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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성지
충청남도 서북부의 중심지에 위치해 내포 지역 정치, 행정, 문화, 교통, 체신의 중추이자 군사적으로도 서해안 방위의 핵심 역할을 담당해 온 홍주성은 그 관할 범위가 넓었던 만큼 순교자들도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홍주는 결성과 합해 홍성이 되어 행정구역상 홍주라는 지명은 없다.
조선 시대에 홍주부를 두어 관찰사가 주재했던 홍성은 관할 구역만 해도 북으로는 평택 이남, 동으로는 경부선 서부 지역, 남으로는 금강 이북의 22개 군에 이르렀다. 홍성읍의 한복판에 있는 홍주성은 전체가 순교 현장이다.
읍성 안 관아시설은 특히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형벌이 집행되었던 곳으로 구체적인 순교터로는 목사가 머물던 동헌, 홍주옥, 진영장이 머물던 조양문 앞, 옛 저잣거리, 북문교 건너 월계천변 참수터, 생매장터로 사용되었을 곳으로 추정되는 홍성천과 월계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부근이 있다. 이렇듯 구석구석이 처형지로 사용됐던 홍주성은 아직도 무심하게 남아 있는 고목들과 함께 당시 교우들이 받았던 엄청난 핍박을 그대로 전해 준다.
홍성은 예로부터 최영 장군, 만해 한용운 선사, 백야 김좌진 장군, 사육신의 하나인 성삼문 등을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1905년 을사늑약에 의분을 참지 못한 의병들이 순국한 충절의 고장이기도 하다. 홍성의 역사를 찾는 순례자들은 죽음을 무릅쓴 신앙 선조들의 굳건한 신앙과 함께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몸 바친 우국 열사들의 향기를 함께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여행길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홍성을 찾는 순례객들은 미리 지역에 대한 사전 지식을 갖추고 떠나는 것이 유익하다. 특히 단순한 경치 구경을 넘어서 선조들의 향기를 맡으려는 여행자는 목적지의 역사와 유래 등을 진지하게 살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홍성에 도착해서 홍주성 내 군청에 들러 간단한 여행안내 책자를 받으면 개략적으로나마 지역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다. 홍성은 서울에서 출발할 경우 2시간이 조금 넘게 소요된다. 홍성역에서 순교 현장인 홍주성까지는 걸어서 20분 남짓이면 갈 수 있어 열차순례도 가능하다.
홍주성은 홍성읍 한복판, 남산 공원에 쌓은 최장 1772미터에 달하는 성곽이 있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810미터 규모로 최초의 축성 연도에 대한 명확한 자료는 없으나 고려 시대로 추정된다. 그 후 여러 차례의 보수와 확장 공사를 거쳤다. 성내 35개 동에 이르렀던 관아 건물 중에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조양문(朝陽門)과 22칸의 목조 기와집으로 건축된 홍주목 관아의 동헌인 안회당(安懷堂), 홍주아문(洪州衙門), 여하정(余何亭)뿐이다. 1870년 흥선대원군이 조양문과 홍주아문, 안회당 등의 현판을 사액하였다. 홍주성 유적지는 1972년 사적 제231호로 지정되었다.
홍성읍 시가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조양문인데 홍주성을 드나들던 동서남북 4개 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동문이 바로 조양문이다. 당시 홍주군이 관할하던 넓은 지역에서 붙잡혀 온 교우들은 이 문을 통해 홍주성 안으로 들어갔고, 멀쩡하게 걸어 들어갔던 그들은 시체가 되어 성벽 밖으로 던져졌다. 조양문의 왼편으로 골목을 조금 돌아가면 군청이 나오는데 그 입구에 서 있는 것이 홍주아문이다.
홍주 아문을 돌아 청사 안으로 들어서면 그 안이 바로 순교의 생생한 숨결이 배어 있는 동헌 안회당이 복원되어 있다. 청사 안뜰에 무심하게 서 있는 고목들은 당시 순교자들이 처분만을 기다리며 오랏줄로 꽁꽁 묶여 있던 기둥들이었고 바닥에 깔린 흙 위에는 선조들의 피와 고통이 서려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지역에서 모진 고통을 당하고 숨을 거둔 선조들이 누구누구이며 얼마나 많은지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관할 지역의 규모와 지리적 위치로 볼 때 많은 순교자가 배출됐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홍성군 내의 문서에는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부분들이 거의 나타나 있지 않아 이에 대한 조사와 정리가 시급하다.
교회 순교록에 따르면 홍성의 초기 박해(1791-1801년) 순교자는 8명으로 이 중 원시장 베드로,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 라우렌시오, 황일광 시몬 등 4명의 시복시성이 추진되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중기 박해(1812-1839년) 때는 이여삼 바오로 등 4명이 순교했으며, 이후 1866년부터 1870년대 초까지 계속된 병인박해 때 가장 많은 200명이 순교해 교회 순교록과 관변기록 등 기록상 확인된 홍성 순교자는 모두 212명에 달한다. 그러나 순교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무명 순교자들까지 고려하면 실제 순교자는 1000여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순교록에 의하면 홍성 순교자는 참수형보다는 교수형이 많았고 생매장된 순교자도 있었다. 많은 순교자가 성 안에서 처형된 후 그 시체는 성 밖으로 내던져졌다. 군청을 나와 왼편으로 약간의 언덕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 높지 않은 성벽이 나온다. 바로 이 성벽 위에서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오직 천주를 배반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차디찬 시체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천주교인들에 대한 혹독한 탄압을 일삼았던 흥선 대원군이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에서 승리하고 그해 서울 종로와 전국 각지에 세운 척화비(斥和碑)는 홍성에서도 발견된다. 척화비는 홍성읍에서 차를 타고 서산 방면으로 15분가량 달리면 구항 면사무소 건너편 산자락에 철책이 둘러쳐진 채로 서 있다. 산허리를 돌아 나오는 세찬 세월의 바람에 척화비의 글자들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지만, 당시의 서슬 퍼런 박해의 기억과 굳은 신앙을 아직도 우리에게 되새기게 해준다.
2004년 홍성 본당과 홍성군에 의해 지역 천주교 순교사가 공론화되고 순교성지 발굴이 본격화된 지 4년만인 2008년 3월, 홍성 본당은 홍성군과 함께 홍주의사총 옆 홍주 순교성지 공원 터에 순교비를 세우고 성역화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순교비가 세워진 곳은 홍주읍성 북문 밖을 흐르는 월계천과 조양문 밖을 흐르는 홍성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지점으로 1868년 생매장으로 순교한 최법상 베드로, 김조이 루치아, 김조이 마리아, 원 아나타시아 등을 비롯해 박해시대 홍주읍성 안에서 옥사나 교수형으로 순교한 순교자들의 시신이 매장된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이다.
순교비 앞면에는 ‘천주교 홍주순교성지’, 뒷면에는 ‘이곳 홍주 골은 믿음을 지킨 성지로 충청 최초 순교자가 승천한 곳 이 숭고한 넋은 평화의 빛이 되리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아울러 순교비 옆 표지석에는 ‘이곳은 순교의 정신으로 내 나라 내 고장 홍주의 얼을 견고히 하는 거멀못이 될 것임에 삼가 순교자를 현양하는 마음으로 이 비를 세운다’라고 적혀있다.
홍성 본당은 순교비 제막과 하천부지 임대에 관심을 두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홍성군과 협력해 순교비가 세워진 하천부지 일대를 홍주 순교성지 공원으로 조성하고, 공원에는 십자가의 길을 비롯해 순례객들이 언제든 찾아와 순교자의 삶을 묵상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계획을 세웠다. 또한 2011년 6월 18일 40년 넘게 사용한 옛 성당을 헐고 그 자리에 새 성당을 지어 봉헌하며, 새 성당을 원시장 베드로와 박취득 라우렌시오 등 순교자 212위와 무명 순교자까지 1000여 명이 넘게 순교한 홍주(홍성의 옛 지명)의 교회사적 의미를 살려 홍주 순교자기념성당으로 명명했다.
홍성군은 장기적인 홍주성 복원사업을 진행하면서 대표적인 순교터였던 홍주 감옥을 2012년 복원했다. 홍주 감옥은 기록으로 확인된 홍주의 순교자 212명 중 가장 많은 113명이 순교한 곳이다. 이곳에서 주로 교수형이 시행됐고, 굶주림과 목마름, 심한 매질로 인한 장독과 전염병, 포졸들의 괴롭힘으로 비참한 옥중생활을 하다가 옥사한 이들도 많았다. 이곳에서 순교한 충청도 최초의 순교자인 복자 원시장 베드로는 3개월에 걸친 매질에도 죽지 않자 우물물을 이용해 얼려 죽이는 형벌을 받았다. 이 우물 또한 복원되었다. 이곳은 또한 프랑스의 첫 번째 선교사였던 성 모방 신부와 두 번째 선교사였던 성 샤스탕 신부가 1839년 기해박해 때 홍주관아에 자수하여 머물던 곳이고, 성 다블뤼 주교와 그 일행인 성 위앵 신부, 성 오메트르 신부, 성 황석두 루카까지 모두 6명의 성인이 머물렀던 역사적 장소이다.
대전교구는 2014년 1월 15일자로 홍주 순교성지를 전담할 신부를 발령했다. 홍주 순교성지는 우선 감옥 앞의 상가 건물을 일부 임대해 아담한 성당과 사무실을 마련해 매일 11시에 미사를 봉헌하고, 성지 신부와 함께 읍내 전역에 흩어져 있는 6곳의 순교터와 증거터를 순례하고 있다.
상홍리 공소
상홍리 공소의 설립 서산은 내포(內浦)의 한 지역으로 충청남도 서북단 태안반도에 위치해 있다. 잘 알려졌듯이, 내포는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에 의해 신앙이 전파된 후 ‘한국 천주교 신앙의 못자리’가 되었던 지역이다. 이러한 까닭에 이 지역에는 오랜 역사를 이어온 본당과 공소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글에서 살펴볼 서산 상홍리(上紅里) 공소도 그러한 곳 가운데 하나다.
상홍리 공소는 서산시 음암면 상홍리에 있으며 과거에는 ‘가재 공소’라고 불렸다. 가재는 갈재 밑에 있는 마을로, 가래나무가 많았다 하여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이 마을에 공소가 세워진 것은 적어도 1884년 이전의 일이었다. 1880년대 초, 충청도의 중앙과 서부 지역을 담당하던 두세(C.-E. Doucet, 丁加彌, 1853-1917) 신부의 1883-1884년도 교세 통계표에서 가재 공소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공소 이름만 있을 뿐, 신자 수 등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신자 수는 1884-1885년도 교세 통계표에 처음 나오는데, 당시 81명이었다. 그 이듬해에는 102명으로, 서산에서 가장 큰 공소였다. 그러나 1886-1887년도에는 신자 수가 52명으로 급감하였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줄어들어 1890년대에는 30명 대에 머물렀다.
가재 공소는 1890년까지 두세 신부의 사목 하에 있다가 1890년 양촌 본당이 설립되면서 그 관할 공소가 되었다. 양촌 본당의 초대 주임 퀴틀리에(J. J. L. Curlier, 南一良, 1863-1935) 신부는 1899년에 양촌이 본당의 중심지로 적합하지 않다고 보고 본당을 합덕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가재 공소는 1908년 수곡 본당이 설립되어 그 관할 공소가 될 때까지 18년 동안 양촌(1899년 이후 합덕) 본당 신부의 사목 하에 있었다.하에 있었다.
2011년 보수공사를 마친 구 사제관. 바로 오른쪽에 상홍리 공소 성당이 있다.수곡 본당의 설립 충청남도 홍주(洪州)에 수곡(결성) 본당이 설립된 것은 1908년이다. 당시 홍주 지역의 신자들은 뮈텔(G.-C.-M. Mutel, 閔德孝, 1854-1933) 주교에게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합덕 본당의 크렘프(H. J.-M. Krempff, 慶元善, 1882-1946) 신부도 그것을 희망하였다. 1907년도 서울교구 연보에 따르면, 크렘프 신부는 결성 지역의 개종 운동을 설명하면서 많은 예비 신자들의 교육을 가까이에서 보살필 수 없음을 토로한 바가 있었다. 뮈텔 주교는 크렘프 신부에게 주어진 부담이 과중하다는 점을 감안하여 본당의 설립을 결정하였다. 그 결과 1908년 수곡 본당이 설립되고, 초대 주임으로 폴리(J. M. D. J. B. Polly, 沈應榮, 1884-1950) 신부가 부임하였다. 본당 설립 당시의 교세 통계표가 없어 관할 구역과 신자 수를 파악할 수 없지만, 다만 1909-1910년도 통계표를 보면, 관할 구역은 덕산, 해미, 서산, 홍주, 결성이었고, 신자 수는 본당과 공소를 합쳐 1,305명이었다.
20대의 젊은 폴리 신부는 열의에 찼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11년 서산과 태안에 2명의 전교 회장들을 보냈으며, 1913년경에 회장들을 위한 피정을 마련하여 기도와 교리 강의 등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희망했던 것만큼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특히 수곡 본당과 인근 지역이 그의 근심거리였다. 결성에서 생활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신자들이 그곳으로 이주하는 것을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게다가 본당 주변의 마을들에는 천도교(天道敎)인들만 살았기 때문에 새 신자들을 얻기도 어려웠다.
이러한 어려움을 겪던 폴리 신부는 1914년 본당을 떠나게 된다. 그해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한국에서 활동하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일부가 소집령을 받아 프랑스로 귀국하게 되었는데, 그 대상에 폴리 신부가 포함된 것이다. 그와 함께 합덕 본당의 크렘프 신부도 소집령을 받아 본당을 떠나게 되었다. 이에 뮈텔 주교는 라리보(A. J. Larribeau, 元亨根, 1883-1974) 신부에게 합덕 본당과 수곡 본당을 맡도록 하였다. 라리보 신부는 서산, 당진, 예산, 아산, 홍성 등을 맡아 3,500명이 넘는 신자들을 사목했다.
서산으로의 본당 이전 1917년 4월 19일 서울 대목구장 대리이자 약현 본당 주임인 두세 신부가 선종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 대목구는 인사 이동을 단행하였는데, 라리보 신부가 교구의 당가(경리)로 임명되었다. 이로 인해 합덕과 수곡 본당을 맡을 신부가 공석이 되었지만, 신부들의 수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임명을 그해 9월에 있을 서품식 이후로 미루기로 하였다. 9월 22일 서품식이 거행되어 4명이 사제품을 받았다. 그들 가운데 박우철(朴遇哲, 바오로, 1884-1956) 신부는 합덕 본당, 안학만(安學滿, 루카, 1889-1944) 신부는 수곡 본당의 신부로 각각 임명되었다.
10월 2일 안학만 신부는 서울을 떠나 부임지로 향했다. 하지만 그가 향한 곳은 수곡 본당이 있는 홍성군 구항면 공리가 아닌, 서산군 팔봉면 금학리(소길리)였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다음의 자료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준다.
그간 금학리의 본당 위치 문제로 공소들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습니다. 즉 모든 교우들이 금학리는 교우들의 중심지가 될 수 없다고 하며, 중심지는 용장리다, 여미다, 해미다, 상홍리다, 산성리다, 이렇게 서로 논쟁하고 있습니다. 산성리 교우들은 본인을 찾아와서 “2천 원으로 50여 칸의 기와집을 마련할 것이니 우리한테 오십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금학리는 주교님이 정하신 곳이다. 그러므로 주교님의 지시 없이 이렇게 행동하면 그것은 불복이다. 그러므로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좀 진정된 것 같습니다만, 단념한 것은 아닙니다. 폴리 신부의 신부댁은 이미 2,800원에 팔렸는데, 계약금 400원은 전 요왕이 받았습니다.
위 글은 안학만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1917년 12월 3일자 서한의 일부다. 본당의 소재지를 두고 서산 지역의 공소 신자들 간에 논쟁이 발생하자, 안 신부는 금학리에 본당이 세워지는 것이 뮈텔 주교가 정한 것임을 명확하게 밝혔다. 이를 통해 뮈텔 주교가 본당의 이전을 결정하고 안 신부를 서산으로 보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뮈텔 주교는 왜 본당의 이전을 결정하였고, 서산의 공소들 가운데서도 소길리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수곡 본당과 인근 지역이 사목상의 어려움이 많았다는 점은 이미 앞에서 검토하였다. 라리보 신부도 냉담자가 많고 비신자들의 개종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 수곡 본당에 대해 비판적인 전망을 내보였다. 뮈텔 주교는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본당의 이전을 결정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본당의 이전지로 서산 금학리를 선택한 이유는 이곳이 오랜 역사를 가진 견고한 신앙 공동체였고, 수곡 본당의 공소들 중에서 가장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금학리 공소는 두세 신부의 1883-1884년도 교세 통계표에 나올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진 공소였다. 또한 퀴틀리에 신부와 파스키에(P. J. Pasquier, 朱若瑟, 1866-?) 신부가 거처한 적이 있었으며, 여러 명의 신학생들이 배출되었다. 신자도 많아 1916-1917년도 교세 통계표에 따르면 금학리 공소의 신자는 288명에 이르렀다.
1918년 당시, 금학리 본당의 관할 구역은 서산과 홍성으로, 공소는 18개였다. 신자는 본당과 공소를 합쳐 총 1,820명이었다. 상홍리 공소도 금학리 본당의 관할 공소들 중 하나였고, 신자수는 121명이었다.
본당을 금학리에서 상홍리로 1919년 9월 23일 폴리 신부가 서울에 도착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한국을 떠난 지 5년 만에 돌아온 것이었다. 종군했던 선교사들이 한국에 되돌아옴에 따라 서울 대목구는 인사이동을 발표하였다. 그해 10월 하순, 안학만 신부는 송도(개성) 본당으로 가고, 폴리 신부가 금학리 본당을 맡게 되었다. 폴리 신부는 1920년 3월 25일 본당을 금학리에서 서산군 음암면 상홍리로 이전하였다. 그가 본당을 이전한 이유를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위 사료(안학만 신부의 1917년 12월 3일자 서한)를 통해 상홍리 공소 신자들이 본당의 이전에 적극적으로 나섰을 가능성이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본당 이전 직후인 1919-1920년도 교세 통계표에 따르면, 상홍리 본당의 관할 구역은 서산, 홍성, 예산으로, 공소는 18개였다. 상홍리 본당의 신자는 118명이었고, 총 신자 수는 1,805명이었다.
본당을 이전하였으나, 성당과 사제관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였을 것이다. 기존에는 상홍리 성당이 1919년에 건축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자료를 확인한 결과, 성당이 세워진 것은 1921년이었다. 1921년 3월 폴리 신부는 “그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을 건축하는 중”임을 보고하였다. 그리고 ‘관보’ 제2718호(1921. 9. 1)의 ‘포교소 설치계’(布敎所 設置屆)를 보면 4월 28일에 상홍리 성당의 설치계가 재출되었다. 이를 정리하면, 상홍리 성당은 1921년 3월과 4월 28일 사이에 완공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당은 전통 한옥 목조 양식 건물이었다. 이때 성당과 함께 사제관도 건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홍리 본당의 신부와 신자들 상홍리 본당의 토대가 마련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21년 8월 1일자로 폴리 신부가 예수성심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해 10월 초순, 후임으로 멜리장(P. Melizan, 梅履霜, 1877-1950) 신부가 부임하였다. 멜리장 신부는 10여 년간 활동하면서 본당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21년 10월경에는 멜리장 신부의 모친 세사리 여사가 종(일명 ‘세사리 종’)을 기증함에 따라 1923년경에 종루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1922-1923년에는 서산 지역의 청년들이 교회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 ‘서산 천주교 청년회’를 조직하였다. 서산 천주교 청년회는 1922년 6월 3일에 창립된 경성교구 천주교청년회 연합회에도 참여하였는데, 1923년 2월 당시 회원이 44명이었다. 멜리장 신부는 교육 사업에도 관심을 가져 1922년 청소년들을 위한 야학을, 1923년경에 청년들을 대상으로 강습소를 개설하기도 하였다.
1932년 7월, 10여 년간 재임하면서 본당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 온 멜리장 신부가 옥천 본당으로 가고, 바로(P. Barraux, 范, 1903-1946) 신부가 부임하였다. 바로 신부의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순교자 유해를 발굴 · 안장한 것이었다. 그는 병인박해 때 해미에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고 순교자들의 목격 증인들을 수소문하였다. 그리고 다행히 순교 장면을 직접 목격한 이주필(李周弼), 박승익(朴承益) 등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증언을 토대로 조사를 한 후, 1935년 4월 1일 백락선(白樂善, 요한) 회장 등의 신자들과 함께 무명 순교자들이 묻혀 있는 해미면 조산리 일대를 발굴하여 유해를 수습하였다. 바로 신부와 신자들은 그날 대곡리 공소에서 1박을 하고, 4월 2일에 만장을 앞세운 유해 상여를 해미읍성 → 음암면 유계리 → 일곱거리를 거쳐 옮긴 후 상홍리 성당 뒷산 백씨 문중 묘역에 안장하였다. 내용 출처: 가톨릭 굿뉴스 성지에서 펌 하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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