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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장 악한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와 세금 논쟁, 부활 논쟁, 첫째 계명에 대한 논쟁, 메시야의 신분 논쟁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넓게는 제 11-16장까지 이어지는 주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 승천에 대한 일련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또한 좁게는 제 11-15장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따라 본래 제2위 성자이셨으나 죄인의 구속을 위하여 성육신하여 세상에 오신 주님의 구속사역의 결정적 성취인 십자가 수난 사건을 다루는 수난 주간 일련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이에 대한 전반적인 개관은 제 11장 개관을 보라.
본장은 이런 문맥 하에서 앞장 후반부인 11:27-33절에서 부터 기록되기 시작한 수난 주간 셋째 날인 화요일에 있었던 주님과 유대 지도자들의 일련의 논쟁들 곧 이로 인하여 유대인들이예수를 정치범으로 몰아서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주의 구속사역을 이루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예수와 유대지도자들 간의 여러 논쟁들을 보도하고 있다.
예수님은 다름 아니라 창조 당시의 원형을 상실하고 사탄의 유혹에 따라 하나님께 반역하여 죄인이 된 인간의 죄 값을 다른 존재가 대신 지고 희생함으로써 구속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그 본질로 하는 구약의 예언과 언약의 성취로서 오사 구속 사역을 일단 성취하시고 다시금 구속사역의 최종 실현인 천국 구원을 골자로 하는 새 언약을 주신 분이었다. 즉 주님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요, 또한 제2위 성자로서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성육신하신 우리의 구속주(救贖主)이셨다. 그리고 최종적인 천국 구원을 골자로 하는 새 언약을 주신 분이셨다. 그러나 당시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처럼 구약을 계승 확장시킨 주님의 사역과 주님의 행적과 교훈치 보여 주는 주님의 메시야직을 열린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구약의 전체가 아니라 일부 내용만을 자신들의 유대 민족의 입장에서 인본주의적으로 곡해한 유대교적 오류에 빠져 메시야는 자신들만을 이 지상나라들의 지배자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참 메시야로서 사역하신 주님을 거부했고 특히 일부 지도자 계층은 메시야로서의 주의 사역으로 자신들의 정치 사회적 기득권이 파손될 것을 염려해 세계 만민을 위한 메시야로서의 주님의 사역을 무조건적이고도 악의적으로 배척하였다. 이런 이들의 배척은 급기야는 예수의 무고한 처형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택한 구약 선민(選民)이 오히려 구약에 거들 예언 약속된 메시야를 죽이는 결과를 야기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예언된 것으로 주님이 힘이 없으셨거나 모르고서 당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택한 자의 죄 값을 대신 치루시어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구속 희생 사역을 성취하고 또한 주의 복음이 이제 새 시대에는 새 영적 선민인 이 땅의 모든 성도에게로 확산되는 통로가 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었다. 한편 본장의 유대 지도자들과 예수와의 논쟁을 이해하기위해서는 먼저 마침내 주님의 처형에까지 이른 유대 지도자들의 예수 배척에 대해서는 전반적 이해가 필요한 바 이에 대해서는 본장의 연구 자료를, 그리고 당시 오류에 빠진 유대교(Judaism)와 태초부터 계승된 신 ․ 구약 전체의 정통 신앙인 기독교(Christianity)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행 서론특별자료를 보라.
이제 이런 전체적 문맥 하에 있는 본장의 세부 내용을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1-12절은 구약 계시(舊約 啓示)를 먼저 받은 선민이요 또 그들의 종교 지도자를 자처 하면서도유대교의 오류에 빠져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던 자들의 악함과 어리석음을 경고한 악한 농부들의 비유이다. 그리고 바로 구약 선민이면서도 구약의 성취요 이를 계승 발전시킨 신약의 새언약의 수여자로 오신 예수께 도전하는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이 바로 그 악한 농부들이며 그들이 당신을 해할 것이나 당신은 오히려 부활하여 신약 교회의 머리요. 그들의 심판자(審判者)가 되실 것을 예수께서 분명히 밝히시고 경고하는 내용이다. 이 비유는 먼저 주님은 살아계신 전 우주의 주권자(主權者)로서 인간의 마음대로 순종해도 그만 안 순종해도 그만이요 그분의 뜻과 섭리를 자신들의 판단과 유익대로 왜곡해도 그만인 분이 아니라 훗날 주님과 주님의 교훈에 대한 자세에 따라 분명히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구속사적 경고이다. 실로 주님은 세상의 일시적 철학이나 도덕을 가르치신 분이 아니라 그에 대한 순종의 여부에 따라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이(살후 1:8) 판가름 나는 복음을 가르치신 우리의 유일한 구주(救主)이시다.
한편 우리는 본 비유에 나타난 악한 농부들이 꼭 예수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에 국한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넓게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본주의적 관점(人本主義的觀點)에서 가리는 각종 세속 정부와 세속 문화의 지도자들과 그 추종자들을, 좁게는 주님의 진리를 안다 하면서도 이를 왜곡하며 호도하는 데 앞장서는 자유주의 신학자 및 이단 사설주의자들이 모두 다 각 시대의 악한 농부들이다. 성경 전체는 물론 우리 주님도 거듭하여 주님의 복음만이 시대를 불문하고 전 구속사의 유일한 엄정하고 은혜로운 구원의 표준이지만 하나님과 인간을 이간시키려는 사탄의 체 계로, 이를 왜곡 호도하는 각종 이단과 문화가 등장할 것을 거듭 경고하였음을 기 억해야 하겠다. 그리하여 먼저 주인의 선하고 바른 뜻을 알면서도 이를 순간적 유익을 위하여 거스리는 악한 농부가 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또한 그들의 세력과 권위나 화려함에 유혹당하지 말고 순결한 복음의 진리를 사수하여(고전 15:2) 구속사(救贖史)가 최종 성취되는 날 주인이 세울 새나라 곧 천국에 참여하여야 하겠다.
이어지는 13-34절은 당시 정치적으로 뜨거운 감자격의 논쟁이었던 세금 납부의 정당성에 대한 논쟁(13-17절), 당시 종교적으로 큰 논쟁이었던 부활의 사실 여부 및 부활 이후의 상태에 대한 논쟁(18-27절), 그리고 예수의 구약 율법에 대한 자세 및 그 지식의 정도를 유대교적 입장에서 테스트 해보고자 제시된 첫째 계명에 대한 논쟁(28-34절) 등 세 논쟁을 연달아 보도하고 있다.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께 제기한 세 질문과 논쟁은 모두 다 순수한 질문이 아니라 예수께서 어떻게 답하더라도 예수를 정치 ․ 종교적 혼란에 빠뜨릴 수 있도록 고안된 저의가 깔린 질문들이라는 공통성을 갖고 있다. 또한 그들이 구약 성경의 진리를 안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에서 야기된 것이라는 공통성도 갖고 있다. 또 이에 대하여 예수는 표면적 질문의 내용보다 궁극적인 그들의 의도 자체를 꿰뚫어 보시고 이에 대하여 각 경우마다 그와 관련된 절대 불변의 진리를 선포하시면서도 그 방법에 있어서는 지혜롭게 적절히 대응하심으로 그들이 숨긴 함정을 모두 다 뛰어 넘어 이기셨다는 공통성도 있다. 사실 이러한 질문은 예수의 공생애 초기부터 구약의 일부 내용만을 민족주의적 관점(民族主義的 觀點)에서 그리고 인본주의적으로 곡해한 유대교적 오류를 고수하며 무조건적이고 악의적인 편견으로 예수의 메시야직을 부인하고 정의와 진리를 선포하는 예수의 사역이 자신들의 알량한 세속적, 종교적 기득권 유지에 지장이 될 것을 두려워한 유대 지도자들의 부당한 예수 배척, 또는 예수의 메시야직에 대한 몰지각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그 세부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전반적인 배경에 대한 구속사적 이해가 필요한 바 이에 대해서는 본장 연구 자료를 보라. 한편 이 세 논쟁 각각의 내용과 그 저의 그리고 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이 갖는 교훈과 의미에 대해서는 해당 문단 강해를 각각 참조하라.
35-40절의 메시야의 신분에 대한 논쟁은 앞의 세 논쟁과는 달리 예수께서 유대 지도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심으로 제기된 것이었다. 유대교 또는 당시의 유대인들은 구약의 계시 전체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일부분만 편협하게 수용하여, 언젠가 자기 민족만을 정치적으로 구원하여 이 지상에서 최고의 민족으로 만들어 줄 메시야가 올 것으로 착각하였고 또 하나님의 계시인 구약 말씀보다 자신들이 만든 유전과 여러 가지 의식(儀式)들을 더욱 중요시 하였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모든 구약의 성취요, 구약을 보다 확장시킨 신약의 새로운 주체로 오심으로 구속사의 시대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이해 내지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히려 배척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기 위하여 메시야이신 자신과 관련된 구약의 모든 말씀을 그들이 온전히 깨닫지 못한 증거의 하나로서 주님의 신인 양성(神人兩性)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즉 표면적으로는 상호 모순인 것처럼 보이는 본문의 말씀을 제시한 것이었다. 보다 상술하자면 그들은 구약을 통해 메시야가 다윗의 혈통을 따라 그의 후손으로 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음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일한 구약이 비록 그 분은 육신으로는 다원의 혈통으로 오시지만(삼하 7:11-17) 그 신분은 다윗의 주가 되는 신적 존재라는 사실 또한 다윗 자신의 입을 빌려 계시한 내용은 간과했다(시 110:1). 이처럼 그들은 구약을 부분적으로만 수용한 것이었다. 따라서 육신으로는 분명히 다원의 후손이지만 그 신분은 다윗의 주가 되시는 메시야의 본질 전체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가질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메시야 예수는 본래 제 2위 하나님 곧 성자로서 다윗의 육신을 타고 성육신하여 세상에 오셨으나 이는 이 현 세상을 정복하여 유대인들만을 지배자 민족으로 격상시키는 정치적 해방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에서는 버림받아 죽임을 당하심으로 택한 백성의 죄를 대속하고 오직 세상 끝 날에 새 천국을 세움으로 영원한 천국(天國)의 참다운 메시야로서 우주적 왕권을 발휘하실 것이라는 예수의 메시야직의 본질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같은 구약 내에 있는 계시의 말씀이 그들에게는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니 심지어는 그런 구약 본문이 메시야에 대한 말씀인 것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모순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이 진실 전체를 모르기 때문에 표면상 모순일 뿐이었다. 어쨌든 이에 예수는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사상과 논리의 근거로 삼고 있는 구약의 말씀 자체를 가지고 그들의 메시야직에 대한 무지를 지적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겸허한 마음으로, 성경 말씀 전체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깨달을 때에만 구속사의 진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 인본주의적 자세로 자신의 판단에 맞는 일부의 내용만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구속사(救贖史)의 실체를 왜곡 변질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엄숙한 교훈을 깨달아야 한다.
마지막 단락인 41-44절은 예루살렘 성전 뜰 안에서 있었던 과부의 헌금에 대한 주님의 평가와 교훈을 보도하고 있다. 이 단락은 먼저 전체 문맥에서 볼 때 이제 주님과 유대 지도자들과의 치열한 논쟁 이 상호간에 메울 수 없는 괴리만 드러난 채 끝나서 유대인들은 주님의 살인을 모의하는 자리로, 주님은 이제 삼일 남은 자신의 십자가 수난을 준비하시며 최종적인 교훈을 주시는 자리로서로 갈라지게 됨을 보여 주는 일종의 전환 단락이다.
한편 본 단락 자체를 구속사적으로 이해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참 기준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이미 전 우주의 창조자(創造者)요, 주권자(主權者)인 하나님과 예수님은 인간에게 무슨 공적이나 재물의 많고 적음을 구분하시고 이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의 중심 자체를 전적으로 당신께 바칠 것만을 원하시며 또한 이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실 것임을 보여 준다(삼상 16:7). 그러므로 우리는 마치 부모가 제 자식을 그 어떤 능력이나 조건이 아니라 일단 자신의 핏줄이기에 사랑하듯이 하나님은 사람을 당신의 피조물(被造物)로서 무조건 사랑하시며 또한 사람도 그 무슨 부분적 행위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당신을 창조주로 인정하고 주님으로 사랑할 것을 원하시는 분임을 깨달아야 하겠다.
외울 말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막 12:30)
악한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
1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3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4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5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이고 또 그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인지라
6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7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8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느니라
9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12 저희가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버려두고 가니라
세금 논쟁
13 ○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14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15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16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17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부활 후 결혼에 대한 논쟁
18 ○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19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0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21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22 일곱이 다 후사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23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날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2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6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제 1계명 논쟁
28 ○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메시야 신분 논쟁
35 ○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36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
바리새인 외식에 대한 논쟁
38 ○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39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41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1) 본문 & 자료 노트
(2)
도표-12:1-12 본문의 비유에 나타난 악한 농부들의 10가지 죄악
1 | 자신들의 신분과 역할을 망각함(1절) |
2 | 주인을 무시함(2-8절) |
3 | 주인이 보낸 종을 때림(3절) |
4 | 주인에게 돌려야할 소출을 안줌(3절) |
5 | 주인이 두번째 보낸 종을 능욕함(4절) |
6 | 주인이 세번째 보낸 종을 죽임 (5절) |
7 | 주인의 기대와 사람을 배반함(6절) |
8 |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임(6-8절) |
9 | 주인의 유업을 가로채려 함(7절) |
10 | 서로 합심하여 악을 행함(7-9절) |
주요주제-12:28-34 계명 준수에 관한 예수 교훈의 특징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메시지 가운데 구약 율법의 계명 준수에 관한 교훈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그 교훈들은 구약 율법을 문자적으로 준수하도록 가르치는 바리새인들의 교훈과는 차원이 다른 특징들을 지닌다. 본문에서 가장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이냐는 서기관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 속에 그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바 이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신앙의 대전제에 대한 강조
모든 계명 중에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이냐는 한 서기관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첫 대답은 계명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계명을 준수함에 있어 대전제가 되는 것에 대한 말씀이었다. 그것은 곧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29절)는 것이었다. 이는 유대인들이 늘 기억하고 있던 쉐마(신 6:4-9)의 첫 번째 내용이다.
유대인들은 이 같은 신앙의 대전제를 기억하고 있기는 하나 종종 그것을 무시한 채 율법의 문자적 준수에만 얽매여있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러한 유대인들의 잘못을 염두에 두면서 계명 준수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하나님이시라는 신앙의 대전제에 대한 고백에서 출발되어야 함을 교훈하신 것이다.
2. 적극적 측면에서의 계명 준수 강조
장로들의 유전에는 유대인들이 실생활에서 지켜야 할 율법 613개 조항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 613개 조항 가운데 '‥‥하지 말라'는 식의 소극적 측면에서의 금지 명령이 365개 조항이며 '‥‥‥하라' 식의 적극적 측면에서의 명령이 248개 조항이다. 이 사실은 당시 유대인들의 계명 준수가 매우 소극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졌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적극적 차원에서의 계명을 준수토록 교훈하셨다. 이에 대한 실례로서 바리새인들은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교훈하였으나, 예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고 교훈하셨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소극적으로 율법의 계명에 이끌려 다니며 괴로워하지 말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준수함으로써 율법 준수의 참된 가치를 실현토록 하신 것이다.
3. 본질적 측면에서의 계명 준수 강조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지극히 사소한 계명까지도 철두철미하게 지키려는 열심이 있었으나 정작 율법 준수의 본질은 망각한 자들이 맡았다. 또한 이에서 더 나아가 겉으로는 계명을 잘 지키는듯하면서도 실상은 그 본질적인 측면에서 완전히 떠난 자들도 있었다. 이에 예수께서 는 그러한 자들을 향하여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막 7:6)라고 책망하신 적이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계명 준수의 본질은 오직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예수께서 주신 새 계명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였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고 했다. 이처럼 사랑은 계명 준수의 본질이다. 이는 사랑만 있으면 모든 계명을 준수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사랑이 있을 때에만이 율법 속에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바를 행하며 지킬 수 있다는 뜻이다.
또한 이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진정한 목적은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사람을 위하여 주신 것이지 결코 사람을 얽어매기 위해 주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교훈하는 것이다.
풍습-12:1-9 포도원 가꾸기
본문의 포도원 비유를 보면 당시 팔레스틴 땅의 포도원에 관한 흥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포도원을 만드는 작업 공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말들이 비교적 정확하게 표현된 것이다. 이에 팔레스틴 땅의 포도원에 관한 전반적인 사실들을 살펴봄으로써 본 비유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1. 포도원의 위치
팔레스틴의 많은 지역에서는 산허리나 경사진 산 밑에다 포도원을 만들었다. 왜냐하면 포도는 습성상 공기와 햇빛을 많이 요구하기 때문에 다른 어느 곳보다도 습기가 있고 햇빛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산언덕은 포도원으로서 매우 좋은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도나무가 자라는 데 방해가 될 만한 산언덕의 큰 돌들을 곡괭이로 파내고, 작은 돌벽을 산허리를 따라 쭉 쌓아서 계단 모양의 지형을 만들었다. 이러한 계단식의 돌층계는 흙을 그 자리에 보존시키고 포도가 제대로 자라도록 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2. 포도원 둘레의 울타리
포도원 둘레에는 울타리나 벽을 세워 야생 동물들과 도둑의 침입을 방지하였다. 즉 포도원 주위를 도랑으로 만들고, 거기서 판 흙을 도랑 안쪽에 쌓은 후 그 위에 막대기, 나뭇가지, 덤불 등으로 담을 쌓아 맨 위에 가시나무 덤불을 씌웠던 것이다.
3. 포도원의 망대
포도원에는 도둑과 동물들을 감시하기 위한 망대나 원두막 등이 세워졌다. 이는 포도원이 한눈에 다 들어오는 높은 곳에 세워졌는데, 포도원을 지키는 사람이 그 곳에서 망을 보았으며 때로는 그 곳을 포도원의 소출들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하였다. 보통 이 망대는 나무가지와 막대기로 엮어 조촐히 만들었기 때문에 여름 한철에만 사람이 기거할 수 있었다.
4. 포도원의 소작
어떤 사람들은 포도원이 클 경우 이를 한 집이나 그 이상의 집에 소작을 주었다. 또는 포도원 주인이 자기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소작으로 주고, 자신은 먼 이국땅으로 이주해 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럴 경우 소작인들은 매년 수확기에 임대료를 지불했는데, 곧 포도수확의 절반 혹은 그 이상을 주인에게 바쳐야 했다. 그래서 수확 때가 되면 그 포도원의 주인은 종을 소작인에게 보내어 포도와 건포도, 포도주 등의 자기 몫을 찾아왔다.
5. 의의
이상 팔레스틴 땅의 포도원에 관한 전반적인 사실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당시의 실생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사실들을 비유로 들어 진리의 말씀을 전하심으로써 당대의 청중들에게는 물론이고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보다 실감 있고, 또 생생하게 그 진리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하셨다.
보감-12:30 마음을 다해서 할 것 8가지
1 | 주를 구하라(신 4:29) |
2 | 주께 봉사하라(신 10:12) |
3 | 주께 순종하라(신 30:2) |
4 | 주의 앞에서 행하라(왕상 2:4) |
5 | 주를 따르라(왕상 14:8) |
6 | 주를 찬양하라(시 86:12) |
7 | 주를 신뢰하라(잠 3:5) |
8 | 주를 사랑하라(막 12:30) |
도표-12:28-34 구약 십계명과 신약 두 계명 요약
하나님을 향하여
1) 다른 신을 있게 말라
2) 우상을 만들지 말라
3)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4) 안식일을 지키라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과 뜻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사람을 향하여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하지 말라
7) 간음하지 말라
8) 도적질 하지 말라
9) 거짓증거하지 말라
10)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보감-12:31 이웃 사랑의 올바른 태도
1 | 이웃에게 자비를 베풂(출 22:25-27) |
2 | 마음으로부터 미워하지 않음(레 19:17) |
3 | 이웃이 범죄지 않도록 권면함(레 19:17) |
4 | 이웃에게 보복하지 않음(레 19:18) |
5 | 이웃을 원망하지 않음(레 19:18) |
6 | 이웃을 업신여기지 않음(잠 14:21) |
7 | 이웃에게 도움을 줌(사 41:6) |
8 |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함(마 7:12) |
9 | 내 몸과 같이 사랑함(막 12:31) |
10 | 이웃과 함께 기뻐함(눅 1:58) |
11 | 하나님께 하듯이 사랑함(눅 10:27) |
12 | 이웃에게 덕을 세움(름 15:2) |
13 | 기회 있는 대로 선을 베풂(갈 6:10) |
14 | 외모로만 사랑치 않음(약 2:8,9) |
15 |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함(요일 3:18) |
삽화-12:42, 렙돈
렙돈(lepton)은 로마의 가장 작은 화폐 단위로서,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한 한 데나리은의 1/128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녔다.
원어 연구 -12:40, 외식으로
'외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프로파시스'( )이다. 이는 어떤 사물 내지는 장소의 앞부분(눅 7:27; 행 14:13)이나 시간상의 앞선 때(요 1:48; 엡 1:4)를 가리키는 전치사 '프로'(before)와 겉으로 어떤 물체가 '번쩍이다'(마 24:27), 또는 '나타나다'(마 2:7; 눅 9:8) 및 '보이다'(마 6:5; 약 4:14), '비추이다'(벧후 1:19; 계 18:23) 등의 뜻을 지닌 동사 '파이노'( )의 합성어이다.
성경에서 '프로파시스'는 주로 '변명'(excuse)이나 '핑계'(요 15:22) 및 '외모'(빌 1:18)나 탐심의 '탈'(살전 2:5)로 번역이 된다. 이것은 앞서 살펴보았던바 이 단어를 이루는 전치사와 동사의 의미를 잘 반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이는 한 인간이 내면에 충실하기보다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을 타인에게 잘 보이고자 노력하는 행위 곧 탐심의 탈을 쓴 채 외모에 급급하는 겉치레를 나타낸다. 아울러 그와 같은 행위에 대해 종종 필요 이상의 변명이나 핑계를 둘러대는 행위 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본절에서는 이와 같은 '프로파시스'의 의미가 서기관들의 구체적인 행위와 관련되고 있다. 즉 그들은 과부들의 약점을 이용해 그녀들의 집을 빼앗으려는 탐심을 사회적 지위라는 가면으로 가리우고 겉으로는 거룩한 자 인양 길게 기도하는 것이다.
도표-12:35 예수의 인성을 나타내는 주요 명칭
1. 여자의 후손(창 3:15; 갈 4:4)
2. 이새의 뿌리(사 11:10)
3. 아브라함의 자손(마 1:1)
4. 사람(마 2:33; 행 17:31)
5. 인자(마 8:20; 눅 19:10)
6. 다윗의 자손(마 20:30,31)
7. 나사렛 예수(막 1:24; 행 2:22)
8. 독생자(요 1:14,18; 3:16)
9. 목자(요 10:11; 벧전 2:25)
10. 모세와 같은 선지자(행 3:22,23)
11. 유대 지파의 사자(계 5:5)
12:1-12 불의한 농부의 비유
본장 역시 고난 주간의 셋째 날(화요일)에 발생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11:15-18에 언급된 바 있는 성전 정화 사건을 시발로 하여 노골화되기 시작한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과 예수님 사이의 갈등과 대립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화되어, 이제 사사건건 서로 충돌하고 있음을 본장에서 발견하게 된다. 특히 우리는 예수님을 정죄하기 위해 유대 종교의 지도층 인사들이 총동원되다시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이 차례대로 등장하여 무슨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기필코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한편 앞장의 마지막 단락에서(막 11:27-33)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의 권세가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추궁하는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농부의 비유'를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의 사악함을 신랄하게 책망하고 계신다. 즉 그들을 선민으로 택한 바 있는 하나님께서 많은 선지자들을 파견하여 그들로 하여금 회개케 하였으나 그들은 오히려 선지자를 박해할 뿐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조차 죽이는 악행을 범할 것임을 예언한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진정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채 자기 고집과 탐욕만 만족시키려고 애쓰는 자들은 마침내 엄한 심판과 멸망에 처해지고 말 것이라는 사실이 바로 본문의 비유에서 강조되고 있다.
결국 이러한 비유는 실제화되어 예수께서는 유대 교권주의자에 의해 죽임을 당하시고 이 일에 대한 책임으로 유대는 멸망하고 성전은 파괴되어(A.D. 70년).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선민의 자격을 잃고 말았으며 그들을 대신하여 신약의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확장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 비유는 하나님의 구속 섭리를 예언하는 의미도 지닌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깨달을 수 있다.
①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도 사명에 충실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축복을 모두 빼앗기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의 축복을 베풀어주신 것은 본문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농부들처럼 이기적인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시키기 위해서 이다.
②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자비롭고 오래 참으시는 분이지만 계속해서 악을 행하며 회개할 줄 모르는 자들에 대해서까지 결코 관용하시지는 않는다. 본문 속에 등장하는 농부들은 자신들이 주인의 종들을 능욕하고 죽였는데도 아무런 징벌이가해지지 않자 마침내 주인의 아들마저 살해하는 악행을 범했다. 이처럼 회개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멸시하면서 끝내 고집을 부리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에 찬 심판 아래 놓이고 만다(롬 2:4,5).
12:1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 '비유'(파라볼레)란 문자적으로 '나란히 놓음'이란 직접적인 뜻을 갖고 있다. 이것은 화자(話者)가 강조하려는 논점을 일상생활 가운데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을 들어 설명함으로써 납득시키는 방법이다. 이에 대해서는 마 13장 연구자료, '비유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여기서도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생활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며, 구약에 여러 차례 교훈의 소재로 사용된 포도원을 들어(사 5:1-7; 렘 2:21; 겔 15:1-6) 영적 진리를 교훈하고 있다. 한편 원문에서는 '비유'(파라볼라이스)가 복수로 나와 있는 바, 이것은 본 비유 외에도 또 다른 비유를 말씀하셨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병행구인 마태복음에는 이 비유가 '두 아들 비유'(마 21:28-32)와 '혼인잔치의 비유'(마 22:1-14) 사이에 언급되어 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비유의 청취자인 '저희'란 말 가운데 는 예수를 적대하는 교권주의 자들도 섞여 있었음이 분명하다(12절).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 팔레스틴은 '감람나무'와 '포도나무'가 특별히 많은 땅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한편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은 포도원을 만든 뒤에 일단의 농부들에게 소작하도록 주고 자신은 길을 떠났다. 이와 같은 소작 형태는 당시 상당히 보편화되어 있었다. 즉 페르시아 시대 이후로보다 국제화되었던 팔레스틴에는 외국의 왕이나 부호, 혹은 외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포도원을 만들고 수확의 일정한 양을 토지 소유자에게 납부하는 소작 제도가 있었다. 이때 소작인은 수확한 포도뿐만 아니라 포도주, 곡식, 기름 등의 현물이나 일정량의 돈을 납부하기도 하였다(Billerbeck). 이와 관련해서는 본장 자료노트, '포도원 가꾸기'를 보다 참조하라. 여하튼 이 비유에 등장하는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키며, 농부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그리고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산울로 두르고. - '산울'이란 포도원에 침입하는 야생 동물이나 열매를 탈취하려는 침입자들로부터 포도원을 지키기 위해 포도원 둘레에 쌓은 담장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 기서는 영적으로 선민과 이방 민족 간의 분리를 나타내며,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준다.
즙짜는 구유. - 포도즙을 짜기 위해 야외에 설치된 시설물이다. 유대인들은 두 개의 구덩이를 판 후 돌로 그 주변을 쌓고 위에 있는 구덩이에 포도를 넣고 밟았다(사 63: 23). 이때 생겨난 즙이 작은 연결 구멍을 통하여 아래로 흘러 포도즙 항아리에 담겨지고(학 2:16) 그 후 그 즙은 포도주 부대에 옮겨져 저장된다.
망대를 짓고. - 침입자를 감시하기에 용이하도록 돌로 쌓았는데(사 5:2) 높이는 보통 10규빗(1규빗은 약 45.6cm), 넓이는 4규빗으로 파수꾼이 거하던 곳이기도 하며 때때로 수확한 포도를 저장하는 창고가 되기도 하였다.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 이 비유에서 포도원을 관리하는 농부는 포도원으로 비유되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로서 제사장과 장로, 바리새인들을 가리키고 있다. 한편 당시의 일반적인 소작의 형태는 수확의 반씩 주인과 농부가 나눠갖는 것이었다.
타국에 갔더니. - 이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부여한 책임이 크다는 것을 묘사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값을 지불하고 사신 포도원을 이스라엘 농부, 즉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보살핌에 완전히 위임하셨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실로 하나님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불러내어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고, 거기에 심으셨을 뿐 아니라 울을 치심으로 외적의 침입에서 보호하시며 그들을 구속사의 주역으로 삼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준비하시는 사랑을 보이셨다.
12:2 때가 이르매‥‥한 종을 보내니. - 팔레스틴에서는 포도나무를 심은 지 2,3년이 지난, 9월경에 포도의 수확을 시작한다. 한편 여기서 '때'(토 카이로)는 정관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아마도 계약에 정해져 있었을 소작료 지불 시기였을 것이다. 즉 포도원을 세로 줄 때 이러한 계약이 분명히 있었으므로 이처럼 정한 때에 종을 보내는 것은 주인의 정당한 행위이다. 한편 여기에서의 '종'(둘로스)은 부분적으로나마 자기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하인'(오이케테스)과 달리 모든 권리가 주인에게 있으므로 주인의 명에 의해서만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노예를 말한다. 그런데 이 '종'은 때때로 하나님의 백성(신 32:36; 느 1:6; 시 135:14; 사 63:17; 계 2:20)이나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왕상 6:53; 시 132:10; 학 2:23).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부여된 사명만을 수행하여야 했던 선지자를 가리킨다. 한편 여기서 말하는 바 '포도원 소출의 얼마'는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구원을 경험하고 선민으로 택함 받은 이스라엘 이 마땅히 실천해야 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성결을 의미한다.
12:3 저희가…심히 때리고. - 농부들은 그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소작료도 주지 않은 채 거저 보내었다. 주인의 정당한 요구에 대하여 순복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주인이 파송한 종을 구타한 이러한 행위는 주인을 멸시한 행위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많은 선지자를 파송하여 그들의 죄상을 지적했으나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파송하셨던 선지자들을 핍박했던 역사를 가리킨다(왕상19:14; 대하 24:19-24; 렘 20:2; 마 23:24).
12:4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 주인이 계속해서 종을 보냈다는 것은 주인의 풍부한 인내심과 관용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농부들의 완악함도 그만큼 더 심해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 여기서 '능욕하였거늘'(에티마산)이란 '모욕을 주다' 또는 '경멸하다'란 의미로서 심각할 정도의 명예 손상을 말하는 것인데, 주인이 파견한 종에 대한 이러한 모욕적 행위는 주인에 대한 불명예와도 같은 것이다. 한편 '머리에 상처를 내는'것은 당시유대인에게 크나큰 수치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머리는 유대인에게 있어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는 것에 대한 상징이며 신체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이곳에 상처를 입혔다는 것은 대단한 불명예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모욕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를 계속하였던 것이다.
12:5 또 다른 종을…때리고 혹은 죽인지라. - 주인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농부들에 대하여 포도원 주인은 놀라운 인내심을 가지고 세 번째 종들을 파송하였다. 그러나 패역한 농부들은 다시 준 기회에도 불구하고 처음과 동일하게 종들을 구타하고 죽이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영적으로 패역하고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속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선지자를 보내시며 때로는 같은 시대에 여러 선지자를 보내기도 하셨는데(요나, 호세아, 아모스, 이사야, 미가 등) 이것 또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를 보여준다(사 48:9; 롬 9:22; 벧전 3:20; 벧후 3:19).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뜨거운 사랑과 인내로 우리들이 당신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인내하심이 영원하지 않고 끝이 있으며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사실이다.
12:6 오히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티 운'( )에서 '에티'는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 시간(still)을, 그리고 '운'은 접속사로서 '그렇다면', '거기에 응해서'란 뜻을 지닌다. 따라서 이 말에는 종들이 비극적인 상황 가운데 있을 때에 하나님이 더 이상 선지자의 무고한 희생을 막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하시겠다는 의지가 암시되어 있다.
한 사람이 있으니……아들이라. - 여러 종들이 희생되고 난 후 이제 포도원 주인은 자신의 아들을 파견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 이 아들은 포도원 주인의 파견을 받았다는 점에 있어서는 그에 앞선 종들과 같은 선상에 있지만, 후에 포도원의 상속자가 된다는 점에서는 절대적인 차이를 지닌다. 그리고 여기서는 종말론적 심판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전권을 부여받은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이것은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방책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무한한 것인가를 알게 해준다. 한편 본절의 '사랑하는'(아가페톤)이란 단순한 감정상의 애정 표현을 넘어선 유일한 존재에 대한 지고(至高)의 사랑을 표현한다. 즉 이 용어가 구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LXX)에서는 '유일한'(창 22:2; 렘 6:23)이란 의미로도 사용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는 삼위일체로서 완전한 하나를 이루신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독생자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최후로 …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 여기서 '최후로'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표현으로서 패역한 자들에 대한 엄격한 심판에 앞서 선지자를 마지막으로 파견하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포도원 주인은 자신의 독백에서 사람들이 자기 아들을 존경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혹자는 이것을 확대 해석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응을 알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전지성에 위배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비유의 목적은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히 참으시는 인내와 하나님 앞에서 저지른 이스라엘의 배역을 보여 주려는데 있음을 알아야 한다.
12:7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 농부들이 협의하여 아들을 죽이려는 상황은 마치 농부로 비유되는 유대의 교권주의자들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 협의하는 것과 유사하다(막 11:18). 예수는 이러한 비유로서 그들의 의롭지 못한 논의를 간접적으로 비방하신 것이다.
죽이자…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 농부들은 포도원 주인의 인내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포도원을 자신들이 가지려는 불의한 욕심으로 상속자인 그 아들마저 죽이려 하였다. 이러한 불의한 살해 행위는 당시 '소유주가 없는 재산'의 처리 규정과 관련을 갖는다. 즉 무연고자의 재산은 제일 먼저 소유권을 주장한 자에게 그 소유가 돌아가기 때문이었다(Lane). 따라서 소유권자의 유일한 상속자마저 죽게되면 그 재산은 경작자인 자신들에게로 돌아오게 된다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한편 그닐카(Gnillka)는 농부들로 묘사된 유대인들 특히 교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선민으로서의 특권을 이방인에게도 보편화시키려는 예수로 비유되는 아들의 시도를 막기 위해 아들을 죽였다고 한다. 즉 이 일로 인해 자신들에게 부여된 특권과 지위를 더욱 보호하고 확보하기 위한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아들에 대한 농부들의 살해 계획은 요셉을 죽이고자 모의했던 형제들과 상황이 비슷하다(창 37장). 또한 당시 민족주의자로서 외세를 몰아내려고 했던 열심당원(Zealots) 이 외국인 부재 지주를 추방하려 했던 것과 본문의 상황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교권주의자에 대한 공격이나 다른 일면으로는 인위적이고 과격한 방법으로 메시야 나라를 임하게 하려 했던 열성 당원에 대한 공격이라고 볼 수 있다.
12:8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느니라. - 농부들의 완악한 생각은 포도원이 자기들의 것으로 될 수 있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주인의 분신(分身)이며 사랑의 표시였던 상속자를 살해하였다. 그들은 비록 상속자를 살해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주인은 살아 있으며 그가 패역한 자들을 응징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이었다(시 2:4). 뿐만 아니라 이들은 아들을 죽인 후 시체를 들판에 그대로 방기하여 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므로 인해 죽은 시체를 또 한 번 모독하게 된다. 이것은 육체적 죽음과 아울러 죽은 자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키는 인격적 죽음까지 더하는 것으로서 농부들의 사악함을 극명하게 나타내 준다. 한편 본 구절의 사건을 기술함에 있어 마태와 누가는 아들을 죽이는 순서를 바꾸고 있다. 즉 아들을 먼저 밖으로 끌어낸 다음에 포도원 밖에서 죽이는 것으로 되어 있다(마 21:39; 눅 20:15). 이 비유에서 포도원은 예루살렘을 상징하며 아들은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당시 종교적 관습에 의하면 하니 거룩한 도성인 예루살렘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죄인들을 처형할 때는 도성 밖에서 사형이 거행된 것을 염두에 둔다면 마태와 누가는 보다 더 당시 관습에 의거해서 사건을 기록한 것 같다. 그러나 마가의 기록 역시 농부의 사악함을 극대화시킨다는 점과 본 비유의 초점이 농부의 어리석음과 사악함을 부각시키는데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기술 역시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있다.
12:9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 포도원 주인이 주인의 관용과 인내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으며 악용하는 농부에게 어떻게 행할 것인가는 너무나 자명하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이 너무나 분명한 대답이 가능한 질문을 함으로써 이를 듣는 사람들에게 더 큰 효과를 내게 하였다. 또한 여기에서 이 비유의 시점이 과거에서 미래시점으로 전환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역이 과거와 현재에 계속 이어지고 있으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다가오는 미래에 곧 있을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 본절에서는 이 말이 바로 앞부분에서 질문을 제기한 예수님이 스스로 하신 대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병행 구절인 마 21:41에서는 이 비유를 듣던 청중들이 대답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은 문답식 방법을 통한 교훈을 많이 주셨고 상대방의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을 흔히 했다는 점에서 마태의 사건 전개가 보다 세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Dodd). 한편 이 심판의 선언은 선민으로서 구속사의 주역의 역할을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를 박대하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적대하는 이들의 파멸과 더불어 그 역할이 다른 사람에게 이전됨을 보여준다. 이러한 예언은 역사상 그대로 실현되어 A.D. 70년 국가 형태로서의 이스라엘은 와해되었으며 복음 역시 혈통적 유대인이 아니라 영적 유대인에게로 넘어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롬 9:19-11:32). 한편 당시 예수로부터 이러한 선언을 들은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는데 이러한 사실은 눅 20:16에서 청중들이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란 호소를 봐서 알 수 있다.
12:10 성경에. - 예수께서는 시 118:22,23을 인용하여 그들에게 상기시킴으로써, 그의 청중 특히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거부하며 죽이려 하였던 대적자들인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마 11:27,28)을 놀라게 하셨다. 한편 본절은 예외적으로 공관복음서 모두에 기록됨으로써 교권주의자들에 의한 예수의 핍박 받으심과 그리스도를 통한 신약 교회의 성립이 이미 구약에서부터 예언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건축자들의…머릿돌이 되었나니. - 이 말은 본래 제 1차 예루살렘 성전 건축의 주역인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 위해 운반한 석재 중 성전 건축에 부적당하다고 판단되어 버려진 돌이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구조물인 성전 문의 기초석이 되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추정한다(Jeremias). 그런데 원래 시편에서는 이 구절이 나라의 멸망으로 쓸모없이 된 선민 이스라엘이 다시 본국으로 귀환함으로써 구속사의 주역의 위치를 회복한 사실이나 사울에게 쫓기는 초라한 다윗이 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다른 신약의 묘사와 마찬가지로(행 4:11; 엡 2:20; 벧전 2:7) 예수께서도 이 시편의 비유를 자신에게 적용시켜 자신의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예언하고 있다. 즉 여기서 '건축자'들은 유대인 지도자들인 산헤드린을 말하고, '버린'이란 살인을 의미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이 죽인 그 아들이요, 건축물 어디서나 맞지 아니하므로 내다버린 그 '돌'이다. 그리고 '모퉁이 돌'은 건축물을 지을 때 가장 먼저 놓는 것으로, 그 건축물의 기준이 되는 기초석이다. 예수님을 고전 3:11에 기록된 것과 같이 '터'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엡 2:20에서는 '터'에서 뛰어난 유일한 모퉁이 돌을 예수라 말하고, 그것이 모든 터와 건물 자체의 표준을 지배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진정 예수님은 하나님의 위대하고 신령한 구조물인 교회 안에서 이 모퉁이 돌의 역할을 하시고 계시는데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우리가 영원히 사모해야 할 하늘에 있는 성소의 머릿돌이시기도 하다(행 4:11).
12:11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 멸시를 받고 버림받은 돌을 들어 하나님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게 하신 것은 인간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고 불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인간의 시각에서는 그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고 오히려 혼란만 야기시키는 무가치한 존재였으나, 당신 스스로는 산 돌로서 많은 생명을 구하시고(벧전 2:4) 동시에 당신을 거부하고 핍박한 자들에게는 큰 형벌을 예비하셨다(벧전 2:7,8). 여기에서는 이러한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아 된 것', 즉 하나님의 인간 구원을 위한 섭리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의무인 하나님 경륜에 따른 삶을 살기 위해 산 돌이신 예수를 삶의 주춧돌이자 머릿돌로 모시고 그분이 뜻하시는 대로 우리의 삶을 영위해 가야 한다.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인간의 판단을 뛰어 넘는다는 사실은 하나님을 배역한 유대인을 버리고 이방인을 구속사의 주역으로 선택함을 묘사한 사도 바울의 기록에서도 나타난다(롬 11:33,34).
읽어보지도 못하였느냐. - 율법의 규정을 잘 알고 있으며 이를 해석할 지혜를 가진 것으로 스스로 생각했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공격적인 말로서 그들의 영적인 완악함과 참 진리에 대한 무지를 공개적으로 책망하고 있다. 특히 당시 권세 있던 교권주의자들을 꾸짖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권위가 강하게 나타나므로 인해 허위와 위선으로 뭉쳐진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12:12 자기들을 가리켜 … 두려워하여. - 본절에 언급된 자들은 막 11:27에 나타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장로들로서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말한다. 이들은 예수의 비유가 자기들의 영적 완악함과 종교적 기득권 유지를 위한 이기적인 태도를 가리키는 말씀인 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반박하지 못하고 단순히 체포하여 대중들과 만날 기회만을 박탈하고자 한 것은 자신들의 비진리를 스스로 입증한 것이나 다름없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잡으려고 했으나 따르는 무리들로 인하여 잡지 못하게 된 것 역시 자신들이 법을 올바로 시행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을 보여 준다. 당시 예루살렘은 유월절 축제로 인하여 각지에서 모인 수많은 순례자들로 가득찼고(약 120만 정도로 추산됨)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선지자로 여겼고(마 21:46) 그를 왕으로까지 추대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산헤드린 회원이 예수를 체포하는 일은 수많은 순례자들이 꽉 찬 예루살렘에서는 위험한 일이었다. 이처럼 예수를 제거하려는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가 실패하는 경우가 '무리들' 때문이라는 사실은(막 11:18) 예수의 교훈이 이기적인 욕심을 전제하지 않고 듣는 백성들에게는 진리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지대한 영향력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를 버려두고 가니라. - 이들이 물러난 것은 예수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무리들이 두려워서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예수에 대한 도전이 중단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불리함을 만회하기 위해 잠깐 동안 후퇴한 것에 불과하다.
12:13-17 납세에 대한 논쟁
예수님의 권세에 관한 논쟁이 무위로 끝나고 오히려 악한 농부의 비유로서 자신들의 죄악이 노출되자(12:1-12) 이번에는 보다 간악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평상시 불화하였던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서로 협력하였다. 즉 그들은 당시 신학과 정치에 있어서 쟁점이 되었던 로마 정부에 세금을 바치는지 그른지에 대해서 질문했다. 이에 대해서 만약 예수님께서 옳다고 대답하면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자처하던 바리새인들이 나서서 예수님을 매국노로 정죄할 작정이었으며, 반대로 그르다고 대답하면 친 로마주의자들로 자처하던 헤롯 당원들이 나서서 예수님을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자로 정죄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간교한 음모 역시 신적 지혜를 가지셨던 예수님에 의해 너무나 간단히 물리쳐졌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 국가의 권위와 질서를 인정해야 되지만 그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의 권위와 질서를 인정해야 된다는 사실을 은연 중에 강조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교훈을 깨달을 수 있다.
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인간은 온전히 하나님의 것으로 바쳐져야 마땅하다. 예수님께서 로마의 은화(데나리온)에 새겨진 가이사 황제의 초상을 가리키시면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였다. 진정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 성도들은 자신의 몸과 마음뿐만 아니라 시간과 재능까지라도 모두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오로지 그분의 뜻에 따라 그 모든 것을 사용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② 비록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상의 국가에 속해서 살고 있는 이상 누구보다도 철저히 국민의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해야 된다. 성경은 지상의 국가 권력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일을 제외하고서는 반드시 그것에 순종하도록 교훈하고 있다(롬13:1-7). 만약 성도가 공연히 국가의 권위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다름 아닌 하나님의 권세를 거스리는 결과가 초래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에 대해 보다 상세한 설명은 마 22장 자료 노트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를 참조하라.
12:13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 여기서 '저희'는 악한 농부의 비유를 듣고 쫓겨간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과 동류의 무리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예수의 권세에 대한 종교적인 문제 제기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제는 정치적인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또다시 예수를 모함에 빠뜨려 사로잡을 궁리를 하는데, 이러한 사실이 본절에서 '책잡으려'(아그류소신)라는 말로서 표현된다. 즉 이 말은 사냥꾼이 사냥감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헛 점을 찾아 활을 쏘아 짐승을 사로잡는(catch) 동작을 의미한다. 마태는 이를 '올무에 걸리게 할까'로 표현했고(마 22:15), 누가 역시 사냥꾼이 사냥감을 면밀히 관찰하는 것을 묘사하는 엿보다가(파라테레산테스)라는 말을 사용하여 이러한 사실을 보여 준다(눅 20:19). 그만큼 이들은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리새인과 헤롯당. - '바리새파(Pharisees)는 '분리된 자'라는 뜻으로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인해 당시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 및 중·근동을 휩쓸었던 헬레니즘의 타락한 영향으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킨 사람들을 뜻한다. 이들은 의식적 정결에 관한 율법을 지키는데 철저하여 죄인들로 취급하는 사람들로부터는 음식, 음료를 구입하지 않고 죄인들의 집에서 식사도 같이하지 않았다. 이들은 이처럼 급격한 문화의 변동 속에서도 율법이 실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새로운 전통을 발전시켰는데 B.C. 1세기의 유력한 두 지도자를 통하여 두 학파가 창시되었다. 그 하나는 힐렐(Hillel) 학파로 온건하여 유대 정통주의와 양립할 수 있다 하여 로마의 법을 수용했고, 또 다른 샴마이(Shammai) 학파는 완고하여 로마에 대해 배타적이었다. 이들의 율법 해석 전통은 율법과 같은 권위를 갖는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은 '성문 율법'으로서 모세 오경인 토라(Torah) 뿐 아니라 '구전 율법'도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본절에서 예수께 나아온 자들은 샴마이에 속한 자들로 이들은 가이사(Caesar)에게 세금 내는 것을 반대하는 반로마 집단의 대표로 온 것이다. 반대로 '헤롯당'(Herodians)은 헤롯의 왕가를 지지하는 유대인의 한 당파로서 로마에 대해 호의적이고 유대인의 메시야 운동을 반대하는 일종의 정치적 집단이었다. 이들은 최초로 헤롯(B.C. 37-4년)을 가리켜 '대왕'이라고 불렀는데, 이에 대해서 터툴리안(Tertullian)과 제롬(Jerome)은 이들이 헤롯을 약속된 메시야로 생각했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헤롯이 화려한 성전을 재건하였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로 인하여 평소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은 친분있는 사이가 아니라 오히려 반목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신약 총론, '신약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참조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예수를 잡는 일에는 결정적으로 하나된 것은 예수는 반로마적인 혁명론자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친로마적인 체제 유지론자도 아니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함으로써 하나의 선동가로 비춰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이점이 예수를 제거하려 한 양 집단의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12:14 당신은 참되시고…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 그들은 예수님의 교훈이 지닌 진실성과 성품의 위대함을 수사학적인(rhetorical) 용어로써 토로하고 있다. 비록 그들은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나아온 사람들이긴 하지만 완벽에 가까우리만치 예수에 대하여 정확히 평가를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가장 열렬한 제자들인 체 행세하였다. 특히 이들이 말한 '참되시다'(알레데스)라는 말은 부정을 의미하는 불변사 '아’( )와 '숨어 있다'를 의미하는 '란다노'( )의 합성어로서 숨겨진 바가 전혀 없이 정직하며 순수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의 초월적인 권위를 고백하는 용어로 여러 번 사용되었다(행 8:13; 롬 3:4; 고후 6:8). 따라서 그들이 지금 말하는바 그대로 예수의 '참되심'을 인정하였다면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라는 표현은 상대적인 인간의 판단이나 지위, 혹은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일이 없음을 가리킨다. 이 역시 신적 불변성을 반영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와 더불어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는다'는 표현은 모든 인간이 상대적인 지각력 밖에 가지지 못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본질을 알고 있다는 의미로서 신적 전지성을 반영하는 말이다. 한편 여기에 사용된 '하나님의 도'라는 말은 믿음과 행위의 방법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백성들이 사고하고 생활해 나가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 서론적인 미사여구에 이어 무엇이 옳으냐라는 핵심적인 물음이 나오는데, 이것은 예수를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사전에 준비해온 질문이다. 여기서 가이사는 최초로 로마 황제가 된 가이사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에서 유래된 말이었으나 그 직위를 이어받은 모든 황제를 지칭한 말이 되었다. 한편 여기서 거론되는 당시 황제는 디베료(Tiberius)이다(눅 2:1; 3:1). 또한 예수의 적대자들이 징수 참여의 질문을 제기한 '세'(켄손)는 A.D. 6년 유대 지역을 다스리던 아켈라우스(Archelaus)가 폐위된 후 세리들이 유대의 모든 성인, 즉 남자는 14-65세, 여자는 12-65세까지 1데나리온씩 거두어 로마로 보낸 인두세(人頭稅)를 말한다. 이런 세금은 로마 황제를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하며 신적 권위까지 부여하고 유대가 로마의 속국임을 상기시키는 것이었으므로,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불만스러운 제도였다. 따라서 이 질문은 매우 교묘한 함정이었다. 만일 긍정적인 답변을 한다면 당시 대중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경건한 바리새인들과 열렬한 애국자들로 자처했던 열심당원들의 극한 반발이, 부정적인 답변을 한다면 실제 권력을 잡고 있던 로마 정부에 대한 반역으로 헤롯당에 의해 고발될 어려운 진퇴양난의 처지였다(눅 20:20; 23:2).
12:15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 앞절의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란 표현보다 더 적극적인 재촉의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이전에 보였던 예수에 대한 찬사는 아랑곳없이 이제 포획물을 앞에 둔 사냥꾼처럼 올무를 조이고 있는 것이다.
그 외식함을 아시고. - 본절에 대하여 마태는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마 22:18), 누가는 '그 간계를 아시고'(눅 20:23)로 말함으로써 예수께서는 그들이 예수를 파멸에 빠뜨리기 위해 나아왔음을 이미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한편 '외식'(휘포크리시스)은 위선(hypocrisy)의 뜻을 가진다. 예수께서는 이미 교권주의자와 당시의 지배계층을 위선자로 질책한 바 있었는데 여기서 다시 그들의 비겁한 허위의식을 밝히고 계시는 것이다(막 7:6).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 인류를 처음으로 시험하여 타락케 한 것은 사단이다(창 3:1-7). 그 이후에도 사단은 인류를 계속 시험하여 왔으며 공생애를 시작하려던 예수조차 광야에서 시험한 바 있다(막 1:12,15). 따라서 이때 진리를 선포하던 예수께 나아와 시험하던 무리들은 구속사의 주역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를 시험하는 것으로 사단의 행동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작은 은화로 로마의 통치권이 미치는 제국 내에서는 이 돈으로 세금을 내어야 했다. 이 은전의 한 면에는 승리와 신적 권위의 상징인 월계관을 쓴 디베료 황제의 흉상과 함께 '신성한 아구스도의 아들 디베리우스 가이사 아구스도'라는 황제를 찬양하는 말이 새겨져 있고, 그 뒷면에는 '최고의 사제(Pontifex Maximus)'라는 말과 함께 황태후리비아(Livia)의 화상(畵像)과 더불어 그 왼쪽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올리브 나무가지가 새겨져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눅 20장 자료노트, '가이사상' 삽화를 참조하라. 이러한 것들은 결국 황제 숭배 사상을 조장하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로마의 화폐가 통용되었다는 사실은 그 통용된 지역이 그 화폐에 찍힌 실재 인물에게 지배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라이트푸트(Lightfoot)는 '어떤 왕의 흉상이 새겨진 돈이 통용되는 것은 거기가 어디든지 그곳 주민은 그 왕을 자기들의 군주로 인정한다는 것의 증거이다'라고 말하였다. 한편 예수께서 로마의 은전 데나리온을 가지고 오라고 하신 것은 예수께 시험하러 나온 자들 자신이 이미 로마의 돈을 사용함을 밝힘으로써 그들의 질문이 진지한 것이 아니며 동시에 이러한 질문을 할 자격이 없는 위선자들임을 나타내려 하기 위함이다.
12:16 가져왔거늘…뉘 것이냐. - 예수를 시험하려고 나아온 이들은 황제의 상이 새겨진 데나리온을 가지러 사람을 보낸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돈을 꺼내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데나리온을 납세하는데 사용하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일상생활에서 편의를 위해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실제로 황제를 군주로 인정한 것이 된다. 결국 이들은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다가 자신들의 부도덕성과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 한 흉계만을 폭로하는 결과를 낳았다.
12:17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 이 말은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이 당시 민족주의자들이 생각했던 바와 같이 거부될 악행이 아니며, 동시에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친다는 명목으로 하나님의 일에 대해 열심을 보이지 않았던 헬라주의자의 태도 역시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터툴리안(Tertullian)은 동전에 새겨진 가이사의 이미지(image)는 가이사에게 바치고 너희에게 새겨진 하나님 자신의 이미지는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해석함으로써 이 두 가지가 병존할 수 있음을 드러내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국가 권력과 하나님이 서로 반목 관계가아님을 가르치셨던 것이다. 바울과 베드로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성도가 세상의 권세자에게 취할 태도를 명쾌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롬 13:1-4; 벧전 2:13-17). 그러나 하나님과 국가 권력이 서로 충돌할 경우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의 권력은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섭리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비록 국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역사 안에 포함되어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절의 예수의 말씀은 가이사의 영역과 하나님의 영역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가이사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 되기 때문에 가이사에게 대한 의무도 있다는 것이 된다(Cranfield). 이에 대해서는 마 22장 자료노트,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를 보다 참조하라.
기이히 여기더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세다우마존'( )은 '놀라다(marvel)', '감탄하다(wonder)'의 뜻을 지닌 말로서 예수의 대답이 그들이 전혀 예측치 못했던 바이며 너무나 완벽해서 그를 책잡으려 하던 자들까지 감탄하며 놀라는 것을 묘사한 표현이다. 병행 구절인 눅 20:26에서는 그 결과 '참람케 됨'을, 마 22:22에서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예수를 떠나감'이 묘사되어 있다.
12:18-27 부활에 관한 논쟁
예수님을 향한 유대 지도자들의 파상 공격은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된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정치적 질문을 통해 올무에 빠뜨리려는 간교한 음모가 실패로 끝나자마자,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등장하여 부활 교리에 관한 논쟁을 제기함으로써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시도하고 있다. 즉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이 정경으로 인정하는 모세오경 속에 부활의 교리가 명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는 이유로 부활·영생·내세·천사의 존재 등을 결코 믿지 않는 자들이었는데, 만약 죽은 사람이 부활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모세의 율법에 규정된 계대 결혼 제도(levirate marriage)와 명백히 모순된다는 주장을 편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예수님께서 동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주님 자신의 부활 예고(8:31; 9:9,31; 10:34)가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 되도록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두개인들의 시도 역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으며, 오히려 그들의 영적 무지만 폭로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왜냐하면 부활 후에는 혈육과 인종이 문제가 되지 않으므로 결혼 제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성도가 천사와 같이 영광스러운 존재로 변한다는 사실로써 천국이 죄가 지배하는 이 땅과 같지 않을 것임을 예수님께서 설명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① 인간적인 논리와 지식으로 영적인 문제를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사두개인들은 육신적인 가치 기준으로 내세의 삶을 오해했기 때문에, 유대 종교의 지도자로 자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적 회의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② 부활 신앙이야말로 기독교 진리의 초석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자신의 부활도 믿지 못할 것이며, 또한 자신의 부활을 소망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기독교 신앙을 지닐 필요도 없을 것이다(고전 15:12-19).
12:18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 이들은 당시 유대인의 세 종파, 즉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센파 중의 하나로서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성격이 더 뚜렷했다. 이들은 다윗과 솔로몬 당시의 대제사장인 사독(삼하 8:17)을 직계 조상이라 생각하며 계속 세습적인 제사장직을 수행하여 왔던 바 민중들과는 구분되는 귀족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특히 대제사장과 주요 사제는 거의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매우 폐쇄적이고 배타적이었기 때문에 민중들과는 단절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모세 오경에만 정경적 권위를 부여 하므로 인해 오경 이외의 성문 율법에 기초한 바리새파의 교리와 특히 구전 율법(oral law)은 철저히 배격하였다.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도 없고 내세의 기쁨이나 슬픔까지도 없다. 주장함으로써 죽은 자와 하나님과의 관련성을 제거해 버렸고(행 23:8) 그와 함께 천사나 악마의 존재도 부정하였다. 결국 이들은 운명이라는 것을 모두 말소시키고 만사를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의 탓으로 돌려 버린 인간 중심적인 현실주의자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신약 총론, '신약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보다 참조하라. 이러한 사두개인들이 자기의 입장과 대조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와의 설전에서 패배하자 자신의 논리로 예수를 궁지에 빠뜨리기 위해 예수께 나아왔다.
12:19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 이들은 바리새인들이나 헤롯당들이 그랬듯이 예수를 존경하는 마음도 없으면서 마치 그를 존경하듯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예수께 나아왔다. 그리고 그들이 구약 가운데 유일하게 신빙성을 부여하는 모세 오경 가운데 기록된 모세의 계대 결혼법(신 25:5,6)을 예로 들어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였다. 여기서 '계대 결혼법'(levirate marriage)이란 사람이 자식을 낳지 않고 죽을 경우 그의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형을 위해 자식을 낳아주는 제도로 '수혼'(婚) 혹은 '형사취수'(兄死取嫂)라고도 불리운다(창 38:8; 룻 3:9-4:12). 이러한 제도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앗시리아, 힛타이트와 가나안 국가에도 있었는데 이들 나라는 혈통 유지의 의미만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경우는 선택받은 하나님 백성이 남편이 죽으므로 이방인과 결혼하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의지할 데 없는 과부에게 자식을 남겨 부양케 함은 물론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케 하여 가문과 기업을 유지케 하기 위함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에 대해서는 신 25장 연구자료 '계대 결혼법'을 참조하라.
12:20-22 칠형제가 있었는데 …여자도 죽었나이다. - 이와 같은 질문은 사두개인들이 부활 교리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던 불합리성을 지적하므로 인해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고, 또한 그들과 대립하던 바리새인까지 제압하려는 속셈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기는데 아마도 이 이야기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는 이들과의 논쟁을 위하여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유치한 이야기일 것이라는 말이 타당성이 있다(Wessel). 왜냐하면 계대결혼을 거부하는 것은 비록 비도덕적인 것이긴 하지만 자식 없는 남편의 계속적인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여자에게도 원인이 있는 것으로 인정되었으므로 그 결혼을 거부할 수도 있었을 것인데(창 38:6-10) 7명이 모두 결혼하고 죽었다는 것은 이해키 어렵기 때문이다.
12:23 부활을 당하여…뉘 아내가 되리이까. - 이러한 난해한 질문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부활 사상을 깨뜨리기 위한 사두개인들의 비장의 무기였던 것 같다. 즉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수혼 제도는 부활 이후 가족제도의 혼란을 야기하므로 모세의 심중에는 이미 부활 사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이 제기한 질문의 경우 첫 번째 결혼한 형이 부활 이후에도 남편이 된다고 생각했다(Lohmeyer). 그러나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들의 이와 같은 곡해는 부활한 자들 역시 지상에서와 같은 생활을 계속할 것이라는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12:24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 예수께서는 현세와 내세 간의 차이를 알지 못하고 현세를 기준으로 내세를 규정하는 사두개인들의 그릇된 부활관을 두 가지 측면에서 꾸짖으셨다. 첫째는 성경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다. 즉 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부활에 관한 교훈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욥 19:25; 사 26:19; 단 12:2). 이러한 것을 간과할 뿐 아니라 오경 가운데서도 출 3:6 등에는 부활사상이 암시되어 있으나 오경의 문자적인 해석만을 고집하는 까닭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를 알지도 못하고 더 나아가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했다. 즉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인간과 천지를 창조하셨던 것처럼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음을 알지 못했다. 이처럼 그들은 내세를 현세와 혼동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의 사고 안에 제한시키는 잘못을 범한 것이다.
오해함이 아니냐. - 여기서 '오해함'(플라나스데)은 '길을 잃다', '방황하다'란 뜻을 갖고 있다. 이는 마치 목자의 말을 듣지 않음으로 길을 잃어버린 양과 같이 우왕좌왕하는 것을 뜻한다(마 18:12; 벧전 2:25). 또한 이 말은 궤도를 이탈하여 떠돌아다니는 별, 곧 유성(遊星)을 가리키기도 한다(유 1:13). 이처럼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성경을 알지 못함으로 인해 갈 바를 알지 못하여 유리하게 되는 비극적인 상태에 처하여 있음을 예수께서 바로 지적하신 것이다.
12:25 살아날 때…천사들과 같으니라. - 예수님의 답변은 내세가 있음을 전제한 후 현세와 내세와의 명백한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즉 현세에서 사람들은 결혼을 통하여 한 가정을 이루고 그 속에서 참삶의 의미를 느끼고 자손의 번성을 꾀한다. 그러나 내세에는 부활한 성도들 간에 큰 기쁨이 항상 존재하고 온 인격들이 한 가정의 형제와 같기 때문에 결혼이라는 것과 자손을 퍼뜨리는 일 등은 필요치 않다. 따라서 그곳은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또는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예속되지 않으며 부활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수가 고정될 것이다(계 7:2-8). 이와 같은 사실로 볼 때 그들이 인정하는 모세 오경에서 천사들의 존재를 분명히 가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창 19:1,15; 28:12; 32:1) 천사들의 존재를 부인한 것은(행 23:8) 예수의 지적처럼 사두개인들이 성경에 대하여 무지하거나 성실치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예수께서는 부활한 몸이 천사가 아니라 천사와 같이 된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천사가 순수한 영적 존재임에 반해 내세의 성도는 부활한 육체를 입고 있음을 반영한다. 우리는 그 상태가 어떠할지에 대해 잘 알 수는 없으나 태어나고 죽음이 없는 모습을 가질 것은 분명하다(눅20:36). 아마 이는 '지상에서 생명이 갖는 모든 결함을 벗어난 자유로운 상태'일 것이다(Calvin). 이러한 부활과 관련해서는 그랜드 종합 교리 중 '종말론' 부분을 보다 참조하라.
12:26 모세의 책 중. - 예수께서는 성경을 오해한 사두개인들의 오류를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계신다. 여기 언급된 모세의 책은 사두개인들이 유일하게 정경으로 인정하는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모세 오경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들은 오경의 일부인 신 25:5, 6에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부활이 없음을 논증하며 예수를 시험하였으나 오히려 예수께서는 모세 오경에 있는 부활의 증거를 역으로 제시하고 계신다.
가시나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 이는 출 3:1-6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모세에게 드러내는 장면이다. 즉 예수께서는 이 내용을 말씀하시므로 인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같은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이미 육신적으로는 죽었으나 그 존재가 완전히 무(無)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이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27절), 족장들이 현재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 강하게 보여 준다. (Gnilka). 한편 본절에서 마가는 생략하고 있으나 마태는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낼 때 현재형 동사 '나는...이다'를 사용함으로써 모세에게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그 시점에도 그들이 살아있었음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마 22:32).
12:27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생존하는 자들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과 더불어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리고 육신적으로 이미 죽었던 이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은 또한 부활의 확실한 증거이기도 하다. 이처럼 생명의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자는 비록 육신은 죽는다 할지라도 그 영혼은 계속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며 결국 마지막 날에 육체까지 부활함으로써 완전한 부활을 체험하게 된다. 한편 구약에는 부활에 대한 암시가 많은 반면에, 신약에는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과 사건이 많이 언급되어 있다. 즉 예수께서 친히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셨고(눅 7:11; 요 11:11), 친히 죽으셨을 뿐 아니라 친히 다시 사심으로 부활의 주인이심을 보여 주셨다(마 27:52,53), 더욱이 예수께서는 이 세상 끝 날에 모든 죽은 자를 일으키시고 심판하시는데 불신자도 부활하여 영원한 징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으며(마 10:28; 요 5:28),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될 것이라고 하였다. (고후 5:10). 그런데 이 부활의 시기에 관하여서 성경은 일반적으로 주의 재림시라고 언급한다(고전 15:51,52; 살전 4:16).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 문자적으로 '너희가 크게 자신을 속이고 있도다'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이것은 부활이 없음을 주장하려던 사두개인들의 주장이 그들의 논리의 근거로 삼는 모세 오경과도 모순됨을 증거함으로써 전혀 정당성이 없으며 성경 또한 크게 잘못 알고 있음을 책망하시는 말씀이다. 한편 이와 병행 구절인 눅 20:39,40에는 바리새인으로 추정되는 서기관들이 이 말을 듣고 찬성의 뜻을 표했으며 사두개인은 더 이상 질문을 하지 못하고 잠잠할 수밖에 없었음이, 그리고 마 22:33에서는 이를 듣는 무리들이 놀랐음을 기록함으로써 예수의 가르침이 갖는 신적 권위를 보여 준다.
12:28-37 가장 큰 계명에 관한 논쟁과
메시야 신분 논쟁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 그리고 사두개인들의 교묘한 질문을 지혜롭게 물리치시자, 이번에는 서기관중의 한 명이 나서서 과연 어떤 계명이 율법 가운데서 가장 첫째가 되는지 질문을 했다. 물론 본서의 기록자 마가에 의하면 이 서기관은 비교적 진지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으나, 마 22:35에 의하면 역시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을 한 것으로 언급된다. 하여튼 예수님께서는 서기관의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심으로 랍비들이 분류해 놓은 613개 조항의 계명들 가운데서 과연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 논쟁을 벌이던 유대인들의 불필요한 태도를 간접적으로 책망하고 계신다.
한편 본문의 후반부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동시에 지니셨음을 밝히시며 유대인들의 잘못된 메시야관을 수정시키기 위해, 구약 성경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자 다윗의 주(主)로 예언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시는 모습이 소개되고 있다. 이후로부터 적대자들은 어려운 질문으로써 예수를 올무에 빠뜨리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토론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모함할 방법을 찾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본문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아무리 성도들이 모든 율법을 준수하고 열심 있는 신앙생활을 할지라도 마음과 지혜와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전13:1-3). 물론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별개의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일이다(요일 4:20,21). 또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 대한 사랑을 더욱 심오하게 만들고 인간에 대한 사랑은 동시에 이 계명을 명하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실증하는 것이 된다.
② 당시 예수를 반대하는 많은 무리들은 예수가 다윗의 혈통을 이어 받은 목수의 아들이라는 인간적인 면만을 보려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메시야는 다윗보다 먼저 계셨던 분이며 다윗조차 '주'로 호칭하는 신성을 지니셨음을 밝히셨다. 따라서 성도들은 예수님의 인성(人性)만 부각시키는 인본주의자들과 예수님의 신성(神性)만 강조되는 신비주의자들을 다같이 경계해야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을 아울러 갖추신 분으로서, 우리 인간들의 모든 고통과 연약함을 친히 아실뿐만 아니라 또한 그 모든 문제를 능히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권능을 지니신 분이다.
12:28 서기관. - '서기관'(그람마테이스)은 '글을 옮겨 적는 자'란 의미를 지닌다. 이들은 성경을 필사(筆寫)하는 자였으나 점차 성경을 능숙하게 해석할 수 있는 전문가로 대접받았다. 따라서 그들은 '랍비' 혹은 '율법사'(마 22:35), '교법사'(눅 5:17)로도 불리워진다.
변론하는 것을 듣고‥‥예수께‥‥나아와. - 평소 율법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서기관이 예수의 탁월한 지혜에 감탄하여 자신의 의문점을 묻고 있다. 이처럼 당시 교권주의자들이 예수를 적대시했던 반면 이 서기관은 선의(善意)로써 진지한 자세를 가지고 예수께 질문했기 때문에 좋은 해결책을 찾았을 뿐 아니라 칭찬을 받게 된다(34절).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 의식적인 신앙을 가졌던 당시 유대인에게는 인간 몸을 이루는 지체의 수효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248개의 행하기를 촉구하는 적극적인 명령과 일년을 의미하는 365개의 행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금지령이 있었다. 한편 여기서 '첫째'(프로토스)는 시간적으로 첫 번째를 의미할 뿐 아니라 지위나 계급에 있어서도 으뜸 됨을 가리킨다(Robertson). 당시 율법의 전문가들 사이에는 이 율법 중에 어느 것이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었다.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첫 계명을 제물과 희생에 관한 것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레위기에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예배는 적절하고 온전한 제물에 달려 있다고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레 22:21, Bede).
12:29 이스라엘아 들으라. - 본절은 신 6:4의 첫 부분과 동일한데 이것은 여호와에 대한 헌신을 다짐하는 이스라엘의 '신앙 신조'인 '쉐마'( )의 구절이다. 이 쉐마는 신 6:4-9; 11:13-21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대인들은 이것을 매일 아침저녁으로 암송하고, 또 그것을 양피자에 써서 작게 접은 후 통에 넣어 팔이나 이마에 착용함으로써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이 자신의 본분임을 고백하고 자신이 선택받은 민족임을 나타내는데 사용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신 6장 자료노트, '경문'(經文)을 참조하라.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 이 말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규정한 십계명 중 제1계명에 해당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유일하시며 절대자시고, 오직 유일한 주(主) 하나님이시라는 이러한 고백은 유대인 종교의 출발점임과 동시에 기독교의 유일성을 보장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본문은 이러한 유일한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없는 분이 아니라 바로 '우리 하나님'임을 밝힘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에 계속 개입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심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해서는 출 18장 자료 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12:30 마음. - 성경적 개념으로 마음은 존재와 인격의 중심이다. 즉 지 ․ 정 ․의를 포괄한 인간의 전반적인 정신적 기능의 좌소(座所)이며 동시에 종교심이 깃드는 곳으로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본절에 나오는 헬라어 '마음'(카르디아)은 뒤이어 언급된 '목숨'의 의미를 포함하며 '뜻'과 '힘'이 발생하는 근원으로서의 의미도 지닌다.
목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케'( )는 일차적으로는 생명을 의미하나, 보다 근원적으로는 생명력이라는 의미도 지닌다. 따라서 본절에서의 의미는 인간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생명조차 포기하는 것과 아울러 활기차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것도 포괄하는 의미를 지닌다.
뜻.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노이아'( )는 인간 지성의 중심일 뿐 아니라 기질과 마음가짐의 중심이다. 따라서 본문은 맹목적이고 무지한 맹종으로서가 아니라 명석한 이해력과 전인적인 통찰력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한편 예수 교훈의 근거가 되는 신 6:5의 히브리 본문에서는 이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히브리 본문의 문맥 속에서는 뜻과 마음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실제적 행동에 앞서 마음 속의 뜻이 보다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해 이를 첨부시켜 사용한 것 같다.
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스퀴오스'( )는 인간의 영적. 육체적 활동력 모두를 포함한 전인적인 역량을 나타내는 말이다.
사랑하라. - 이 말이 원문에는 명령형이 아니라 2인칭 단수미래형으로 나와 있다( 아가페세이스). 그러나 이러한 미래적인 표현이 강한 의지를 나타내는 명령문이나 당연히 준수해야 함을 강조하는 법조문에 쓰인다는 점에서 결국 이 모든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모든 '능력'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한편 본절에서는 '다하고‥‥다하고‥‥다하고‥‥다하고'라는 말이 중복하여 쓰였다는 점에 유의해 보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에 대하여 내키지 않는 태도로 응답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주심으로 자기 자신을 주셨는데 이보다 더 놀라운 자기희생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요 15:13; 롬 5:6-10; 고후 8:9). 그러므로 그렇게 크신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는 인간 역시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고전 6:20; 10:31; 고후 9:15; 엡 5:1,2; 골 3:12-17).
12:31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예수님은 계명 중 첫째가 무엇이냐는 서기관의 질문에 대해 두 가지 측면에서 대답하셨는데 첫째는 이미 앞 구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태도이며, 둘째는 본절에서 설명하는 바 피조물인 인간들 상호간의 관계에 대한 교훈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다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곧 사랑이다. 그러나 그 사랑의 출발점이 하나님에 대한 전적 사랑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본절은 레 19:18의 말씀으로서 이웃에 대한 사랑은 사랑의 출발점인 하나님 사랑이란 신앙적 차원의 문제가 인간 사랑이란 실천적 차원으로 옮겨져서 율법의 완성을 이룸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레위기에서는 이웃의 범위가 이스라엘이나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외국인까지 국한되지만, 예수가 말한 이웃은 눅 10:29-37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와 같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까지 그 대상의 영역이 확대된다. 이것으로써 예수는 처음으로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온전한 사랑의 연합이 율법의 완성임을 제시하셨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안에서 이웃을 사랑해야함을 기억해야 한다.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이 계명이 구약에 언급된 모든 계명의 요약임을 말해준다. 한편 이와 병행 구절인 마 22:40에서는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로 나와 있다.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 전체를 가리키므로 결국 30,31절의 이중 계명이 모든 구약 교훈의 핵심임을 보여준다.
12:32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 '옳소이다'(칼로스)라는 말은 28절에서 서기관이 예수에 대한 판단 근거인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에서 '잘하신'과 동일한 말로서 이는 '좋습니다' 또는 '훌륭합니다'로 대치될 수 있다. 서기관은 예수의 답변에 대하여 처음 나아올 때 예상했던 결과를 얻었음으로 인해 매우 흡족해 한 것이다. 즉 그는 그 당시 많이 주장되었던 예물에 대한 계명보다 사랑이 우선임을 주장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인정한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하여 예수는 29절에서 신 4:35를 인용한 반면, 이 서기관은 신 4:35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독특성을 자기 나름대로 인정하고 있다. 한편 본절에서 서기관이 신 6:4 히브리어 본문에 나오는 '여호와'라는 칭호를 삭제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으려는 유대인들의 경건한 전통에서 기인한 것이다.
12:33 마음을 다하고‥‥제물보다 나으니이다. - 서기관은 예수의 가르침에 전적인 동의를 표하고(32절) 나서 예수께서 방금 말씀하신 것을 반복하므로써 그 뜻을 다시 되새기고 있다. 그런데 그는 '목숨'과 '뜻'이라는 말을 '지혜'라는 말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의미하는 바는 예수의 말씀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일치한다. 그는 또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되는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계명이 근원적인 가치를 갖는다는 사실을, 이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우위에 있다는 구약 예언자들의 가르침(삼상 15:22: 사 1:11; 호 6:6)을 상기함으로써 확인하고 있다. 한편 진리에 대한 서기관의 이런 태도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많은 교훈을 준다. 즉 그는 율법에 대하여 맡은 사람을 가르치는 서기관의 지위에 있었으나 진리 앞에서는 자신의 지위나 명예 또는 체면도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인용한 '번제물'은 모두를 불로 태워서 바치는 제물을 의미하고(레 1:9). '기타 제물'은 모두 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과 경배자가 제물의 일부를 분배하여 가지는 일반적인 제물을 의미하는 것 같다.
12:34 지혜 있는 대답함을 보시고. - 서기관의 대답에 대한 예수의 평가 역시 매우 긍정적이다. 여기서 '지혜 있게'(누네코스)란 '이해력', '지성'을 의미하는 '누스'( )와 '소유하다'를 의미하는 '에코'( )의 합성어로서 '사려 깊고', '슬기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즉 이 말은 예수께서 서기관의 말이 입에 발린 외식적인 말이 아니라 진지하게 생각한 결과 하나님의 뜻에 맞는 영적으로 슬기로운 대답을 하였음을 인정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멀지 않도다. - '멀지 않도다'는 '아주 가까운'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말은 벌써 그 서기관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했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를 완전히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서기관은 당시 대부분의 교권주의자들이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전면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음에 비해 진리의 핵심을 알고 있었으므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은 많은 적대자들과의 논쟁이 있었다. 특히 공적 선교의 마지막 날인 고난 주간 화요일에는 성전 뜰에서 산헤드린 공회원(막 11:27-12:12), 바리새인과 헤롯당원(13-17절), 사두개인(18-27절) 등과 더불어 장시간 논쟁을 벌이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들의 도전을 모두 물리 치셨다. 즉 예수를 올무에 빠뜨리기 위해 나왔던 무리들이 오히려 자신들이 비 진리에 속해 있음을 입증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더 이상 논쟁을 야기함으로써 예수를 시험하려는 자는 없게 되었다. 또한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란 말은 뒤이어 나오는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지는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12:35 성전에서 가르치실 새 대답하여 가라사대. - 가르침의 대상이 본절의 병행구인 마 22:41에는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 눅 20:41에서는 '저희에게'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서 성전 안에서 여러 백성에게 가르치셨고 여기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대답하여'란 어떤 사람이 제기한 질문에 대답을 주셨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교훈 듣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욕구에 부응하여 가르침을 베푸시는 상황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 예수는 자신이 메시야되심을 나타내기 위해 당시 유대인들의 공통된 생각인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구약 성경에 계속 예언되어 온 것으로(삼하 7:12,13),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때 무리들이 외친 '찬송하리로다‥‥다윗의 나라여'(막 11:10)라는 환호성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12:36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 본절 이하의 내용이 다윗이 저작한 시편에 나오는 말씀임이 밝혀져 있다(시 110:1). 그러나 그리스도는 다윗보다 더 근원적인 출처를 성령으로 밝힌다. 즉 성령이 다윗을 감동시키시므로 이 시편을 서술했다는 것이다. 이로 볼 때 성경의 제 1저자는 성령이며, 제 2저자는 성령에 감동받은 인간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성경말씀의 근거를 성령 하나님에게 둘 때 성경의 참다운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다(본서 제 1권 성경 교리, 신론 중 '성령 ' 참조).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 다윗이 지은 원래 시에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로 나와 있다. 따라서 히브리 본문의 '여호와'가 여기서는 '주'로 나와 있다는 차이점을 지닌다. 이러한 불일치는 히브리인들이 여호와( )라는 이름을 직접 입으로 말하는 것을 불경하다고 생각하여 의도적으로 '주'(主)라는 의미를 지닌 '아도나이'( )로 읽는 데서 기인한다. 이러한 전통에 따라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을 헬라어로 옮긴 70인역(LⅩⅩ)에는 여호와란 이름 대신 '아도나이'의 헬라어 번역인 '퀴리오스'( )가 나오며 예수께서도 이를 인용하신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앞에 나오는 '주'는 성부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말하며 '내'는 시 110편의 저자인 다윗을, 그리고 뒤에 나오는 '주'는 열방의 심판자로 오실 메시야를 의미한다. 이처럼 다윗은 자기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에게도 성부 하나님께 붙인 호칭과 마찬가지인 '주'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존경의 뜻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 여기서 '네 원수'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구속사의 흐름을 역행하려는 사탄의 세력을 말한다. 또한 '발아래 둔다'란 표현은 고대 중근동에서 정복자가 정복지를 다스리던 통치자를 발아래 끌어 앉히거나 심할 경우 그 목을 밟음으로써 완전한 승리를 나타내었음을 반영하고 있다(수 10:24). 이처럼 그리스도 역시 창 3:15에 나오는 말씀대로 사탄의 세력을 완전하게 패배시킬 것이다. 창 3장 자료노트, '원시 복음'을 참조. 이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사망의 권세를 이김으로 이미 성취되었고 재림하신 후 사탄의 세력을 무저갱에 가둠으로써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계 20:2,3).
내 우편에 앉았으라. - 그리스도께서 지상 사역을 마치신 후 승천하셔서 재림하실 그 날까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사실은 예수의 예언에서는(마 24:64) 물론 사도들의 증언에서도 여러 번 나타난다(행 2:35,36; 5:31; 엡 1:20). 그러나 이는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서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이처럼 본절은 유대인들이 이름 부르는 것조차 불경하다고 생각하는 성부 하나님과 메시야가 같은 신분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12: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 예수는 다윗이 메시야를 주로 선언한 것을 되풀이하면서 강조하고 있다. 더하여 '어찌 메시야가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면서 바리새인들에게 질문까지 하셨다. 여기서 '어찌'는 다윗의 주(主)인 동시에 다윗의 자손이 되시는 놀라운 이 말을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이 육적으로는 다윗의 자손이나 근본적으로는 하나님 아들되심을 말함으로써 그들이 갖고 있는 잘못된 메시야관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의 적대자에게 말씀하시는 그 이면적인 뜻은 다음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너희는 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사람들의 숭배를 받아들이는 것을 가지고 나에게 흠을 잡으려 든다. 그러나 나는 가장 존귀한 의미에서의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를 배척하는 자는 다윗의 주를 배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직까지도 공개적으로 대적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언급하지 아니하셨다. 그 일은 조금 후에 하실 것이다(막 14:61,62).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 - 예수의 주위에는 늘 많은 무리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때때로 자신이 병 고침 받기를 원하거나 아니면 가까운 사람이 병 고침 받기를 원하여 예수께 나아 왔으며, 또 때로는 주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나아오기도 했다(마 7:28,29 ; 막 1:22; 2:2,13). 이들은 당시 교권주의자들의 위선적이고 고압적인 가르침에 식상해 있었으므로 그리스도의 신선하고 권위 있는 가르침에 대해 큰 감명을 받았을 것이다.
12:38-44 서기관들의 위선과 과부의 바른 헌금
본문은 서기관들로 대표되는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이 빠져있는 위선을 책망하는 전반부(38-40절)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헌신을 칭찬하는 후반부(41-44) 즉 상호 대비되는 두 부류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예수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후반부 사건은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성전에서 행하신 일이며 재판 때의 변론과 가상칠언(架上七言)을 제외하고는 대중들을 대상으로 가르치는 마지막 사역이다.
한편 본문에 등장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은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 너무나 상반되는 신분과 지위를 지니고 있던 자들로서 전자는 존경을 후자는 멸시를 받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신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를 기준으로 책망과 칭찬을 하심으로 결코 세상적인 조건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평가 기준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비록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지 않는다면 도무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인정받을 수 없다. 한편 본문과 누가복음에는 이 부분이 요약된 형태로 나오나(눅 20:45-47) 마태는 이를 상세히 보도함으로써(마 23:1-39) 유대인을 대상으로 쓴 책과 이방인을 대상으로 쓴 책 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성도들은 사람들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위선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된다.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이 위선에 빠진 이유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여 그분의 칭찬을 받으려고 애쓰기보다, 주위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여 그들의 칭찬과 존경을 받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물론 성도가 올바른 믿음과 선한 삶의 자세를 지님으로써 늘 이웃들로부터 칭찬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외식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안된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고 의로운 삶을 살려고 애쓰면, 자연히 주위 사람들도 성도를 칭찬하고 존경하기 마련이다(행 2:47).
② 참된 헌금은 얼마를 바치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세로 바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본문 속의 과부가 바친 헌금의 액수는 동전 두 닢에 지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는 태도를 그녀가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칭찬을 받았다. 진정 하나님께서는 재물이 필요해서 우리의 헌금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며, 다만 우리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만드시기 위해 헌금 제도를 정하셨다.
12: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 가르치는 장소는 여전히 성전 뜰이다. 그러나 병행 구절인 마 23:1에는 그 대상이 '무리와 제자들'로, 그리고 눅 20:45에는 '모든 백성이 들을 때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로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는 예수로부터 호된 책망을 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리를 떠난 이후인 것 같다.
긴 웃을 입고 다니는 것. - 지금까지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중심으로 공격을 가했으나 본절에서부터 40절까지에서는 그들의 그릇된 행동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 가운데 첫 번째로 지적된 긴 옷 착용 문제는 당시 서기관들이 자신들의 경건을 나타내기 위해 외식하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그들은 흰 세마포 두루마기를 입고 화려한 옷술을 달며(마 23:5) 팔과 이마에 성구를 넣은 경문을 크게 만들어 부착하고 다니면서 자신들의 경건을 과시하였다. 이와 관련해서는 마23장 자료노트, '히브리인의 외투와 옷술 장식'을 보다 참조하라.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들의 마음에는 악독이 가득했으며 경건의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질책을 받은 것이다.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 - 여기서 '시장'은 단순히 상행위만 이루어지는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시 시장은 많은 사람이 모여 정치와 종교에 대한 논의를 하는 대중 집회의 장소이기도 했다. 당시 서기관들은 이와 같이 대중이 모이는 장소에 나아가 그들의 지위를 확인하는 것을 즐긴 것 같다. 아마 당시사람들은 서기관을 '랍비'(선생님)라 부르며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경의를 표했을 것이다.
12:39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 회당은 당시 사람들의 종교 집회의 장소로서 기도와 성경 낭독 및 해석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서 '회당의 상좌'는 '율법'(토라)을 넣어두는 킬 앞에 위치한 자리로서 기도 인도자나 성경 낭독자가 앉는 자리였다. 이곳은 회중의 시선이 집중하는 곳이므로 이 자리에 앉는 것은 명예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당시 서기관은 이곳을 자신들을 위한 고정석과 같이 생각하며 이곳을 독점함으로써 자신들의 권위를 의도적으로 드러내려했다. 또한 '잔치의 상석'은 출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잔치에 참석한 모든 사람을 한 눈에 블 수 있는 곳이었다. 원래 이곳은 잔치 배설자나 주빈 흑은 노령자가 앉는 곳이었으나 서기관들은 가장 주요 좌석인 이곳을 차지하여 자신의 명예를 과시하였다.
12:40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 하나님께서는 객이나 고아, 과부들을 해롭게 하지 말고 보호하라고 하셨으며(출 22:22; 신 24:17), 서기관들은 그들을 돌아보며 그들을 보살펴 줄 종교 지도자로서의 의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지위나 권력을 이용하여 약한 자들의 것을 착취하는데 온 생각을 집중시켰다. 이같은 착취의 방법으로는 과부들을 자신들의 관리 하에 두고 이들에게 적정선 이상의 헌금을 강요한다든가, 또는 과부들이 소유한 부동산 거래를 도와주면서 과부들보다 더 많은 몫을 가로챘다든가, 그들이 자발적으로 바친 물질적인 헌납으로부터 부당한 이득을 취했다는 점이다. 어떤 방법이 사용되었든지 간에 예수께서는 이들이 가장 극악한 죄인으로서 과부의 가산을 착취한 범죄를 비난하고 계신다.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 종교 행위를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행하는 위선적 태도가 고발되고 있다. 즉 기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은밀한 대화이다. 그런데 그들은 기도를 자신의 경건함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외식'(프로파시스)은'거짓된 동기'를 가리키는 바 실제로는 악을 행하면서 이를 감추기 위해 남들이 보는 앞에서 큰소리로 길게 기도하는 거짓된 행동이 만연했음을 보여 준다.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 종교 행위를 악행의 은폐 수단으로 사용하는 자는 타인에게 이중적인 범죄를 하는 것임과 동시에 하나님을 이익 추구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기 때문에 큰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이중적 범죄라 함은 하나는 경제적 손실 등을 일으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악행으로 인해 종교에 혐오감을 느끼게 함을 의미한다.
12:41 연보궤에 대하여 앉으사. - 성전에서 연보궤는 유대인 남자와 여자만이 출입할 수 있었던 여인의 뜰에 놓여 있었다(왕하 12:9; 요 8:20). 즉 이곳에는 놋쇠로 만든 13개의 연보궤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9개는 성전 세나 제물을 대신한 헌금을 바치는 용도로 사용되었고, 나머지 4개는 가난한 자를 돕는데 쓰일 재원 마련을 위해 설치되었다. 예수께서는 지금까지의 격렬한 논쟁과 가르치는 행동을 중단하시고 쉬시면서 헌금하는 광경을 면밀히 관찰하신 것 같다.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 이때는 고난 주간 화요일로서 유월절 절기가 가까와짐에 따라 많은 순례 객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들었고 많은 '무리'(오클로스-'군중'이란 뜻)들이 헌금을 하였다. 한편 당시 헌금은 공개적으로 행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여러 부자들이 헌금을 맡이 한 것과 다음절에 나오다시피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이란 헌금 액수가 밝혀지는 데서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연보궤 앞에는 헌금을 징수하는 제사장들이 있어 헌금 액수를 공개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여기서 '넣는데'(에발른)는 미완료형으로서 계속 던져 넣는 동작을 보여 주는데 이처럼 계속적으로 여러 번 던져 넣었기 때문에 많이 헌금함을 알 수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12:42 가난한 과부는‥‥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 - 여기서 '가난한'이란 앞절의 '부자'와 대조를 이루는 계층으로 생계유지가 어려운 '극빈자'를 의미한다. 한편 여기서 '렙돈'(Lepton)은 당시 팔레스틴에서 통용되던 헬라의 가장 작은 화폐 단위이다. 이는 로마화폐 단위로서 가장 작은 고드란트의 2분의 1에 해당하고, 이 고드란트는 참새 두 마리의 가격 정도가 되는 앗사리은(마 10:29)의 4분의 1에 해당하며, 앗사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인 데나리온의 16분의 1에 해당한다. 따라서 한 고드란트는 노동자 1일 임금의 1/128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적은 돈이다. 이러한 화폐 단위에 대해서는 본서 1권 성경 총른, '성경 도량형 환산표'를 참조하라. 한편 여기서 '고드란트'란 로마 화패 단위가 소개 되는 것은 본서 의 독자인 로마인들에 게 보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이다.
12:43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 예수께서 보시기에 이 과부가 행한 일은 대단히 귀중한 일이었기에 제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하여 제자들을 불러 모으셨다. 그리고 '진실로...'라는 말씀으로 그의 가르침을 시작하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을 말씀하려하신다는 것과 이것을 마음속에 새겨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셨다는 사실과도 잘 부합된다.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 헌금의 총액에서는 이 과부의 돈이 부자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적지만 신앙적 가치에 있어서는 부자의 것보다 더 크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 두 닢의 동전은 일정 기간이 경과한 후에 그 가치가 두 배로 불어난 달란트의 비유(마 25:20,22)와 흡사하다'고 하기도 한다.
12:44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 과부의 헌금이 부자의 헌금보다 많다고 표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유가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부자는 여유가 있는 중에 일부만을 헌금으로 바친 반면, 여인은 생활비 전부를 헌금으로 바쳤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활비'란 하루하루의 생계를 그날 노동한 대가로 지속하며 비축이 전혀 없는 노동자의 최저 생계비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그녀의 생계를 유지시키는 아주 귀한 돈을 바친 것이 된다. 예수께서 이러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헌금은 그 양이 문제가 아니라 헌금을 바치는 자가 지닌 신앙의 진실성과 헌신으로 평가되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절대 양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것이 소유에 실린 삶의 무게가 어떠한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과부의 헌금은 자신의 모든 것, 즉 생존의 기본적인 것까지 아낌없는 마음으로 드리는 그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여인의 완전한 헌신이었던 것이다.
연구자료
유대인의 예수 배척
두말할 나위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진리와 사랑을 전하신 거룩한 생애였다. 또한 세상 모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구주의 생애였다.
그러나 그분이 성육신하여 세상에 왔을 때 세상은 아무도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요 1:11).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특히 주님의 동족이었던 유대인들이 앞장서서 그분을 배척하였다. 예수께서 초라한 베들레헴 마굿간에 탄생하셨을 때 헤롯이 그를 죽이려했으며, 공생애 기간 동안에 유대종교 지도자들과 심지어 고향 사람들에게도 배척을 당하셨으며 , 결국에는 온 유대 백성들의 극심한 조롱과 모욕 속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다.
실로 주님의 생애는 고난과 배척당하심으로 연속된 생애라 하겠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 자신에게 무슨 오류나 악함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그 옛날 스스로 타락한 후 마침내 인간까지 타락시키고 이 죄로 오염된 세상의 공중 권세를 잡은 원수 사탄(엡 2:2)이, 주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을 자신이 쳐놓은 죄의 결박에서 풀어내시고 마침내 자신을 멸하러오시자 이를 방해하고자 구약 선민이었으면서도 끝끝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않은 유대인들을 사주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사탄의 이런 궤계를 능히 물리치사 유대인들의 이런 배척이 오히려 자신이 뜻한 바 택한 백성의 죄 값을 대신 치루어 그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구속사역을 이루는 계기가 되게 하셨다. 또 구약에 약속된 대로 이제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구속사(救蹟史)가 육적 선민인 이스라엘 중심이 아니라 영적 선민인 세계 만민 중에 택한 성도 중심으로 오히려 확산 전개되는 계기도 되게 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창 3: 15에 이미 예언된 바 사탄은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의 발꿈치를 물 것이나 주님은 사탄의 머리를 치실 것이라는 예언이 이미 성취되기 시작하였고 세상 끝날 온전히 성취될 것이 분명해졌다.
그러면 이제 예수에서 구속사역을 이루어 나가시는 통로요 계기로서, 예수 구속사역의 이해를위해서는 꼭 알아야 할 유대인의 예수 배척의 이유, 과정, 결과 및 그것이 가지는 구속사적 의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유대인의 예수 배척의 근본 원인
유대인이 예수를 배척한 근본 원인은 한마디로 그들의 잘못된 메시야관 때문이었다. 즉 그들은 잘못된 메시야관을 갖고 있었는데 이제 주께서 참 메시야(Messiah)로 오셔서 당신의 메시야직을 선포하시자 이것이 그들에게 걸림이 되어 배척이 일어났던 것이다. 물론 더 긍극적으로 유대인이 잘못된 메시야관을 갖게 된 것은 사탄의 획책 때문임은 두 말할 나위 없다. 그러면 이제 이를 보다 더 상술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님은 본래 제 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결국 하나님 자신이었다. 따라서 전 우주에 대하여 창조자로서 절대적 통치권을 가지신 분이셨다. 한편 주님은 이제 태초 이래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아담과 그 후손을 위하여 세워진 구속(redemption)의 법 곧 인간의 죄 값을 다른 존재가 대신 갚으며 희생하는 대신, 인간 자체는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려는 공의와 사랑의 법인 구속의 법과 이에 대한 구약(舊約)의 거듭된 약속과 예언을 이루시고자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성육신 강림하신 분이셨다. 동시에 이처럼 초림(初臨)하사 일단 구속사역을 성취하신 후에 다시금 훗날 당신이 재림(再臨)하사 현 세상의 역사를 종결시키시고 인간을 당신이 행하신 구속사역을 믿고 회개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가르시고 각각 천국의 영생과 지옥의 영벌을 주실 것을 약속 예언하는 새 약속 곧 신약(新約)을 주신 분이셨다. 따라서 주님은 이미 그 신분상 메시야이셨으며, 또 성육신하여 택한 죄인을 위하여 구속 희생하여 주신 후 이를 근거로 이 땅이 아닌 하늘 나라를 세우시고 영원한 축복 속에 통치하실 것을 약속, 예언하심으로 전 구속사적 메시야직을 수행한 분이기도 하였다. 또한 우리 주님을 통하여 신․구약은 하나로 연결된 것이었다. 주님은 공생애 동안 바로 이런 자신의 메시야 신분과 사역에 대하여 그리고 당신으로 인해 서로 연속되며 또한 신약이 구약을 계승 완성하는 관계에 있는 신․구약의 구속사적 관계에 대해서도 분명히 선포하셨다.
한편 유대인들은 다름 아니라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으로서 구약 계시를 먼저 받았고 또한 그 혈통을 통하여 우리 주님께서 태어나도록 약속되고 예비된 선민이었다. 즉 그들은 구약 시대 구속사의 전개의 통로요 그 주역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상 단 한 번도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구약시대에 주어진 하나님의 참된 계시인 구약 전체에 의거한 구약 기독교와 달리 구약의 일부 내용만을 자기들 편의대로 곡해 한 소위 유대교(the Judahism)라는 저들의 종교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소위 중간기 시대부터 저들은 잘못된 계시관을 갖게 되었다. 즉 먼저는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직 신약으로 확장 계승될 때에만 의미를 갖는 구약의 본질에 대하여 오해하였으며, 또 하나님의 계시인 구약과 달리 인간의 전통과 사상에 불과한 장로(長老)들의 유전(tradition)까지를 하나님의 계시와 동등히 하는 잘못된 계시관을 갖게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처럼 인본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잘못된 입장에서 오직 구약의 일부 내용만을 왜곡 해석하여 잘못된 교리를 갖던 중 특히 저들의 종말론(終末論)과 관련하여 메시야의 신분과 사역에 대하여 심각한 오해를 갖게 되었다. 즉 그들은 구약 선민인 자신들만을, 그리고 이 지상 나라에서만 영원한 지배자 민족으로 만들어 줄 정치적 메시야가 등장할 것으로 기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주님께서 참 메시야로 세계 만민 모두를 위해 오셔서 구속사역의 성취와 제 2위 성자 하나님이셨던 당신의 신분과 메시야의 나라 곧 메시야로서 당신의 백성에게 주는 구속의 은혜가 구현되는 낙원은 오직 세상 끝 날의 천국에서만 실현될 것 등을 선포하시자 주의 말씀이 신․구약 성경 전체의 진리임을 인정치 않고 오직 구약의 일부 내용에 입각한 잘못된 메시야관을 가지고 예수를 배척하게 되었던 것이다.
2. 유대인의 예수 배척의 양상
유대인들 모두가 앞서 설명한 대로 근본적으로는 잘못된 메시야관을 갖고서 예수를 배척한 점에서는 같지만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양상은 주로 유대인의 사회 계층에 따라 다소 달랐다. 그러나 그들이 편견과 이해타산에 사로 잡혀, 조금만 마음을 열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도 정의와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분명한 예수의 교훈을, 무조건적이고도 악의적으로 배척한 점에서는 같다. 이하 제시될 배척 양상의 구분은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상의 구분이고 실제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 모든 요소가 복합된 이유로 각자가 예수를 배척하였다.
① 배척의 정치적 양상
정치적 이유 때문에 예수를 배척한 대표적인 부류의 사람들은 헤롯(the Herod) 가문을 비롯한 헤롯 당원들이었다. 헤롯 가문은 이방 이두매 출신의 왕가인 데다가 로마 제국의 앞잡이들이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유대 지역을 통치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라는 인물이 혜성같이 나타나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 하며(마 27:11), 많은 백성들의 환호를 받게 되자 헤롯 당원들은 그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백성들의 지지 기반이 약하여 항상 염려하던 중인데 예수까지 백성들을 선동하며 민중봉기라도 일으키게 된다면 그것은 정말 큰일 날 일이었다. 헤롯 당원들은 이 같은 정치적 입장에서예수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예수는 영락없이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한 인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예수를 찾아와 로마 제국에 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라고 질문한 세금논쟁 사건도 결국 예수의 정치적 성향이 어떠한가를 알아보기 위한 계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빌라도(the Pileate)가 예수님을 심문할 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마 27:11)라는 질문을 한 것도 결국은 예수께서 헤롯 당원들에 의해 정치범으로 몰려 배척 당하셨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주를 배척한 한 부류는 당시의 일반 유대 민중들이었다. 그들은 처음 예수가 많은 이적을 행하며, 또 그들의 현실적인 욕구, 곧 빵의 문제도 해결해 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야말로 그들이 기대하던 정치적 구원자와 현실 문제의 해결자인 메시야라고 생각하였고 이에 그를 유대인의 왕으로 삼고자 하였다(요 6:15,26). 로마 압제에 시달리며 극심한 빈곤으로 고통을 받았던 백성들로서는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태도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그러한 정치적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가 자신들을 궁극적으로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에는 소극적으로는 그를 떠났으며, 적극적으로는 당시 예수를 미워하는 정치 종교 지도자들에게 선동되어 그를 십자가에 못 받으라고 외쳤다(마 27:22).
② 배척의 종교적 양상
이 부류에 속하는 대표적 인물들은 당시의 소위 유대교의 지도 계층들이었던 바리새인들(the Pharisees)과 사두개인들(the Saducees)이었다. 물론 이 두 종파는 종교적 입장에 따라 그들의 정치적 입장도 달리 하였지만 유대교의 교리를 내세워 예수를 배척한 점에 있어서는 서로 합세했다. 그들도 물론 일반 백성들과 유사하게 자기 민족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야는 구약 성경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유대교적 입장에서 볼 때에 다윗의 후손이어야 하며 또 자신들이 신봉하는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며, 또 메시야이심을 입증할 만한 이적과 표적을 보여야 했다. 물론 우리가 신약 성경을 통해 알다시피 예수께서는 실로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고 구약 율법을 성취하셨으며(마 5:17) 당신이 메시야이심을 입증할 만한 많은 표적을 보이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보기에 예수는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지 않는 불법을 행하는 자이며,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고 백성들을 그릇된 가르침으로 악의 길로 인도하는 거짓 선지자이며, 함부로 죄 사함을 선포하며, 스스로 신적 권위를 빙자하는 신성 모독자였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자칭하는 신성 모독자로 몰아서, 음흉하고 비열한 음모까지 동원하여 사형이 선고되게 만들었던 것이다.
한편 당시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 중에는 일부 그래도 순수하게 종교적 편견에 의해서만 예수를 배척한 자도 있었겠지만 대다수는 겉으로 내세운 명분만 유대교 교리였을 뿐 구약 선민으로서 전통적으로 종교성이 강했던 유대 사회에서 종교 지도자로서 당연히 상당한 정치적 특혜까지 누리던 이들은 주의 진리와 정의에 입각한 가르침이 자신들의 기득권에 걸림이 되자 무조건적으로 예수를 배척했었다(마 26:63-68).
③ 배척의 인간적 양상
이는 예수의 메시야로서의 사역과 교훈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거기에 담긴 진리를 발견하려는 자세 없이 성육신하셨던 예수의 인간적 측면 즉 외모와 혈연관계, 학식이나 사회적 지위 등에 얽혀 심지어는 지역 감정(눅 7:51-56)에 빠져 처음부터 예수를 경시하였던 그 당시 사람들의 배척 양상이다. 이들은 이런 사소한 외적 요인에 얽혀 전 우주의 창조자로서의 위엄을 버리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의 겸손의 참 뜻을 보지 못하고 주께서 당신의 메시야직을 선포하시자 한마디로 일축하여 무조건 경시하였던 것이다(사 53:2; 마 13:53-58; 눅 4:16-30; 요 1:46).
3. 배척의 과정
유대인들의 예수 배척이 처음부터 노골화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주께서는 공생애를 개시하신 후 곧바로 구속사역의 성취를 위한 수난을 당하셔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즉 이제 십자가 수난을 통하여 구속사역을 최종 성취하시기 전에 그 구속사역의 본질 곧 복음에 대한 계시를 미리 계시, 선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당신은 제 2위 하나님으로서 태초부터 세워진 구속의 법에 따라, 또 이미 구약에 예언된 대로 구속사역을 성취하여 이제 이를 근거로 훗날 세상 말일에 전우주적 심판을 통하여 천국과 지옥을 개시하실 것이라는 복음의 진리를 미리 계시 선포할 필요가 있으셨다. 특히 당신의 사후 세상 끝날까지 이 세상에서 택한 성도들의 신앙중심지가 되어 당신이 남긴 복음을 보존할 주체인 교회의 설립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당신이 특별히 택한 12제자를 충분히 훈련시킬 필요가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을 경우 세상은 주의 사역과 그 복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주님은 복음전파와 제자 훈련의 충분한 시간 확보를 위하여 호기(好期)에는 되도록 당신의 메시야직을 직접 선포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유대인의 배척도 적었다. 오히려 주의 공생애 초기에 유대인들은 예수의 이적과 권위 있게 전파하는 말씀에 매료되어 예수께 많은 관심을 나타내보였다. 그러나 예수의 구속 사역이 본격화 되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유대인들의 예수 박해가 노골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유대인의 박해가 절정에 이르러 마침내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게 되었다.
이에 우리는 이런 유대인의 예수 배척 과정을 시간 순으로 정리하여 전체적인 조망을 얻고자 한다.
① 초기의 배척(제 1차 갈릴리 사역을 마친 A.D. 28년 중반까지)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직후 헤롯 대왕이 아기 예수를 살해하려 한 사건(마2:16-18)은 예수께서는 심지어 아직 젓먹이였을 때부터 이 세상의 정치․종교적 지도자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셨음을 보여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결국 그것은 그러한 배척으로 인하여 장차 십자가 수난을 당하실 사건에 대한 전조(前兆)였다. 그러나 헤롯 대왕의 유아 살해 사건을 제외하면 예수의 공생애 초기 동안에는 유대인들의 예수 배척은 그렇게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예수의 초기 유대 사역과 제 1차 갈릴리 사역으로 그 존재가 유대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한편으로는 그의 새로운 교훈과 많은 이적들로 인해 일반 민중들이 맹목적 기대로 크게 호응하여 주를 따르기 시작한 반면(마 4:23-25),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몇 가지 이유로 인하여 예수의 행동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첫째, 금식논쟁(마 9:14-17), 안식일 논쟁(마 12:1-8) 등으로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이 유대교의 교리와 뚜렷하게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둘째, 제 1차 예루살렘 성전 숙정(요 2:13-25), 중풍 병자 치유(마 9:1-8) 사건 등으로 예수가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등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신성 모독적인 발언을 스스럼 없이 했기 때문이다. 셋째, 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추앙하여 따름으로써 유대교 내에 혼란을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공생애 초기 동안에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순수한 의도에서 종교적 교리 논쟁을 벌이기 위해 예수를 찾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그러한 논쟁 등으로 인해 예수를 죽이고자하는 적의(適意)를 품기도 했으나(마 12:9-14) 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추앙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하였다.
② 중기의 배척(제 2,3차 갈릴리 사역 이후 유대 사역이 진행 중인 A.D. 39년 말까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지 1년쯤 지난 A.D. 28년 중반 이후, 제 1차 갈릴리 사역의 성공적인 수행으로 인해 더욱 많은 추종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반면 안식일 논쟁, 산상 수훈(마 5-7장) 등의 예수의 가르침이 유대교의 종교적 가르침들과 정면 배치된다는 사실도 널리 유포되기 시작했다. 또 예수께서 공개적으로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비난하시며 또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공격하시기도 하였다(마 12: 34). 그리고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노라며 오히려 하나님의 계명은 범하는 그들의 오류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지적하셨다(마 15:1-20).
또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도 공개적으로 예수를 비난하기 시작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예수 배척은 먼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고조되기 시작했다. 즉 그들은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시는 것이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하는 것이라 말하기도 하고(마 12:25), 예수가 스스로 자신을 메시야(Messiah)라 한 것은 그것을 뒷받침할 증인이 없으므로 거짓이며 오히려 신성 모독이라고 비난했다(요 8:12-19). 그리고 의도적으로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메시야로서의 표적을 구하기도 하였다(마 15:39-16:4).
그러나 이 때까지만 해도 예수께서는 자신의 메시야 신분을 되도록 감추시고 제자들에게 함구령(緘口令)을 내리사 공개적으로 당신의 신분을 말하지 못하도록 하셨다(마 8:4; 12:66; 16:20).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아직까지는 노골적으로 예수를 죽이기 위한 계획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전지전능하신 주의 신성으로 바로 그들의 배척을 통하여 당신의 구속사역을 성취하실 것을 내다보시고 당신이 수난 받으실 것을 예고하시기 시작하셨다. 전 4차에 걸친 수난 예고 중 1,2차 수난 예고가 이 시기에 있었다(마 16:2,28). 이에 관한 세부 설명은 눅 18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또 이 시기의 특징 중 하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 즉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의 예수 배척은 상당히 두드러진 반면에 헤롯 당원들의 예수 배척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유대인들과 예수 사이에는 대부분 종교적으로만 충돌했지 정치적으로는 그렇게 문제시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③ 후기의 배척(유대 사역 이후 성고난 주간이 끝난 A.D. 30년 중반까지)
예수께서 공생애를 마치시고 구속 사역을 성취하실 시기가 가까워지기 시작하면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예수에 대한 살해 계획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즉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Caiaphas)가 예수 한 사람 때문에 유대 민족 전체가 망할 수도 있다는 발언을 함으로써 예수를 죽이려는 종교 지도자들의 모의(謀議)가 시작되었다(요 11:50-53). 대제사장 가야바의 그 발언은 신․구약의 정통 계시에 근거한 예수의 가르침이 당시에 구약의 일부만을 왜곡 해석한 유대교 전체에 얼마나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었던가를 잘 반영하는 것이었다. 한편 지금까지 예수께 많은 추종자들이 따르고 있는 것에 대해 염려스런 눈빛으로 예수를 지켜만 보고 있던 헤롯 당원들을 비롯한 유대 정치 지도자들이 드디어 예수가 민중들을 선동하여 헤롯 왕가에 대해, 혹은 로마 제국에 대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판단 하에 예수를 정치범으로 몰아 종교지도자들과 합세하여 그를 제거하기 위한 함정을 파기 시작했다. 세금 논쟁(마 22:15-22)도 그 함정 중에 하나였다.
한편 이 같은 유대 정치, 종교 지도자들의 예수 살해 음모가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지금까지 예수를 추종하던 무리들도 점차 예수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들이 일차적으로 예수가 그들이 기대하던 것과 같은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헤롯 당원들을 비롯하여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모두 합심하여 예수를 공격하는 것을 보고 그들도 예수와 한편으로 몰리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 때문이었다. 결국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 중 한 사람인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손에 넘기워졌으며, 헤롯 당원들에게는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한 정치적 모반자로, 또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유대교를 혼란케 하고 신성 모독죄를 범한 자로 물려 급기야 십자가 처형의 수난을 받으시게 되었다. 더우기 지금껏 주를 따르던 일반 백성들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획책에 말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마 27:20,25,26).
이렇게 해서 예수는 모든 부류의 유대인들에 의해 배척을 당하시고 끝내는 십자가 처형이라는 최고의 수난을 당하셨던 것이다.
4. 배척의 결과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모든 유대인들에 의해 배척받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 당하신 예수는 마치 실패한 불운한 영웅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미 유대인들에 의해 배척 받으실 것을 알고 계셨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미 구약에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며(사 53:1-3) 예수 자신이 전지전능한 제 2위 하나님이셨기 때문이었다. 또한 주께서 이를 이미 알고 계셨다는 사실은 전 4차에 걸쳐 예수께서 수난 받으실 것을 예고하신 사실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마 16:21-28; 17:22,23; 20:17-19; 26:2). 이것은 곧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유대인으로부터 배척을 받으셨음을 보여준다. 이는 다음과 같은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서였다.
① 구속 사역의 성취
예수께서 스스로 유대인들로부터 배척받으신 것은 택한 성도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구속사역의 성취를 위해서였다. 즉 최초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타락 이후 곧바로 추진되어 온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이제 성취하시기 위해서였다. 즉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원죄와 자신이 직접 범한 자범죄에 빠져서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하여 스스로는 구원에 유효한 아무 능력이 없는 인간을 위하여 죄 값을 대신 치루어 주심으로써, 법적으로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 주시어 결국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게 하려고 태초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진 구속의 법을 마침내 성취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유대인의 예수 배척은 결국 최초의 인간인 아담을 타락케 하였을 뿐만 아니 라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까지 막으려한 사탄이 유대인들을 획책한 결과였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사탄의 방해 공작을 역으로 이용하셔서 오히려 이를 통하여 구속 역사를 성취하심으로써 예수의 죽음은 결국 사탄에 대한 승리를 가져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창 3:15에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관계에 대한 예언대로 사탄은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물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머리를 치신 격이된 것이다.
②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구속 역사의 확장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이 선민이 되고,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구약 구속사가 전개된 것은 결국 그들만 영원히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다만 훗날 신약 시대에 세계 만민에게까지 구속사가 확장되게 하기 위한 통로에 불과하였다. 이에 이미 구약에는 신약 시대에 구속사가 이방인에게로 확장될 것이 거듭 예언되어 있었다(시 102:15; 사 41:1,2; 60:1-3; 렘 3:17; 4:2).
그런데 이제 구약 선민으로 택함 받았던 유대인들이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배척하였다. 나아가 예수에서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고 부활 승천하사 후에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예루살렘 초대 교회를 중심으로 주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사역을 극히 일부의 유대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전 민족적으로 거부하였다(행 4:1-31; 5:17-42; 6:8-15; 7:54-60; 23:7-22). 그 결과 오히려 세계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한 복음이 자연스럽게 이방 지역에까지 확산되게 되었고 이로써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만민의 구주가 되어 그를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실 수 있게 되었다(요 1:11,12). 즉 육적 선민인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배척하자 하나님은 오히려 이를 기회로 신약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더욱 거세게 전파되게 하시어 모든 이방인 가운데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을 영적 선민 곧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이다. 이에 대해 성경에서는 '저희가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이라고 했다(롬 11:11,12). 이처럼 유대인에 의해 배척당하신 예수는 세상 만민의 구주가 되신 것이다. 즉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것이다(막 12:10).
5. 유대인의 배척의 의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의 구속사 전개를 위한 통로로 택하신 선민이었다. 즉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모든 열방 민족을 대표한 제사장 나라였으며 거룩히 구별된 민족이었다(출 19:6). 이렇게 모든 열방 민족의 대표격인 유대인들이 온 인류의 구세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다는 것은 결국 온 인류가 다 제 2위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배척한 셈이 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보편적 부패와 하나님께 대한 패역을 보여준다. 동시에 이렇게 인간들이 하나님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오히려 이것을 당신의 구원 섭리가 이루어지기 위한 계기로 삼으셨음은 먼저 그분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은총이 얼마나 큰가를 잘 보여준다(요 3:16). 또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한번 작정하시고 약속하신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즉 사탄과 인간의 방해와 배척에도 불구하고 필히 성취됨을 보여 준다. 이 같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절대 사랑의 확증은 구속사역의 최종 실현인 천국 구원과 영생에 관해 예수께서 새로 주신 새 예언과 새 약속도 필히 이루어 질것이라는 우리의 소망과 믿음의 확실한 보증이 되는 것이다(롬 5:5).
한편 구약 선민이던 유대 민족 전체가 이렇게 하나같이 예수를 배척하였다는 사실은 태초 에덴 동산에서 바로 자신 때문에 타락한 인간을 위하여 세워진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성취를 막바지에 두고 그 계획을 저지코자 사탄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훼방 공작을 펼쳐 왔는가를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몸서리치는 전율마저 느끼게 한다. 그리고 예수의 구속 사역 성취 기간 동안에도 이 같은 방해 공작을 폈던 사탄(the Satan)이 이제 구속 사역의 최종 목표점인 천국 도래를 위해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가 임박한 이때에, 즉 영원히 무저갱 속에 갇힐 것이라는 예언(계 20:17)의 성취가 임박한 지금, 그가 벌이는 최후 발악이 얼마나 더 극심할 것이겠는가? 이를 생각할 때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힘입고 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사탄과 그 악한 세력을 담대히 대적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엡 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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