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숙 시인
기다리는 사람들
집을 뗘나 멀리 떨어진 섬에 갔다
그립다며 밀물처럼 몰려오는 전화들
그중에서 서너달에 한 번씩 꼭 오는 문안 전화
"집에 오셨나요?"
"내년에 간다고 했잖아요"
"아하 그렇지, 적어놓고 깜빡했어요 허허 참"
주변에 다양한 친구들이 있다
같이 시를 공부하고, 그림을 그리고, 운동도 하고
그중에 누가 간절하게 돌아오기를 기다릴까 생각하는데
신문사 보급소장이 웃으며 애교섞인 목소리로
사랑을 구걸하듯 신문 보기를 권한다
짜증이 났다가도 그 정성이 고맙다는 쪽으로 기울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웃으며 돌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비 오는 날
비가 추적추적 내리면
오련(五蓮) 찻집으로 분위기를 마시러 간다
연일 온 비로 작은 연못을 가득 메운
개구리밥이 흘러넘쳐 먼 길을 떠난다
나무 계단에서 빗방울에 싸여
노란물을 마신 꽃치자와 황홀하게 눈을 맞춘다
자색 고구마빵과 유자향을 마시며
옛이야기에 나오는 고승에 머리 숙이고
아직도 자취를 못 찾은 흑련사(黑蓮寺)는 어디쯤 있었을까
북쪽이라 했는데 그쪽을 걸어 볼까...
비에 젖은 초록숲
흰색 도라지꽃의 빗방울이 발을 잡는 늦은 오후
하늘길
눈이 뻑뻑해도, 몸이 무거워도
하늘이 보고파서, 어서 오라 손짓해서
목요일이면 전철을 탄다
바깥 경치가 싫증이 날 때쯤
큰 역에서 내려 서울의 중심부로
속을 채워줄 먹거리를 사들고
작은 버스에 올라 하늘길로
종점에 도착하면 눈앞에 바다같은 하늘이 들어온다
걸으며 침묵하는 한양성벽에게 말을 건넨다, 괜찮냐고
멀리 북한산 봉우리들 고요하게 온몸으로 맞아준다
한걸음 한걸음 허공을 향하면
발밑에 많은 집들이 납작 엎드려 숨을 쉰다
구름과 눈높이를 맞추며 가는 하늘길
그 끝에 친구가 산다
소묘(素描)
해가 솟아오를 때부터 여행이 시작되었다
일찍 와서 웃으며 여유로운 사람
조금 늦어 약간 당황하며, 횡설수설 말 많은 사람
사연이 많아 엄청 늦었지만 오기만 해도 고마운 사람
맨 뒤에 앉아서 전체를 물 흐르듯 보는 사람
오로지 짝만 쳐다보고 꼭 붙어다니는 사람
그냥 즐거워 연신 웃음꽃이 핀 사람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걸어야 속이 시원한 사람
무언가 먹거나 마시면 다 내 세상이 되는 사람
해가 저물자
모두 한 배를 타고 노를 저으며
사색의 파도를 넘나들었다
숲길을 걸으며
비가 와도 도시의 숲길은 걷기가 좋다
줄 서있는 대왕참나무가 기다란 줄기로
비를 가리고 하늘도 가리고
각 진 비행기 모양의 잎으로 햇빛도 가린다
걷다가 그네가 보이면
한달음에 달려가 앉아 궁둥이로 굴린다
그네 지붕 처마에 빗방울이 총총총 맺혔다
양쪽으로 움직이다 중심 못잡고 떨어지는 방울
느긋하게 붙어있는 빗방울
그 모습들이 오후 시간에 갇혀서
비틀거리는 나를 보는 듯 하다
빗소리를 들으며
빗방울에게 한 수 배운다
지구에게 휴식을
지구에
불이 났다
눈물을 흘린다
온 몸으로 강풍을 맞는다
파도가 몰려 온다
지구가 아프다
우리 사는 이 곳이 행복하기를
기원(祈願)
천천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절벽 위 마애불
잔잔한 미소 머금으며 손을 흔든다
깊은 산속, 탑을 배경으로 앉아 계신
볼살 통통한 천진불
장난을 손에 가득 담은 개구쟁이 같다
산길 큰 바위 밑에 돌무더기 높이 쌓아놓고
성황당 팻말이 꽂혀있는 분위기 스산한 곳
동리 입구에서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수호신 장승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마을을 지키고
연약한 인간은 기댈 곳들을 많이 만들어놨다
나는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사는지
똑똑한 부엉이는 알까
적멸보궁
잘 왔다
기다리고 있었다
허공에서 들려오는 무언의 말씀
섬처럼 떠있는 구름, 반듯하게 예를 갖추고
지나가는 바람, 천천히 숨을 마시고
바람난 여인 얼레지,숲속에서 살짝 고개 숙인다
정적에 쌓인 엄숙의 공간
오면서 하나씩 줘버렸다
소나무, 참나무에게 주고
말을 건네는 까마귀에게도
일 배 일 배 절속에
나를 벗겨내니
내려가는 발걸음이 가벼웁다
여름 손님
날이 무더우니 몸이 늘어지고
웃음이 사라지니 옆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입안이 바짝 말라
침샘이 화가 나서 볼록볼록 성을 내니
물을 찾아 몇 모금 마신다
금빛 해바라기 다섯 송이
더운날 밤 우리집으로 왔다
넓디 넓은 세상에서 살다
비 오기 전에 다 뽑아 버리려는 주인이
선물로 보내왔다
여름 손님은 반갑지 않다지만
이것도 무슨 연(緣)이 있었겠지
다음은 어떤 손님이 오실려나
다 받아들이고 싶다
이중섭로 29
섶섬이 보이는 언덕
정이 넘치는 초가집에서 11개월 동안
그는 두 아이와 부인을 품고 그림을 품었다
사람들은 그가 살던 3평 남짓한 방과 부엌
마당을 둘러보고 사진을 찍고는 바쁜 듯이 가버리면
벽에 걸린 담배에 심취한 그가 이곳을 무심히 지킨다
서귀포 시내는 그의 자취로 출렁인다
물고기와 게와 아이들, 소와 새의 모습들이
보도에도 벽에도 간판에도 실내에도 살아있다
시간이 흘러도 가족과 살을 비비며 살던 곳
힘든 피난 생활이었지만 포근한 행복이 깃든
이곳에는 담배갑 작은 은박지만이 떠다니고 있다
첫댓글 귀한 시 10편 송고 감사드립니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넓고 깊은 시의 지평이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