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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4장 말세의 징조와 재림에 대한 예언들
구속사적 개관:
본장과 다음 제 25장은 바로 예수께서 직접 십자가 수난 삼일 전에 감람산에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세상 끝 날에 있을 여러 징조와 주요 사건에 대해 그리고 이를 맞는 성도의 자세에 대하여 계시해 주신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 유명한 소위 감람산 강화(講話)이다. 24:1-44절이 말세의 징조와 재림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인 반면 24:45-25:46절은 종말을 맞이하는 성도의 바람직한 자세와 그 결과를 교훈하기 위한 비유들이다. 특 특히 24:4-44절의 말씀은 예수의 소묵시록(小黙示錄)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런 문맥 하에 있는 본장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1-3절이 성전 파괴에 대한 주의 예언을 듣고 제자들이 그 때와 징조에 대하여 질문함으로써 이하 이어지는 감람산 강화가 시작되게 된 배경을 소개한다. 다음 4-28절은 재림 직전의 말세에 나타날 여러 징조들과 특히 종말 직전에 있을 대 박해에 대한 예수님의 계시(啓示)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29-31절은 세상 종말의 결정적 시점인 예수의 재림 자체에 대한 주님의 예언을 기록한다. 다음 32,33절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로써 자연의 변화를 보면 자연스럽게 계절의 변화를 깨닫듯이, 이상 밝힌 주님의 가르침을 잘 되새겨 시대의 변화를 보면서 세상 끝 날의 도래를 깨달을 것을 교훈한 말씀을 기록한다. 33-44절은 주의 재림으로 인한 세상 끝 날의 도래는 전적으로 성부 하나님의 주관 하에 있으므로 이를 완전히 예측할 수 없으며, 또한 그 재림 이후에는 영생과 영벌을 나누는 심판이 있을 것이므로 평소 늘 미리 예비할 것을 교훈하신 말씀의 기록이다. 끝으로 마지막 단락인 45-51절은 앞서 말씀하신 주의 재림의 도래 및 그 시기를 각각 상반되게 생각한 두 부류의 인간이 결국은 서로 상반되는 운명에 처해질 것을 경고함으로써 재림을 준비하는 자의 바른 자세를 촉구하는 두 종의 비유이다.
한편 본장 말미의 두 종의 비유의 의의에 대해서는 다음 장인 제 25장 개관에서 함께 간략히 다루며, 본장의 주요 내용인 세상 끝 날의 징조와 주의 재림에 대한 여러 예언의 말씀이 각각 갖는 개별적 의미에 대해서는 해당 문단 강해에서 다루기로 하고, 본 개관에서는 이런 감람산 강화를 대할 때 기억해야 할 기본 사항인 성경 예언의 복합성에 대한 설명 및 감람산 강화가 전반적으로 갖는 구속사적 의의(救贖史的 意義)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기로 한다.
본장에 나타난 주의 예언(the prophesy)과 교훈을 대할 때 우리는 성경의 예언이 전반적으로 갖고 있는 복합성을 꼭 기억해야 한다. 성경의 예언은 대부분 그 예언이 발해지던 동시대 또는 그것이 1차적으로 지칭하고 있는 후대 역사의 한 특정시기에 대한 내용뿐만 아니라 역사 전체에 걸쳐 반복되는 동일한 사건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특히 세상 끝 날에 대해서도 예언하는 내용을 한 예언 안에 동시에 오묘하게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의 예언을 대할 때에는 이를 꼭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본장의 예수님의 예언의 경우도 1차적으로는 예수님의 사후 얼마 되지 않아 발생할 A.D. 70년의 로마제국(Roman Empire)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과 유대인 학살 사건의 예언인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세상 끝 날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다. 따라서 각 부분을 대할 때 그 예언의 세부 내용이 복합적으로 지칭하는 대상에 대하여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한편 감람산 강화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개관할 때에 먼저 우리는 이제 곧 자신이 십자가 수난을 당할 것을 이미 예언해 놓은 상태에서 주님이 다시금 세상 종말에 대한 예언을 주셨던 사실과 그 내용이 향후 그대로 이뤄졌고 또 이루어지는 과정에 있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어느 한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그에 대한 예언이 있었고 그것이 훗날 그대로 이루어졌다면, 그 사건에는 분명히 신적 개입이 있는 것으로 먼저는 그 예언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것이며 그 성취된 사건은 신적 경륜(經論)에 의한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그 예언을 주신 분은 신적 능력이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따라서 결국 우리는 이 예언을 주신 주님은 신적 능력을 가지셨던 우리의 절대적 구주이신 사실을 확인하는 동시에 이 예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 세상의 역사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내재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역사는 실로 그저 우연히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주권에 의하여 그분의 뜻과 섭리대로 진행되는 것임을 깨닫는다. 역사의 창조자요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주권이야 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해야 할 제 1의 근거이다. 동시에 우리는 세상 역사가 지금 당장 보기에는 아무리 타락하고 혼란스러운 것 같아도 이를 주재하시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궁극적으로는 의와 평강이 회복될 천국을 지향하여 나아가는 구속의 역사임을 깨닫고 역사에 대하여 희망(Hope)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주님의 감람산 강화에서 세상 역사에는 종말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다시금 깨닫고 주목하게 된다. 지금 이 땅위의 역사는 그것 자체가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옛 낙원이었던 에덴동산이 폐쇄된 이래 새 하늘과 새 땅에 세워질 새 낙원 곧 천국을 향하여 진행되는 것으로써 그 종말이 분명한 중간기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참 평화와 축복이 있는 영원한 거처는 오직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일 뿐이며 지금 이 세상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런 역사적 종말관(終末觀)이 현실 세상의 질서와 인간의 능력을 맹신하여 무분별한 낙관을 일삼는 세속 사상과 기독교를 가름하는 중요한 시금석(試金石)이다.
셋째 주님께서는 밝고도 분명하게 세상 끝 날에 이르러 새 천국이 도래하는 과정에서 이를 증오 시기하는 이 현재 세상의 권세자(엡 2:2)인 사탄(the Satan)의 광란으로 인하여 혼돈과 미혹과 환난으로 요약될 수 있는 각종 징조들이 있을 것을 예언해 주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미 앞에서 살펴온 두 가지 진리를 기억하고 또 주님께서 주신 종말의 각종 징조에 대한 말씀을 기억하면서 눈앞의 현실에 흔들림 없이 그 징조를 잘 살피며 세상의 일시적인 유혹과 환난에 넘어가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는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구속사적 교훈을 결론으로 얻게 된다.
실로 종말은 매순간 우리에게 가까워오고 있다. 그러나 세상 종말은 문자 그대로의 종말이 아니라 그것은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형벌의 참다운 시작이다. 따라서 이 순간 나는 종말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하지 말고 다만 이 세상 역사의 종점이요 새 역사의 출발점이기도 한 그 날에 재림하여 다시 오실 주님으로부터 영생과 영벌 중 무엇을 받기 원하는 지를 점검하자.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눈에 보이는 현실 뒤에서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구속사는 종말을 향하여 도도히 전진하고 있음을 다시금 기억하며 종말을 경건히 맞이하자(벧후 3:8-13).
외울 말씀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5,36)
감람산 강화의 시작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3 ○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말세의 징조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15 ○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가지 말며
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20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23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26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7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28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29 ○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무화과나무의 비유
32 ○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아무도 모르는 재림의 때
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35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43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두 종의 비유
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48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49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50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본문 & 자료노트
도표 - 24:1-51 말세의 징조
1. 지식의 증가(단 12:4)
2. 적그리스도의 출현(마 24:5)
3. 전쟁 기근, 질병, 지진(마 24:7)
4. 핍박(마 24:9)
5. 거짓선지자의 활동(마 24:11)
6. 불법의 성행(마 24:12)
7. 사랑의 식음(마 24:12)
8. 복음의 확산(마 24:14)
9. 배교(살후 2:3)
10. 성도의 타락(딤후 3:1-5)
원어연구-24:5, 미혹하다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플라나오'인데, 그 어근 '플라'는 인도 게르만 어족의 어근인 '켈라'(Pela: 펴다, 펴지다)에서 기원하였다. 원래 이 단어는 도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공간적 ․ 물리적 의미에서 '길을 잃다', '길을 잃게 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성경에서도 이런 일반적인 용례들이 발견된다(마 18:12; 벧전 2:25). 그러나 이 단어는 위의 용례들보다 빈번하게 은유적으로 '진리로부터 벗어나게 이끌다', '잘못에 빠지게 속이다', '유혹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한편 신약성경에서 '플라나오'는 주로 묵시적인 본문에서 자주 사용된다. 이런 의미에서, 마지막 때에 관한 교훈인 본문에서도 이 단어는 4번 쓰이고 있으며(4,5,11,24절). 또한 계시록에서도 집중적으로 발견된다(계 2:27; 12:9; 13:14; 18:23; 19:27; 27:3,8,10). 마지막 때에 사탄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는다고 했다(벧전 5:8). 이는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과 진리에서 떠나게 하여 유리케 하는 일이 극성스러워진다는 말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혹하는 자의 속임에 넘어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한다.
한편 이 단어와 유사하게 사용되는 '아파타오' 역시 '속이다', '기만하다'라는 뜻인데 '플라나오'와는 서로 다른 강조점을 갖는다. 즉 '아파타오'는 '에피뒤미아'(욕구)를 자극하므로써 속이거나 유혹하는 행위 즉 감정적인 측면에서의 유혹을 가리킨다. 반면 '플라나오'는 '아그노이아'(무지)를 이용하여 불의한 길로 인도하는 동작 . 지성적인 측면에서의 유혹을 지칭한다. 이러한 원어적 의미는 우리에게 마지막 때에 닥쳐올 미혹을 이길 방법을 알게 한다. 즉 우리가 먼저 지적으로 진리를 올바로 분별하고 있거나,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를 구분할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다면 마귀는 함부로 우리를 미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의 말씀에 굳게 서서 거짓 교리와 거짓 이적으로 성도들을 유리케 하는 사탄의 세력에 대적해야겠다. 또한 감정적으로 자기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면 사탄은 우리의 욕심을 빌미로 우리를 죄에 빠지게 한다(약 1:14,15). 그러므로 항상 육체의 소욕을 버리고 성령의 소욕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갈 5:17).
보감-24:1-51 말세에 성도가 기도해야 할 것 10가지
1.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도록(4,5절)
2. 말세의 징조 현상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도록(6,절)
3. 예수를 위해 받는 핍박에서 이기도록(9,0,1절)
4. 구원을 얻기 위해 끝까지 인내하도록(13절)
5.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 굳건히 견디도록(13절)
6. 말세임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도록(15절)
7. 늘 준비하며 기다릴 수 있도록(16-20,4절)
8. 하나님이 환난의 때를 감(減)해 주시도록(22절)
9. 주의 재림 약속을 확신할 수 있도록(35절)
10. 주의 재림 때까지 성실하게 살아가도록(40-45절)
도표-24:1,2 예수께서 주신 예언들
본권 사복음서 개론 특별 자료 '예수 시리즈' 참조.
도표-24:3-51 예수의 교훈들
본권 사복음서 개론 특별자료 '예수 시리즈' 참조.
주요 주제-24:15 신.구약의 연속성과 점진성
본권 신약총론 특별 자료 참조.
도표-24:1-51 그리스도 고난 사역의 마지막 7일과 부활
행적
일요일 승리의 예루살렘 성 입성(마 21:1-11)
월요일 제 2차 성전 정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마 21:12-22)
화요일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심(마 21:23-22:40),
감람산에서의 종말 강론(마 24,25장)
수요일 침묵의 날(기록이 없음)
목요일 최후의 만찬(마 26:17-29), 다락방강화(요 13-17장),
체포당하심(마 26:47-68)
금요일 불법 재판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심(마 27:1-61)
토요일 무덤에 머무심(마 27:57-66)
일요일 부활하심(마 28:1-15)
지리 배경-24:3 감람산
막 13장 자료 노트 참조.
주요 주제-24:27 인자의 이해
눅 12장 자료 노트 참조.
난제해설-24:34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본문은 예수의 재림 때에 일어날 징조들을 예언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학자들 간에는 본문의 '이 세대'가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 매우 많은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본문의 해석에 대한 학자들의 제 견해를 살펴보고 그것의 의의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본문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1. '이 세대'의 의미
'세대'(헬' 게네아)란 말은 '동시대의 사람들', '한 세대', '시대'(age), '종족' 등의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어느 한 가지 의미만을 채 택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이 세대'의 의미에 대한 학자들의 여러 견해를 알아보기로 한다.
① 유데 민족을 가리킴:
이는 '게네아'를 종족, 혹은 민족으로 본 것이다. 이에 따르면 본문은 재림의 모든 징조가 유대 민족이 다 사라지기 전에 임하게 됨을 뜻한다. 이 견해는 마 10:23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한 말씀과도 잘 연결된다.
② 예수 당시의 사람들을 가리킴:
이는 '게네아'를 '동시대의 사람들'로 해석한 것이다. '게네아'는 성경에서 이런 의미로 가장 맡이 쓰였다(11:41,42; 23:36). 만일 이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본장 전체에 기록된 예수 재림의 징조에 관한 예언은 모두 A.D. 70년 로마 장군 디도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과 연관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예루살렘 멸망은 종말의 예표일 수는 있으나' 또 예수 재림의 징조 중에 하나일 수는 있으나 재림 징조의 전부는 아니다.
③ 예수 초림에서 재림 사이의 모든 세대를 가리킴:
이는 '게네아'를 일정한 어떠한 시기로 해석한 것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많은 학자들이 지지하는 해석이다. 즉 예수의 재림의 징조는 예수의 재림 이전의 모든 세대가 다 지나가기 전에 반드시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 견해에서 어느 한 견해만을 취하는 것은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오히려 세 가지 견해를 모두 종합적으로 취할 때 보다 합리적인 해석을 할 수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의 의의 부분에서 밝히도록 하겠다.
2. 의의
본문과 유사한 난제를 지니고 있는 부분이 복음서에는 자주 나타난다. 예를 들면 마 10:23에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또 마 16:28에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예언들을 해석할 때 우리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들을 고려해 야 한다.
① 성경 예언의 복합성:
성경 예언은 한 가지 예언이 그 시대의 역사적 사건을 가리킴과 동시에 세상 끝 날의 상황까지도 오묘하게 암시하는 복합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예언의 복합성은 구약 예언에서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신약 예언' 특히 예수의 재림과 종말에 관한 예언에서도 잘 나타난다. 즉 본장의 예언은 A.D. 70년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예언인 동시에 세상 끝 날의 상황에 대한 예언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성경 예언을 특정한 한 시대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성경 예언을 올바로 해석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일인 것이다.
② 성경 예언의 궁극적 목적: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께서 재림의 징조들에 대해 예언하신 것은 성도들에 게 종말의 비밀을 미리 보여주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 대비하는 성도의 자세에 대해 교훈하는데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이처럼 성경 예언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해하는 일은 소홀한 채, 그 본질상 천상의 비밀에 속하는 일들을 억지로 이해하려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도표-24:30 그리스도의 재림 양상에 대한 묘사
마 26장 자료 노트 참조.
도표-24:44 예수의 메시아직을 나타내는 호칭 '인자'
'인자'(人子)의 문자적인 의미는 '사람의 아들'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칭호를 특별히 자신의 메시야직과 관련해 사용하셨다. 즉 메시야로서의 신적 권위를 나타내고자 하실 때'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구속 사역의 핵심인 수난, 죽음, 재림 등과 관련해서 이 칭호를 사용하셨던 것이다. 이에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 칭하신 경우들을 살펴봄으로써 메시야로서 그분의 신분과 사역의 특성을 좀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한다.
1.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나타내실 때(9:6)
2. 십자가 죽음 후 사흘 동안 무덤 속에 머무르심을 예언하실 때(12:40)
3. 언젠가 그의 천사들을 보내 불신자들을 심판하심을 예언하실 때(13:41)
4. 세상 끝 날에 성부 하나님의 영광으로 재림하심을 예언하실 때(16:27)
5. 십자가 죽음 후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실 때(17:9)
6. 사람들에게 수난을 받을 것을 예고하실 때(17:12,2)
7. 언젠가 하늘 영광의 보좌에 앉게될 것을 예언하실 때(19:28)
8. 예기치 못한 때에 다시 오실 것임을 예언하실 때(24:44)
24:1,2 예루살렘 성전 파괴의 예언
본문은 23:37-39에 언급된 예루살렘 멸망 예언의 연속 기사로 도둑과 강도의 굴혈이 되어버린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파멸 예언이다. 이 예언대로 예루살렘 성전은 AD.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하면서 파괴되었다.
24: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 본장은 마 25장과 더불어 일명 예수님의 '감람산 강화'라 부르는 부분으로 본서의 5대 강화 중 마지막에 해당한다. 이러한 감람산 강화는 종말적 교훈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본장은 주로 종말에 대한 예언을, 마 25장은 주로 종말에 대한 비유를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본장은 일명 '소계시록'이라 불리기도 한다. 한편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오신 때는 고난 주간의 화요일 저녁 무렵으로 마 21:23-23:39의 교훈을 모두 마치신 때이다. 한편 예수께서 성전에서 떠나신 것은 일종의 메시야적 예언 행위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도둑과 강도의 굴혈이 되어버린 성전에 대한 파멸 선고를 뜻하는 것이었다(마 21:13). 실제로 예수께서는 전장에서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마 23:38)고 예언하시고 성전에서 나오시자마자 성전 파멸을 예언하셨을 뿐만 아니라(2절), 다시는 성전을 찾지도 않으셨던바 이러한 사실들은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신 행위가 '메시야적 예언 행위'였음을 입증해 준다 할 것이다.
제자들이 성전 건물을 가리켜 보이려고. - 여기의 성전은 헤롯왕이 건축한 제 3성전을 가리킨다. 솔로몬이 건축한 제 1성전(왕상 6장 연구자료, '솔로몬 성전의 이해' 참조)은 B.C. 586년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에 의해 파괴되고, 포로 귀환 후 스룹바벨의 영도 하에 재건축한 제 2성전(스 6장 연구자료, '스룹바벨 성전' 참조)은 솔로몬의 제 1성전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헤롯 왕 때까지 보존되었다. 그런데 당시 에서의 후예인 에돔인이었던 헤롯왕은 항상 혈통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고, 유대인들 역시 반쪽 유대인이었던 헤롯왕에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그래서 헤롯왕은 이 같은 처지를 타개하기 위한 일환으로 스룹바벨 성전의 개축을 시도했는데, 이 공사의 규모가 매우 방대했기 때문에, 완공된 이후에는 스룹바벨 성전의 모습은 온데 간 데 없어졌다. 그래서 제 3성전은 스룹바벨 성전의 개축임에도 불구하고 헤롯 성전이라고 명명하게 된 것이다. 하여튼 이 제 3성전은 B.C. 19년에 착공되어 A.D. 63년경에 완성되었는바, 이 공사는 무려 80년이 넘는 기간이 걸렸다. 따라서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리킨 성전은 외형만 완공한 상태로 아직도 계속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눅 21장 연구자료, '헤롯 성전의 이해' 참조). 한편 예수님과 제자들은 지금 막 성전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예수께 성전을 가리켜 보이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본절과 병행 구절인 막 13:1-4을 보면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성전을 가리켜 보이며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라는 질문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제자들의 행동과 질문은 전장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멸을 선언하신 것(마 23:38)과 깊은 연관이 있다. 즉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의 진의를 깨닫지 못하고 그들의 눈으로 볼 때 공사 시작 50여년이 지난 현재(A.D. 30년)도 여전히 공사가 진행 중이며 그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견고한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24:2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 이 구절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에 대한 예언으로 특별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으리라는 말은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완전한 파괴에 대한 묘사이다(렘 26:18; 미 3:12; 학 2:15). 제자들마저도 그 웅장함과 화려함에 감탄했던 헤롯 성전이 완전히 황폐화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은 실제로 A.D. 70년 로마 장군 디도(Titus)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함으로써 그대로 실현 되었다. 이때 성전은 흔적도 없이 무너졌는데 심지어 투르누스 루푸스(Turnus Rufus)란 사람은 성전의 기초까지도 파헤치는 일을 감행했다고 한다. 이것은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갈이 갊을 당하고'(미 3:12)라는 말씀의 문자적 성취가 아닐 수 없다. 또한 배교자 줄리안(Julian)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예언을 무시하고 기독교에 대항하기 위해서 성전을 재건하려 했으나 땅에서 불이 솟아나와 좌절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예루살렘 성전 터에는 이슬람 회교 사원이 세워져 있다. 이로써 유대교의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으며, 이것은 진리를 담고 있지 못하는 종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한 집행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4:3-14 종말의 여러 징조들
24:3-25:46은 성전에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을 마치고(22:23-22:46)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대한 저주 및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선포를 하신 예수(23:1-24:2)께서 성전에서 나와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에 올라 하신 말씀으로, 일명 '감람산 강화' 라 불리워지며, 본서의 5대 강화 중 그 마지막에 해당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마태복음 서론 특별자료, '마태복음의 주제별 구성 원칙'을 참조하라. 그런데 바로 이 감람산 강화는 세상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교훈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과 더불어 기독교 종말론(終未論)의 중요한 골격을 형성함은 물론 소계시록으로도 불리운다. 따라서 우리는 본장과 다음 장의 내용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는 신앙을 갖도록 교훈 받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의 예언을 이해함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이 예언이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점이다. 즉, 예수의 종말의 예언은 직접적으로는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을 가리키며, 궁극적으로는 세상의 종말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본문 4절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한편 감람산 강화의 첫 부분에 해당되는 본문은 세상 종말의 징조에 관한 예언으로서, 앞장의 마지막 단락에 언급된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예언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하여튼 이러한 본문은 말세의 징조로 모두 네 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첫째는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과 미혹(4,5설), 둘째는 전쟁과 기근과 지진 현상(6-8절), 셋째는 세상의 성도들에 대한 박해 및 거짓 선지자의 출현과 불법의 성행(9-13절), 넷째는 모든 민족에의 복음 전파(14절) 등이다. 이 가운데 전자의 두 가지는 비교적 세상 종말의 초기 단계에 발생하는 징조이며, 후자의 두 가지는 세상 종말의 후기 단계에 발생하는 징조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와 같은 본문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영을 잘 분별하여 악한 영들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특별히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스스로 그리스도라 자처하는 자들과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거짓 교사들이 맡은바 그들을 경계하여 그들의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23-28절; 요일 2:18,19).
② 시대가 악할수록 종말의 때가 가까워 옴을 알고 그때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실로 오늘날 이 시대는 불법과 불의가 난무하고 있다. 이는 곧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때는 아니라 할지라도 분명 종말의 징조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시 깨어 경성하며(마 25:1-13) 더욱 말씀에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딤후 3:1-4).
③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소망 중에 기뻐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세상의 죄악이 극심해질수록 성도들에 대한 세상의 핍박은 더욱 극심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상의 죄악이 극심하다는 것은 그만큼 종말의 때가 가까이 이르렀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인내하는 가운데 믿음을 지킴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13절; 딤후 3:1;유 1:3).
24:3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 감람산은 성전 건너편, 곧 예루살렘 성밖 동편에 위치한 산으로 예루살렘 성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이곳에 대해서는 막 13장 자료노트, '감람산'을 참조하라. 예수께서는 성전을 나오신 후 아마도 예루살렘성의 동쪽 문으로 해서 베다니로 가시던 도중 감람산에 오르셨을 것이다. 하여튼 예수께서는 성전을 보시면서 성전의 파멸을 예언하셨고(12절), 이제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의 종말에 관해서 예언하고 계시다.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 마가는 이 제자들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 네 사람이었다고 전하고 있다(막 13:3). 한편 여기서 '종용히'는 '은밀하게'(privately)라는 뜻으로, 이는 제자들이 무리들과는 격리된 곳에서 예수께 질문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들이 이처럼 은밀하게 질문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들은 성전 파괴의 예언이 너무 충격적인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제자들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요 당시 백성들의 경외의 대상이 되었던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수께서 말씀하시자 마음에 번민하다 차마 공개적으로는 질문하지 못하고 예수께 은밀히 나아와 그들의 의문을 해결해 주시도록 요청하였던 것이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 여기서 '이런 일'이란 단순히 '성전 파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세상의 종말'에 관한 예언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즉 제자들은 성전의 파괴와 세상의 종말을 동시에 있을 사건으로 알았던 것이다(Calvin, Zahn). 사실 당시 유대인들은 성전의 파괴란 세상이 존속하는 한 있을 수 없고 세상 끝에야 비로소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쨌든 제자들의 질문은 크게 나누어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종말의 때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종말의 징조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것은 제자들 이후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질문으로 예수께서는 종말의 징조는 말씀하셨으나 종말의 구체적인 시기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시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맡기셨다(36절, 행 1:17). 따라서 종말의 때를 준비하는 것은 잘하는 일이라 할 수 있으나 종말의 때가 '이때다' 혹은 '저때다'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적인 주장이 되지 못한다.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 여기서 '임하심'(파루시아)은 본래 인격적인 '참여', '임재'를 뜻했던 말로,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키는 특정 낱말이 되었다(살전 4:15; 약 5:7). 한편 '세상의 끝'은 문자적으로 '세상의 마침', 또는 '세상의 종말'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제자들의 질문은 '주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이 있을 때에는 어떠한 징조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까'라는 말이다.
2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 본절에서부터 본장 마지막 절까지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이다. 그런데 예수의 답변을 이해함에 있어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즉 그것은 예언의 복합성이다.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 또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리스도의 재림 또는 세상의 종말을 같은 때에 일어날 일로 생각했다. 그러나 A.D. 70년에 있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세상의 종말은 아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답변을 통해 가까이는 예루살렘 멸망을 멀리는 종말적인 사건을 예언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종말 예언에는 제자들의 질문과는 달리 현 세대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예언과 장차 미래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예언이 동시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의 멸망은 세상 종말의 예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예루살렘의 멸망이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믿지 아니한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의 때라면, 세상 종말은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 대한 심판의 때인 것이다. 하여튼 우리는 예수의 예언을 해석하면서 어느 한 사건에 대한 예언으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며 통시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 종말의 첫 번째 징조(5절)와 관련하여 주신 경계의 말씀으로 종말의 때와 징조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종말에 있을 미혹을 삼가 조심하여 신앙을 굳건히 할 것을 촉구한 말씀이다. 한편 여기서 '미혹하다'(플라나오)라는 말은 '속이다', '잘못 인도하다'라는 뜻으로, 이는 종말의 때에는 거짓 그리스도가 일어나 적극적으로 믿는 자들을 속여 파멸에 빠뜨리게 될 것을 시사해 준다. 이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24:5 나는 그리스도라. - 종말의 첫 번째 징조는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이다. 이같은 현상은 예루살렘 성 함락 전이나 종말 전에도 공히 있는 일로서 교회사에서 자주 발견된다. 즉 예루살렘 함락 전에는 드다와 갈릴리 유다(행 5:36,37), 애굽인(행 21:38) 등과 같은 사람들을 비롯해서 사마리아인 도시데우스, 시몬 마가스 등이 자칭 그리스도라고 가장했었다(Theophylact). 물론 이 같은 현상들은 유대인 사이에 편만했던 메시야 대망 사상에 편승해서 로마 통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민족주의적 운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메시야적 권위를 가장한 민족주의인 운동은 예루살렘 직후에도 한 차례 발생한 적이 있는데, 이는 A.D. 135년에 있었던 바르코흐바의 반란 사건이었다(Josephus). 한편 이 같은 유대 민족주의적 색채를 띤 메시야 운동과는 달리 종말 전에 발생하는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은 대부분 성도들의 영적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접근하는 것이 특징인데, 이들의 거듭되는 출현은 종말의 확실성에 대한 징표라고 할 것이다. 특별히 오늘날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자칭 그리스도라 하는 자들이 수없이 일어나 성도들을 미혹하여 실족케 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이 이르렀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신앙의 경주의 마치는 날까지 더욱 깨어 경성하여야 하겠다.
24: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 종말에 대한 두 번째 징조는 난리와 난리에 대 한 소문이 흉흉해 진다는 것이다. 전쟁이 종말적인 징조 가운데 하나라는 것은 유대들 사이에서 통념적인 사상이었다(외경 에스드라2서 13:29-31). 실제로 예루살렘 성이 로마에 함락되기 전까지 유대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Josephus), 또한 종말을 향해 치닫는 인류 역사 진행 가운데서도 전쟁은 항상 있어 왔다.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 비극을 만들고, 인간의 야수성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전쟁 앞에서도 예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 것을 명하신다. 이는 결국 전쟁 또한 당신의 섭리 아래 허용된 것으로서 결코 성도들이 무서워하고, 겁내어야 할 성질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인하고 있다.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 전쟁은 종말의 징조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종말의 시작을 알리는 전주곡에 불과할 뿐 세상의 종말 그 자체는 아니다. 세상의 종말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고전 15:24). 그러므로 성도들은 전쟁과 전쟁의 소문을 듣는다 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할 것이 아니며 오히려 담대한 믿음으로 신앙을 지켜야 할 것이다.
24: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 이는 난리와 난리의 소문(6절)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종족과 민족 그리고 국가 간에 있을 전쟁을 뜻한다. 따라서 이 징조는 앞서서도 언급했듯이 구체적으로는 예루살렘 멸망 전 유대적 상황과 일반적으로는 종말을 향해 치닫는 인류 보편사적 상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 종말의 또 다른 징조는 처처에서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당시의 기록들에 의하면 예루살렘 멸망 전 곳곳에서 기근과 지진이 있었다고 전해 주고 있다. 특히 기근은 전쟁의 부산물로서 여겨지는데, 사도행전에서도 대규모의 기근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는 바다(행 11:28). 또한 지진은 보통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로 여겨졌는데(삿 5:4; 시 18:8; 사 24:19; 겔 5:17) 당시 그레테, 로마, 브르기아의 아하네아, 프리기아의 라오디게아' 캄파니아 등지에서 대규모로 발생했다고 전하고 있다(Tacitus). 하여튼 오늘날에도 대규모의 지진과 기근이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 재해 현상들은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신호라 아니할 수 없다.
24:8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 본절은 전쟁, 기근, 지진 등의 일련의 현상들이 종말의 징조인 것은 분명하나 그것이 곧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종말의 때에는 새로운 현상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한편 여기서 '재난'(오딘)은 본래 '해산의 고통'을 뜻하는 말로, 본절에서는 죄로 물든 세상이 심판받고, 메시야가 통치하는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될 고난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즉 예루살렘 멸망 전에 있을 난리와 기근과 지진 등은 메시야를 배척한 이스라엘의 멸망과 교회의 태동 및 확산이라는 과도기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현상이었으며, 종말 전에 있을 전쟁, 기근, 지진 등은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세상의 멸망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 과정에서 있을 수밖에 없는 현상인 것이다(사 66:10; 렘 22:23; 미 4:9; 롬 8:22).
24: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 여기서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오고 오는 세대의 성도들이 당할 환난을 종말의 징조로 설명하시고 계신다. 이처럼 교회에 대한 세상의 핍박은 종말의 중요한 표징으로서, 이런 양상은 초대 교회에서 뿐 아니라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행 4:3; 8:1; 12:4; 13:50; 14:19).
너희를 죽이리니. - 실제로 예루살렘 멸망 전에 예수의 많은 제자들이 순교를 당했다(행 7:59; 8:1; 12:2). 그와 마찬가지로 세상의 종말 때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대적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성도들은 담대한 믿음으로 신앙을 지킬 때 비로소 최후 승리를 거둘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 이런 현상은 초대 교회 교인들이 받았던 대표적인 핍박이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들이 가는 곳곳에서 미움을 받았었다. 특히 로마인들은 기독교인을 매우 증오했는데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그의 역사책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치욕스런 행동 때문에 보기 싫은 무리'들이였다고 적고 있다. 또한 사도행전에서는 '이 파에 대해서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행 28:22)라는 기록을 볼 수 있는바, 이런 기록들은 당시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억울한 미움과 설움을 받았는가 하는 사실을 잘 증언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24:10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시험에 빠져. - 이 구절은 교회 내부에서 발생한 징조에 대한 설명인데' 특히 성도들의 배교와 분열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여기서 '그 때에'는 일반적으로 종말을 뜻하지만 구체적으로는 앞절의 상황' 즉 모든 민족들이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할 때를 가리킨다. 이때에는 믿음이 어린 성도와 원래 가라지와 같은 거짓 성도들은 교회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갈 뿐 아니라 성도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을 서게 될 것이다(살후 2:3).
서로 잡아 주고. - 배교한 성도들의 고발은 실제 많은 믿음의 성도들을 잡는데 결정 적인 단서가 되었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역사가 다키투스(Ttcitus)의 기록에 의하면 '처음에는 자신이 신자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붙잡혔다. 그리고 나서는 그들이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다른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오게 되었다'고 한다.
24: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 거짓 선지자에 대한 경계의 말씀은 여러 차례 주어졌다(마 7:15; 24:5; 고후 11:13; 딤후 2:17'18). 이들 거짓 선지자들은 다양한 형태로 성도들을 미혹케 하고 있지만, 예루살렘 멸망 전 이스라엘에 출현했던 자들은 주로 자신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메시야로 자칭했다. 특히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멸망 직전까지 성 내에는 극도의 혼란과 불안이 증폭되었는데' 이처럼 극도의 혼란과 불안이 팽배해지자 예루살렘 성 내에서는 백성들의 구원을 보장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다수 등장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추종했다고 한다(Josephus). 한편 초대 교회에서 자주 보여지는 '거짓 선지자'는 예루살렘 성 내에서 백성들을 선동했던 부류와는 성격을 약간 달리 하는데' 이들은 주로 교회 공동체에 잠입해서 성도들에게 유대주의적 율법을 주입시킴으로써 복음의 정신을 희석시키는데 역점을 두었다(행 20:30; 롬 16:17,18; 고후 11:13; 갈 1:7-9; 골 2:18-23). 특히 거짓 선지자들은 '이신득의'(以信得意)의 교리를 주장한 바울의 선교에 지대한 방해 공작을 획책했는데, 이들은 심지어 성도들을 미혹하여 유대주의적 요소를 배격하는 바울의 사도성까지도 부인하게 하였다(갈 1:1-24). 이처럼 당시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자행된 이단 사설은 교회와 교인들을 미혹하고 분열시켰던바 교회에 대한 외적 핍박보다 더 큰 악영향을 끼쳤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이단 사설은 교회를 위협하는 가장 큰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들은 거짓 선지자들과 그들의 악한 교훈이 교회에 침투하지 못하도록 철저한 감시와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하며 그들을 쳐부수기 위한 대책 마련을 시급히 서둘러야 할 것이다.
24:12 불법이 성하므로. - 여기서 '불법'(아노미아)은 부도덕함을 나타내는 말로, 본절에서는 신앙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는 온갖 비신앙적인 방종과 타락을 가리킨다. 결국 본절은 종말의 때에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신앙이라는 허울을 쓰고 교회를 부패시키며 부도덕을 조장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오늘날 이단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부도덕함이라는 것은 이 사실을 잘 입증해 주고 있다.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 이런 현상은 '불법이 성행한' 결과이다. 불법과 사랑은 결코 함께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Bengel). 따라서 불법이 성행하면 교회는 타락할 수밖에 없고 신자들은 사랑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와 같은 실례를 에베소 교회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에베소교회는 처음에는 성도들 간에 뜨거운 사랑을 지녔으나 교회에 불법이 성행하자 그 '처음 사랑'을 버렸던 것이다(계 2:2-4). 한편 본절에 사용된 '사랑'(아가페)이라는 명사형 단어는 공관 복음에서는 이곳과 눅 11:42에만 보인다. 물론 누가복음에서는 이 단어가 '하나님의 사랑'과 관련해서 사용된 반면' 여기서는 '형제애'와 관련해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형제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그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요일 4:19). 여하튼 성도들은 불법이 성행하는 때일수록 보다 더 형제에 대한 사랑을 배가시킴은 물론 불법을 조장하는 자들은 단호히 조처함으로써 교회가 불법의 장이 되는 것을 막는데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24:13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여기서 '끝'은 고난의 마지막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본절의 의미는 5절부터 열거된 고난들을 인내하는 자만이 구원을 받게 될 것임을 뜻한다. 이때 구원은 기본적으로는 종말적 심판 때 얻을 최종 구원인 영생을 뜻하지만, 현실적인 육체적 구원까지 염두에 둔 말이다. 실제 예루살렘 멸망 때에는 유대의 많은 종교 지도자들과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 예수께서 종말의 징조로 보이신 것 가운데 마지막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종말의 끝 시점을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전파되는 때로 정하셨다. 이 예언적 말씀이 특별히 의미가 있는 것은 종말이 올수록 성도들을 미혹하고, 박해하는 세력이 흥왕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천국 복음이 결코 축소되거나 중단되는 일 없이 전파될 것이라는데 있다. 즉 종말의 끝이 박해와 냉대의 분위기 속에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임무 완수로 완결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말이 오기 전에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보여 주는 구절로서, 범세계적인 복음의 확장은 종말이 임박했다는 중요 표적이 될 것이다.
24:15-28 마지막 대 환난
종말의 때에 나타날 징조에 대해 언급한 전 단락(1-14절)에 이어 본문은 세상 종말에 있게 될 대환난의 참혹함에 대한 예언이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종말의 때에 성도들이 취해야할 태도(15-20절), 하나님께서 그 택한 백성을 위해 환난의 때를 감하실 것이라는 사실(21,22절),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한 교훈(23-27절)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로 보아 본문은 결국 성도들로 하여금 종말의 때에 일어날 일들로 인하여 두려움에 빠져서 믿음을 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목적에서 주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미 앞 단락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본장의 예언들은 복합성을 지니는바 본문의 대환난 역시 종말에 있을 대환난에 관한 예언이자 예루살렘 멸망 때 있을 상황에 대한 예언이다. 실제로 A.D.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멸망 때에는 본문의 예언들이 그대로 성취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본문 해당 주석을 참조하라. 그러므로 예루살렘 멸망 사건은 종말의 예표론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종말론적 신앙을 소유한 성도들은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깨닫고 종말의 때를 철저히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우리는 이외에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① 모든 성경의 예언은 어느 하나라도 성취되지 않는 것이 없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예언 역시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을 통해 정확히 성취되었으며, 또한 머지않아 닥칠 세상 종말의 시기에 다시 한 번 완전히 성취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입중하게 될 것이다(마 5:18; 눅 16:17).
② 성도들은 어떤 사람이 정말 놀라운 이적들을 행하며 또한 온갖 감동적인 말들을 늘어놓는다고 할지라도, 마치 자신이 재림주인 것처럼 행세한다면, 단호히 그를 배격해야만 된다. 사탄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미혹하기 위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사탄의 일꾼들 역시 의(義)의 일꾼으로 교묘하게 가장한다(고후 11:15).
24:15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 단 9:27; 11:31; 12:11에 나타난 다니엘의 예언을 가리킨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 본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들이 제시되어 왔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견해를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①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성전을 파괴시킨 사건을 가리킨다는 견해(De Wetle, Bengel, Bruce), ②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는 동안 열심 당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점령하여, 매일의 제사 행위를 중지시킨 일을 가리킨다는 견해(Josephus), ③ B.C. 168년에 수리아 왕 안디오커스가 예루살렘 성전에 쥬피터의 신상을 세운 사건을 가리킨다는 견해(Calvin)가 있다. 그런데 이상의 세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점들을 안고 있다. 즉 첫 번째 견해는 예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의 멸망의 징조를 말씀하고 계시는바 그것이 예루살렘 멸망 자체를 가리킨다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는 것을 보거든 산으로 도망하라는 말씀(16절)과 조화하기 어렵다는 난점이 있다. 다시 말해서 첫 번째 견해는 성도들이 도피할 여유를 전혀 주고 있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 견해는 주로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해서 제기되었는데, 그는 당시 예루살렘 성의 극도의 혼란과 광란의 주범을 열심당원으로 보았다. 즉 그의 기록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 내에서 주도권을 쥐고, 결사 항쟁의 무모한 작전을 세웠던 열심 당원들은 매국적 행위를 일삼았던 제사장들을 폐위시키고, 성전에서 진행된 제사를 금지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이러한 기록에서 열심 당원들이 로마에 대해 결사 항쟁을 벌이고 전인했다는 기록은 신빙성이 있지만 열심 당원의 성향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이 성전 제사를 폐지하고 성전에 멸망의 가증한 것을 세웠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친 로마적 성향을 지니고 있던 요세푸스는 로마의 예루살렘 침공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예루살렘 멸망의 원인이 이스라엘 내부의 죄악에 있음을 묘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열심당원들이 성전의 제사를 폐지하고 성전에 우상을 세웠다고 기록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견해는 외경 마카비 1서 1:54에 근거한 해석인데, 이는 예수께서 이미 과거의 사실을 앞으로 있을 징조로 말씀하셨다고 볼 수 없으므로 또한 난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역시 가장 타당한 견해는 ①의 견해이다. 다만 우리는 이 예언을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 자체로 볼 것이 아니라 A.D. 66년에 있었던 로마의 예루살렘 포위 작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병행 구절인 눅 21:20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이 견해의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으며,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도망할지어다'라는 말씀과도 조화를 이룬다.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 괄호 안의 본 구절에 관해서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마 6:13의 송영과 마찬가지로 초대 교회의 논평이라는 견해이다(Alford). 둘째, 기록자인 마태의 생각이 삽입되었다는 견해이다. 셋째, 긴박한 사건을 앞 둔 예수님의 특별한 당부라는 견해이다. 이 중에서 첫 번째 견해는 추측에 불과하고, 두 번째 견해는 마가도 동일한 말을 적고 있어 별다른 신빙성을 얻지 못한다(막 13:14). 여기서는 세 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24: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 여기서 그 때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섰을 때를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로마 군대의 예루살렘 성 포위 작전이 개시될 때를 말한다(15절 주석 참조). 그런데 문제는 예루살렘 성 내에 머물러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물샐 틈 없는 포위망을 어떻게 뚫을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요세푸스(Josephus)가 그 해답을 주고 있다. 즉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예루살렘 포위 작전을 펼치던 로마 장군 베스파시안(Vespasia) 휘하의 세스타우스(Cestius Gallus)는 포위망을 좁히면서 성을 공격하다가 특별한 사유도 없이 잠시 물러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 예수의 말씀을 명심했던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로 보고 풀린 포위망을 지나 데가볼리의 한 성읍인 펠라(Pella)로 도망을 친 것이다. 이에 대한 당시의 기록을 보면 '거룩한 사람들에게 내린 계시 덕택에 전쟁이 있기 전 온 교회가 요단을 건너 펠라로 이주하여 거기서 혼란기 동안 안전하게 지냈다'(Eusebius)고 적고 있다. 한편 이때 베시파시안 장군의 군대가 갑자기 공격을 멈추고, 포위망을 푼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당시 로마 황제가 갑자기 죽자 그 뒤를 베스파시안 장군이 계승하게 되었고, 따라서 베스파시안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돌아갔는데, 그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디도(Titus) 장군이 다시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기 전까지 잠시 동안 포위망이 뚫렸었다는 것이다. 하여튼 우리는 여기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와 같이 종말의 때에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머리털 하나상하지 않게 보호하시며 구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비록 대적에 의해 에워쌈을 당한다 할지라도 믿음을 잃지 말고 끝까지 인내로 견뎌야 할 것이다.
24: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 내려가지 말며. - 이 구절은 그 다음절과 더불어 예루살렘 멸망의 임박성과 여기서 구원받을 수 있는 시간이 매우 촉박하다고 하는 사태의 긴박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유대인의 주택 구조상 지붕은 평평했는데, 이는 휴식과 기도(행 10:9)의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또한 이 지붕은 다른 집의 지붕과 연결되어 있기도 했는데, 여기서는 이 연결부분을 이용해서 급히 도망하라고 권장하고 있다. 임박한 심판이 눈 앞에 닥쳐옴에도 집안에 있는 재산을 염두에 두는 것은 마치 롯의 처와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과 같다(창 19:26). 더욱이 당시 열심당원이 성내 주도권을 잡자 예루살렘 성을 빠져 나가는 것을 철저히 통제했는데 이런 상황에서의 시간의 단축과 간편한 차림은 탈출에 있어서 생명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4:18 밭에 있는 자는…뒤로 돌이키지 말지니라. - 예루살렘 성 밖에서 일하는 사람은 당연히 간편한 옷차림을 했겠지만, 멸망이 임박한 때에는 그 차림으로 도망해야 함을 권면하고 있다. 겉옷이 아무리 귀하다 해도 목숨과는 바꿀 수 없는 것이다.
24: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 이 구절은 예루살렘 멸망 시 전개될 비극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당시 예루살렘에 임한 심판은 여인의 가장 축복인 '임신'과 '수유' 기간도 용납하지 않을 정도였는데, 실제로 젖먹이 아이가 목이 말라 혀가 입천장에 붙는 일은 비일비재했고, 심지어 어머니가 아이가 먹는 떡을 때 앗아 먹을 정도로 비참했다고 전해 주고 있다. 겨울이나, 인식일은 도피하는데 많은 애로점이 있다.
24:20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 겨울이 우기에 해당하는 팔레스틴 기후를 감안한다면 겨울은 도피하기에는 매우 부적절한 때임이 분명하다. 또한 아직은 율법의 규정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에 도망한다는 것도 부적합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도망하기에 적절한 상황과 환경을 달라는 기도를 하도록 명하신 것이다.
21: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 여기서 '이는'은 헬라어 어원상 '왜냐하면'(가르)이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앞절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성도들이 속히 도피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쓰였다. 여기에 '큰 환난'이란 예루살렘의 함락을 뜻하는데, 이 당시의 비극은 인류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요세푸스(Josephus)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110만 여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했고 10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사람이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던 것은, 이때가 유월절 기간이라 많은 순례자가 운집했던 까닭이었다. 어쨌든 이러한 유대인들의 참극은 종말에 있을 7년 대환란(계 11:3,11; 12:6,14)의 전조로서 선지자들을 잡아 죽이고 종내에는 그리스도까지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Chrysostom). 따라서 세상의 종말 때에는 예수를 믿지 않는 모든 자에게 예루살렘 멸망 때보다 더 극심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다.
24: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 예루살렘 멸망 당시 하나님께서 섭리로 그 환난의 기간을 단축시키셨다. 만약 하나님께서 진노의 기간을 제어하지 않으셨다면 그 비극은 극에 다달았을 것이고, 그 영향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멸망 중에서도 당신의 택하신 자들을 보존하시기 위해서 환난의 날들을 감축하셨다. 즉 유대와 로마 간의 전쟁은 비록 많은 사상자를 내기는 했으나, 그 전쟁은 단시간에 끝남으로써 나라 전체가 황폐화되는 것을 막았으며 더 많은 사상자가 날 수 있는 가능성을 줄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전쟁이 빨리 끝날 수 있었던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헤롯 아그립바가 자신의 재위 기간에 예루살렘 성벽을 공고히 쌓기 시작하였지만, 이 공사는 글라우디오(Claudius, A.D. 41 -54) 황제의 명령에 의해서 A.D. 42년경에 중단되었다는 점이다. 만약 이 성벽 공사가 완공되었더라면 전쟁은 아주 오랜 기간이 걸렸을 것이다. 둘째, 예루살렘 성내에 거주했던 유대인들은 내부적인 분열과 갈등이 심해서, 로마 군대의 침입을 막을 하등의 준비도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만약 유대인의 종교적 일치성을 기반으로 모든 전력을 다해 하나님께서 심판의 막대기로 사용하고 있는 로마 군대와 맞섰다면, 더 큰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은 뻔한 이치이다. 셋째, 로마 군대의 진입 전 곡식 창고가 이미 소각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즉 여러 종파들의 주도권 싸움에 의해 곡식 창고가 전부 불타 버렸던 것이다. 이로써 일부 요새에서는 싸울 의욕을 잃고 투항해 버린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환난 날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주도면밀하게 섭리하셨다. 그와 같이 종말 때에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환난 날을 감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 환난에서 구원 얻을 자가 없을 것이다.
24:23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 이 구절은 5절에서 언급한 내용을 단순히 반복한 듯한 느낌을 주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 같은 징조가 나타나는 시기가 반드시 일치하고 있지는 않다고 보고 있다. 즉 5절에서 등장하는 거짓 그리스도는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과 관련된 징조로 보고 있고, 본 구절은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나타날 징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다(Chrysostom).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은 종말 뿐 아니라 예루살렘 멸망 직전에도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었던 까닭에, 이 구절은 이 양자의 사건을 동시에 담아내는 징조를 언급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거짓 그리스도는 임박한 환난에서 구원할 수 있다는 감언이설로 백성들을 광야로(행 21:38) 끌고 다녔지만,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 같은 징조에 미혹 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 스스로 그리스도라고 주장하거나 혹은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선지자로 자칭하는 자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교훈을 믿게 하기 위해 동원하는 수단이 '표적과 기사'이다. '표적과 기사'(세메이아 카이 테라타)는 성경에서 흔히 같이 언급되는데(막 13:22; 요 4:48; 행 2:22; 4:30; 살후 2:9; 히 2:4), 이는 두 단어의 차이가 극히 미미하다는데 있다. 물론 학자에 따라서는 전자를 외형적인 성격으로, 후자를 내부적이고 신비적인 성격으로 각각 나타내거나(Williams), 혹은 전자는 인간에게, 후자는 자연에 미치는 신적 능력이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이처럼 꼭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이 표적과 기사는 거짓 그리스도와 선지자들의 주장을 더욱 그럴싸한 것으로 포장해 주고, 결국 사람들을 미혹케 하는 강렬한 수단이 된다. 따라서 표적과 기사를 가지고 신적 권위의 출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 본절의 의미에 대해서는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택하신 자들을 미혹케 하더라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NV)와, 택하신 자들을 미혹케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NAS)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것은 '할 수만 있으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는 구원받은 성도가 과연 타락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아주 미묘한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 번 택한 자는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는 점(롬 8:39)에 비추어 볼 때 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 어쨌든 본절은 사단의 공격이 성도들까지도 그 표적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경고로서 더욱 성도들이 근신하여 살 것에 대한 권면의 말씀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24: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 이 구절은 당시 예수께서 얼마나 깊은 염려 속에서 '감람산 강화'를 하셨는지를 짐작케 해 준다. '반복'과 '강조'의 말씀은 곳곳에 발견되지만 본 구절 역시 이를 잘 보여준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만큼 종말에 사단의 영들이 집요하고 대규모적으로 활동할 것임을 깊이 간파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24:26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 이 구절은 23절의 말씀에 대한 보충 설명이다. 이러한 본절은 궁극적으로는 종말에 대한 예언이지만, 부분적인 성취는 이미 예루살렘 멸망 때 이루어진 역사적 사실이다. 원래 '광야'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자주 거주했던 곳으로서, 모세나 세례 요한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과 많은 연관이 있던 곳이었다. 따라서 '광야의 선지자적 전승'은 거짓 그리스도나 선지자들이 자주 악용했던 출현방법인데, 이는 예루살렘 멸망 때 거짓 그리스도가 백성들을 광야로 미혹했던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행 21:38).
골방. - 이곳은 회당의 교실이나 비밀스런 장소를 말하는데, 실제로 예루살렘 멸망 직전에 거짓선지자들이 일어나 자신의 구원의 계시를 전수할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사람들을 비밀스런 장소로 모이게 했던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현상은 그만큼 당시 사회가 멸망에 대한 불안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바,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거짓 선지자들의 유언비어가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을 미혹케 하기에 충분한 여건을 조성해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4:27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 번쩍임 같이. -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성격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예수님은 거짓 그리스도들처럼 특정 지역에 국한되어 강림하심으로써 사람들을 우왕좌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번개처럼 단 한 번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강림하신다는 것이다(계 1:7).
24:28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 - 여기서 '독수리'는 시체를 먹고 사는 '콘돌'류를 뜻하는 것일 것이다(미 1:16). 이 새는 주검이 있는 곳에 대한 예리한 시각이 매우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삽시간에 떼 지어 시체로 모여 드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본절과 동일한 말씀을 눅 17:37에서도 하신바 있는데, 그 해석에 관해서는 다음 몇 가지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첫째,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암시적인 말씀으로서 유대인들을 진멸하기 위해 사용한 하나님의 재앙의 사자들인 로마 군대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Bengel, Clarke, Bruce). 실제로 로마 군대의 군기에는 독수리 형상이 새겨져 있고, 유대인들에게 덮친 죽음의 재앙을 생각한다면, 매우 타당한 해석으로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일반적인 의미로서 죄악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모여들 심판의 천사들로 보는 견해이다(Zahn, Allen). 셋째,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 마치 콘돌이 시체에 모여들 듯이 하나님의 택한 자들이 그에게 모일 것이라는 견해이다(Calvin, Luter). 이상의 세 견해 가운데 본장의 교훈이 직접적으로는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것이요, 근본적으로는 종말에 관한 예언이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역시 첫 번째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24:29-31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상황
종말의 징조(3-14절)와 종말의 때에 있을 대환난(15-28절)에 관해 언급한 앞 단락에 이어 본문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상황을 제시해 주고 있다. 즉, 본문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는 천지가 개벽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29절)과, 그리스도께서는 초림 때의 초라하고 비천한 모습과는 달리 큰 능력과 영광 가운데서 구름을 타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오시게 될 것을 보여 주고 있다(30,31절).
따라서 이러한 본문은 앞 단락에 언급된 거짓 그리스도의 미혹(4,5,23,24절)으로부터 성도들이 벗어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자칭 그리스도라 주장하며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주장했으나 본문에 근거해 볼 때 모두 거짓 증거임을 알 수 있다. 하여튼 본문에 언급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왕이 자기 도성으로 위엄 있게 개선하는 광경을 연상케 하는 것으로 종말에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으로 이 세상에 위엄 있게 임하실 찬란한 모습을 보여 준다.
한편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교훈을 깨달을 수 있다.
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들에게 엄청난 기쁨과 감격을 가져다 줄 것이지만, 불신자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통곡을 가져다주게 될 것이다. 정녕 주님께서 구름을 타고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이 되면, 그때까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던 자들에게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며 오직 심판이 그들에게 내려질 뿐이다.
② 성도들은 재림의 주님께서 천사들을 시켜서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할 때, 하나님 나라의 곳간에 들어가는 알곡이 될 수 있도록 미리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삶을 영위해야 된다(마 13:24-30; 갈 5:22,23; 6:7,8). 만약 그렇지 못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은 삶을 영위하게 되면(마 21:18,19), 영원한 심판의 불속으로 던짐을 당할 수밖에 없다(눅 13:6-9; 요 15:6).
24: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흔들리리라. - 여기서 '환난'은 예루살렘 함락을 의미할 수도 있고 종말 때의 대환난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환난'을 예루살렘 함락으로 이해할 경우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라는 말과 조화되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본절의 '환난'을 마지막 때에 있을 대환난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결국 우리는 본절 이하의 내용이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본절에 나타나는 천재지변 현상에 대해서는 그것을 국가의 멸망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라는 견해(Lighfoot, Carr)와 문자적으로 실제 일어난 현상으로 이해하는 견해(Bengel, Williams)가 있는데, 후자의 견해가 유력하다. 왜냐하면 종말의 현상에 대한 성경의 일관된 입장이 이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실 때 해가 빛을 잃고 어두워졌고(마 27:45), 또한 종말에 하늘이 불에 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진다는 기록들은(벧후 3:12) 본 구절의 천재지변 현상들을 당연한 현상으로 수납하게 해 주고 있다. 아무튼 종말에 해가 빛을 내지 않고, 그 결과 달이 빛을 잃으며 하늘의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등의 우주의 총체적인 대이변은 전대미문의 충격이 되겠지만, 이는 만물을 새롭게 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재창조하시기 위한(시 102:26) 과정이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되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어떤 빛보다 더욱 창연하게 비칠 것이고, 따라서 태양과 달과 별들의 빛들이 전혀 무색해질 것이다(사 24:23).
24: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 이 구절은 3절에서 인자의 재림을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다. 한편 여기서 '인자의 징조'가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들이 제시되어 왔다. 즉 ① 그리스도의 십자가(Cyrill of Jerustlem, Chrysostom, Origen, Alford), ②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영광의 광채 (Meyer, De Wette), ③ 천군천사(Calvin), ④ 주의 탄생을 알린 것과 같은 별(shausen), ⑤ 예수 그리스도 자신(Bengel)일 것이라는 견해 등이다. 이 가운데 ②, ③,④는 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부족하고, ⑤는 본 구절의 문맥상 흐름을 거스르고 있어 수용하기 힘들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본 구절은 인자의 징조와 인자 그 자체를 뚜렷이 구분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징조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가장 무난한 해석은 ①인데, 십자가보다 더 인자를 더 잘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점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이 견해도 유력한 것일 뿐 단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가장 정확한 답변은 '인자의 징조'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때에는 그것을 보는 자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징조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 이들 족속 중 가장 비통한 마음을 가지고 통곡할 족속은 유대인들인데, 이는 그들이 인자를 십자가에 죽였던 까닭이다. 또한 천국 복음을 거부했거나 핍박한 사람들 역시 그들 자신의 불신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단 12:10; 계 1:7)에서 통곡을 하게 될 것이다.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 이것은 단 7:13을 배경으로 한 인자의 재림의 모습으로, 이러한 재림의 모습은 신약 다른 곳에서도 자주 나타난다(마 26:64; 살전 4:17; 계 1:7). 이러한 재림의 모습은 그리스도께서 초림 때와는 달리 재림 때에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공개적이고도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보여주고 있다.
24:31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를 보내리니. - 나팔은 이스라엘에서 새해나 절기의 선포, 전쟁 소집(민 10:1-10; 시 81:3) 등에 사용되었다. 또한 하나님을 찬양하거나(시 81:3), 제사를 드리거나(민 10:10), 나팔절을 선포할 때 불었다(레 25:9).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여기서의 나팔 소리는 불신자들의 통곡의 소리와는 대조적으로 택하신 백성들을 영원한 복락으로 들이기 위해 부르시는 축복의 신호라 할 수 있다.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 이는 종말에 있을 예수님의 재림이 공간적 제약을 받지도 않고, 또한 예수께서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자신의 종들을 모으는 일에 한 사람도 소외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재림의 때에 천사들을 통해서 각처에(계 7:9) 흩어져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원·근거리에 상관없이 불러 구별시키실 것이다(사 43:6; 49:12; 마 8:11).
24:32-51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에 관한 교훈
앞 단락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상황을 언급하신 예수(29-31절)께서는 이제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에 관해 교훈하고 계시다. 이를 위해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무화과나무의 비유(32,33절), 노아의 때(37-39절), 집 주인의 비유(42-44절), 두 종의 비유(45-51절) 등을 동원하고 계시다. 이들 비유의 핵심 내용은 재림의 시기의 불예측성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재림의 시기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재림의 때는 노아의 홍수 때와 마찬가지로 이미 예고된 일로서 그 임박성이 강조되어 왔다. 또한 예수께서는 종말에 나타날 여러 징조에 대해 말씀하셨다(4-15절). 따라서 우리는 이 징조들을 통하여 그 때를 분별할 수 있다. 다만 그 정확한 시기와 때는 아무도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는 것이다(36절). 이처럼 재림의 시기가 비밀에 감추어져 있는 까닭은 주를 믿는 성도들에게는 항시 깨어 경성하게 하기 위함이요, 주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임박한 종말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51절).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에서 다음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① 종말론적인 신앙을 갖고 살아가야 하지만 그렇다고 재림의 시기에 대해 지나치게 관심을 가짐으로써 그때를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② 세상일에 너무 몰두하여 재림의 때가 임박했음을 깨닫지 못하며 영적인 일에 무관심 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③ 그리스도의 재림이 더디다 할지라도 결코 낙심하거나 게을러져서는 안 되며 하나님 나라를 더욱 간절히 사모하며 충성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24: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 본 구절부터 마지막 51절까지에서는 제자들의 첫 번째 질문인 재림의 시기와 관련된 교훈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무화과나무 비유와 노아의 때 그리고 두 종류의 종의 비유가 동원되고 있다. 하여튼 이들 비유의 핵심적인 교훈은 재림의 시기의 불예측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항상 재림을 소망하며' 근신케 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여기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는 말은 별도로 이와 관련된 비유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 나무 자체가 가르쳐 주는 것을 배우라는 뜻이다.
그 가지가‥‥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 팔레스틴에서 무화과나무가 잎이 나는 것은 여름이 가까웠음을 알리는 신호와 같다(마 21:19,20 주석 참조).
24:33 이와 같이 너희도. - 사람들이 무화과나무의 성장 상태를 보고서 계절을 확인하듯이 제자들 또한 시대의 징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임박성에 대해 깊이 깨닫기를 권면하신 부분이다.
이 모든 일을 보거든‥‥문 앞에 이른 줄 알라. - 여기서 '모든 일'이 가리키는 바는 확실하지 않지만, 몇 가지 의견으로 집약되고 있다. ① 4-14절의 내용(Zahn), ② 15-21절의 내용(Bruce), ③ 29-31절의 내용(Meyer), ④ 4-31절의 내용(Plummier) 등이 있는데' 여기서는 재림의 징조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전부 포함되어 있는 ④번의 의견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아무튼 성도들은 시대의 징조를 통해서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를 분별할 수 있도록 믿음의 안목을 가져야 할 것이다.
24:34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다 이루리라. - 본절은 해석하기 매우 난해한 구절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이 말씀은 그의 재림이 임박한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자들 간에도 이 '세대'(게네아)의 해석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살펴보면 ① 유대인이 존속하는 동안(Alford, Clarke), ② 그리스도인들이 존속하는 동안(Chrysostom), ③ 당시의 사람들이 존속하는 동안(Calvin, Bengel, Bruce)이라는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다. 이 가운데 '세대'란 말이 일반적으로 30년 내지 40년을 가리키는 말임을 감안할 때 ③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즉 예수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이 모두 죽기 전에 그의 예언이 성취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지금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 실제로 일부 제자들 가운데는 예루살렘 멸망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4-31절의 말씀은 이 세상의 종말의 때에 완전히 이루어질 사건들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의 말씀은 단순히 예루살렘 멸망만을 염두에 두고 하신 것이 아니다. 즉 예수께서는 1차적으로는 예루살렘 멸망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고, 궁극적으로는 그의 재림이 있게 될 종말의 때를 염두에 두고 본절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본장에 나타난 예수의 예언은 복합성을 띠고 있다. 본절의 해석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 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24:35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 예수께서 그의 예언이 확실하게 성취될 것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천지가 없어질 때는 최후 심판의 때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그 천지의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심판자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천지보다 크시다. 그러므로 천지는 없어질지라도 그의 말씀은 항상 살아서 역사하며(시 102:26; 벧후 3:10), 반드시 성취되고 말 것이다.
24:36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 이 구절은 '재림의 정확한 때'(3절)을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으로, 한 마디로 말한다면 재림의 때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재림의 때가 공개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사람들로 하여금 항시 깨어 경성하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종말에 대한 지나친 집착보다는 현실의 삶에 충실하면서도 항시 겸손한 신앙과 신실한 자세를 견지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 여기서 예수께서는 점층법을 강조하셔서 '종말의 때'를 추측하는 것이 전혀 무익한 일이며, 이는 지적 . 영적 교만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계신다. 즉 재림의 때는 피조물인 인간이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하늘의 천사와 심지어 그리스도 자신마저도 모르는 일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이와 관련하여 혹자는 본절을 예수의 신성과 전지성을 부정하는 근거로 삼고자 했다(Arius). 그러나 본절은 예수의 신성이나 전지성에 대한 부정의 근거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성부에 대한 성자의 완전한 복종과 겸손을 표시한다(Alford). 사실 아리우스(Arius)의 공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조화로움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었다. 예수께서는 신성으로서는 아버지와 동등하셨지만, 인성으로서는 이 문제에 대해 스스로 제한하셨던 것이다. 이는 여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으로 자신을 비우시고 비천하게 만드셨던(빌 2:7) 자발적인 자기 비하와 복종의 측면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오직 아버지만. - 이에 대한 정확한 번역은 '오직 아버지만을 제외하고는'이다. 즉 예수께서는 재림의 시기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일임하신 것이다. 이처럼 재림의 시기와 관련해서는 성자이신 자신마저 제외하신 예수님의 태도는, 이 시대에 재림의 시기를 거론하며 성도들을 미혹케 하는 각종 이단들의 행위는 반 성부적인 교만임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고 하겠다.
24: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 여기서 '노아의 때'란 노아의 홍수가 있던 때를 말하는 것으로(창 6:13-7:24), 노아의 홍수는 하나님의 최후 심판의 모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인자의 재림의 때'가 '노아의 때'에 비유된 것은 인자의 재림이 성격상 노아의 홍수와 마찬가지로 불현듯 돌연히 임하게 될 것을 암시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것이 재림의 때를 전혀 예측할 수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노아의 홍수도 이미 예측할 수 있도록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인자의 재림의 때도 그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그 때만큼은 계시된 징조를 통해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나타나는 징조를 통해 종말의 때가 가까움을 알고 그 때를 준비하되 그 정확한 시점을 단정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24: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 이 구절은 노아 당시 사람들의 특징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부분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고 방주에 들어가기 전까지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준비하며 그 사실을 120년 동안이나 사람들에게 전했지만 단 한 사람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먹고 마시며. - 먹고 마시는 일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적인 욕구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자체가 심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비상시, 즉 회개하고 기도해야 할 때 이를 외면하고 탐욕스럽게 먹고 마시는 일에만 집착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종말의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일에는 무관심하고 육적이고 세속적인 일에만 열심이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고 말 것이다.
장가들고 시집가고. - 이것 역시 인류의 보존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기본적인 일이다. 문제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그 시대의 특징이 되어 버린데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하늘에 대한 소망도 없었고, 이것을 또한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즉 노아 당시 사람들은 세속적인 일에만 관심을 두었을 뿐 영적인 일에는 전혀 무관심하다가 돌연히 다가온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한 것이다.
24:39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 노아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임한 홍수가 엄습할 때까지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깨닫지 못했다. 이것은 그들이 세속적인 쾌락과 생활에 너무도 깊이 빠졌기 때문에 심판의 징조를 바라볼 수 없는 영적 무감각 상태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이런 영적 무감각 상태는 노아의 때 뿐 아니라 종말의 세상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날 현상으로, 그들 역시 하나님의 심판이 엄습한 이후에야 그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24: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 본 구절과 다음 절은 예수님의 즉각적인 재림으로 인해 생길 최종적인 분리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두 사람이 같은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면서 동일한 일에 종사하지만, 그 두 사람의 영적 상태는 정반대의 상태였기 때문에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나머지 사람은 남겨질 것이다. 본절의 비유가 의미하는 바가 휴거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이 멸망을 받을 것인지를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재림 때에 알곡과 가라지가 구분되듯이 최종적인 분리가 생긴다는 사실을 잘 보여 주고 있다.
24:41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 '매'는 한국의 맷돌과 비슷한 것으로 두 여자가 마주 앉아 손으로 돌려가며 곡식류를 가는 기구이다. 이러한 일을 하는 두 여인 역시 같은 일에 종사하지만 영적 상태에 따라 그 결국은 정반대의 결과를 맞이할 것이다.
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 급작스런 재림으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최종적인 분리가 생기고, 그 결과 한쪽은 영생을, 한편은 영벌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이 같은 심판을 동반하는 주님의 재림을 앞 둔 성도들이 할 바는 오직 깨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깨어 있는 것은 언제 오실지 모르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때 행해질 심판에 합당하게 이 세상에서 처신해야 함을 말한다.
24:43 너희도 아는 바니. - 이것은 계속된 가르침을 진행시키기 위해 주위를 환기시키는 말씀이다.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 성경에서는 주의 재림이 종종 도적이 오는 것에 비유되고 있다(살전 5:2; 벧후 3:10; 계 3:3; 16:15). 이는 다 이 재림의 돌연성을 강조할 때 사용되었다. 한편 여기서 '경점'(퓔라케)은 본래 '수호자', '감옥' 등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상징적으로 시간, 특히 밤을 네 등분했던 헬라인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하나인 '경'(更)을 뜻한다. 이에 관해서는 마 14:25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 당시 이스라엘의 가옥은 일반적으로 흙벽돌로 지어졌다. 그래서 도둑의 입장에서는 빗장이 잠겨있어도, 벽을 뚫고 침입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집주인이 깊은 잠에 빠져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할 때를 전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절의 비유는 결국 예수님의 급작스런 재림이 도적과 같이 얘기치 못한 때에 도래할 것이라는 경고와 아울러 깨어 있을 것에 대한 명령을 주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24:44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 이 구절은 34-43절까지의 결론적인 언명이다. 따라서 종말을 앞둔 성도들이 견지해야 할 유일한 태도는 최후의 심판 때 영생을 받기에 합당한 생활일 것이다.
24: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 - 눅 12:42에 의하면 이 종은 '청지기'(오이코노모스)였다. 그런데 '청지기'는 '집을 맡은 자'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여러 종들 가운데 주인의 신임을 받아 피택되어 주인을 대신하여 집안의 제반 사무를 관장하고, 다른 종들을 관장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러한 '청지기'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성도들을 양육하고 지도하는 '교회 지도자'를 가리킨다고 이해된다(Lenski, Williams). 한편 본절에 언급된 '충성과 지혜'는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2대 요건이다(고전 4:2; 골 3:16).
24:46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 이는 깨어있고, 예비한 종에 대한 축복의 말씀이다. 주인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가 맡긴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종이 여간 미덥지 않을 것이며, 그에게는 더 큰 일을 맡기게 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종은 복되다 할 것이다.
24:47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 앞절에서 말한 종의 복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즉 주인의 모든 소유를 맡아서 관리하는 지위를 얻게 될 것이다. 이는 요셉이 보디발의 신임을 얻어서 그의 재산을 관리했던 것(창 39:4,6)을 볼 때 이런 파격적인 대우가 드문 일이기는 해도, 실제 있었던 일임을 보여 준다. 어쨌든 본절은 작은 일에 충성한 자에게 주어질 하늘의 큰 상급과 영광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마 25:21).
24:48 그 악한 종이‥‥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 악한 종은 충성된 종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그의 불충성한 마음의 동기는 '주인이 더디 오리라'라는 생각이다. 이는 청지기적 사명을 망각한 처사로서, 이것이 그가 '악한 종'이라는 불명예스런 호칭을 받은 까닭이 라고 할 수 있다.
24:49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면. - 악한 종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불충성할 뿐 아니라,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동료들을 때리며 방해까지 한다. 마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또한 그의 행각은 주인의 재산을 축내며, 그것으로 자신의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데에까지 치닫는다. 이처럼 부정직과 무절제 그리고 시기는 악한 종의 주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24:50 생각지 않는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 주인의 돌아올 날에 비유되는 예수님의 재림 때는 전혀 생각지 않는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급작스럽게 임하게 된다. 종의 입장에서는 주인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 위에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을 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악한 종은 자신이 예상한 주인의 귀환 날을 상정하고 자신의 종된 신분을 망각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악한 종의 생각은 마치 재림의 날짜를 추측하는 각종 이단들의 경향과 일맥상통하고 있는데, 대개 이들은 개인의 죽음으로 임하게 될 심판의 때를 고려하지 않는 듯하다. 이 개인적 죽음 또한 또 다른 형태의 종말이다. 이렇게 볼 때 소위 재림과 더불어 임하는 종말의 때가 전혀 예기치 않는 시간에 임하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더 이 세대의 사람들에게 경고의 말씀이 되고 있다.
24:51 엄히 때리고. - 직역하면 '두 조각을 낸다'는 뜻으로, 이는 톱과 같은 것으로 몸을 두 조각을 내듯이 심한 형벌을 가하는 것을 말한다. 실제 성경에는 통으로 몸을 자르는 것과 같은 형태의 형벌이 행해진 경우가 더러 있었다(삼상 15:33; 삼하 12:31; 단 3:29). 본절은 결국 게으르고 악한 청지기에게 임할 형벌이 상상 외로 큰 것임을 알려주는 주님의 경고의 말씀이다.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외식하는 자들의 운명과 악한 종의 운명이 동일한 것이 될 것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 이 표현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과 절망을 나타낼 때 종종 사용하는 마태의 전형적인 표현으로서(마 8:12; 22:13; 25:30), 악한 자에게 임할 형벌이 가공할 만큼 경악스러운 것임을 암시해 주는 말이다(마 22:13 주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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