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저항보고서㉛] 우크라이나 하늘엔 새가 날지 않는다
기자명 박설민 기자 입력 2023.10.31 17:1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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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슈프대 생명공학연구소, 472일간 우크라이나 4개 지역 조사
러우 전쟁발 폭격, 홍수, 화재로 조류 생태계 파괴… 번식도 급감
우크라이나 군인들, 조류 보호 활동도 진행… 칡부엉이 등 보호종 다수 구출
‘멸종(Extinction)’. 지구상에 존재하던 어떤 종이 모종의 이유로 세계에서 사라져 개체가 확인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지구의 입장에서 멸종은 항상 일어나는 작은 사건일 뿐이다. 지구의 생명역사가 시작된 38억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의 생명체 대부분이 사라지는 ‘대멸종의 시대’가 존재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멸종의 원인이 기존의 ‘자연현상’에 의한 것이 아닌, 인간이 직접적 원인이 된 멸종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환경오염, 불법 포획부터 지구온난화까지 우리 스스로 자초한 결과물들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이제 지구는 우리에게 묻는다. “너희 스스로 자초한 재앙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이 있는가.” [편집자 주]
전쟁은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생물들에게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폴란드 제슈프 대학교 생물학 및 생명공학 연구소의 에바 뱅그진 교수팀은 2022년 3월 15일부터 2023년 6월 30일까지 실제 현장을 방문해 연구를 진행한 결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우크라이나 전역의 새들이 심각한 위기에 처한 것을 확인했다./ 그래픽=박설민 기자
전쟁은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생물들에게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폴란드 제슈프 대학교 생물학 및 생명공학 연구소의 에바 뱅그진 교수팀은 2022년 3월 15일부터 2023년 6월 30일까지 실제 현장을 방문해 연구를 진행한 결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우크라이나 전역의 새들이 심각한 위기에 처한 것을 확인했다./ 그래픽=박설민 기자
시사위크=박설민 기자 “아침이면 울새와 개똥지빠귀, 비둘기, 굴뚝새 등 수많은 새들의 합창이 숲을 채웠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다. 드넓은 숲과 계곡, 습지에는 우울한 침묵만이 드리웠다.” 1962년 출판된 미국의 저명한 해양생물학자이자 과학저술가 레이첼 카슨의 저서 ‘침묵의 봄(Silent Spring)’에 등장한 한 구절이다. 인간이 초래한 생태계 파괴로 인해 봄이 와도 새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암담한 현실을 묘사한 것이다.
소름끼치는 카슨의 예언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조금 다른 점은 단순한 환경 파괴가 아닌 ‘전쟁’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바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다. 지난해 2월 24일 시작된 러-우 전쟁은 우크라이나 주변 환경을 초토화시켜놓고 있다. 이로 인해 인근에 살고 있던 새들이 생존에 위협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안타까운 점은 현재까지 전쟁이 조류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위험한 분쟁 지역에서의 과학적 연구는 제한돼 있을 뿐 아니라, 전쟁 기간 인간 피해를 집계하는 것도 어려워 다른 종을 신경 쓸 겨를이 없어서다.
그러나 분명 지금 이 순간에도 러-우 전쟁으로 인해 새들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에 <시사위크>에서는 우크라이나 전 지역의 새들이 전쟁으로 인해 어떤 피해를 받고 있는지 연구한 폴란드 제슈프대학교 생명공학연구소 연구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불타버린 우크라이나 지역의 숲./ Uniwersytet Rzeszowski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불타버린 우크라이나 지역의 숲./ Uniwersytet Rzeszowski
◇ 포격으로 쑥대밭이 된 새들의 둥지… 화재로 300여종 치명상
지난해 폴란드 제슈프 대학교 생물학 및 생명공학 연구소의 에바 뱅그진 교수팀은 우크라이나 지역 전역 조류종의 생태 환경 조사를 진행했다. 연구기간은 2022년 3월 15일부터 2023년 6월 30일까지 총 472일. 연구 지역은 △투즐리브스키 리마니 국립공원(Tuzliwsky Limany National park) △드네프르강 하구 인근 흑해 생물권 보전지역 △돈바스 지역 인근의 메오타이다 국립공원(Meotyda National Nature Park) △키이우(Chernihiv) 등 우크라이나 전역이다.
총 15개월에 걸친 대장정을 마치고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에바 뱅그진 교수팀은 우크라이나 지역 내 새들이 직·간접적으로 전쟁에 악영향을 받고 있음을 확인했다. 특히 치명적으로 작용한 것은 ‘포격’이었다. 미사일, 자주포, 박격포 등에 의한 거대한 폭발은 숲, 늪지 등 새들의 주요 서식지를 완전히 파괴했다.
특히 포격 피해를 크게 본 지역은 투즐리브스키 리마니 국립공원이었다. 투즐리브스키 리마니 국립공원 연구원들에 따르면 지난해 3월 2주 동안 발생한 폭격으로 발생한 폭발 분화구를 조사한 결과, 분화구 당 약 500마리 이상의 까마귀 사체를 발견했다고 한다.
에바 뱅그진 교수는 “공원 내 보호 구역은 폭발로 인해 발생한 수많은 분화구로 덮여있었고, 이로 인해 수많은 새들이 죽었고, 둥지가 파괴됐다”며 “공원 내 서식하던 뒷부리장다리물떼새의 둥지들은 하룻밤 사이 흑해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선박이 발사한 200여발의 포탄에 완전히 산산조각났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포격에 이어 발생한 화재는 더 큰 비극으로 이어졌다. 숲 전역에 산불이 발생한 것이다. 산불로 인해 큰 피해를 본 지역은 드네르프강 하구 인근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유네스코(UNESCO)에서 1983년 지정한 생물권 보존 지역이다. 축구장 1만개 넓이에 달하는 이 보존 구역에선 300종이 넘는 조류와 3,500여종의 멸종위기생물들이 살고 있다. 연구진에 따르면 지난해 2월 24일부터 11월 11일까지 이어진 헤르손 전투로 대규모 화재가 발생했다. 이 화재는 위성사진으로도 판별 가능한 수준의 규모였으며, 보호구역 내 300종이 넘는 새들에게 치명적 영향을 미쳤다.
지난 6월 6일 폭파된 ‘노바 카호우카(Nova Kakhovka) 댐’ 때문에 물에 가라앉아버린 드니프로강 하류 인근 마을의 모습. 인간뿐만 아니라 새들의 번식지도 초토화됐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지난 6월 6일 폭파된 ‘노바 카호우카(Nova Kakhovka) 댐’ 때문에 물에 가라앉아버린 드니프로강 하류 인근 마을의 모습. 인간뿐만 아니라 새들의 번식지도 초토화됐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 카호우카댐 폭파로 축구장 7만6,000개 침수… 왜가리 등 물새 둥지 전멸
포탄에 의한 폭격도 위협적이지만, 우크라이나 지역 내 새들의 멸종을 가속화한 가장 치명적 사건은 ‘노바 카호우카(Nova Kakhovka) 댐 폭파 사건’이었다. 지난 6월 6일 헤르손주 노바 카호우카에 위치한 노바 카호우카 댐이 누군가에 의해 폭파된 사건이다. 현재 범인이 확정되진 않았으나, 러시아군의 소행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노바 카호우카 댐 폭파 사건은 그 피해 규모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유럽에서 발생한 가장 큰 규모의 산업 및 생태학적 재난으로 꼽고 있다. 실제로 드니프로강 하류가 일시적으로 범람해 주변 지역을 초토화 시켰고, 상류의 자포리자 저수지는 물 공급이 끊겨 메말라버렸다.
에바 뱅그진 교수팀은 노바 카호우카 댐 인근을 조사한 결과, 수많은 새들의 둥지가 파괴된 것을 확인했다. 댐 붕괴로 범람한 홍수로 대백로, 회색 왜가리, 쇠백로 등 여러 물새종들의 새끼 거의 대부분이 죽었다. 피해 면적은 총 7만6,000 헥타르. 이는 축구장 7만6,000개에 달하는 면적이다. 드네르프 강 하구, 올레쉬키 샌즈(Oleshky Sands) 등 9개의 환경 보전 구역인 에메랄드 지역과 5개의 람사르 습지가 파괴됐다.
에바 뱅그진 교수는 “습지에 서식하는 물고기는 회색 왜가리, 대백로, 쇠백로 등 물새들에게 매우 중요한 먹이원”이라며 “전쟁으로 인한 폭격과 댐 폭파로 인해 강과 습지가 파괴되고 오염되어 왜가리들의 서식지가 완전히 손실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에바 뱅그진 교수는 “헤르손 지역의 댐 폭파에 대한 조사를 좀 더 진행하고자 했으나, 러시아의 점령으로 인해 자세한 소방 활동 및 피해 기록을 얻는 것은 어려웠다”며 “피해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파괴된 상태를 방치한다면 생태계를 원래 상태로 복원하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에바 뱅그진 교수팀에 따르면 전쟁에서 살아남은 새들의 경우, 둥지 파괴와 스트레스 등의 원인으로 번식률이 급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Next Stop Ukraine
에바 뱅그진 교수팀에 따르면 전쟁에서 살아남은 새들의 경우, 둥지 파괴와 스트레스 등의 원인으로 번식률이 급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Next Stop Ukraine
◇ 생존한 새들도 번식 실패… 중간 서식지 파괴로 철새 이동도 불투명
더 큰 문제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새들조차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생존한 조류들의 번식 활동이 현저히 줄었다. 뿐만 아니라 아예 우크라이나 지역을 떠나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마치 전쟁을 경험한 인간이 트라우마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는 것과 유사하다.
실제로 에바 뱅그진 교수팀은 러우 전쟁이 시작된 후, 투즐리브스키 리마니 국립공원에서 해오라기(Nycticorax nycticorax)들의 번식 활동이 멈춘 것을 확인했다. 투즐리브스키 리마니 국립공원은 아프리카에서 툰드라로 이동하는 철새들에겐 가장 중요한 번식지이자,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한다. 그런데 전쟁으로 인해 성체 새들이 번식을 할 수 없어진 것이다. 이는 러우 전쟁이 단순히 우크라이나 지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철새 번식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에바 뱅그진 교수는 “국립공원 내에 서식하는 새들을 관찰한 결과, 6월 달이 해오라기 등 철새들에게 가장 중요한 번식기임에도 성체들은 알을 낳지 않았다”며 “근 1년 넘게 쉬지 않고 이어진 포격과 환경 파괴가 새들에게 얼마나 큰 부정적 영향을 미쳤는지 방증하는 사실”이라고 우려했다.
새들의 번식 감소 및 이탈은 투즐리브스키 리마니 국립공원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전 지역에서 발생했다. 돈바스 지역에 위치한 메오타이다 국립공원에서는 ‘큰머리검은갈매기(Ichthyaetus ichthyaetus)’가 서식지를 떠난 것으로 확인됐다. 돈바스 지역에 서식하는 큰머리검은갈매기의 숫자는 3,000마리.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군집이었다. 이밖에도 △달마시안 펠리칸 △검은머리물떼새( Haematopus ostralegus) △샌드위치 제비갈매기(Thalasseus sandvicensis) 등이 돈바스 지역을 떠났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 역시 상황이 좋지 않긴 마찬가지다. 키이우에 서식하는 핵심 조류종이었던 황새는 2022년 이후 개체수가 급감하고 있다. 특히 전쟁이 확산되기 시작한 4월 황새의 둥지 대다수가 파괴됐다. 그나마 파괴되지 않은 서식지에서도 황새가 둥지를 틀거나 알을 낳는 경우가 크게 줄어들었다.
에바 뱅그진 교수는 “손상된 둥지를 재건하려는 황새 개체수도 많았으나, 일반 새둥지보다 훨씬 큰 황새의 둥지를 복원하는데는 시간이 더 들었다”며 “결과적으로 많은 황새들이 번식을 포기했고, 젊은 개체들은 키이우 산림 지역을 떠나버렸다”고 말했다.
이어 “새들은 매년 동일한 이동 경로를 따라 이주하는데, 이번 전쟁으로 중간 정착지가 파괴되면서 이주가 불가능해지고 있다”며 “휴식을 취하지 못하는 새들은 아프리카에서 툰드라까지 안전하게 날아갈 수 없고, 이는 생태계에 치명적 영향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우크라이나군의 구호활동으로 구조된 새들의 모습. 폭격에 의해 부상을 입거나 철조망, 전선 등에 얽혀 날개가 부러진 새들이 주로 구조된다./ Uniwersytet Rzeszowski
우크라이나군의 구호활동으로 구조된 새들의 모습. 폭격에 의해 부상을 입거나 철조망, 전선 등에 얽혀 날개가 부러진 새들이 주로 구조된다./ Uniwersytet Rzeszowski
◇ 전쟁터에 핀 희망의 꽃… 우크라이나 군, 조류구호활동 진행
폴란드, 우크라이나의 과학자들은 황폐화된 우크라이나 생태계 복구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는 아직까지 요원한 상황이다. 러우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을뿐더러, 피해 규모도 너무 크다. 우크라이나 환경부가 2월 발표한 바에 따르면 이번 전쟁으로 인한 환경파괴 피해액은 최소 514억달러(약 69조원)에 달한다.
하지만 참혹한 전쟁터에서도 희망의 새싹은 조금씩 피어나고 있다. 작전과 함께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새들의 보호 활동도 함께 진행하고 있어서다. 이들은 주로 포격으로 다친 새들이나 철조망, 전선 등에 얽힌 새들을 구호하고 있다.
에바 뱅그진 교수팀과 우크라이나 군인들은 하르코프(Kharkov) 주변 숲에서 철조망에 날개가 얽힌 부엉이를 구조하는데 성공했다. 구조 받은 부엉이는 ‘칡부엉이(Asio otus)’다. 심각한 멸종위기종은 아니지만 개체수 감소가 진행되고 있어, ‘국제 자연 보전 연맹(IUCN)’에선 보호종으로 분류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천연기념물 제324호에 등록돼 있기도 하다.
철조망뿐만 아니라 미사일 잔해도 생존한 새들에겐 위협으로 다가온다. 특히 전선의 경우 지상 동물을 사냥하는 맹금류나 새들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 군인들은 작전 과정에서 미사일 잔해를 치우는 과정에서 여러 새들을 구조했다고 한다.
작전 중 새들을 구조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군인들의 모습./ Uniwersytet Rzeszowski
작전 중 새들을 구조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군인들의 모습./ Uniwersytet Rzeszowski
미사일 잔해에서 우크라이나 군인들에게 구조된 새로는 ‘유럽개미잡이(Eurasian wryneck)’가 있다. 바흐무트 숲 주변에서 구조한 이 새는 딱따구리의 일종인 개미잡이는 나무 속에 살고 있는 애벌레나 개미 등을 잡아먹는다. 그런데 미사일 잔해를 나무로 착각해 내부로 들어갔다 전선에 얽혀 죽을 뻔한 것이다. 이밖에도 현재까지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구출한 것으로 기록된 새는 동부제국독수리(Aquilia heliaca), 말똥가리, 황갈색 올빼미, 긴귀부엉이, 황조롱이, 장화수리, 유럽 피그미 올빼미 등 다양하다.
전쟁은 인류 여명의 시대부터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으며, 여러 문명이 파괴됐다. 물론 전쟁이란 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관점에서만 기록된 역사다. 그 뒤에 가려진 수많은 다른 생물들의 피해는 기록되지 않는다. 때문에 기존 과학 문헌에서는 전쟁 중 동물의 운명에 대해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도 우크라이나에선 새들을 포함에 여러 생물들도 전쟁의 화마에 희생되고 있다. 물론 이번 전쟁으로 사람들이 잃은 것들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하지만 이제 잠시만 서로 간의 총구를 거두고 지킬 수 있는 것을 헤아려야할 때가 아닌가 싶다. 우크라이나 하늘을 날고 싶은 새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멸종저항보고서④] 바다의 주인, 고래가 돌아온다
기자명 박설민 기자 입력 2020.03.18 15:14 댓글 0
‘멸종(Extinction)’. 지구상에 존재하던 어떤 종이 모종의 이유로 세계에서 사라져 개체가 확인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지구의 입장에서 멸종은 항상 일어나는 작은 사건일 뿐이다. 지구의 생명역사가 시작된 38억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의 생명체 대부분이 사라지는 ‘대멸종의 시대’가 존재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멸종의 원인이 기존의 ‘자연현상’에 의한 것이 아닌, 인간이 직접적 원인이 된 멸종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환경오염, 불법 포획부터 지구온난화까지 우리 스스로 자초한 결과물들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이제 지구는 우리에게 묻는다. “너희 스스로 자초한 재앙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이 있는가.” [편집자 주]
우리의 노력으로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을 구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사람들의 50여년간 끈질긴 노력 끝에 고래는 다시 바다로 돌아오고 있다./ 픽사베이
시사위크=박설민 기자: 길을 지나다보면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들을 구해야 합니다’와 같은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캠페인 활동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를 목격한 우리는 잠시나마 캠페인의 취지에 공감하게 된다.
그러나 망각의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온다. 곰곰이 생각해보기엔 너무 바쁘고, ‘우리가 노력한다고 정말로 멸종 위기 동물들을 구할 수 있을까’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에겐 멸종위기종들을 위기에서 구해낼 힘이 있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여러 사람들의 끈질긴 노력 끝에 바다의 주인 ‘고래’들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 근대의 바다, 고래의 피와 인간의 탐욕으로 붉게 물들다
과거 인간에게 있어 바다의 주인이었던 고래들은 ‘정복’의 대상이었다. 고래들은 다른 가축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양의 고기와 기름을 제공했다. 말 그대로 바다의 ‘금광’같은 존재였다. 이 같은 자원들을 얻기 위해 인류는 16세기부터 상업적 포경을 시작했다.
특히 19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인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기계용 윤활유와 연료유의 사용량이 급증하자 고래기름의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후 유럽 등 서양권에서는 포경산업 역시 급격한 성장을 이뤘고 고래를 잡는 선장과 선원들은 막대한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때문에 19세기의 바다 곳곳에서는 죽어가는 고래의 비명 소리와 피로 붉게 물든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는 흰색 향유고래와의 사투를 그린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에 잘 묘사돼 있다. 선원들은 수십 개의 작살을 고래의 등에 찍은 뒤 배로 질질 끌고 다니며 지치게 만든 후 경동맥을 찔러 죽인다. 이때 붉은 피를 뒤집어 쓴 선원들은 기쁨과 탐욕으로 가득 찬 웃음을 짓는다.
19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인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기계용 윤활유와 연료유의 사용량이 급증하자 고래기름의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에 유럽 등 서구권을 중심으로 포경산업이 급속도로 발달했다./ wiki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기선과 폭약 작살이 등장하면서 향유고래, 흰수염고래, 혹등고래 등 대형 고래들이 심각한 멸종 위기에 처하기 시작했다. 석탄 등 화석연료로 운항할 수 있는 기선들은 기존의 범선(바람을 이용해 운항하는 배)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안정성과 기동성을 자랑했다. 또한 폭약 작살은 고래의 몸에 박힌 후 부착된 폭약을 몸속에서 폭발시켜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었다. 이 같은 ‘신식 무기’를 갖춘 인간은 매우 손쉽게 고래들을 사냥할 수 있게 됐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19세기 말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이루면서 서양 열강들과 함께 본격적인 포경을 시작했다. 이후 일본의 과도한 포경으로 인해 북태평양참고래가 지금까지 심각한 멸종위기종으로 몰린 상태다. 우리나라 동해에 서식하던 귀신고래의 씨도 말라 버렸다.
산업혁명 이후 기술의 발달로 폭약작살, 기선 등이 발명되면서 포경산업이 급증했다. 이로 인해 수많은 고래들이 사냥당했고 심각한 멸종위기에 처했다./ 뉴시스
◇ 돌아온 ‘혹등고래’… 포경 규제의 노력이 결실을 맺다
이처럼 근대화된 장비들과 무분별한 포획으로 인해 전 세계 바다에서 고래의 개체수가 급감하자 고래 사냥을 통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국제적으로 포경을 규제하기 위한 움직임은 1931년 9월 24일 체결된 제네바 협약과 1937년 6월 8일 체결된 국제포경단속협정 등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됐으며 1946년 12월 2일 미국 워싱턴에서 국제포경규제협약(ICRW)가 체결되면서 구체화됐다.
이후 국제포경위원회(IWC)는 1966년 혹등고래 등 일부 멸종 위기에 처한 고래종에 대한 포획을 금지했으며 1982년 7월 23일 고래 개체수 보호를 위해 상업포경에 대해 전면 금지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1972년 스톡홀름 유엔(UN) 인간환경회의가 고래 멸종 위기 문제해결을 위해 ICW측에 포경 금지를 요청한 후 10년간의 논쟁 끝에 맺어진 결실이다. 다만 토착민의 생계유지, 과학 연구 목적 등의 포경은 부분적으로 허용됐다.
사람들의 노력에 화답하듯 최근 고래의 개체수는 서서히 회복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혹등고래 개체수 복원 사례다. 심각한 멸종 위기 고래종 중 하나였던 혹등고래는 개체수가 과거 포경으로 위협받기 전 수준으로 회복한 상태다. 혹등고래는 포경이 어업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19∼20세기에 가장 많이 포획된 고래 중 하나다.
2015년 4월 미국 국립해양대기청(NOAA)의 발표에 따르면 세계 혹등고래 14개 집단 중 10개 집단이 멸종 위기 목록에서 제외됐다. 혹등고래는 무분별한 포경으로 인해 과거 1960년대 초반 개체수가 세계적으로 500마리까지 급감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혹등고래는 1966년 IWC의 국제포경제한조약과 1986년 국제포경 전면금지 조약체결 등을 거치며 세계적인 보호를 받기 시작했다. 혹등고래를 주로 사냥하던 국가였던 미국도 1971년 상업적 포경을 금지했다.
이 같은 지속적인 보호는 혹등고래의 개체수를 정상 궤도로 돌려놓는 결실을 맺었다. 혹등고래 개체수는 해마다 평균 10.9%씩 개체수를 회복하며 2005년에는 1만 마리, 현재 약 2만5,000마리까지 증가했다. 이는 포경으로 인해 멸종 위기에 처하기 직전 개체수의 약 93%까지 회복된 수치다. 미국 워싱턴대학교와 NOAA등의 연구진은 오는 2030년쯤에는 혹등고래의 수가 99%까지 회복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캘리포니아대학교 산타크루스 캠퍼스의 고래전문가 댄 코스타 교수는 “기후변화, 멸종 등 끔찍한 소식만 들려오는 지금 시대에 혹등고래가 멸종위기 목록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은 놀랍고도 상징적인 소식”이라고 평했다.
◇ 개체수 회복되자 상업포경 재개 움직임… 전문가들 “지속적 보호 필요한 시점”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모든 고래종들이 멸종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세계적으로 아직까지 향유고래, 흰수염고래 등이 멸종 위기의 문턱 앞에 놓여 있는 상태다. 국내에서도 웃는 고래로 불리는 ‘상괭이’ 등의 돌고래종이 여전히 멸종위기종으로 분류되고 있다.
무엇보다 고래들의 개체수가 어느 정도 안정 단계에 이르자 다시 상업포경을 허용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전 세계에서 가장 고래고기를 많이 소비하는 나라 중 하나인 일본 측이 끊임없이 이를 주장하고 있다. 일본은 그동안 IWC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연구를 이유로 고래를 사냥해 왔다. IWC가 상업포경을 중지한 후 1987년부터 남극해의 고래 생태를 연구한다는 명분으로 ‘조사 포경’을 시작했다.
일본 IWC가 상업포경을 중지한 후 1987년부터 남극해의 고래 생태를 연구한다는 명분으로 ‘조사 포경을’시작했다. 이후 지난 2018년 12월 IWC탈퇴를 결정한 후 상업포경을 재개할 것을 선언한 뒤 지난해 7월부터 다시 상업포경을 벌이고 있다./ 뉴시스
실제로 지난 2018년 슬로베이나에서 개최된 IWC 과학위원회 회의에 제출된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은 2017년 여름 남극해에서 ‘과학 프로그램’을 이유로 총 333마리의 밍크고래를 사냥했다. 이 중 122마리는 뱃속에 새끼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으며 114마리는 아성체(새끼와 성체의 중간 정도) 상태였다. 포획된 고래는 연구 활동 진행 후 식용으로 팔려졌다. 때문에 세계 각국의 전문가들과 환경단체들로부터 과학 연구를 핑계로 금지된 상업포경을 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이후 야마구치, 홋카이도 등의 일본 고래잡이 어부들이 상업포경 재개를 요구하자 일본 정부는 지난 2018년 12월 IWC탈퇴를 결정한 후 상업포경을 재개할 것을 선언했다. 지난해 7월부터 다시 상업포경을 벌이고 있다.
문제는 일본의 상업포경 대상종이 멸종 우려 대상이라는 것이다. 2018년 일본이 포경을 재개하면서 포획하고 있는 종은 밍크고래, 정어리고래 ,브라이드 고래 3종이다. 야생 동·식물 국제거래규제 조약인 ‘워싱턴 조약’에 따르면 이들 모두 멸종 우려 대상에 포함돼 국제적인 거래를 금지하고 있다.
이같이 조약을 무시하는 일본의 상업포경 재개에 대해 세계 각국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호주 정부는 일본이 IWC를 탈퇴하고 상업포경을 재개한다고 선언한 직후 비판 성명을 냈다. 마리스 페인 호주 외교부 장관과 멜리사 프라이스 환경부 장관은 공동성명을 통해 “일본의 상업포경 재개 결정은 매우 유감스럽다”며 “호주는 모든 종류의 상업포경을 강력하게 반대한다”고 밝혔다.
우리나라의 해양수산부도 지난해 7월 비판 성명을 통해 “일본의 상업포경에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며 “우리 수역의 고래자원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해양수산부는 특히 한국과 일본 양국 수역을 왕래하며 서식하는 밍크고래가 일본의 포경대상에 포함된 점을 우려하고 있다. 해양수산부 관계자는 “고래의 보존과 이용은 IWC에서 논의돼야 한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라고 전했다.
세계 환경단체 및 동물단체들의 반발도 거세다. 세계 최대 규모의 국제해양환경단체 시셰퍼드(Sea Shepherd)는 “일본의 상업포경 재개에 따른 고래 및 돌고래 살해에 대해 계속해서 투쟁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IWC 본부가 위치한 영국의 런던에서는 동물보호단체과 환경단체들이 “포경을 멈추지 않으면 도쿄올림픽을 보이콧할 것”이라고 외치며 항의시위를 벌였다.
아울러 전문가들은 일본을 제외한 상업포경은 거의 종식된 상황이지만 버려진 플라스틱, 화학물질, 그물, 혼획(잡으려고 의도했던 물고기와 다른 종류의 물고기가 함께 잡히는 것) 등에 희생되는 고래의 수는 여전히 많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혹등고래와 같이 개체수를 회복하는 종도 있겠지만 여전히 멸종의 위기에 몰려있는 종도 있어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린피스 관계자는 “지난 수백 년 간 인간은 수많은 종의 고래의 씨를 말려왔다”며 “이제는 오랜 세월 지구의 바다를 지켜온 고래를 우리가 지켜야 할 때”라고 전했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서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들을 걱정하거나 환경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풍차로 달려가는 ‘돈키호테’처럼 망상가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고래들은 그 ‘망상가’들과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바다로 돌아오고 있다. 이제 우리도 인간의 행동에 의해 벼랑 끝까지 몰린 생명들을 위해 꿈꿀 수 있는 돈키호테가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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