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시 사찰의 창건연혁 일람>>
번호 | 사찰명 | 종파 | 창건년도, 창건자 | 소재지 |
1 | 대승사 | 조계종 | 신라 진평왕 9년(587), 망명비구 | 산북면 전두리 산8 |
2 | 김룡사 | “ | 신라 진평왕 10년(588), 운달조사 | 산북면 김룡리 산410 |
3 | 심원사 | “ | 신라 무열왕 7년(660), 원효대사 | 농암면 내서리 산8 |
4 | 원적사 | “ | 신라 무열왕 7년(660), 원효대사 | 농암면 내서리 산1 |
5 | 운암사 | “ | 신라 문무왕 17년(677), 의상대사 | 문경시 불정동 65 |
6 | 혜국사 | “ | 신라 문성왕 8년(846), 보조국사 | 문경읍 상초리 산13 |
7 | 봉암사 | “ | 신라 헌강왕 5년(879), 지증국사 | 가은읍 원북리 485 |
| | | - 이 하 생 략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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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문경지” 증보판 하권 제7편 종교 제2장 불교조 179쪽, 2002년.
*문경지역 최초의 불교사찰 “대승사”를 창건한 분은 누구인가?
*'사불산 대승사 사적비명' 참조.
사불산 대승사 사적비명(四佛山大乘寺事蹟碑銘)
사불산(四佛山)은 본시 공덕산(功德山)인데, 삼국유사(三國遺史/事)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9년 정미(丁未)에 사면(四面)에 불상이 조각된 일좌방장암(一座方丈岩)이 홍사(紅紗)에 쌓여 천상(天上)으로부터 공덕산 중복(中腹)에 내려왔다는 소문이 궁중까지 전하여, 왕께서 친히 공덕산에 행행(幸行)하시니 과연 사불암(四佛岩)이 있는지라, 왕께서 대희(大喜)하사 신심(信心)을 발(發)하여 예배를 무수히 하시고는 암하(岩下)에 절을 건립케 하시고 도승(道僧)인 망명비구(亡名比丘)를 주석(住錫)케 하니 이것이 곧 대승사(大乘寺)이다. 이로 인하여 사명(寺名)은 대승사(大乘寺)로 칭하게 되었다.
연(然)이나 기지(基址)가 협소하여 망명비구가 현사지(現寺址)에 대가람(大伽藍)을 창건하고 대상(大象)과 같이 수행하시다가 입적(入寂)하시다.
망명비구는 상주(尙州)출생으로 본명(本名)이 망명이 아니라 익명(匿名)이니 무명승(無名僧)으로 상주지방의 소사(小寺)에서 음양술수(陰陽術數)로서 인간의 화복(禍福)이나 점(占)치고 겨우 의식(衣食)을 연명하는 술승(術僧)으로만 지목(指目)받고 수도승(修道僧)으로서는 보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주내(州內) 신도가정에서 선망부모(先亡父母)를 위하여 설제(說齊)하고 여러 고승(高僧)을 청하여 법요(法要)를 행할시 망명비구도 말석(末席)에 참예(參詣)케 되어 야심(夜深)토록 독경(讀經)하고 파제(罷齊) 후 소등취침 하려든 중 별안간 소광(少光)이 발사하므로 실화(失火)로 생각하고 현장을 가보니, 망명비구의 구중(口中)에서 방광(放光)을 하는지라, 그런 후에 승속(僧俗)이 망명비구가 비로소 도승(道僧)임을 깨닫고 구중(口中)에서 서상(瑞相)이 발하는 이유를 물으니 답왈(答曰), 내가 승수(僧數)에 참여하고 있으나 떳떳한 정행(淨行)을 닦지 못하고 술수(術數)로서 자신지책(自身之策)을 삼는 것이 부끄러워 남모르게 법화경(法華經)을 지송(持誦)하고 도업(道業)을 자조(資助)하는 밀행(密行)을 계속한 소치(所致)인가 하므로, 비로소 그의 이름이 원근(遠近)에 전하여 승속(僧俗)이 흠귀(欽歸)하였다.
그런데 천강사불(天降四佛)의 기적으로 인하여 왕께서 대승사를 창건케 하고, 망명비구가 입적한 후 사하(寺下) 동구내(洞口內)에 매장(埋葬)한 총상(塚上)에서 쌍연(雙蓮)이 용출(湧出)하였으므로, 현재까지 천강사불(天降四佛)과 지용쌍련(地湧雙蓮)이라는 높은 도예(道譽)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진다.
이 밖에 고전(古傳)에 의하면 의상대사(義湘大師)가 공덕산 하에 미면사(米麵寺)를 창건하고, 원효대사(元曉大師)는 인근 10리허(許)인 화장사(華藏寺)에 계시면서 조석으로 상봉(相逢)하였다. 사지(寺誌)에 의하면 차사(此寺) 초창 후 순치(順治) 무자(戊子)에 의현사(義玄師)가 중수(重修)하고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관음지장(觀音地藏)을 좌우보처(左右補處)로 모셨고, 순치(順致) 신묘(辛卯)에는 경묵사(敬默師)가 중수(重修)하고, 만력(萬歷) 갑진(甲辰)에는 서총사(瑞聰師)가, 강희(康熙) 기사(己巳)에는 종수사(宗秀師)가, 순치(順致) 신묘(辛卯)에는 성동사(省동師)가, 강희(康熙) 신사(辛巳)에는 연립사(衍笠師)가, 숭정(崇貞) 경오(庚午)에는 계담사(桂淡師)가, 강희(康熙) 정미(丁未)에는 선림사(先林師)가, 순치(順致) 병술(丙戌)에는 각인사(覺仁師)가, 강희(康熙) 계미(癸未)에는 원응사(圓應師)가, 강희(康熙) 기사(己巳)에는 혜원사(惠垣師)가 각각 중수하였고, 그 외에도 제사중수(諸師重修)함에 힘을 써서 대웅전(大雄殿), 응진전(應眞殿), 관음전(觀音殿), 시왕전(十王殿), 금당(金堂), 요사(寮舍), 종각(鍾閣), 일주문(一柱門), 누각수각(樓閣水閣), 주고(廚庫), 문랑(門廊) 등 전각(殿閣)이 사불산 일동(一洞)에 미만(彌滿)하여 교남(嶠南)의 대가람(大茄藍)이 되었다.
그리고 산내(山內)에는 구암(九庵)이 있었으니 상적암(上寂庵), 대비암(大妃庵), 묘적암(妙寂庵), 윤필암(潤筆庵), 보현암(普賢庵), 문수암(文殊庵), 반야암(般若庵), 사불암(四佛庵), 미륵암(彌勒庵) 등인데 현재에는 묘적암(妙寂庵), 윤필암(潤筆庵), 보현암(普賢庵)만 남아 있다.
묘적암(妙寂庵)은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15년 정미(丁未)에 부운거사(浮雲居士)의 초창(初創)인 바 나옹화상(懶翁和尙)의 출가득도지처(出家得道之處)이다. 화상(和尙)의 속성(俗姓)은 아씨(牙氏)이고 영해인(寧海人)이다. 화상이 생후 20년 기묘(己卯)에 우인(友人)의 사망을 보고 인생의 무상을 느껴 공덕산(功德山) 묘적암(妙寂庵) 요연선사(了然禪師)에게 삭발위승(削髮爲僧)을 청하니 선사(禪師)가 묻기를 네가 무슨 일로 승(僧)이 되고자 하느냐 함에 답왈(答曰) 초출삼계(超出三界)하고 제도중생(濟度衆生)코져 함이외다.
또 네가 이곳을 오는데 무슨 물건(物件)이 왔느냐고 물었더니 답왈(答曰) 능히 말하고 능히 듣는 자가 왔나이다. 그러나 수도해탈(修道解脫)의 길을 모르겠나이다. 하니 사(師)가 아역부지(我亦不知)이니 명안종사(明眼宗師)를 찾아 가라 하시고 삭발수계(削髮受戒)만 해주었으므로 지정(至正) 14년 갑신(甲申)에 회암사(檜岩寺)로 가서 석옹화상(石翁和尙)과 4년간의 향연(香緣)을 맺고 곽철대오(廓徹大悟)하여, 그 후 중국대도(中國大都) 법원사(法源寺)로 가서 서천(西天) 지공화상(指空和尙)과 평산(平山) 처림선사(處林禪師)에게 인가(印可)를 받고 귀국하여 고려 공민왕의 왕사(王師)가 되신 분이다.
그 후 다시 묘적암에 오셔서 기념식수로 회목(檜木) 4주를 심었는데 현재 노목으로 남아 화상(和尙)을 추모케 하고 있다.
그리고 반야암(般若庵)에는 이태조(李太祖)의 왕사(王師)인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제자(弟子) 함허득통선사(涵虛得通禪師)가 금강경(金剛經) 오가해설의(五家解說誼)를 찬술(撰述)하시었다고 전한다. 선사가 읊은 시에는 반야봉두원(般若峯頭月)이요, 대승전각풍(大乘殿閣風)이라는 시구(詩句)가 있다. 윤필암(潤筆庵)은 고려 우왕(禑王) 6년에 각관비구(覺寬比丘)가 초창하여 현재까지 선도장(禪道場)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며 그후 옹정(雍正) 계축(癸丑)에 능파화상(凌波和尙)이 쓴 사적기(事蹟記)에 보면 옹정(雍正) 기사(己巳)에 의학사(義學師)가 당사(當寺)에 모신 삼존상(三尊像)을 보수하던 중 미타상(彌陀像)의 복장(腹藏)에서 금합(金盒)에 사리일과(舍利一顆)와 금자화엄경(金字華嚴經)이 나왔다고 하였다.
불상조성 연기(緣起)에 신용원년을사(信龍元年乙巳)라고 하였으니 신룡(神龍)은 당(唐)의 중종(中宗) 연호인즉 신라 진평왕(眞平王) 후 70여년이라 현재 당사(當寺)에 봉안된 사리가 이때의 것이 아닌가 한다. 그 후 익종(翼宗) 신유(辛酉)에 구담화상(九潭和尙)이 법형(法兄) 만송(滿松)과 같이 고운사(孤雲寺)에서 차사(此寺)로 오자 철종(哲宗) 임술년(壬戌年) 화재로 사우(寺宇)가 전소한지라 본사(本寺) 대덕(大德), 의운(意雲), 취월(就越), 덕산(德山) 삼화상(三和尙)이 화연(化緣)을 모아 창건케 하였다.
고종(高宗) 을해(乙亥)에 목각후(木刻後) 탱(幀)을 부석사(浮石寺)로부터 이안(移安)하였으며 대한 광무(光武) 기해(己亥)에 현종(玄鍾), 월파(月波) 양화상이 염불당(念佛堂)을 창건하기 위하여 건립 기금으로서 계(契)를 모아 을사(乙巳) 정월에 환종(幻鍾), 학송(鶴松), 화응(華應)의 제사(諸師)와 같이 쌍련암(雙蓮庵)의 정건(定建)을 보게 되었다.
거금(距今) 23년 전에 병신년(丙申年) 실화(失火)로 극락전(極樂殿), 명부전(冥府殿), 산신각(山神閣)을 제외한 대소건물이 전소된 것을 그 후 남인(南印), 설월(雪月), 의현(義玄) 3화상이 화연(化緣)을 모아 응진전요사(應眞殿寮舍)는 경자년(庚子年)에 대웅전(大雄殿), 선실(禪室), 일주문(一柱門)은 무신년(戊申年)에 중건(重建)하였는데 을묘년(乙卯年)에 설월사(雪月師)가 일주문을 현재 위치로 이건(移建)하였다.
기타 부속건물을 신건불상(新建佛像) 4위의 개금(改金) 500나한(五百羅漢)의 개분불사(改粉佛事)를 하고 무오년(戊午年)에 김천, 대구 양지(兩地) 신도들의 원력(願力)으로 전기불사까지 완성하게 되어, 심산유곡에도 현대문명의 혜택을 보며 생활하게 되었다.
상기와 같이 사적(事蹟)과 업적(業蹟)을 영원토록 보존하기 위하여 삼가 비명(碑銘)을 찬술(撰述)하나이다.
불기(佛紀) 2532년 12월 일 무오(戊午)
당사(當寺) 개산후(開山後) 1391년
대은(大隱) 김태흡(金泰洽) 撰
진성(眞城) 이원두(李源斗) 書
월성(月城) 이정부(李正夫) 刻
시임질(時任秩)
주지(住持) 설월(雪月) 상열(相悅)
총무(總務) 일봉(一峯)
묘적암(妙寂庵) 김호(金虎)
윤필암(潤筆庵) 법일(法日)
보현암(普賢庵) 오희(五喜)
※"대승사사적비명" 첫 행에 "三國遺事"가 '三國遺史'로 잘못 기록되어 있음.
첫댓글 해동고승전 / 각훈
https://db.history.go.kr/common/imageViewer.do?levelId=hg_001r_0050_0010&begin=hg_b_001_0009
신라 진평왕 때에도 소백산맥 일대는 신라 및 고구려, 백제가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던 국경지역으로, 삼국이 각각 큰 절을 세워서 스님이나 군사들이 은밀히 정탐활동을 수행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따라서 대승사 사적을 살펴보면 서기 587년에 진평왕의 어명?에 따라 국경지역의 거점사찰을 창건하면서 탁발승이던 망명스님을 주승으로 임명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유사불산기 / 고려국사 천책(속명 신극정) 지음
유사불산기 본문내용
대승사사적기 1 / 묘적암 벽천 근기, 부훤당 김해 교정
대승사사적기 2
대승사사적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