무 '자' 쪽이 생각나 화투 놀이 근처에 가지 않고 잔심부름만 하게 된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
'청학동 명심서당'에서는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문을 활짝 열어 놓고 1주 과정에서부터 2주, 3주 과정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의 올바른 버릇을 잡기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갖춰놓고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곳에서는 버릇이 없고 자세가 바르지 못한 아이, 예의가 없고 위아래를 모르는 아이. 행동이 천방지축인 아이, 자기만 알고 남을 모르는 아이, 정서가 불안하고 안정이 되지 않는 아이, 불효를 하는 아이, 화목과 우애를 모르는 아이, PC방 오락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 아이를 위해 잘 못된 점을 알게 하고 옳은 길을 인도하여 바르게 살아가도록 길들이고 있다.
기나긴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이른바 제도권 밖 '청학동 명심서당'에서 자연스럽게 청소년들의 '예절교육'을 체험케 하는 것은 '과외수업'이나 '해외연수'보다 더욱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름다운 치매/김 홍
필자는 KBS 인기프로였던 아침마당 '자유발언대'에서 어떤 며느리가 출연하여 치매로 고생하신 시어머니와의 불편한 관계를 말하고 눈물짓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시어머니는 치매의 정도가 얼마나 심했던지 며느리를 어머니라 부르며 존대 말을 했다고 한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깎듯이 순종(?)하면서 살았는데 눈이 보이질 않아 불편했고, 때로는 오물을 벽에 바르는 등 엉뚱한 행동을 자주 했다는 것이었다.
맞벌이였던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수발을 성의껏 하다 어쩔 수 없이 요양원에 맡기게 됐는데, 그 후 면회를 가서 보니 시어머니의 발이 묶여있었다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집으로 다시 모시게 됐다는 발언을 하면서 효심의 눈물을 쏟고 있었다.
몇 년 전, 필자가 잘 아는 사람의 아버지께서도 치매로 고생하시다 세상을 떠나셨다. 그 때 상주인 아들이 가장 슬퍼하던 것 중의 하나가 아침마다 일어나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문안 인사를 하던 일이라고 했다.
이 세상에 가장 큰 '형벌 중의 형벌'이라는 표현을 하면서 문상객들에게 괴로워하던 아들의 모습을 보고 당시 필자는, 당한 본인은 괴롭겠지만 평소 인품이 고귀하고 품성이 좋은 사람이었기에 치매의 상태에서도 폭언과 거친 행동을 하지 않고 바른 예의범절과 순종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망자(亡者)에 대한 존경심이 생기던 것을 기억하면서, 예로 든 두 사람의 치매를 감히 '아름다운 치매'라 일컫고 싶어진다.
치매는 건망증과 다르다. 치매와 건망증을 초기에 구별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치매는 과거에 자신이 경험했거나 있었던 일에 대한 기억을 전반적으로 광범위하게 모두 잊어버리는 특징이 있으나, 건망증은 기억된 것의 일부를 선택적으로 잊어버리는 것으로 구별 할 수 있다.
필자도 어느 날, 자동차 키가 포함된 열쇠뭉치를 찾느라 허둥대던 때가 있었다. 불과 몇 분전에 분명히 집에 가지고 들어왔는데 열쇠뭉치는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한참 후에 열쇠뭉치는 엉뚱한 곳(신발 속)에서 나왔고, 찾아낸 사람은 필자가 아닌 아내였다.
살다보면 이런 일들이 가끔 생기지만 의학적으로 볼 때, 건망증은 뇌의 신경회로가 좋지 않을 때 나타나고 치매는 뇌 신경조직 손상으로 일어난다고 한다. 따라서 건망증은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 회복되어도 치매는 쉰다고 해결되지 않는다고 한다.
한달 전 필자의 친한 친구가 뇌경색으로 수술했었다. 수술 당시 가 본 후 차일피일 하다 아내와 함께 재활센터에서 걸음 걷는 연습을 열심히 하는 친구를 찾아갔는데, 다행스럽게도 친구는 모든 면에서 거의 원상회복을 해 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간 필자를 보며 친구는 불편한 몸인데도 웃어 주었다. 그리고 친구의 해 맑은 얼굴에서,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마음 그 자체가 묻어 나온 듯 했고 '제2의 인생'에 대한 재기의 다짐도 역력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치매'와 친구의 뇌경색 같은 질환은 나이 들면 걸릴 수 있는 것이라지만, 너무나도 두려운 질환이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모시이불//김종숙
밝아온 아침에 다시 보니 그 빛깔이 더욱 곱다.
자목련으로 물감을 들였을까. 붉은 보랏빛 모시결은 흔하지 않은데...
안감으로 또 한겹 하얀 세모시가 더욱 정갈하다. 이 까슬한 감촉으로 살포시 눌러주던 어젯밤 잠자리, 꿈결처럼 포근했어야 하건만 한숨도 잘 수 없어 몽롱한 지금, 나는 전쟁을 치른 지친 병사처럼 초죽음상태다.
"한번도 덮지 않은 새거예요. 이걸 덮고 자요, 제수씨."
어젯밤에 이 모시이불을 건네주며 아주버니가 그랬다. 매 번 새 이불을 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자 아주버니는 반 농담삼아 '난 제수씨에게는 늘 깨끗한 걸 주고 싶어요.'라며 미소지었다. '제수씨에게는...'이란 말이 가슴에 와 탁 걸렸다. 특별히 마음 쓰고 있다는 뜻으로 들려 갑자기 그의 아내인 나의 맏 동서가 그 말을 들었을까봐 신경이 쓰였다. 다행히 바쁜 일상에 고단한 형님(맏동서)은 일찌감치 자리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아주버니는 마음놓고 그런 표현을 했는지도 모른다. 언제던가 남편을 향해 눈을 흘기며 퉁박을 주던 형님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그, 저이는! 그저 그저 짝사랑이지...."
아주버니가 제수를 짝사랑하다니 무슨 흉칙한 소리냐 싶겠으나 당사자인 나는 좀 머쓱했을 뿐 눈치가 보이지는 않았다. 막상 난감해야 할 아주버니도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그 말이 나온 실제상황을 알고나면 민감할 문제는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둘러앉은 밥상에서 맛있다는 반찬을 자꾸만 내 쪽으로 옮겨놓으며 먹어보라 권유하는 아주버니와 대답만 할 뿐 쳐다보지도 않는 내 모습이 얄미워 형님이 참견을 한 것이니까.
아주버니의 진심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외면하는 것인지 난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정말 나를 아끼는 마음으로 좋은 걸 먹이려는 거라기보다 아주버니의 타고난 습관일 뿐이라고 믿기 때문에 특별한 고마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오히려 유명 요리연구가인 아내의 음식솜씨를 나에게 자랑하고 싶은 거란 생각이 앞서므로 내 젓가락들이 저항을 하는지도 모른다.
30년 넘게 일년이면 두어 번 씩 벌어지는 똑같은 밥상머리 풍경인데 난 아직도 여전히 무감각하고 아주버니의 진심을 가늠해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으로 나는 아웃사이더라는 힐책을 아직도 면하지 못하고 있다.
군인이었고 공무원으로 퇴직을 한 깐깐한 남자, 세상에 내 새끼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게 없는 아버지, 유명인 아내를 자랑스러워하는 남편, 열 다섯살 손위 큰 아주버니는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내 마음안에 자리잡지 못하고 여전히 서먹한 어른일 뿐이다. 어쩌면 집안의 여왕처럼 군림하는 맞동서의 기세때문에 큰집이라면 아예 마음을 닫고 사는 부산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새삼스레 '제수씨에게는...'이란 말이 가슴에 걸려든 것일까.
전에 없이 형님 눈치가 보일만큼 부드러운 어조와 깨끗한 것만 주고 싶다는 첨언에 감동이 된 것일까. 1분도 채 안되는 잠깐의 대화였지만 그 상황은 누가 보아도 짝사랑에 버금가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너무 예쁜 모시이불이었으므로.
이불을 받아들고 방으로 들어와 시어머니 침대 아래 자리를 폈다.
시어머니 간호당번으로 와서 낯선 방바닥에 누으면 늘 잠은 천길 멀리 달아난다.
밤낮도 구별하지 못하고 거동조차 불편한 어머니의 노구는 이제 아기처럼 작아졌지만 쉴새없는 치매성 옹알이는 곁에 있는 간호원(?)을 지치게 한다. '불 꺼.'와 '불 켜.'를 연습하는 세살짜리처럼 쉬지 않고 일을 시키고 지금 몇시야, 일으켜 줘를 반복한다. 새벽 세시쯤이었다. 잠시 조용하다 했는데 또 다시 '엄마 '(어머니는 곁에 있는 사람을 여자일 경우엔 엄마라 부른다)를 찾기에 다가가 보니 자리에 오줌을 질펀하게 싸놓았다.
아, 하느님....!
목구멍으로 슬픔이 밀려올라왔으나 소리낼 수는 없었다. 형님 내외분의 잠을 깨우면 안되는 한 밤중이므로 조용조용 어머님을 옮겨 욕실에 앉혀놓고 목욕을 시켰다. 옷을 갈아입히고는 오줌이 스며든 매트리스까지 비누질하여 닦아내고 침대커버와 요, 시트, 모두 걷어내어 욕조에 담가둔 후 짜증내며 종주먹질하는 어머니를 다시 새 이부자리에 눕히고 나니 새벽이 다가온다.
조금 있으면 이 큰 집에 위 아래층으로 나누어 자던 네 사람이 다시 하루를 버티기 위해 몸을 일으킬 것이다. 성이 다 다른 네 사람...어머니, 아들, 며느리, 동서이자 제수, 우연이라도 같은 성 하나 없이 남남인 네 사람, 우린 어찌 얽히어 이렇게 한집에서 잠을 자게 되었을까.
인간관계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아주버니와 제수란 관계는 도대체 어떻게 얽혀진 사이인가.
한 남자와 여자가 만나 부부가 되더라도 애초에 서로 남남이다. 부부는 사랑이라는 윤활유 덕분에 곧 서먹함이 매끄러워진다고 치자. 하지만 결혼을 계기로 하여 맺게 된 남편이나 아내의 가족들과의 관계는 갑작스럽고 새롭다. 시댁이나 처가라는 단어가 편안한 느낌이기보다 조심스러운 까닭도 그 갑작스런 비 혈연때문일 것이다. 하물며 시댁도 아니요 처가도 아닌 또 하나의 울타리 밖 인연으로 얽힌 아주버니와 제수는 멀어도 한참 멀다. 조심스러워 말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사이다. 내 남편의 형이거나 내 동생의 아내라는 도리가 뒤따를 뿐이다. 같은 입장이라도 형수와 시동생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핵가족화되어 버린 현대에는 어느 정도 변질되었을지 모르나 형수와 시동생은 한 울타리에 살아 볼 확률이 많아 애틋한 정을 나눌 수도 있는 관계이다. 하지만 아주버니와 제수란 함께 산다고 해도 언제까지고 조심스런 사이다.
혹시 개인차에 따라 그 관계의 벽을 부드럽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집안 환경이나 당사자들의 성격에도 좌우되긴 할 것이다. 사실은 어느 누구의 경우라도 친 형제처럼 정을 나누며 살기를 바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떠올릴 필요도 없이 나도 결혼 초에는 그러길 열망하였다. 우선은 동서지간의 화목을 딛고 귀여운 막내 제수가 되어 아주버니들께 애교도 부릴 맘이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게 얽힌 줄타기는 그리 만만치 않았다. 살아 온 환경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이 그렇게 큰 벽일 줄 몰랐다. 예의범절에 약하고 주방일에 민첩하지도 못한 데다가 하필 나에게만 아들을 낳게한 하늘도 공모자다. 나의 부족함은 열등감을 키우고 만남을 기피하거나 긴장을 조장하여 결국은 마음을 닫게 하였다. 어느 곳에 가져다 놓아도 밝은 편인 내가 큰 집에만 가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머리 조아리며 허둥거리거나 거짓 웃음 몇번으로 머물다 대문을 나서야만 숨을 쉬곤 한다.
우린 서로 불행한 관계이다.
함께 깔깔거리며 수다를 주고 받는 동서지간이길 꿈꾸었던 나도 불행하고 센스있는 아랫동서에게 가문의 영광을 내림하고 싶은 맏며느리도 불행하며 상냥하고 재치넘치는 제수를 못 갖게 된 아주버니도 불행하다. 하지만 어쩌랴. 처음부터 닫혀버린 철옹성은 열릴 줄 모르는 걸... 결혼후 첫 대면에서 무릎 꿇고 형님으로부터 들어야 했던 '맏 동서는 시어머니'라는 공식이 싫었고 요즈음도 기회만 닿으면 '자네 이리 좀 앉게.'라는 형님의 말이 무섭다.
그렇듯 돌처럼 굳어진 내 마음이 아주버니의 온기있는 말 한마디에 무너지는 것일까.
세월이 흐르고 흘러 철옹성이 낡아 자연 붕괴하는 것일까. 아니지, 애초부터 아주버니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나를 지켜보아왔을지도 모르는데. 이제 그도 칠순을 넘긴 노인인걸.... 내가 너무 무심했나보다.
결 고운 자목련빛 모시이불을 조심조심 귀 맞추어 갠다. 어제 밤 건네 받은 모양대로 곱게 개어 무릎에 올려놓고 손으로 쓰다듬어본다. 씨줄과 날줄이 어김없이 교차하여 예술품처럼 우아하다.
거친 모시나무껍질은 아마도 온갖 시련을 다 겪고나서야 이렇게 고운 실로 탈바꿈되었을 것이다. 두둘겨 맞고 삶아지고 잿물에 담기어 더러움을 떨쳐내고 나서도 바람에 말리어 갈라지고 염색되어 아낙들의 손길에 수도 없이 다듬어진 후에야 이런 고고함을 얻었을 것이다.
나도 이젠 하나의 씨줄되어 교차되는 날줄들과 곱게 엮이고 싶다.
이왕이면 곱게곱게 엮이어 아름다운 짜임을 이루어내고 싶다.
그런 나의 속마음을 전달하기라도 하듯 모시이불이 흐트러질세라 조심스럽게 머리맡에 놓아두고 집을 나선다.
아주버니가 내 마음을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저 기차 좀 잡아주세요/김종숙
남은 시간은 겨우 3분이다. 과연 한시 기차를 탈수 있을까.
청량리 시발역에서 출발하는 영동 태백선을 타야만 한다.
이놈의 지하철은 멈추는 데도 왜 이리 속터지게 느린 것인지, 일분만 일찍 도착했더라도 이렇게 초초한 행보는 면할 수 있었을텐데
무슨 까닭인지 역사 밖에서 잠시 대기하느라 늦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3분을 두고 아직 포기할 수는 없다. 기를 쓰고 뛰어가면 가능한 시간이 아닐까.
문이 열리자마자 내려서서 우선 영동선으로 갈아타는 안내선을 찾는다.
그런데 이리저리 두리번거려도 없다. 나가는곳을 표시한 노란선 말고는 없다.
무조건 달린다. 혹시 반대방향으로 뛰고 있다면 어쩌나 하면서도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는 이유는
그곳엔 갈아타는 연결통로가 있으리라는 희망때문이다. 벌써 1분은 소비했는데 출구에 다가와도 그런 것은 없다.
옆 사람에게 물어볼 시간조차 아까워 일단은 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황급히 개찰구 기계에 지갑을 올려놓았는데
지난 번과 달리 문이 열리지 않는다. 두꺼운 지갑 탓인가 싶어 카드만 꺼내어 올려놓아도 마찬가지여서 마음은 동동동 발을 구른다.
할 수 없이 눈에 띄는 공익요원에게 달려가 물으니 파란 불 개찰구로 나가란다.
에고, 이런! 개찰구도 파란불, 빨간불이 있었구나...
조금 창피하지만 얼굴이 빨개질 새도 없다. 날듯이 개찰구를 빠져나와 계단을 오른다.
광장으로 나가는 계단, 다시 역사 안으로 오르는 계단, 열차와 계단은 왠 연분이 그리 깊은 지 숨은 턱까지 차올라 가슴이 터질 것 같다.
두 계단씩 뛰어오르는 다리는 한계에 이르러 빨리 서두르라는 명령에도 아랑곳없이 허둥거리는데 머리속은 딴 생각으로 복잡하다.
'그냥 차를 몰고 왔어야 했어....'
서울에 자주 다녀도 차를 두고 다닐 생각을 해본 일이 거의 없다.
천생 걷기 싫어하는 게으름뱅이라 아무리 먼 길도 차를 타고 다녔다. 이 나이에 기름값 걱정하랴 싶어 별 가책없이 누린 셈이라 할까.
그런데 사정이 달라졌다. 두달 전부터 일주일에 네번이나 서울에 있는 병원에 다니게 되면서 경제적으로 부담이 커진 것이다.
때 맞추어 경유값마져 올라 한번 왕복에 평균 4만원이 소용된다. 약 값을 포함하여 지난 두달동안에만 200만원가량을 지출하였다.
그러고보니 일년 전부터 온갖 방법을 동원한 치료비에 턱없이 비싼 특진비들을 따져보니 어림잡아도 오백만원은 잡아먹은 것 같다.
변변치 못한 부실함도 은근히 미안한데 가계지출에도 손해를 끼치는 것 같아 절약할 수 있는 방도를 궁리하였다. 기차를 생각해내었다.
더구나 시력을 집중해야하는 운전이 병증을 악화시킬까 염려하는 남편은 오가며 쉴수도 있겠다 싶은지 기차통원을 찬성하였다.
짠돌이 기질이 없지도 않지만 함께 동행하지 못하는 미안함을 덜 수 있어 좋아하는 눈치였다.
잔머리를 굴리다보니 진 일보하여 이왕 서울나들이길에 강의까지 해치우자는 쪽으로 결론을 굳혔다.
양평역까지 운전, 청량리까지 기차, 병원까지 셔틀버스, 돌아오는 길은 반대의 코스를 밟아 양평에서 강의를 마치고 귀가하면
반 값에 두 가지 일을 하니 일석이조인 것이다. 진작부터 그러지 못했던 것이 후회되었다.
기차를 처음 타던 날, 모든 것이 어색하였지만 깨끗한 열차내부에 지정좌석도 있어 차창으로 흐르는 풍광을 바라보니 잃었던 낭만까지 선물받은 기분이 들었다.
표를 끊고 기차 안에서 책을 읽기도 하고 지하철을 갈아타고 마을버스에 올라 흔들려보기도 하고...
나름대로 시간 연결을 여유있게 고려하여 기차 타기 두번째인 오늘 아침엔 왕복표까지 샀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지하철 대기사건으로 기차시간이 아슬아슬한 지경에 놓인 것이다.
한시 기차를 타지 못하면 두시부터 시작되는 강의를 망치게 된다. 다음기차가 한 시간 뒤에 있기때문이다.
죽을 힘을 다하여 개찰구로 뛰어가니 마악 개찰구 문을 닫고 있는 역무원의 모습이 보인다.
벽에 붙은 디지털시계가 정각 한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저씨, 저 이 기차 타야해요. 내보내주세요!"
숨 넘어가는 나의 다급함과 대조적으로 손사래를 치는 젊은 역무원의 여유로운 미소가 그리 미울 수가 없다.
"안돼요, 안돼요, 저기 아직 기차가 서 있는데! 아저씨, 저 기차 좀 잡아주세요!"
절망이란 건 바로 그런 것일텐데 내 언제 마지막 순간까지 이렇게 발악을 해 본 일이 있었던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나는 역무원 손에 들린 무전기를 바라보며 사정하기 시작했다. 기관사에게 무전을 쳐달라고 했다.
냉정한 역무원에게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느끼는 순간 나는 아직 닫히지 않은 옆 개찰구로 번개같이 달려나가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촌각을 다투는 극한 상황에서는 없던 힘이 생기는 걸까.
부디부디 문을 닫지 마라, 난 항상 운이 좋은 편이었지, 하느님, 오늘까지만 봐주세요, 부디...
그런데 열차 꽁무니에 서 있는 역무원의 깃발이 올라가며 문이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잠깐만요, 저 이 기차를 꼭 타야 해요.
당황한 역무원은 이미 늦었다며 나를 제지하고 나는 드디어 절망했다. 온 몸의 힘이 쫙 빠지며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안타까웠던지 역무원이 다가와 물었다. 어디를 가야 하느냐기에 양평이라하니 그 아저씨, 눈이 둥그래지며 목소리를 높인다.
"양평이요? 이건 경춘선이에요. 양평은 저쪽 에서 타야해요."
어이없다는 표정 너머로 눈길을 보냈지만 그곳에도 열차는 이미 떠나고 홈은 텅 비어있었다.
한 칸 더 건너가 영동선 계단으로 내려갔어야 하는데 잘못 내려온 것이다.
이래도 저래도 일은 끝난것을 어쩌랴. 아직도 숨은 헐떡거리고 무리를 감당하지 못한 심장때문에 통증이 느껴졌다.
이런 것이 바로 기차 떠난 뒤에 손들기로군, 이젠 어쩌나...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거슬러 올라오니 개찰구 아저씨가 험상궂게 나무란다.
"아줌마, 왜 제 지시를 안 따르신 거예요?"
할 말이 없다. 저도 참 선량한 시민이랍니다. 이런 일 난생 처음이거든요. 미안한 변명을 속으로 감추고 개찰구를 도로 나와
화장실로 향한다. 물에 빠진 생쥐꼴을 한 거울 속 여인은 절망이란 체험과 잘 어울리는 얼굴이다.
뼈저린 후회, 기차는 기다리지 않는다. 나 하나를 위해 멈출 수는 없어.
미리 여유있게 대비했어야지. 기름값 급등 때문이 아냐. 세상에다 핑계를 댈 생각은 하지 말기....
지나온 나의 삶에도 멀리 보지 못한 작은 계산때문에 기차를 놓친 일은 없었을까.
오늘의 이 깨달음은 아직도 배워야 할 인생수칙이 수없이 많음을 암시한다.
제 때 잡아야 할 인연을 놓치거나 타이밍이 좋지 않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 할 일이다.
물 흐르듯 순리대로 산다는 것과 적당히 산다는 것과는 다르다.
진찰
일반 내시경으로 하시겠습니까? 수면 내시경으로 하시겠습니까?
병원 사무를 보는 여직원 질문앞에 잠시 생각하다 다시 여직원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일반 내시경은 통증이 심한가요?"
"저도 내시경은 아직 한번도 해본적이 없어요"
겁먹은 내 모습에 친절한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그 웃음에 감염된듯 나도 따라 웃는 동안 여직원은 내시경 검사에 따른 설문지 작성지에 수면 내시경이라고 볼펜으로 크게 써 놓고 말했다.
"수면 내시경은 2만원 추가로 내셔야 합니다"
"아닙니다. 일반 내시경으로 할 겁니다."
용기를 내어 말하는 순간 2만원 앞에서 멈칫했다. 내 지갑에 있는 금액이 2만원이란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뺏기지 말아야지, 생각하며 지갑에 돈을 더 안쪽으로 다시 넣었다. 직장도 없이 사는데, 2만원을 축낼수는 없는 일이다. 세련된 이미지가 2만원쯤은 가볍게 쓸 사람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어깨가 으쓱한다. 병원문을 들어서면 몸 이곳저곳이 고장난다는 중년을 넘어선 사람들을 많이 보는데 환자라는 개념에서인지 화려한 모습이나 밝은 표정을 찾기어렵다. 이런 칙칙한 느낌때문에 병원을 찾을때면 치장에 깔끔하게 신경을 쓰는 편이다.
일반 내시경으로 결정하고나서도 은근히 두려웠다. 일반 내시경 경험자인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자기야. 일반 내시경 많이 아프나?"
"한번 하고나면 다시는 병원찾기 싫을거야"
어느 정도 통증이 있다는 말이다.
" 직장도 없으니, 일반 내시경 할려구. 이만원이 어디야"
잠깐의 통증은 감수할 생각인데, 두려움을 쫓아내기위해 그냥 보낸 문자에 아내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있는 사오정 문자가 도착했다.
"내가 직장있는데,무슨 소리야. 수면 내시경으로 해"
"자기 직장 말고 내가 놀고 있으니, 하는 말이지"
남편에게 보내는 문자를 끝으로 핸드폰을 메너모드로 설정하고 가방속에 깊숙히 넣었다. 통증은 고통이다. 고통을 싫어하지만 고통없는 삶이 어디있으랴, 어떤 고통이라도 죽는것보다 덜 아프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 창밖을 스치는 바람을 바라보았다. 한번도 경험없는 일반 내시경을 앞두고 이렇게 의연할수 있구나, 생각했다.
내시경 진찰실앞 의자에 앉았다. 여직원이 이름을 확인하더니, 조그만 물컵에 물약을 주었다. 쥬스맛이라도 나면 좋으련만 맛이 별로다. 다시 하얀 액체를 가지고와서 입에 물고 목을 뒤로 젓히고 넘기지 않게 10분을 있으라 한다. 내 앞에는 연인처럼 다정한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있는데, 한 사람이 수면 내시경을 위해 링게르봉지에서 혈관으로 약을 주입하고 있는 중이었다.
수면에서 안 깨어나면 어떡하냐는 말로 연약한 척하는 여성의 모습에 남자는 손을 꼭 잡아주며 괜찮을거란 믿음을 심어준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표정에선 착함이 묻어나고 온순함이 느껴져 평화롭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런 얼굴 표정을 짓고 살아갈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으련만, 나태해지면 삶의 곳곳에 잠복되어있던 실망과 절망이 찾아온다.
앞 의자에 남아있는 한 사람에게서 의식을 떼고 핸드백속을 더듬거려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꺼냈다. 시간 확인을 위해서다. 눈을 몇번 깜빡이고 심심해서 천장에 조금이라도 이상있는 곳을 발견하다 시간을 확인하면 꼭 일분이 지났다. 또 다시 거미줄을 찾아내어 묘하게 얽혀져있는 선의 모양새를 감상하다 시간을 보니 또 일분이 지났다. 정확하게 일분과 일분사이를 자유롭게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혹시 전생에 시계추? 훗훗 하마터면 넘기지 말라던 액체를 꿀꺽할뻔 했다. 생각의 세계는 엉뚱하여 늘 놀랍고 재미있다. 일분씩 열가지의 풍경을 보고 혼자만의 상상이야기를 즐기다보니, 십분이 짧게 느껴졌다. 이런 생각의 묘미에 혼자라는 사실이 자유롭고 좋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앞 의자에서 앉아있던 남자가 내 생각속에서 갑자기 불쌍해졌다.
둘은 둘이라서 행복하고 혼자는 혼자라서 행복하다. 보는 관점과 즐기는 것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나 다른 사람 마음이나 평등한 것이 있다면 무게가 없다는 사실이다. 가끔 호기심이 발동하여 삶의 무게가 어께를 누르는 날에 체증계를 달아보았다. 뜻하지 않게 즐거움이 찾아온 날 마치 하늘위를 날아갈것 같은 가벼운 마음에 체증계를 올라갔다. 마음은 무게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날 사는 것이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몸에 내가 무거운 마음을 올려놓기도 하고 가벼운 무게를 올려놓기도 하며 살아가고 있었으니, 참으로 어리석은 인간이다.
앞 사람의 수면 내시경이 끝났고 내 차례다. 사는 일에 고통이 있다면 고통을 제대로 즐겨볼 생각이라며 몸의 긴장을 내려놓았다.
목만 마취가 된 상태이지,의식이 뚜렸하다. 수면 내시경을 할 때와는 달리 간호사와 의사의 지시대로 침대위에서 내시경을 위해 자세를 내가 취할수 있었다. 의식이 있다는 것은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수동적이 아닌 스스로 움직일수 있는 능동적이다. 이 순간의 자세는 의료기구가 제 역활을 잘 할수 있도록 신체 내부와 외부의 소통을 돕는 자세다. 어렸을때 울다지쳐 방 한켠에 옆으로 쪼그려 잠든 자세와 흡사하다. 유년을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것에 설음에 복받혀 그렇게 울때도 있었다. 그럴땐 언제나 엄마는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내 편이 되어 주었다. 영원히 엄마는 자식을 낳았다는 이유로 자식의 편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라 생각했다.
간호사는 내시경 의료기구가 목구멍을 통과하는 순간 꿀꺽 침을 삼켜야 한다고 말했으며 통증에 팔을 움직이거나 몸을 움직여서는 안된다고 했다. 마음을 비운 의식은 간호사의 지시를 잘 따랐다. 아주 잘 한다고 칭찬했다. 그리고 스스로도 아주 잘했다고 생각했다. 약간의 통증은 잘 참아냈으나 양쪽눈에 흐르는 눈물은 감출수 없었다. 눈물을 흘릴만큼 통증을 느끼지 못했는데, 왜 한가닥 눈물이 얼굴위에 흘렀는지 모르겠다. 내시경 호스를 꺼내면서 약간 속이 울렁거렸다. 침을 흘리면서 내시경 촬영은 막을 내렸다. 드디어 해냈다는 승리감은 들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닌것에 선입견을 가지고 겁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세상을 살면서도 겁에 질려 시도없이 포기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를 깨달았다. 도전해볼 일이다. 너도나도 우리 모두가 용기있게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일에 도전해볼 일이다. 내 몸속만을 살필일이 아니고 세상의 물줄기 따라 골목따라 사람사는 삶을 살필일이다.
용서할수 있는 위치
심경이 묘했다. 누군가 내 일부를 훔쳐가버린 그런 느낌이 들었다. 왜 그랬을까, 그렇게 해서라도 조금이라도 주목을 받고 싶었던 것일까? 우울했다.기분이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적어도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도덕적 양심만은 지니고 있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글을 표절당한 사람의 심경을 바로 헤아리지 못했다. 오히려 누군가 표절을 해가고 싶을 만큼 욕심이 나는 글을 쓴 그들을 무척 부러워했다. 그래서인지 심경이 복잡하다는 말을 자신의 글에 대한 과시쯤으로 내 맘대로 해석하고 묵살한적도 있다. 그렇게 귀한 분신이면 도둑맞지 않게 잘 보관했었어야지,인터넷에는 왜 올리냐는 생각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언제쯤이면 표절의 유혹을 불러올수 있는 매력있는 글을 쓸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했다.
그때는 누군가 내 글을 표절한다면 기분이 우쭐해질것도 같았다. 글이 표절당하더라도 저작권을 운운하지 않고 기분좋게 용서해 주리라는 생각이었다. 삶의 행복찾기로 시작된 글이 여러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고 나눌수 있는 삶의 위로와 즐거움이 숨어있다면 그렇게라도 함께 나누리라 생각을 해본적이 있다. 일상의 글은 과시욕도 돈도 명예도 될수 없었지만 삶의 정도와 그 속에서 얻는참행복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런데 욕심없이 자랑할것도 없는 소박한 글중의 하나가 배달된 책속에 다른 사람 이름으로 씌어있었다.
말로만 듣던 표절이 내 글이라는 사실에 기분이 우울했다. 적어도 글을 쓴 나에게 사전 동의쯤은 얻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한마디 말없이 남의 글을 자신의 이름으로 버젓이 올려놓은 사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고민했다. 그냥 모른체 넘어갈까,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또 다시 반복적인 불상사로 이어질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은 아닐까,싶어 어떻게 접근하여 말을 꺼낼까,나름대로 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갈등했다. 결론은 그 사람이 먼 훗날 우리 문학을 한단계 올리는 인재로 거듭날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조심스럽게 카페 운영자에게 이야기를 해서 충고를 해 주길 바란다는 마음을 보내고나서 개인적으로 그 일은 접기로 했다. 그렇지만 한동안 그 일이 내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만들고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용서할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에 대해 곰곰히 생각을 해 보았다. 오래전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가 부러졌을때, 아무런 조건없이 합의해주었다. 당시에는 한 순간 실수로 젊은 사람의 앞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내린 결정이었는데,경찰은 의아해하며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고 나는 같은 대답을 했다. 용서할수 있는 위치에서 나쁜 마음을 먹으면 한 사람을 곤경에 빠트릴수도 있는 위치다. 얼마전 주변에 있는 분이 교통사고를 냈는데, 상대방이 무리하게 큰 돈을 청구하여 공탁을 걸고 기다리는 중이라 한다. 살다보면 씁쓸한 우리 사회의 단면들을 많이 보게 된다.
좋은 글을 발표해서 주목받고 싶은 심리가 표절의 유혹을 불러왔을 것이다. 타인보다 조금 느려도 자신이 배우고 노력해서 이룬 글 한 문장이 더 귀하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더구나 순수 문학을 지향하는 문인의 길
가을맞이
맑은 바람이 불고 하늘이 높은 가을이 찾아 오고 있다.
입추와 말복이 지나면서도 연일 한 낮 기온은 29도를 오르내려도 풀벌레 우는 소리는 요란하기만
하다. 아침 저녁으로 선들거리는 가을 바람이 가냘픈 코스모스를 마냥 흔들어 대고 있다.
자연인으로 돌아와 갈 곳은 많아도 마음은 늘 허전하고, 한가한 시간은 많아도 어딘가 훌쩍
떠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어느 날 가을 맞이 길을 나서 보려고 용기를 내어 꼭두새벽에 차에
올랐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여행은 언감생심 이였지 않았을까 싶다. 이른 시간이라 차는 막힘
없이 시원 하게 질주를 한다.
여름 햇살은 뜨겁고 갈 햇살은 따갑다 하였던가? 차창을 파고드는 햇살이 얼굴을 달구어 댄다. 비탈진 고랭지 채소밭에는 김장용 배추가 초가을의 햇살을 받아 무럭무럭 자라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어느 곳인가에는 메밀꽃이 한창 피어 바람에 일렁이고 있다. 숨가쁘게 달려가 처음으로 들린 곳은 동해시에 있는 무릉 계곡이다. 초가을의 햇살이 따갑게 쏟아져 내리고 있다. 계곡을 올라가니 시원한 바람과 흐르는 물소리, 그리고 산새의 지저귐이 무아지경에 흠뻑 빠져 들게 된다.
흐르는 물은 한시를 쉬지 않고 앞뒤를 다투지 않고 오직 제갈 길을 흐르고 있다. 다투지 않고 질서 정연하게 흐르는 저 물을 보며 사람은 깨우쳐야 하겠다. 오늘도 이곳까지 오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지 않았던가?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계곡에서 철철 흐르는 소리를 듣자니 잡다한 번뇌가 말끔히 씻어지는 듯싶다. 산바람은 나의 몸을 부드럽게 핥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한없이 앉아 있고 싶은 충동을 뒤로하고 돌아서는 발길이 무겁기만 하다.
백암 온천 가는 길에 들어서니 울진군의 꽃이라 하는 백일홍나무(배롱나무)가 형제 같이 길가에
오목조목 서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모두 고만고만한 크기의 백일홍이 발그레하게 피어 우리를 반겨 준다. 아마도 한 무렵에 심었는가
보다.
참으로 정겨운 모습들이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서산에 기울고 있다. 지는 해가 아쉽기만 하다.
들판에는 풍요로움이 물결치고 다락 논 뙈기 벼 이삭도 고개를 숙여 가고 있다. 이도 아름답고
저도 아름답기만 하다.
겨울에 눈이 많이오면 풍년이 든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인가 올해는 분명 풍년이 들것만 같다.
지난겨울엔 눈도 많이 오고 이렇게 낮과 밤의 기온이 현저 하니까 말이다. 필경 풍년이 오리라.
그래서 장마에 수해를 입은 농민들의 아린 가슴을 보듬어 주리라.
목적지인 백암 온천 숙소에 당도하여 짐을 풀고 내려다 보니 돌아 가는 물레 방아가 정겹기
그지없다. 인공으로 물길은 만든 곳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는 마치 심산계곡의 물소리와 흡사하다.
깊은 산중이라도 와 있는 듯하다. 내일 아침엔 저 물레방아와 마치 덕수궁 돌담 길 같은 저 돌담
길을 거닐어 보리라.
새벽같이 잠은 깨었다. 살며시 일어나 밖으로 나가니 사람의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아직
곤한 잠에 취하여 고운 꿈길을 거닐고 있으리라.
아직 이른 시간이 여서인가 물레방아는 멈추어있다. 하늘을 처다 보니 새 파란 하늘에는 기울어져
가는 하현달이 빛을 잃어가고 영롱한 별들은 와르르 쏟아져 내린다.
어쩌면 저토록 파랗고 반짝반짝 빛을 낼까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돌담 길을 걸어 고즈넉한 오솔길을 접어 드니 숲 냄새가 향긋하다.
산책길을 들어서는데 귀여운 다람쥐란 녀석이 냉큼 앞질러 간다. 풀벌레소리 가 요란스럽다. 아마 해뜨기 전에 실컷 울어 보려는 가 보다. 이름 모를 산새들이 지저귀며 어둑한 새벽을 밝히고 있다.
저 먼 산에서는 산꿩이 푸드득 하고 날갯짓을 하는 소리도 들려 온다. 참으로 싱그러운 아침이다. 나무의 종류도 가지 가지다. 그 중에서도 노송(老松) 한 그루가 우람한 양팔을 힘있게 뻗치고 있다. 갖은 나무들을 다소곳이 안아 주는 듯하다.
이곳 소나무는 금강송이라 한다. 가만히 눈 여겨 보노라니 소나무도 여러 종류가 있는가 보다. 솔잎 모양새가 조금씩은 다른 게 눈에 뜨이니까 말이다.
자그만 한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눈이 모자라는 동해바다를 굽어 본다. 어제도 그렇더니만 오늘도 잔잔하기가 말을 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끝도 없는 수평선에는 고깃배가 한가로이 흘러가고 있다. 햇볕에 마치 보석과도 같이 반짝반짝 빛을 내는 바닷물이 새벽 하늘의 별빛과 흡사하다.
새벽하늘엔 보석을 박아 놓은 듯 하더니 바닷물 위에는 몇 섬의 보석을 뿌려 놓은 듯하다.
동해 바다의 시원한 바람과 눈앞에 펼쳐지는 모습이 나의 존재도 잃어 버리게 하고 무아지경에 빠져들게 한다. 바닷가에는 갈매기가 두 줄로 길게 도열하고 있다. 어찌나 정교하게 줄을 지어 있는지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생전처음 보는 모습이다. 언제까지 보아도 실증이 나지 않을 것 같기만 하다.
아쉬움을 안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백봉령 정상에 멈추었다.
이곳 백봉령은 해발 740m 라 한다. 굽이굽이 흘러가듯 한 백두대간 을 굽어보려니 마치 물결처럼 굽이 치는 것 같다. 파란하늘엔 흰구름이 두둥실 청산만 두고 흘러 간다. 참으로 장관이다. 정선을 거처 상경 길을 달리다 보니 곳곳에 산사태로 허물어진 집들과 농경지가 눈에 쉽지 않게 들어
온다. 어디뿐이겠는가. 쓸려온 온갖 풀과 나뭇가지로 다리 허리가 몸살을 앓고있다.
또 어디에는 다리가 끊어져 있기도 하다. 여기 저기서 복구공사를 한다고 중장비들을 동원하여 쉴틈 없이 공사를 하고 있다. 조용해야 할 들판에 굉음이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잔디는 밟을수록 튼튼하여지고 쇠는 담금질 할수록 단단하여 진다 하였던가? 하루 빨리 복구공사가 마무리되어 저 아픈 상처를 씻어 주기 간절한 마음으로 빌어 본다.
휙휙 지나 가는 밤나무에는 아기 밤송이가 속살을 키워가고, 밭두렁에는 늙은 호박이 부끄럼도 없이 엉덩이를 내 보이고 있다. 들판에 엎드린 농부들을 보려니 미안한 생각이 든다. 저들은 먹거리를 위하여 저토록 땀을 흘리는데 우리는 한갓지게 관광 길을 나섰으니 말이다.
우리는 저 농부들께 감사를 드려야 하겠다.
아픔도 많았던 지난 여름을 깨끗이 잊고 풍성한 가을을 맞아 덩실덩실 어깨춤 추는 농부님네 들을 보고 싶다.
(2006년9월)
명석(名石)을 찾아라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두 가지의 취미는 가지고 살아 가리라.
그런데 나는 그때 그 흔한 동양화(고스톱)감상도, 등산이나 낚시에도 취미를 붙이지 못 하였다. 남세스럽다. 그러다 80년도에 접어 들면서 우연한 기회에 수석(夀石)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처음엔 직원들과 또 때로는 고객들과도 동행하고, 나중에는 수석회원이 되어 눈이오나 비가오나 매 휴일마다 3년이란 세월을 강기슭을 찾아 미친 듯이 휘돌아 다녔다. 새벽같이 한 장소에서 만나 명석의 꿈을 안고 달려가는 곳은 <?xml:namespace prefix = st1 />장호원이다. 늘 가는 그 집은 해장국 맛이 그저 그만이기 때문이다. 식당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큼지막한 수석으로 잘 정돈하여 명석의 부픈 꿈을 키워주기도 하였다. 주인께서는 할머니이신데 입담이 아주 걸쭉하시다. 이쪽에서 걸쭉한 말을 한마디 던져보면 더 걸쭉한 말로 되받아 친다. 밥을 먹다가 배꼽을 움켜쥐고 파대 웃음을 하지 않고는 배겨낼 장사가 없다.
주로 단양에서 충주까지의 강변을 빼어놓지 않고 구석구석을 휘젓고 찾아 다녔다. 그 외에는 점촌, 문경, 정선, 영동, 여주, 연천,이천을 찾아 다니기도 하였다. 그 덕에 수려한 단양팔경도 샅샅이 구경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특히 남한강줄기의 석질(石質)은 으뜸으로 꼽아준다. 그 중에서도 포탄이란 곳은 석질도 좋고 자원이 풍부하여 자주 들리던 곳이다. 오죽하면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아예 채취 허가를 받아 굴삭기로 탐석을 하였겠는가. 그 넓은 강가에는 수석인 들이 몰려와 마치 시장을 방불케 하였다. 드넓은 돌 밭에서 천 년을 두고 만년을 두고 뒹굴면서 마모된 수석이라고 할만한 것을 찾아 내기란 그리 쉽지가 않다.
탐석1회에 수석이라고 할만 것 한 점 한다는 것도 쉽지 않다. 한 배낭 끙끙거리며 가져와봤자 좌대(밭임대)를 하여 진열장으로 올라 앉는 것은 고작 한 두 점이 고작이다, 나의 수석 장에 진열된 100여 점 중에 명석이라 할만 한 것은 아예 한 점도 없다. 그러니 명석을 움켜 쥔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에 별 따기나 다름없다. 3년간 수석을 하여 쓸만하다는 것은 단양에서의 월드컵 모양과 영동에서의 돼지 모양의 물형석(物形石)이 고작인 것 같다. 그외손을 곱으라면 연천에서의 북한산 인수봉과 흡사한 것과 포탄에서의 평석(平石)과 초가집이라 할 수 있겠다. 평석은 손바닥만한 크기인데 어찌나 까맣고 반질반질한지 너무 앙증스럽고 사랑스럽다. 그날은 무척이나 더운 날이었다. 넓은 강변를 휘젓고 다니다가 주었을 때 얼마나 따끈따끈하던지 돌에 침을 뱉으니 금방 보글보글하였다. 계란을 깨어 놓으면 금방 프라이가 될 듯 하였다. 초가집이라 명명한 것은 마치 초가지붕같이 둥그스름하게 생겨서 그리 명명을 하였다. 울타리며 마당 한 켠에 있는 절구며 널찍한 대청마루며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다. 전원 스위치를 꼽아 놓으면 방방에 전깃불이 깜박깜박한다. 가만히 바라다 보면 그 운치가 정겹기 그지없다. 좌대의 연출이 그만큼 중요 한 것이다.
3년이란 세월을 강변을 누비고 다니면서 남겨진 잊지 못할 추억 세가지만 소개한다. 내가 술을 좋아해서인가 첫 번째로 농주를 꼽을 수 있겠다.
탐석을 하다가 이동을 하는데 비포장 도로라 먼지가 뽀얗게 일었다. 때마침 논두렁에서 일하던 농부들이 새참을 먹고 있는지라 조심조심 서행을 하며 가는데 한 농부가 차를 세우라고 손짓을 하였다. 꼭 한 소리를 들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차를 세우니 “여기 농주 한 잔씩하고 가시오” 한다. 뜻밖의 후의에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다가가니 대접에 가득 따른 농주를 권한다. 농주를 한 사발씩 쭉 들어 마시고 안주로 열무김치에 풋고추를 우적우적 씹어먹든 그 맛도 맛이려니와 풋풋한 인심을 여태껏 잊지 못한다.
그 두 번째로는 경상도의 선비 박달이와 충청도 처녀 금봉이의 애절한 사랑을 노래한 박달재라 하겠다. 갈 때마다 늘 흘러 나오는 노래는 “울고 넘는 박달재” 다. 하도 의아스러워 휴게소 직원에게 물어보니 1년 내내 그 노래만 들려 준단다. 아무리 박달재라 하지만 좀 심한 듯하였다. 지금도 그러한지는 모르겠다. 그 세 번째로는 수장(水裝) 당할뻔한 이야기다. 장마 후 충주 인근 구불구불한 산길을 돌고 돌아 넘어 간 곳에는 산허리까지 뻘 흙이 덮쳐 채 마르지도 않아 발자국이 또렷이 남을 지경이었다. 조심스럽게 강가에 다가가 자그만 한 쪽배를 삵을 주고 욕심을 내어 도강을 하였다. 도강 할 때는 몰랐는데 탐석을 하고 다시 건너 오는데 어찌나 물살이 세고 물이 깊던지 아찔하였다. 그때 자그마한 실수라도 하였더라면 일행은 수장을 면키 어려웠으리라. 지금도 그 생각만하면 온 몸이 오싹하여져 온다.
다음은 수석인 들의 에티켓 하나를 소개 하여야 하겠다. 수석 인들은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아도 반듯이 제자리에 조심스럽게 놓고 간다는 것이다. 절대로 던지지 않는다. 내가 아닌 타인이 가져가게 하는 배려 차원이다. 금기 사항으로서는 탐석 전날 밤은 부부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정을 타 명석이 눈에 뜨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서다. 하나 더 보탠다면 그 좋아하는 술도 강가에서는 마시지 못하는 것이다. 술을 마시면 시야가 흐려져 그 역시 명석이 눈에 뜨이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 물끄러미 수석장을 쳐다보면 곳곳에서 모인 수석들이 이제는 한식구가 되어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하다. 새 모양의 수석은 세 점이다. 각기 한 방향으로 줄지어 있어 한 마리만 날면 남은 두 마리가 날갯짓을 하며 따라 날듯싶기도 하다. 또 물고기 모양의 문양석(文樣石), 혹 달린 스님상, 바둑이 모양 등등의 수석들이 어깨를 으쓱하며 제 자랑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보면 볼수록 사랑스럽다. 잘 관리 하여 이생 다할 때까지 함께 하리라. 뒤돌아보면 눈이오나 비가오나 미처 날뛰던 그 시절이 한없이 그리워진다.
아 옛날이여!
농로길 일등성
어느 곳이나 밤공기가 차가우면 상쾌하게 느껴지겠지만 덕유산자락에서 북상면 골짝을 타고 위천천 청정구역을 지나 건계정 산책로 후미진 골짝을 통해 거창분지로 쏟아져 나오는 그 바람은 정말로 동요에서 나오는 산위에서 부는 바람이다.
오늘도 저녁을 마친 후, 건계정 산책로를 걸을 심산으로 비 한차례 쏟아진 농로 길을 택해 걸었다. 유난히 울어 대던 개구리도 모내기가 끝나니까 또 그리 울지 않은것 보면 써레질 하기 전 집 뭉그러 질까 안타까워 그리 울어 댔나싶다. 그러고 보면 재개발 둘러싸고 티격 태격하는 우리네 모습이랑 똑같다.
외곽 도로를 벗어나 어느덧 호젓한 산책로를 들어서니 벌써 바지런한 동료들이 애써 앞서 걷는다.
"안녕 하세요, 보기 좋습니다".
"작가님, 아직 배 여전 하시네요".
깔깔거리며 앞서가는 구면인 여인네들이 친근스럽게 다가오고, 꼭 손이라도 잡고싶은 얼떨결의 연인으로도 착각 되어진다.
건계정 산책로를 걷다 보면 아치형 파이프 터널이 몇 군데 조성되어있다. 작년까지는 조롱박을 심어 천정에서 주렁주렁 달린 품상이 꼭 축 처진 늙은곰의 불알같다고 집사람과 옆구리찌른 농담도 주고 받았는데... 지금은 포도나무와 다래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산책로 옆으로 흐르는 위천천은 엊그제 내린 비로 제법 물 흐름이 활기 차다. 예전 같으면 왜가리 몇마리 배 채우느라 물 밑 쪼아 볼 텐데...
이런 저런 생각으로 다리품을 팔고 있는데 옆으로 낯 선 사내 (머리는 갈색이고 눈은 움푹하고, 살갗은 희미한) 하나가 성큼 성큼 걷는다. 그의 눈에는 건계정 휘몰아 내리치는, 조그맣지만 아름다운 물 내림과 물 틀임이 보이지 않는겄 같았다. 오로지 휘적 휘적, 내가 이미 돌았던 반환점을 내라고 못 돌소냐 하는 식으로 두 팔 휘저으며 걸어간다.
갑자기 그 어린 시절은 왜 생각날까. 군청색 찦차에 코 크고, 키 크고, 잘 난, 군복입은 외래인들이 맛있는 과자 던져주며 키득거리는 그 장면이...... 찦차 뒤를 좇아가며 일부러 땅에다 던진 쵸콜릿이며 과자 부스러기를 서로 차지하려던 아귀다툼! 좀 더 커서 국민학교 입학하니까 외국인만 보면 무조건 친절하라는 세뇌를 하더구만, 그러다보니 외국인은 나의 구세주가 되어 버렸고 우상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오는날 나의 또래나 그 위의 날고 기는 사람들이 여차하면 그 나라 가는 것 보면 나만의 우상은 아닌듯)
어느덧 S병원 뒤 외곽도로를 접어 들었는데 뒤에서 터벅거리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렷다. 스쳐 지나가는게 건계정 산책로의 그 외래인이였다.
"허허, 빠릅니다".
"......"
대답없는 걸음에 무안하기 이를데 없었는데 이 양반 건널목을 지체않고 건너가고 있었다.
"헤이, 래드 사인, 노 크로스!".
그냥 나오는대로 제꼈다지만 한 자도 못 알아 듣는 것 보니 영국이나 미국인은 아닌것 같았다. 그렇쟎아, 우리는 희멀건하니 소고기 덜 익힌것 같고 눈 움푹하니 광우병 생각나면 미국사람이라고...
대꾸없는 어이없음에 뒤통수에 대고 나도 모르게 오리지날 코리아 랭귀지를 일갈!
"지기미, 씨팔!".
허허, 그 양반 가다가 뒤돌아 보면서 쏴하게 쳐다 보더라고. 희한한 외래 한국 거주민이야. 그 양반 쟤네말 잊어먹고 우리 욕 배운게지...그런데 신호 위반은 또 어디서 배운게야?
미국은 일등성 국가이고 영국도 일등성 국가이고...... 그러고 보니 그렇다, 요즘 밤하늘에 밝은별이 너무 많길래 어느게 일등성이냐고 물었지.
"저건 별이 아니고 위성이야".하더라구.
다시 농로길로 접어 들었다. 얼굴 모르는 농부가 작은 공지에 심어 놓은 콩에서 싹이 올라와 제법 푸릇한게 먼 가로등에 포롬히 비췬다. 그리고, 그 앞, 좀 더 앞에 반딧불이가 이제 비상을 하려고 날개짓 하며 떨고 있다.
아, 내 조국의 일등성, 바로 너였구나. 한참을 지켜보다 들치는 빗방울에 일어섰다. 멀리 내 집 아파트 앞으로도 도열해 있는 일등성이 보인다.
저녁노을
해가 질 무렵이면
언제나 처럼 오늘도 2호선 지하철 에
작은자리 하나 만들어 두고 스치듯이 지나치는
차창밖 의 지나가는 그림자 에 행복 해진다
어느세 지나치는
산자락 저만치에 걸려있는 불타는 저녁 노을이
자신을 태우며 사그러저 가는 장엄함에 숨조차 죽인채
혹여 조금이라도 시야에서 멀어저 가기전에 더보려고
오늘은 가슴가득히 넘어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어두워 가는 도회지를 감싸기 위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자신을 사르며 다른 내일을 잉태하려는
장엄한 저녁 노을속에 취해본다
가을바람 스산하게 바람이분다
이리저리로 구르는 낙엽들의 바스락 거림에 조금남은 가을 햇살이
부서지며 한잎조차 남기지 않으려 소리없이 흔드는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낙엽들이 이제는 텅빈가슴 같은아픔 만 안은채 소리없이
구르며 흩날리고 가을을 태우는 아낙의 손끝에서 갈색의 진한커피
향을 음미하며 주섬주섬 주워모은 가을을 태우는 손길에 잊고 지낸
그리움 같은 추억도 태우며 진한 낙엽타는 내음에 추억을 그려본다
아직은 청춘 인데
길고긴 세월을 인생이란 그릇에
담아온지도 어느덧 오십고개 를 넘고도 덤으로 굽이굽이 몇고개
그누가 엮었을까
주렁주렁 매인 세월의 끝자락에
어느덧 성글성글 검은것 보다는 힌것이 더많은 이고 있는 하얀머리
인고의 삶 을살아온 결실일까
작은 시간들을 역어온게 어제같은데
벌써 불혹을 넘기고 지천명 이라는 언덕에서 살아온 지난날을 돌아보며
깊게 패인 세월의 흔적이 안스러워 가만이 뒤돌아 본다
아장아장 거리던 나를닮은 내 아이들
성큼성큼 건너온 세월의 계단은 올려다 볼만큼 자라 화들짝 놀라지만
이것이 세월이고 시간인것을
이제 딸아이 를 꼭닮은 작은 천사같은
녀석이 어느날 인가 가슴 시리게 할머니 라 부르지만 그것조차 대견한 것은 수없이
첫 출동
나의 첫 구급 환자는 청주 시내의 구석진 공원 벤치에 누워 덜덜 떨고 계시던 한 할아버지셨습니다.
방한복을 입어도 한기가 엄습하는 12월의 차디찬 날씨 속에서 얇은 점퍼만 하나 걸친 채, 어디서 다치셨는지 깊게 패인 얼굴의 상처에서는 스며나던 핏물이 두텁게 굳어 있었고 거친 수염과 깊은 주름, 빨갛게 달아오른 작은 눈에서는 삶의 고단함이 짙게 묻어났습니다. 연신 알아듣기 매우 힘든 이야기들을 토해내고 계셨는데 손을 꼬옥 잡고 중간 중간 웃으며 내가 이해한대로 대답을 해 드리자 “그렇죠~ 내 아들이...” 하시며 피로가 묻어나는 웃음을 보이셨습니다.
그 때 제 안에서 꿈틀댔던 감정선들... 과연 그 실뭉치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연민, 진솔한 공감, 눈 앞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에게 취해야 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예의... 나 자신도 어느 하나 선명한 자신감으로 골라내지 못할 그 실뭉치가 할아버지를 병원에 안전히 모셔다 드리고 텅 빈 앰뷸런스 뒤 칸에 홀로 등지고 앉아 뒷 유리창을 통해 멀어지고 길어지는 길과 불빛들을 바라보며 돌아오는 내내 제 육신과 정신을 꼬옥 움켜쥔 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소방서로 돌아와 잠시 화장실에 들러 손을 씻고 있는데 또 다시 구급출동이 발생했습니다. 이번엔 약물을 삼킨 환자라 하여 앰뷸런스에 타면 양 손에 끼게 되는 장갑도 평소에 사용하는 비닐장갑이 아닌 라텍스 장갑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요즘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는 휘황찬란한 고급모텔이 아닌 낡은 동네의 엘리베이터도 없는 허름한 여관 3층. 수면제를 과다 복용 하셨는데 '정말 다행이도' 아직 의식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얀 내복과 양말을 꼼꼼히 챙겨 입으시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실눈을 뜨고 있는 백발이 성성한 메마른 노인... 침대 맞은편의 테이블 위에는 남아있는
알약 수십알과 꼬깃꼬깃 접어놓은 종이에 세로로 정성스럽게 글씨가
박혀있는 할아버지의 유서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 글씨들을 꼼꼼히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한 인간의 죽음에 관한 마지막 자기고백'인 유서라는 한없이 무거운 존재를 난생 처음 대면했기에 순간 경건함을 느꼈다고 하면 거짓말일까요? 하얀 종이와 세로로 쓰여진 검정색 굵은 펜글씨의 선명한 대비는 그 느낌을 더했습니다.
여유롭게 생을 정리하고 쉬셔야 할 인생의 황금기에 놓인 한 노인 이젠 남을 해할 기력조차 남지 않은 듯한 마른 한 노인께는 도대체 어떤 기구한 사연이 가슴 깊이 박혀 있길래, 이 추운 겨울날 구석진 여관방에 홀로 남아 하얀 내복 차림으로 고단한 생을 끊어내고자 백여알이 넘는 수면제를 삼키셨을까요.
두차례의 구급출동을 통하여 고달픈 생의 깊은 주름을 지닌 두 노인 분들을 만나 뵈었을 뿐이었지만, '집단적 경제 맹신의 최면'에 걸린 온통 파아란 대한민국을 목전에 둔 어느 12월의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이 땅의 사회 구조적 비인간성의 심화로 인하여 더더욱 생의 구석진 곳으로 몰리게 될 수많은 '빈자와 약자'들의 절박한 생존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때 만나 뵈었던 두 노인들은 사회와 가족들의 무관심 속에 사각지대에 갇혀버린 가엾은 존재들임을 본능적으로 인지했고 그들을 향한 감정의 끈은 이를 꽁꽁 묶어 확신케 했습니다.
앞으로 구급활동을 계속 하다보면 이렇듯 안전보호망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우리 사회의 최하 계층에서 하루하루 고단하고 역한 삶을 힘겹게 지속하고 계신 분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위에서 언급했듯 현재도 턱없이 부족한 사회복지영역이 축소되어 앞으로 직접 만나뵙게 될 그분들, 그리고 그들과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을 수많은 '빈자와 약자'들의 고된 생존이 더 어두운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와 공존의 모색은 개개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국가와 시민사회간의 강인한 연대를 통한 실질적인 영역에서의 지속적인 지원과 실천이 절실한 부분입니다. 진정으로 실용주의가 시급한 부분은 규제를 풀고 민영화를 추진하여 기업의 등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 보다는 당장 오늘의 삶이 불투명한 자국민의 생존과 직결된 사회복지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구급출동을 하다 보면 섬뜩한 일도 많고 취객을 상대하는 등 불쾌한 일도 매우 많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첫 구급출동에서 환자의 생존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에 작은 보람을 느낌과 동시에, 사회 구조적 차원에서의 복지 안전망의 심층화에 대한 고민을 다시금 해보게 되었고
그때부터 홀로사는 노인분 들에 대한 의료봉사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계기를 마련해주신 두 노인 분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실까 지금도 항상 궁금하고 생존해 계신다면 항상 건강 하시고 행복한 노년을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의 이기는 이런 노인 분들의 희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또한 이런 분들이 좀더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야 한다고 봅니다.
이제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나면 추운 겨울이 다가옵니다.
홀로사는 노인분들이 증가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분들이 추운겨울을 무사히 날수 있도록 그분들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어느때보다 그리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