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이동] ‘왕희지(王羲之:307~365)와 현,절강성소흥(紹興)’의 관계 (추정)
20231206 by 진정(眞正)
<참조자료 : 현재의 통설(요약)> 1. 두산백과 : https://www.doopedia.co.kr/ --- (검색어 : 백과사전/왕희지) 2. 위키백과 : https://ko.wikipedia.org/wiki/왕희지
-성명 : 왕희지(王羲之:307~365=58세), 낭야(琅琊)출신 -자(字) :일소(逸少) / 아호(雅號):담재(澹斋) / 별칭:왕우군(王右軍),서성(書聖) -생몰 : 生303년[서진(西晉)/현,절강성소흥(紹興)] ~ 歿361년[동진(東晉)/현,산동성임기(临沂)] -부(父) : 왕광(王曠), -삼촌: 왕도(王導=동진왕조 건설 유공자) -아들 : 왕헌지(王獻之:344~386=서예가) [현,절강성소흥(紹興)生] -경력 : 정치가, 시인, 서예가 o. 339년~343년 : 동진(東晉)/내사령(內史令) o. 343년~353년 : 동진(東晉)/(會稽=현,紹興)내사령(內史令) 겸 우군장군(右軍將軍) -치적 : 《난정서(蘭亭序)》 = 353년,회계(會稽=현,紹興)/난정(蘭亭) 유상곡수(流觴曲水)41인연회(41人宴會) 시집서문 -일화 : 당태종(唐太宗)이 왕희지의 글씨를 사랑한 나머지 천하에 있는 그의 붓글씨를 모아, {한 조각의 글씨까지도 애석히 여겨} 죽을 때 자기의 관에 넣어 묻게 하였다고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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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이동] ‘왕희지(王羲之:307~365)와 현,절강성소흥(紹興)’의 관계 (추정)
4C중엽 동진(東晉:317~420)의 유명한 서예가인 왕희지(王羲之:307~365)가 353년에 '현,절강성소흥(紹興)의 난정(蘭亭)이라는 곳에서 있었던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의 시문들을 모은 시집의 서문인 《난정서(蘭亭序)》를 썼다'고 하는데,... 이 글은, '353년 당시의 이곳(현, 紹興)은 {동진(東晉:317~420)의 땅이 아니라} 당시 백제의 22담로지역에 해당된다'는 것을 추론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참고가 되시기 바랍니다.
1. 백제(百濟) 13근초고왕의 재위기록 : [참조:한국사db]
삼국사기에서 백제(즉,산동백제) 13근초고왕의 재위기록 첫부분을 조사하면,... 즉위(1년=346년7월)해서 2년(347년1월)에 천신지기에게 제사를 지낸 다음의 ‘3년(348년)~20년(365년)까지 19년간의 기록’이 통째로 누락되어 있다. 이렇게 긴 기년의 기록이 장기간 누락된 경우는 삼국사기에서 다른 예를 찾을 수가 없는 아주 특이한 케이스이다.
1년/346년09월 : 13근초고왕이 즉위하다[近肖古王,比流王第二子也.體貌竒偉,有逺識.契王薨, 繼位]
2년/347년01월 : 하늘과 땅에 제사지내고 진정을 조정좌평에 임명하다.[祭天地神祗,拜真淨爲朝廷佐平]
21년/366년03월 :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다[遣使聘新羅]
이는 곧 ‘3년(348년)~20년(365년)까지의 19년간’ 동안에 ‘13근초고왕이 주변의 다른 나라들을 두루 정벌하러 멀리 출정했었던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 기간에 백제13근초고왕이 동진(東晉)을 포함한 현,중국의 동해안 지역 및 현,(동+남)중국해 지역을 모두 직접 정벌해서 소위 말하는 후대의 22담로 체제를 구축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21년(366년03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다[遣使聘新羅]’라는 기록은,... 백제(즉,산동백제) 13근초고왕이 바로 옆에 가까이 있는 신라(즉,산동신라)로 사신을 보내서 ‘속국으로 삼겠다’라고 통보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신라본기에도 이에 상응해서 ‘新羅本紀3>17奈勿尼師今11년(366년03월) > 백제 사람이 예물을 가지고 찾아오다[百濟人來聘]’라고 핵심내용을 누락시킨 간단한 왜곡기록만 남기고 있지만, {이후에 진행된 양국 관계에 대한 기록내용을 분석해 보면} 결국 산동신라가 산동백제에게 완전히 병합되어서 ‘신라19눌지왕은 434년10월에 백제의 금성군태수로 전락하였었던 것[王以黄金·明珠,報聘百濟=>즉, 신라가 국가통치권(明珠)를 백제에게 바침]’이므로, 이때(366년03월) '백제의 병합요구가 처음으로 신라로 전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추가 추론근거=힌트) : ‘19년간의 기록공백’ 이외의 사안으로서...]
1) 2년(347년1월)의 ‘祭天地神祗’ => 정상적인 표현은 ‘祭天神地祗’인데,... ‘神’자와 ‘地’자의 순서를 바꿈
2) 2년(347년1월)의 ‘朝廷佐平’ => {일반장관급 佐平이 아니라} ‘국왕 부재시의 國政全權에 대한 대리통치권’을 위임한 佐平임
2. 현,산동성임기(临沂)] : [참조 : 바이두백과/临沂市=>번체변환]
바이두백과를 참조하면,...“임기시는 옛날에 낭야, 기주라고 했다(臨沂市,古稱琅琊、沂州).... 임기시는 기하에 임했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臨沂市因臨沂河得名).... 춘추 때 계양성으로 건설되었고(春秋時建啟陽城),진나라 때 낭야군에 속했고(秦時屬琅琊郡),한나라 때 임기현을 설치했고(漢代設臨沂縣),청나라 때 임기부가 설치되었다(清設沂州府)”라고 한다.
이를 참조하면, '현,산동성임기(临沂)란 지명은 옛,지명인 낭야(琅琊) 및 기주(沂州)라는 지명에서부터 유래했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직접적으로는 ‘한나라 때 설치된 임기현(漢代設臨沂縣)’이라는 지명에서 직접 유래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산동성지역(속칭,靑州)은 '현,하남성녕보시(靈寶)에 있었던 춘추제(春秋齊)나라를 지명이동해서 왜곡한 곳'이므로, '현,산동성임기(临沂)란 지명도 대략 현,하남성평정산시(平頂山) 정도에서 지명이동되었다'고 추론된다. 그리고 4C중엽에는 백제가 현,중국의 해안지역 전체를 장악해서 속칭하는 22담로를 설치하던 시기였었으므로 현,산동성에 {현,하남성 서쪽에 있었어야 할} 낭야(琅琊)나 기주(沂州) 및 임기(临沂)라는 지명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3. 동진(東晉:317~420)의 위치와 위상 : [참조 : 바이두백과/東晉]
낙양{雒陽=현,섬서성상락(商洛)=현,하남성낙양(洛陽)으로 지명이동하여 왜곡된 것임}에서 ‘8왕의 난(291~306)’과 ‘영가의 난(307~312)’을 겪은 뒤 {사실상 국가체제가 무너져버린} 서진(西晉:265~316)이 잠시 현,섬서성서안(西安:312~316)으로 옮겨서 재기를 노렸었으나, 결국 남흉노 유연(劉淵)이 세운 한(漢=후에 前趙로 고침)에게 멸망당하자 {학살을 피해서} 남쪽인 건강{建康=현,호북성무한(武漢)=>현,강소성남경(南京)으로 지명이동되었고, 이때 오군(吴郡) 및 양주(扬州) 등도 함께 지명이동되었음} 부근으로 도망한 낭야왕(琅琊王) 사마예(司馬睿:276~322)가 동진(317~420)을 건국하였었는데,.... 현재의 통설에서는 동진이 {도중에 아무런 국체(國體)의 변동도없이 잘(?) 지내다가} ‘11공황제(恭皇帝=419~420)’가 ‘유송(劉宋:420~479)’에게 {정상적으로?} 멸망당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5진효종(晉孝宗)목황제(穆皇帝:344~361)’ / ‘6애황제(哀皇帝:361~365)’ / ‘7폐황제(廢皇帝=태화(太和:366~371)’ / ‘8진태종(晉太宗)간문황제(簡文皇帝:371~372)’ / ‘9진열종(晉烈宗)효무황제(孝武皇帝:372~396)’)로 이어지는 동진(東晉)의 왕력표를 참조로 하면... 5대~9대의 사이에 {묘호(廟號)가 없는} ‘6애황제(哀皇帝:361~365)’와 ‘7폐황제(廢皇帝=태화(太和:366~371)’ 및 {묘호(廟號)는 있지만, 시호(諡號)가 조금 이상한} ‘8진태종(晉太宗)간문황제(簡文皇帝:371~372)’가 끼어 있는 것이다.
즉, 347년에 정벌을 나선 (산동)백제13근초고왕이 결국 동진을 정벌하고 361년부터 임시로 허수아비왕(즉,6애황제)을 유지 하면서 사실상 직할통치를 시작하여 {태화(太和:366~371) 시기에는 동진을 아예 국가로 인정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7폐황제라는 기록'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며, 백제의 지배체제가 완전히 정비된 371년에 비로소 옛,동진의 토착실력자를 ‘8간문황제{簡文皇帝=즉, 서류상(簡)의 문황제라는 의미임}’로 인정해 주는 아량(?)을 베풀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만, 그 이후에는 ‘簡(문서,간)이라는 딱지'를 붙이지는 않았지만} 동진은 여전히 '백제의 완전한 속국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인데,... 50년 뒤인 420년에 {대맹주인 고구려가 개입해서} 동진이라는 국가를 완전히 멸망시키고서 송(劉宋)나라로 바꾼 뒤에 {백제와 대등한} 소맹주로 삼아서 대맹주인 고구려가 직접 관할함으로써 이 지역이 일단 백제로부터 분리가 되었었지만, 나중에 {'북연왕 풍발문제'에 개입해서 과욕을 부린} 송(劉宋)나라가 고구려의 대맹주권에 도전을 하다가 완전히 토벌당한 뒤[참고: 사서에는 이를 '고구려가 良馬800匹을 조공했다'라고 주객전도해서 왜곡기록함], 결국 { 479년에 고구려가 그 땅을 도로 산동백제(小盟主)에게 되돌려 줌으로써} 옛,동진(東晉) 지역이 모두 백제의 군현으로 편제되게 되었던 것이다 {참고: 이 상황을 중국사서에서는 '백제의 요서(遼西) 점유' 또는 '백제의 진평군(晉平郡)진평현(晉平縣)'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현행의 왜곡된 중국정사25사에서는 이 상황을 완전히 주객전도(主客轉倒)해서... '동진(東晉)이 {소위말하는 남조국가인} 유송(劉宋)이 되었다가 다시 남제(南齊:479~502)가 되었다.'라고 기록'해서... '백제가 오히려 {백제13근초고왕이 정벌해서 병합했었던} 남조국가들의 책봉을 받았던 것처럼 왜곡'하고 있는것이다. 물론 삼국사기도 이러한 맥락에 맞춰서 기록하고 있으므로 주의해야 할 것이다. [참고: 502년에는 양(蘇梁)나라가 백제로부터 독립했었다.]
[참고(추론근거) : ‘태화(太和:366~371)’라는 연호]
앞에서 설명한 동진의 왕력표에 나타난 ‘7폐황제(廢皇帝=태화(太和:366~371)’의 연호인 ‘태화(太和)’가 바로 일본나라현의 석상신궁(石上神宮)에서 발견된 ‘칠지도(七支刀)에 부각되어 있는 태화(太和) 4년(즉,369년)’이 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칠지도의 태화(太和)’ 는 ‘동진7폐황제(廢皇帝=태화(太和:366~371)의 연호’가 아니라 ‘백제13근초고왕의 연호’였던 것이다. 이미 앞의 ‘동진6애황제(哀皇帝:361~365)’ 시기에 동진이 백제에게 완전히 병합되었던 것이므로 365년 이후부터는 백제의 직할통치가 시작되어서 사실상 ‘동진7폐황제(廢皇帝)는 황제에 즉위하지도 못했던 것’인데, {중국정사25사가} 중국국가를 올리는 춘추필법(즉, ‘역사왜곡방법론’의 주객전도 방법)으로 기록을 조작해 둔 것이다.
결국, 동진은 애당초부터 현,강소성남경(南京)에 도읍을 한 적도 없었고, 현,절강성소흥(紹興)이나 현,산동성임기(臨沂)에는 아무런 연고도 없었던 것인데,... {당나라가 ‘7말8초 역사왜곡’을 하면서} 현,하남성녕보시(靈寶)의 옛,춘추제(春秋齊)나라를 현,산동성으로 지명이동시키고, 또 현,호북성무한(武漢)부근에 있었던 손권(孫權)의 오(孫吳)나라 건강(健康)을 현,강소성남경시(南京)로 지명이동시켰었던 것이다.
4. 왕희지의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의 위치와 역사왜곡
현재의 왜곡된 통설에서는... 명필서예가인 ‘낭야(琅琊)출신 왕희지(王羲之:307~365=58세)’가 353년에 현,절강성소흥(紹興=會稽라고 지명이 이동+왜곡됨)의 난정(蘭亭)에서 열린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에 참석해서 《난정서(蘭亭序)》라는 유명한 시집의 서문(序文)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7말8초 역사왜곡(대왜곡3)’에 따른 ‘지명이동에 의한 역사왜곡’ 때문에 잘 못 알려진 것이다. 즉, 당시의 동진(東晉:317~420)은 현,호북성무한(武漢) 부근의 건강(健康)에 도읍하고 있었으며, 353년으로부터 8년전인 345년경에 이미 백제13근초고왕에게 정복당해서 백제의 속국 상태였었던 것이므로... 현,절강성소흥(紹興)지역은 동진(東晉)과는 전혀 무관한 또 다른 백제 22담로지역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왕희지(王羲之:307~365=58세)’의 고향이라는 ‘낭야(琅琊)’도 대략 현,하남성평정산시(平頂山) 부근일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결국 이 '왕희지의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 스토리'는 {동진이 백제에게 정복당한 시기에 해당되는 353년에 출간되었었던} '왕희지의 난정서 서문'을 이용해서 '마치 현,절강성소흥(紹興)이 당시에 동진의 땅이었던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기 위한 '7말8초 시기에 구사된 역사왜곡방법론' 중의 하나라고 보면 될 것이다.
5. 4C중엽 현,절강성지역의 상황
현재의 왜곡된 통설에서는 현,상해시(上海)의 장강하류 남쪽지역 및 그 북쪽지역에 춘추오(春秋吳)나라와 춘추월(春秋越)나라 및 회계산(會稽山) 등등이 있었고 또 그 이후에는 왜(倭=속칭,江南倭,大陸倭)가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러한 지명이들은 모두 ‘7말8초 역사왜곡’에 의해서 현,하남성이나 현,호북성에서 현,절강성으로 지명이동되어 온 왜곡된 지명들인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소위 중국국가라는 나라들은 당나라가 백제(660년)와 고구려(668년) 및 신라(675년)를 정벌하기 전까지 이 지역{현,중국의 화동(華東)지역}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모두 당나라가 역사를 왜곡한 ‘(7말8초)대왜곡3’의 결과물들인 것이다. 따라서 왕희지가 활동하던 353년 전후의 현,절강성소흥(紹興) 일대는 백제의 22담로 중의 하나였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차수정(20231219)
2차수정(20240402)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