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곡으로 유명한 <동심초>(同心草)의 원작자는 1200년 전 중국 당나라 때의 여류시인 설도(薛濤: 768?-832)이다. 그녀의 한시(漢詩)를 1930년대에 당대의 유명 시인이며 김소월의 스승인 김억(1896-1950?)이 번역시로 세상에 내 놓았다.동심초의 1,2절 가사가 같은 한시의 다른 번역(김억이 전반부를 달리 번역했다는 의미)임은 ‘이정식 가곡 에세이 <사랑의 시, 이별의 노래>’(2011.5)에서 밝힌 바 있다. 필자가 설도의 흔적을 찾아 중국 사천성 성도에 가게 된 것은 이 책을 출간한 두 달 후인 2011년 7월 하순이었다.
동심초(同心草)설도 원작, 김억 번역, 김성태 작곡1절: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2절: 바람에 꽃이지니 세월 덧없어
만날 길은 뜬 구름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시 원문:
風花日將老(풍화일장로)
佳期猶渺渺(가기유묘묘)
不結同心人(불결동심인)
空結同心草(공결동심초)
< 설도의 ‘춘망사’ 제 3수>
사천성에 간 원래 목적은 장족(티벳족)과 강족(챵족)이 주로 사는 사천성 서북쪽 ‘아바장족강족자주’(동티벳으로도 불림)를 방문하는 것이었지만, 성도를 지나면서 설도의 흔적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 작가, 사진 동호인들과 함께 한 여행이었는데 내게는 설도의 흔적 찾아 보는 일이 내심 더 중요했다.설도의 자취가 남아있는 성도시내 망강루(望江樓) 공원에는 아바주에 다녀와 중국을 떠나기 전날인 7월 31일에야 갈 수 있었다.
망강루 공원
▲ 망강루 공원 옆을 지나는 장강 지류인 '금강' |
망강루 공원에는 설도가 좋아했다는 각종 대나무들이 입구부터 가득 들어차 있었다. 대나무의 종류만도 150종에 이른다고 했다. 공원에는 설도기념관, 설도상, 설도정(薛濤井), 설도의 묘, 죽(竹)문화 전시관, 그리고 공원의 이름이 된 망강루 등이 들어서 있다.기념관 안에는 설도의 모습을 이런저런 상상력을 동원해 그려놓았고, 설도가 교류했던 백거이(白居易), 유우석(劉禹錫), 원진(元[禾眞]), 두목(杜牧) 등 당대의 이름있는 문인들도 그림으로 설명해 놓았다.한쪽에는 설도가 원진을 향해 무언가를 써 보내는 듯한 내용의 그림도 그려져있다. 동심초의 원본이 된 춘망사(春望詞, 봄을 기다리는 노래)가 연하의 남성이었던 원진을 향한 설도의 연모의 정에서 쓰여진 것이라는 이야기를 나타내려는 것 같았다.
그림들 속에 동심초로 번역된 춘망사 제 3수가 적혀있었다면 좋았을 터인데 아쉽게도 다음과 같은 춘망사 제4수가 적혀있었다.
那堪花滿枝(나감화만지) 어찌할까 꽃 가득 핀 저 가지
翻作兩相思(번작양상사) 생각할수록 그리움만 가득하여라
玉箸垂朝鏡(옥저수조경) 눈물이 아침거울에 떨어지네
春風知不知(춘풍지부지) 봄바람은 아는지 모르는지.- ‘춘망사’ 제 4수 - (일반 번역)
그런데 김소월의 스승인 시인 김억(金億, 1896-1950?)은 1943년 여기에 ‘봄바람’이라고 제목을 붙여 다음과 같은 번역시를 그의 번역시집 <동심초>에 실었다.
봄바람
那堪花滿枝(나감화만지) 가지마다 가득이 피인 꽃송이
飜作兩相思(번작양상사) 이 상사 풀길 없어 쉬는 긴한숨,
玉筋乘明鏡(옥근승명경) 거울속에 비최인 세인 이머리
春風知不知(춘풍지부지) 휘도는 봄바람야 어이 알으리.- 출전: 안서김억전집 (한국문학사, 1987) -
한시 원본과 달리 김억의 번역시집에는
제4수 2행 ‘번작양상사’의 번(翻, 원본)이 번(飜)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채자(採字)과정에서의 실수로 빚어진 오자(誤字)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한 실수가 1980년대에 전집을 만들 때 생긴 것인지 번역시집 원본부터인지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3 행도 안서김억전집엔 ‘옥근승명경(玉筋乘明鏡)’으로 나와 있다. 다섯 자 중 무려 세 자가 다르다. 왜 한자가 그렇게 바뀌었는지 이유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설도의 원문대로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국학자인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순우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옥근(玉筋)은 ‘옥 젓가락처럼 흘러 내리는 눈물’이란 뜻의 옥저(玉箸) 혹은 글자의 형태가 비슷하게 생긴 옥저(玉筯: 앞의 옥저와 같은 뜻)의 채자상의 착오로 보이며 승(乘: 탈 승) 역시 수(垂:드리울 수, 떨어질 수)의 채자상의 실수로 보인다는 것. 또한 명경(明鏡: 밝은 거울)은 조경(朝鏡: 아침 거울)에 비해 멋스러움이 덜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모든 실수를 감안하더라도 김억 선생이 3행을 ‘거울 속에 비최인 세인 이머리’라고 한 것은 지나친 비약이거나 창작에 가깝다는 것이다. (주: 옥저(玉箸, 玉筯: 마치 옥으로 만든 젓가락처럼 흘러내리는 눈물. 중국 삼국시대의 고사로, 위나라 문제(文帝)의 왕후인 견후(甄后)의 얼굴이 희었는데, 그 위에 두 줄기 눈물이 흐르면 마치 옥저와 같았다는데서 유래된 말.)
▲ 설도기념관 내 벽면에 대나무에 쓴 듯이 그려진 <춘망사> 제4수. |
아무튼 기념관 안 어디에도 설도의 <춘망사>중 제 3수가 한국에서 <동심초>라는 유명 가곡이 되어 지금도 널리 불리고 있다는 설명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한국인 가이드들 조차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듯 했다. (글/사진: 이정식) (‘가곡 동심초 2편’에서 계속)
春望詞 四首(춘망사 4수) /薛濤 (770~832)
1.
花開不同賞, 꽃 피어도 함께 바라볼 수 없고/
花落不同悲. 꽃이 져도 함께 슬퍼할 수 없네/
欲問相思處, 묻노니 그대는 어디 계신고/
花開花落時. 꽃 피고 꽃 질 때에/
2.
攬草結同心, 풀을 뜯어 한마음으로 맺어/
將以遺知音. 님에게 보내려 하네/
春愁正斷絶, 봄 시름 그렇게 끊어버렸건만/
春鳥復哀鳴. 봄 새가 다시 와 애달피 우네/
3.
風花日將老, 꽃은 바람에 날로 시들고/
佳期猶渺渺. 만날 날은 아득히 멀어져 가네/
不結同心人, 맘과 맘은 맺지 못 하고/
空結同心草. 헛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4.
那堪花滿枝, 어찌 견디리 꽃 가득 핀 나뭇가지
飜作兩相思. 괴로워라 사모하는 마음이여
玉箸垂朝鏡, 눈물이 주르르 아침 거울에 떨어지네
春風知不知. 봄바람은 아는지 모르는지
제1수에서는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써서 상사(相思)의 정을 표현했고, 제2수는
마음과 마음이 합쳐지는 것을 바라는 아름다운 소원을, 제3수에서는 연인을
만나지 못해 비통해 하는 마음이 넘쳐흐르고 있다.
가곡 '동심초'의 가사는 바로 이 제3수를 우리나라 말의 맛을 살려 다시 쓴
것이다.
# 설도(薛濤)는
唐대의 명기.여류 시인이란 사실을 모르는 이가 많지만 송나라 때의 이청조와 함께 중국 여류 시단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당시의 일류 문인들과 교류가 많았는데 백거이,원진, 유우석,두목 등이 바로 그들이다.
설도를 이야기 할 때 원진(779-831)을 기억 해야 한다.왜냐하면 그녀가 원진을 사모하여 지은 춘망사(春望詞)란 시가 바로 우리가 즐겨 부르는 동심초의 가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설도가 태어난 해와 죽은 연도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략 770-832 쯤인 것 같다. 때로는 768-841로 보기도 한다. 일설에는 고구려아 티베트와 싸우고 신라군에 패전한 당의 명장 설인귀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어렸을 때 하급 관리였던 아버지가 성도(成都)에서 근무하게 되어 그 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8, 9세에 능히 시를 지을 줄 알았으며 아버지가 죽자 가세가 기울어서 16세에 樂籍(악적 : 고급기생 명부)에 올랐다고 한다. 어릴 적에 아버지와 함께 정원에 앉아 있을 때 아버지가 작은 나무 한 그루를 가리키며 시를 읊었다고 한다.
庭 除 一古桐 (마당의 오동 한그루 )
聳于 入雪中 (줄기가 구름을 치솟았구나)
그리고 어린 딸에게 댓구를 지으라 했더니
枝迎 南北 鳥 (가지는 남쪽과 북쪽에서 오는 새들을 맞고)
葉 送 往來風 (잎은 오고 가는 바람을 보내는 구나)
라고 댓글을 지다고 한다. 이것을 보고 아버지는 슬퍼했다고 한다. 새와 바람이 오고 간다는 것은 고급 기생에 대한 시적인 표현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운명을 예견한 것이 아닐까하고 걱정했던 것이다.
설도는 이미 14세 때부터 詩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전당서 소전>에 설도 18세에 위고가 검남서천 절도사로 부임해 왔는데 설도를 불러 악적 (음악을 담당하는 기생)에 올려 관청 기생이 되게 하였고 위고는 죽을 때까지 20여년동안 ,부모를 졸지에 잃은 설도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여인이지만 박학한 그녀에게 책 교정과 열람의 소임을 담당하는 교서 직책을 부여하여 그뒤로 설도는 '교서'라고 불렸다.
원진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으로 아내를 잃고 또 올 곧은 성품으로 부패한 정권과 맞서다가 몇번이나 좌천을 갔다고 한다. 세상의 냉혹함에 아내를 먼저 보내야 했던 그는 삶의 고달픔을 설도라고 하는 기생 시인과 정을 나누며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
설도는 또한 그러한 원진에게 애련한 감정을 품었을 것이다. 나이와 신분을 초월한 남녀간의 지순한 사랑, 그것도 서로 같은 하늘아래 살면서 헤어져야 하는 비련의 사랑이란 시공을 초월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마력이 있다. 그 것이 또한 인간의 영혼을 얼마나 고양시키겠는가?
원진의 字는 微之이다.9세때부터 시를 짓기 시작했고 15세때 과거에 급제한 수제였다. 그는 백거이와 아주 절친한 관계였는데 그는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서 동천, 혹은 통주로 좌천되었는데 5년 후에 백거이도 강주라는 곳으로 귀양을 갔다. 809년 설도와 원진이 이곳에서 서로 처음 만난다. 당시 원진은 동천에 좌천되어와 있었는데 설도의 文名을 듣고 그녀를 찾아 간 것이다. 설도 역시 원진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평가 했다.
설도는 39세에 12세 연하의 원진을 만났고 둘은 평생을 서로 그리워 하는 연인이 되었다고 한다. 원진은 나중에 옛날 은사였던 위하경을 만났는데 원진이 기생을 만난다고 책망하며 자기의 질녀를 소개 했다고 한다. 원진과 설도는 벼루를 반으로 나누어 사랑의 징표로 나누어 가졌으나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는 사람 때문에 그 벼루를 개울에 빠뜨려 잊어버리고 만다. 모두 그둘의 사랑을 방해한 그녀로 인하여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춘망사가 생겨나고 ,김억 번안 , 김성태 곡의 동심초가 생겨난다.
꽃 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을 맺지 못하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갖 되이 풀잎만 맺으려 는고
설도는 자기가 직접 만든 아름다운 색종이( 설도전)에 백여편의 시를 써서 원진에게 보여 주며 그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고 , 원진 역시 설도에게 향한 詩로서 화답을 했다. 그들은 얼마나 서로 사랑하고 있었을 까? 두사람의 시를 감상 해 보자.
1). <설도의 춘망사( 春望詞)>
花開不同賞 花落 不同悲 ( 화개 부동상 화락 부동비)
欲問 相思處 花開花落時 (욕문 상사처 화개 화락시 )
攬草 結 同心 將以 遺 知音 (람초 결 동심 장이 유 지음 )
春愁 正斷絶 春鳥 復 哀吟 (춘 수 정단절 춘 조 부애음)
花落日將老 佳期 猶渺渺 (화 락 일 장노 가기 유 묘묘 )
不結同心人 空結同心草 (불결 동 심인 공결 동심 초 )
那堪 花滿枝 飜作 兩相思 (나감 화 만지 번작 양 상사 )
玉箸 垂朝鏡 春風 知不知 (옥저 수 조경 춘풍 지 부지 )
꽃 피어도 함께 즐 길 이 없고 꽃져도 함께 슬퍼할 이 없네
묻노니 그 대 어디에 계시는가 꽃 피고 꽃 지는 이 게절에
풀을 따서 한마음으로 맺어 날 알아주시는 임에게 보내어
봄 시름 그렇게 끊으려 하는데 봄 새가 다시 슬피우네
꽃잎은 바람에 시들어가고 만날날은 아득히 멀어져 가네
마음과 마음을 맺지 못하고 헛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어찌 견디리 꽃 가득한 나무가지 바람에 날려 그리움으로 변하네
옥같은 눈물이 아침 거울에 떨어지는데 봄 바람은 아는지 모르는지
2). 원앙초(鴛鴦草)
綠英 滿香砦 兩兩 鴛鴦小 (녹영 만향채 양양 원앙소)
但娛 春日長 不管 秋風早 (단 오 춘일장 불간추풍사 )
싱그러운 꽃봉오리 향기로운 섬돌에 가득하고
둘씩 둘씩 어울린 어린 원앙이어라
오직 긴 봄을 즐거워 할 뿐이니
가을 바람이야 무에 걱정 할 것 있으리
3). 원진(元鎭)
錦江 滑 賦 娥眉 秀 幻出文君 與 薛濤 (금강 활부 아미수 환출 문군 여 설도 )
言語巧 愉 鸚鵡舌 文章 分得 鳳皇毛 (언어 교유 앵무 설 문장 분득 봉황모 )
紛紛 辭客 多停筆 個個 分卿 欲夢刀 (분분 사객 다정필 개개분경 욕몽도 )
別後 相思 隔煙水 菖蒲 花發 五雲高 (별후 상사 격연수 창포 화발 오운고 )
금강의 매끄러움과 아미산의 빼어남이 변하여 탁문군과 설도가 되었구나
말씨는 앵무새의 혀와 같고 문장은 봉황의 깃털같이 화려하네
詩人들 부끄러워 붓을 멈춤이 많고 공경 대부들 꿈속에서라도
그대와 같은 시를 쓰고 싶어하네
헤어져 그리운데 아득한 강 저편이라 창포꽃 피고 오색 구름 높구나
4).유서(柳絮)/薛濤
二月楊花 輕復微 春風搖蕩 惹人依 (이월 양화 경복미 춘풍 요탕 야인의 )
他家 本是 無情物 一向 南飛又北飛 ( 타가 본시 무정물 일향 남비 우 북비 )
이월의 버들 강아지 가볍고도 작아 봄바람에 하늘 거리며 옷깃을 스치네
버들 강아지야 무정한 꽃잎이지만 남쪽으로 날리고 또 북으로도 날리네
5). 離思( 리사)/元鎭
曾經 滄海 難爲水 除却 巫山 不是雲 (증경 창해 난위수 제각 무산 불시운 )
取次 花叢 懶回顧 半緣 修道 半緣 君 ( 취차화총 라회고 반연 수도 반연 군 )
창해를 보고나선 세상의 강이다 대수롭지 않고
무산을 보고나면 다른 것은 구름이라 할 것이 없네
아름다운 꽃을 봐도 즐겁지 않은 것은
반은 수도 때문이고 반은 님을 그리기 때문이라오
6). 허균(許均)이쓴 설도(薛濤)
燈暗 芙蓉 帳 香殘 翡翠 裙 (등암 부용장 향잔 비취군 )
明年 小挑發 誰過 薛濤墳 ( 명년 소도발 수과 설도분 )
부용 꽃 휘장에 불빛이 희미한데
비취색 치마엔 향기 아직 남았구나
명년에도 복사꽃 활짝피면 누가 또
설도의 무덤을 찾을 건가
39세의 정상을 달리던 이름난 시인이요 명기였는데 12살 연하의 불운한 천재 연인 원진을 만나 주고 받은 애틋한 사연을 대하니 동심초 노래가 떠오르네요
꽃 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을 맺지 못하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갖 되이 풀잎만 맺으려 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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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시인 이었던 원진은 여자문제에서만은 花花公子였다고 한다.최앵앵과 결혼 약속을 못지키고 기생 유재춘을 농락하여 자살하게 하고 자신은 재상의 딸과 결혼하고 설도와 사랑을 하게 되었으니..이런 소문을 듣고 설도는 풍류객 시인 두목과도 사랑을 하게되나 자기의 나이가 연상인 것을 생각하고 결별을 선언했다고 한다. 설도는 여러모로 황진이와 유사한 삶을 살았다.
만년에는 완화계에서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완화계는 두보가 살았던 두보 초당과 사마상여와 탁문군이 함께 살았던 탄금대가 있던 근처로 현재는 공원으로 꾸며져 있고 ,지금도 성도에는 그를 기리는 유적이 많이 있다고 한다. 설도전을 만들 때 사용하던 우물이 설도정으로 명명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묘도 잘 관리되고 있고 설도의 詩에 대나무가 자주 등장하기에 그녀의 遺墟地인 望江樓 공원에는 대나무 140여 종이 숲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설도를 기념하여 세운 望江 樓( 성도의 동남쪽 장강의 지류인 금강변 대나무 무성한 곳에 여류 기생 설도를 기리는 망강루가 있음)를 방문한 어떤 풍류객이 읊기를
< 망강루 아래 강물은 천고에 흐르고
비록 사랑에 울던 설도였지만
천년 세월에도 그녀의 명성 여전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