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위치: 유럽 중부
인구: 9,137,561명 (2023년 추계)
수도: 빈
면적: 83,879㎢ 세계면적순위
공식명칭: 오스트리아 공화국 (Republic of Austria)
기후: 대륙성기후, 해양성기후
민족 구성: 오스트리아인(91%), 유고슬라비아인(4%), 터키인
언어: 독일어
정부/의회형태: 연방제 / 양원제
종교: 로마가톨릭(74%), 개신교(5%), 이슬람교
화폐: 유로 (€) 환율계산기
국화: 에델바이스
대륙: 유럽
국가번호: 43
GDP: USD 477,672,000,000
인구밀도: 107명/km²
전압: 220V / 50Hz.
도메인: .at
오스트리아와 한국과의 관계
▶ 외교
▶ 경제·통상·주요 협정
▶ 문화교류·교민 현황
요약
유럽의 국가. 수도는 빈이며, 공용어는 독일어이고 로마카톨릭교가 우세를 보인다. 혼합 자유시장경제와 국영경제가 발달했으며 제조업이 GNP의 약 34%를 담당한다. 음악분야에서 문화적 공헌을 했으며 이 전통은 계속되고 있다.
수도는 빈이며, 남북 길이 300km, 동서 길이 약 560km이다. 서쪽으로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 북서쪽으로 독일, 북쪽으로 체크, 동쪽으로 헝가리, 남동쪽으로 슬로베니아, 남서쪽으로 이탈리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자연환경
오스트리아는 3개의 지리적 지역으로 나뉜다. 독일, 리히텐슈타인 공국, 스위스, 이탈리아와 함께 유럽 알프스 산맥을 차지하고 있는 오스트리아의 알프스 산맥지역은 국토의 약 2/3를 이루고 있으며, 이 지역으로 인해 유럽에서 가장 산이 많은 주요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몇몇 산은 해발 3,000m 이상이며, 3,797m까지 솟아 있는 그로스글로크너는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국토의 약 1/10을 차지하는, 수목으로 덮인 고지대인 보헤미아 대산괴는 체크 북쪽으로 펼쳐져 있는 광범위한 고지대의 일부이며 대체로 고도 1,200m를 넘지 않는다. 빈 분지를 포함하는 저지대는 동부의 거의 1/4을 차지한다. 이 저지대에서 주요농업활동이 이루어지지만 해발 150∼400m에는 구릉이 많다. 도나우 강과 이 강의 오스트리아 지류들이 거의 전지역으로 흐르며, 수많은 강과 가파른 지형이 수력발전의 가능성을 높여준다.
습기가 많은 대륙성기후(추운 겨울과 따뜻하거나 덥고 습한 여름)는 오스트리아 북동부의 특색을 이루며 남부와 서부의 알프스 산맥 기후와 대조를 이룬다. 비가 많은 서부지역은 연강수량이 약 1,000㎜이며 동부 농업지역은 다소 적다. 저지대와 산이 많은 동부지역의 평균기온은 -1℃(1월)∼20℃(7월)에 이르며, 3,000m가 넘는 산들은 1년 내내 눈으로 덮여 있다.
동부에 있는 경작지는 비옥한 토양, 특히 기름지고 검은 체르노젬토(土)가 특징이다. 전국토의 1/4인 목초지와 2/5인 삼림지역의 특성과 분포는 주로 고도에 의해 결정된다. 고도 이외에 오스트리아 산골짜기에서 흔히 일어나는 따뜻하고 건조한 남풍(푄) 또한 식물과 토지의 용도에 영향을 준다. 남쪽 사면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경작지와 목초지로 이용되고, 북쪽 사면은 삼림으로 남아 있다.
오스트리아는 중부 유럽에서 나무가 가장 빽빽하게 많은 나라이며, 숲은 대개 가문비나무 종류와 약간의 낙엽송·너도밤나무·참나무 등으로 이루어졌다. 야생동물로는 평원과 낮은 구릉지대에 노루가 있으며 더 높은 곳에 붉은사슴이 서식한다. 한때 오스트리아에 많았던 야생염소와 스위스영양은 거의 소멸되었다가 지금은 보호되어 그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마그네슘의 주요원료인 마그네사이트의 전세계 생산량 중 1/10가량을 생산하며, 적당량의 석유, 천연 가스, 아탄, 갈탄 등이 매장되어 있다. 철광석 생산은 국내의 강철 생산량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오스트리아는 공업에 필요한 다른 많은 광물이 부족하여 수입을 하거나 가능하면 재생 이용해야 한다.
국민
인구의 99%가 독일어를 사용하는데, 일반적으로 어투가 독일보다 더 부드럽고 느리며 선율이 있다. 인구의 약 85%가 로마 가톨릭교도이며, 6%가량이 신교도이다. 2023년 기준 인구는 913만 명이다. 인구증가율이 0%대로 인구 노령화를 보이고 있으며, 인구의 1/5 이하가 15세 이하이고 1/5 이상이 60세 이상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몇 십 년 동안 동부에서 서부로 뚜렷한 인구이동이 있었다. 1956년 헝가리의 도피자를 포함해서 동유럽 국가에서 쫓겨온 사람들의 유입이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 혼란스러운 몇 년 동안의 출국이민으로 국가인구는 어느 정도 감소했다. 증가하는 도시인구는 이 나라 전인구의 약 66%에 달한다(2020).
언어
가장 대표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는 오스트리아 독일어로, 교육, 출판, 공공시설, 웹사이트 등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스트리아 독일어를 사용한다. 오스트리아 독일어는 거의 대부분이 독일어와 비슷하지만, 어휘나 문법이 약간 다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등 독일어권 국가들은 독일에서 사용하는 독일어를 표준 독일어로 지정하고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탈리아, 벨기에, 덴마크 등지에서도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다만 오스트리아 독일어는 타 독일어 방언들에 비해서는 약간 독특한 면이 있어서, 다른 독일어권 국가들과 바로 소통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다. 오스트리아 인구의 88.6%가 독일어나 그 방언을 사용하며, 이중에는 오스트리아에 거주하는 독일인 2.5%도 포함한다. 오스트리아 독일어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는 언어는 튀르키예어 2.8%, 세르비아어 2.21%, 크로아티아어 1.63%, 영어 0.73%, 헝가리어 0.51%, 보스니아어 0.43% 등이 있다.
오스트리아 연방주들 중 하나인 카린시아와 스티리아 등 오스티라아 극동부 지방에는 슬라브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다. 특히 이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에 헝가리의 영향을 지대하게 많이 받았기 때문에, 헝가리어와 크로아티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동구권 국가들에서 온 국제이민 노동자들과 그들의 후손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피하여 도망쳐온 난민들과 그 후손들로 구성된 비오스트리아 출생 국적자들도 상당히 많은 수이며, 1994년부터는 집시족들도 공식적인 소수민족으로 인정을 받았다.
2001년 연구결과에 의하면 오스트리아에는 약 710,926명의 외국인들이 살고 있다고 전했고, 이들 중 283,334명이 옛 유고슬라비아에서 넘어온 사람들이라고 전했다. 오스트리아에서 2번째로 많이 쓰이는 언어는 터키어로, 대략 20만 명에서 30만 명 정도가 사용하며 주로 주변의 쿠르드족이나 튀르키예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사용한다. 3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언어는 독일어로, 약 124,392명 정도가 독일어를 사용한다. 주로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의 티롤 주, 루마니아, 소련 등에서 넘어온 독일계 이민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편이다.
문화예술
오스트리아의 현대 문화환경은 풍부한 유산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유산은 건축과 시에서는 중세부터, 의학과 과학에서는 18, 19세기부터 이어져 내려왔다. 마찬가지로 빈 화랑들은 많은 옛 대가들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어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편이다.
오스트리아는 음악분야에서 가장 높이 인정되는 문화적 공헌을 했으며 이 전통은 계속되고 있다. 유명한 오스트리아 작곡가로 요제프 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프란츠 슈베르트, 요한 슈트라우스가(家) 등이 있다. 아르놀트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안톤 폰 베버른 등은 현대음악의 창시자에 속한다.
문학에서는 종종 독일어 문화의 정체지역으로 간주되기도 했지만, 19세기 고전기 이후의 프란츠 그릴파르처, 요한 네스트로이, 페르디난트 라이문트 등과 20세기 초기의 후고 폰 호프만슈탈, 아르투르 슈니츨러 같은 작가들은 독특한 오스트리아의 특성을 보여주었다. 20세기 후반에 국제적 명성을 얻은 작가로 슈테판 츠바이크, 로베르트 무질, 페터 한트케 등이 있다. 오스카르 코코슈카와 알프레트 쿠빈은 오스트리아 현대미술의 최초의 창조자에 속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완전히 재조직된 빈 국립 오페라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 와 함부르크와 뮌헨의 오페라와 같은 위치를 차지한다. 빈 교향악단은 세계의 음악도시에서 연주했다.
역사
오스트리아가 현재의 국경선 안에 정착한 것은 초기 구석기시대부터였다. 할슈타트 근처에 있는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이 대체로 약 3,000년 전에 서부와 중부 유럽에 존재했던 철기시대 문화에 그러한 이름을 갖게 했다. 이 지역의 주요거주자는 일리리아인으로 알려졌다. BC 400년경에 켈트족이 침략해서 노리쿰이라는 왕국을 세웠고, BC 200년 이후에 이곳의 철광석 광산에 이끌린 로마인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BC 15년경 로마인들은 오스트리아 전역을 차지했으며, 라이티아·노리쿰·파노니아 등 세 주를 만들어 번영을 누렸고, 토착민들을 로마화시켰다. 도나우 강 북부에 거주하는 게르만족들의 로마 영토에 대한 계속되는 침략(167∼180)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 의해 격퇴되었다. 5세기 로마의 멸망과 함께 수많은 게르만 부족들이 이 지역을 지나갔으며, 이곳의 최종적인 인종 구성은 바이에른족과 슬라브족에 속하는 아바르족이 정착한 6세기에 이루어졌다.
바이에른족과 슬라브족은 꼭 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프랑크족 사람들은 아바르족을 위험하게 여겼다. 샤를마뉴 대제가 독립심 강한 기질의 바이에른족을 정복했고 계속해서 아바르족을 멸망시켰다. 이후에 이 지역은 완전히 그리스도교화 되었고 인종적으로는 게르만화 되었다.
동쪽의 마자르족과의 50년에 걸친 투쟁 끝에, 장차 오스트리아가 될 뚜렷한 정치적 실체가 976년에 바벤베르크가(家)의 레오폴트 1세와 함께 나타났다.
1156년경에 오스트리아는 바벤베르크가의 지배를 받는 공국이 되었으며 경제적·문화적으로 번영했다. 1246년 프리드리히 2세가 계승자 없이 죽자 오스트리아 귀족들은 보헤미아의 왕자 프렘슬 오타카르 2세를 군주로 선출했다. 그가 1278년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 4세(후에 신성 로마 제국의 루돌프 1세)에게 패배함으로써 1918년까지 지속된 오스트리아에 대한 합스부르크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그뒤 수세기 동안에 합스부르크가는 오스트리아·보헤미아·헝가리를 중심으로 왕국을 세웠다. 그들은 그들의 국경 안에서 개신교도들의 활동을 억눌렀으며, 투르크인들의 침략에 대항하는 전투를 계속했다.
1800년대 초기의 나폴레옹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의 붕괴를 가져왔으며 오스트리아 제국을 창조했다.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는 독일어 사용 국가들 사이에서 오스트리아의 패권을 확보하려고 노력했으나 옛 질서에 대한 그의 보수적인 지지, 전제정치에 대한 믿음, 비민주적인 관행들이 빌미가 되어 제국을 혼란시킨 단기간의 혁명(1848)이 일어났다.
프로이센의 힘은 더욱 커졌으며 오스트리아 제국 내의 여러 소수민족들은 근대 다국적 국가의 도전에 대응하는 정부의 무능함에 대해 극심한 압력을 가했다. 1866년 프로이센과의 소규모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가 패하자 제1의 독일어 사용 국가로서 프로이센의 지위가 확립되었고 오스트리아는 제국을 분할해야 했으며,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국이 형성되었다.
치솟는 민족주의 감정이 왕국을 계속 혼란시켰으며, 1914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 의해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되자 오스트리아 제국을 붕괴시킨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몇 개의 독립국으로 분할되었으며, 오스트리아는 독립공화국이 되었다. 일부 오스트리아인들이 독일과 연합할 것을 지지했지만 국제연맹이 이를 수락하지 않았으며 이후 20년 동안 오스트리아는 독일 나치주의자의 위협이 증가하는 가운데 자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분투했다.
1938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합병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5년에 공화국은 재건되었으나 연합점령군은 1955년까지 남아 있었고, 그후에 오스트리아가 중립을 유지할 것과 독일과 연합하지 않으며 합스부르크가를 되찾지 않을 것을 약속하자 철수했다. 1966년 오스트리아 사회당은 여당이 되어 오스트리아의 부유하고 안정된 경제를 지속시켰다.
종교
2001년 기준으로 오스트리아 전체 인구의 74% 정도가 가톨릭를 믿었다. 또한 인구의 5% 정도가 개신교를 믿었다. 오스트리아의 기독교인들, 즉 천주교 신자들과 개신교인들 모두가 수입의 1% 정도를 반드시 교회에 상납해야 하며, 이를 ‘교회기부금(Kirchenbeitrag)’이라고 부른다. 20세기 후반부터 점차 기독교 신자수가 줄어들고 있는데, 2018년에 새롭게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전체 오스트리아 인구의 56,9% 밖에 되지 않는 5,050,000여 명 정도만이 가톨릭 신자라고 하였다. 2015년 기준으로 일요일 예배에 참석률은 605,828명으로, 전체 인구의 7% 밖에 되지 않았다. 루터교 교회도 2001년과 2016년 사이에 무려 74,421명에 달하는 신도들이 이탈하였다고 전한다.
2001년 조사결과에 의하면 전체 인구의 12% 정도가 종교가 없다고 밝혔으며, 2015년에는 이 비율이 20% 정도로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한편 기독교도,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 중에서는 터키나 보스니아, 코소보에서 이민을 온 무슬림 신자들이 많으며, 특히 2016년에는 70만 명을 기록하며 무려 15년 만에 2배 가까운 성장세를 보이며 오스트리아 내에서 가장 많은 증가세를 기록하였다. 또한 18만 명 정도가 세르비아에서 이민을 온 정교회 신자들이며, 21,000여 명 정도의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을 믿으며 8,100여 명 정도가 유대교를 믿는다.
오스트리아와 한국과의 관계
외교
오스트리아는 한국과 1963년 5월에 국교를 수립했으며, 1966년 12월에 주 오스트리아 대사관을 개설했다. 수교 이후 꾸준히 우호협력관계를 발전시켜 오고 있으며, 양국 간 교역규모는 29억 달러로 경제관계도 긴밀하게 발전해 오고 있고, 오스트리아는 국제무대에서 중립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2001년 5월에 페레로-발드너 외교부장관, 2007년 4월에 피셔 대통령의 국빈으로 방한했으며, 한국은 2004년 10월에 이해찬 국무총리, 2016년 12월에 윤병세 외교부장관이 방문했으며, 2019년 2월에는 문재인 대통령-세바스티안 쿠르츠 오스트리아 총리와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한편 오스트리아는 북한과 1974년 12월에 국교를 수립했다. 오스트리아는 주 대한민국 대사관이 겸임하고 있으며, 북한은 주 오스트리아 대사관을 개설했다. 양국이 체결한 협정으로는 무역협정(1960년 12월), 무역 및 지불에 관한 협정(1978년 11월), 항공운수협정(1979년 5월) 등이 있다.
경제·통상·주요 협정
2020년 기준 오스트리아의 대한국 수출액은 16.3억 달러, 수입액은 10.7억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승용차, 자동차부품, 의약품 등이고, 주요 수입품은 반도체, 전기자동차, 자동차부품 등이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는 한국 기업의 오스트리아 진출 및 상담을 돕기 위해 빈무역관을 설치했다. 한국은 오스트리아에 2017년 기준 누계로 2.6억 달러, 오스트리아는 한국에 2억 달러를 투자했다.
2007년 5월에 협상 개시된 한국과 오스트리아의 자유무역협정(FTA)(한국-EU FTA)은 총 8차례의 협상을 거쳐 2015년 12월 정식 발효되었다. 이 밖에도 사증(비자)면제협정(1970년 8월), 무역협정(1971년 10월), 항공협정(1979년 5월), 이중과세방지협정(1985년 10월), 투자보장협정(1991년 3월), 항공협정개정(1996년 3월), 과학기술협력협정(2007년 9월) 등이 있다
문화교류·교민 현황
오스트리아에 설립된 한글학교 5개교는 교민의 한글교육과 오스트리아에서 한국 문화를 알리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 2021년 기준 오스트리아에는 2,700명의 재외동포가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비엔나 주, 잘츠부르크 주, 슈타이어마르크 주에 거주하고 있다. 한국에는 2018년 12월 기준 206명의 오스트리아의 등록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