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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위치: 남아메리카 남서부
인구: 19,535,113명 (2023년 추계)
수도: 산티아고
면적: 756,096㎢ 세계면적순위
공식명칭: 칠레 공화국 (Republic of Chile)
기후: 사막성기후
민족 구성: 백인 및 혼혈인(95%), 아메리카 원주민(3%)
언어: 에스파냐어
정부/의회형태: 공화제 / 다당제&양원제
종교: 로마가톨릭(89%), 개신교(11%)
화폐: 칠레 페소 (CLP)
국화: 코피후에(Copihue)
대륙: 남아메리카
국가번호: 56
GDP: USD 280,269,000,000
인구밀도: 25명/㎢
전압: 220V / 50Hz
도메인: .cl
칠레와 한국의 관계
▶ 외교
▶ 경제·통상·주요 협정
▶ 문화교류·교민 현황
요약
남아메리카의 국가. 태평양 해안선이 서쪽 경계이고 페루, 볼리비아, 아르헨티나와 국경을 접한다. 인구의 3/4이 메스티소이며, 스페인 정복 이전에는 인디언 종족이 거주했다. 공용어는 스페인어이고 종교는 로마 가톨릭교이 지배적이다. 정치제제는 양원제를 토대로 한 공화국이다. 광업과 제조업에 기반을 두고 자유시장 경제를 이룬다. 1990년대를 거쳐 안정적 성장을 지속했고, 21세기 초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부강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으나, 시장 자유화 결과 소득 불평등에 따른 빈부의 격차가 극심하게 벌어졌다. 2019년 10월 공공 요금 인상으로 촉발된 대규모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사회불안이 가속화되었다.
수도는 산티아고이다. 파타고니아의 남단에서 북쪽으로 4,350km에 걸쳐 있다. 남위 17°30′~56°30′, 서경 66°15′~76°45′에 위치한다. 동서의 평균너비는 약 177km이다. 5,337km의 태평양 해안선이 서쪽 경계선을 이룬다. 북쪽으로 페루, 북동쪽으로 볼리비아, 동쪽으로 아르헨티나에 접한다.
인구의 3/4이 메스티소이며, 나머지는 유럽계이거나 아라우칸인(마푸체족)의 후손들이다. 스페인 정복 이전의 토착민들로는 디아기타, 피쿤체, 우이이체, 페훈체, 쿵코 등의 인디언 종족이 있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16, 17세기에 도착했으며, 18세기에는 바스크인들이 그 뒤를 이었다. 비교적 단일 혈통의 메스티소들이 퍼져 살았다.
공용어로 스페인어를 사용한다. 종교는 그리스도교 가운데 로마 가톨릭교가 지배적이며 개신교 및 다른 그리스도교 유파도 믿는다. 화폐단위는 칠레페소(Chile Peso/Ch$)이다.
칠레는 독특한 지형, 즉 안데스 산맥과 태평양 사이에 놓인 길고 좁은 지형으로 유명하다. 북에서 남까지 길이가 약 4,300km이고, 폭은 어느 곳도 349km를 넘지 않는다. 북쪽에는 건조한 고원인 아타카마 사막이 있으며, 4,900m 이상의 봉우리들이 여러 개 있다. 가장 높은 봉우리들은 볼리비아와 아르헨티나의 경계에 있다. 비오비오 강을 비롯한 강들은 규모가 크지 않다. 리안키에 호수를 비롯해 호수들이 많다. 최남단의 해안에는 많은 만과 섬, 군도들이 나타난다. 혼 곶이 있는 오르노스 섬이 속한 티에라델푸에고 제도의 서쪽 후안페르난데스 군도와 이스터 섬 등은 칠레 영토에 속한다.
칠레는 광업과 제조업에 주요 기반을 두고 부분적으로나마 선진 자유시장 경제를 이루고 있다. 정치제제는 양원제를 토대로 한 공화국으로, 국가원수와 정부수반은 대통령이다.
1536년 스페인은 마푸체를 비롯해 원주민들이 살던 이 지역에 침략했다. 1541년 시작된 산티아고의 이주지는 페루의 부왕령으로 통치되었으나, 1778년에 독립된 도독령이 되었다.
1810년에 주민들이 스페인 지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1817년 차카부코에서 호세 데 산 마르틴이 지휘하는 아르헨티나와 칠레 군대의 승리로 마침내 독립을 쟁취했다. 이 지역은 1823년까지 칠레 장군인 베르나르도 오이긴스가 통치했다. 페루와 볼리비아에 대항해 싸웠던 태평양 전투(1879~83)에서, 칠레는 볼리비아 해안의 질산 처리된 비옥한 평야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볼리비아가 해안가로 접근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었다.
칠레는 제1차 세계대전(1914~18) 당시 중립을 지켰으며 제2차 세계대전(1939~45)에도 거의 중립을 유지했으나, 1942년에 추축국 편에서 전쟁을 선언한 다른 남아메리카 국가들에 동참했다.
1970년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는 남아메리카에서 국가원수에 당선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경제대란 이후 그는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이끈 쿠데타로 전복되고, 피노체트의 군사정권은 내부 저항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1988년 국민투표와 1989년의 선거에서 피노체트는 실각하고 민주국가 체제로 돌아갔다.
칠레의 경제는 1990년대를 거치면서 안정적인 성장을 지속했고, 21세기 초반에는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부강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피노체트 대통령 시절 칠레의 주요 산업인 구리광산뿐 아니라 전기, 가스, 수도 등 공공서비스도 민영화하는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력하게 펼친 후유증은 극심한 소득 불평등과 빈부 격차를 낳았고, 이는 2010년대 이후 사회불안 요소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통계에 의하면 전 국민의 1%에 해당하는 상류층이 전체 국부의 25%를 갖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급기야 2019년 10월에는 공공요금 인상을 계기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여 국가비상사태가 발동되기도 했다.
자연환경
지형학상 동서로 안데스 산맥, 중앙 저지대인 중앙 팜파스, 코스테라 산맥이 있는 해안지대 등 세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세 지역은 거의 전국토에 걸쳐 남북 방향으로 펼쳐져 있다.
안데스 산맥은 남북으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 지역은 넓고 건조한 고원지대로 볼리비아 국경에서 남쪽으로 남위 27°까지 펼쳐져 있다. 2번째 지역인 좁은 중앙 안데스 고원은 남위 42°까지 남쪽으로 뻗어 있으며, 해발고도가 5,000~6,000m이다. 3번째 지역은 호수와 피요르드가 많이 있는 안데스 산맥 남부로 국토의 나머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안데스 산맥 남부에서는 아직까지 화산활동이 계속되고 있으며, 현대에 들어서도 지진이 여러 번 발생했다.
1647년에는 산티아고 시가 파괴되었으며, 20세기에는 지진으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안데스 산맥과 해안산맥 사이에 있는 중간의 저지나 세로로 뻗어 있는 골짜기가 북부의 여러 주(州)에 걸쳐 있는 아타카마 사막에서 시작된다. 아타카마 사막은 세계에서 가장 황량한 사막으로 꼽힌다. 이 중앙 저지는 남쪽으로 계속되면서 산맥이 중간중간 가로놓여 있기도 하지만 센트랄 계곡처럼 인구가 밀집된 평야지대도 있다. 그리고 남위 43° 부근에서 코르코바도 만 아래로 잠겨든다.
해안산맥은 동쪽의 웅장한 안데스 산맥보다 낮은 산맥으로 서쪽에서 중앙의 골짜기와 접하며, 이 산맥으로 인해 국토의 중앙부에서 바다로 나가기가 어렵다. 남위 43°에서 중앙 저지는 바다를 향해 남쪽으로 경사져 있으며, 이곳에서 해안산맥도 침수하여 남서 해안 앞바다에서 복잡한 군도로 솟아난다. 국토가 남북으로 길고 강들이 안데스 산맥에서 발원하여 중앙 저지와 해안산맥을 가로지르며 서쪽으로 흘러내려 강의 길이는 160~480km로 비교적 짧다. 중남부를 흐르는 비오비오 강은 해안산맥을 통과하는 유일한 주요 횡단 골짜기를 형성하므로 비중이 크다.
중부와 북부 대부분 지역에서는 기후가 온난하며, 부분적으로 지중해성기후를 보이기도 한다. 위도가 10°씩 높아지면서 평균온도가 약 4℃씩 떨어지지만, 평균강수량이 기후차를 보여주는 데 더 좋은 지표라 할 수 있다. 남위 30°의 북부 사막지역에는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다. 남위 30~40°인 중부의 평균강수량은 305~355㎜로, 대부분 5~8월의 겨울에 비가 내린다. 남부지역은 강수량이 많은 편이다. 위도 약 40°의 발디비아에는 2,300㎜ 이상, 파타고니아 서부에 있는 섬들에는 4,100㎜ 이상 내린다.
경작이 가능한 토지는 전국토의 7%를 약간 넘는데 대부분 남위 30~42°의 중부에 있다. 약 16%의 땅은 소와 양을 대규모로 방목할 수 있는 영구목초지이며 21%는 임야이다. 40°선에 걸쳐 있는 발디비아 군은 풍부한 우림지대로 국내 목재품의 대부분을 공급한다. 국토의 나머지 56%에는 사막과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고산지 등 황무지가 많다. 야생동물로는 알파카·비쿠냐·라마·퓨마·게말사슴·안데스고양이 등이 있다.
국민
스페인의 식민지가 시작되기 전 칠레에 살았던 토착민으로는 디아기타·피쿤체·마푸체(아라우카니아)·우이이체·페운체·쿵코 등의 인디언 종족이 있었다. 16, 17세기에 스페인인들이 도착했으며, 18세기에 바스크인들이 들어왔다. 그후 강력한 문화적 통일을 배경으로 메스티소를 중심으로 한 비교적 동질적인 국민이 형성되었다.
비중이 큰 소수민족으로는 테무코 일대의 마푸체족이 있다. 지리적으로 칠레인의 90% 이상이 북부의 코피아포와 남부의 푸에르토몬트 사이와 살기에 어려운 산악지대를 피해 중간 저지에 거주한다. 인구는 보통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이민의 유입이 별로 없어 인구성장은 대부분 높은 출생률과 낮은 사망률과 같은 내부 요인에서 비롯된다. 영아사망률이 꾸준히 감소하고 있지만 여전히 높은 편이다. 전체인구의 약 1/3이 15세 이하로 비교적 젊은 층이 많고, 4/5 이상이 도시에서 생활한다. 거대도시인 산티아고는 규모에 있어서 다른 도시들을 압도한다.
언어
대부분의 남아메리카 국가와 마찬가지로 칠레에서도 스페인어를 쓰는데, 이웃 나라와는 달리 무척 특이한 억양을 보이고 있다. 칠레에는 몇몇 토착 언어가 존재한다. 마푸둥군어, 케추아어, 라파누이어 등이다. 대 북부에는 케추아어, 아이마라어, 아타카메뇨(사어)가 있으며, 중부와 남부에는 마푸체어, 파타고니아에는 오나어가 분포한다. 칠레 제9주에는 가장 큰 인디오 민족 마푸체(Mapuche)가 거주한다. 그들의 언어는 마푸둔군(Mapudungun)이다. 마푸체는 "땅의 주민들"이라는 뜻이다(마푸: 땅, 체:사람). 마푸체는 다시 북쪽 땅의 사람들인 페우엘체와 남쪽 땅의 사람들인 우일리체로 구분된다.[56] 스페인 침략 이후 스페인어가 링구아 프랑카로 기능하면서, 토착 언어들은 소수 언어로 전락했으며, 몇몇은 현재 사멸했으며 혹은 사멸 위기에 놓여있다.
문화
예술 분야에서는 가브리엘라 미스트랄과 파블로 네루다와 같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인, 클라우디오 아라우 같은 음악가, 로베르토 마타 에차우렌 같은 화가들이 있다.
역사
스페인 식민시대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스페인사). 16세기 스페인인들이 발견했을 당시 아라우카니아 인디언은 주로 비오비오 강 남쪽에 살면서 다른 부족을 지배하던 유목민이었다(아라우칸인). 스페인인들은 19세기 내내 아라우카니아 인디언과 싸웠으나 끝내 그들을 정복할 수 없었다.
스페인은 1536년 디에고 데 알마그로의 지휘 아래 세력을 뻗어가기 시작했으며, 1541년 페드로 데 발디비아가 산티아고를 세웠다. 대토지에 기반을 둔 농업이 주요경제활동이었고, 이로 인해 부유한 지주계급이 생겼다. 1808년 프랑스의 스페인 침공으로 인해 독립운동은 활기를 띠었다. 1810년 산티아고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1814년에 스페인이 통치권을 재천명했지만 애국 지도자 베르나르도 오이긴스가 아르헨티나로 피신했다가 호세 데 산 마르틴이 이끄는 군대와 함께 돌아와 1817년 차카부코에서 스페인군을 물리쳤다.
오이긴스는 국가원수로 선포되었으며, 이듬해 2월 12일 공식적으로 독립이 발표되었다. 1861년까지는 헌법으로 보장된 지주들의 과두정치가 행해졌고, 그후 정권은 자유당으로 넘어갔다. 로마 가톨릭의 권위가 축소되었으며, 유럽의 정치적·지적 흐름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1879~83년에 있었던 볼리비아와 페루와의 전쟁으로 두 나라로부터 옛 영토를 되찾아 영토가 확장되었다. 19세기에 토지를 소유한 이전의 소수 독재자들이 국내 정치계에서 계속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20세기초,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새로운 도시중산계급이 출현했다. 그후 10년 동안 급진당·사회당·기독교민주당 등과 같은 새 정당이 창설되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초 약간의 정치적 불안과 혼란이 있었지만 평화적인 정치발전이 계속되어 민주적 정권교체가 가능했다. 1938~52년에 급진당에 속한 대통령들이 줄곧 통치했으나, 1964년에는 중도파인 기독교민주당이 집권당이 되었다.
이 정부는 가난한 사람들을 정치행정에 채용하는 개혁을 시도했다. 1969년 사회당과 공산당은 급진당과 기독교민주당에 소속된 몇몇 좌파들과 연합해 197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과반수를 득표했다. 그들의 후보였던 살바도르 아옌데가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아옌데는 미국 소유의 구리광산을 몰수하고 여러 가지 사회주의정책을 실시했다. 그후 2년도 안 되어 미국이 자본투자 거부를 주도하여 경제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많은 중산층 사람들이 아옌데 정부에 등을 돌렸으며,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육군사령관이 군부 쿠데타를 일으켰다. 아옌데 정부는 전복되고 군사혁명위원회가 들어섰다. 군사평의회의 수반인 피노체트는 엄격한 자유시장정책을 제도화했으며, 군부통치에 반대하는 국내 저항세력들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1980년 새 헌법이 승인되었고, 피노체트가 대통령으로 뽑혔다. 헌법에 명시된 대로 1988년 10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이 투표는 군사정부의 후보인 피노체트의 8년간 재임 추진을 위해 실시된 것이었지만, 대다수의 유권자들이 피노체트를 거부했다. 결국 피노체트는 물러났고, 1989년에 실시된 선거로 다시 민간정부가 들어섰다.
기독교민주당(Christian Democrts/PDC) 출신의 아일윈 대통령은 군부정권에 살해·실종된 정치범들에 대한 증거를 조사하기 위해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구성했다.
10개월 후인 1991년 2월 위원회는 1973~90년 군부독재 기간 동안의 인권 침해 사례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279명이 사망했고, 그중 1,068명이 고문·총살·처형당했다. 보고서는 1973~77년 군보안경찰인 디나(DINA)가 '체계적인 학살 정책'을 수행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보고서에는 가해자의 이름이 빠져있었으며, 아일윈 대통령은 희생자들 일부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겠지만 인권재판은 열지 않기로 한 결정을 재확인했다.
1993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PDC에 에두아르도 프레이가 당선되었다. 하지만 1980년 자신에 의해 제정된 신헌법에 힘입어 피노체트는 여전히 군총사령관의 자리에 남아 있으면서 상원의원 9명을 지명하는 권한을 유지함으로서 우익에 힘을 실었다. 프레이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인 1994년 2춸 칠레 의회는 대통령 임기를 8년에서 6년으로 단축했다. 프레이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군부가 지명하는 상원 의석 8석을 폐지할 것을 국회에 제안했다. 또한 내각에 사회주의 계열 인사 4명을 임명하므로써 군부가 고위관직에 대한 사회주의 계열 인사 임명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1989년 집권한 중도좌파연합정권은 2009년까지 20년 동안 장기집권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2006년에는 미첼 바첼레트(Michelle Bachelet)가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는데, 좋은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피노체트 정권에서 추진했던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사회의 양극화 현상에 대한 국민의 실망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결국 2010년 중도우파의 세바스티안 피녜라(Sebastián Piñera)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며, 이후 2014년 대선에서 미첼 바첼레트가, 2018년 대선에서는 세바스티안 피녜라가 재선되는 정치적 혼란기를 맞게 되었다.
종교
칠레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며, 다른 법과 정책을 통해 일반적으로 종교 의식의 자유에 기여하고 있다. 모든 수준의 법은 정부에 의한 종교 억압을 완전히 막고자 한다. 또 칠레는 정교 분리 국가이며, 1999년 종교 관련법에서 종교 금지를 금했으나, 칠레의 전통종교인 가톨릭은 50%로로 특별한 위치에 있으며, 가끔 우대를 받기도 한다. 정부 공무원은 가톨릭 행사 뿐 아니라 유대교나 성공회 행사에도 참여한다.
70%는 가톨릭 신자이며, 15%는 개신교(Evangelical)이다. 여기서 "개신교"란 동방 정교회(그리스, 페르시아, 세르비아, 우크라이나, 아르메니아), 모르몬,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여호와의 증인을 제외한 非가톨릭계 그리스도교를 총칭한다. 개신교는 15%로 오순절 교회, 루터교회, 개혁교회,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등이다. 무종교 사람들, 무신론자, 불가지론 자 및 인구의 약 40%를 차지한다.
피노체트의 군사독재당시 칠레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우들이 민중들을 살인, 고문, 가혹행위 등의 국가 폭력으로 탄압하는 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살해당하자, 1973년 10월 정의평화위원회를 구성,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정의평화위원회에는 로마 가톨릭교회 외에도 유대교, 정교회, 개신교에서도 참여했다. 7명의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들이 살해당할 정도로 정의평화위원회는 군사독재 정권의 큰 탄압을 받았으며 지도자로 활동하던 추기경도 피노체트 군사독재 정권으로부터 "붉은 추기경"(Red Cardinal)이라는 비난을 받을 만큼 미움받았다. 칠레 기독교의 민주화 운동은 성만찬에 근거한 신학적인 행동이라는 점에서 다른 사회운동과 다르다. 즉 로마 제국과 예루살렘 성전의 결탁에 의한 예수의 죽임과 수난을 기억하는 성례전인 성만찬을 통해 예수처럼 지배계급에게 부당한 죽임과 고통을 당하는 민중들의 고통을 생각하고 그들의 인권과 해방을 위해 투쟁한 것이다. 그래서 미국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United Church of Christ,UCC) 터 브로그만은 성만찬이 칠레 교회가 피노체트의 군사독재에 대항하는 가장 큰 무기였다고 설명한다.
정부는 성탄절, 성 금요일, 가르멜 산의 성모, 성 베드로와 바울 축일(Feast of Saints Peter and Paul), 성모 승천 대축일(8월 15일), 제성일(모든 성인의 날,All Saints' Day), 공현절(Feast of the Immaculate Conception, 주님의 공현 대축일, 주현절이라고도 함. 1월 6일)등 기독교가 교회력에 따라 지키는 절기들을 공휴일로 정하고 있다. 정부는 최근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날인 10월 31일을 개신교를 위한 공휴일로 정했다.
칠레와 한국의 관계
외교
칠레는 1962년 4월 12일에 한국 정부와 국교를 수립했다. 한국은 1966년 1월에 산티아고에, 칠레는 1969년 11월에 서울에 각각 상주공관을 설치했고, 1966년 11월에 주 칠레 한국대사관, 1969년 11월에 주한 칠레 대사관을 개설했다. 2003년 2월 15일에 한국은 칠레와 자유무역협정을 맺었다. 2004년 4월 1일부터 발효된 이 협정으로 칠레는 한국의 첫 자유무역협정 국가가 되었다. 한국은 1996년 9월에 김영삼 대통령, 2004년 11월에 노무현 대통령, 2012년 6월에 이명박 대통령이 방문하여 정상회담을 개최했으며, 칠레는 1994년 11월에 프레이 대통령, 2003년 2월과 2005년 11월에 라고스 대통령, 2009년 11월에 바첼렛 대통령이 방한하여 정상회담을 가졌다.
한편 칠레는 북한과 1972년 6월에 수교했으나 1973년 9월에 피노체트 정권 수립 이후 단교했다가 1992년 9월에 외교관계를 재개했다. 북한은 주 브라질 대사가 그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경제· 통상· 주요 협정
한국은 칠레의 경제개발에 협력하기 위해 2017년 누계 6.9억 달러를 투자했으며, 삼성전자, LG전자, 이건산업, 포스코건설, 현대종합상사, 한국광물자원공사 등이 칠레에 진출해 있다. 한편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는 한국 기업의 진출 및 상담을 돕기 위해 산티아고무역관을 설치했으며, 한-칠레상공회의소가 출범하여 기업 및 산업 분야에서의 협력이 확대되고 있다.
2020년 기준 칠레의 대한국 수출액은 3.5억 달러, 수입액은 8.6억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구리, 정밀화학원료, 와인 등이고, 주요 수입품은 차량, 석유, 합성수지 등이다. 1999년 12월에 협상 개시된 한국과 칠레의 자유무역협정(FTA)은 총 6차례의 협상을 거쳐 2004년 4월에 정식 발효되었다. 한국-칠레 FTA는 농업을 포함한 모든 산업뿐만 아니라 서비스·투자·무역규범·정부조달·지적재산권·동식물검역 조치까지 자유화 대상에 포함하는 포괄한다. 칠레와의 FTA는 한국 기업의 중남미지역 진출 교두보로서 가치가 높으며, 포괄적이고 전략적인 협력관계로 도약했다.
이 밖에 양국이 체결한 협정으로는 무역협정(1977), 항공협정(1979), 경제·기술협력협정(1982), 문화협정(1983), 과학기술협력협정(1994), 범죄인인도협정(1994), 외교관/관용여권 사증면제협정(1995), 투자보장협정(1996), 이중과세방지협약(2002), 원자력협정(2002년), 일반비자면제협정(2004년 발효), 세관협력협정(2005), 운전면허상호인정협정(2008) 등이 있다.
문화교류· 교민 현황
칠레에는 한글학교 1개가 설립되어 있어 교민과 칠레인의 한글교육에 이바지하고 있다. 칠레한인회는 한인사회의 발전과 권익보호에 힘쓰고 이쓰며 한국·칠레문화협회는 양국의 문화교류에 기여하고 있다.
2017년 기준 칠레에는 2,635명의 재외동포가 있고, 이들 대부분은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에 거주하고 있다.
한국에는 2018년 12월 기준 142명의 칠레의 국적의 등록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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