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된장찌개의 비밀
도둑키스의 말로는 참혹했다. 도둑키스의 현장은 귀가하던 박정자 여사에게 발각됐다. 민정은 혼신을 다해 만취한 연기를 했다. 그녀는 진환을 베개 삼아 누웠다. 코고는 소리도 시끄럽게 냈다. 그녀가 실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박정자 여사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박정자 여사의 중매 본능이 깨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박정자 중매 프로젝트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이상한 프로젝트에 휘말리면 괜스레 그와의 사이만 어색해질 것이었다. 그녀는 기회를 노렸다. 애당초 돌아다니는 잠버릇이라도 있는 것처럼 방으로 걸어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계획은 단숨에 수포로 돌아갔다. 몸을 뒤척이던 그가 그녀를 안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그의 품에 안긴 채로 눈만 껌뻑거렸다. 심장박동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그의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그녀가 가늘게 숨을 내뱉었다. 그의 품을 맴돌던 숨이 얼굴에 스몄다. 눈앞이 아찔했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한여름에 독감이라도 걸린 것처럼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그의 가슴팍에 그녀의 숨이 번졌다. 그의 온기에 졸음이 왔다. 그녀는 그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그의 품에 안긴 순간에 박정자 여사의 중매 본능이 깨어났다.
박정자 프로젝트의 서막이 올랐다. 같이 있는 시간을 늘리면 없는 정도 생긴다는 박정자 프로젝트는 아침 일찍부터 시작됐다. 박정자 여사의 손길에 떠밀려 두 사람은 아침부터 포도밭으로 향했다. 공복에 포도따기라니. 그녀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러나 어제 허점을 잡혔기 때문에 그녀는 군말 없이 포도밭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포도의 잎사귀 사이로 여름해가 고개를 내밀었다. 잎사귀를 솎아 내던 그녀가 하늘을 봤다. 얼굴로 쏟아지는 햇볕이 따가웠다. 그녀가 포도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그를 찾았다. 포도 잎사귀를 솎아 내고 있는 그의 다리만 보였다. 박정자 프로젝트는 망했다. 하늘을 보여야 별을 따지.
“일해라.”
“엄맛! 놀랐잖아요.”
“허튼 생각하니까 놀라겠지.”
“갑자기 나타나니까 놀라죠.”
여름의 햇발이 그녀의 눈에 앉았다. 사방에 번진 햇살에 그가 찬란하게 빛났다. 햇살에 못이겨 그녀가 실눈을 감았다. 흐릿하게 번진 그의 모습이 또렷해졌다. 시원하게 뻗은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느껴졌다. 우뚝하게 올라간 코를 타고 내려가던 그녀의 시선이 멈칫했다. 불그스레한 그의 입술이 선명해졌다. 그녀의 기색이 죽었다. 어젯밤의 일이 어릿거렸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마음이 세차게 뛰었다. 봄이 온 것 같았다. 갑자기 봄이 와버렸다.
“이리 와.”
그가 그녀의 팔을 끌었다. 눈을 간질이던 햇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산들바람이 불었다. 한들한들 바람결을 따라 그녀의 마음도 흔들렸다.
“헛생각 말고 일이나 해.”
“안해요.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지금.”
“아메바냐.”
“칭찬은 아니죠?”
“눈치는 있네. 단세포라고 욕하는 중이었는데.”
“허! 됐어요. 됐어. 칭찬이라도 기대한 내가 바보죠. 단세포는 저쪽 가서 일할게요. 그래야 서로한테 좋으니까. 그럼 수고하십쇼.”
그녀가 포도밭 입구로 걸어갔다. 걸을 때마다 힘이 풀렸다. 그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완전히 인정했다. 짝사랑이 그녀는 마냥 달갑지 않았다. 김두준과 헤어지고 그녀는 자신을 더 좋아해주는 남자를 만나자고 다짐했다. 단순하게 짝사랑이 힘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두준과 연애를 하면서 그녀는 길었던 짝사랑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녀는 용기가 이루어낸 해피엔드라고 생각했다. 연애를 시작하고 몇 달은 아침에 일어나는 것부터 잠이 드는 순간까지 행복했다. 하늘 높이 솟았던 행복은 시간이 지나면서 곤두박질쳤다.
연애가 깊어지면서 욕심이 생겼다. 시간이 남았기 때문이 아니라 시간을 내서라도 자신을 만나주기를 바랐다. 욕심은 결핍으로 이어졌고 결핍은 곧 공허함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연애가 외롭다고 생각했다. 김두준이 회사에 입사하면서 애정의 불균형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연수와 교육으로 연일 바빴던 김두준에게 연애는 이순위였다. 그녀는 자신을 일순위로 생각하는 남자를 만나고 싶었다. 그녀가 포도 잎사귀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그를 봤다. 마왕은 자상함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여자 여럿 울리는 천하의 죽일 놈이면 모를까.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재빨리 잎사귀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지지리 복도 없구나 싶기도 했다. 상사와 바람이 난 남자까지는 커버할 수 있었다. 시원하게 욕하고 헤어지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임자가 될 몸이라고 했다. 상대방이 마왕을 마음에 담고 있을 수도 있었다. 세상의 반이 남자라고 했다. 의미 없는 수치상 결과값이었다. 세상의 반인 남자 중에서 그녀가 만날 수 있는 남자는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나쁜놈에게만 연이어 느끼는 설렘이 못내 원망스러웠다. 이제 마왕이 내뱉는 가벼운 말에도 천당과 지옥을 오가게 될 것이었다. 작은 행동은 갖가지 의미로 포장될 것이었다. 그녀가 거칠게 잎사귀를 땄다. 숨기자고 다짐했다. 잎사귀를 따는 것처럼 차곡차곡 마음을 정리하면 두근거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써.”
“어디서 났어요?”
“주웠다.”
그가 그녀에게 밀짚모자를 내밀었다. 각오를 다지면서 잎사귀를 따던 그녀의 손길이 멈췄다. 그가 고백하고 싶다던 여자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그녀의 상상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녀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낮볕으로 변한 햇볕은 더 뜨거워졌다. 그는 뙤약볕에 땀을 흘리는 그녀의 머리에 밀짚모자를 씌어주었다. 바닥을 보고 있던 그녀의 눈이 껌뻑거렸다. 쉽지 않을 것 같다. 짝사랑의 종지부를 찍는 건.
“이왕이면 예쁜 모자로 좀 주워오지. 촌스럽게 밀짚모자가 뭐예요.”
“기껏 힘들게 가져왔더니. 싫음 됐다. 내놔. 다시 내다 버리게.”
“엣! 누가 싫다고 했어요? 그냥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 이거죠. 아무튼 고마워요. 마침 얼굴 탈까봐 걱정됐는데.”
“잘 어울리네. 모자 하나 썼는데 천생 일꾼처럼 보여.”
“강진환씨도 꽃무늬 바지 입으니까 천생 일꾼 같거든요. 일꾼답게 열심히 일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죠.”
그는 그녀의 말에 대꾸를 하려다가 말았다. 아침 댓바람에 나와 공복으로 일을 시작했기 때문인지 속이 쓰렸다. 집으로 돌아가자는 그의 턱짓에 그녀는 격하게 동의했다. 시원한 북엇국은 아니더라도 무슨 국이라도 마시면서 해장을 하고 싶었다. 오전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제일 먼저 부엌으로 들어갔다. 전기밥솥을 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은 물론이거니와 쌀 한 톨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녀가 부엌을 뒤적거렸다. 냄비에 있어야 할 국도 어젯밤에 맛있게 먹고 남았던 갈비찜도 모조리 자취를 감췄다. 그녀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냉장고를 열었지만 냉장고는 거짓말처럼 텅 비어있었다.
“아무래도 밥을 만들어 먹으라는 계시인 것 같다.”
그가 냉장고에 머리를 들이밀고 남은 반찬을 찾던 그녀를 잡아당겼다. 고개를 돌린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식재료부터 행주까지 말끔하게 세팅된 현장은 요리프로그램을 방불케 했다. 박정자 프로젝트의 끝은 어디인지 궁금할 정도였다.
“진짜! 할머니!”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마을 회관에서 가요무대 재방송을 보고 있던 박정자 여사가 그녀의 목소리라도 들은 듯 창밖을 힐끔 쳐다봤다.박정자 프로젝트의 이단계는 자연스러운 스킨십이었다. 우연하지만 빈번하게 스킨십을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요리만한 것이 없었다. 박정자 여사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민정의 요리 실력은 검증되지 않았지만 알아서 잘 해내리라 생각했다. 박정자 여사는 작은 걱정까지 모두 털어버리고 다시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박수를 치면서 노래를 따라부르던 박정자 여사의 여유로움과는 달리 민정은 앞이 캄캄해졌다. 요리라니! 날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탄 맛이 나는 제육볶음을 만들어 내는 이 손으로 요리를? 절대 안 돼. 마왕에게 마이너스를 당하느니 내빼는 것이 상책이지. 그래. 무조건 빼자!
“요리는 할 줄 아냐.”
“당연히 잘하죠. 프랑스 요리부터 궁중요리까지 못하는 게 없다니까요. 재료만 있으면 다 만들 수 있는데 오늘은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네요. 일사병이라도 걸렸나. 머리가 어질어질하구.”
“아까는 신나서 걸어가던데. 자신 없어서 빼는 거 아니야?”
“허! 내빼기는 누가 내빼요. 해요. 해! 먹어보고 감동 받았다고 울지나 마요.”
입이 방정이었다. 갑자기 무슨 재주로 감동의 요리를 만들어내나. 자신있게 소리쳤던 그녀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했다. 일렬로 가지런히 놓인 식재료를 보고 있던 그녀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새나왔다. 완벽하지 않은 요리 솜씨가 들키지 않을 정도의 쉬운 요리를 생각하기 위해 그녀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계란말이가 좋을 것 같았다. 된장찌개도 된장을 풀고 야채만 썰면 되겠지. 그녀는 블로그의 힘을 믿으면 된다고 스스로를 격려했다. 까짓 마왕의 눈물 콧물을 쏙 빠지게 할 음식 만들고 만다.
“그렇게 됐으면 소원이 없겠어.”
“먹고 충분히 감동 받을 테니까 걱정 말구 있어요.”
그가 있으면 인터넷 검색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손에 떠밀려 마당으로 나왔다. 진돗개 진환이 마당에 나온 그를 격하게 반겼다. 그가 진돗개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째 볼수록 정감가는 녀석이었다. 그녀가 부엌문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진돗개가 부드럽게 그의 손을 핥았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를 따르는 진돗개의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였다. 혼연일체 된 두 진환을 보고 있노라니 그녀는 문득 질투심이 피어올랐다. 진돗개를 쓰다듬던 그와 그녀의 눈빛이 마주쳤다. 번쩍 정신이 들었다. 이제 하다하다 진돗개한테도 질투를 하다니! 것도 수놈한테!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흔들면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팔을 걷어붙였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인터넷에 된장찌개 만드는 법을 쳤다. 친절한 설명에 자신감이 솟았다. 재료를 준비하기 위해 그녀가 칼을 들었다. 감자의 껍질을 벗겼다. 감자의 껍질만큼 속살이 떨어져 나갔다. 온 집중을 쏟으면서 칼질을 하고 있는 그녀는 그가 부엌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의 칼질을 보고 있던 그의 마음이 불안했다. 금방이라도 피를 볼 것 같은 폼이었다.
“줘.”
“언제 들어왔어요? 편하게 앉아있어요.”
“칼질은 내가 할 테니까 가서 육수나 내고 있어.”
“제가 할 수 있기는 한데…… 정 원하시니까 부탁 좀 할게요.”
그녀가 선심 쓰는 듯 그에게 칼을 건넸다. 말이라도 못하면. 그는 그녀의 형편없는 칼질을 지적하려다가 참았다. 자칫 그녀가 궁싯거리면서 다시 칼을 잡겠다고 오기를 부릴 확률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불안한 칼질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칼을 들고 능숙하게 야채를 썰었다. 도마를 스치면서 울리는 명랑한 소리에 다시마를 팔팔 끓이던 그녀의 고개가 돌아갔다. 입이 벌어지는 솜씨였다. 여름에 제철이라는 풋고추도 그의 손끝에서 정갈하게 썰렸다. 그가 일정한 크기의 애호박과 감자를 접시에 담았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칼질을 도와주겠다고 나섰던 그는 어느새 부엌의 일을 진두지휘했다. 계란말이를 스크럼블에그로 만드는 신비한 그녀의 솜씨를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인터넷의 레시피를 참고하기 위해 그녀는 연신 핸드폰을 힐끔 쳐다봤지만 괜스레 그의 눈치가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암기력과 감을 믿기로 했다. 된장이 풀린 국물에 야채를 투하하니 구수한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엄마의 어깨너머로 봤었던 된장찌개 조리법을 떠올리면서 그녀는 마지막으로 고춧가루를 넣었다.
“냄새 죽이죠.”
“음식을 냄새로 먹냐.”
“냄새로도 먹고 맛으로도 먹죠. 일단 냄새는 합격점이니 맛도 합격일걸요.”
그녀의 자신감이 넘칠수록 그의 불안함이 커졌다. 그는 숟가락을 들고 된장찌개 국물을 맛봤다. 목젖을 타고 내려가는 칼칼한 된장찌개의 맛에 그는 흠칫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빠르고 간단하게 결론이 났다. 이것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설령 일주일을 넘게 굶어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은 지경에서도 절대로 먹고 싶지 않은 된장찌개였다. 그는 입맛을 다시듯 혀로 입술을 쓸어내렸다. 숟가락이 절로 내려졌다.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를 봤다. 기대에 찬 눈빛을 보고 있으니 그는 사실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단순한 동정이다. 어젯밤에 한풀이 하느라 고생했으니 격려해주는 것 뿐이다. 고래도 춤추게 하는 칭찬 한번 해주지.
“이상해요?”
“괜찮은데 좀 아쉽네.”
“좀 아쉬워요? 뭐가 부족한가.”
“김민정. 숟가락 내려놔.”
“먹어봐야 뭐가 부족한지,”
“됐고. 어디 가서 팽이 버섯이나 좀 구해와라. 그것만 넣으면 완벽할 것 같다.”
그가 급하게 그녀를 저지했다. 자칫 그녀가 국물의 맛이라도 보게 된다면 그의 거짓말은 단번에 들킬 것이었다.
“팽이요? 금방 구해올게요.”
“천천히 와.”
“국물 쫄잖아요. 빨리 구해가지고 올게요.”
“국물이 아주 우러나야 될 것 같으니까 천천히 와라.”
“넵! 금방 돌아올게요.”
처음으로 만든 된장찌개가 성공했다는 기쁨에 취해 그녀는 걸음도 가볍게 집을 나섰다. 총총히 대문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그녀가 돌아오기 전에 바글바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의 맛을 되살려야했다.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하나. 그가 다시 한번 된장찌개의 맛을 봤다. 일단은 뭐라도 건드려야 사람이 먹을 수 음식으로 탈바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팔을 걷어붙였다. 인수합병을 위해 피인수기업을 분석하는 것보다 더 심도가 깊은 분석이 필요했다.
빠르게 마늘을 다졌다. 불의 세기를 조절하고 꿀을 살짝 넣어 된장의 맛을 살렸다. 이것저것 손을 봤다. 처음부터 된장을 풀었기 때문에 텁텁함이 남아 있었지만 된장찌개의 맛은 전보다 훨씬 살아났다. 그가 응급 처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그녀는 이장님 댁에서 팽이 버섯을 얻어가지고 신나게 집으로 달려왔다. 그녀가 도착하기 무섭게 그의 손놀림이 일순간 멈췄다. 그는 된장찌개에 손조차 대지 않은 것처럼 심드렁하게 팽이 버섯을 넣었다.
평상에 상을 차린 그녀는 그의 눈치를 보다가 숟가락을 들어 된장찌개 맛을 봤다. 구수한 맛이 일품이었다. 식당에 내다 팔아도 손색이 없을 맛이었다. 그녀는 요리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연신 국물을 들이켰다. 와인이 아니라 요리를 배울 걸 그랬나. 밥을 푸던 그가 싱글벙글거리는 그녀를 보고는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산타 노릇도 나쁘지는 않네. 그녀의 산타를 자청했던 그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퉁명부렸다.
“거기 계란말이나 들고 나와.”
“된장찌개 들게요. 요리사가 직접 들고가야 분위기도 나고 좋죠.”
“됐다. 뜨거우니까 나가서 앉아있어.”
그가 능숙하게 행주로 손잡이 부분을 잡았다. 그녀는 계란말이를 들고 잰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바글바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 소리가 유난히 맛있게 들렸다. 그는 상에 있던 받침에 뚝배기 그릇을 올려놨다.
“제가 기가 막히게 된장도 만들었으니까 많이 먹어요.”
늦은 점심이었다. 그가 참기름을 솔솔 뿌려 무친 나물과 예쁘게 잘 말린 계란말이가 상을 채웠다. 김이 나는 쌀밥에 된장찌개를 비비면서도 그녀의 미소를 사라지지 않았다.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모습에 그는 밥상에 있는 된장찌개 맛의 비밀을 영원히 비밀에 부쳐야겠다고 생각했다.
***
영동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어색하게 다가왔던 것이 차츰 익숙해졌다. 심심하던 밤을 고스톱으로 채웠다. 더러 산책을 하거나 그녀와 투닥거리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가게의 오픈이나 마감시간에 보고를 받는 경우도 있었으나 전보다는 통화시간이 짧아졌다. 화재사건에 관련된 새로운 자료나 소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핸드폰을 잡고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포도밭에서 일을 하면서 만나는 새로운 사람에 경계를 늦추지는 않았지만 새참을 먹을 때는 항상 전투적으로 임했다.
박정자 프로젝트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삼단계로 이어지던 프로젝트는 이제 막 오단계에 이르렀다. 동네에 소문을 낸다거나 둘이 함께 할 수 있는 심부름이나 시간을 주는 것이 박정자 프로젝트의 끝이었다. 야밤에 캄캄한 산길로 심부름을 보내는 박정자 여사의 프로젝트로 힘든 사람은 민정이었다. 그와 함께하거나 스킨십이 일어나는 일이 많아질수록 그녀의 착각과 망상은 극에 달했다. 그녀의 괴로움을 모르는 그는 박정자 프로젝트에도 익숙해졌다. 모든 것이 일상처럼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포도밭을 뒤흔들 폭풍우가 들이닥쳤다.
일상이 택시에서 내렸다. 외길 진입로에서 짐가방을 내렸다. 산바람이 불었다. 아침부터 정신없이 영동으로 향했던 일상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여름 바람이 폐부 깊숙이 번졌다. 일상이 짐가방을 그러쥐었다. 떨림과 기대가 공존했다.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고 영동에 오기까지 일상은 결과에 연연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마왕이 자신을 해고한다고 해도 덤덤하게 받아들이자고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했다. 멀리서 민정의 모습이 보였다. 일상이 먼저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오시느라 힘드셨죠. 주세요. 같이 들어 드릴게요.”
“괜찮아. 마왕은?”
“집에 있겠대요. 갑의 횡포도 아니구. 아니. 신메뉴 개발되면 서울 가서 맛봐도 되는데 여기까지 오라니.”
“싫은 사람한테 친절을 베풀 사람은 없지. 집은 여기서 머나.”
“아뇨. 금방 도착해요. 가면 물심양면으로 도와드릴게요. 콱! 본때를 보여주세요.”
그녀의 응원에 한결 기운이 났다. 일상은 그녀를 따라갔다. 주변의 풍광이 푸르렀다. 좁다란 길을 감싸는 산이 말간 공기를 내뱉었다. 좁은 길을 따라 걷던 일상의 걸음이 느려졌다. 까마득히 높은 하늘이 푸르렀다. 하늘을 따라 흐르던 구름 사이로 해가 나왔다. 마을 입구에 가까웠는지 낮은 지붕의 집이 보였다. 산바람을 타고 포도의 향기가 전해졌다. 일상은 중학교 시절에 만났던 서울 아이가 생각났다. 서울에서 일상의 마을로 놀러왔던 아이는 인기가 많았다. 하얀 얼굴에 볼이 복숭아빛으로 물든 여자아이였다.
일상이 부는 풀피리를 신기해했던 그녀는 요리사가 꿈이라고 했다. 그녀는 프랑스 요리와 함께 와인을 즐겨 마시던 아버지에게 눈물 나게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주고 싶다고 했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다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기를 바랐다. 일상은 그녀의 꿈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일상도 요리사가 되고 싶었다. 그녀의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할 수 있을 만큼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싶어졌다. 포도밭에서 나는 포도의 향기가 좋다던 그녀는 아버지의 휴가가 끝나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갔다.
“여기 좋죠?”
“좋네. 은퇴하고 여기에 집 한 채 짓고 살까봐.”
“나중에 오세요. 나중에. 지금은 때가 아니죠. 가요. 거의 다 왔어요.”
멈췄던 걸음이 다시 움직였다. 녹이 슨 대문이 보였다. 일상이 느릿하게 집을 살폈다. 깨끗하게 보수된 지붕을 제외하고는 일상은 유년 시절에 살던 집과 같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일상은 요리사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집을 박차고 나왔다. 서울역에서 노숙도 하고 갖가지 일을 하기도 했다. 한 권의 책이 해어질 때까지 수십 번을 돌려봤다. 참으로 악착같이 살았다. 기회가 있으면 물고 늘어졌다. 열망은 일상에게 기회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렸던 시간은 일상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갔다.
녹슨 대문을 열고 일상이 집으로 돌아간 날은 일상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기도 했다. 남은 가족도 사랑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은 잘 살고 싶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싶었다. 서울에서 왔던 그녀의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할 수 있을 만큼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일상은 최선을 다해 신메뉴를 궁리했다. 결과는 겸허하게 받아들이되 최고의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밤낮으로 메뉴 개발에 힘썼다.
민정이 대문을 열었다. 아담한 집에서 풍기는 냄새가 포근했다. 진돗개가 일상을 경계했다. 그녀는 진돗개를 쓰다듬으면서 긴장을 풀어주려 애를 썼다. 일상이 평상에 짐가방을 내려놨다. 마당에 자리잡은 수레국화가 눈에 들어왔다. 일상이 수레국화의 꽃잎을 매만졌다. 수레국화는 샛파란색의 수수함을 뽐냈다. 그녀의 손길에도 불구하고 진돗개는 일상을 향해 세차게 짖어댔다. 진돗개 짖는 소리에 방에 있던 진환이 마당으로 나왔다. 일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제가 자리를 비워서 그런지 주방장님 신수가 더 훤해지신 것 같군요.”
“꺼칠꺼칠한 얼굴이야 늘 똑같죠.”
“신메뉴는 가져오셨습니까.”
“예. 재료와 와인은 준비해왔으니 주방만 내주신다면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기대하지 않아도 충분히 잘하시겠죠.”
그가 턱짓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일상을 부엌으로 안내하라는 신호였다. 그녀는 일상과 함께 부엌으로 들어갔다. 일상이 짐가방을 풀었다. 일상은 빠른 손놀림으로 아이스박스를 열었다. 포 뜬 흰 살 생선이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능숙하게 무딘 칼날을 가는 일상의 뒷모습을 봤다. 일상의 손놀림마다 결의가 느껴졌다. 빠르지만 일정하게 감자를 얇게 채 썰었다. 감자를 물에 담가 전분을 빼내었다.
“마당에 있는 꽃 좀 써도 될까.”
일상이 허드렛일이라도 하기 위해 앉아있던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꽃이요?”
“국화.”
일상이 몸을 돌려 그녀를 봤다. 그녀는 잠시 고민했다. 수레국화는 박정자 여사가 가장 아끼는 꽃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사고로 세상을 등지고 정확히 일년 뒤에 박정자 여사는 마당에 수레국화를 심었다. 박정자 여사는 수레국화의 샛파란색을 유난히 좋아했다. 불길에서 아들이 간절히 기다렸을 시원한 물줄기와 같은 색이었기 때문이었다. 정성으로 키운 꽃임을 알기에 그녀는 선뜻 일상에게 꽃을 사용해도 좋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할머니가 아끼는 꽃이라서. 꼭 필요한 거예요? 다른 꽃도 많은데.”
“아끼시는 꽃이라면 어쩔 수 없지.”
일상은 다시금 요리에 집중했다. 일상에게 꽤나 중요한 재료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그녀는 못내 일상에게 미안했다. 그러나 마음대로 일상에게 꽃을 넘겨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고민을 하다가 눈을 딱 감고 박정자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박정자 여사는 몇 장의 꽃잎을 일상에게 내어주기로 했다. 누군가를 돕는 것을 좋아했던 아들이 일상을 돕는 편을 더 행복하게 여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마당에 있던 수레국화의 꽃잎을 조심스럽게 떼어서 일상에게 가져갔다.
부엌은 고소한 냄새로 진동했다. 달걀을 묻힌 흰 살 생선과 감자가 맛있게 튀겨졌다. 기름이 튀기는 소리가 경쾌했다. 마당에 있던 진환은 부엌의 상황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 특출나는 신메뉴가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일상을 해고 할 참이었다. 해고를 하고나면 최고의 주방장을 데려와 모든 사람들이 일상의 존재를 완벽하게 잊게 만들 생각이었다. 모든 일은 일상을 신뢰하는 그의 할아버지가 돌아오기 전에 처리되어야 했다.
부엌에서는 기름 튀기는 소리와 칼질하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그녀가 평상에 작은 상을 폈다. 일상이 가져온 화이트 와인을 내려놨다. 라 푸카 샤도네. 돈나푸가타의 와인이었다. 돈나푸가타는 화이트 와인의 표준이 될 정도로 우아한 맛을 내는 와인을 생산했다. 사과향이 강하게 나는 돈나푸가타의 와인은 드라이-달지 않음을 뜻함-했다. 나폴레옹의 군대로부터 포도밭으로 도망친 여인의 모습이 돈나푸가타의 로고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가 와인을 살폈다. 화이트와인은 육류보다는 생선류에 어울리는 와인이었다. 돈나푸가타의 와인은 한식과 어울리는 구석이 많았기 때문에 일상이 준비한 음식은 한식일 확률이 컸다.
그의 예상은 완벽하게 적중했다. 일상은 흰 살 생선전과 꼬치전을 가지고 나왔다. 수레국화가 박힌 버섯전도 독특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일상의 성공을 기원하면서 박정자 여사는 수레국화까지 내주었다. 그런데 신메뉴가 전이라니. 그것도 명절이면 물리게 먹을 수 있는 전. 그녀는 설마 싶었다. 일상이 비장의 무기라도 숨겼을 거라는 생각에 일상의 주위를 샅샅이 살폈다. 그러나 아무것도 나오는 것이 없었다. 일상이 선택한 메뉴는 전이었다. 전을 보고 있던 그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그는 젓가락을 들어 마지못해 흰 살 생선전을 맛봤다. 기존의 생선전과는 달리 부드러움과 함께 고소함이 남아 있었지만 최고라고는 말할 수 없는 음식이었다. 그의 얼굴을 살피던 일상이 와인 오프너를 꺼냈다.
“와인은 됐습니다.”
“평범한 메뉴라 실망하셨겠지만 와인하고 같이 드시면,”
“볼품은 없지만 실망 할 일은 없었습니다. 애당초 기대조차 없었으니까요. 이만하면 수고 많으셨습니다. 돌아가셔도 됩니다.”
“해직은 예정대로 처리하실 예정이십니까.”
“예. 변동 없습니다.”
여느 때와 같았다. 준비는 길었지만 승패는 단숨에 갈렸다. 너무 짧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준비를 했던 시간이나 노력에 대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을 정도였다. 일상에게 해직을 고하는 그의 말에는 조금의 감정도 없었다. 그는 일상에게 자신은 아버지와 다름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모든 것을 내어주었던 아버지와는 다르게 자신은 일상의 모든 것을 빼앗을 것임을 확실히 밝혀두고 싶었다.
“감사했습니다.”
일상은 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아무르의 직원으로서 하는 마지막 인사였다. 그는 일상의 인사에 가볍게 목례로 대꾸했다. 일상이 부엌으로 들어갔다. 키친타월로 주방기구에 묻은 기름기를 닦아냈다. 일상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힘겹게 주방기구를 정리했다. 모두 예상했던 일이었다. 원수에게 자비를 베풀 사람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상은 아주 깊은 구멍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고생을 하면서 올라왔던 나날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일상은 비틀거리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마왕에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도 정갈한 모습으로 남고 싶었다.
“이대로 가면 억울하시잖아요. 이건 아니잖아요.”
일상은 짐가방을 챙기고 대문을 나섰다. 뒤늦게 사태 파악을 한 그녀가 일상을 막아섰다. 그녀는 이대로 일상을 보낼 수 없었다. 실패로 답이 정해진 시험이었다면 적어도 불평은 쏟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상이 허공에 길게 숨을 내뱉었다. 살다보니 실패나 탈락으로 정의된 시험을 마주하게 되는 일이 있었다. 그녀라면 자기주장을 올곧게 펼치겠지만 일상은 그러지 못했다. 일상은 지는 것을 택했다. 부러지는 막대가 되느니 구부러지는 철사가 되었던 것이었다. 억울하지 않아서 지는 것을 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것이 뒷빽 하나 없는 일상이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결정에 따라야지.”
지금의 일도 마찬가지였다. 결정이 내려지면 따르면 된다. 그것이 끝이다. 그녀의 말림에도 일상의 의견을 구부러지지 않았다. 처음에 영동에 도착해 다짐했던 것처럼 일상은 마왕의 결정을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그녀가 뒤를 돌아 마왕을 봤다. 그는 일상에게는 관심도 없는 얼굴로 그녀를 보다가 이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대마왕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일상이 그녀를 지나 대문을 나섰다. 영동까지 바래다주겠다는 그녀의 말에도 일상은 혼자 돌아가겠다고 극구 그녀를 말렸다. 짐가방을 들고 대문을 넘으면서 집을 떠나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자신감 넘치게 집을 나섰던 젊은 청춘은 이제 머리가 희끗해졌다. 외길을 걸어 나가면서 일상은 씁쓸한 웃음을 내뱉었다. 요리사가 되어서 이루고 싶었던 그 꿈을 이제는 절대로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서울에서 왔던 그 아이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일상의 꿈도 완벽하게 바스라졌다.
일상이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를 탔다. 영동은 아니더라도 자그마한 산골로 들어가볼까 생각했다. 세련되지는 않지만 자그마한 집을 짓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바람을 타고 포도의 향기가 물씬 풍기면 더욱 좋을 것이었다. 조금만 더 걸으면 서울에서 온 아이가 좋아한 해안가가 펼쳐지는 곳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기차가 영동을 출발했다. 모든 것이 흐릿해지는 창밖을 보고 있던 일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일상이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사람조차 없는 텅 빈 칸에서는 일상의 설움 가득한 울음소리만이 가득했다.
***
일상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뒤에도 민정은 대문에 서서 일상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오랜시간 일상과 함께하지는 않았지만 일상이 좋은 사람인 것만은 확실했다. 일상은 아무르가 잘 운영될 수 있도록 남몰래 진환을 돕던 중요한 보조축이었다. 일상은 주요 고객들의 컴플레인에 부드럽게 대처를 하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일상은 까다로운 일부 음식 칼럼니스트의 극찬을 끌어낸 명실상부 대한민국 유명 요리사이기도 했다. 낡은 것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낡은 것이 가진 연륜과 경험은 새로운 것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일상이 착했기 때문에 마왕의 결정을 순순히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진돗개를 지나 그의 마루에 올라섰다. 그의 방문 앞에서 수십 번의 고민을 했다. 직원을 해고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업무였다. 그녀는 인사팀도 아니었고 인사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일상에 일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이 부담스럽게 다가오기도 했다. 일상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확실히 오지랖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가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일상의 일을 마냥 모른척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일상을 해고한다면 그는 충실한 인재를 잃는 것과 같았다. 무슨 일을 해내든지 사람을 얻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그녀가 심호흡을 했다. 일단 말이라도 꺼내보자.
“강진환씨.”
“왜.”
“들어가도 돼요?”
“아니.”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방문에 기대어 앉은 그의 마음은 싱숭생숭했다. 오래 기다렸던 일이었다. 유쾌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상을 해고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리라 확신했었다. 계획대로 일상의 해고절차를 진행시키는 동안에도 그는 즐겁지 않았다. 오히려 일상에게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일상은 성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상이 자신의 바짓가랑이라도 잡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상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일상은 덤덤하게 해고를 받아들였다. 해고를 당하면서 과거에 있었던 일을 속죄하려는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차분했던 일상의 모습을 떠올리니 화가 치밀었다.
“정말 해고할 생각이예요?”
“결정. 번복되는 일 없어.”
“그래도 한번은 제대로 먹어보고 해고해도 됐을 것 같은데. 그냥 제 생각에는 가게 직원들도 주방장님 좋아하고,”
“결정은 내가 내려.”
“주방장님이 계시는게 강진환씨한테 더 좋을 것 같아서요. 가게 운영도 잘하시고 요즘 주방장님만큼 착한 사람 찾기도 어렵잖아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가 격하게 문을 열었다. 마루에 앉아있던 그녀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게서 한기가 느껴졌다. 그녀가 손가락을 매만지면서 그를 봤다. 한소리 크게 듣겠구나. 그녀는 마음을 단단히 먹기로 했다. 문틀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이 떨렸다. 언제나 같았다. 그의 할아버지도 주변 사람들도 일상은 욕심 하나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일상의 가면에 속은 사람들은 일상을 끊임없이 밀어붙이는 그를 비난했다. 일상은 선이 되었고 그는 악이 되었다. 일상의 가면을 벗길 수 있다면 그는 모든 비난을 감수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일상을 두둔하는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그가 구석으로 그녀를 몰아세웠다. 그녀의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에게서 냉기가 쏟아졌다. 외벽을 짚고 있는 그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빈틈 사이로 사람다운 냄새를 풍기던 그는 완전한 마왕이 됐다. 격분한 그에게서는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적당히 해.”
“강진환씨.”
“주제를 생각해. 고용인이면 고용인답게 행동하라고.”
“저는…… 그냥 강진환씨 생각해서,”
“누가 내 생각해달라고 했어? 할아버지가 완장 좀 줬다고 착각이라도 하는 것 같은데. 김민정. 당신은 그냥 계약직이야. 가게에서 사라져도 아무도 관심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자기나 잘 챙겨.”
그녀가 울컥했다.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그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르의 계약직이었다. 남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임무 성공에 따른 엄청난 보상이 있다는 것과 계약기간이 유독 짧다는 것이었다. 계약만료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녀는 성공한 것이 없었다. 그는 이미 와인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가르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녀의 운명을 쥐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그의 비위를 잘 맞추는 것이 그녀가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었다.
그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는 모든 것이 부서진 옛집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았다. 일상의 손에 이끌려 화마를 피해 밖으로 나왔을 때에 그는 울지 않았다. 우는 법을 잊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화재에 놀라고 무서워 모든 사고가 정지했던 것이었다. 불을 진압하기 위해 도착한 소방차 사이에 있던 구급차에 올라탔다. 일상은 침착하게 그를 달랬다.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이동하는 동안에 그는 혼자가 됐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그가 숨을 골랐다. 정신이 돌았다. 그제야 두려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그녀가 보였다. 날을 세우면서 내뱉었던 말을 주워담고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상처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상에 대한 분노를 그녀에게 내던졌다. 너무도 익숙하게. 그렇게 풀어버렸던 것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다가섰다.
“할머니가 유명한 요리사 요리 좀 남으면 친구분들하고 같이 드시고 싶다고 하셨는데. 생각 난 김에 마을회관에 좀 가서 드리고 와야겠어요. 그럼 다녀올게요.”
그녀가 그를 스쳐 지나갔다. 어색하게 감도는 기류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평상에 있던 와인과 전을 들고는 아무 일이 없었다는 것처럼 대문을 나섰다. 외길을 따라 마을회관으로 올라가던 그녀의 걸음이 느려졌다. 다리가 후들거려 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와인과 전을 든 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시끌벅적거리던 박정자 여사의 집이 조용해졌다. 그가 뱉었던 날카로운 말은 다시 그에게로 돌아갔다. 제자리에 서 있던 그가 뒤를 돌았다.
찬찬히 집을 살폈다. 전에는 시끌시끌한 분위기가 어색했는데 이제는 고요함이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나간 대문을 봤다. 대문너머로 모두가 사라졌다. 그는 한참 녹슨 대문을 봤다. 아무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연락도 없는 그녀가 내심 걱정됐다. 어디서 울고 있나. 마당을 배회하던 그가 대문 앞에 섰다.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정말 우나. 시간이 지날수록 걱정의 크기가 커졌다. 고민을 하던 그가 결국 집을 나섰다. 목적은 하나였다. 김민정 사수.
첫댓글 어서 진환이가 민정이 사수하길~ 분량의 신 다음편도 기대할게요~
작가님 분량 짱짱! 어서 민정이를 사수하기를요!! ㅋㅋ 다음편도 기대해용:)
주웠다ㅋㅋㅋㅋㅋㅋㅋㅋ진환이 츤데레 츤츤! 이렇게 보니 진환이가 확실히 오해를 하고 있는거 같네요.할아버지는 진환이가 오해하고 있는걸 알면서도 말씀 안해주시는건가요? 일상이 불쌍해요ㅠㅠ(뭔가 소설 상 나이많은사람 성을 떼고 말하니 기분이 이상하네요ㅋㅋ) 민정이도 적잖게 속상한거같은데 얼른 민정일 사수하길!! 진환이도 슬슬 마음을 여나요~~~
♥.♥
아익후ㅋㅋㅋㅋㅋ 사람이 먹을만한 음식이 아니래ㅋㅋㅋㅋㅋ 진환이 요리실력이 좋은가 보오ㅋㅋㅋ 어여어여 민정이 사수하러 가시지요 마왕님!!ㅋㅋㅋ
민정이 덕분에 마왕이 착해지는것같아 보기 좋으네요ㅎㅎ재밌게 봤습니다~
마지막 문단 왜 이렇게 좋지 ㅋㅋㅋㅋ
왕왕왕♥♥♥♥
담편기대할게용 진환인 미워할수없는매력남!
일상이 불낸거맞나여??혼란
지금까지 보면 일상이가 나쁜 사람같지는 않은데 오해를 한걸까요?ㅠㅠ 다음편도 기대돼요!!
분량 짱ㅎㅎㅎㅎ다음편도 기대할게요!! 좋은 사람 같다가도 마왕같다니......ㅠㅠㅠ언제쯤이면 민정이랑 알콩달콩해질까요?
오오오오오 점점 민정이한테도 넘어가네요~ 재밌어요!! 다음편 기대하겠습니당!!
진환이도 이제 민정이에게 마음이///꺄 둘이 빨리 잘됐으면좋겠어요!!ㅎㅎㅎ
이제 곧 이어지겠죵?? 두근두근
ㅋㅋㅋㅋㅋ진환이가 슬슬 민정이에게 넘어가는건가요?
진환이가 얼른민정이를 사수하길.. 다음편도 기대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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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사수~ 깍
진환이 너무 과거에 얽매여 있는 건 아닌지..
아무튼 김민정 사수하러 고고 하는 진환에게 박수를~보내요^^
김민정사수ㅋ 너무 좋아요ㅋ
ㅠㅠㅠ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