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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호남의병과 정읍
김덕진(광주교육대학교 교수)
1. 머리말 2. 임란 호남의병의 역사적 의의 1) 임란 극복의 원동력은 호남의병 2) 학자ㆍ관료들의 솔선수범 거의 3. 정읍 사람들의 의병활동 1) 임금을 지키자 : 남문창의 2) 전라도를 막자 (1) 금산ㆍ웅치ㆍ이치 전투 (2) 제2차 진주성 전투 (3) 남원성 전투 3) 실록을 옮기자 4) 고장을 지키자 : 향보의병 5) 곡식을 모으자 4. 맺음말 : 임란 의병의 전통을 이어서 1) 임란의병이 호란의병으로 2) 의병활동을 기록으로 |
1. 머리말
임진왜란 극복의 중심적 역할을 한 곳은 자타가 공인하는 전라도였다. 이와 관련하여 임진왜란이 한 창인 1596년(선조 29)에 이원익(李元翼)이 “전라도는 임진년의 병란 이후로 국가에 공이 많거니와, 양반 중에서 근왕한 자는 다 호남 사람입니다.”고 말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도 영암 현씨가에 보낸 편지에서‘약무호남(若無湖南) 시무국가(是無國家)’라며 이원익과 거의 같은 말을 했다. 1794년(정조 18)에 제주목사 심낙수는 임진왜란 때에 나라를 중흥시킨 것은 호남의 힘이었다고 말했다.이상의 말을 종합하면 임진왜란 극복에 호남의병의 역할이 지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오늘 임진왜란 때 호남 사람들의 거의가 갖는 의의를 말씀드리고자 한다.
그러면 이때 오늘날 정읍 사람들은 어떠하였을까? 많은 정읍 사람들이 임진왜란 때 거의를 하여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활약하였다. 그리하여 정읍의 시사나 의병사에서 일찍이 다루어진 적이 있고,정읍 출신 거의자 또는 정읍에서의 의병활동 및 정읍 사람들의 실록 이안에 대한 연구를 행한 논문도 있지만,아직 이 점에 대한 체계적 정리에까지는 미치지 못한 것 같다. 비록 이러한 상황이지만, 필자는 오늘 임진왜란 당시 정읍 사람들의 의병봉기의 양상과 그 의미를 말씀드리고자 한다.
2. 임란 호남의병의 역사적 의의
1) 임란 극복의 원동력은 호남의병
우선, 거의의 배경이 되는 임진왜란의 초기 전개 과정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1592년(선조 25) 4월 14일, 왜군이 부산진성을 공격함으로써 임진왜란은 발발하였다. 왜군이 동래부성ㆍ탄금대를 함락하고 북진을 거듭해오자, 조정은 30일 서울을 출발하여 서쪽으로의 파천 길에 올랐다. 선조는 개성을 거쳐 5월 7일 평양에 이른 후 사수 계획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도 여의치 않아 6월 11일 평양을 떠나 23일 의주에 이르러 의주목사 숙소에 임시 궁궐을 정하였다.
선조는 4월 30일 서울을 떠나 서쪽으로 향하였고, 왜군은 5월 3일 경성을 함락시켰다. 이 사실을 전라도 사람들이 알게 된 때는 5월 6일 무렵이다. 곧 바로 일부 인사들은 거의를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남쪽 백성들 대부분은 서쪽으로 떠났다는 말만 들었을 뿐 임금이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는 별다른 진척 없이 지연되고 있었다. 임금이 서쪽으로 갔다는 말만 들었을 뿐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를 몰라,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하고서 망연자실 상태로 나날을 보내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그때 병력 보충을 위해 사신을 남쪽에 보내어 임금을 지키는 근왕병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비변사의 건의에 따라, 임금을 호위하고 있는 윤승훈이 무유어사란 직책을 띠고 바닷길로 5월 말 전라도에 내려왔다.그가 가지고 온 임금의 호소문 속에는 남쪽 근왕병을 고대하고 있다는 선조의 당부가 담겨 있었다. 이로 인해 전라도 사람들은 비로소 임금이 평양에 가 있고, 전황이 매우 위급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고부터 도내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 마침내 고경명은 담양에서 5월 29일, 김천일은 나주에서 6월 3일 각각 출정식을 가졌던 것이다.
전라도 곳곳에서 고하와 비천을 따지지 않고 거의에 동참하였다. 어떤 이는 형제간에 또는 부자간에 참여하였다. 어떤 이는 스승과 제자가 함께 거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어떤 이는 곡물을 내거나 군병을 모았다. 어떤 이는 노모를 동생에게 맡기거나 상중인데도 집을 나섰다. 종도 주인의 말고피를 잡고 함께 길을 나섰고, 부모가 왜군에게 순절하여 홀로 남은 어린 자녀를 노비가 자기 자식처럼 돌본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공동체 정신은 이후 정묘ㆍ병자호란 때 재현되었고, 19세기말~20세기초 항일 의병ㆍ독립 운동으로 이어졌다. 바로 이 점이 전라도의병이 갖는 첫 번째 역사적 의의가 되겠다.
그들은 처음에는 임금을 지키자는 근왕에서 출발하였지만, 지역이 위험에 노출되자 지역방어에 나섰고, 이웃이 위태롭자 경기도ㆍ경상도에까지 진출하였다. 이치ㆍ웅치ㆍ금산 등지에서의 전투는 전라도를 사수하여 ‘모군모속’을 가능하게 하여 조선군의 전투력 증강에 기여하였고, 강화도ㆍ수원ㆍ진주 등지에서의 전투는 서울을 탈환하고 경상도를 지키는 데에 기여하였다. 의병 가운데는 관군에 투신하여 임금의 근위병 충원은 물론이고, 권율의 행주대첩과 이순신의 해전승리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 점이 전라도 의병이 갖는 두 번째 역사적 의의가 되겠다.
2) 학자 · 관료들의 솔선수범 거의(擧義)
전라도에서 의병이 대대적으로 일어난 데에는 학자이면서 관직을 역임한 엘리트층의 솔선수범에 있었다. 관군에 대한 기대가 절망으로 끝나자, 유생⋅사족을 중심으로 한 의병이 조직되었다. 엘리트층의 솔선수범은 전 지역적인 추동력을 발휘하기에 충분하였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제봉 고경명(高敬命)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고경명은 문과 장원 급제자로서 관직을 역임한 후 고향에 머물고 있다가 두 아들과 함께 창의를 하였다. 1592년 7월 9일 금산전투에서 고경명의 장렬한 순절은 이후 전라도 의병이 대대적으로 일어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점은 안방준(安邦俊)이 1632년(인조 10)에 이귀에게 보낸 편지 속에 들어 있다. 그는 이 편지에서 임진왜란을 극복한 것은 호남이 보전된 데 연유하고, 호남이 보전된 것은 여러 의병이 봉기한 데 연유하고, 여러 의병이 봉기한 것은 고경명이 앞장선 데 연유한다고 하였다.안방준을 포함한 호남의 엘리트들은 임진왜란 극복의 원동력을 ‘호남 의병’의 봉기로 인식하고 있었다.
반대의 경우도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김덕령(金德齡)의 억울한 죽음은 의병의 열기를 빼앗아갔다는 데에 반면교사 감이다. 왜란이 일어나자 김덕령이 무등산 주검동에서 대검을 주조했다. 검이 완성되자 산이 우레 같은 소리를 내고 흰 기운이 골짜기로부터 하늘에 뻗치기를 수일간 지속되었다. 이 칼을 차고서 김덕령이 의병을 일으켰다. 거의한 날 고려말 왜구를 물리친 정지 장군의 갑옷을 입고, 정지의 무덤에 제를 올렸다. 병자호란 때 광주 사람 유평이 의병 출정식을 읍성 밖 절양루에서 거행할 때도 이 정지 장군 갑옷을 입었다. 이 갑옷은 현재 광주시립역사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정식을 마치고 김덕령은 담양을 거쳐 남원에 이르러 요천 옆에 있는 밤나무 숲에 진을 쳤다. 경상도 진주에 이르러 진을 치니 정부로부터 ‘익호장군’이란 칭호를 받았다. 의령 등 경남 서부지역에서 권율, 곽재우와 함께 왜적을 물리쳤다. 왜군과 휴전 협상을 하고 있던 명나라 장수는 전투 중지령을 내렸다. 그래도 김덕령은 거제도, 고성 등지에 상륙하려는 왜적을 공격하여 막아냈다. 그때 충청도 홍산에서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켰다. 김덕령이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무고가 들어왔다. 이몽학이 처음 군사를 일으킬 때에 그의 무리들에게 속여 “김덕령이 나와 약속이 있고, 도원수⋅병사⋅수사도 다 내통되어 있으므로 반드시 호응할 것이다.”고 말하였다. 김덕령은 서울로 압송되어 6차례의 형문을 받고 그만 감옥에서 죽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도처에서 원통하게 여기고 가슴 아파했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죄인이 되어 시신으로 돌아온 김덕령을 목격한 전라도 선비들은 더 이상 의병을 일으키지 않고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대검을 주조할 때에 하늘이 울었고, 그 칼을 차고 출정식을 치를 때 칼이 허리춤에서 떨어진 것이 이 억울한 죽음의 징조였다고 사람들은 쑥덕거렸다. 후세 지식인들은 선조가 패전의 책임자를 찾기 위해 김덕령을 희생 제물로 삼았다는 평가도 나왔다.
3. 정읍 사람들의 의병활동
여기에서는 정읍 사람들이 어디에서 창의하였는지, 그리고 어디에서 왜군과 전투를 펼쳤는지, 창의하여 무엇을 하였는지 등을 알아보겠다.
1) 임금을 지키자 : 남문창의
무기를 집어 들고 군병을 무장시키는 일은 임금을 지키라거나 외적을 물리치라거나 등 임금의 명령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나머지 행위는 반란이었다. 이때도 오직 근왕(勤王)을 위해서 창의를 하였기 때문에, 이때 의병을 ‘근왕 의병’이라고 한다.
김경수(金景壽)에 의해 주도된 장성 남문에서의 거의를 ‘남문창의’라고 한다. 일자는 1592년 7월 18일로 보고 있다.창의자를 배양하는 사우가 장성에 있는 오산사(鰲山祠)이다. 그 사지가 바로 오산사지인데, 여기의 「제현사실」에 73명의 행적이 수록되어 있다. 그 속에 정읍 사람으로 김제민⋅엽⋅흔⋅안 부자, 이수일, 유희진⋅희문⋅희사 형제, 도강김씨 김후진⋅대립 등이 보인다. 한편, 호남절의록에도 유희진, 이수일, 김제민, 김엽, 김흔, 김안, 이경주 등이 보인다.
이들은 장성 남문에서 창의할 때 곡물을 내거나 군병을 제공하였고, 그 가운데는 나중에 각지의 전투에 참여한 이도 있었다. 특히 이들이 낸 곡물은 의병의 식량이나 명군의 식량은 물론이고, 재력이 열악한 의주 행재소에 운송되어 그곳의 재원으로도 사용되었다.
2) 전라도를 막자
(1) 금산 · 웅치 · 이치 전투
고경명(高敬命)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아들과 함께 창의하여 5월 29일에 6천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의병을 담양에서 모았다. 이는 남원의 양대박ㆍ안영 의병장과 옥과의 유팽로 의병장의 합세에 힘입은 것이었다. 고경명은 담양을 출발하여 북상 길에 올랐다. 전주를 거쳐 여산에 이르러 격문을 각지에 보내어 동참을 호소하니, 여러 고을의 수령과 백성들로부터 열렬한 호응과 지원을 받았다. 충청도 은진에 이르렀을 때 왜군이 금산을 거쳐 전주에 침입하려 한다는 첩보를 들었다. 함경도까지 유린한 왜군은 군량 확보를 위해 곡창 지대인 전라도에 대한 공략을 서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북상하여 임금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만약 전주가 무너지면 전라도 전체 형세가 위급하고 게다가 전주는 어진과 사고가 있는 곳이어서 부득이 먼저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경명은 전주를 지키기 위해 왜군이 머물고 있는 금산으로 향하였다. 7월 9일에 관군과 함께 금산성을 좌우에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다음날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왜군의 집중 공격으로 관군이 먼저 무너지고, 이어서 의병도 패퇴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고경명과 그의 차남 고인후, 부장 안영과 유팽로 등이 순국하였고, 사후 이들은 광주 포충사에 배향되었다. 금산성도 파괴되어 영원히 복구되지 못하고 말았다.
금산을 점거한 왜군은 두 갈래로 나뉘어 전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한 부대는 용담과 진안을 친 다음 험한 웅치를 넘어 전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이에 웅치에서 호남의 관군과 의병이 왜군과 맞서 적병 수백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었으나, 나주판관 이복남은 퇴각하고, 김제군수 정담과 해남현감 변응정 등은 순절하고 말았다. 의병장 김제민도 웅치로 들어가 싸우다 아들 안을 잃고 말았다.
또 한 부대는 진산을 친 후 이치를 거쳐 전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이치에서 도절제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 및 고부 출신 의병장 김제민과 함열 출신 의병장 황박 등이 7월 20일 왜군에 맞서 대혈전을 벌였다. 왜군은 시체가 길게 널려 있을 정도로 많은 사상자를 내고 전의를 상실한 채 금산으로 후퇴하였다. 이치대첩은 임진왜란 초기 육전에서의 전세를 뒤엎는 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이처럼 금산성 전투에서 전라도 최대의 의병군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금산성 전투, 웅치 전투, 이치 전투를 통해 왜군의 기세는 꺽이어 왜군으로 하여금 전주 공격을 단념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라도 사람들의 의병 봉기를 촉진시키기도 하였다.
이때 정읍 사람으로 김신문과 전용관이 고경명 의병진에서, 이환은 조헌 의병진에서, 김진태는 웅치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김진태(金振兌)의 경우 무과 급제 후 선천부사로 임명되었다가 진안에 유배 중에 웅치 전투에 나가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의병이 되어 관군에 투신한 이도 있는데, 백광언과 전덕린이 이광 순찰사 진영에서, 그리고 배흥립과 이대축이 이순신 진영에서 활약하였다. 이 외에 의병은 아니지만, 고부 출신의 동래부사 송상현의 장렬한 순절은 임란극복의 한 표상이 되기도 하였다.
(2) 제2차 진주성 전투
김천일(金千鎰)은 담양부사 임기를 마치고 고향에 내려와 나주 향리의 서재에 머물고 있었다. 손죽도 왜변으로 이대원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상소를 올려 대응책의 잘못과 상벌의 혼란을 논했고, 낮에는 학문을 강론하고 석양에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하며 제자들로 하여금 병마를 익히게 했다. 향리에서 들은 왜인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아 김천일은 자위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임금이 서행 길에 올랐고 왜군이 한양에 입성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천일은 울부짖고 통곡하며 이윽고 떨쳐 일어났다. 그리고는 급히 도내 선비들에게 서신을 보내 거병할 것을 촉구했고, 향중부로와 집안 자제들을 나주 공관에 소집하였다. 이리하여 김천일은 나주에서 3백여 의병을 모아 북상하였는데, 진군 과정에서 7백여 명으로 증강되었다. 수원을 거점으로 활동하다 강화도로 옮겨갔다. 조정의 재촉에 다시 뭍으로 나와 단독 작전 또는 관군과의 연합 작전으로 한강 연안에서 왜적을 소탕하였다. 관군과 명군의 공세로 왜군이 남해안으로 후퇴하자, 김천일 의병군도 그 뒤를 좇아 남하하였다.
왜군은 조⋅명 연합군의 압박에 따라 1593년 4월 한양에서 철수하여 경상도 지방으로 남하했다. 제1차 진주성 전투(1592년 10월)에서 대패했던 왜군은, 대규모 보복전으로 그 치욕을 씻고 나아가 호남으로 진출할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진주성 공략에 나섰다. 약 10만 명에 이르는 왜군에 맞선 조선측은 성을 비워 희생을 피하자는 의견과 죽음으로 성을 사수하자는 의견으로 양분되었다. 그때 김천일은 “지금 호남은 국가의 근본이고 진주와 호남은 입술과 이의 관계인데, 진주를 버리면 그 화가 호남에 미칠 것이다”라는 논리로 성을 사수하자고 역설했다. 반면에 순찰사 권율, 의병장 곽재우, 그리고 명나라 장수들은 중과부적이라고 판단하고서 성을 버리고 외곽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6⋅7만여 명에 이르는 군민(軍民)은 밤낮 9일 간에 걸친 1백 여 차례의 악전고투를 감당하다 6월 29일 성 함락과 함께 대부분 순절했는데, 이를 제2차 진주성 전투라고 한다. 진주 사람들은 장렬하게 순절한 사람 가운데 대표 3인 김천일⋅최경회⋅황진을 ‘진주 삼장사’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을 위한 제단을 만들어 놓고(제단은 나중에 서원으로 승격) 제사를 지냈다. 아울러 진주 사람들은 성이 무너진 날을 기억하기 위해 강가에서 추모제를 열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남강 유등 축제’로 이어지고 있다.
비록 성을 지켜내지는 못했지만, 왜군의 호남 진격을 좌절시키는 데에 성공하였고, 왜군도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여한 정읍 사람으로 최억룡, 권극평, 민여운, 정운근 등이 보인다. 이 가운데는 최억룡은 화순 출신의 최경회 의병장을 따라가 부장(部將)으로 활약하다 함께 촉석루 아래에서 죽었다. 그의 아들 최논동은 계의의병장 최경장을 따라 함께 순절하였다.
(3) 남원성 전투
임진왜란은 1593년부터 강화 교섭 문제로 소강상태였다. 그때 왜군은 부산 일원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다가 1597년(선조 30) 1월 왜군은 전격적으로 재차 침략을 단행하였다. 이를 정유재란이라고 한다.
왜군은 남해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거느린 조선 수군을 대파한 후 호남과 호서를 석권하고서 북진할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고바야가와를 총대장으로 한 일본 육군은 우키다ㆍ고니시ㆍ시마즈ㆍ하치스카 등으로 구성된 좌군, 그리고 모리ㆍ가토ㆍ구로다ㆍ나베지마 구성된 우군 등 좌ㆍ우군으로 편성되었다. 한편, 도도ㆍ가토요시아키ㆍ와키자카 등으로 구성된 왜 수군은 남해안에 상륙하거나 섬진강을 거슬러 육군과 합세하여 남원 공략에 나섰다. 이들은 광양 섬진에 상륙한 후 하동을 거쳐 좌군의 주력부대와 합세한 뒤 구례 석주관에서 우리의 관군ㆍ의병을 무너뜨리고 영남에서 호남으로 넘어가는 길목인 남원을 향해 쳐들어갔다.
조정은 이원익을 체찰사로 권율을 도원수로 삼아 주요 지역에 지휘관을 보내 대비하게 하였으며, 명나라에서도 재차 원병을 보내 공동연합전선을 펴게 되었다. 당시 아군은 부총병 양원, 중군 이신방, 천총 모승선ㆍ장표 등이 거느린 명군 3천명과 접반사 정기원, 전라병사 이복남, 조방장 김경노, 방어사 오응정, 남원부사 임현, 구례현감 이원춘 등이 거느린 관군 1천 명을 합해 4천 명에 불과했는데, 남원성에 진을 쳤다. 험준한 교룡산성이 아니라 평지 남원성에 진을 친 것은 명나라 장수의 주장에 의한 결과였다.
8월 12일에 우키다가 이끄는 왜좌군은 수군의 엄호를 받으면서 남원성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13일에는 고니시의 주력부대가 도착하니 왜군은 5만 6천여 명의 대병력이었다. 양원은 이신방과 함께 동문을 지키고, 모승선은 서문, 장표는 남문, 이복남은 북문을 각각 지켰다. 전투는 13일 밤부터 시작되어 16일에는 성이 함락되었다. 이복남ㆍ이신방 등을 비롯한 모든 장수들이 전사했고, 양원만이 겨우 성을 탈출했다. 이 전투가 바로 남원성 전투이다. 남원에 있는 만인의총은 이때 순절한 사람들의 무덤이다. 그 옆에 있는 충렬사는 그들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다.
이 남원성 전투에 정읍 출신으로 교룡산성 수어장이던 신호(申浩)가 순절하였고, 신호를 따라갔던 최준ㆍ보의 부자도 순절하였다. 특히 신호는 낙안군수로 있으면서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함께 왜선을 격파하는 공을 세웠다.
3) 실록을 옮기자
조선왕조는 처음에 춘추관, 성주, 충주, 전주 등지에 역사책을 보관하는 사고를 두었다. 4대 사고 가운데 하나인 전주사고는 경기전 안에 ‘실록각’이란 이름으로 있었다. 경기전 안에는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도 보관되어 있었다.
1592년 당시 북상하던 왜군의 일파가 전라도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전라관찰사 이광, 광주목사 권율, 의병장 고경명ㆍ조헌 등은 왜군의 전라도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금산 쪽으로 향하였다. 이때 경기전 안에는 태조에서 명종에 이르는 조선왕조실록과 태조 초상화가 보관되어 있었다. 만약 왜군이 전주에 들어오면 소실될 것이 분명하였다. 이에 경기전참봉 오희길, 태인 출신의 유생 안의와 손홍록, 정읍 영은사의 승려 희묵 등은 사비로 실록과 어진을 전화가 미치지 않을 정읍 내장산 용굴암으로 옮기었다. 때는 1592년 6월 무렵이다.
실록은 다시 아산ㆍ강화ㆍ해주를 거쳐 묘향산으로 옮기어졌다. 손홍록 등은 전주에서 묘향산까지 따라다니며 5ㆍ6년간 어진과 실록을 지켰다. 그때 나머지 사고의 실록은 모두 불타 없어져 버렸다. 1614년(광해군 6)에 무주 적상산성에 실록각을 창건하고서 묘향산의 실록 일부를 옮겨왔다. 이후 적상산사고에는 실록 외에 선원록, 의궤, 잡서 등이 봉안되었으나, 국권 강탈 이후 일제가 그것들을 규장각으로 이송하면서 사고는 황폐화되고 말았다.
4) 고장을 지키자 : 향보의병
앞에서 말한 것처럼, 1597년 정유재란 발발 이후 왜군의 한 그룹은 구례 석주관과 남원성에서 아군을 무너뜨리고서 전주를 거쳐 북상하였다. 그렇지만 9월 6⋅7일 충청도 직산 전투에서 패배한 후, 전라도 방면으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이리하여 왜 육군이 전라도 전 지역에 들어오게 된다.
영광 출신 강항(姜沆)의 간양록에는 9월 14일 왜적이 영광군을 불태우고 산을 수색하고 바다를 훑어 사람을 도살한다고 적혀 있다. 왜장의 종군 승려가 남긴 문서에 따르면, 왜군은 15일 정읍에서 군사회의를 열어 전라도 점령 정책을 짰다. 이는 규슈 사가의 번주 나베시마를 수행한 승려 고레다쿠가 작성한 「高麗陣諸將郡割並ニ陣立人數書出案」이란 문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영광은 무장⋅진원⋅창평과 함께 ‘中國衆’의 관할 구역이었다. ‘중국중’이란 주고쿠 지역, 지금의 야마구치⋅히로시마⋅오카야마 출신의 군소 장수들이란 말이다.
영광에 들어온 왜 육군은 곧장 법성포에까지 들어온 것으로 16일 확인된다. 그때 함평 월악리 정희득 가족이 피란을 가기 위해 영광 둔전포에서 조운선 한 척을 구해서 수리한 후 구수포에 이르렀다. 법성포에 이르러 있던 왜 육군은 이리저리 분탕질을 하다가, 정희득 피란선을 보고서 총을 쏘았지만 배 있는 곳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19일 오후 이순신이 법성포에 도착하니, 이미 육 왜군이 도착하여 인가와 창고 곳곳이 불에 타 있었다.왜 육군은 남쪽 해안 지역에 웅거하기 위해 계속 내려가는 전략이었기 때문에, 법성포에 머물지 않고 곧장 떠나가버렸다. 이리하여 창고를 포함한 법성창의 조운시설도 소실되었던 것 같다.
이때 광주나 고창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한 정읍에 왜군은 9월 15일 전후에 들이닥쳐 갖가지 만행을 자행하였다. 정읍 사람들은 멀리 도망을 가거나, 아니면 이들과 맞서 싸워야 하였다. 그 참상이 눈을 뜨고 볼 수 없었을 것이지만, 아직 구체적인 모습이 보고된 바 없다. 바로 이때 유경인은 아우 성인⋅극인과 함께 우치 등지에서 왜군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이허량은 사현에서, 유윤근은 오봉치에서 각각 싸웠다. 특히 입암산성에 들어가서 장성 출신 윤진과 함께 싸운 이가 적지 않았다. 자기 고장을 지키기 위해 왜군과 싸웠던 사람을 ‘향보의병(鄕保義兵)’이라 한다.
5) 곡식을 모으자
신립 장군의 탄금대 방어선이 4월 28일 무너지자, 선조는 4월 30일 황급하게 피란길에 올랐다. 얼떨결에 빠져나온 데다가 평양⋅의주 쪽 재력도 궁핍하여, 조정은 여러 관리들이나 기관들의 사용 경비를 대 줄 길이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왕실의 식사 제공까지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군병과 양곡이었다. 특히 개전 초기 군량미 사정이 매우 열악하여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이때 민간에서 자원 모집하여 행재소에 바친 곡물을 의곡(義穀)이라 하였고, 의곡을 모으고 운송하여 정부나 관군에 바친 장수를 의곡장(義穀將)이라 하였다. 의곡장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고봉 기대승의 아들인 광주 출신의 기효증(奇孝曾)이다. 기효증의 의곡 모집과 운송 과정에 대한 기록물이 함재근왕록이다.
당시 의곡의 선구적인 지역은 전국 최대 곡창 지대이자 아직 왜군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은 전라도였다.이에 대한 개략적인 사실은 남원 출신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록 1592년 10월 18일자에 나오는데, “들은즉 호남의 의사(義士)들은 행재에 경비가 부족할 것을 생각하여 서로 권면하여 쌀 수만 석을 모아서 의곡이라 이름하여 배에 싣고 수레로 운반하여 평안도로 보내 바치었으니 그 충성이 지극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선조수정실록⋅국조보감의 11월조에 “호남의 사민(士民)이 의곡을 모아 해로를 따라 의주에 수송하였다.”고 하였다. 전라도 사민 또는 의사가 의곡을 행재소에 바쳤다는 사실을 최초로 인정한 정부 측 기사이다.
이때 정읍 사람들도 의곡 행렬에 대거 참여 하였다. 그런 사람으로 송창, 김복억, 김경억, 김후진, 김대립, 김지백, 이수일, 안의, 손홍록, 최안 등이 발견되고 있다. 이들은 양곡을 모아 선박을 통해 의주 행재소에 보내고 각처 의병진에도 보냈고, 명군에게도 곡물이나 옷감을 제공하였다.
4. 맺음말 : 의병의 전통을 이어서
1) 임란의병이 호란의병으로
임진왜란 이후 의병이 다시 활동하게 된 때는 1627년(인조 5) 후금이 압록강을 넘어 침략한 정묘호란이다. 이때 임금은 강화도로 피란을 갔고, 임금을 지키기 위해 평안⋅충청⋅전라⋅경상도 등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정묘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킨 호남 사람은 100명 정도가 확인된다. 이들의 인적 구성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묘호란 시 호남 의병 가운데 이전에 의병을 일으킨 전력을 지닌 사람이 많다. 그 가운데에는 임란 의병 전력과 갑자 의병 전력이 있는 사람이 있다.
임란 의병 전력이 있는 사람으로는 광주 출신의 정민구ㆍ박지효, 보성 출신의 안방준, 무장 출신의 오익창ㆍ김덕우, 고부 출신의 최경행, 전주 출신의 양몽열, 남원 출신의 방원진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김덕우ㆍ양몽열은 이전 이괄의 난 때에도 의병을 일으켰고, 정민구ㆍ안방준ㆍ최경행ㆍ방원진은 이후 병자호란 때에도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갑자 의병 전력이 있는 사람으로는 영광 출신의 신유일ㆍ신응순ㆍ정전ㆍ이홍기ㆍ정제원ㆍ김진, 나주 출신의 이영정ㆍ나해봉ㆍ양만용, 광주 출신의 고순후ㆍ고부필ㆍ박종ㆍ박충렴ㆍ유평ㆍ이덕양, 전주 출신의 김준업, 김제 출신의 유즙ㆍ고봉익, 무장 출신의 강시언, 고창 출신의 유철견ㆍ안진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나해봉ㆍ박종ㆍ박충렴ㆍ유평ㆍ이덕양ㆍ김준업ㆍ유즙ㆍ강시언ㆍ유철견 등은 이후 병자호란 때에도 의병을 일으켰다.
둘째, 정묘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킨 호남 사람 가운데에는 그 친족이 이미 이전에 의병을 일으킨 사람이 많다. 대를 이어 의병활동을 한 사람이 많았다는 말이다.
대표적인 인사가 광주 출신 고순후를 포함한 고씨가 사람이다. 가령, 고종후(고경명 아들)는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하였는데, 그의 아들 고부립은 정묘호란 때에 김장생이 숙부 고순후를 의병장으로 천거하자 모병유사를 맡아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병사와 식량을 모아서 전주에 이르렀다. 강화가 성립되었다는 것을 듣고 세자를 호종하여 여산에 갔다가 돌아와 은둔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도 양만용 등과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고성후는 임진왜란 때에 숙부 고경명을 따라 밖에서 군량을 실어 날랐다. 금산에서의 패전 소식을 듣고 관군과 모은 군량을 가지고 권율에게 나아가 함께 힘을 합쳐 적을 치기로 하였다. 권율이 군량 운반 책임을 맡기니 일을 잘 처리하여 행주에서 대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의 아들 고부민은 정묘호란 때에 의청의 군기유사를 맡아 전참봉 유평과 삼종형 고부립 및 종제 고부필 등 여러 사람과 함께 병량과 군기를 모아 전주에 이르렀다. 이미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것을 듣고 세자를 호송하여 여산에 갔다가 돌아왔다. 병자호란 때에는 뜻을 같이 하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병사와 양식을 모아 청주에 이르렀으나 강화가 성립되었다는 것을 듣고 돌아왔다.
또한 광주 출신의 임란 의병장 김덕령의 동생 김덕보, 박광옥과 의병을 일으킨 유사경의 아들 유술, 의병장으로서 영광 법성포에서 양곡을 모아 의주에 있는 행재소에 바친 기효증의 아들 기정헌 등도 정묘호란 때에 거의 하였다.
이 외에 장성 출신으로 남문 창의장 김경수의 아들 김숙명, 남평 출신으로 임진년에 창의한 송기원의 아들 송격, 영광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에 창의한 정희맹의 아들 정전과 이곤의 아들 이홍겸, 고창 출신으로 장성 남문 창의한 김홍우의 아들 김여성과 서홍도의 조카 서일남 등이 정묘호란 때에 각읍의 소모유사로서 의병을 일으켰다.
정읍 사람 가운데 김제민(金齊閔) 가문 사례도 빼놓을 수 없다. 순창현감으로 있던 김제민은 임진왜란 때 아들 엽ㆍ흔ㆍ안과 함께 거의하였고, 웅치에서 왜군과 전투를 펼치던 중 아들 안과 김제군수 정담이 순절하였다. 그의 손자 김지문ㆍ지영ㆍ지서와 종질 김습이 병자호란 때 창의하였다.
2) 의병활동을 기록으로
임진왜란 때 활약하였던 의병활동을 정리하여 기록으로 남긴 최초의 저작물은 보성 출신의 은봉 안방준이 남긴 호남의록일 것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임란 호남의병에 관한 것이다. 그는 20세 되던 1592년(선조 25)에 스승인 박광전을 따라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박광전은 병 때문에 군사의 임무를 다할 수 없어 진보현감 임계영을 추대하여 전라 좌의병의 대장으로 삼자, 안방준은 거기에서 참모가 되어 군사 전략을 숙의하였다. 특히 안방준은 좌의병진과 체찰사 사이의 연락책 역할을 하였다.
광해군 때에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 우산으로 돌아왔다. 시내 위에 정사를 짓고 또 시내 동쪽에 단을 쌓아 한그루의 소나무와 여덟 그루의 매화를 심었다. 이를 우산전사(牛山田舍)라고 하는데, 그는 여기에 있으면서 「임진기사」, 「노량기사」, 「진주서사」, 「부산기사」, 「삼원기사」, 「임정충절사적」, 「호남의록」 등을 지어 호남 출신의 의병장이나 공신에 관한 충절을 정리하거나 임진왜란의 전개 과정을 기록하였다. 이들 저서는 안방준 자신이 당시 전황을 직접 보고 듣고, 종전 후에 조사한 것을 토대로 임진왜란의 전말과 주요 전투 및 호남 의병의 실상을 객관적이고 치밀하게 서술한 것으로 임진 전란사를 가장 폭넓게 정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유성룡의 징비록과 함께 매우 중요한 사료가 된다. 사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을 이렇게 폭넓게 정리한 경우는 유일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절의사상으로 무장된 애국심과 향토애가 충만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중에서 「삼원기사(三寃記事)」는 김덕령, 김응회, 김대인 등 3인의 의병장이 무고로 억울하게 죽은 내용에 관한 기록이다. 그리고 「임정충절사적(壬丁忠節事蹟)」은 임진왜란ㆍ정유재란 때 순절한 송상현(고부), 김여물, 유극량, 변응정, 이종인, 이잠, 고득뢰, 신호(고부) 등 8인의 충절에 관한 기록이다. 또한 「호남의록(湖南義錄)」은 최경회, 정운, 백광언(태인), 소상진, 황진, 장윤, 김경로, 안영, 유팽로, 양산숙, 문홍헌, 최희립, 강의열, 오유, 오빈, 김인휘 등 16인의 전라도 의병장의 활동에 관한 기록이다.
이처럼, 안방준은 임진왜란 때에 의로운 행동을 한 사람들의 열전을 지어 호남의록이라고 했다. 전라도 선비들은 정묘호란 때 활약하였던 양호 지역 의병들을 정묘거의록에 수록하였고, 병자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킨 전라도 사람들의 기록을 호남병자창의록에 담았다. 정묘거의록에는 60명의 전라도 사람이 등재되어 있고, 호남병자창의록은 모두 5종이나 될 정도로 여러 판본이 출간되었다. 5종 가운데 김영한이 서문을 쓰고, 이승의가 발문을 붙였으며, 4권 3책 구성으로, 남원 명성재에서 1932년에 출판한 호남병자창의록에는 이전 것을 증보하여 전북 인물을 대폭 실었는데 모두 448명의 인물이 수록되어 있다. 호란 의병을 이렇게 다양하게 정리한 사례는 전라도가 전국에서 유일하다.
광주 출신 고정헌은 전라도 출신의 역대 의병들을 방대한 호남절의록에 담았다. 전란 후 포상은 정부가 통치 이념 차원에서 시행한 노력과 함께 전국 사람들의 자발적 노력으로 이루어진 측면도 있었다. 양반들은 유교 윤리를 구현해야 한다는 소명 의식에서, 또는 계급ㆍ문벌의 명예와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좋은 소재라는 측면에서 전란 유공자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였다. 고경명의 후손 고정헌(高廷憲)에 의해 1799년(정조 23)에 출간된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은 그러한 노력의 결정판이었다. 이 책에는 임진왜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이인좌의 난 때에 국난을 극복하다 순절한 호남 출신 유공자 1,460명의 행적을 담았다. 그중에서 임진왜란 관계자가 946명으로 대부분이고, 정묘ㆍ병자호란 관련자가 242명에 이른다. 전쟁이 끝난 지 200년이 지났음에도 그러한 출판 활동을 한 전라도 사람들의 기본 동기와 저력을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이 무렵에는 지역별 또는 가문별 절의록 출간도 줄을 이었다. 고창 출신 김성은(1765~1830)은 자기 지역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 창의한 의병을 기록한 임병창의록을 저술하였다. 장성 사람들은 남문창의록, 강진 사람들은 금릉창의록이라는 책을 간행했다. 창의자 외에 효자⋅열녀까지 포함안 삼강록도 편찬되었는데, 고흥삼강록이나 호남삼강록 등이 있었다. 특정 집안에서도 자기 집안에서 창의한 사람들을 정리한 책을 발간했는데, 장흥의 위백규 집안에서 그리고 보성의 박광전 집안에서 그러한 책을 발간했다.
이렇게 보았을 때, 무엇을 하였느냐도 중요하지만, 하였던 것을 정리하고 의미를 부여하여 후대에 남기는 일도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옛 정읍 사람들의 숭고한 정신과 업적을 정리하는 작업을 동학에만 집중하지 말고 임란ㆍ호란 의병과 항일 의병으로까지 확산하는 데에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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