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향인 암태도는 전남 목포시 근처에 있는 신안군의 여러 섬들 중의 하나이다. 섬이라고 하면 흔히들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먹고 사는 줄 안다. 즉 생업이 어업이냐는 것인데 신안군의 섬들은 꽤 크고 농사지을 땅이 제법 많아 주 소득원이 농작물이다. 나의 고향 역시 특산품으로 택사라는 약초도 생산되고, 마늘과 쌀, 대파, 콩 등이 들판에서 주로 자라는 곳이다.
나는 암태에서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살고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고3이던 1996년까지 바쁜 농번기에는 본격적으로, 아닐 때에도 틈틈이 농사일을 도우며 살 수 밖에 없었다. 아빠가 일찍 돌아가셔 엄마는 우리 땅이 아닌 큰아버지네 땅까지 빌려 혼자 논농사, 밭농사를 다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이차이가 많이 난 오빠들은 일찌감치 광주, 서울로 돈 번다고 떠났기에 나는 초등학교 3~4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농사일을 도우며 학교를 다녀야 했다. 바쁠 때마다 사람을 사서 농사일을 다 하기엔 일당을 줄 돈이 없었기에 엄마는 종종 새벽부터 나가 달이 뜬 밤까지 일을 하고 돌아왔다. 그래서 나 혼자 저녁 먹고 집을 치우고 기다리다 잠들기도 하고 엄마를 찾아 나섰던 기억도 많다.
엄마에 대한 연민과 걱정으로 학교에 다녀오면 농사일을 거들러 나섰지만 정말 정말 하기 싫었다. 다른 친구들은 모여 티비를 보거나, 동네 공터에서 고무줄도 하고 술래잡기도 하고 노는데 그러지 못할 때면 속이 상했다. 뙤약볕에서 농작물을 캐고, 나르고, 흙을 뒤집어 쓰고, 벌레를 보는 것도 힘들었지만, 간혹 지나가는 사람들, 먼 동네의 친구들이 지나가다(우리 동네는 배타는 선착장이 있는 마을 바로 옆이라 지나가게 되는 곳이었다.) 내가 농사를 짓는 것을 흘끔거리며 보는 것 같으면 창피해서 숨고 싶었다.
힘들고 싫은 농사 중에서 사람의 손길이 사계절 내내 필요한, 가장 귀찮고 손이 많이 가는 건 단연코 마늘농사이다. 지금은 드넓은 마늘밭에 기계가 들어가서 쉽고 효율적으로 처리될 것도 같은데 당시 만해도 마늘 농사는 백퍼센트 사람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반면 벼농사는 모내기도 기계가, 벼를 베는 것도 콤바인이라는 기계로 했다.)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며 마늘 농사의 과정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8월 가장 더운 날들이 지속되면 판매한 후 종자로 남겨놓은 마늘을 손으로 일일이 다 쪼깨야 한다. 그나마 이 일은 마당 그늘 진 곳이나 나무 밑에서 앉아서 할 수 있으니 낫긴 하다. 하지만 아무 볼거리, 들을 거리 없이 혼자서 그걸 하루 종일 하고 있는 것도 곤욕스럽다. 그래서 엄마를 비롯한 동네 아줌마들은 종종 동네 나무 밑 여기저기서 모여서 함께 수많은 마늘을 쪼개기도 했다.
암튼 그 지루한 시간들을 보내고 가을에 접어들면 촉진제라는 약을 푼 물에 마늘을 넣고 불려 싹을 틔운다. 그 사이 트렉터로 밭은 정리되고, 검은 비닐은 마늘이 심어지는 이랑에 덮여 있어야 한다. 그럼 이제 마늘을 가지고 가 쪼그리고 다니며 드넓은 밭이랑에 마늘을 심는 것이다. 이 일은 혼자서는 못하므로 여러 인력을 구해야 한다. 어린 나는 이 때만은 제외된다. 겨울을 보내는 동안 마늘은 파릇파릇 이파리를 키워낸다. 그러다 5월 정도되면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되는데 바로 마늘쫑을 뽑는 것이다. 우리가 식탁에서 반찬으로 먹는 그것 말이다. 마늘쫑을 뽑지 않으면 마늘이 잘 자라지 않기 때문에 일일이 손으로 다 뽑아내야 한다. 적당한 힘과 속도로 쓰~윽 하고 뽑아 올려야 하는 나름 고난도 기술과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그런데 더운 계절, 햇볕 아래서 투덜투덜 대다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가면 마늘까지 쑥 뽑혀 버린다. 그 때 엄마한테 들키면 혼이 나고, 안 들키면 얼른 발로 뽑힌 마늘을 어떻게든 땅에 도로 들어가라고 누르곤 했다.
마늘밭을 돌며 마늘쫑을 뽑아 낸 지 한 달 조금 넘으면 이제 마늘을 캐야한다. 비라도 그 사이 적절히 와서 밭의 무르기가 적절하면 좋은데 가물어 땅이 건조해서 딱딱하면 캐기가 힘이 들어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역시 잘못 캐면 위에 대만 쏙 뽑혀 호미가 동원되고, 때론 삽으로도 캐야했다. 캔 마늘들은 그대로 땅에 뉘여 하루 이틀 말리는 과정을 거치고 묶어 집으로 날라야 했는데 아, 이 과정은 또 얼마나 고되던가. 엄마가 마늘을 묶어놓으면 나는 두 손으로 한 곳에 날라 싹 모으고 리어카에 실어 집으로 나른다. 농사짓는 밭이 다 집 주변이어서 이동거리는 길지 않았는데 생각해보니 차라리 멀었으면 트럭이든 어떤 이동수단을 이용했으면 더 빨랐을지 싶다. 물론 그러려면 또 누군가의 도움을 요청해야 했을 테지만 말이다. 엄마와 나는 주말이 되면 새벽부터 나가 마늘을 날라 집으로 옮겨야 했는데 장마철이 다가와 비라도 오면 큰일 나기 때문이다. 집에 가지고 가서 그걸 허물어지지 않게 쌓느라, 어두워도 끝나지 않아 힘들어서 울었던 밤이 떠오른다.
여하튼 그렇게 애써 쌓아놓은 마늘들은 또 햇볕이 좋으면 죄다 마당에 다 널어야 한다. 잘 말라야 상품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마당에 널었다, 쌓았다 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마늘을 사는 업자들이 동네에 돌아다니고 드디어 엄마의 통장에 돈이 들어온다. 그러나 내 기억엔 마늘 농사로 큰 돈을 벌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대부분은 흉년이면 마늘이 잘 안 되서 가격이 안 나오고, 풍년이면 풍년대로 가격이 낮아져서 엄마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지는 못했다. 그렇게 애증의 마늘이 종자만 남기고 사라지면 집은 어느새 좀 깔끔해 지고 한여름이 찾아온다. 그러면 다시 마당 그늘 밑에 앉아 마늘을 다시 까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 끝나지 않은 마늘농사, 마늘 노동!
마트 진열장에 놓여있는, 하얗고 매끈한 자태로 포장지에 담겨있는 마늘에게 이런 서사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소비자는 가격과 어디 흠이 없는지만 보느라 이리저리 살펴보고 선택한다.(생마늘은 보통 비싸게 여겨져 나는 좀처럼 구매를 하지 않는다.) 어느 새 나에게도 가격만 보이는 농작물이 된 것이다.
가격이 제일 중요하게 취급되는 농작물. 그러나 정작 우리는 그것들이 어떻게 누구의 손을 거쳐 식탁까지 오는지는 좀처럼, 또는 전혀 떠올리지 못한다. 마늘 뿐 아니라 깻잎, 배추, 대파, 무 등의 대부분의 농작물이 어떠한 과정으로 재배되어 오는지 대부분의 도시의 사람들은 관심이 없을 것이다. 대파의 가격이 한 단에 870원이면 합리적인 가격이라 여기는 대통령부터 핫딜이라면 우르르 달려가서 싼 가격에 득템했다면서 좋아라 하는 우리들까지, 사랑과 정성으로 키운, 때론 눈물이 스며든 농작물들의 가치는 잘 모르는 듯 싶다. 어릴 적 직접 재배해 보았던 나도 가격 앞에서 주춤해지니 말이다.
우리가 지금 마트에서 먹거리를 살 수 있는 이 편리한 생활은 ‘실로’ 논밭에서, 비닐하우스에서 허리 한 번 제대로 못 펴고, 분주하게 움직이며 농작물을 거둬들이는 사람들, 특히 일손이 부족한 최근에는 이주노동자들 덕분이다. 소비자인 우리는 마늘이 내 앞에 오기까지, 아니 모든 농작물이 우리 식탁까지 오기 까지 거친 모든 이의 손을 알고,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농사짓는 것은 돈을 준다고 해도 섣불리 하겠다고 나서기가 주저될 정도로 아주 고된 노동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르포과제를 요기다가 올려주셨네요 잘 읽었어요
마늘농사가 이런건줄 진정 몰랐네요 어린 아이가 얼마나 싫고 지겨웠을까 저는 슬프게 읽었어요.
밤늦게 일할때 참지 못하고 울어서 엄마가 두고두고 기억하며 미안해 하신게 기억나요. 농사일을 시킬 수 밖에 없었을 엄마의 마음을 이제는 좀 알 것 같기도 하구요.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우주진주가 노동한 현장에 함께 땀 흘리는 느낌이 들 만큼 생생한 글이네요. 단숨에 잘 읽었습니다. 피할 수 없었던 나의 어린 시절 노동이 떠오르기도 했구요.
저는 늘 결말이 어려워요. 이론적으로는 의미화하는게 어떻다는걸 이해가 되는데 글로 표현하는건 아직도 풀기 힘드네요 ㅎㅎ 계속 써봐야겠죠? 우리모두 어린시절에게 토닥토닥..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