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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장 하나님, 교회, 사회에 대한 성도의 의무
구속사적 개관
본서 전체를 크게 나누어 볼 때 제 1-8장은 구원론 전반의 원리로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음에 대한 교리적 진술이며, 제 9-11장은 이스라엘의 복음 거부로 인한 이방인의 구원 및 이에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다룬 구원 역사의 기록이다. 그리고 12:1-15:13은 이신득의의 원리에 의해 값없이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써 삶의 전 영역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의 실천, 곧 그리스도인의 윤리(倫理)에 대해 집중 강론하고 있으며, 15:14-16:27은 바울의 로마 방문 계획과 본서를 끝맺는 말을 기록하였다. 이 중 본장은 넓게는 12:1-15:13까지의 일련 기사의 개시 부분이다. 그리고 좁게는 로마 교회가 당면한 실제적인 문제인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갈등 해결을 위한 해결책을 직접 제시하기에 앞서 기독교 윤리관에 관한 전반적인 사실들로서 기독교 윤리의 기초와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인 삶의 주요 장(場)이 되는 교회, 사회 안에서의 윤리적 자세와 비록 이 세상에 속한 존재는 아니라 할지라도 여전히 이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자로서 마땅히 갖게 되는 두 가지 신분, 곧 국민으로서 갖는 위정자에 대한 의무와 시민으로서 갖는 이웃에 대한 의무에 대해 기록한 두 장(제 12,13장) 중 그 첫 번째 장이다.
이런 맥락 하에 본장을 좀더 상술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1,2절은 기독교 윤리의 기초는 성도의 삶 전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 곧 영적 예배가 되도록 하는 것이며, 모든 윤리적 행위의 기준은 이 세대(世代)가 자신의 육적인 욕망에 따라 마음대로 살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행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 3-13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실천의 첫 번째 장(場)이 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 곧 교회(헬, 에클레시아) 안에서의 성도의 삶의 기본적인 자세로서, 먼저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다는 지체 의식을 가져야 하며(3-5절), 또 각각 다른 지체로서 자신의 은사에 따라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하며 최선을 다해야 하며(6-8절), 수평적인 면에서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과 수직적인 면에서의 주님을 향한 경건 생활 및 선을 행함에 있어서 열심을 가져야 함(9-13절)을 교훈하고 있다.
끝으로 14-21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실천의 두 번째 장(場)이 되는 사회 속에서의 성도의 삶의 기본적인 자세로서, 자신을 핍박하는 원수이든 아니면 동료이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며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교훈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의 윤리적 교훈들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상고해 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속사적 교훈들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1,2절에서 그리스도인의 윤리에 있어 가장 중요하며 윤리적 기초가 되는 사실은 어떤 외적인 형식이나 모양이 아니라 과거 육에 속하여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고 천국 구원에 이르게 된 상태에로의 변화, 곧 삶의 본질에 있어서 완전한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엡 2:1-10). 과거 육에 속하였을 때의 죄인의 행동 양식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며 그분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었으나 이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구원에 이르게 된 성도의 행동 양식은 행동 하나 하나에 있어서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생각하고 실행하는, 곧 삶 전체가 하나님께로 향해 방향 지워져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삶의 본질적인 변화가 윤리적 행동 양식을 전혀 새로운 것으로 가져오게 한 것이다.
둘째, 3-13절에서 윤리적인 기본자세에 관하여 그리스도인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무조건적인 용서를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 죄로 말미암아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던 존재들이 아무 공로 없이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죄 사함 받고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기에 이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이 믿는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 용서와 사랑을 베풀고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또한 하나님의 의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이다.
셋째 14-21절에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 받았으므로 이제 더 이상 죄 아래 굴복치 아니하고 악과 대적하여 싸우기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악'이라 함은 궁극적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탄의 궤계를 가리킬 수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 불화케 하고 악을 도모하게 하는 모든 행위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21절)는 말씀은 윤리적인 실천 방법에 있어서 조차도 선해야만 그리스도인이 진정 하나님의 의를 나타낼 수 있음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목적만 선하면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과정은 어떠하든지 상관치 아니하는 인본주의적 세속 윤리관과는 전혀 상반되는 윤리관이다. 즉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기독교 윤리는 그 목적뿐만 아니라 그 동기와 방법 및 과정에 있어서 조차도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할 만한 선한 것이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한편 우리 자신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얼마만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죄 사함 받고 구원받은 사실을 생각하며 그 은혜에 보답하는 심정으로 살고 있는가? 과연 우리 자신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지고 있는가? 내 원수까지도 저주하지 아니하고 축복하며 선으로 악을 이기기 위해 힘쓰고 있는가? 깊이 반성할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이 과연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로서, 또 그 은혜에 감사하며 마땅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할 자로서의 삶인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외울 말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하나님께 대한 성도의 의무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교회에 대한 의무
3 ○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사회에 대한 성도의 의무
14 ○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본문 & 자료노트
보감-12:1,2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새 생활
1.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난 삶(요 3:3: 벧전 1:3-23)
2. 예수님의 은혜로 풍성한 삶(요 10:10; 엡 1:7)
3. 그리스도 중심의 삶(요 15:5; 엡 4:17-24)
4. 주가 주신 기쁨이 충만한 삶(요 15:11; 빌 4:4)
5.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요 17:4; 고전 10:31)
6. 전적으로 자신을 헌신하는 삶(롬 12:1,2)
7.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삶(갈 5:13-15)
8.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삶(갈 5:22-25)
9. 성령 충만하여 방탕하지 않은 삶(엡 5:18)
10. 성경을 사모하며 따르는 삶(딤후 3:16,17; 벧전 2:2)
원어연구-12:2, 새롭게 하다
여기에 쓰인 헬라어는 '아나카이노오'( )이다. 여기서 '카이노오'는 종류나 특성, 혹은 양식에 있어서 '새로운', '특이한'이란 뜻의 형용사 '카이노스'( )에서 파생된 것으로 '새롭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카이노스'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 단어로는 '네오스'( )가 있다. 이 두 단어는 후기에 이르러 거의 동일한 개념을 지닌 것으로 사용되었으나 원래는 서로 구별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즉 '카이노스'는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질적으로 새로운 것, 곧 과거의 것보다 더 훌륭한 어떤 것을 나타낸다. 반면에 '네오스'는 아직 없었던 것, 이제 막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을 뜻하는 시간적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헬, 아나카이노오)은 과거의 타락된 생각과 헛된 욕심을 버리고 전혀 질적으로 새로운 생활로 변화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네오스'와 같이 과거에 없었던 것이 새롭게 생겨난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생활의 질적인 변화는 스스로의 결심이나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본문의 단어에서 접두어 '아나'( )는 '다시'(again)라는 뜻도 있지만, 원래 '위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아나카이노오'는 율법적인 방법이나 인위적인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위로부터 부여받아 새롭게 변화되는 것을 가리킨다.
보감-12:11 하나님께 대하여 성도가 열심을 품고 해야 할 일
1. 하나님을 사랑함(마 22:37)
2. 하나님 영광을 위한 일들(고전 10:31)
3. 하나님을 의지함(욥 13:25)
4. 하나님을 사모함(시 42:1,2)
5. 하나님에 대해 앎(호 6:3)
6. 하나님을 섬김(롬 12:11)
7. 하나님께 대한 헌신(딤후 2:15)
8. 하나님께 나아감(히 11:6)
9. 말씀 청종과 묵상(겔 33:31)
10. 기도(고전 14:15)
11. 복음 전파의 명령 수행(행 1:8)
12. 선을 행함(약 2:26)
신학용어-12:10,16 성경적 겸손
삿 8장 자료 노트 참조.
주요 주제-12:6-8 은사의 이해
고전 12장 연구 자료 참조.
보감-12:7,10-13 성도 상호간 섬김의 자세
삼하 17장 자료 노트 참조.
보감-12:14-21 이웃에 대한 성도의 태도
1. 핍박하는 자를 축복함(14절; 벧전 3:9)
2.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함(14절; 마 5:44)
3.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눔(15절; 잠 17:5)
4. 서로 마음을 같이함(16절; 롬 15:5)
5. 겸손하게 행함(16절; 롬 11:20)
6. 지혜 있는 체하지 않음(16절; 잠 3:7)
7. 악으로 악을 갚지 않음(17절; 벧전 3:9)
8. 선한 일을 도모함(17절; 살전 5:15)
9. 화평을 도모함(18절; 막 9:50)
10. 긍휼을 베풂(27절; 잠 25:21)
12:1-2 하나님에 대한 성도의 자세
제 9-11장은 삽입 부분으로서 유대인의 구원 문제 중심으로 인류 구원 역사 전개에 대해 언급하였었다. 이제 제 12-16장에서 바울은 기독교 구원론에 관한 전반적인 사실에 대해 기록한 제 1-8장에 이어 구원받은 성도에게 마땅히 요청되는 실천적인 측면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대부분의 바울 서신이 그러하듯이 본서도 전반부(1-11장)의 교리 설명과 후반부(12장-15:13)의 실천적 권고로 나누어진다. 본문은 그러한 실천적인 권고의 서론 부분으로, 모든 실천적 권고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 앞에서의 성도의 자세에 대해 교훈하고 있다.
즉 본문에서 바울은 성도에게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릴 것을 권면한다(1절).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몸은 단순히 육체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우리의 육신 뿐 아니라 마음과 의지까지도 포함된다. 즉 이미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의 몸은 성령께서 항상 내주하심으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는데, 이러한 몸을 우리가 온 맘과 정성을 다하여 전적으로 헌신할 때에 성도의 삶 전체가 거룩한 산제사가 되는 것이다. 성도의 삶 전체가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가 된다고 할 때에 실상 본문 이하에서 다루게 될 다른 윤리적 실천들은 이미 온전히 실행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렇게 성도의 삶 전체가 거룩한 산제사가 되도록 하는 방법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다(2절). 여기서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는다는 것은 삶의 완전한 전환을 의미한다. 즉 예전의 죄된 생활에서 가졌던 습관이나 성품, 악한 생각과 행동들을 모두 버리고 영적으로 새롭게 되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대를 본받아서는 안 된다. 즉 세상에서 중요시하는 권력이나 명예 등에 가치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신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좇아 행하고 육신의 일을 버려야 한다(롬 8:4-6). 만약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의지와 계획대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뜻은 결코 분별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는다.
① 성도된 우리는 마땅히 자신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 여기에는 전적인 헌신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그럴 때에 구원의 은혜를 얻은 우리의 날마다의 생활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예배가 될 것이다(왕하 23:3).
② 세상의 가치들을 좇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가치들은 인간의 탐욕을 불러일으키어 하나님과 멀어지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려진 우리의 삶은 오직 주의 뜻을 분별하고 그것에 소망을 두어야 할 것이다(딤후 2:4).
③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날마다의 실천적 노력이 필요함을 자각해야 한다. 즉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시 51:10).
12:1 그러므로. - 이 접속사는(운) 바울에게 있어 특징적인 표현으로 앞선 교리적 부분을 받아 실제 생활적 측면으로 전환할 때 흔히 사용되고 있다(엡 4:1; 딤전 2:1). 그런 의미에서 본절에 있어서도 이것이 바로 앞의 절을(Meyer) 혹은 11장(Sanday & Headlam), 9-11장(Schlier)을 받는다는 주장도 있지만 보다 폭넓게 1-11장 전체를 받는다고 보는 것이 좋다(Murry, Cranfield, Alford, Benny, Wuest).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음에 관한 앞부분의 기술의 결론으로서 성도가 생활 가운데서 실천할 일들을 밝히는 도입부인 것이다.
형제들아. - 초대 교회 성도들 간에 통용되던 호칭임과 동시에 아직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지체로서의 로마 교회 성도들에 대한 바울의 사랑이 드러나는 호칭이다. 롬 1:13; 7:1; 8:12; 10:1 주석들을 참조하라.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 '권하노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칼로'( )는 '간곡하게 청한다', '권면한다'는 뜻으로 본래 고전 헬라어(Classical Greek)에서는 출전하는 군인들을 위로한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바울의 형제로서의 부드러운 요구와 더불어 사도적 권위에 근거한 권위적 요청이란 뉘앙스도 가지고 있다(Hichel). 더구나 이 동사가 문두에 위치하고 있어서 1-11장의 교리적 설명과는 다른 12-16장의 '권면적 특징'을 암시하기도 한다(Hendriksen). 바울의 이 권고의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이다. 여기서 '자비하심'(오이크티르몬)은 복수로서(고후 1:3; 빌 2:1; 히 10:28) 히브리어 성경에서 이에 대응하는 '라하밈'( )이 복수형태로 사용된 것을(삼하 24:14; 대상 21:13; 시 25:6; 40:11; 51:1)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Dunn. Lietzmann). 이것을 개역 성경은 '모든 자비하심'이라고 강조적 형태로 번역했다. 또한 이러한 복수 형태는 성도의 선택, 부르심, 칭의, 성화, 영화에 계속하여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은혜들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Wuest).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 '너희 몸'이란 헬라적 개념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이분법적 사고의 유형인 '영'과의 대조를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도의 육신은 이미 그리스도의 지체요(고전 6:15) 성령의 전(고전 6:19)으로서 영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는 2절의 '마음'과 더불어 양자가 다 '인격 전체'로서 '너희 몸'이란 '너희 자신'(yourselves)을 뜻한다(Calvin, Hendriksen). 이처럼 살아있는 인간의 '몸'은 영과는 분리될 수 없는 본래부터 인간의 인격 속에 있는 하나의 완전한 요소로(창 2:7,21-23) 장차 있을 우리의 구속에는 반드시 몸의 부활이 따를 것이다(롬 8:23; 고전 15:54-56; 빌 3:21, Murray). 그러나 본절의 '산제사'라는 표현 때문에 '몸'을 인간의 육신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Wuest, Käsemann). 하지만 지금 바울이 언급하는 제사는 구약 시대처럼 어떤 동물의 생명을 드린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면(히 13:15,16; 벧전 2:5, Bruce) '몸'은 인격 전체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산제사'에 신자가 드려야 할 것은 죄의 형벌로 죽은 상태에서 '살아난' 중생한 몸인 것이다. 즉 신자 속의 새 생명의 삶을 드리는 것이다(Mendriksen). 아울러 '산'(조산)이란 현재 분사로 사용되어 현재도 '살아있는'이란 의미로서 이 제사의 영구성, 즉 계속적 헌신이 성도의 삶에 수반되어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hurray). 한편 거룩의 개념은 하나님(신)을 위해 따로 성별(聖別)된 것을 뜻 하는데, 이러한 개념은 헬라 세계에서 이교 숭배에도 적용되었다. 하지만 이 용어(하기오스)는 신약적 의미에서는 죄로부터의 해방의 개념을 추가한다. 이것은 바로 죄로부터는 절대 자유로우신 하나님의 속성이기도 한 것이다(Wuest). 따라서 바울이 '거룩한' 제사를 드리라고 하는 것은 이교 사회에서 생활하며 그들의 악습적인 제사(성적 타락이 수반된)에 익숙해 있는 자들에게 이러한 죄로부터 벗어난 기독교적인 참된 삶을 제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거룩한 제사야말로 거룩하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받으시는 것이다.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 '영적'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로기켄'( )은 문자적으로는 '합리적인'(rational), '합당한'이란 뜻이다. 바울이 이러한 표현을 여기에 사용하는 것은 '산제사'라는 표현 속에 이미 '영적인'(spiritual)이란 의미가 함축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이를 전제로 하며 이방인의 미신적 예배와 구분하여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예배를 보다 강조적으로 제시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Calvin, Betz, Cranfield, Thayer, Vincent, 1(nr, Berkeley version). 한편 이 표현이 본절 외에 유일하게 사용되는 벧전 2:2을 고려한다면 개역 성경과 같이 '영적'(spiritual)이라는 번역이 더 합당하다고도 볼 수 있다(Bruce, Denny, Hendriksen, RSV, NIV). 이러한 해석법을 취한다면 본문은 구약의 의식적인 예배와는 구분되는 영적 예배를 강조하는 것이 된다. 한편 '예배'에 해당하는 헬라어 '라트레이아'( )는 본래 70인역(LXX)에서는 레위기법 규정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게 된 직무'를 가리켰고 히 9:6에서는 신성한 직무를 수행하는 제사장의 일에 사용되었다(Wuest). 그러나 여기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주님을 섬기는 삶에 강조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이 단어는 '예배'(worship, RSV)란 번역과 더불어 '섬김'(service, KJV)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 '세대'(아이오니)란 요한복음에서 특징적으로 사용되며 '세상'(요 6:14; 8:23) 또는 '세계'(고친 4:9; 히 11:2; 113)로 번역되어 주로 공간적인 의미를 지니는 '코스모스'( )와 유사한 용어이나 바울에게는 특히 장차 올 시대와는 구분된 현세를 의미하는 종말론적 뉘앙스가 함축되어 있다(고전 1:20; 2:6; 3:18; 고후 4:4; 갈 1:4). 하지만 여기서 이 표현은 종말론적 시간 구분이라기보다는 말세를 만난 성도들이(고전 10:11; 벧전 1:20) 겪는 시대상황 혹은 시대정신을 의미한다. 즉 본절에서는 종말을 사는 성도들이 겪어야 하는 비 신앙적 사상과 견해들, 충동 등을 가리키는 추상적 용어로 사용되었다(Trench, Bengel). 한편 '본받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스케마티조'( )는 '어떤 것으로부터 형성하다'(to form after something)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어떤 행위의 양상(mode of conduct)을 모방하는 것을 가리킨다(Godet). 성도들은 비록 악한 시대상황 속에 살고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존재임을(고후 5:17) 자각하고 마귀가 왕 노릇하는 악한 시대의 흐름에 동화되어 변질된 신앙에 떨어져서는 안된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 여기서 '마음'(누스)이란 1절의 '몸'과 같은 의미로 보는 것이 좋다. 즉 인간의 지적 능력이나 도덕적 능력 등을 포함하는 '전인격'을 뜻한다. 한편 '변화를 받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타모르푸스데'( )는 본래 외모의 변화를 의미하는 표현이다(마 17:2, transfigure, Moulton & Howard, A Grammar of New Testament Greek, p. 313). 그러나 이 단어가 고후 3:18에서는 신자들이 영이신 주의 사역으로 한 단계 더 영광스런 모습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표현에 사용된 것을 고려하면(Bruce) 이 용어는 '내적 본성(inmost nature)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Sanday & Headlam). 즉 이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자의 내적 본성이 지금까지 마귀의 악한 세력의 지배를 받았던 것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롬 11:33,34에서 하나님의 신묘불측함을 서술한 바울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뜻에 관해 세 가지 형용사를 연속적으로 서술하여 그 의미를 강조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전자가 지적인 측면을 강조하였다면 여기서는 다소 윤리적인 측면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반영된 신적 속성을 표현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선'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9,21절; 롬 13:3)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윤리적 기준이다. '기쁨' 또한 같은 맥락으로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피조 세상에 실현될 때 수반되는 기쁨을 가리킨다. 그리고 '온전함'도 하나님의 윤리적 완전함의 속성에 근거해 성도들이 추구하여야 할 윤리적 실천 방향(마 5:48)의 기준이 되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하나님의 무한성을 제시해 준다. 한편 '분별하도록 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키마제인'( )은 '시험을 통해 입증함으로 수납하다'(accopt as approved after testing, Rienecke)의 뜻이지만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시험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는 뉘앙스는 물론 배제된다(Murray). 오히려 이 동사는 성도들 자신의 삶을 시험대에 올려놓아서 그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의 여부를 확인한다는 의미를 가진다(Wuest). 제시된 동사가 부정사(infinitive)로서 '~으로'란 뜻을 지니는 '에이스'( ) 전치사를 동반한 것은 '결과'(result)의 의미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Moulton & Turner, A Grammar of New Testament Greek Ⅲ. p. 143).
12:3-13 교회 안에서의 성도의 자세
구원받은 성도에게 마땅히 요청되는 실천적 권면들을 기록함에 있어서 가장 기본되는 사실로서 성도의 삶 전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가 되어야 함을 증거한 서론 부분(1,2절)에 이어 본문은 성도의 삶의 현장 중 가장 중요한 교회 안에서의 삶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먼저 교회 안의 모든 성도들에게는 각자 그 믿음의 분량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있다는 사실과 그 은사대로 모든 성도들이 서로 지체의식을 가지고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을 충실히,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실행할 것을 권한다(3-8절). 즉 성도들은 다른 지체를 섬기는 마음으로 예언하고 가르치며 권면과 위로를 베풀고 성실과 즐거움으로 구제하며 부지런함으로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각기 다른 은사를 부여하신 것은 그들 각자를 높이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겸손함으로 서로 협력하여 연약한 부분을 보완함으로 성도를 온전케 하고 그리스도를 높이는데 목적이 있다(엡 4:11,12). 이와 관련해서 은사에 대해서는 고전 12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성도 간에 가져야 할 삶의 자세에 대해 언급하는데, 먼저 그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사랑을 가질 것을 권하고 있다(9절). 이어 가족처럼 사랑하고 존경할 것과(10절), 성도 개개인이 주님을 섬기는 데 부지런하고 열정적일 것(11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어려움을 이기며 기도할 것(12절), 생활이 어려운 가난한 성도들을 실질적으로 도울 것(13절) 등을 권면한다. 이러한 바울의 권고는 로마 교회 교인들 뿐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교회의 지체들인 전 신약교회의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매우 실제적인 교훈이 준다.
따라서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의 교훈을 얻는다. ① 모든 성도는 그 믿음의 분량에 따라 하나님이 각양의 은사를 주신 만큼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그 은사들을 최대한 발휘하여 사용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각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신 목적이다. 우리들은 과연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들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② 받은 직분에 대하여 충실하되 그 일을 행하는 마음 자세 또한 매우 중요하다. 외면적으로 열심히 봉사한다 할지라도 그 마음에 불평과 불만족이 가득하고 성실과 즐거움이 없다면 그것은 온전히 주께 영광 돌릴 수 없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고후 9:7). ③ 성도 간의 모든 일은 사랑을 기초로 해야 한다. 사랑이 없이 행하는 모든 일에는 진실이 있을 수 없고 또 그렇게 해서는 다른 성도들에게 아무런 감동을 줄 수 없다. 거짓 없는 사랑만이 신앙을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고전 13:1,2).
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 롬 11:13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바울은 여기서도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이 사도직의 권위에 근거한 하나님이 부여하신 영적 은혜로 말미암음을 강조한다(Bruce, Calvin). 이렇게 자신의 사도직이 은혜에 기인한다는 주장은 다른 사도와는 달리 승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사도로 부름 받은 바울의 특징적 주장으로(롬 1:5; 15:5; 고전 3:10; 15:9,10; 갈 1:1; 2:9) 그는 이 사도직을 자신의 복음 전파하는 소명(calling)으로 인식했기에(롬 1:5; 갈 1:1, 특히 롬 1:14; 고전 9:16) 그 은혜를 반드시 전해야 한다는 의무감을(엡 3:8; 골 2:2) 가지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는 고전 9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 사도 바울은 복음을 선포하는 대상을 '너희중 각 사람'으로 밝힌다. 이는 본서의 수신자인 로마 교인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지금부터 말하려는 교훈이 적용됨을 강조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이다(Metier, Wuest). 뿐만 아니라 여기서 '말하노니'(레고)는 1절에 나오는 '권하노니'란 말보다 훨씬 권위를 지니는 표현이다. 즉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부여받은 사도적 권위를 사용하여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실천해야 할 바를 강권하고 있는 것이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 본절부터 8절까지는 성도들의 공동생활에 대한 권면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바울의 첫 교훈이 '자기 분수를 지키라'(Alford)는 것이라는 점은 의미가 깊다. 어쩌면 바울은 본서의 1차 수신자인 로마 교회를 가본 적이 없지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등 여러 사람들을 통해 그 교회의 상황에 정통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16장에 열거된 인명들을 참조하라). 그렇다면 본절을 통해 당시 로마 교회에서 자기 분수를 지키지 않음으로 인하여 야기된 혼란의 상황을 대체로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이 구절에 나타나는 네 개의 동사들은 모두 '생각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네오'( )를 가지고 언어유회(word play)를 함으로써 문학적 기교를 보이고 있다. 즉 '그 이상의 생각을 품다'의 '휘페르프로네인'( ), '생각할'의 '프로네인'( ) 그리고 '지혜롭게'의 '소프로네인'( ), '생각하라'의 '프로네인'( )이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언어 유회는 바울이 본절에서 분에 넘치는 생각을 품지 말 것을 특히 강조하기 위함이다. 또한 앞부분에서 '각 사람에게' 교훈을 들으라고 강조한 바울의 의도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이라는 표현 속에도 반영되어 있다. 즉 지혜로운 생각은 하나님께서 개개인 신자들에게 획일적이지 않고 인격적으로, 그리고 중요하게 부여하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분량'에서 '믿음'이란 본서의 교리 부분에서 언급된 죄인인 인간으로 하여금 의롭다 인정함을 받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새롭게 변화된 사람의 영적인 능력 혹은 성향으로 4절과 6절에서 묘사하는 '직분' 혹은 '은사'와 연결되는 개념이다(Bruce, Murray, Wuest). 즉 이는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5,2,1 달란트를 받은 사람과 같이 각 사람에게 다르게 주어지는 영적 능력을 가리킨다(마 25:15). 또한 이 '영적 능력으로서의 믿음'을 자신에게 주어진 대로 인식하는 것이 바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지혜롭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프로네인'( ) 동사 자체가 '겸손'과 '자제'의 의미를 내포함으로써 과분한 것을 자제하는 '적절성'(proper measure)이란 뜻을 함유하고 있다(Godet). 즉 본절은 분량 이상의 생각을 품는 교만을 경계하고 겸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지체인 성도 상호 간에 능동적으로 협력해야 함을 교훈한다.
12: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 헬라어 원문에는 '왜냐하면'이란 의미를 지닌 '가르'( ) 접속사가 본절 문두에 쓰임으로써 본절이 앞절의 이유를 설명해 준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한편 '지체'에 관한 비유는 바울에게 매우 통상적인 것일 뿐 아니라(고전 12:12-31; 엡 1:22,23; 4:5,16; 골 1:18 등) 고대 근동 문화권에서도 매우 흔한 것이었다. 또한 본절에 나오는 '많은'(폴라)과 '모든'(판타)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어 교회에 있어 다양한 구성원이 다양한 직분을 맡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직분'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랔시스'( )는 '행동', '실천'(practice), '기능'(function)의 뜻을 가진다. 이는 앞절에 나오는 '믿음의 분량'과 연결되는 개념으로(엡 4:7), 이것은 성도들 개개인 거의 모두가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니므로 각자에게 부여된 임무가 다를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표현은 고전 10:17; 12:27에도 나타나는 개념으로 신자들의 통일성을 강조한다. 즉 고린도전서와 본서에 나타나는 지체 비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합된 지체들의 상호 보완성과 더불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형성된 우주적 교회의 유일성이 강조되고 있다(Hendriksen).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그랜드 종합 교리, 교회론 '교회의 통일성' 부분을 참조하라. 또한 이러한 모습이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는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하는 관계로 묘사되고 있다(엡 1:22,23; 4:15,16; 골 1:18).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 개역 성경의 번역에서 생략된 헬라어 '카드 헤이스'( )는 '개별적으로', '각자'라는 뜻이다(Vincent). 이는 교회란 공동체 전체가 아니라 그 구성원인 각각의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연합함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러한 연합은 그리스도의 생명과 유기체적 연합으로써 죄인인 인간이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구원에 이르는 근거가 된다. 이에 대해서는 롬 5장 연구자료 '대표와 연합의 원리'를 참조하라. 한편 바울이 특히 이 문맥에서 염두에 두는 것은 성도들의 공동체에서의 투철한 지체 의식이다. 3절부터 시작하여 8절에 이르기까지 각 절마다 강조하고 있는 공통적 관심이 바로 그것이라는 점에서 당시 지체의식을 가지고 용사하는 마음이 부족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로마 교회에 대한 바울의 애타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 '은혜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텐 카린'( )을 직역하면 '은혜를 따라'로서 '은사'가 주어지는 기준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지적해 준다. 여기사 '은혜'(카리스)란 바울의 특징적 용어로 '하나님의 값없는 사랑'을 가리키고, 본서에서 뿐만 아니라(롬 1:5) 바울의 서신 전편에서 그가 받은 사도직의 직분 혹은 소명(calling)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또한 이는 동일한 어근의 용어 '은사'(카리스마)와 연결되는 개념이다. 이 '은사'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도록 하는 탁월한 능력'으로(Thayer) '직분'(4절)의 개념을 포괄한다. 이 '은혜'에 따른 '은사' 혹은 '직분'은 개인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교회의 공적 유익을 위한 것이며 바울이 이제 언급할 것들도 그러한 측면에 강조점이 있다. 한편 은사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는 고전 12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각각 다르니. - '지체'가 많지만 각각 다른 일을 함으로 유기체적인 몸을 이루듯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에게 주어진(4,5절) 은사 역시 각각 다르다. 그렇다고 하여 '각각 다르다'(디아포라)는 표현이 동일한 은사가 없이 모든 성도들이 저마다 다른 은사를 가진다는 표현은 아니다. 한편 본절 이하에 언급되는 입곱 가지의 은사와 고린도전서 12장에 나타나는 은사들의 기본적인 유형들이 바울 당시의 일반적인 은사들이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언급된 은사들 외에도 교회의 유익을 위한 성령의 인도에 따른 다른 은사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 본래 예언의 은사 혹은 예언자의 직분은 고전 12:28에 의하면 사도의 직분 다음 가는 중요성을 지닌다. 그러나 바울이 사도의 직분을 배제 혹은 생략하는 이유는 당시 로마에는 사도가 없었기 때문이며(Murray), 또한 고린도 교회와 같은 사도권 논쟁이 로마 교회에 발생하지 않았기에 언급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바울 당시의 '예언'(프로페테이아)이란 1차적으로 예언자 자신의 직관이나 학습에 의한 것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특별한 계시'를 언급하는 것이다. 즉 예언자들은 그들의 메시지를 성령에게서 받았던 것이다(행 11:27, 28; 21:1). 또한 이 예언은 단순히 미래적인 일을 예고(predict)한다는 의미에 한정되지 않고 위로, 권면, 판단, 교훈 등의 개념도 포함하고 있다(고전 14:3,31, Hendriksen). 따라서 이 직분은 교회에서 선포되던 설교와도 연관되므로 교회 내의 직분 중에서 우위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고전 12:29; 엡 4:11). 한편 '분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날로기아'( )는 70인역(LXX)에서도 드물고 신약에서는 여기에만 나타나는 용어로서 고전 헬라어에서는 '휘페르'( )와 더불어 수학적 비율을 의미했다(Vincent, Murray). 여기서도 '비율'(proportion)의 의미로 쓰였다고 볼 수 있으며, 특히 '규범과 한계'란 뉘앙스를 함축한다(Meyer). 즉 예언할 때는 그 자신의 믿음의 한계 안에서 도가 지나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교회 생활에서의 일반적인 지침을 말할 때 언급했던 '믿음의 분량'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믿음의 분량'이나 본절의 '믿음'의 의미에 대해서는 3절 주석을 참조하라.
12: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 '섬기는 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니아'( )는 본래 '다른 사람에 대한 봉사(service)로 행해지는 개인적인 사역(personal ministry)을 가리켰는데(TDNT), 성경 가운데는 다양한 의미의 용례들이 나타나고 있다. 즉 음식을 준비하는 일(눅 10:40), 말씀을 전하는 일(행 6:4), 화목케 하는 일(고후 5:18)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용어들은 본절의 '디아코니아'와 동일한 어근을 가지며 1세기 교회에서 널리 알려지고 교회의 직분으로 시행되어 오던 집사 직(디아코노스)을 염두에 둔 표현임이 틀림없다(Cranfield, Meyer). 이들은 실제로 사도의 일을 제외하고는 다양한 일들을 하였다(Moule). 이러한 사실에서 암시받을 수 있듯이 이 은사는 특히 실제적인 행동을 통해 그 진가를 드러내므로(Trench) 본문은 하나님이 그에게 설정해 주신 영역 속에서 실제적으로 섬겨야 함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Wuest). 즉 이들 역시 기본적인 은사의 활용 원리대로(3절) 믿음의 분량대로 자기에게 주어진 직분을 성실히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 '가르치는 자'란 구체적으로 지적하지는 않지만 고전 14:6이 지적하는 대로 '계시-예언'에 상대되는 '지식-가르치는 것'과 관계된다. 즉 직접적인 계시는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이미 주어진 '기록된 계시'는 늘 존재하므로 그 말씀을 체계적으로 해석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바로 이 '가르치는 자'가 한 것으로 보인다(Hendriksen). 이 은사는 말씀의 '선포'(케뤼그마)를 담당한 '사도'의 직분과는 구분되는 초대 교회의 교사들이 주로 감당했던 것으로 이들을 통해서 교회가 형성되고 양육되었던 것으로(롬 15:4; 딤전 4:16; 딤후 3:16) 추측할 수 있다. 이 은사를 가진 자들은 역시 다른 은사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은사와 관련된(전문적인)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특히 이들에게 요구되는 바는 기록된 말씀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이며, 조심해야 할 바는 말씀을 억지로 풀거나 사사로이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진리를 발견하며 가르쳐야 했다(벧후 1:20,21).
12: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 '권위하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파라칼론'( )은 '권면하다', '위로하다'라는 뜻의 동사 '파라 칼레오'( )의 현재 분사형이다. 이 은사는 예언하는 것과는 판이하며 가르치는 것과는 다소 가까운 것으로서 성도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서 선포된 말씀을 적용하며 복종하도록 장려하고 권고하는 일을 말한다. 구체적인 언급은 없으나 아마도 공적인 가르침 속에서도 나타날 수 있고(행 13:15, Hendriksen) 대개는 교회 생활 가운데의 양육과 교제 속에서 이 은사가 활용되었을 것이다(행 15:21,32; 16:40). 따라서 이러한 직분을 맡은 자는 다른 성도의 사정을 잘 알며 깊은 사랑을 가지고 그들이 당면한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 '구제하는 자'(호 메타디두스)의 일은 7절의 '섬기는 일'과도 연관될 수 있으나 여기서는 아마도 개인적인 자선을 의미하는 듯하다(Godet, Murray, Hendriksen). 예루살렘 초대 교회 공동체가 재산을 공유(共有)하였던 적도 있었으나 늘 그랬던 것은 아니며 또한 이방인 교회들 가운데서는 더군다나 그런 경향이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구제함의 원리가 되는 '성실함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하플로테티'( )는 '순진함', '단순함', '성실함'을 의미하지만 약 1:5에서는 '관대하게'라는 의미로 번역되어 후히 주시는 동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면 여기서도 자비와 관용의 태도로 자신의 재물의 축남에 구애되지 않고 넉넉하고 후하게 주는 모습을 가리킬 것으로 보인다(Thayer). 이처럼 후한 구제에 대해서는 고후 8:2; 9:11,13; 엡 6:5도 참조하라. 한편 KJV가 이 단어를 '단순성'(simplicity)으로 번역하는 것은 감추어진 동기가 없는 순수한 마음에 강조점을 두었기 때문으로 보인다(Hendriksen).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 '다스리는 자'(호 프로이스타메노스)라는 용어 는 '앞에'(프로)와 '선 자'(히스테미)의 분사형의 합성어로서 '감독'이나 '장로' 등 교회의 치리(治理)와 운영의 책임을 맡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이에 대하여는 고전 12:28의 다소 다른 표현 '퀴베르네시스'( )와 더불어 딤전 1장 연구 자료 '교회의 직분'을 참조하라. 한편 이들 다스리는 자들의 체제는 대개 교회마다 복수의 형태를 초기부터 보이는 것이 특징적이다(행 15:2,4; 16:4; 20:17,28; 딛 1:5; 히 13:7). 한편 이들에게 특히 요구된 것은 '부지런함'(엔 스푸데)인 데, 이와 동일한 단어가 마 6:25에서는 '급히'라는 뜻으로 쓰였다. 즉 이 단어 속에는 서두름, 열망, 노력함, 부지런함 등의 개념이 들어 있다(Wuest). 이처럼 교회의 지도자에게는 자신에게 맡겨진 주의 교회의 올바른 성장을 위해서 반드시 이러한 근면함과 도덕적인 긴장이 필요하다(Benny).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 '긍휼을 베푸는 자'(호 엘레온)란 금전적인 구제가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봉사로써 자비를 베푸는 은사를 가진 자를 말한다. 이처럼 초대 교회부터 교회는 환난을 당하며 곤고한 자리에 있는 자를 직접 찾아가 돕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였다. 한편 '즐거움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힐라로테티'( )란 우울함이나 억지가 없이(Calvin) 기쁨과 상냥함으로 상처받고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어루만져 위로하는 태도를 가리킨다(Vincent).
12: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교회를 구성하는 지체들의 다양한 은사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바울은 이제 지체들 간에 교제를 위하여 필요한 깊고 순수한 사랑을 삶 속에서 실천하라는 일반적인 권면을 한다. 따라서 본절의 '사랑'은 10절의 형제 사랑이나 14절 이하의 원수에 대한 사랑을 포괄하는 일반적 의미의 사랑을 의미한다. 한편 본절에서 사용된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로는 '아가페'( )가 쓰였는데, 바울에게 있어서 이 용어는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신자들의 다른 사람에 대한 이타적인 사랑을 가리킨다(Ridderbos). 이러한 사실은 본서에서 이 '아가페'라는 용어가 주로 신적인 사랑을 나타낸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롬 5:5,8; 8:35,39; 15:30, Dunn). 이처럼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이교도들의 타산적이며 감정에 이끌리는 사랑과는 구분되는(Barth) 신적인 사랑을 성도들에게 나타내라는 것이다. 한편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사랑에 해당하는 여러 헬라어가 갖는 용례와 의미에 대해서는 요일 3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한편 '거짓이 없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뉘포크리토스'( )는 본래 고대 헬라 세계의 연극 배우와 연관된 표현인 '휘포크리테스( )에 '안'( )이란 부정 접두사를 붙어 '외식이 없이', '위선적이지 않게'(Bruce)라는 뜻이다. 즉 성도가 실천해야 하는 '아가페' 사랑은 그 본체가 사랑이신 하나님의 완전하신 사랑을 본받는 것으로써 결코 가식이 없는 마음에서 우러난 그대로의 순전한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악을 미워하고. - '미워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스튀군테스'( )는 '미워하다'라는 뜻의 다른 동사 '미세오'( )가 마음 속에 품은 은밀한 중오를 가리키는 것과는 달리 밖으로 표현된 중오를 가리킨다. 더구나 '스튀게오'( ) 앞에 붙은 '아포'( ) 전치사는 '~로부터'(from), '~밖으로'(out of)의 뜻을 가져 분리의 의미를 함축한다. 즉 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악을 소극적으로 기피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를 증오하며 그 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적극적인 모습이어야 한다.
선에 속하라. - 악에 대한 기피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선에 속하는 적극적인 윤리적 행위가 사랑을 실천하려는 성도들에게 요구된다. 여기서 '속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콜로메노이'( )는 매우 단단한 결속을 뜻하며 전인적(全人的)인 동조를 의미한다(Abbot-Smith, A Manual Greek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즉 이 동사는 마 19:5; 고전 6:16,17에서 결혼 관계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선에 대한 성도의 태도는 적극적인 헌신의 자세여야 하며(Murray)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선과 일체가 되는 삶이어야 한다.
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 본 구절 안에는 '필'( )로 시작되는 두 단어가 등장하여 강조적인 언어 유회(word play)의 효과를 낸다. '형제 사랑'이라는 의미의 '필라델피아'( )와 '우애하고'에 해당하는 '필로스토르고이'( )가 그것이다. 전자는 형제 간의 사랑을, 후자는 친족, 가족, 종족 간의 자연스러운 사랑을 가리킨다. 이처럼 '형제'(아델포스)라는 호칭이 가지는 특수성과 더불어(롬 1:13; 9:3; 10:1; 11:25 주석 참조) 혈육적인 사랑이 강조된 것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란 말에서도 보여지듯이 그리스도인들을 '가족 관계'라는 친밀함을 지니는 구성원들로 규정하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Wuset). 따라서 본절은 바울이 지체의식을 강조하는 것(4,5절)의 연장이라 볼 수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상호 간에 가족과도 같은 친밀한 사랑으로 서로를 섬겨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 이 태도는 다른 사람을 높이 평가해서(빌 2:3) 존경심을 보이는 일에 늘 앞서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모습은 진정한 사랑의 결과가 그 자신의 영광이나 지위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기꺼이 존경과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보여준다(Sandal & Headlam). 이처럼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태도를 반드시 요구한다(고전 13:5).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 다스리는 자에게 필요한 덕목으로 '근면함'을 제시한 바울은 모든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바로 이 덕목이 필요함을 피력한다. 왜냐하면 신앙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가졌던 활력을 잃어버리고 타성에 젖어 나태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계 2:4). 한편 '게으르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크네로이'( )는 자신의 할 일에 대한 최소한의 도덕적 진지성도 포기하고(Denny)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늑장을 부리거나 지연시키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런 자는 마치 가시떨기 가운데 떨어진 씨앗과 같이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빠져 자신에게 부여된 영적 사명을 감당치 못하는 자이다(마 13:22). 따라서 이런 자는 후에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을 때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정죄 받게 될 것이다(마 25:26).
열심을 품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토 프뉴마티 제온테스'( )로서 '프뉴마'( )를 '성령'으로 본다면 본문은 '성령으로 인한 열심을 품고'라는 의미가 된다(새번역, RSV). 그러나 개역 성경은 '프뉴마'를 '인간의 영혼'으로 보아(Munay, Meyer, Wuest) 본절을 '열심 있는 마음으로'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공동번역, '열렬한 마음으로', 현대어성경, KJV, NIV, NASB, LB, TEV). 이처럼 많은 역본들이 따르고 있는 것같이 여기서는 '프뉴마'를 인간의 영혼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롬 1:9; 고전 2:11; 5:4; 7:34; 고후 7:1; 엡 4:23; 살전 5:23, Murray). 왜냐하면 앞부분의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라는 권면이 강조하고 있는 바와 같이 본문에서도 인간 편의 충심을 다한 노력을 바울이 권면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지기 때문이다.
주를 섬기라. - 시내산 사본(H), 알렉산드리아 사본(A), 바티칸 사본(B), 바질 사본(I), 레기우스 사본(L), 풀피리안 사본(P) 등 대부분의 사본들에는 개역성경의 번역과 같이 '주'(토 퀴리오)로 나와 있으나, 베자 사본(D), 오전시스 사본(F), 보엘네리안 사본(G)등 일부 사본에는 이 단어가 '시간'(토 카이로)으로 나와 있다. 이는 아마도 '퀴리오'를 잘못 읽은 필사자들이 이를 '카이로'라고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은 '시간을 섬긴다'라는 뜻으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라는 앞의 구절의 문맥과 더욱 적합하게 어울린다고 볼 수도 있다. 즉 이러한 사본대로라면 엡 5:16의 교훈처럼 '세월을 아끼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사본들의 권위를 고려한다면 전자가 본래의 기록이었을 가능성이 더 많다(Meyer, Godet, Theodoret, Antiochus, John-Damascus, Theophylact, Luther, Bengel, Denny, Murray). 한편 '섬기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둘류온테스'( )는 어근에 '종'이란 의미가 있는 '둘로스'( )가 반영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종과 같이 섬긴다'는 의미이다(Rienecke). 이 단어는 주님께 대해 성도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신앙 자세의 한 단면을 효과적으로 설명해 준다. 한편 본절의 세 가지 권면이 '주를 섬기라'로 끝맺는 것은 앞선 '근면'과 '게으르지 않음'과 '열심'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지적해 주는 것이다. 즉 만물의 근원과 과정과 목표가 '주'이듯(롬 11:36) 성도들의 모든 신앙생활의 방향도 오직 '주'외에는 아무 것도 없음을 보여 준다.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 믿음(3절)과 사랑(9절)을 말한 후 소망을 말하는 것은 고전 13장에서 바울이 성도가 지향해야 할 세 가지 덕목으로 '믿음 ․ 소망 ․ 사랑'을 언급하는 것을 연상시킨다(고전 13:13). 바울에게 있어 '소망'이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소유하게 될 것과 연관되며(롬 5:2) 또한 성도들은 이 소망을 지니므로 구원을 얻었다(롬 8:24). 그러므로 이 소망은 현재적이지 않고 종말을 기대하는 성격을 가진다(롬 8:24,25). 따라서 성도들은 이 종말론적인 소망을 견지하면서 현재 당하는 모든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망은 비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구분하는 잣대가 되며, 소망 중에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비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만의 특권이라 할 수 있다(살전 4:13, Philippi).
환난 중에 참으며. - 바울 자신은 여러 환난 가운데서 그것을 극복해 낸 경험이 있다(고후 1:4,8; 2:4; 6:4; 7:4; 엡 3:13; 살전 3:7). 바울은 본절에서 이러한 환난이 이질적인 문화권 속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반드시 있을 것을 암시하며 그들 역시 인내하는 신앙을 가질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행 12장 연구자료 '초대 교회 박해사'를 참조하라. 한편 여기서 '참으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메논테스'( )는 문자적으로 '어떤 어려움에도 견디며 남아 있는다'라는 뜻으로(Wuest) 본문에서는 전술한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것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즉 현재의 고난이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다는 소망적 사실에 근거해(롬 8:18) 생활 가운데 닥쳐오는 어떠한 고난도 감수하는 삶이(롬 8:17)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다.
기도에 항상 힘쓰며. - 소망 중 인내하는 방법으로 바울은 힘써 기도할 것을 권면한다. 계속적인 기도가 없이 인간적인 방법만으로는 소망 중에 즐거워함과 인내함은 불가능하다. 또한 그 역 (逆)도 가능하여 소망 중에 인내하는 자는 반드시 기도하는 자이다. 한편 '항상 힘쓰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카르테룬테스'( )는 '견지하다'(hold fast to), '지속적 관심을 표명하다'(give attention to)라는 뜻이며 '전적으로 충실하다'라는 의미로도 쓰였다(행 6:4, TDNT). 또한 성도의 기도는 종말의 시대에 언제나 계속되어야 할 필수적 의무임이 이 동사의 현재형을 통해 지적되고 있다(살전 5:17).
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 12절이 내적인 신앙생활을 권면한 것이라면 본절은 신앙의 외적 표출에 대해 권면한 것이다. 섬김과 구제, 긍휼을 베푸는 은사에 대해서 이미 언급한 바울이지만(7,8절) 여기서 또다시 '구제'가 모든 성도들의 필수적인 덕목임을 천명한다. 한편 공급하며'에 해당하는 '코이노눈테스'( )는 헌금(롬 15:26; 고후 9:13), 친교(고후 6:14; 갈 2:9), 참여(고전 10:16; 빌 2:1) 등을 시행하는 것과 관련되어 다양한 의미로 쓰인 단어로, 여기서는 성도들의 물질적 어려움을 통찰함과 아울러 여러 어려움에 함께 동참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즉 초대 교회 당시에는 로마의 압정과 부자들의 수탈로 인하여 노예로 전락하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자가 많았고 교회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것이다. 이처럼 초대 교회의 경제적 유무상통의 실례는 사도행전에서도 발견된다(행 4:32-35). 그러나 이 표현은 단순한 구제 개념 이상으로 이어 나오는 '손 대접'과 연결시켜서 여행 등의 사유로 숙박할 필요가 있는 성도들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라는 권면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Hendriksen). 당시에 로마 사회의 숙박업소들은 대부분 매춘 행위 등이 성행하였으므로 정결한 생활을 지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외지에서 온 성도들을 자신의 집에 숙박시키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으며 또 실제적으로 그러한 봉사가 시행되는 과정에 있어서 사소한 불평도 있었던 것으로(벧전 4:9) 보인다. 따라서 본절은 바울이 그러한 나그네의 대접을 기쁜 마음으로 하도록 권면하기 위한 의도에서 이러한 교훈을 주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 예수께서도 나그네의 영접과 환대를 간접적으로 교훈하셨을 뿐 아니라(마 25:35), 이미 구약 시대부터 이 나그네 대접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구제와 함께 이스라엘에게 요구된 필수적 요소였다(신 10:18,19). 그러나 여기서 요구되는 환대의 범위는 반드시 성도들 혹은 순회 전도자들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보다 폭넓게 적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손 대접하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필롴세니아'( )가 '좋아하다', '사랑하다'는 의미를 지니는 '필'( )과 '손님', '이방인'을 의미하는 '크세노스'( )의 합성어로서 '낯선 사람들에 대한 애정 또는 환대'를 가리키며(Vincent) 구체적으로 음식과 옷과 거처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12:14-21 대사회 관계에서의 교회의 자세
교회 내에서 성도가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를 본래 부여하신 목적에 맞게 활용할 것과 성도 간에 가져야 할 삶의 자세를 제시한 앞 단락(3-13)에 이어 본문은 성도의 모임인 교회 공동체가 대사회(對社會) 관계에 있어서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하여, 특히 성도를 핍박하고 성도와 원수된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먼저 핍박하는 자를 오히려 축복하라고 권면하는데(14절) 이는 예수님의 가르치심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마 5:44). 이렇게 핍박하는 자까지 적극적으로 축복하는 성도의 삶은 다른 사람의 즐거움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위로와 격려의 삶이며(15절) 스스로 교만하지 않고 겸손해야 하는 성도로서의 성숙한 삶임을 강조한다(16절). 또 더 나아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과 힘이 닿는 데까지 화평할 것을 이야기하는데(17,18절). 사실 선을 선으로, 악을 악으로 대하는 일은 평범한 자연인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성도가 이 상태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세상 속에서 화목자가 될 것과 악한 행위나 상황 때문에 낙심하거나 악을 악으로 갚기 보다는 악에 대하여 보다 능동적으로 대처할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방법이자 본문의 결론으로 바울은 원수에 대한 보복은 오직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19,20절). 그리고 '선으로 악을 이길 것'을 제시한다(21절). 특별히 27절에서 언급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는 말은 원수에게 도리어 선을 베풂으로써 원수가 마음에 찔림을 받아 스스로 자복하며 회개한다는 뜻이다. 이렇듯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의 자세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원수된 자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이미 모범을 보이셨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가야 할 성도의 삶도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우리 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는다.
① 성도는 겸손함으로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는 세상의 화목자가 되어야 한다(롬 14:19; 딛 1:4).
② 성도는 원수된 자에게까지 선을 행함으로써 그 원수조차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살전 5:15).
12: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 이 권면은 바울이 접했던 것으로 생각되는 예수의 이웃 사랑에 대한 적극적인 교훈(마 5:44; 눅 6:28)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행 20:35에서 복음서에 나타나지 않는 예수의 교훈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한편 본절의 교훈은 구약에서 가해 당한 만큼의 복수를 허용함으로써 무제한의 보복을 막으며 공식적인 처벌을 통해서 사회 정의를 구현하려 했던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의 정신을(레 19:18) 주님께서 재해석하시고 새로운 계시의 빛 안에서 신약의 성도들에게 제시하신 교훈이다. 이와 관련하여 동해 보복법에 대해서는 레 24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한편 본절의 '핍박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오콘타스'( )는 전절의 '힘쓰다'와 같은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는 '각박히 뒤쫓는(pursue) 핍박(persecute)'을 의미하며, 13절에서는 '힘써(pursue) 실행하는 것(practice)'을 가리킨다. 또한 '축복하라'에 해당하는 '율로게이테'( )는 직역하면 '좋게 말하다'라는 뜻으로 '찬송함'(눅 1:64; 약 3:9; 벧전 1:3)이나 '축복'(마 5:44; 눅 2:34; 6:28)을 의미한다. '축복'이라는 의미로는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대한 것이나 인간들 서로 간에도 구분 없이 사용되었다. 한편 이와 같이 자기를 적대하는 자를 축복하기는 인간적인 성정(性情)으로는 불가능하나 자신이 과거에 죄를 지음으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가해자란 의식을 가지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이러한 일을 가능케 할 수 있다. 또한 바울이 여기서 이러한 기독교의 윤리를 강조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 자신이 이러한 핍박자에 대한 축복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고전 4:12, 13). 원수에 대한 사랑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마 5:44과 눅 6:28의 주석을 참조하라.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 참된 이웃 사랑은 그 이웃의 슬픔과 기쁨에 대해 인격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을 통해 증거된다. 이러한 이웃과의 동참 의식은 손 대접(13절)과 마찬가지로 신자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비신자들과도 형성되어야 한다. 핍박하는 자를 위해 축복해야 하는 교훈(14절)이 그러한 당위성을 증거해 준다(Cranfield). 이렇게 이웃과 함께하는 삶은 인간적인 미덕에 머물 뿐 아니라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서(벧전 3:1)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다(마 5:16, Hendriksen).
12: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아우토 에이스 알렐루스 프로눈테스'( )를 직역하면 '서로 같은 일을 생각하다'라는 의미이다. 사실상 민족과 계급과 생활 정도가 다양했던 당시 사회에서 상대방과 동일한 생각을 하며 상대방의 입장에서 가치 판단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께서도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고 교훈하신 것처럼 스스로를 상대방의 입장에 두는 것은 기독교 윤리의 기본이다. 한편 이러한 권면을 바울이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구태여 강조하는 이유는 노예 제도와 극한 이기심에 시달리는 비신자들에게 기독교적 영향력을 끼치도록 하게 하기 위함이다(15,17절).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 '높은 데'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휩셀라'( )를 중성으로 해석하면 '높은 것들'이란 뜻이 되어 구체적인 상황을 지적하지는 않지만 '지위'나 '명예'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를 남성으로 해석하면 '높은 사람들'이 되어 지위 높은 사람과의 교류를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본문은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지닌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성도들은 마땅히 헛된 교만심과 야망을 억제해야 하고 오히려 겸손을 추구하며 지체 낮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함을 교훈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처하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나파고메노이'( )는 수동태로 쓰여서 모든 것을 싹 쓸어가는 홍수처럼 강력하게 '이끌린다'(be carried along)는 뜻이다(Sanday & Headlam). 따라서 '낮은 데 처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뜻이나 능력을 과도하게 평가하여 거기에 이끌리지 않고 자신에 대해 겸허한 입장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Thayer).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 잠 3:7의 상반절이 반영된 것으로 문자적으로는 '네 눈으로 너를 지혜롭게 보지 말라'(Murray)는 의미이다. 진정한 겸손은 이렇게 스스로 우월의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남의 생각을 귀히 여긴다. 약 3:17에 제시된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의 덕목을 보면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다. ' 사실상 자신의 결정과 다른 사람의 판단을 공정하게 평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러한 판단에 있어 진실하지 못하고는 서로에 대해 같은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Denny).
12: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 14절의 교훈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 전자가 적극적인 권면이었다면 본절은 그에 대한 보충적이며 소극적인 가르침이다. 구약의 가르침은 동해 보복법(同害報復法)이긴 하나 사사로운 원한에 의한 복수가 아닌 공식적 형벌을 지적하고 있는바(14절 주석 참조), 신약의 원리도 또한 보복적 충동에 사로잡히지 말고(19절) 하나님의 보응 형벌에 맡기고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는(마 5:44) 적극적 태도를 가지라는 것이다(벧전 3:9 주석 참조).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 '선한 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라'( )는 또 다른 표현 '아가도스'( )와는 다소 구분된다. 후자는 밖으로 드러나는 선을 표현하고 전자는 내적인 선을 가리킨다. 즉 후자는 전자의 외적인 표현이다(Wuest). 여기서도 '모든 사람'은 신 ․ 불신을 떠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뜻한다. 또한 '도모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노우메노이'( )는 '미리 생각하다'(think before), '심사숙고하다', '몰두하다'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앞서서 생각하며 몰두하여 처리하다'라는 뜻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성도들은 선한 일에 대해서 남보다 앞서 생각하며 경쟁적으로라도 그 일을 행해야만 한다.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 선한 일을 위해 노력하라는 전절의 교훈에 한 단서를 붙이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과 평화를 유지한다는 것은 언제나 가능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완전한 사랑을 가지지는 못한 우리 성도들의 연약함과 아울러 평화를 파괴하고 있는 죄악된 세상의 경향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본절에서는 평화를 요구하는 후자가 더욱 강조되어 있다(Murray). 한편 '할 수 있거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 뒤나톤'( )은 '당신이 할 수 있으면'(if you can)이 아닌 '그것이 가능하다면'(if it be possible), 즉 '다른 사람들이나 환경이 그것을 허용한다면'이라는 의미이다(Alford). 따라서 이 유보 조항은 성도들이 세상을 향해 평화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의 노력만을 가지고는 진정한 평화가 불가능하다는 긴장 관계를 보여 준다. 교회 구성원들에게 평화를 주셨고(엡 2:14-19) 우주에도 화평을 도래케 하신 분이(골 1:20) 그리스도이시지만 그 평화의 궁극적 성취는 완전한 승리자의 모습으로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 새롭게 도래할 세상에서 완성될 것이다. 한편 '너희로서는'이라는 표현은 인간 편에서 가능한 온갖 수단을 다 써서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Murray).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 본서에서는 이곳에 유일하게 나오지만 바울의 다른 서신서 에서는 자주 나온다(고전 10:14; 빌 2:12). 이는 1절에 나오는 '형제들아'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만 보다 더 친근한 호칭이라 볼 수 있다.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 '진노하심에 맡기라'는 표현은 '도테 토폰 테 오르게'( )로서 직역하면 '그 진노에 장소를 제공하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진노'를 피해를 당한 자의 노여움으로 보아 시간적 여유를 가짐으로써 노를 가라앉히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며, 또한 '진노'를 가해하는 자의 노로 보아 원수의 노에 대하여 직접 대항하지 말고 내버려두라 란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Ambrose, Scott). 그러나 '진노'(오르게) 앞에 관사 '테'( )가 붙어있는 것은 하반절의 인용구를 고려할 때, '하나님의 진노'로 보는 것이 가장 좋다(롬 3:5; 5:9; 9:22; 13:5, Chrysostom, Luther, Wuest, Hendriksen), 즉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것을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으므로 그 진노하심을 믿고 맡겨 두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의 바른 태도라는 것이다.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 신 32:35을 구약 히브리어 본문이나 70인역(LXX)과 조금 다르게 인용하고 있다. 신명기의 상황적 문맥은 택한 자들을 비웃는 적들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지만, 본절에서는 인간의 범죄에 대한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복수자는 하나님뿐이시라는 일반적 원칙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렇게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상은 신약에 와서 더욱 두드러진 윤리적 교훈으로 나타나고 있다(마 12:18; 요 5:30; 9:39; 히 9:27). 한편 본질적으로 하나님으로서 세상을 지배하는 권세가 있으시며 무죄하시면서도 원수에 의해 수욕당하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친히 원수를 갚지 않으셨던 그리스도에게서 이러한 사상의 완전한 실천을 볼 수 있다.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 지금까지 바울이 말한 교훈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음을 밝힘으로써 말씀에 권위를 부여 하는 말이다.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 본절은 잠 25:21,22의 거의 정확한 인용이다. 그러나 바울은 17절의 교훈을 입증하는 구약 인용 구절로서의 본절의 내용에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잠 25:22 하반절의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는 부분은 생략함으로써 하나님의 보상을 전제하지 않는 순수한 선행을 강조한다.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는데, 애굽의 풍습에 회개의 증거로 숯불을 담은 냄비를 머리에 이고 다니는 것이 잠언에 인용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면 성도의 친절한 행위가 원수로 하여금 심적 고통을 일으키며 회개케 하는 결과를 이룬다는 내용이 된다(Chrysostom, Augustine, Calvin). 또한 이는 순수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므로 성도가 친절을 베풀어도 결과적으로 그에게 신적 심판이 임한다는 견해가 있다(Whitby). 그러나 그보다는 동방 세계에서 난방과 취사용으로 화롯불을 하루 종일 유지하는데 불을 꺼뜨리면 이웃에 가서 숯불을 얻어 오게 되었다는 견해가 본절 이해에 도움이 된다. 즉 그렇게 숯불을 건네주어 머리에 이고 갈 수 있게 한 사람의 행위는 대단한 친절로 인식되었으므로 성도들은 악행 하는 원수에게 그러한 친절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Wuest). 이러한 친절을 베푸는 행위만이 원수가 부끄러움과 후회의 감동으로 돌이키게 하는 첩경이란 점에서 이 견해가 보다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 '악에게 진다'는 표현은 대적자의 불의한 행동에 대해 불의한 방법으로 대응하거나 혹은 악한 행동에 패배하여 좌절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이러한 악은 오직 선으로서만 이길 수 있음을 강변하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진술해 온 바울의 논리의 결론으로서 자신에게 악행하는 원수에게 그 악행을 되갚는 행동은 전혀 사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친절과 사랑을 보임으로 진정한 평화를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대응 폭력은 끝없는 폭력을 낳는다'는 현대 평화 윤리의 한 명제와 같은 사상이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윤리는 오히려 끝없는 선행으로 악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악인의 강퍅한 마음도 회개시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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