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운명의 숙적
취월루(醉月樓).
낙양 거리를 따라 걷다 보면, 유난히 빛 바랜 주기(酒旗)를 볼 수 있다.
값이 저렴하고 한 잔의 독주를 청한 다음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지 않아도 되는 곳.
그러하기에 낙양성의 허다한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는 주루 겸 다루이다.
낭옥비는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창 바로 곁의 좌석에 앉아 죽엽청(竹葉靑)을 마셨으며, 안주래봤자 삶은 낙화생이 전부였다.
죽엽청과 안주를 날라다 주는 점소이는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십칠 세 소년으로, 낭옥비를 잘 기억하고 있다.
낭옥비는 비 오는 날 즐겨 취월루를 왔으며, 많이 마셔야 죽엽청 반 주담자를 마실 뿐이었다.
이 날, 주루의 창에 빗물이 흘러내리기에 거리의 풍경은 불투명한 유화처럼 흐릿하게 보이고 있었다.
"……."
낭옥비는 자음자작하였으며,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가끔가다가는 자신의 텅 빈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입가에 고졸된 미소를 짓곤 했다.
'더 참아야 한다.'
그는 입술을 한 일자로 다물었다.
'그 날까지는… 그 날이 될 때까지는…….'
그는 술잔 가득히 술을 따랐으며, 천천히 술잔을 비웠다.
오늘따라 그는 주량을 넘게 마셨다.
소칠(少七)이라는 점소이 녀석은 그가 세 번째로 시키는 죽엽청 주담자를 들고 탁자 곁으로 다가서며 이렇게 말했다.
"좋지 않은 일이 있었나 보군요, 공자?"
그는 낭옥비의 안색이 좋지 않자, 은근히 걱정이 되는 눈치였다.
"살다 보면 흐릴 날도 있지. 개인 날도 있듯이."
낭옥비는 빙긋 미소를 지어 주었다.
'세상에 저리도 밝은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운예서각의 낭공자님뿐이시리라.'
소칠은 낭옥비의 미소를 볼 때마다 감탄했다.
'아마도 오늘은 죽은 부인 생각이 나시는가 보군. 술을 꽤 많이 드시는 것을 보니…….'
그는 조용히 뒷걸음질 쳐서 문 쪽으로 갔다.
낭옥비가 네 주담자를 비웠을 때였다. 취월루가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주루 한가운데를 점거하고서 화주(火酒)를 퍼마시던 세 명의 파락호(破落戶)들이 갑자기 환호성을 터뜨렸다.
"와아… 대단한데?"
"녠녠… 이 거리에 저런 우물(尤物)이 있다니, 놀라운데?"
"병아리로군? 녠녠, 하여간 내 평생 처음 보는 미녀다. 이리 오너라! 오라버니의 무릎 위에 앉아 봐라!"
술 취한 파락호들은 막 주루 안으로 접어든 홍의소녀를 보고 군침을 삼켰다.
천하절색(天下絶色).
낙양 명기 아향(阿香)이나 옥매(玉梅)조차 따라잡기 힘든 미모이다.
너무나도 청초하게 피어난 수선화(水仙花)랄까?
겁먹은 눈빛을 하며 주루 안으로 접어든 한 명의 미소녀는 세 명의 거한이 다가서자, 갑자기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으으……!"
미소녀는 두렵다는 듯 몸을 움츠렸다.
"그냥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군. 그래, 어서 안기거라. 네게 줄 화대 정도는 늘 갖고 있단다."
"프하핫… 얼굴에 홍조가 떠오르니, 더욱 보기 좋군."
"어서… 안기거라!"
취한들이 미소녀를 희롱할 때였다. 갑자기 아주 낭랑한 목소리가 그들의 고막을 때렸다.
"그 소녀는 나의 누이동생이오. 일반 기녀(妓女)가 아니니 언행을 삼가해 주기 바라오, 노형들."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구깃구깃한 회삼, 헝클어진 머리에 문사건(文士巾)을 쓴 나이 스물두셋 정도의 청년.
하루 온종일 방구석에만 틀어박혀 사는지 안색이 창백하기 짝이 없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서자, 세 명의 거한은 잘 됐다 하는 표정으로 낙척서생 차림의 회삼청년을 품자형(品字型)으로 포위했다.
"녠녠… 네가 이 계집의 오라버니라고? 그럼 내게는 처남이 되겠구나?"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이기에 낙양삼룡(洛陽三龍)을 몰라보느냐?"
청년은 바로 낭옥비였다.
주루 안에 들어서다가 봉변을 만난 미소녀는 바로 무향이었다.
무향은 낭옥비가 예정보다 늦자, 낭옥비가 취월루에 머무르려니 짐작하고 낭옥비를 찾아 나선 것이다.
"이 놈! 우리들을 몰라보고 끼여 들다니!"
낙양삼룡의 우두머리가 소리칠 때, 갑자기 점소이 소칠이 죽는 시늉을 하며 다가섰다.
"그분은 운예서각주이십니다. 낙양제일학자(洛陽第一學者)이십니다. 그러시면 아니 되십니다."
"낙양제일학자라고? 호오, 그럼 우리 같은 파락호들은 감히 우러러보지도 못할 어르신네로군?"
"녠녠… 글줄이나 읽은 작자들은 모조리 목뼈가 부러져 죽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소원이지. 학자라면 더 잘 된 일이다."
"점소이 녀석, 끼여 들지 마라."
세 녀석 가운데 하나가 소칠을 향해 금강복호장법(金剛伏虎掌法)을 펼쳤으며, 순간 소칠의 뺨에 장인이 찍혔다.
쾅-!
폭음이 터져 나오며 소칠의 몸뚱이가 붕 떠올랐다.
그의 동체는 탁자 위에 나가떨어졌으며, 탁자의 두 다리가 부러지며 탁자가 바수어졌다.
"크으윽……!"
소칠이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까무러치는 바로 그 순간, 낭옥비의 두 눈에서 한망(寒芒)이 뿜어져 나왔다.
파르르르…….
그의 손길이 가늘게 떨렸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 중지(中指)와 식지(食指)가 모아져 원을 만들었다.
그가 손가락을 퉁기어 낸다면, 미륵모니금환지(彌勒牟尼金環指)라는 절세무공이 발휘될 것이다.
십 장 밖의 거석을 한 줌 모래로 만들어 버리는 가공할 지력이 발휘되기 직전, 타올랐던 그의 눈빛이 여지없이 흐트러졌다.
'참아야 한다. 더 큰 것을 위해.'
그는 입술을 질끈 물며 손에서 힘을 뺐다.
"노형들, 너무 하시는구려?"
그가 진중한 어조로 말하자, 소질의 뺨을 뭉개 버린 자가 옷소매를 팔뚝에 걷어붙이며 낭옥비 앞으로 다가섰다.
"녠녠… 이번엔 네 차례다!"
그는 다짜고짜 낭옥비 쪽으로 다가섰다.
"쓰러져라!"
입이 쩌억 벌어지는 가운데, 강철 같은 주먹이 낭옥비의 가슴팍을 향해 움직여 나갔다.
퍽-!
둔중한 소리와 함께 낭옥비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콰쾅-!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낭옥비는 의자에 떨어져 내렸으며, 의자는 산산이 바수어지고 말았다.
"프핫핫… 일 권에 나자빠질 놈이 거만히 나서기는……."
"핫핫… 저런 문사 나부랭이에게는 주먹이 보약이지."
"저 놈은 지금쯤 극락에 가서 선녀들과 즐겁게 지낼 것이니, 우리들은 저 잡놈의 누이와 현세에서 즐겁게 놀아 보세."
파락호들은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시선을 한 곳으로 돌렸다.
무향, 그녀는 독 오른 꽃이 되어 있었다.
겁을 집어먹고 벌벌 떨던 무향이었는데, 낭옥비가 한주먹에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암코양이처럼 표독스러워진 것이다.
그녀의 그러한 모습은 더욱 관능적(官能的)이었다.
사실 낙양이 넓고, 낙양의 밤거리에 무수한 노류장화가 있다 한들 무향만한 미녀는 전무했다.
"어이구, 귀여운 것!"
"어서… 어서 이리 안기거라!"
"녠녠… 오늘 밤, 극락 구경을 시켜 주겠다."
세 녀석은 개침을 질질 흘리며 무향이 쪽으로 다가섰다.
무향의 몸이 그들에게 포위될 때, 또다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형들! 그 아이는 나의 누이동생이라고 하지 않았소이까? 그대로 보내 주시오. 몸이 약한 아이요."
휘청거리며 회삼청년 하나가 그들 쪽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저, 저 놈이 일어나다니?"
"으으, 도대체 모를 놈이군? 내일 아침은 되어야 깨어날 줄 알았는데?"
파락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휘청거리며 다가서는 청년은 낭옥비였다.
그는 쓰러졌고, 즉시 몸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나의 누이를 괴롭히지 마시오. 부탁하겠소."
그가 정중히 말하며 다가설 때.
"네놈을 완전히 눕히겠다!"
가운데 녀석이 낭옥비 앞으로 덮쳐 들며 무작정 일 장을 가했다.
퍽-!
폭음이 터져 나오며, 낭옥비는 일곱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그는 쓰러질 듯 휘청거렸으며, 그러다가는 다시 균형을 바로잡으며 파락호들 쪽으로 다가섰다.
"주먹을 함부로 쓰지 마시오."
"비, 빌어먹을!"
"이번에는 내가 저 놈을 눕히겠다!"
가장 큰 체격을 가진 자가 낭옥비 앞으로 들이닥치며 좌우장을 잇따라 떨쳐 냈다.
그는 삼류무공을 터득한 인물인 듯 초식구사가 제법 능수능란했다.
낭옥비는 또다시 격타당했으며,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세 걸음 물러나다가는 신형을 바로잡았다.
주먹은 쉬지 않고 잇따라 날아들었고, 낭옥비는 수십 장에 무참히 격타 당했다. 하나,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휘청거리며 쓰러질 듯하다가는 신체를 바로잡았다.
히죽… 낭옥비의 입가엔 여유 있는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낭옥비를 피떡으로 만들 듯 주먹질을 해 대던 세 명의 파락호는 어느 틈엔가 술에서 깨어나 도리어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귀신을 대낮에 본다 한들, 이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신체를 땀으로 흠뻑 적시고 있었다.
'무서운 놈이다.'
'으으, 귀신보다도 지독한 놈이다.'
'아무래도 불길하군. 이럴 때에는 삼십육계가 제일이다.'
세 녀석 모두 주먹에 통증을 느꼈다. 그들은 낭옥비를 후려치다가 탈진해 버린 것이다.
일순, 셋 가운데 대형 노릇을 하던 자가 욕지거리를 토해 냈다.
"재수가 없다. 똥을 밟았다. 그냥 가자!"
"퉤에, 거머리 같은 놈! 다음에 끝장을 내주겠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놈!"
낙양삼룡은 땀을 후줄근히 흘리며 뒤돌아섰다.
맞아도 맞아도 쓰러지지 않는 자가 있다니?
아마도 그들 평생 이러한 경험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종종걸음으로 주루를 빠져 나가자, 낭옥비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가 아직도 겁에 질려 있는 무향 곁으로 다가설 때,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빠르게 문 밖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이제껏 침묵하며 낭옥비가 실컷 두들겨 맞는 것을 바라보던 구 척(九尺) 거한(巨漢).
그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낙양삼룡의 뒤를 따라나선 것이다.
"제가 처리하는 것을 막지 마십시오."
낭옥비는 그가 자신의 곁을 스치고 지나갈 때, 이렇게 중얼거렸다.
"문룡(文龍), 피를 흘리지는 마라."
문룡이라니?
그럼 그의 비위, 좌문룡이란 말인가?
사실, 좌문룡은 무향과 함께 주루에 왔다. 그는 낭옥비가 두들겨 맞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아 왔던 것이다.
낙양삼룡은 이차(二次)를 하기 위해 또 다른 주루를 향해 갔으며, 마치 철탑(鐵塔) 같은 인물이 뒤따르는 것을 알아차린 장소는 불빛이 거의 없는 뒷골목에서였다.
고리눈의 천하거한, 그는 팔짱을 낀 채 낙양삼룡 사이로 무작정 파고들었다.
"어엇? 우리들은 형씨와 초면인데……."
"으으……!"
세 녀석들은 비슷한 순간, 비슷한 공포를 느꼈다.
"사지(四肢) 중… 하나만 성하게 된다."
거한은 무뚝뚝히 말한 다음, 거대한 손바닥으로 낙양삼룡 가운데 첫째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어… 엇?"
첫째의 체격도 상당히 큰 편이나 너무나도 간단히 쳐들리고 말았으며, 두 발이 땅에서 떼어졌다 느끼는 찰나 공깃돌이 떠오르는 듯이 그의 몸이 떠올라 붉은 벽돌벽을 향해 총알처럼 빠르게 튕겨 나갔다.
쾅-!
"케에에엑… 내 다리!"
그의 비명 소리가 야음을 깨뜨릴 때.
"케에엑……!"
낙양삼룡의 둘째는 철퇴보다도 위력적인 일 권에 등판을 격파당해 허공으로 공중제비 돌며 떠올랐으며, 셋째는 겁을 집어먹고 도주하려다가는 무쇠 기둥 같은 다리에 차여 담 너머로 날아올랐다.
전광석화.
낙양의 파락호 낙양삼룡이 초주검이 되는 데, 걸린 시간은 가히 탄지지간(彈指之間)이었다.
쏴아아… 쏴아아……!
폭우 속, 낙양삼룡을 늘씬하게 두들겨팬 구 척 거한은 툴툴거리며 흙탕물을 발로 걷어찼다.
"빌어먹을! 이 같은 일이 이번 달로 벌써 세 번째다. 빌어먹을! 총표파자는 대체 언제까지 시체(屍體) 노릇을 하실 작정이신가?"
그는 바로 좌문룡이었다. 골치 아픈 주인으로 인해 마음을 끓이는 과거의 거패철협(巨覇鐵俠).
그는 낙양삼룡을 초주검으로 만들고서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일 권을 후려쳐 벽을 붕괴시켰다.
나무 세 그루를 뿌리째 뽑아 버리고, 돌덩어리 일곱 개를 산산이 바수어 버리고… 좌문룡은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제 가슴을 무쇠 주먹으로 후려치고 마는 것이다.
한 노인, 그도 취월루 구석진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신복술사(神卜術士)로 보이는 초췌한 신색의 노인인데, 그는 낭옥비가 소칠을 위로해 준 다음 무향과 더불어 나가는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자다. 노부가 찾던 인물은……."
그는 천축어(天竺語)로 지껄였다.
껄끄러운 목소리, 폐부 가득 가래가 끓고 있는 듯 노인은 잔기침 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무서운 혼(魂)을 가진 자다. 저 자야말로 천기(天機)를 변화시킨 운명의 거물(巨物)이다. 이제… 찾은 것이다."
노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몸을 자세히 보는 사람이라면, 그가 걸치고 있는 의복이 피에 절은 법의(法衣)라는 것을 알고 흠칫해 할 것이다.
* * *
쏴아아… 쏴아아……!
비는 쉬지 않고 내렸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천지간이 온통 물의 잔치다.
폭우(暴雨), 그리고 쉬지 않고 떨어져 내리는 전뢰(電雷).
콰르르르릉- 꽝-!
하늘과 땅이 부서져 버리는 듯하다.
낙수(落水) 가에도 지겨운 장마비는 퍼부어지고 있었다.
낙숫물은 미친 용이 하늘을 휘젓듯이 광란을 일으키며 격동하고 있었으며, 도롱이에 잠뱅이 차림의 조사(釣士) 하나는 죽간(竹竿)을 격탕의 낙수에 드리운 채 착잡한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키가 팔 척(八尺)이며, 흡사 청동(靑銅)의 거인상(巨人像)처럼 체격이 발달된 자이다.
우립(雨笠)으로 얼굴을 감춘 자, 지금 그의 두 눈에서는 섬전(閃電)과 같은 청망(靑芒)이 쉬지 않고 분출되고 있었다.
스스슷-!
세차게 뿌려지는 폭우를 헤치며 상당히 많은 그림자들이 조사 뒤쪽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마부(馬夫) 차림도 있고 어부(漁夫) 차림도 있다. 거지 차림을 한 사람도 있으며, 심지어 악녀(樂女)와 기녀(妓女)들도 끼여 있었다.
조용히 다가서는 사람들은 호흡 소리를 감추고 있었다. 그리고 가공스러운 신법을 시전하고 있는 절정고수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눈빛이 침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위장술에 달통한 괴객(怪客)들.
숫자는 도합 일백팔(一百八).
콰르르르릉- 꽝-!
뇌전이 일대를 파랗게 물들일 때, 괴객들 가운데에서 두 사람이 미끄러지는 듯한 이형환위보법(移形換位步法)으로 조사 쪽으로 다가섰다.
한 사람은 농부(農夫) 차림이고, 또 한 사람은 상인(商人) 차림의 외팔이였다.
"비찰일호(秘察一號), 다녀왔습니다.!"
"비찰이호, 오십사비찰지반(五十四秘察地班)을 거느리고 다녀왔음을 보고드립니다."
두 사람 모두 허리를 정중히 숙였다.
조용히 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은 그들의 상위자였다.
뜻밖에도 젊은 나이. 하나, 이미 무수한 실전(實戰)을 경험한 듯 그의 신체에는 상처 자리가 허다하다.
"확인했는가?"
조사는 입술을 거의 벌리지 않고 말했다.
지금, 그는 숨을 멈추고 있었다.
쏟아지는 빗속에… 실로 무거운 의미가 가라앉고 있는 것이다.
"확인했습니다!"
"바로 그였습니다. 혜성옥수(彗星玉手) 낭옥비(浪玉飛)! 과거 철혈십구로(鐵血十九路)의 총표파자, 바로 그였습니다. 강호계를 떠난 지 일천 일 만에 그의 위치가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입니다."
"으음……."
조사 차림의 대한(大漢)은 깊은 탄식을 토했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먹장구름에 휘어 감긴 하늘을 우러른다.
실로 묘한 빛이 그의 눈에서 흐른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어떠한 상념이 번지고 있는 것일까?
'그는 모든 것을 바쳐 중원을 구했다. 그리고 상처 입은 사자(獅子)가 되어 조용히 물러났다.'
쏴아아… 쏴아아……!
세차게 퍼부어지는 비는 우립(雨笠)과 도롱이를 흠뻑 젖게 했으며, 밀랍을 입힌 옷자락 위로 빗방울이 알알이 구슬되어 흘렀다.
'한데, 중원이 그를 죽이고자 한다. 장로회의(長老會議)는 그의 제거를 결정했다. 그리고 그를 흠모하고 있는 나에게… 바로 나에게, 그의 제거를 비밀리에 명령했다.'
우두둑-!
두 주먹에서 쇳소리가 들렸다. 주먹을 어찌나 세게 쥐는지 손바닥에 손톱 자국이 깊이 파일 정도였다.
'그를 제거하는 명을 어긴다면, 나는 비밀감찰부주(秘密監察府主)라는 지위를 잃어버리리라. 그리고 그를 제거한다면, 나의 지위는 보다 높아질 것이다.'
번뇌(煩惱)는 보다 짙어졌다.
'하수자(下手者)는 상부의 결정에 회의를 가져서는 아니 된다. 내게 내려진 결정은, 이십팔노장로(二十八老長老)의 비밀회에서 내려진 결과이다. 아아, 나는 그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만 한다.'
콰콰쾅-!
낙뢰(落雷), 그리고 강물은 몸틀임하는 흑수룡(黑水龍)이 되어 도도히 흐른다.
이 밤, 칠월 초여드레.
하나의 번뇌(煩惱)가 깊어 가고 있다.
* * *
비는 저녁 무렵이 돼서야 그쳤다.
하늘은 아직도 낮은 구름을 이고 낮게 깔려 있다.
운예서각(雲藝書閣)의 너와지붕에서 빗물이 작은 폭포가 되어 흘러내렸다.
낭옥비는 뒷짐을 진 채 천천히 뜨락으로 접어들었다.
"비가 너무 많이 내리면, 국화 뿌리가 상하게 되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낭옥비는 화단의 물고를 터 줄 작정으로 뜨락 한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느릿느릿 걸었으며, 그의 회색 유복 아랫부분에는 흙탕물이 묻어 있었다.
낭옥비가 몸을 낮추어 흙이랑을 살필 때였다.
"……!"
낭옥비의 눈빛이 야릇하게 달라졌다.
'이상한 기운이다.'
그는 우무(雨霧)를 뚫고 다가서는 야릇한 기운을 느꼈다.
그 기운은 그가 느끼어 본 지 오래되는 기운이었다. 그리고 과거에는 그가 너무나도 자주 접해 보았던 기운이기도 했다.
너무도 차갑고 너무도 예리한 기운.
'살기(殺氣)!'
낭옥비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는 고개를 슬쩍 돌렸으며, 막 목옥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사람의 모습이 망막에 들어섰다.
사박… 사박…….
앙증맞은 걸음걸이로 걸어 나오는 섬세(纖細)한 인영.
그녀는 바로 무향(無香)이었다.
무향의 혈색은 이전에 비할 수 없이 좋아져, 두 뺨은 사과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살인회주에게서 얻은 선란초(仙蘭草)를 복용한 덕에 그녀는 지극히 건강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공… 공자(公子)."
무향은 낭옥비의 눈길이 덮쳐 듬을 느끼자, 허리를 숙였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바보소녀, 낭옥비의 눈길을 느낄 때마다 그녀의 뺨은 불덩어리처럼 달아오르곤 하는 것이다.
"객(客)이 와 계십니다."
"손님이……?"
낭옥비의 눈꼬리가 날카롭게 휘어졌다.
그는 무향이 다가섰던 곳에서 강하고 짙은 살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 곳은 바로 소군(少君)이 머물러 있는 곳이었다.
누군가 거기 와 있고, 그는 너무나도 가공스러운 살기를 가슴에 품고 있는 자이리라,
"죽마고우라 하십니다. 매우 무섭게 생긴 분이십니다."
"나의 친구라고?"
"공자를 아주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내실(內室)로 모셨습니다."
"……."
"공자께서 자신을 반가워하실 것이라며……."
무향은 낭옥비를 향해 얼굴을 쳐들지 못했다.
백치소녀, 그녀에게 있어 낭옥비는 신(神)과 다를 바 없었다.
지금 그녀가 고개를 쳐들었더라면, 그녀가 절대자로 존경하는 낭옥비의 표정이 석고처럼 굳어졌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소군은……?"
"그분이 안고 계십니다."
낭옥비의 두 눈에서 섬전과 같은 정광이 뿜어져 나왔다.
정실(靜室).
두 줄기 호흡 소리가 교차되고 있었다.
새근거리는 아기의 고요한 숨소리, 그리고 사물을 얼어붙일 듯한 냉혈(冷血)의 호흡 소리.
어른의 호흡 소리가 아가의 호흡 소리보다 크기 마련인데, 그 자의 호흡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낡디낡은 흑포(黑袍)를 걸친 자, 허리춤에는 녹이 붉게 슬어 있는 한 자루 철검을 매달고 있다.
무릎 위에 세 살짜리 귀여운 남자아이를 앉혀 놓은 채, 그는 하이얀 이빨을 드러내며 히죽이고 있었다.
그의 얼굴 윗부분은 편립(篇笠)에 의해 감추어져 있었다.
그는 활짝 열려진 문을 통해 뜨락을 보고 있다가는 헌칠한 체격의 회삼청년의 모습이 나타나자, 너무나도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다정한 웃음이 아니라 차디찬 웃음이었다.
"오랜만이로군? 녠녠……!"
키득거리는 자, 그 자의 왼손은 소군의 뺨에 닿아 있으며 오른손은 언제인가 녹슨 검자루에 닿아 있었다.
낭옥비는 정실 안으로 접어들며 입매를 한 일자로 경직시켰다.
"자네였던가, 류흔(流痕)?"
"녠녠…, 나를 알아보는군? 나를 까맣게 잊고 있으리라 여겼는데."
흑의괴인은 소군의 뺨을 매만지던 손을 쳐들어 편립을 벗었다.
편립 아래 가려졌던 실로 추악한 고깃덩어리가 확연히 드러났다.
뭉개어지고 찢겨져 버렸다 할까?
이목구비의 모습이 제대로 분간되지 않는다.
마차 바퀴에 깔렸다가 나온 사람의 얼굴이 그러할까?
마주 대하고 있다 보면 역겨운 나머지, 구역질이 울컥 일어날 정도였다.
그는 무참히 일그러진 얼굴을 자랑하고 싶은 듯, 그 얼굴로 낭옥비를 빤히 바라봤다.
"보기 좋겠지? 과거 마도제일미남자(魔道第一美男子)의 모습이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 녠녠……!"
"으음, 이리 떼에게 물어 뜯겼군?"
"녠녠… 역시 눈매는 여전하군. 녠녠, 나의 얼굴이 이렇게 된 이유는 천랑불사검(天狼不死劍)… 일명 야수검(野獸劍)을 얻기 위함이지. 그것을 얻어야 했던 이유는, 나보다 네가 더 잘 알 것이고!"
히죽이는 자, 그는 왼손바닥을 쓰다듬다가는 그 손으로 소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정말 잘생겼군? 자네를 닮은 것 같지는 않지만… 녠녠, 실로 잘생긴 아이이네."
"……."
낭옥비는 석고처럼 굳고 있었다.
지난 삼 년 세월 가운데, 이렇듯 긴장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야수 같은 자, 그는 낭옥비에게 복수하기 위해 삼 년을 떠돈 끝에 무서운 승부사가 되어 찾아온 것이다.
파르르르…….
야수검사의 손길이 심하게 떨렸다.
"이 아이는… 그녀의 아이겠지?"
"그녀라니?"
"녠녠… 내가 짝사랑했던 여자(女子). 천하제일미인(天下第一美人)이며, 천하제일인의 혜성옥수를 사모하며 사도(邪道)를 떠난 여자. 옥류향(玉流香), 그녀가 바로 이 아이의 모친이겠지?"
옥류향(玉流香).
녹수장한궁주(綠水長恨宮主)이며, 한때 천하제일의 미녀로 소문난 여인이다.
그녀는 화화성모(花花聖母)의 후계자로 녹림을 장악했다.
그녀의 세력은 사 년 전 낭옥비에게 격파 당했는데, 그녀가 낭옥비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 싸움에서는 피가 흐르지 않았다.
현재, 옥류향에 대한 소문도 알려지지 않았다.
파천검후(破天劍侯) 묵류흔(墨流痕).
과거 마도제일인(魔道第一人)으로 천마지존궁(天魔至尊宮)을 이끌고 천하를 질타하던 젊은 마도영웅.
만에 하나, 낭옥비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중원마도사에 금자탑을 이룩하며 마도의 절대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낭옥비에게 철저히 꺾였으며, 그가 거느리고 있던 세력은 무참히 붕괴되었다.
묵류흔은 너무나도 큰 치욕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려다가, 생각을 바꿔 복수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이유는 오직 하나, 그가 사랑했던 여인 옥류향이 그를 버리고 낭옥비를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묵류흔의 웃음은 메마른 웃음이었다. 그는 낭옥비를 빤히 보았으며, 낭옥비도 그를 보고 있었다.
낭옥비는 처참히 뭉개어져 버린 묵류흔의 얼굴을 쓸어 보며 입술을 나직이 벌렸다.
"아니네."
"아, 아니라고? 이 아이의 어머니가 옥류향이 아니라고? 그, 그럴 리가?"
묵류흔은 낭옥비의 말을 믿지 않으려 했다.
"그녀는… 삼 년 전, 떠났네."
"떠, 떠났다고?"
"자신을 보다 성숙시키기 위해 일단 떠나야겠다고 하며 떠나갔네. 그 후, 나는 그녀를 만나지 못했네."
"으으……!"
묵류흔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그녀는 옥류향을 죽이고, 낭옥비를 죽이기 위해 재출도했다.
옥류향을 죽이려 하는 이유는, 그가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데, 옥류향과 낭옥비가 삼 년 전 헤어져 아직 만나지 못한 상태라니?
"그, 그럼… 여기 있던 여인의 아들인가?"
"아니네. 그녀는 무향이라고 하는데… 기억상실증 환자로, 이 년 간 나의 집 식객(食客)이지. 나와 특별한 관계는 아니네."
"그… 그럼, 이 아이의 어머니는?"
"죽었네……."
"누구이지? 자네가 옥류향 대신 선택한 여자는?"
"사람에게는 말하기 힘든 일이 있기 마련이지. 그 일에 대해서는 묻지 말게!"
낭옥비의 눈빛이 쓸쓸해졌다.
"빌어먹을!"
묵류흔은 낭옥비에 대한 것이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자, 노기가 치솟는 듯 두 손을 쳐들어 아래쪽으로 후려쳤다.
스슷-!
가벼운 소리와 함께, 두텁던 나무 탁자가 반으로 쪼개어졌다.
"어쨌든 좋아! 너는 내게 죽어야만 해. 다른 사람이 너를 죽이기 전에, 너는 내게 죽어야만 한다!"
묵류흔은 사납게 소리치며 몸을 뒤틀었다.
슷-!
녹슨 검이 흰빛을 끌며 떠올랐다.
그것은 곡선(曲線)이 아닌 직선(直線)을 끌었으며, 낭옥비의 미간을 향해 번개처럼 빠르게 다가섰다.
늑대의 피를 빨며 야수굴에서 벌레처럼 웅크려 살며 삼 년 간 갈아 온 복수검!
그것은 가히 무형무영(無形無影)의 극쾌검(極快劍)이었다.
팟-!
묵류흔의 철검은 일순, 정지되었다.
검극(劍極)은 낭옥비의 눈썹 가운데에 멈추어졌으며, 한 방울 붉은 선혈(鮮血)이 검극을 타고 흘러내렸다.
뚝-!
한데, 낭옥비의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검극이 피부를 누르고 있는데도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도리어 초조한 표정을 짓는 쪽은 묵류흔이었다.
그는 사지를 바들바들 떨면서 고개를 옆으로 갸웃거렸다.
"어이해, 막지 않지?"
"……."
"왜… 방어하지 않느냐?"
묵류흔이 이를 갈며 외치자, 낭옥비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축하하네. 자네는 완전한 검도에 접어들었네. 발검(拔劍), 운검(運劍), 그리고 지검(止劍)이 모두 완벽하네. 그리고 자네의 검은 마검(魔劍)이 아니라 정검(正劍)이네. 자네가 터득한 격허탄천(隔虛彈天) 파천황검(破天荒劍)은 가히 백년절정이네! 자네는 삼 년 전에 비해 세 배 강해졌네."
"미, 미친 소리 마라. 나는 네게 나의 성취를 축하해 달라고 여기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너를 죽이기 위해 여기 왔다. 한데, 왜 나를 막지 않느냐?"
묵류흔이 버럭 소리치자, 낭옥비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왜… 막지 않느냐고?"
그는 묵류흔의 두 눈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것은… 자네가 나를 베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이네."
"우, 우라질! 나는 멋진 승리를 하기 위해 고생했다. 시시하게 암습하기 위해 뼈를 깎아 가며 연검(鍊劍)한 것은 아니다."
묵류흔은 땀을 뚝뚝 흘렸다.
그는 삼 년 전, 낭옥비의 이대숙적(二大宿敵) 가운데 하나였다.
하나는 북풍혈번주(北風血幡主) 잠룡풍(潛龍風), 그리고 또 하나의 인물이 파천검후 묵류흔이었다.
그들이야말로 낭옥비의 진정한 실력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었으며, 잠룡풍이 자결한 이상 낭옥비의 무공수위에 대해 가장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묵류흔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나를 향해 무공을 써라!"
묵류흔은 버럭 소리치며 다시 일 검을 시전했다.
흰빛이 떠도는 찰나, 낭옥비의 유복을 고정시키던 넓적한 허리띠가 반으로 잘라져 버렸다.
그러나 낭옥비의 미소는 여전했다.
"자네는 이미 승자(勝者)이네. 나를 꺾었다는 소문을 내도 좋네. 그러나 진정한 위대함은 나를 꺾는 데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네의 마성(魔性)을 이기고 정검지도(正劍之道)로 접어들었다는 데에서 오는 것이네."
"죽일 놈! 그래도… 충고냐?"
묵류흔은 허탈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