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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장 예수의 권위 논쟁과 악한 농부들의 비유 및 세금과 부활, 메시야의 신분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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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영광을 받으시는것 좋아하세요.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19:28-23:56까지 이어지는 일련기사, 즉 구속사역의 최종 성취를 위하여 주께서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공식 입성하시어 십자가 수난을 당하기까지의 소위 성 고난 주간(Holy Passion Week) 사건을 보도하는 일련기사의 연속부분이다. 그중에서 본장은 특히 성 고난 주간 제 3일인 화요일에 있었던 예수와 유대 종교 지도자들 간의 논쟁을 집중 보도하고 있다.
사실 지금껏 예수는 되도록 당신의 메시야직을 숨기시며 당신의 사후 세상 끝 날까지 이 땅에 남아 택한 백성의 중심지가 될 교회(敎會)를 성립할 제자들에게 당신의 구속사역이 갖고 있는 참뜻 곧 복음의 계시와 언약을 집중 훈련하여 오셨다. 그러나 이제 주께서 이를 필하시고 마침내 구속사역을 최종 성취하시고자 공식적으로 예루살렘 입성을 행한 이후에는 더 이상의 주저 없이 당신의 구속주로서의 본성과 사역 곧 당신은 원래 제 2위 성자 하나님이심과 온 세상의 메시야이심을 선언하셨다. 그리고 이제 당신을 기점으로 구약이 성취되고 나아가 최종 천국 구원을 정점으로 하는 신약으로 확장됨을 선언하셨다. 그리하여 자연히 인본주의적 오류에 빠져 구약의 일부 내용만을 근거로 하나님의 계시를 곡해하며 그릇된 메시야관을 갖고 있어서 예수를 중심으로 한 구속사의 새 시대가 개시됨을 거부한 당시의 유대인들 특히 예수의 등장과 그의 계시가 자신들의 당장의 정치, 종교적 기득권과 첨예하게 대립되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예수 사이에는 극단적인 갈등이 일촉즉발의 기세로 고조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는 급기야 며칠 후 예수의 십자가 수난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본장은 바로 이런 상황 하에서 진행된 예수와 당시 정치․종교 지도자들 사이의 각종 논쟁을 나열식으로 보도하고 있다.
1-8절은 본장 내내 계속되는 논쟁들 곧 이제 십자가 수난을 통한 구속사역의 최종 성취의 때가 이르러 당신이 메시야요, 구속주임을 밝히 드러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를 몇 일 후에 정치범으로 몰아 죽임으로써 결국 예수 구속사역 성취의 통로가 될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예수 사이에 있었던 첨예한 논쟁의 시작 부분이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께 대한 구약의 분명한 예언과 이들의 예수를 통한 성취, 예수님의 바르고 정의로운 교훈의 복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무조건적이고도 악의적으로 예수를 배척하여 주님께 나아와 메시야로서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 숙정을 감행하시는 예수의 권위(authority)의 근거를 물었던 것이다. 구약의 계시와 주의 사역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처럼 맹목적인 우문(愚間)을 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은 곧 그들의 완고함과 영적 무지를 보여 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이미 편견과 이해타산에 사로 잡혀 아무리 사실 자체를 말하여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간파하시고 그들에게 사실은 당신의 선구자였으며 자신에 대하여 백성들에게 증거하던 자로서 당시의 민중들에게 의로운 선지자로 추앙받던 세례인 요한(John, the Baptist)의 기원을 되물음으로써 진리를 그 자체로 보기보다 정치적 입장에서 보려하는 그들을 역습하셔서 그들을 침묵시키시는 실로 놀라운 지혜를 보이셨음을 보여 준다. 이 사건은 전체적으로 구속사의 진리를 그 자체로 보지 않고 늘 세속적 입장에서 보고자 하는 자는 끝내 그 구속사의 실체를 보지 못할 것을 암시해 준다.
9-18절은 구약 계시(舊約啓示)를 먼저 받은 유대인이요 또 그들의 종교 지도자를 자처하면서 도 구약의 일부 내용만을 인본주의적으로 곡해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오류와 정치 사회적 이해 타산에 빠져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모든 구약의 성취로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까지 배척하게 된 자들의 오류를 경고한 악한 농부들의 비유이다(9-15절). 그리고 바로 구약 선민이면서도 구약의 성취요 이를 계승, 발전시킨 신약의 수여자로 오신 예수께 도전하는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이 비유 속의 그 악한 농부들이며, 그들이 당신을 해할 것이나 당신은 오히려 부활하여 신약 교회의 머리요 그들의 심판자(審判者)가 되실 것을 예수께서 분명히 밝히시고 경고(16-18절)하는 내용이다. 이 비유는 먼저 주님은 살아계신 전 우주의 창조자신 성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자(聖子)로서 인간의 마음대로 순종해도 그만 안 순종해도 그만이요 그분의 뜻과 섭리를 자신들의 판단과 유익대로 왜곡해도 그만인 분이 아니라 훗날 주님에 대한 자세의 여하에 따라 분명히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구속사적 경고이다. 실로 주님은 세상의 일시적 철학이나 도덕을 가르치신 분이 아니라 그에 대한 순종의 여부에 따라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이(살후 1:8) 판가름 나는 근거가 되는 복음을 가르치신 우리의 유일하고도 영원한 구주(救主)
이시다.
한편 우리는 본 비유에 나타난 악한 농부들이 꼭 예수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에 국한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넓게는 하나님의 주진을 인본주의적 관점(人本主義的 觀點)에서 가리우는 각종 세속 정부와 세속 문화의 지도자들과 그 추종자들을, 좁게는 주님의 진리를 안다 하면서도 이를 왜곡하여 호도하는데 앞장서는 자유주의 신학자 및 이단 사설주의자들이 모두 다 각 시대의 악한 농부들이다. 성경 전체는 물론 우리 주님도 거듭하여 주님의 복음만이 시대를 불문하고 전 구속사에 유일한 우리 구원의 엄정하고 은혜로운 표준인데, 이를 왜곡 호도하는 각종 이단과 문화가 등장할 것에 대해 경고하였음을 기억해야 하겠다. 그리하여 내가 먼저 주인의 선하고 바른 뜻을 알면서도 이를 순간적 유익을 위하여 거스리는 악한 농부가 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또한 그들의 세력과 권위나 화려함에 유혹당하지 말고 순결한 복음의 진리를 사수하여(고전 15:12) 구속사가 최종 실현될 세상 끝 날에 우리의 유일한 주인이신 예수께서 축복으로 세울 새나라 곧 천국에 참예하여야 하겠다.
이어지는 19-40절은 당시 정치적으로 '뜨거운 감자'격의 논쟁이었던세금 납부의 정당성에 대한 논쟁(19-26절), 당시 종교적으로 큰 논쟁이었던 부활의 사실 여부 및 부활 이후의 상태에 대한 논쟁(27-40절) 등 두 논쟁을 연달아 보도하고 있다.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께 제기한 이 두 질문과 논쟁은 모두 다 순수한 질문이 아니라 예수께서 어떻게 답하더라도 예수를 정치 ․ 종교적 혼란에 빠뜨릴 수 있도록 고안된 질문들이라는 공통성을 갖고 있다. 또한 그들이 구약 성경의 진리를 안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에서 야기된 것이라는 공통성도 갖고 있다. 또 이에 대하여 예수는 표면적 질문의 내용보다 궁극적인 그들의 의도 자체를 꿰뚫어 보시고 이에 대하여 각 경우마다 그와 관련된
절대 불변의 진리를 선포하시면서도 그 방법에 있어서는 지혜롭게 적절히 대응하심으로 그들이 숨긴 함정을 모두 다 뛰어 넘어 이기셨다는 공통성도 있다. 사실 이러한 질문은 모두 다 예수의 공생애 초기부터 구약의 일부 내용만을 민족주의적 관점(民族主義的觀點)에서 그리고 인본주의적으로 곡해한 유대교적 오류를 고수하며 무조건적이고 악의적인 편견으로 예수의 메시야직을 부인하고 정의와 진리를 선포하는 예수의 사역이 자신들의 알량한 세속적, 종교적 기득권 유지에 지장이 될 것을 두려워한 유대 지도자들의 부당한 예수 배척, 또는 예수의 메시야직에 대한 몰지각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그 세부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전반적인 배경에 대한구속사적 이해가 먼저 필요한 바 이에 대해서는 막 제 12장 연구 자료를 보라. 한편 이 두 논쟁 각각의 내용과 그 저의 그리고 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이 갖는 교훈과 의미에 대해서는 해당
문단 강해를 각각 참조하라.
마지막 단락인 41-47절의 그리스도의 신분에 대한 논쟁은 앞의 세 논쟁과는 달리 예수께서 유대 지도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심으로 제기된 것이었다. 유대교(the Judaism) 또는 당시의 유대인들은 구약의 계시 전체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일부분만 편협하게, 그것도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왜곡되게 수용하여 잘못된 메시야관을 가짐으로 사실은 예수께서 모든 구약의 성취자요 구약을 보다 확장시킨 신약의 새로운 주체로 오신 사실을 인정치 않고 오히려 주를 배척했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기 위하여 메시야이신 자신과 관련된 구약의 모든 말씀을 그들이 온전히 깨닫지 못한 증거의 하나로서 주님의 신인 양성(神人兩性)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즉 표면적으로는 상호 모순인 것처럼 보이는 본문의 말씀을 제시한 것이었다.
보다 상술하자면 그들은 구약을 통해 메시야가 다윗(King David)의 혈통을 따라 그의 후손으로 온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일한 구약이 비록 그분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지만(삼하 7:11-17), 그 신분은 다윗의 주(the Lord)가 되는 신적 존재라는 사실 또한 다윗자신의 입을 빌려 계시한 내용은 간과했다(시 110:1). 이처럼 그들은 구약을 부분적으로만 수용한 것이었다. 따라서 육신으로는 분명히 다윗의 후손이지만 그 신분은 다윗의 주가 되시는 메시야(the
Messiah)의 본성 전체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가질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메시야로서 세상에 오셨으나 이는 이 현 세상을 정복하여 유대인들이 지배자 민족이 되는 지상의 나라를 세워서 유대인에게 정치적 해방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에서는 버림받아 죽임을 당하심으로 택한 백성의 죄를 대속하고 오직 세상 끝 날에 새 천국을 세움으로 영원한 천국(天國)의 우주적 메시야(the Messiah)로서 우주적 왕권을 발휘하실 것이라는 예수의 메시야직의 본질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같은 구약 내에 있는 두 계시의 말씀이 그들에게는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니 심지어는 그런 구약 본문이 메시야에 대한 말씀인 것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모순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이 진실 전체를 모르기 때문에 표면상 모순으로 보일 뿐이었다. 어쨌든 이에 예수는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사상과 논리의 근거로 삼고 있는 구약의 말씀 자체를 가지고 그들의 메시야 직에 대한 무지를역(逆)으로 지적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겸허한 마음으로, 성경 말씀 전체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깨달을 때에만 구속사의 진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 인본주의적 자세로 자신의 판단에 맞는 일부의 내용만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구속사(救贖史)의 실체를 왜곡 변질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엄숙한 교훈을 깨달아야 한다.
외울 말씀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으로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36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눅 20:35,36)
예수의 권세 논쟁
1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 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2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3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4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 에게로서냐
5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6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마 14:5
7 대답하되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악한 농부의 비유
9 〇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10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11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12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
13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14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15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16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17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함이 어찜이뇨 사 8:14,15
18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세금 논쟁
19 〇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20 이에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21 그들이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22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하니
23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가라사대
24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뒤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다
25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6 저희가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기이히 여겨 잠잠하니라
부활 논쟁
27 〇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28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주기를 사람의 형이 만일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9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말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30 그 둘째와 세째가 저를 취하고
31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32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아내로 취하였으니
33 일곱이 다 저를 부활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36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고전 15:42,49,52
37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출 3:6
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39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 하니
40 저희는 아무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메시야의 신분 논쟁
41 〇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42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시 110:1
43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시 110:1
44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하시니라
45 〇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본문 & 자료노트
주요주제-20:4-6 예수의 선구자 세례 요한
눅 3장 연구 자료 참조
주요주제-20:9-18 예수의 비유의 이해
마 13장 자료 노트 참조
도표-20:19-26 예수에 대한 유대 지도자들의 오류
1. 구약 경륜 일부를 유대인의 입장에서만 곡해한 구속사적 시대 착각의 오류
2. 각종 위선과 외식을 유발시킨 형식주의적 신앙의 오류
3. 참사랑이 결여된 채 무조건 진리를 배척한 배타주의의 오류
4. 정치·종교적 기득권 때문에 정적(政敵)을 제거해 버린 권위주의의 오류
5. 내세의 영원한 구원보다 현세의 안정을 더 갈망한 세속적 지향주의의 오류
6. 예수께 나아가는 백성들을 오도하여 결국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한 오류
7.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신성 모독의 오류
난제해설-20:1-8의 근원 논쟁
예수 권세유대 사회의 최고 행정 기관인 산헤드린(Sanhednin)의 몇몇 대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예수의 권세의 근원에 대해 질문했다. 이때 예수께서는 대답 대신세례 요한이 주는 세례의 기원에 대해 그들에게 되물으셨다가 그들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8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얼른 보기에 예수께서 유대 지도자들의 질문에 맞는 아무런 대답도 주시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사실 그러한가? 그렇지 않다면 예수께서 주신 대답은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해 생각해 보자.
1. 유대 지도자들의 질문의 배경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권세의 근원에 대해 질문한 것은 그에 앞서 예수께서 행하신 성전 정화 사건과 성전 안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신 것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19:45-20:1). 즉 구약적인 배경에서 볼 때 성전 정화(聖殿淨化)는 선지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또한 성전 안에서 백성들을 가르칠 수 있는 권세도 제사장이나 선지자만이 가진다. 일반 랍비(선생)들 조차도 성전 안에서는 백성들을 가르치지 못하며 성전 밖에서, 각 마을의 회당에서만 가르칠 수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모든 일을 행하시자 그들은 예수가 그렇게 선지자적 권세를 행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고 예수의 권세의 출처에 대해 질문한 것이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순수하게 예수 권세의 근원을 알고 싶어서만 질문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세례 요한이 베푼 세례의 권위의 근원에 대해 되물으셨을 때 그들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사실 속에 잘 암시되어 있다. 즉 그들은 정말로 예수의 권세의 근원에 대해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예수가 아무런 권세도 갖지 않고 그 같은 일을 서슴없이 행하였다는 사실을 군중들에게 알려 예수 체포의 빌미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2. 예수님의 대답
예수께서는 자기 권세의 출처에 대한 질문에 직접적인 답은 주시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시의 백성들로부터 의로운 선지자로 추앙받았던 세례요한의 세례의 기원에 대해 되물으심으로써 사실상 간접적인 대답을 주셨다. 즉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4절)라는 질문 속에는 자신의 선구자인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 라면 궁극적으로 요한이 증거하던 자 곧 예수 자신의 권세도 하늘로서 온 것임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대답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런 의도에서 주어진 예수의 질문에 대해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사실은 곧 애당초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마음은 없이 예수를 죽일 생각만 갖고 있던 그들의 악한 의도를 스스로 드러낸 셈이 된 것이다.
3. 의의
여기서 우리는 진리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진리를 보려하는 유대 지도자들을 역습함으로써 그들을 침묵시키시는 예수의 놀라운 지혜를 발견케 된다. 이에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진리 그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우리의 이기적인 입장에 따라 진리가 아닌 것들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느라고 진리를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나 않는지 항상 경계하며 자신을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삽화-20:22-25 가이사 아구스도 상(像)
아구스도는 그 유명한 율리우스 가이사(Julius Caesar)의 양아들로서 최초의 로마 황제가 된 자이다. 그의 이름은 영어식으로는 아우구스투스 케사르(Aucustus Caesar)로 표기된다. 그리고 그의 본명은 옥타비아누스였다. 한편 그 이후부터 아구스도 황제의 아버지였던 율리우스(영, 쥴리어스)의 성(姓)이었던 가이사(영, 시이저)는 잠정적으로 로마 황제의 직함이 되었다.
주요주제 - 20:19-26 유대인의 예수 배척
막 12장 연구 자료 참조
도표-20:24 성경의 사건과 관계 있는 로마의 황제들사건 황제(연대)
1. 예수의 출생·소년시절 가이사 아구스도(B.C. 27-A.D. 14)
2. 예수의 공생애, 죽으심 디베료 가이사(A.D. 14-37)
3. 교회의 성장, 바울의 회개 칼리굴라(A.D. 37-41)
4. 바울의 초기 선교 글라우디오(A.D. 41-54)
5. 바울의 후기 선교 네로(A.D. 54-68)
6. 유대와 로마 전쟁 갈바, 오토(A.D. 68-69)
7. 예루살렘 함락과 파괴 베스파시안(A.D. 69-79)
8. 유대의 멸망과 분산 디도(A.D. 79-81)
9. 요한의 밧모섬 유배 도미시안(A.D. 81-96)
보감-20:27-38 부활에 관한 성경의 교훈
본문은 인간의 부활을 믿지 아니하는 사두개인과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논쟁 장면이다. 이에서 보듯 예수께서는 분명인간의 부활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으며, 성경은 신자들뿐만 아니라 불신자들도 부활할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고전 15장). 이에 부활과 관련된 성경의 교훈들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1. 부활한 자는 하늘의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됨(마 22:30)
2. 예수의 재림 때 부활할 것임(마 24:31; 고전 15:51)
3. 부활 후에는 시집 장가가지 않음(막 12:25)
4. 부활 후에는 다시 죽지 아니함(눅 20:36)
5. 부활체도 보고 만질 수 있음(눅 24:39; 요 20:27)
6. 불신자들도 신자들과 동일하게 부활하여 그 부활체로 영벌 받음(마 10:28)
7. 성도는 생명의 부활, 불신자는 심판의 부활함(요 5:29)
보감-20:36 천사의 특징
성경은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많은 곳에서 천사들의 활동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하여 성경은 귀신 같은 악령들 및 천사들의 존재에 대하여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영계는 단순한 신비주의적 허구가 아니라 실재하는 또 하나의 차원인 것이다. 그러면 이제 다음에서 그중 한 존재인 천사들의 특징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1. 그 수가 무수히 많음(욥 25:3)
2. 인간보다 먼저 창조됨(욥 38:7)
3. 하나님께 순종하는 존재(시 103:20)
4.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음(시 148:2,5)
5. 결혼하지 않음(마 22:30)
6. 전지(全知)한 존재는 아님(마 24:36)
7. 지성, 감정, 의지를 가짐(눅 15:10)
8.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임(눅 20:36)
9. 눈에 안 보이는 영적 존재(골 1:16)
10. 계급과 조직을 이룸(살전 4:16)
11. 성도를 섬기라고 보냄 받음(히 1:14)
12. 초인적인 힘과 능력 소유(벧후 2:11)
13. 온유하고 거룩함(유 1:9)
주요주제-20:41-44 메시야의 이해
막 서론 특별 자료 참조
보감-20:46, 외식자의 특징
마 23장 자료 노트 참조
원어연구-20:23, 간계, 아시고
'간계'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파누르기아'이며, 이는 형용사 '파누르고스'에서 유래한 여성 명사이다. 또 형용사 '파누르고스'는 '모두'(every), '전체'(the whole)라는 뜻의 형용사 '파스'와 '일' (work), '행위'(deed)라는 뜻의 명사 '에르곤'의 합성어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즉 좋은 의미에서는 '솜씨 좋은'(dexterous)'지혜로운'(wise), '현명한'(sagacious)이란 뜻을 갖는다. 그리고 나쁜 의미에서는 '교활한'(crafty), '간악한'(cunning), '기만적인' (knavish), '남을 속이는'(deceitful)이란 뜻을 갖는다. 본문에서는 나쁜 의미로 사용되었다.
한편 '아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카타노에사스'로서 '지각하다'(perceive), '이해하다' (apprehend), '관찰하다' (observe)라는 뜻의 동사 '카타노에오'의 부정과거 분사형이다. 여기서 부정과거형은 어떤 동작이 단 1회 발생하였을 때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카타노에사스'는 '즉각적으로 단번에 알게 된 것'을 가리킨다.
이상의 사실에서 우리는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어떤 의도로 세금 문제를 예수께 제기했는가 하는 사실과 예수께서는 신적 능력으로 그들의 흉악한 간계를 단번에 아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1-8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
본장은 수난 주간 셋째 날인 화요일에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성전 정화 사건(눅 19:45-48) 이후 예수님을 해치려는 종교 지도자들의 노골적인 음모와 이에 대항하는 예수님의 적극적인 모습이 대비되어 예수님의 수난이 점차 가까이 오고 있음을 보여 준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증거를 확보하려고 계속해서 신학적이고 정치적인 질문 공세를 통하여 논쟁을 걸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질문에 명쾌한 답변을 하시고 오히려 이들을 책망하며 궁지에 빠뜨리는 지혜로운 메시야의 모습을 드러내신다.
본문은 그 첫 번째 논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가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논쟁이 소개된다(마 21:23-27; 막 11:27-33). 당시 종교 지도자의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에서 파견된 대표들은 공식적으로 임명되지 않은 랍비, 즉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칠 권세가 없음을 주장하는데, 이는 이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을 나누어서 고찰함으로써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질문(2절)은 예수님의 메시야적 권위에 대한 신학적인 도전으로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려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 당신의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대답하면 신성 모독죄로 정죄하고 권위의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백성을 미혹케 하고 성전을 소란케 한 죄로 정죄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간교한 계략을 파악하고 계셨기에 역으로 요한의 세례의 출처에 대한 질문을 하심으로써(3,4절) 종교지도자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모순에 빠지게 함은 물론, 그의 권위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스스로 깨닫게 하셨다(5-7절).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① 하나님의 권세에 도전하려는 악한 세력들의 어떠한 노력도 무의한 것에 불과하며 결국 하나님의 권세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② 악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의 눈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20:1 하루는. - 이것은 누가가 특정한 시간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하던 단어인데(눅 5:17; 8:22), 이 날은 수난 주간의 화요일로서 그 주간의 첫날인 주일에는 예수께서 백성의 환영을 받으며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둘째 날인 월요일에는 성전을 정화(淨化)하셨으며 열매 없는 무화가 나무를 저주하셨다. 그리고 셋째 날인 이날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던 마지막 날이었다. 이에 대해서 본서 14권, 사복음서 개론, '사복음서 대조표'를 보다 참조하라.
복음을 전하실 새. - 이 말은 누가와 바울이 즐겨 사용하던 말이다. 특히 누가는 본서와 사도행전에서 이 말을 25회나 사용하는데, 이를 통해 누가는 예수님의 설교의 중심내용을 거듭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모인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곳은 성전의 회랑 또는 솔로몬 행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요 10:23).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 이미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음모를 꾸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및 장로들은 바로 그 계획을 착수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가까이 와서'(에페스테산)란 말은 '마주하여 섰다'는 뜻으로서 예수에 대한 적대 감정을 갖고 갑자기 예수 앞에 나타난 그들의 성급한 행동을 잘 묘사하고 있는 표현이다.
20:2 본절에서 8절까지는 예수의 권위에 대한 예수와 유대 교권주의자들과의 논쟁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의 질문에는 그 동안 예수가 행한 일들에 대해 그들이 강한 불만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 특히 그들은 예수의 성전 정화 사건을 보고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권위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예수의 권위 문제를 따져 물었던 것이다.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말하라. - 누구보다 율법을 잘 알고 있던 저들은 예수의 권세가 신적인 것인지 인간적인 것인지 묻고 있는데, 이러한 질문에는 예수에게 신성 모독죄를 덮어씌우려는 교활한 의도가 숨겨져 있다.
20:3 대답하여 가라사대…내게 말하라. - 질문하고 있는 유대 교권주의 자들의 간계를 익히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답할 그 어떤 의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적과 기사를 통해 자신의 신적 능력을 충분히 입증하셨던 예수님은 도리어 그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 때문에 감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하심으로 그분의 신적 권위를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계신다.
20:4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서로서냐. - 여기서 '세례' 라는 말은 세례를 중심으로 한 요한의 모든 사역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본절에서 우리는 세례 요한의 사역을 예수께서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세례 요한은 종교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선지자였지만 그는 단순히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전체적인 사역은 메시야와 결코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세례 요한은 예수를 만났을 때 이 사람이 바로 메시야라고 선언했으며 자신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존재임을 분명히 밝혔다(요 1:19-28).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직접 목격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예수께서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고 반문하는 것은 그들의 질문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그들에게 내가 바로 세례 요한이 선포했던 메시야로서 신적 사역을 수행하고 있다는 정확한 대답을 하셨던 것이다. 마 21:25 주석 참조.
20:5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 예수님의 질문을 받은 대적 자들은 곤경에 빠지고 말았다. 여기서 '의논하여'(쉬넬로기산토)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사용된 말로, '함께 계산하다'라는 의미의 '쉴로기조마이'의 제 1부정과거 중간태이다. 따라서 이 말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그 자리를 피해 장시간 의논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데, 저들의 이러한 태도는 예수께 나왔던 그들의 불순한 동기를 충분히 입증하는 것이다.
만일 하늘로서라… 할 것이요. - 이제 질문 자체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대답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고 있는 대적자들의 모습을 통해 진리에 무감각한 사람들은 결코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세례 요한의 설교를 제대로 경청하지 않았던 저들은 세례 요한의 사역이 하나님의 권세에 의한 것이라고 인정했을 때 세례 요한을 달갑지 않게 여겨 그를 따르지 않았던 자신들이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이 이것을 인정치 않은 까닭은 자신들이 세례 요한의 사역을 하나님의 권세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로 인정하는 순간 요한이 선포한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당연히 믿어야 했고, 지금까지 이것을 문제 삼아온 그들의 행동은 신성 모독죄에 해당한다는 것을 인정하고야마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었다.
20:6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돌로 칠 것이라. - 저들은 세례 요한의 사역이 그들이 평상시 인정했던 것처럼 사람의 권세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알고 그에 대해 많은 존경심을 갖고 있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백성들의 감정을 격분시켜 도리어 그들 자신이 백성들의 돌에 맞아 죽을 위험이 있었다. 결국 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곤경에 빠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카탈리다세이 헤마스)는 말의 보다 정확한 표현은 '우리에게 돌들을 내리던질 것이다', '우리들을 돌로 파묻을 것이다'는 뜻으로서 성난 백성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이 잘 나타나 있다.
20:7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 이것은 명백한 거짓말로서 그들은 정확히 '우리는 말하고 싶지 않다'라고 대답했어야 했다. 사실 자기들에게 닥친 위급한 상황을 충분히 감지한 그들은 그 어떤 것도 감히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결국 영적이고 종교적인 문제를 정치적인 의도로 해결하고자 했던 저들은 도리어 스스로 모순에 빠져 매우 불성실하고 무력한 모습을 예수와 일반 백성들 앞에 보이고 만 것이다. 아울러 이렇게 종교적인 문제에 무능한 저들이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로 그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것은 유대의 어두운 종교적 실상을 가늠케 하기에 충분하다.
20:8 나도 무슨 권세로…아니하리라. - 불성실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특별히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예수께서 대답을 거절하신 것은 그들처럼 알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를 부인하는 정직하지 못한 그들에게 답변에 대한 거절로서 최상의 대답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 권위를 간접적으로 다시 한 번 입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처럼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동안에도 그들의 부정직한 교만 때문에 복음의 진리를 애써 거부하고 그 진리를 인정하지 못하는 이러한 무리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할 때 우리는 그들의 잘못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연히 가르쳐야 하지만 그들의 강퍅함이 도리어 지나쳐 복음에 대한 무례함과 적의를 계속 나타낸다면 그들에게 복음을 인정치 않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경고하며 침묵을 지키는 것이 최상의 선택일 수도 있다.
20:9-19 악한 농부의 비유
본문은 앞 단락(1-8절)의 종교 지도자들과의 권세에 대한 논쟁과 연결되는 비유로서 예수께서 자신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의 완악함을 풍자한 비유이다(마 21:23-46).
여기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 소작인 농부는 유대인, 주인의 종은 여러 선지자들, 아들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유대인들은 그 은혜를 저버리고 선지자를 학대하며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는 죄악까지 저지른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패역한 유대인들을 용서하시지 않고 주님의 재림을 통하여 심판하시며, 유대인의 사명이 이방인에게 옮기워질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비유는 구약의 이사야서 5:1-7에 기록된 포도원의 노래와 그 내용이 흡사한데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유대인들이 결국 심판받게 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을 예수님께서 당시 상황에 맞추어 새롭게 가르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비유의 결론으로 주어진 말씀(17,18절)은 시 118:22의 인용으로 유대인들이 배척한 예수님을 이방인들이 구주로 영접하게 될 것을 예언하는 것이다. 여가서도 예수님의 심판하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여기서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정치적 메시야로만 오해했다가 그가 대속주이심이 판명되자 실족하여 넘어진 자를 가리키며, '돌에 의해 맞을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적극적으로 대적하다가 종내에는 심판주로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철저히 심판받을 완악한 무리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서는 18절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다음과 같은 점을 깨닫게 된다.
첫째, 타락한 인간 본성의 부패상을 알게 된다. 즉, 본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며 불순종하는 모습을 지녔다는 것이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길이 참으심으로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원하신다는 점이다(벧후 3:9).
셋째, 마지막 날에 죄인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예수로 인해 제시된 복음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의 결단임을 깨달아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다(신 28장; 고전 1:18,23,24).
20:9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 이 비유는 마 21:33-46 및 막 12:1-12과 병행을 이루는 것으로 일명 '악한 농부의 비유'라 불리는데, 이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이고 또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악함을 경고하시기 위해 도입하신 비유이다.
한 사람. - 포도원 주인을 가리키는 말로, 하나님을 상징한다.
포도원을 만들어. - 여기서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그런데 포도원을 만들었다는 것은 단순히 포도나무만을 심어 놓았다는 말이 아니라 포도원 유지에 필요한 산물, 즙 짜는 구유, 망대 등을 모두 갖추었다는 말로(마 21:33),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돕고 보호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물심양면으로 섭리하신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 여기서 '농부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이들은 소작인들이 주인에게 소작료를 지불해야 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열매를 하나님께 바칠 의무가 있었다.
타국에 가서. - 이는 농부들의 완전한 책임 아래 포도원이 운영되었음을 시사하는 말로, 하나님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 하여금 백성들의 신앙을 정진시킬 수 있도록 모든 여건을 제공하시고 소신껏 일하도록 자유 의지를 주셨음을 의미한다.
오래 있다가. 여기서 '오래 있다가'(크로누스 히카누스)라는 말은 같은 비유를 기록한 마태와 마가와는 달리 누가만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로, 이것은 '매우 오랜 시간' 또는 '상당한 시간'이 경과되었음을 가리킨다. 이를 통해 다른 복음서에 비해 예수님의 이적 기사와 비유를 가장 많이 언급했던 두가는 또한 그것의 정확한 전달을 위해 매우 신중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신앙의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제공하셨음을 시사한다.
20:10 때가 이르매 포도원…거저 보내었거늘. - 열매를 거둘 때가 되자 주인은 농부들과 맺은 계약의 조건에 따라 세를 받고자 종을 보냈으나, 악한 농부들은 이것이 주인의 정당한 요구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하고 도리어 자신들의 주인이 보낸 종을 때려 보냈다. 여기서 '때가 이르매'(카이로)라는 표현은 마 21:34과 같이 본격적으로 열매를 거두는 정해진 수확시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종'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백성들의 믿음과 의의 행동의 모습을 요구하였던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어 선민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백성들의 의와 공평과 믿음을 요구했으나, 유대 종교지도자라 하는 자들은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도리어 선지자를 박해하는 불법을 저질렀던 것이다.
20:11,12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내어 쫓은지라. - 농부들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인내하며 농부들의 성실한 의무 이행을 촉구하기 위해 계속해서 다른 종들을 그들에게 보냈다. 하지만 그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더욱 심히 학대함으로써 주인에 대한 그들의 패역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말았다. 이는 이스라엘의 패역에도 불구하고 오래 참으시며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계속하여 박해하며 더욱 패역한 모습을 드러낸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드러내는 말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만민 중에 택하여 많은 은혜를 베푸시고 난 후 그들에게 '열매'를 구하셨으나 그들은 그 때마다 하나님의 기대와는 어긋난 '열매'를 맺고 있었다(사 5: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여러 선지자를 보내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권고하셨지만 그들은 이것을 무시하고 도리어 선지자를 능욕하고 무시하며 온갖 학대를 다했던 것이다(대하 24:20,21; 렘 20:1,2; 히 11:37). 결국 그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내용과 그 실행 의무는 생각지 않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특권만을 생각하는 사람들로서 바로 그들이야말로 포도원 소출의 주인을 모르고 자신들의 이익만 생각하는 악한 농부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패역한 이스라엘의 모습은 오히려 그들의 지도자들에게서 더 심하게 나타났는데, 심지어 그들은 이스라엘의 패역과 부패를 조장하는데 있어 앞장섰던 사람들이었다.
20:13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공경하리라. - 악한 농부들의 패역한 행동에 대해 강력한 보복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에게 회개의 길을 준비하는 포도원 주인의 모습은 이스라엘 민족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오래 참으시며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암시한다. 여기서 어찌할꼬' (티 포이에소)라는 말은 악한 농부들을 권고하기 위해 깊이 고민하고 숙고하는 포도원 주인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는 단어로서, 이는 중요한 고비에서 자주 표현되는 하나님의 최후의 고려 표시였다(창 3:13; 출 14:15; 삿 13:18; 삼상 2:29). 한편 '내 사랑하는 아들'이란 표현은 종들과 주인의 아들의 차이를 명확히 구별하는 것으로, 이는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명할 때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마 17:5; 눅 3:22).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회개시킬 최후의 방법으로 선지자들이 아닌 그의 독생자를 이스라엘 가운데 보내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20:14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만들자. - 농부들의 각성을 위해 아들을 보낸 주인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농부들은 아들을 공경한 것이 아니라 포도원을 자신들이 소유하기 위해 아들을 죽이고자 하는 계획을 모의함으로써 그들의 악하고 부패된 모습을 더욱 드러내고 말았다. 일반적으로 당시 관습에 의하면 주인이 상속자 없이 사망한 경우에는 그 토지에 대한 권리가 그곳을 관리하는 사람들이나 거주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졌다. 그래서 악한 농부들은 포도원의 상속자인 주인의 아들을 죽임으로써 그 포도원을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이러한 음모를 꾸민 것이다. 또한 악한 농부들이 이러한 음모를 꾸민 배경에는 포도원 주인이 죽었기 때문에 상속자인 아들이 이것을 소유하기 위해 왔다는 생각과 혹시 주인이 살았다 할지라도 상속자인 아들이 죽으면 타격이 너무 큰 나머지 포도원을 포기할 것이라는 가정이 전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본절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장차 악한 유대인들의 음모에 의해 그의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비유 속의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통해 예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15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 이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 밖으로 끌려나가 죽으실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요 19:17; 히 13:12). 악한 농부들은 그들의 악한 음모를 실행하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는 사람들로서, 그들은 포도원 주인의 아들이 도착하자마자 그를 포도원 밖으로 내어 쫓은 다음 죽여 버렸다. 특히 그들은 포도원 안에서 상속자를 죽이지 않고 밖에서 죽였는데, 이는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그들이 그 땅의 저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고 자신들의 악한 음모를 감추기 위한 계략이었다.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 본절은 악한 농부의 비유의 결론으로 이제 비유는 패역한 이스라엘이 장차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예언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예수께서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악한 농부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묻고 계시는데, 이를 통해 예수께서는 악한 농부로 비유된 유대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Cobbin).
20:16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주리라. -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할 것과 아울러 그들이 지금까지 누려온 특권을 이방인들이 누리게 될 것을 선언하고 있다. 한편 같은 비유가 기록되어 있는 마 21:41은 예수님의 질문에 비유를 듣고 있던 청중들이 대답한 것으로 기록한 반면, 본절에서 누가는 예수님이 묻고 예수님 자신이 대답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기록상의 오류가 아니라 포도원 비유를 들은 청중들 또한 예수님과 같이 악한 농부들이 받을 심판의 당위성과 포도원 주인의 궁극적 승리를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두 저자가 서로 다른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 예수님의 비유를 들은 청중들은 마침내 그 비유의 의미를 깨닫고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말 것을 구하고 있다. 여기서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메 게노이토)라는 말은 미래에 대한 희구법으로 이것을 직역하면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말지어다'는 뜻으로서, 이 말에는 분노와 공포가 뒤섞여 있는 그들의 감정이 잘 표현되고 있다.
20:17 저희를 보시며. - 이것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없는 구절로 '보시며'(엠블레프사스)라는 말은 청중들을 자세히 관찰하며 그들의 심중을 꿰뚫어 보는 예수님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누가만의 독특한 관찰이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 여기서 '돌'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비록 예수께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배척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배척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 사역을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나라의 굳건한 반석으로 삼으셨다. 특히 시 118:22에 먼저 예언된 이 말씀은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가 공통적으로 인용하고 있는데, 이는 또한 사도 시대에도 베드로나 바울에게서 자주 인용되어 구원의 초석이요 반석이신 예수께서 이 예언을 성취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행 4:11; 엡 2:20).
20:18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 이는 생명의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 준다. 여기서 '돌 위에 떨어지는 자'나 '돌에 의해 맞을 자'는 악의 정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고 할 수는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즉 '돌 위에 떨어지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정치적 메시야로 오해했다가 그가 대속의 구주임이 판명되자 실망하여 떠남으로써 실족하여 넘어진 자를 가리킨다면, '돌에 의해 맞을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적극적으로 대적함으로써 종내에는 재림주에 의해 철저히 심판받을 완악한 부류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Bruce). 따라서 여기서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직접적으로는 당시 모든 일반 유대인을 가리키고, 보편적으로는 모든 불신자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또 '돌에 의해 맞을 자'는 직접적으로는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키고, 보편적으로는 사단을 비롯하여 예수의 모든 대적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20:19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두려워하더라. -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에서 악한 농부가 구체적으로 자기들을 가리키는 것을 깨달은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를 즉시 잡아 죽이고 싶은 적개심을 갖게 되었으나 예수를 따르는 백성들이 두려워 그들의 계획을 감히 실현할 수가 없었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백성들을 두려워한 까닭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 그들은 백성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알고 있다는 사실(눅 7:16)과 둘째, 바로 그 주간의 첫 날에 백성들이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크게 기뻐하고 찬양했다는 것(눅 18:37)과 셋째, 그 이전에도 백성들은 예수를 왕으로 세우려고 의도했던 경우(요 6:15)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Hendriksen).
20:20-26 납세에 관한 논쟁
본문은 앞 단락(9-19절)의 '악한 농부의 비유'를 통해 책망을 들은 종교 지도자들이 더욱 분노하여 다시금 세금납세에 대한 정치적인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다(마 22:15-22; 막 12:13-17). 당시 유대를 지배하던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곡식 십분의 일과 기름과 술의 오분지 일을 토지세로 징수했고, 수입의 백분지 일을 소득세로 징수하였다. 또한 14세에서 65세까지의 남자와 12세에서 65세까지의 여자들에게서 노동자의 하루 품에 해당되는 한 데나리온을 인두세(人頭稅)로 징수하였다. 여기서 논쟁의 대상이 되는 세금이 바로 이 인두세이다. 인두세는 한 데나리온을 바치게 되어 있었는데 이 데나리온은 납세를 목적으로 만든 로마의 화폐로 황제의상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들은 이 화폐를 지님을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는 것으로 여겨 평상시에는 사용하지 않았다(마 22:19). 그리고 그것이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국임을 상징하는 것이라 해서 유대인들 사이에는 이 세금을 내는 것에 대한 저항 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따라서 저들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22절)라는 질문을 하는 의도는 먼저 예수께서 로마 정부에 대한 납세를 반대하면 예수님을 로마 정부에 반항하는 정치적인 범죄자로 고발하고, 반대로 납세를 찬성하면 예수를 반민족주의자로 매도함과 아울러 유일한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거역하는 자로 정죄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계략을 이미 간파하시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5절)는 지혜로운 대답을 통하여 종교 지도자들을 침묵하게 하신다.
이것은 로마 정부나 이에 반대하는 유대인들 중 어느 편에도 찬성하지 않는 것으로 다만 이 세상의 권세와 하나님나라의 권세가 분명히 구별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동시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를 소홀하게 하는 근거가 되지 못함을 보여 준다. 그리고 메시야께서 세우실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인들이 원하는 세상의 국가 조직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닫게 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자 세상의 국가 조직의 일원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자세를 알게 된다. 성도들은 국가의 권위가 세상의 질서를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임을 생각하여 그 권위에 복종하며 질서를 지켜야 한다(롬13:1-7; 벧전 2:13-17). 또한 국가와 정부도 역시 그 권위가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해 허락된 것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고 선을 행하는 종의 모습을 가져야 한다(골 3:23).
둘째, 예수님을 궁지에 빠뜨리려는 종교 지도자들은 그 적의와 반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아첨과 아부로써 경계심을 늦추려고 하였는데, 이것은 달콤한 것으로 성도를 유혹하는 사단의 전형적인 모습이다(시 55:21). 따라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환난과 핍박보다 달콤함으로 다가오는 유혹을 경계하고 믿음의 자세를 굳게 가지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행 12:22; 살전 2:5).
20:20 저희가 엿보다가. - '엿보다가'(파라테레산테스)라는 말은 '옆에서'(파라)와 '지켜보다'(테레오)는 말의 합성어로, 이는 흔히 사냥꾼이 짐승을 잡기 위해 올무를 놓고 엿보는 자세를 가리킨다. 이를 통해 우리는 백성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예수를 반박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유대 교권자들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 아주 은밀하고 교활한 악의를 갖고 예수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성도를 그 구원의 방주에서 이탈시키기 위해 분주히 노력하는 사단의 교묘한 활동을 잘 시사해 준다 하겠다.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여. - 대부분이 유대인의 지도자적 위치에서 예수를 모함하는데 앞장섰던 교권자들은 당시 사회배경 속에서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는 로마 총독이 직접 예수를 정죄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모든 계획들은 이러한 목표에 역점을 두고 있었는데 이 같은 사실을 누가만이 독특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Robertson).
정탐들을 보내어. - 구약성경과는 달리 '정탐'(엥카데투스)이라는 말은 신약 성경 중 이곳에만 유일하게 나타나는 단어로,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교활한 말로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이 협력하여 보낸 사람들이었다(마 22:15,16). 결국 예수에게 정탐을 보낸 그들의 동기에서부터 이미 불순한 의도가 나타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마 22:16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20:21 그들이 물어 가로되… 가르치시나이다. - 정탐꾼들은 기만적이고 아첨하는 태도로 예수께 접근하였다. 실로 그들은 양의 가죽을 쓰고 목자를 속이고자 하는 이리였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를 가리켜 한 말은 그것이 가식이 섞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 내용은 어디까지나 사실이었다. 특히 여기서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란 말은 '사람의 판단 기준으로 얼굴을 취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것은 편벽되지 않고 진리를 좇아서 판단하는 것을 가리킨다. 결국 정탐꾼들은 예수께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면서도 자신들의 거짓된 행동으로 교활하고 음흉한 마음을 예수님 앞에서 숨기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20:22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 당시 세금은 로마 정부가 속주의 백성들 가운데 남 14세, 여 12세 이상 65세까지의 사람들에게 부과했던 인두세를 말한다. 그리고 '가이사'(Caesar)는 당시 로마 제2대 황제 디베료(Tiberius, A.D. 14-37년)를 가리키는 말로, 본절의 질문은 결국 선민 이스라엘 사람들이 로마 황제에게 인두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 것이냐? 옳지 못한 것이냐? 라는 요지의 내용이다. 사실 이것은 상당히 대답하기가 어려운 질문으로서, 인간의 지혜가 총동원되어 짜낸 흔적이 역력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 황제에게 납세하는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로마 간에 상당한 마찰을 빚었던 예민한 문제로서 아직도 각 정파 간에 일치된 의견 접근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당시 열심 당원과 같은 정파에서는 일체의 납세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납세를 반대하여 갈릴리의 유다와 같은 사람은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던 것이다(행 5:37, Josephus). 반면 본문에 나타난 헤롯 당원은 헤롯 가문의 재 부흥이라는 기치 아래 로마의 정책에 적극 찬성하며 협력했다. 하여튼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선민인 자신들이 이방의 군주에게 납세를 한다는 것에 대해 매우 껄끄럽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납세는 곧 가이사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가이사를 동일한 위치에 두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의 권력에 눌려 어쩔 수 없이 세금을 납부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이 같은 복잡한 기류가 형성되어 있는 상황에서 본절의 질문은 상당한 긴장감을 유발시켰음이 분명하다. 또한 비록 전지하셨던 예수께서 이들의 불순한 의도를 간파하셨다 하더라도(23절) 이것을 빌미로 회피할 수는 없으셨다. 왜냐하면 주위에 둘러선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이 문제에 대해 그들이 메시야라고 생각했던 예수의 입장을 알고 싶어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퇴 양난의 처지로 몰아세운 바리새파와 혜롯 당원들이 예상했던 상황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① 예수께서 자신을 메시야로 떠받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실망시킬 수 없어서 납세를 거부해야 한다고 대답할 경우이다. 이 경우는 이들 바리새파와 헤롯 당원들이 가장 원했을 대답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 예수님은 일시적으로 민중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겠지만 곧바로 로마 황제에 대한 반란죄에 해당되어 사형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② 예수께서 이들의 의도를 알고, 납세를 허용했을 경우이다. 이는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의 입장에서 볼 때 최선의 결과는 아니지만 대체로 만족할만한 상황이다. 그들은 애초 예수를 체포하려고 했지만 그를 선지자로 생각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선 때문에 여러 번 좌절된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여기서 납세를 허용한다면 백성들은 더 이상 예수를 선지자로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언제든지 예수를 체포할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까닭이다. 이들은 이 같은 상황을 기대하면서 분명 득의만만했을 것이고, 백성들의 관심은 순간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신경을 곤두 세웠을 것이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아닐 수 없다.
20:23 그 간계를 아시고. - 온갖 가식과 달콤한 말로예수님을 추켜세운 정탐들이 예수께 던진 질문은 마치 그들이 율법의 준수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경건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려고 했지만 이미 예수께서는 그들의 치밀한 계획을 간파하고 있었다. 여기서 '간계'(파눌기안)로 번역된 헬라어는 하와를 유혹한 사단의 '간계'를 묘사할 때 사용된 말과 동일한 것으로서(고후 11:3), 이는 질문 속에 숨겨진 정탐꾼들의 의도가 매우 야비하고 파렴치한 계획임을 잘 입증하고 있다. 본절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마태복음 병행구절에 의하면 예수께서 이들을 향해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마 22:18)고 책망하신 것으로 나타난다.
20:24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 데나리온은 로마가 주조한 은전으로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가 하루 동안 일한 대가로 받는 평균 임금이었다(마 20:1,2). 그리고 그것은 법으로 정해진 인두세의 납부액으로서 로마 정부는 유대인들이 세금을 낼 때 로마의 화폐로 내도록 하였다.
뉘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 데나리온에는 정치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면에서 로마 황제를 우상화시킬 양으로 황제의 형상과 글을 앞뒤로 새겨 넣었는데 동전 앞면에는 '존엄한 신의 아들 티베리우스 가이사 아구스도'라는 내용이, 뒷면에는 '최고의 제사장'이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본장 자료 노트 '가이사의 상' 삽화 참조.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동전이 부정한 것이라 하여 휴대하기를 꺼려하였다.
20:25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하나님께 바치라. - 납세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이것(가하니이까)도 저것(불가하니이까)도 아닌 제 삼의 것이었다. 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의 공세에서 벗어나기 위한 임기웅변적인 대답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대답에는 그의 탁월한 신적 지혜와 오묘한 진리가 담겨 있다. 즉 예수께서는 국가에 대한 의무와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결코 모순된 것이 아님을 강조하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납세 문제를 제기한 것은 사실 이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된다고 여긴 까닭이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권력 역시 하나님께 속한다는 점에서(롬 13:1-7) 국가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거스리는 것은 아닌 것이다(벧전 2:13-17). 즉 국가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도 곧 하나님께 대한 의무의 하나를 이행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골 3:23). 물론 여기서 국가에 대한 의무는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국가가 하나님께서 국가를 제정하실 때의 본래 목적, 곧 세상의 질서를 세워 나감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나갈 때를 말하는 것이요, 국가가 하나님의 선한 목적에 위배될 때는 의무 행함을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교훈을 통해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①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혜택을 누리고 있는 국가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게 하는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국가에 대한 의무 이행이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② 국가의 권력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어떤 개인의 숭배나 이기적인 욕심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③ 성도들은 국가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되 더불어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 노트와 롬 13장 연구자료 '국가 권력에 대한 성도 및 교회의 자세'를 보다 참조하라.
20:26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잠잠하니라. - 정탐꾼들의 질문 의도를 파악한 예수님은 그들의 올무에 걸리지 않고 도리어 그 난제를 명쾌하게 해결하심으로 그들의 수치를 드러내셨다. 더구나 일시적인 궤변만을 늘어놓는 서기관들이나 제사장들과는 달리 시종 일관근본적인 원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가르치는 예수님의 지혜를 그 누구도 비난할 수는 없었다. 결국 분통하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0:27-40 부활에 관한 논쟁
앞 단락(20-26절)에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납세에 관한 정치적인 논쟁을 통해 예수님을 궁지에 빠뜨리려 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살펴보았다. 계속해서 본문에서는 사두개인들이 나서서 부활 문제를 통해 예수님을 공격하는 장면이 소개된다. 사두개인들은 당시 로마 정부와 유화적인 관계를 맺은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경향의 사람들인데 예루살렘 귀족이나 대제사장 무리들로 대부분 구성되었다. 이들은 유대주의적 전통을 벗어버리고 모세 오경만을 인정하며 교리
적으로는 내세나 부활 혹은 천사나 사탄과 같은 영적 존재를 믿지 않았고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강조하였다(행 23:8). 사두개인에 대해서는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을 보다 참조하라.
이들의 질문은 계대 결혼(繼代結婚)과 부활을 관련시킨 신학적인 것이었다. 계대 결혼(levirate marriage)은 결혼한 형제가 후손을 보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에 다른 형제가 죽은 형제의 아내를 취하여 형제의 대를 잇고 여자를 돌보는 제도이다. 이에 대해서는 신 25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을 신봉하는 자들답게 신 25:5-10절에 기록된 모세의 규례를 제시하면서 만약 부활이 있다면 부활 후에 계대 결혼을 한 사람들의 혈통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에 대하여 질문을 제기한 것이다. 즉, 모세오경에 언급된 계대 결혼 제도를 근거로 예수께서 가르치는 부활 교리가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음을 밝힘으로써 예수의 교훈의 가치를 떨어뜨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저들의 질문이 몇 가지 오류를 지닌다.
첫째, 그들은 성경을 편협하게 인용했고 이미 부활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후 질문하였기 때문에 현세와 내세를 동일한 상태라고 전제한다는 것이다.
둘째, 질문 자체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것이기에 성경의 원래 의도를 무시한 채 자신들의 논리에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즉, 신 25:5-10의 계대 결혼에 대한 규정은 부활에 대해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자의 인권이 무시되는 사회에서 과부의 신분과 그의 남편이 속한 지파와 가문의 재산을 보호해 경제적. 신분적 불평등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는 성경의 저작의도 면에서 볼 때 부활과는 연결시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부활 후의 상태 모습을 예시하셔서 사두개인들의 부활에 대한 무지함을 깨닫게 하신다(34-36절). 부활 후에는 결코 결혼 제도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도 없을 뿐 아니라 사후 부활체의 삶의 양식이 어떠할지 암시해 주는 바, 그것은 천사와 같게 되리라는 것이다. 즉 부활한 성도들은 더 이상 세상의 법칙에 지배를 받지 않고 새로운 하늘의 법칙에 따라 살게 될 것이다. 특히 예수께서는 그들이 신봉하는 모세 오경을 인용해서 부활의 실재를 확증하셨다(37, 38절). 즉, 출 3:6은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인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표현하여 이 조상들이 죽어 없어진 존재가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살아있는 존재임을 말씀하셨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성도들이 부활하여 믿음의 조상들과 함께 영원한 영광에 참예할 것을 보여 주는 것으로 세상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말해 준다. 따라서 우리는 편협한 지식을 주장하는 자가 아니라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이 모든 일을 이루어 가실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고전 3:19,20).
20:27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어떤 이들이 와서. - 당시 사두개인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수는 적었지만 매우 부요하고 권력 있는 당파로서 그들은 모세가 기록한 율법책들만을 거룩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 책들 안에서 부활이나 내세에 관한 어떤 증거도 인정하지 않았고 선지서나 기타 다른 책들의 중요성을 무시하였으며, 풍요로운 세속적 생활에 만족하여 사후 세계와 같은 영적 일들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 그들의 특징이었다(Spence). 이들에 관해서는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 부분을 보다 참조하라. 한편 그들은 교리적인 문제로 바리새인들과 자주 충돌하곤 했는데, 예수를 모함하려 했었던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계획이 실패하자 이제 자신들이 이것을 실행하기 위해 예수 앞에 나은 것이다. 특히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보낸 정탐꾼들은 세금의 납부에 관한 사회적인 문제를 예수에게 물었던 반면, 현세주의자인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관한 영적인 문제를 가지고 예수 앞에 나왔다는 것은 매우 특이할 만한 일이다. 결국 그들은 육체의 부활을 가르치는 예수를 비방하여 그의 권위를 실추시킴과 동시에 이 기회를 통하여 자신들과의 경쟁 관계에서 내세의 교리를 인정하는 바리새인들을 제압하여 자신들의 우월성을 입증하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던 것이다.
20:28 모세가 우리에게 써주기를. - 이것은 신 25:5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 내용은 형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아우는 형수를 취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유업을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흔히 '계대 결혼'(繼代結婚) 또는 '수혼'(搜婚)이라고 한다(신 25장 연구 자료, '계대 결혼법' 참조).
형이 만일 아내를 두고‥‥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이 철저히 신봉하고 있는 모세의 율법에 나타난 '계대 결혼의 풍습'을 통하여 부활 사상의 허구성을 입증하고자 했다.
그리고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풍습은 죽은 사람의 유업을 보존하기 위한 제도로서 그 구체적 사례는 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나타나지만(창 38:8; 룻 4:5), 신약 성경에는 이러한 제도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아 신약 시대 이후 이 풍습은 거의 시행되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Morris).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의 이러한 질문은 다분히 논쟁을 야기시키기 위한 것으로서, 이것은 또한 그들이 바리새인과의 논쟁에서도 자주 사용한 수법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20:29-33 본문은 예수를 그들이 의도한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사두개인들이 단지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더욱이 그들은 '계대 결혼'을 제시하고 있는 모세 율법의 구체적 사례를 통하여 육체의 부활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가를 밝힘으로써 자신들이 논쟁의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실 탈무드의 전승에 의하면 바리새파의 위대한 랍비들에게 사두개인이 예수에게 행한 똑같은 질문이 제기하였을 때, 그들의 통상적인 대답은 문제의 여인이 첫 번째 남편의 아내가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대답은 당시 사두개인들의 많은 비방과 조롱을 받았는데, 아마도 사두개인들은 예수에게서 같은 대답을 기대했을 것이다. 결국 영적인 것에 무지했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모두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거룩한 것과 진주를 깨닫지 못하는 개나 돼지'와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마 7:6).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의 가시적인 세계 밖에 보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부인하고 우리와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 논쟁을 일삼고자 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때마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함정을 직시함으로써 공허한 논쟁을 애써 피하고 그들에게 영적이고 성경적인 방법으로 대응할 수 있는 지혜를 간구하는 신앙의 모습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34 이 세상의 자녀들은. - 여기서 '이 세상의 자녀들은'(호이 휘오이 투 아이오노스 투투)이란 말은 같은 비유를 언급하고 있는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는 나타나 있지 않는 말로, 이것은 현세와 내세를 분명히 구별하여 사두개인들이 묻고 있는 질문의 근본적 오류를 지적하시는 예수님의 논리적인 모습을 누가만이 독특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표현이다.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 사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장가를 가고 시집을 가는 일을 중요시 여길 뿐만 아니라 인생의 많은 시간을 가정과 관계되는 일에 투자하고 소비한다. 특히 부활과 내세를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현 시대의 안락함과 풍요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진리에 무지하면서도 부활의 문제를 묻고 있는 그들의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된 것인가를 현세와 내세의 분명한 차이점을 통하여 부활의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20: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입은 자들은. - 여기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이란 표현은 원어상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으로. 이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인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부활한 의인들을 가리킨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의인들만이 부활한다는 것을 믿었지만 예수께서는 의인과 악인이 같이 부활할 것을 말씀하셨는데(요 5:29), 본절에서 부활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된 생활을 누리는 의인들을 말한다.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 사두개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가졌던 부활관을 살펴보면 그들은 부활을 현세의 무한한 연장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정되고 발전된 모습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현세와 같은 종류의 삶이었다. 탈무드의 전승을 보면 심지어 어떤 율법학자들은 부활한 사람들이 시체와 접촉할 경우 결례 의식이 필요한지 안한지에 대해 열정적으로 토론했다는 기록이 나타날 정도이다(Morris).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당시 유대인들의 부활에 관한 일반적인 견해의 약점을 이용하여 예수께 부활 후의 상태에 대해서 질문을 하였지만, 예수님은 도리어 부활이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육체적이고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그들의 잘못된 부활 사상을 비판하신다.
20:36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 결국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이 세상의 고통과 환난에서 오는 사망의 위협 가운데서 해방될 것이다. 아울러 영화롭게 부활한 육체는 이제 더 이상 가시적인 것에 의해 방해를 받지 않을 것이며, 부활한 의인이 거하는 처소는 영원하고 적합한 거주지가 될 것이다. 따라서 부활한 성도들은 더 이상 결혼과 같은 이 세상의 제도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사실 결혼 제도는 인류를 보존하고 번성시키기 위한 창조의 법칙이었다. 그러나 부활 때는 이미 창조의 법칙이 완성된 때요, 죽음이 사람을 지배할 수 없는 때이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인류 보존 목적에서 제정된 결혼 제도가 필요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결혼을 통한 쾌락이나 만족은 더 새롭고 영원한 즐거움과 기쁨으로 대체될 것이다.
천사와 동등이요. - 이 말은 신약 성경에서 본절에만 나오는 단어로서, 이것은 우리가 천사와 똑같이 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망과 질병으로부터 자유를 얻으며 결혼과 출생이 필요한 제한된 존재의 상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Ryle). 아울러 이 말에는 부활한 성도가 천사가 갖고 있는 속성을 같이 취할 것을 나타내지만 지위에 있어서는 보다 낫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천사들은 우리들이 가진 것과 같은 육체가 없는 영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본장 자료 노트, '천사의 특징'을 보다 참조하라.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활의 생명을 얻는 성도는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여기서 '부활의 자녀'란 성도의 특권을,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은 성도의 신분을 가리킨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20:37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인용하여 이 같은 사실을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절대적인 가치를 두고 신뢰하는 모세 오경 가운데 출 3:6을 통해 율법에서도 육체의 부활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심으로 사두개인들의 잘못된 사상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계시다.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칭하였나니. - 본절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마 22:32을 살펴볼 것 같으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에고 에이미 호 데오스 아브라암 카이 호 데오스 이사악 카이 호 테오스 이아콥)라고 원어상 분명히 현재 시제로 나타나 있다. 이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현재 사실로서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결국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지금도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 또한 영광스러운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두개인의 영적 무지를 지적하는 예수님의 이러한 답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살고 있는 그분의 자녀를 축복하고 보호하시지만 그들이 죽은 이후에도 그들을 향한 인자하심과 사랑하심을 영원히 멈추지 않고 그곳에서도 주신 언약을 성실히 이행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0:38 하나님은‥‥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 만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 구약 성경에 나타난 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짧은 생애를 마치고 사라지는 먼지와 같은 존재라면 하나님은 자신을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나는 산 자의 하나님이다'라고 선언하심으로 현재이든지 내세이든지 간에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맡겨져 있음을 분명히 밝히셨다. 그리고 이러한 율법적 증거를 통해 예수께서는 부활을 인정치 않는 사두개인들에게 율법이야말로 인간의 영원성과 부활의 사실을 강력히 뒷받침해 주는 신앙의 열쇠로서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그들의 잘못된 율법 이해를 비판하신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단순히 그들의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부활의 참된 의미를 가지고 사두개인들이 꾸며낸 가설의 허구성을 무너뜨린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 이것은 마태나 마가복음에는 나타나 있지 않는 누가만의 독특한 표현으로,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죽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는 살아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어 장사지낸바 된 성도들이 비록 우리 눈에는 '죽은 자'로 보일지는 몰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여전히 살아있어,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영원한 관계는 결코 단절되지 않고 유지되는 것임을 알려 주는 것이다(Hendriksen).
20:39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옳으니이다. - 여기서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란 구체적으로 육체의 부활을 믿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을 가리킨다. 항상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에서 적대 관계에 있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율법에 기록된 말씀으로 그들이 이전에 감히 깨달을 수 없었던 명쾌한 부활의 진리를 설명하여 사두개인들의 주장을 여지없이 물리치자 비록 예수에 대하여 적의를 갖고 있던 그들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예수의 가르치심에 존경을 표시한 것이다.
20:40 저희는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 예수를 모함하기 위해 갖은 계략을 다 꾸몄던 대적들의 계획은 오히려 예수님의 신적 지혜를 사람들 앞에 더욱 드러내어 예수를 존귀케 여기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무지를 드러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따라서 그들은 더 이상 감히 어떠한 질문도 할 수 없었다. 특별히 여기서 '저희'는 단순히 사두개인 뿐만 아니라 본장 전체에서 시종 일관 예수를 모함하고자 했던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로서 누구보다도 많이 배우고 지혜가 있다고 자처했던 그들은 결국 예수 앞에서 한 마디도 제대로 묻고 대답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사람들이었다.
20:41-44 다윗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권세, 납세, 부활에 대한 문제를 통해 예수님을 공격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질문에 답변하신 바 있는 예수님께서(1-40절) 이제 본문에서는 오히려 그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므로 공박하고 계신다. 이러한 본문은 세 차례에 걸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질문에 대한 결론적 성격을 떤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윗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질문하신 것은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밝히 드러내고 유대인들의 잘못된 메시야관을 시정하시며 그들의 무지를 폭로하기 위함이었다(마 22:41-46; 막 12:35-37).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으나(사 16:5; 렘 13:13; 슥 12:7). 그 메시야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조상되는 다윗이 자기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주(主)라 칭하고 있으므로(시 110:1) 자손이 주(主)로 칭함 받는 것은 모순이 된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된 두 가지 태도를 지적하시는 것인데 첫째는 메시야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인간적인 왕의 모습으로만 생각했고, 하나님의 나라도 현세적인 정치적 왕국으로만 이해했으므로 예수님의 질문에 답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둘째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야로 오신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더구나 왕의 모습으로 연상하고 있던 메시야가 나사렛이라는 촌에서 온다는 것은 더욱 상상할 수조차 없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시 110:1의 다윗의 시를 인용하여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신 분임을 밝힘으로써 유대인의 잘못된 메시야관을 교정시키신다. 즉 비록 육신적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지만 영적으로는 다윗의 주(主)가 되시는 예수님이 인성과 신성을 모두 갖추신 메시야이심을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당신의 사역도 유대인만을 위한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완전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인자이심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으로서 온 인류의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올바른 신관을 가져야 할 것이다(요 1:14; 고전 8:6).
20:41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 자신을 모함하려던 대적들의 계획이 모두 실패로 끝나자 이제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질문하심으로써 유대인의 잘못된 메시야 관념을 지적하고자 하셨다. 사실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메시야를 지칭하는 대명사로서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은 복음서 에 자주 나타나고 있다(마 15:22; 21:9; 눅 18:38). 그리고 예수께서도 이러한 칭호를 기꺼이 수납함으로써 자신이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야이심을 간접적으로 나타내 보이셨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이란 명칭을 문제 삼은 것은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 성경에 여러 번 예언된 메시야로서 자신이 그 기록에 앞서 선재했었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예수님 자신의 신성을 밝히시고자 하는 의도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요 8장 자료 노트, '그리스도의 선재성' 참조). 또한 당시 메시야에 관계된 많은 유대의 문헌을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고 이스라엘에게 궁극적인 승리를 안겨다 주는 자기 민족 중심의 메시야 관념이 팽배해 있는 것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Morris).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예언된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메시야의 신적 사역을 가르치심으로써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편협한 메시야 관념을 지적하고자 하신 것이다.
20:42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 이것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시 110편의 저자를 다윗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 시편의 신적 영감의 충만함은 마 12:36에 잘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이 시편이 기록하고 있는 메시야의 신적 특성은 공관복음서의 저자들뿐만 아니라 베드로(행 2 : 34, 35), 바울(고전 15:25), 히브리서의 저자(히 1:13; 10:13)가명백하게 다루고 있는 신학적 주제이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 이 말이 기록되어 있는 시 110편의 히브리 원전에는 '여호와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로 되어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메시야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은 시편에서 다윗이 '여호와’와 ‘주'라는 명칭을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통해 입증된다. 또한 신약 성경에서 '주'(퀴리오)라는 명칭은 '권능과 위엄을 소유하신 중보자 하나님'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되던 단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20:43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이것은 세상 끝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원수를 정복하여 짓밟을 때를 가리킨다. 한편 여기서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둔다는 말은 마 22:44에서 잘 표현하고 있는 바와 같이 '원수를 발 아래 굴복시킨다'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대적하는 모든 사단의 세력을 완전히 물리쳐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히 10:12,13).
내 우편에 앉았으라. -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적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는 은유적 표현이다. 아울러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승귀를 나타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세상을 통치하는 권한을 부여하신 만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서 최고의 권력과 권위를 가진다는 표현인 것이다(Calvin).
20:44 다윗이…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 이 말씀은 메시야이신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적인다윗의 후손이라는 견지에서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으나 성결의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만민의 주가 되시는 분이다(롬 1:3,4).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당연히 다윗의 주로 인정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만을 알고 신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의 잘못된 메시야관은 수정되어야 했던 것이다. 결국 예수께서는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 이라 예언한 시편의 논증을 통하여 첫째,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탄생하셨지만 단순히 육체적인 다윗의 후손이 아니시며, 둘째, 그리스도는 다윗이 주라고 고백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심성을 소유하신 분일뿐만 아니라, 셋째,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소유하신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이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셨던 것이다.
20:45-47 서기관들에 대한 경계
앞 단락(41-44절)에서 다윗과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해 질문하심을 통해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말씀하신 후 예수님은 본문에서 외식적이고 위선적인 신앙으로 백성들 앞에 군림하던 서기관들을 경계하라고 교훈하신다. 이런 경계의 말씀은 이미 눅 11:39-52에서 주어졌었는데 이제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을 끝내시면서 제자들에게는 경계의 말씀으로,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심판의 경고로 선언하시는 것이다(마 23장; 막 12:38-40).
본문에서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허영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높임을 받고자 하는 태도를 집중적으로 책망하고 있는데(46절) 특히 동정과 구제의 대상인 과부의 재산까지 종교적으로 속여서 착취하는 서기관들의 탐욕과 죄악에 대해서 그 심판이 더욱 무겁다고 경고하신다(47절). 이것은 다른 사람을 신앙으로 인도해야 될 지도자의 직분에 있는 사람이 악행을 범하면 하나님 앞에서 더 큰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의 외식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심으로써 본장에 기록된 긴 논쟁을 끝내고 계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심판 선포는 오늘날의지도자들이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하며 성도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 준다(눅 12:48; 요 9:41; 롬 14:10).
20:45 모든 백성이 들을 때…제자들에게 이르시되. - 무리들을 향하여 메시야에 관한 참된 본질을 가르치신 예수께서는 이제 제자들에게 이스라엘의 대표적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서기관들의 위선을 경고하시고 계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모인 청중들 중에 서기관들이 그 자리에 같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대해서 본절은 명확히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그들의 위선에 대한 예수님의 통렬한 비판을 기록하고 있는 마 23장의 정황을 살펴보면 예수를 모함하고자 했던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모든 계획이 실패로 끝난 후, 그들이 예수를 떠났을 때에 이 말씀을 하셨을 것으로 추정된다.
20: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 당시 서기관들은 율법에서 규정하는 것(민 15:28) 보다도 그들 의복의 소매 자락을 훨씬 크게 하였고 옷자락을 길게 만들어 입었는데(Ryle), 이는 일반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거룩함과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것으로 그들의 허영심과 교만을 잘 드러내 준다. 이와 관련해서는 마 23장 자료노트, '히브리인의 외투와 옷술 장식'을 참조하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 - 여기서 '문안'(아스파스무스)이라는 말은 우정 어린 '인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우월성에 대한 공개적인 '존경의 표시'를 의미한다. 따라서 서기관들이 시장에서 문안받기를 즐겨했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명예욕에 굶주려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 위선적으로 형식적인 사람들은 항상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돋보이게 하는데 지대한 관심이 있게 마련이며, 이러한 기회를 통하여 사람들로부터의 칭찬과 존경을 받기를 갈구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탐내는 사람들의 결말에 대해서 이미 분명히 경고하셨다(눅 14:8,9).
20:47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 서기관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과부의 재산을 착취했는가에 대해서 본절이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서기관들은 그들이 돌보아야 할 대상인 과부들의 재산을 도리어 토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령 예를 들면 당시 율법을 가르친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과부들의 돈을 받았다든지, 아니면 과부들이 소유한 부동산 거래를 알선하면서 그 대가로 더 많은 몫을 가로챘든지, 혹은 과부들에게 많은 헌금을 강요함으로써 자기들의 부당한 이익을 취득하는 경우가 될 수 있다. 하여튼 과부들의 재산을 착취하는데 어떠한 방법이 사용되었든지 간에 예수님께서는 성경이 가증한 범죄 행위로 규정하고 있는 죄를 범한 서기관들의 행위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 가증한 범죄를 아무 거리낌 없이 행하면서도 경건의 탈을 쓰고 꾸며낸 기도를 오랫동안 계속하는 그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실 리 없다. 그러므로 이렇게 과장된 서기관들의 기도는 그들이 하나님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악을 사람들 앞에서 은폐하기 위해 꾸며낸 술수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 서기관들의 기만적인 경건과 극에 달한 패역함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스스로 자초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침으로써 백성들의 모범이 되며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악행을 제거하는데 힘써야 했던 그들이 도리어 죄를 행하는데 있어 앞장섰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임할 형벌의 가혹함을 더욱 부추키는 행동이었다(눅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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