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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장 십자가 수난에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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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제 13-17장까지 이어져온, 본래 성자 하나님이었으나 태초 하나님이 세우신 구속의 법에 따라 우리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제 하루 밤만 지나면 겪게 되실 십자가 수난(crucifixion)을 통하여 구속 사역을 최종 성취하시기 전날 밤인 고난주간 제 5일째인 목요일 밤에 최후의 만찬을 전후하여 행한 고별설교와 기도로서, 예수께서 고난 받고 승천하신 이후에도 이 땅에 계속 남아 구속사의 주역으로서 사명을 성취해야 할 제자들에게 주신 여러 말씀들을 보도한 일련 기사의 종결 부분이다.
이와 같은 취지의 일련기사인 제 13-17장은 제 13장이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주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사랑의 행동을 통하여 서로 섬기는 자가 될 것을 교훈하시고 이어 가룟 유다의 배반 및 베드로의 예수 부인 등을 미리 아시고 예언까지 하셨음을, 그리고 14-16장이 당신의 십자가 수난 및 부활 승천 이후 세상에 남게 될 제자들을 향한 내세에 대한 보장과 위로의 약속 및 복음 전도자가 겪을 수밖에 없는 핍박에 대한 교훈과 성령 강림에 대한 약속을, 그리고 제 17장이 대속 희생을 위한 죽음을 앞두시고 자신과 제자들 및 장차 성립될 모든 교회들을 위해 이 세상의 구속주로 오신 그리스도로서 대제사장적인 중보 기도를 드린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한편 이런 문맥 하의 본장은 공관복음서가 예수께서 수난 받으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인간적인 고뇌에 찬 기도를 공히 기록하고 있는 것과 대조된다. 이는 요한이 이미 요 16:33에서 예수께서 공언하신 바와 같이 장차 있게 될 승리를 예견하며 공관복음의 겟세마네 기도를 생략하고 중보의 사역을 수행하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승리의 기도를 드림을 기록하는 것이다. 이처럼 본장은 앞의 제 13-16장에서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이후로부터 재림 때까지의 기간 동안 성도들이 명심해야 할 사랑의 새 계명과 세상의 핍박에 대한 성도의 자세 및 승리의 신앙생활을 위해서 명심해야 할 일련의 구속사적 진리들을 교훈한 것에 대한 결론 부분으로서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신과 제자들과 전 신약 성도들을 위한 중보 기도를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십자가의 고난을 바라보는 침통한 분위기보다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모든 신약 성도의 중보자로서 대제사장적 권위를 가지신 그리스도의 승리와 기쁨의 분위기가 넘치는 장엄한 기도이다. 이런 문맥 하의 본장 내용을 개략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1-5절은 예수의 제자들과 전 신약 성도들을 위한 중보기도(中保祈禱)에 앞서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더불어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의 기록이다. 여기서 성자 예수께서 자신을 위해 구한 영광이란 곧 십자가 수난을 통하여 태초 이래 진행되어 온 하나님의 구속 섭리에 따라 구속 사역을 최종 성취하시고 부활 승천하심과 그로 인하여 온 우주 만물이 그를 참 구속주(the Saviour)로 인정하고 그 앞에 경배하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빌 2:9-11). 또한 성자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을 위해 구한 영광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신구약 전시대의 성도들이 여호와를 창조주이시며 은 우주와 역사의 주권자로 인정하고 오직 그분께만 영광 돌리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엡 1:4; 벧전 2:9). 이에서 우리는 새삼 구속사(redemptive history)의 최종 목적은 오직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의 영광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또한 이런 구속사의 성취를 위한 삼위 하나님의 열심이 얼마나 큰가를 깨닫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입은 우리들은 과연 우리의 생활과 뜻과 생각으로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지 돌이켜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6-19절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 드린 중보 기도의 기록이다. 그리스도의 기쁘신 뜻에 의해 선택받은 제자들은 예수께서 신약 선민인 세계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재림하시 기까지 지상에서 생활할 동안 신앙과 생활의 중심이 될 교회(the Church)의 창설자로 세워진 자들이다. 따라서 이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는 이들 자신들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이들이 세울 신약 교회의 전 성도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수의 공생애 사역의 시종을 목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약 복음의 핵심 내용들을 예수께로부터 직접 전수 받은 이들이 믿음 가운데 든든히 서느냐 못서느냐가 신약 교회의 설림 성패 여부를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내용의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는 주께서 재림하여 당신이 일단 성취하신 구속 사역을 최종 실현시키기 전에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을 통한 구속의 공로를 힘 입어 구원받은 성도를 불러 교회를 세워나가시는 구속 사역을 승천 이후에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신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중보 사역을 통해 계속하실 것임을 암시한다(롬 8:34).
끝으로 20-26절은 전 신약 교회 성도들의 연합(聯合)을 위한 예수의 중보기도의 기록이다.
즉 이 대목은 성도와 그리스도, 또 성도와 성도 간에 반드시 이루어 나가야 할 연합에 관한 구속사적 진리를 보여 준다. 연합의 원리에 관해서는 롬 5장 연구 자료를 참조토록 하고 여기서는 '연합'(Unity)의 정의에 대해서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여기서 성도와 그리스도가 연합되었다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합일(合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 죄인들이 받을 죄 값을 대신 치러 주심으로써 법적으로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법적 연합을 이룬 성도는 실상 스스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에 함께 연합하여 동참함으로써 본래의 죄 값을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통하여 다 치르고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남으로써 의인(義人)이 되었다는 법적 인정을 획득한 것이 된다(롬 6:3,5).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다 이와같이 하여 그리스도와 법적 연합을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무형 교회(無形敎會)의 구성원이 되고 이로써 성도와 성도들 간에도 연합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와 성도, 또 성도와 성도 간의 연합은 생명체요, 인격체의 연합인 고로 참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요 15장)나 사람의 신체의 비유(고전 12:13)에서 보듯이 단순한 법적 연합에만 머무는 것이 아닌 유기적이고 생동적인 연합이다. 이러한 전 신약 성도들의 연합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는 오늘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연합하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인간적인 편견이나 이기심으로 인해 다툼과 분열만을 일삼는 현대 교회로 하여금 깊은 반성을 촉구한다.
외울 말씀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6,17)
성부와 성자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創世)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제자들을 위한 기도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7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줄 알았나이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 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회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 내가 저회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들이오니 이는 성경을 웅하게 함이니이다
13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회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회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전 신약 성도들을 위한 기도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본문 & 자료노트
도표-17:1-26 예수 중보 기도에 나타난 그의 공생애 사역 내역
1.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심(2절)
2. 성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심(4절)
3. 세상에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냄(6절)
4. 성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함(8절)
5. 자신에게 속한 자들을 위해 기도(9절)
6. 성부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보전(12절)
7. 구약 성경 예언을 성취하심(12절)
8. 성부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심(14절)
9.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심(18절)
10. 자신의 영광을 제자들에게 주심(22절)
원어 연구-17:2, 권세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엨수시아'이다. 이는 법적으로 '옳다'(마 12:12) 또는 '합당하다'(눅 14:3)라는 뜻을 지닌 동사 '엑세스티'에서 유래한 명사이다.
성경에서 이 명사는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것은 첫째, '어떤 일을 자신의 뜻대로 행할 자유'(고전 9:12,18), '‥‥에 관하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롬 9:21) 등 어떤 존재가 날 때부터 고유로 가지고 있는 권한을 나타낸다. 그리고 둘째는 육체적인 힘이나 정신적인 능력(마 9:8; 행 8:19; 계 9:3,19). 셋째는 직분이나 신분이 가지는 권세(마 9:6; 요 5:27), 혹은 그런 신분자가 다른 사람에 대해 가지는 통치권(마 28:18; 계 17:12)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절에서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께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고 할 때 그 '권세'는 일차적으로 통치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권은 예수께서 지상 공생애를 마치시고 승천하셨다가 다시 재림하실 때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권세와 함께 재림으로 도래할 영원한 메시야 왕국에서의 통치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단 7:14).
보감-17:1-5,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신 방법
1. 거룩한 생애를 통하여(마 5:16)
2. 제자들에게 성부께 영광 돌리도록 가르치심으로(마 6:13)
3. 성부께 감사드림으로(마 11:25)
4. 사람들로 하여금 성부께 영광 돌리게 하심으로(눅 18:51)
5. 영광스러운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눅 24:51)
6. 직접 성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으로(요 17:1)
7. 성부의 이름으로 행하신 일을 통하여(요 17:4)
8. 성부의 거룩하심을 선포하심으로(요 17:11)
9.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순종을 통하여(빌 2:8)
10. 사단에게 승리하심으로(히 2:14)
도표-17:1-26, 예수의 중보 기도
중보(中保)란 어느 두 양자를 다 잘아는 제 삼자가 가운데 서서 양측에게 보증이 되어 주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서서 하나님께는 인간의 죄를 대신에 자신의 몸을 드림으로써, 그리고 인간에게는 먼저 자신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시사 그의 사랑을 증거하심으로써 구원의 중보자가 되어 주셨다. 한편 본장의 기도는 바로 이런 중보자로서 중보 사역의 절정인 대속 희생 죽음을 앞두고 드린 예수의 기도이다. 이제 그 기본 요소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성부의 영광(1-4절)
2. 성자의 영광(5절)
3. 성도의 보호(11,15절)
4. 성도의 연합(11,22절)
5. 성도의 거룩(17절)
6. 복음의 확대(21절)
신학용어-17:3, 하나님의 유일성
출 18장 자료 노트 참조.
신학용어-17:5,24 그리스도의 선재성
요 8장 자료 노트 참조.
보감-17:6-26 보혜사로서 예수의 사역
일반적으로 ‘보혜사’(돕는 자, 변자라는 뜻)라고 할 때 우리는 성령만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요 14:16을 보면 그리스도 자신이 이미 보혜사로서,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는 약속이 나온다. 그리스도는 지상의 공동 생애 기간 동안 당시 성도들의 보혜사가 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를 대신하여 성부께 중보 기도하심으로 보혜사 역할을 하신다. 그러면 이제 예수의 사역 중에서 그분의 보혜사 사역들에 대해서 살펴보자.
1. 위기 상황에 대한 예고로 불안해 하는 제자들을 위로하심(14:1)
2. 성도를 위해 하늘나라에 처소를 예비해 놓으심(14:2,3)
3.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심(14:16,17)
4.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은 평안을 주심(14:27)
5. 성부께 들은 것을 다 제자들에게 가르치심(15:15)
6. 하나님께 자신의 이름으로 구할 수 있게 하심(15:16)
7. 성도로 직접 기도하게 하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심(16:25-33)
8. 제자들과 장차 성도가 될 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심(17:6-26)
도표- 17:1-26 성부로부터 성자에게 위임된 것
1.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2절)
2. 성자의 영광(4절)
3. 제자와 성도들(6,24절)
4. 신적 교훈(8절)
5. 성부께 속한 모든 것(10절)
6. 아버지의 이름(11절)
7. 성자의 영광(24절)
보감- 17:8 그리스도의 말씀의 10대 특징
1. 권세가 있는 말씀(마 7:28,29)
2. 영원한 말씀(마 24:25)
3. 은혜로운 말씀(눅 4:22)
4. 평강을 주시는 말씀(눅 24:36)
5. 영이요 생명인 말씀(요 6:63)
6. 영생의 말씀(요 6:68)
7. 비할 데 없는 말씀(요 7:46)
8. 믿음을 낳는 말씀(요 8:30)
9. 심판하는 말씀(요 12:47,48)
10.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요 17:8)
주요 주제-17:14 로고스의 이해
요 1장 자료 노트 참조
도표- 17:14,22 본서에서 그리스도가 성도에게 주시는 8가지
1. 생수(4:14)
2. 생명의 떡(6:51)
3. 영생(10:28)
4. 거룩한 본(13:15)
5. 새 계명(13:34)
6. 그리스도의 평안(14:27)
7. 하나님의 말씀(17:14)
8.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17:22)
보감-17:21,22 성도의 연합과 일치의 10대 유익
1. 선하고 아름다움(시 133:1)
2. 서로 돌보며 위로함(사 35:10,11)
3. 주의 은혜를 받음(렘 32:39)
4. 주께 영광 돌리게 함(겔 11:19,20)
5. 주께 함께 기도하게 됨(행 2:42)
6. 타인을 위해 일하게 됨(행 4:32)
7. 성령의 기쁨이 됨(롬 14:17)
8. 만족감이 생김(롬 15:24)
9. 분리와 불평이 사라짐(빌 2:2-4)
10. 세상에 좋은 영향을 줌(빌 2:15,16)
신학 용어- 17:25 하나님의 속성
출 34장 자료 노트 참조
17:1-5 예수 자신과 성부를 위한 기도
앞장(16장)을 끝으로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고별 설교(요 13:31-16:33)가 일단락되었다. 이제 그에 이은 본 장에서는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가운데 겟세마네 동산 근접한 지역에서 하나님께 드린 일명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불리워지는 중보 기도가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본서의 저자 요한이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공통으로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마 26:36-46; 막 14:32-42; 눅 22:40-46)를 소개 하지 않는 대신, 이처럼 겟세마네로 가는 도중에 드린 중보 기도만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까닭은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겟세마네 기도가 십자가 고난을 목전에 둔 예수님의 인간적 고뇌를 부각시키고 있는 반면에, 본장의 중보 기도는 이 땅에서의 공생애 사역을 마무리 짓는 시점에서 메시야적 사역의 완성을 확신하면서 드린 기도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앞장에서 이미 선포되었듯이(요 16:26)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더욱더 부각시키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예수님의 중보 기도는 주님 자신을 위한 기도로부터 시작하여 제자들과 모든 믿는 자들에게까지 그 대상이 점차 확대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본장을 세부적으로 구분하면 예수 자신과 성부를 위한 기도(1-5절), 제자들을 위한 기도(6-19절), 모든 성도들을 위한 기도(20-26절)로 나눌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먼저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는 자신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성육신하사 완전한 인간이 되심으로 스스로 포기했던 창세 전의 영광을 이제 십자가의 사역을 다 이룸으로 다시금 누리기를 간구하는 것이다(3-5절).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영광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바라는 것이었다(1,2절).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영적 사실을 깨닫게 된다.
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 그 자체였다는 점이다(4절), 다시 말해서 주님의 성육신(成肉身)과 각종 사역 그리고 십자가 고난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라도 예수님 스스로의 뜻에 따라 좌우되거나 결정된 것이 아니며 이미 오래 전부터 정해 놓으신 성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이다(요 5:30; 6:38.39; 7:16,28; 8:42).
②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영광은 인간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이미 하나님과 함께 소유했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이란 점이다(5절). 그러므로 성육신하신 예수는 완전한 인간이시자 또한 완전한 하나님이셨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③ 영생의 비결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데에 있다는 점이다(3절). 물론 여기서 말하는 '아는 것'이란 결코 추상적인 지식을 의미하지 않으며. 인격적인 만남을 전제로 하는 체험적 지식을 의미한다.
따라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정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만이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요 14:6).
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인간적으로 고뇌하며 기도하는(마 26:36-46; 막 14:32-42; 눅 22:40-46) 모습을 생략하는 요한은 그와는 별개로 인류의 속죄를 위해 대제사장되신(히 9:11,12) 예수께서 승리를 확신하며 선포하신 대제사장의 기도를 고별설교(13-16장) 후에 삽입하고 있다. 이 대제사장의 기도는 겟세마네 기도가 표현하는 인간적 고통과 번민 보다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어진 사역을 완수하신 승리자로서의 예수를 부각시켜 준다.
눈을 들어. - 본래 제사를 드릴 때의 자세였으나(겔 33:25) 신약에서는 기도의 자세, 특히 성전에서의 기도 자세에 적용되었다(눅 18:11,13; 요 11:41). 요한은 이처럼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기록하지 않는 내용을 몸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목격자임을 암시한다.
아버지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파테르'( )이다. 예수께서는 복음서에서 하신 모든 기도 가운데 십자가 위에서 하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마 27:46; 막 15:34)이란 외침 외에는 언제나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호칭하셨다(마태 1회, 마가 1회, 누가 2회, 마태와 누가 공통 3회, 요한 9회, Jeremias). 6:57 주석 참조. 하지만 구약시대의 기도들 중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용례를 전혀 찾을 수 없고 유대교 문헌에서도 이와 관계된 어떠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예수께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은 매우 특이하다. 한편 '파테르'는 헬라어이므로 실제로 당시에 일상 구어체에서 사용되던 호칭은 아람어 '아바'( )였을 것이다(Je.emias, Smalley). 이 '아바' 호칭은 팔레스틴에서 주로 어린이들이 사용한 일상적인 용어로서 아버지에 대한 애칭이었다. 따라서 당시 유대교에서는 이 말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무례한 것이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자신과 아버지와의 독특한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이 말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마 23:9)고 말씀하심으로써 이러한 호칭을 성도들도 사용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한편 이때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육신의 아버지에 대한 호칭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아버지'란 호칭의 존엄성을 보존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때가 이르렀사오니. - '때'란 직접적으로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가리키고 궁극적으로는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시기를 말한다(요 13:1 주석 참조).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 공관복음에서는 단 한 번 뿐이지만(막 13:2) 본서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일컫는 경우가 자주 있다(요 3:16,18; 5:25; 10:36; 11:4). 한편 예수께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여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은 자신의 영광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아버지께 영광을 돌기기 위해서이다(Morris).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당해야 했고(마 27:54; 막 15:39)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를 죽기까지 낮춘(빌 2:8) 아들을 지극히 높여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빌 2:9; 히 1:4). 즉 십자가의 수난을 통한 인간들의 구원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Bernard, G. Beasley-Murray). 마 27장 자료노트 '십자가 수난을 통한 구속 성취의 이해'를 참조하라.
I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 '모든 자'에 해당하는 '판'이 요 6:37의 남성형과는 다르게 중성(neuter)인 것은 구원의 대상에는 남자와 여자의 성별(性別)구별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한 저자의 의도 때문이다(7,24절). 또 이러한 중성은 어떤 그룹의 통일성 (a certain unity of the group)을 의미하기도 한다(Brown). 따라서 이 표현이 온 세상 사람들을 다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즉 이러한 표현은 혹자가 주장하듯이 열두 제자만을 의미하지는(Barrets) 않지만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이라는 구절이 한정하듯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해 '선택된 무리임'이 분명하다.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조에 아이오니오스'는 본서에 17회, 요한일서에 6회 나타나는 요한이 애용하는 용어이다. 그런데 다른 복음서나 서신서들과 특징적으로 다른 점은 보통 '사후(死後)에 얻을 미래적인 영원한 생명'으로 나타나는 이 개념을 요한은 현재와 문맥에서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즉 영생은 미래에 주어질 것이라기보다는 현재에도 누리는 상태라는 것이다(요 3:36; 5:24; 6:47; 요일 5:13). 그래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단순히 목숨을 지속한다는 의미보다(양, quantity) 그 생명의 질(qualily)에 더 강조점이 있다. 따라서 영생을 얻음은 그리스도(요 1:4)와 하나님의 생명을 함께 나눈다는 것을 의미한다(요 5:26). 또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같다(3절). 왜냐하면 진정한 지식은 밀착된 관계성(affinity) 없이는 얻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요일 5:12, Bernard).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 '만민'(파세스 사르코스)이란 문자적으로는 '모든 육체'이다. 그러나 이는 이교적 영육 이원론에서 영혼과 구별되는 부정적 의미에서 사용되는 육체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단순히 '많은 사람'을 의미하는 셈어적 표현이다(Hendriksen, Brown, 요 8:15 주석 참조). 이러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란 직접적으로 아버지께서 주신 자에게 예수가 영생을 주는 권세를 말하는데(요 6:37,39,44)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진노가 머물러 (요 3:36) 심판받도록 하는 권세도 포함한다(요 5:22,27). 이렇게 모든 인류를 영원한 작정적 선택 속에서 구분하는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예수에게 위임된 것이다(마 11:27; 28:8).
17:3 본절은 '하우테 데 에스틴 헤 아이오니오스조에'( )로 시작되는데, 이것은 직역하면 '이것이 영생이다'라는 뜻으로 전절에서 언급한 영생에 관한 전형적인 설명적 도입 문체이다(요 3:19의 '이것이 심판 혹은 정죄이다'와 같은 구조).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유일성'과 '진실성'은 전형적인 하나님의 속성이다. 보다 상세한 내용은 그랜드 종합 교리 신론을 참조하라. 전자가 비공유적(非公有的)인 절대적 속성 중 하나인 반면 후자는 인간도 부분적으로 지니는 공유적인 보편적 속성의 하나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은 구약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으나 요한 저술 가운데도 자주 등장한다(유일성: 사 37:20; 요 5:44; 진실성: 출 34:6; 계 6:10). 한편 예수가 성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셨다고 표현하는 것은 자신의 모든 구속 사역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예수와 하나님과의 '기능론적인 종속' (functional subordination) 관계라 한다.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 본절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께서 자칭(自稱)하신 유일한 용례로서(요 1:17) 이것을 메시야의 자기 증거라고 볼 수도 있으나(Godet, Meyer) 이 문맥은 청중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기도라는 점에서 이러한 해석은 부자연스럽다. 따라서 요한이 본서를 통해서 자주 자신의 주석적 설명을 추가하는 경우와 같이(요 2:21; 7:39; 11:13; 12:43 등) 이것도 요한의 해설적 설명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Bernard, Westcott, Hengstenberg, G.Beasuey-Murray, Barrett). 아마도 요한 자신이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참조했을지도 모르는 예수의 기도 어록(the text of Jesus prayer)의 본서가 기록된 당시(A.D. 90년경) 교회의 고백적이고(Confessional) 예배적인(liturgical) 예수의 칭호 형식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Brown, 요일 4:2).
아는 것이니이다. - 본절은 '아버지가 아들을 알고 아들로 인해 계시를 받는 자가 아버지를 알게 된다'(마 11:27)는 예수의 가르침이 담긴 '복음서 전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앎은 단순한 지식(intellect)을 넘어서 밀접한 관계와 연합을 포함한다. 즉 여기서 '안다'(기노스코)는 히브리어 '야다' ( )와 마찬가지로 남녀 간의 성 관계에도 사용될 정도로(마 1:25) 철저하며 인격적으로 앎을 의미한다. 이러한 단어의 뜻이 본절에서는 예수에 의해 계시된 지식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과의 교제, 즉 '코이노니아'에 참여하게 됨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J.Blank, G.Beasley-Murray). 그리고 특히 이 단어가 본문에서 현재 가정법으로 쓰인 것은 예수를 아는 지식이 중단됨 없이 계속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 본서는 일관되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지상 대리인' 역할을 하시는 분으로 묘사한다(요 4:34; 5:36). 예수께서는 창조 전부터 누렸던 영광과(5절) 아울러 하나님과 같은 전지성(全知性)과 전능성(全能性)으로 인해 지상에서 독자적인 사역을 감당하는 것같이 보이나(A.T.hanson) 그가 행하는 모든 일들은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일이며 이 일을 함으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Smalley). 한편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이 요 5:36에서는 복수로 나타난데 비해 본절에서 단수로 나타나는 것은 특히 십자가 사역을 앞두고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당면한 중요한 일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즉 린다스(qindars)는 이 '일'이 예수의 공생애 사역만을 포함한다고 하지만 크리소스톰(Chrysostom) 이래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일'속에 예수의 죽음을 포함시키고 특히 십자가의 죽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특히 '이루어'(텔레이오사스)라는 단어와 십자가 상에서 외치신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를 연관시켜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에 해당하는 '에독사사'가 부정과거인 것은 이 일이 이미 마쳐졌다는 인상을 준다(Brown). 그러나 이것은 시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미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다는 의미이고 12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예수는 가시지만 이 땅에 남아 있는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아직 '그 일'이 장차 있을 일임을 알아야 한다(G.Beasley-Murray). 즉 이 말씀의 시점(時點)은 대제사장의 기도를 하시는 때가 아닌 예수의 수난과 승귀 이후의 '그 시간' (요 16:23,26 참조)이 지난 때로 비로소 그때에 이르러서야 아버지께서는 완전히 영화롭게 되신다는 의미이다(Brown).
17:5 아버지여. - 1절 주석 참조.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 성자(聖子) 하나님께서는 창조된 피조물과 달리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존재하셨으며 영원하신 성부(聖父)와 교제하면서 영광을 누리셨음을 묘사하고 있다.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 1절과 거의 유사한 말씀이나 '지금도'(카이뉜)라는 단어를 통해 그 차이점을 명백히 보여 주고 있다(A. Laurentin). 본서(9회)와 사도행전에(10회) 자주 나타나는 이 표현은 구약에서 주로 언약적 요구에 연관된 문장이나 예배적인 간구에 자주 사용된(출 19:5; 수 9:6; 24:14; 삼하 7:25; 사 13:4) '와우'란 표현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특히 이 표현은 이미 요구된 내용에 대해 더 결정적인 요청을 하는 '반복'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본절에 적용될 수 있다. 즉 본절은 성자가 성부를 영화롭게 하고 성부가 성자를 영화롭게 한다는 언약에 대한 요구의 상황을 보여 주는 기도의 문맥에 있고 1절의 내용을 더 강조하기 위한 반복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처럼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 곧 삼위 하나님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영화로우실 뿐 아니라 상호 영화롭게 하심으로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함을 교훈하신다.
17:6-19 제자들을 위한 기도
앞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 수난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림은 물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본래의 영광을 되찾고자 간구하신 것에 관하여 살펴보았다(1-5절).
이제 그에 이은 본문은 예수께서 자신의 수난과 부활, 승천 이후 계속 이 땅에 남아 복음을 증거해야 할 제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제자들을 위한 예수의 중보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을 때에 세상을 피하거나 악한 자들에게 빠지지 않도록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해주실 것과, 계속 그 믿음이 보존되게 해 달라는 것이다(6-10절). 둘째는 아들과 아버지가 하나이신 것같이 제자들 또한 진리와 사랑 안에서 연합되게 해 달라는 것이다(11-16절). 셋째는 제자들을 하나님 말씀, 즉 복음의 진리로 거룩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17-19절). 결국 예수님의 기도는 제자들이 장차 복음의 전도자로서 사명을 감당할 때 필연적으로 받게 될 세상의 핍박을 능히 이겨 나가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주요 교훈들을 얻을 수 있다.
① 성도들은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至上) 명령(마 28:19, 20)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세상과 성별(聖別)된 삶을 유지해야 된다는 점이다(14절). 만약 성도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그들과 융화됨으로써 자신의 사명을 좀 더 쉽게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왜냐하면 어떤 이유에서든지 성도다운 거룩함을 상실하고서는 다른 사람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기는커녕 자신마저 진리에서 멀리 떠나기 쉽기 때문이다.
②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17절). 사실 진리 그 자체인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성도를 거룩하게 보존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모든 것이 파 본래의 순수성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롬 8:19-25).
③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택한 백성을 멸망으로부터 끝까지 지키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분이라는 점이다(9절). 즉 본문과 같은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주께서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시지 않고 오늘도 우리 모든 성도를 위해 간구하시는 선한 목자되심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목자의 곁을 떠나 딴 길로 가려 하는 어리석은 양들처럼 행동할 것이 아니라 온전히 주의 장중에 거함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룸은 물론 성도로서의 마땅한 본분을 감당해 나가야 할 것이다.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바로 2절에서의 '모든 자'의 제한성을 적절히 설명해 준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 얻는 것은 아니고 예수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는 자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 한편 히브리인의 사고에 있어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이름을 가진 존재의 본질과 인격을 나타내듯이 아버지의 '이름'(11절) 역시 하나님의 본질과 존재 그 자체를 말한다(요 12:28 주석 참조). 또한 예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을 보여 주는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에파네로사)"라는 구절은 4절의 '아버지를‥‥영화롭게 하였사오니 '나 26절의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라는 표현들과 거의 유사한 의미이다(Bemard). 즉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창조주이시면서 구원자되신 하나님의 본질을 보여 주심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 이땅에 오신 것이다. 한편 '나타내었나이다'에 대해서는 요 1:31 주석을 참조하라.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 이 구절은 칼빈(Calvin)이 주장하는 대로 하나님의 예정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꼭 구약적 개념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께서 동시에 이끌어 택한(요 6:44,70; 12:32; 15:16) 신약적 개념의 성도들이다(벧전 2:9).
내게 주셨으며. - 요 6:37 주석 참조(2,9,12,24절도 참조하라).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 '지키었나이다'(테테레칸)가 완료시제인 것은 문자적으로 제자들이 과거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고 그때까지 그러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말이 선포되던 당시 제자들의 형편으로 보아서는 부적절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들 마음에는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예수를 따르겠다는 예수에 대한 깊은 신뢰나 희생정신이 결핍되어 있었던 것이다(요 16:32 참조). 따라서 이 시점은 이후의 저자가 본서를 기록할 시점의 형편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4절의 '에독사사' 의 시점에 관한 주석과 비교해 보라).
17:7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줄 알았나이다. - 이 말씀은 예수의 지상 사역의 근거와 권위가 스스로의 권위에 의존함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에게 귀결되어 있음을 제자들도 알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예수의 이 말씀이 요 16:30의 제자들의 말을 확정적으로 받아들인 증거라고는 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당시 제자들의 그 말이 완전한 믿음과 이해에 의한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도 예수께서 더 잘 아셨기 때문이다(요 16:30 주석 참조). 한편 본절을 중심으로 6절과 8절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셨다'는 동일한 사상을 반복하는 용법을 사용함으로써 마지막 십자가를 향한 자신의 사역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이루기 위한 다짐을 나타내고 있다.
17: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 '말씀'에 해당하는 '레 마타'가 복수인 것은 (6절과 14절은 '로고스'로서 단수) 단수가 전체로서의 신적 메시지를 의미하는 반면, 복수는 개개의 교훈들(precepts)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Barrett). 그러나 본절과 14절에서 '말씀'이라는 단어는 거의 같은 사상을 내포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Brown) 이는 바람직하지 못한 구분이며 '로고스'와 '레마타'의 구분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대부분 요한이 선호하는 동의어 반복 표현으로 보는 것이 좋다(단, 로고스가 그리스도의 본질을 묘사하는 요 1장의 진술은 예외임). 한편 '아오며'(에그노산)는 믿음의 유래를 설명하고, '믿었사옵나이다'는 앎의 결과를 의미한다는 견해도 요한의 문체적 특징을 고려할 때 별로 신빙성이 없다. 왜냐하면 '아오며'와 '믿었사옵나이다'가 평행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본서의 특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즉 양자는 거의 교차적으로 사용되며 어떤 의미에서 동의어에 가깝다. '아버지께로서 오신 예수'라는 동일한 대상에 대해 요 16:27은 '믿는다'로, 본절과 요 16:30은 '안다'와 '믿는다'를 사용한다는 사실이 이것을 증명한다(요 14:7과 10절의 예도 참조하라). 한편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라는 진술은 예수의 모든 행동의 정당성파 구속사적 의미를 지님을 설명해 주는 것으로서 본 대제사장의 기도에서 거의 후렴과 같이 반복된다(18,21,23, 25절, Bernard). 한편 '아버지께로서 나온'이라는 표현은 예수의 존재 근원에 관한 삼위일체적 존재론에 대한 진술이라기보다는 성자의 선교적인 사명이 성부에게 근거함을 언급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다'는 표현과 동의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I7: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 '비옵나니'(에로토)는 문자적으로는 '묻다'라는 뜻이지만 '기도하다'는 뜻을 지닌 '아이테오'( )와도 동의어로 자주 사용되었다. 그러나 전자는 동등한 위치에서 요구하는 것을 가리키는 반면 후자는 종속 관계에 있는 자가 간청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요한에게 있어서는 '아이테오'가 제자들의 기도에 자주 사용되고 있으며 본절과 같은 '에로토'는 예수님 자신의 기도에 집중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경향이 있다(Schwanck). 본절에서도 예수께서는 삼위 하나님 가운데 한분으로서 인간의 중보자의 자격으로 성부께 기도함을 보여 준다.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 여기서 '세상'이란 6절에서 말하는 대로 선택된 자들이 배제된 '좁은 의미'의 세상을 말한다. 한편 예수께서 궁극적으로 구원하실 대상으로서 묘사된 넓은 의미의 세상에 대해선 요 3:16을 참조하라. 또한 21절과 23절에는 이러한 넓은 의미의 세상이 묘사되고 있다. 예수께서 간구하시는 자들이 단순히 제자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이 20절의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라는 기도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와 함께 했던 열두 제자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형(model) 혹은 대표(representative)로서 중요성을 가진다. 예수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1차적으로 제자들을 지목하여 말씀하시는 것도 그러한 의도였을 것이다.
17: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 '내 것은‥‥것이 온데 '는 요 16:15과 평 행 구절이므로 그곳의 주석을 참조하라. 요한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것'이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표현은 '인류의 창조'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심, 즉 '소유'를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창조를 통한 '영적 소유'를 의미한다. 어떤 사람이든 그가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예수께 받아들여질 수 없고 또한 그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Brown). 또 본서가 언급하는 예수의 영광은 예수의 공생애 가운데서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처음으로 나타나지만(요 2:11) 본절에서외 저자의 관점은 예수의 부활 이후 제자들과 모든 믿는 자들의 성숙한 믿음을 통해 드러날 영광에 초점이 있다. 예수의 영광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고 장차 십자가 대속 수난을 통해 하나님께 돌려 드림으로써 1절 말씀을 성취하실 것이다. '데 독사스마이'의 완료시제는 바로 그러한 저자의 시점에서는 벌써 성취된 그리스도의 부활과 기독교 확장으로 인한 영광의 실현을 말한다(Barrets, Brown). 한편 A.D. 5세기에 기록된 베자사본(D)은 이 단어를 '에독사사스 메'( )라고 기록하는데, 그 뜻은 '당신이 나를 영화롭게 했다'로서 아마도 이를 필사한 서기관이 1절을 염두에 두고 고쳐 기록했거나 실수로 오기(誤記)한 것으로 보인다.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노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 이제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께로 의 길을 떠나 가셔야 할 시간이 임박했으므로 남아 있는 제자들의 시급한 필요에로 관심을 돌리셨다. 또한 이렇게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은 단순히 12제자들만이 아니라 자신을 믿는 모든 신자들도 위함이다(20절),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고 계신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롬 8:34). 한편 '가옵나니'(에르코마이)는 원문을 직역하면 '온다'(come)이다. 하나님께로 가신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예수께서는 '간다'라는 뜻의 '포류오마이'(요 14:2)나 '휘파고'( 요 16:5) 동사를 사용하셨으나 지금은 제자들에게(제3자)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당사자)께 직접 기도하는 것이므로 '에르코마이'가 더 적절하다. 이러한 표현법은 헬라어, 라틴어, 영어 등이 속해 있는 인도-게르만(Indo-German)어족(語族) 언어에서 흔한 것이나 우리 말 어법에는 잘 맞지 않으므로 개역성경과 같이 '가옵나니'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나신 위대성과(사 6:3) 죄와의 구별성을 강조해서 표현한(레 11:45) 하나님의 이 칭호는 ① 구약시대(시 71:22) ➁ 중간시대, 즉 B.C. 400년 경부터 그리스도의 성육신까지의 400년 침묵기(외경 마카비하 14:36, '거룩하신 주님') ③ 신약시대(눅 1:49) ④ 속 사도시대, 즉 사도들의 계승자들이 활동하던 시대 (A.D. 2세기)의 저작으로 '12사도의 교훈집'이라고 불리는 디다케(Didache, 10:2 '가장 거룩하신 아버지여 ')등 일관성있게 사용되었다(Bemard). 예수께서 특히 이 시점에서 '거룩하신' 이란 표현을 삽입하는 것은 제자들을 비롯한 성도들이 죄악된 세상에 살고 있지만, 죄로부터 분리되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며(레 11 45) 이러한 삶은 하나님의 보존하심이 있을 때에만 가능함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 히브리적 사고에 있어 '이름'이 그 본질을 말하는 것이라면 (요 14:13 주석 참조) 본 구절은 '거룩하신 아버지'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동어반복법이라고 볼 수 있다. 주기도문의 첫 기도가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9)인 것을 생각하면 제자들을 보존하는 중요한 일에 하나님의 거룩성을 의지하는 예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신성을 통해서만 제자들은 세상의 악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이다.
저희를 보전하사. - '보존하다' 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레손'은 6절에서 제자들이 말씀을 붙들어야(개역성경은 '지켰다'로 번역함)한다고 할 때 사용된 단어로 '굳게 붙잡다', '보살피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간구는 세상의 악과 오염으로부터 제자들을 굳게 보호하며 안전하게 보살펴주실 것을 기도하시는 것이다(요일 2:15-17).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 성육신하신 아들과 아버지의 존재론적인 연합(요 14:20)은 성도들과 하나님 사이의 통일성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연합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연합의 사상은 21-23절에서 더욱더 확실하게 전개된다. 이 세상의 악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예수 안에서 연합된 유기체적 공동체가 반드시 필요하다. 한편 '하나'에 해당하는 헬라어를 요한은 바울이나(엡 4:3,13)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가 즐겨 사용하는 '헤노테스'라는 추상적인 개념의 단어를 쓰지 않고 '헨'이라는 중성명사를 쓰고 있다. 여기에 대해 바렛(Barrets)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한 공동체는 어떤 단위들의 연합이 아니라(즉 Units가 아니라) 철저한 통일성이 강조되는 연합(즉 Unity)임을 표현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장래에 모든 교회가 하나의 교파가 되어 맘모스화 하라는 말씀은 아니다(Hendriksen). 본절의 문맥에서 이 명령은 성도들이 세상에 대항할 때 항상 하나로 연합해야 할 것을 요청하시는 것이다.
17: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 이제 거의 마쳐가는 공생애를 회고하시면서 아버지께 부탁하는 '제자들의 보전'을(11절) 지금까지는 성자 자신이 하셨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도 예수께서는 예수 자신이 했던 그 일도 역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 즉 성부 하나님의 신성에 의존해서 가능했던 것임을 밝힘으로써 겸양을 나타내 보이신다. 이처럼 선한 목자로서 사역하신 예수께서는 이제 최종적으로 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과정에 있으면서도 제자들의 영적 안전을 하나님께 부탁하였던 것이다(요 10:11). 한편 '지키었나이다'에 해당하는 '에퓔랔사'는 부정과거 시제로 나타나고. '보존하와'(에테룬)는 미완료인 차이점에 대해서는 다음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미완료 시제는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보호가 단회적인 것이 아니요 계속됨을 의미하고, 부정과거 시제는 그 주님의 보호의 과정이 불변하는 효과를 지님을 요약적으로 표현한 것이다(Barrett). 이는 결국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보호를 강조하는 문법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한 보호가 어떠한 예외도 해당되지 않을 만큼 완벽함을 보여 주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요 3:16; 6:39; 10:28 주석들을 참조하라.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 '멸망'(아폴레이아)이란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자주 '지옥에 떨어뜨림'(damnation)의 뜻으로(마 7:13; 계 17:8) 사용되었고 멸망의 자식이란 바로 그 최종적인 파멸의 영역에 있는 자를(마 23:15) 가리키며 살후 2:3에서는 '적그리스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의미를 보다 축소시켜 본다면 사탄의 사주에 의해 이미 멸망의 길로 들어선 가룟 유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이러한 표현은 고전적 헬라어식 용법(F.W.Darker)이라기보다는 히브리어적 용법(Semitism)임이 거의 확실하다(Murphy, Brown, Hendriksen). 머피는 이 헬라어를 히브리어 '벤솨하트'로 번역하는데 '솨하트'는 쿰란 히브리어에서 '파멸'을 의미하며 '스올의 구덩이'(the Pit of Sheol)를 가리킨다고 본다. 따라서 이는 '음부의 자식', '지옥의 아들'로 번역될 수도 있다. 한편 살후 2:3에서 이 용어가 '적그리스도'(antichrist)를 의미하는 것과 연관해 요한이 이 용어를(비록 예수의 선교 사역의 문맥이지만) 종말론적인 암시를 함축하며 사용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Brown). 왜냐하면 데살로니가후서가 기록되었을 A.D. 50년대 초에 제기되었던 종말론적인 기대가 요한복음이 기록된 A.D. 90년경에도 여전히 계속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종말론적인 기대 속에서 명백한 것은 유다가 사탄의 도구였다는 사실이며 그 결과는 멸망이란 사실이다. 한편 가룟 유다에게 사탄 혹은 마귀가 들어간 상태임을 나타내는 내용에 대해서는 요 6:70; 13:2,27,30의 주석을 참조하라.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 본절에 관한 문자적인 구약의 증거는 발견하기 힘드나(Morris) 요 13:18에서 주님이 유다에 관한 말씀을 하실 때 직접 인용하신 시 41:9의 '․․․․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를 생각할 수 있다. 한편 혹자는 이를 시 109:4-13과도 관련시키며(Morris) 또한 구약의 인용이라기보다는 요 6:70,71에서 예수께서 유다에 관해 하신 말씀을 가리킨다는 견해(Free)도 있으나 후자의 견해는 복음서 기자들의 관용적인 용법으로 볼 때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Brown).
17: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것에 대해서는 11절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본문에서 '이 말'이란 원문에는 복수로서 나타나지만 14-16장에 계속 이어지는 예수의 강화 전체라기보다는(C.K. Barrett) 본장의 '대제사장의 기도'를 언급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요 15:11의 '이름은'(say)에 해당하는 '렐랄레카'는 완료시제이므로 폭넓게 고별설교(14-16장)를 가리 킬 수 있어도 본절의 '랄로'는 현재형이고 또한 아버지께로 가시려는 때가 더욱 임박한 순간에 하시는 말씀이기에 본장의 기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 그리스도의 말씀이 제자들에게 주는 영적 기쁨에 대해서는 요 15:11 주석을 참조하라. 예수께서 이 기도를 '세상에서', 즉 제자들 앞에서 하시는 것은 그가 아버지께로 가신 후 제자들만 남게 되었을 때 세상으로부터 받을 환난과 핍박을 염두에 두셨기 때문이다. 그 핍박을 견디기 위해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충만히 채워 주실 기쁨을 가져야 했던 것이다. 즉 세상적인 측면에서는 근심이 가득할 수밖에 없지만(요 16:6) 제자들은 이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고(요 16:24) 예수의 말씀을 받는다면(14절) 세상의 역경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충만한 기쁨을 소유하고(요 15:11) 그 가운데 거할 수 있는 것이다.
I7: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 8절 주석을 참조하라.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 요 15:18,19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요 15:18,19에서 '미워하다'의 시제가 현재인 반면 본절의 '에미세센'이 부정과거인 것은 예수께서 세상의 미움을 더욱더 임박한 자신이 당할 고난과 죽음에 연결시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더불어 그 사건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보는 저자의 본서 기록 시점에서 바라보는 시각의 반영으로 볼 수도 있다(4절 주석 참조, R.Brown).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 본서에서는 제자(성도)들이 위로부터 왔고(요 3:3-6 주석 참조) 하나님께로서 난 그의 소유(요 1:13)임을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제자들은 세상으로부터 선택된 자들이다(요 15:19). 그런데 전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그 사실을 말씀하셨으나 지금은 동일한 사실을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제자들은 더 큰 위로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Hendriksen). 한편 이방 종교나 유대교보다 기독교가 더 우월하다고 변중한 A.D. 2세기 후반의 익명 작품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서신」(the Epistle to Diognetus)6:3에는 다음 같이 본절과 동일한 사항이 반영되어 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에 살고 있기는(dwell in the world) 하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습니다(not belong to the world)'. 한편 '이는‥‥인함이니이다' 구절 전체가 중요한 서방 사본들에서 빠져있는데(P66) 이것은 본구절과 거의 같은 16절로 인해 본 구절을 빠뜨린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다.
17: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 사명을 완수하신 예수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시지만 제자들은 아직 세상에서 해야할 사역이 남아 있으므로 서로 연합하여(11절)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요 15:27). 이처럼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지낸 것은 함께 아버지께로 가기 위함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할 증인들(witnesses)로 남겨놓기 위함이었다(G.Beasley-Murray). 한편 본문에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제자들을 지금 이 땅에서 데려가지 말고 계속 머물게 해달라는 것은 본서의 저술 당시 물질적인 것을 악하다고 보고 세상적인 것과의 분리를 주장하는 영지주의의 그릇된 사상을 봉쇄하기 위한 의미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 본 구절은 마 6:13에 나타나는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주기도문의 간구에 대한 요한의 병행 구절이라고 볼 수 있다(Bernard). 본 구절은 제자들이 세상에 있을 동안의 선한 삶을 위한 간구인 반면(요일 2:13,14), 계 3:10에서의 '...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는 말씀은 미래의 종말을 대비한 권고 말씀이다. 이로 볼 때 요한에게 있어 예수의 간구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보호는 전시간적(全時間的)이다. 한편 '보전하시기를'에 대해서는 11절의 '저희를 보전하사'의 주석을 참조하라. 또한 '악'의 젤라어 포네로스는 추상명사로서 '악'(중성), 혹은 '악한 자'라고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요일 2:13,14; 3:12; 5:18,19 등에는 이 단어가 사탄에 대한 인격적인 적용(personal application to the devil)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본절도 사탄의 세력 하에서 사주를 받는 '악한 자'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Meyer, Morris, Brown, Barrets).
17: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 요 15:18,19과 본장 14절 주석을 참조하라.
17:I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 '거룩하게 하옵소서'(하기아손)는 동의어처럼 사용되는 '정결케 하다'의 뜻을 지니는 '카다리조'와는 구별된다. 제자들은(물론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 그때 이미 요 13:10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깨끗하였으나'(카다로이 에스테) 지금 예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제자들의 '거룩함'(하기아스모스)을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 한편 '거룩하다'란 뜻을 지니는 '하기아조'는 본래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위해 사람이나 사물을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분리한다는 의미로 쓰였고(Hoskyns) 여기서는 거룩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11절) 제자들의 '미래의 사역'을 위한 적절한 은혜를 구하기 위해(Bernard) 세상이라는 악의 세력으로부터 분리시키는(Bultmann) 것을 의미한다. 구약의 용례들에서부터 '거룩'이란 개념이 특수한 종교적 '사역'과 연관된 예들을 찾을 수 있다(출 28:41, 아론과 그의 아들들; 렘 1:5, 예레미야). 한편 거룩케 하는 수단으로 언급된 본절의 '진리'(알레데이아) 앞에는 관사가 붙어 있으나 19절에는 빠진 것으로 보아 관사와 별 관계없이 본서가 지금까지 언급해 온 진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진리는 작용하고 활동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요 8:32). 즉 본절에서의 진리는 ① '거룩케 함'의 집행자이기도 한 반면 ② 거룩케 된 제자들이 머물러야만 할 영역(realm)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은 본문에 사용된 '엔'이라는 전치사는 일차적으로 '~안에'(in)란 뜻과 더불어 수단(by)과 목적(for)의 의미를 동시에 갖는 것에서도 확인된다(Brown). 한편 어떤 학자는 11절에 나오는 '아버지의 이름' 즉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본질과 계시는 본절과 19절의 '진리'와 동의적인 개념으로 쓰였다고 보기도 한다(Schnackenburg). 이러한 입장은 존재 자체가 진리이신 하나님의 계시만이 참된 성별(性別)을 가능하게 한다는 입장에서 수용이 가능하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이신 진리의 구체적인 모습은 바로 말씀인 것이다(시 119:142). 즉 모든 성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곧 진리를 행하는 기준으로서 절대로 무오하므로 말씀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준에 맞게 거룩하여질 수 있다(딤전 4:5).
17:18 '~같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도스'로 본절이 시작되는 것은 본절이 독립된 한 문장이 아니라 전절에 종속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즉 전절에서 나오는 바와 같이 진리 안에서 성결케 되는 것은 단순히 죄로부터의 성결(purification from sin, 요 15:3)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본절에 언급된 바와 같이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인에 대한 선교(mission)로의 성별(consecration)까지 뜻한다. 이와 동일한 구조가 1,2절에서도 발견되는데 1절에서 아들을 통한 아버지의 영광이 2절에서 '카도스'로 연결되는 절(節)에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영광)를 통해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는 것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는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 ① 보내시는 성부 ② 보냄을 받으면서 동시에 보내시는 성자 ② 보냄을 받는 제자들의 이중 구조는 세상을 향한 선교 사명의 중 차대성과 아울러 그 일의 성취를 위한 강한 결속력을 동시에 강조하는 표현이다. 한편 본문에 두 번 사용된 '보내다'라는 동사는 모두 '아포스텔로'이다. 그런데 '아포스텔로'는 동일하게 '보내다'로 번역되는 '펨포'와 달리 사명을 주어 보내는 것을 뜻하므로 성부나 성자의 보내심의 성격이 동일하고 아울러 그 보내시는 자들의 인격도 같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중 구조는 본절의 사명뿐만 아니라 본서 가운데서 ① 생활(요 6:57) ② 아심(knowing, 요 10:14,15) ③ 사랑(23절; 요 15:9) ④ 관계(22절) ⑤ 영광(22절) 등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Brown, Bernard),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는 데에는 '아페스테일라'로서 부정과거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후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선교 위임(Commission)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서 저자의 저술 시점에서 바라보면 이미 이루어진 것이므로 예상적인(proleptic) 부정과거로 이해되어야 한다(Morris). 요 4:38에서 사마리아인들의 영적인 추수를 말씀하실 때 '보내었노니' 라는 표현의 시제가 과거인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양자는 다 저자의 관점에서의 시제인 것이다(요 20:21,22 참조).
세상. - 본서에서 사용되는 '코스모스'라는 용어의 용법은 대체로 다음 같이 구분된다.
① 지구를 포함하여(요 21:25) 질서 정연한 우주(5절). ② 인류나 인간 사회를 의미하는 환유법 적 표현(요 16:21). ③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포함하는 모든 종족(요 3:16,17; 4:42; 6:33,51; 8:12; 12:46). ④ 일반 대중(요 7:14; 14:22). ⑤ 심판을 받게 되었으므로 구원이 필요한 인류(즉 윤리적 의미. 요 3:19). ⑥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대적한 악한 세력(요 7:7; 8:23; 12:31; 14:30; 15:18; 17:9,14). 본절의 세상은 ⑤와 같이 아담 이후 심판 아래 놓였으나 복음으로 구원받아야 할 인류를 가리킨다(Hendriksen).
17: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 제자들이 자신들의 사명을 완수해야 할 당위성의 기초는 그들을 위해 예수께서 거룩하게 되시는 사건이다(요 10:36 참조). 한편 '거룩하게 하오니'(하기아조)는 세속적인 것이나 악과의 구별의 개념이 기본적이지만(17절 주석 참조) 여기서는 특별히 제사를 위해 성별된 제사장으로서(출 28:41; 29:21) 인류의 죄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헌신함으로써 스스로 구별된 제물이 되셨다는(출 28:38) 의미이다. 즉 이때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바라보시면서(Morris) 그 구속을 통해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①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②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딛 2:14. Bernard).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 예수께서 스스로 거룩하게 하심은 제자들의 성결함의 근본적 동인(動因)이 된다(J.Reid). 이 제자들의 거룩도 세상으로부터 분리되고 사명에로 성별된 것으로 근본적으로 예수의 구속 사역에 기인한다. 즉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온전한 제물로 내어주심으로 거룩하여지지만 제자들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제사의 효력을 힘입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거룩도 17절과 같은 '성화'(聖化)의 의미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그 수단으로 동일한 '진리'. 즉 '알레데이아'가 제시되는 것을 보아도 분명하다.
17:20-26 모든 성도들을 위한 기도
앞 단락에서는 장차 복음을 증거할 자들인 자신의 제자들을 위하여 저들을 세상의 악으로부터 보전하여 거룩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 예수의 중보 기도에 관하여 살펴보았다(6-19절). 이제 그에 이은 본 단락에는 그 범위를 더욱 확대하여 제자들의 전도를 통해 장차 자신을 믿게 될 미래의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는 예수의 중보 기도가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의 기도 내용은 ① 성도들 간의 일치와 연합(20-23절), ➁ 저들이 장차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것을(24-26절) 구한 것으로, 이것은 앞에서 언급된 제자들을 위한 기도 내용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의 기도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당대의 유대인들만을 구원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의 오고 오는 세대에 걸친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데 있음을 시사해 준다. 사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택정하사 사도로 세우신 궁극적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마 28:19,27; 행 1:8).
한편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도들 간의 연합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21-23절). 여기서 성도들 간의 연합은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속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즉,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으나 한 몸'(고선 12:12-27)을 이루는 것처럼 성도들 간의 연합이란 몸의 머리되신 주 안에서의 일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의 교회들이 자신들이 믿는 신앙과 신학적 견해 차이가 아닌 세상적 이해관계나 기타 인본주의적 요소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과 일치를 외면하는 현상은 절대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사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성들을 향하여 간곡히 지적하는 바와 같이,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서 모든 성도들이 서로를 용납하고 하나가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이다(엡 4:1-7).
17: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 당시 예수와 함께 있었던 제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멸망의 자식인(12절) 가룟 유다는 제외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 13-19절에서 일관되게 강조되어온 제자들의 사명, 즉 구원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말한다. 여기서 '말'(로고스)이란 14절에서 쓰이는 대로 그리스도를 통한 신적 계시를 의미하며(딛 2:5) 기독교의 구원의 메시지인 '복음'(유앙겔리온)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했다(눅 5:1; 8:11,21; 11:28, W.Bauer). 한편 이 구절은 헬라어 문장 단어 순서에 있어서도 나에 관한 그들의 말을 인하여 믿는 사람들'로 번역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본 구절의 이러한 번역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라는 전도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말씀과 비슷한 내용을 가지게 된다(히 2:3,4). 한편 본절에서 '믿는'(피스튜온톤)은 현재분사인데, 이 기도의 시점에서 볼 때 장차 믿게 될 자를 가리키는 예상적(proleptic) 성격을 가진다(M.Zerwick).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에야 비로소 '저희 말을 인하여 믿는 사람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렇게 현재가 미래의 의미를 가지는 용법은 전형적인 히브리적 용법(Semitism)이다(Brown, Bernard).
17:21 헬라어 본문에는 본절부터 23절까지 목적(that)을 나타내는 '히나'( )와 방법(as)을 나타내
는 '카도스'가 이끄는 절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호 문법적 평행법을 보이고 있다.
1:A 2l절a(히나),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B 21절b(카도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C 21절c(히나), 우리 안에 있게 하사
D 21절d(히나),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A' 22절b(히나),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함
B' 22절c-23절a(카도스),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C 23절b(히나),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
D' 23절c (히나), 나를 보내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
1과 2는 각각 4부분씩으로 이루어 세 개의 히나절과 한 개의 카도스절을 가지는데, 이 카도스절은 각각 A, A'행에 종속된다. 1과 2에서 공히 첫째와 셋째 행의 히나절(A, A', C, C')들은 각각 믿는 자들의 연합성을 표현하며 셋째 행은 단순히 첫째 행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연합의 사상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리고 넷째 행은 그 연합성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을 말하고 있다. 카도스 절은(B, B') 각각 믿는 자들의 연합의 근거가 성부와 성자의 연합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즉 요한은 잘 짜여진 구조를 사용하여 지금까지 강조해 온 성부와 성자, 성도들 간의 '유기체적 연합'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J.F. Raudall, "The theme of unity in John"요 17: 20-23).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 이후 기독교 시대의 전 세계 교회를 위한 예수의 첫째 기도는 바로 '하나됨'이었다. 이것은 기계적인 연합이나 교회의 맘모스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 간의 연합과도 같은 본질적인 측면의 통일성을 의미한다(요 10:30).
'아버지께서 내 안에. - 내가 아버지 안에 '라는 구절은 아리우스주의 (Arianism)를 대항한 아다나시우스(Athanasius)의 정통교리를 대변하는 표현이 되었다. 한편 이단자 아리우스(Arius)는 그때 이 구절을 해석하기를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라는 성도의 연합이 도덕적 연합(moral unity)인 것처럼 성부와 성자 간의 연합도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본절에서 요한은 천상의 연합(즉 성부와 성자 간의)과 지상의 연합(성도 간의)을 동일한 모델로 제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T.Pollard, Brown), 천상의 연합은 믿는 자들 간의 연합의 모델이 됨과 동시에 근원이 되는 것이다.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 불트만(Bultmann)은 요한 신학의 다른 부분에서는 예수께서 세상을 위해 직접적으로 기도하신 적이 없기 때문에 본 구절 역시 본래는 예수의 기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제자들의 눈에 확실하게 드러나게 될 연합과(본절) 내주하심(22,23절)은 (그것이 성부와 성자 간, 혹은 제자들 간이든) 예수나 그의 제자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믿음을 유발하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이 구절은 예수께서 세상의 믿음을 위해 간접적으로(Brown) 기도하신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J.C.Earwaker).
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 '주다'는 동사가 두 번 쓰였는데, 그것은 모두 완료시제이다. 예수께서는 계속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고 또 제자들도 계속 예수로부터 영광을 받는다. 이렇게 예수께서 영광을 나누어 주시는 최초의 시기는 1절에서 암시하시는 대로 승귀(exaltation) 후의 시기, 즉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자신의 영광이 최고조에 달한 때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시제도 본장에서 요한이 계속하여 사용해 오고 있는 저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예상적(proleptic) 용법이다. 한편 롬 8:30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영광을 칭의(justification)의 결과로 일어나는 순차적인 구원 서정(order of salvation)으로 설명하고 있다. 롬 8:30 주석과 본장에서 제시하는 영광의 주제 구절들인 1,5,10절의 주석을 참조하고 '구원의 서정'에 대해서는 그랜드 종합 교리 '구원론'을 참조하라. 성도들이 받을 영광이란 바로 그리스도께서 성도들 안에 계신 것(21절,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참조), 즉 주와의 연합을 말하며 이것은 이미 구원 받은 후에 시작되어(Hendriksen) 천국에서 완전히 이루어진다(Meyer). '우리가 하나가‥‥함이니이다'는 11절,21절 주석을 참조하라.
17: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성도 안에 있을 때 나타나는 결과가 성도의 온전함과 하나됨이다. 여기서 '온전함을 이루어'(테텔레이오메노이)는 '완수하다'라는 뜻의 '텔레이오오'의 완료 수동형 분사로서 4절에서는 능동형으로 이미 사용된 바 있다. 본절과 같이 수동형의 용례는 요한일서에서 자주 나타나는데(요일 2:5; 4:12,17,18), 특히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함을 이룬다는 문장에 사용된다(이 하나님의 사랑이 본절 하반절에 나타남에 유의하라). 한편 본 구절은 목적을 의미하는 완료 수동태 가정법 문장을 형성하는 완곡어법적 구조이다. 특히 완료가 사용된 것은 연합의 최종적 결과인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는 상태가 영속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A.T.Robertson). 신자들은 이러한 연합의 삶에 있어 온전함을 이루어 세상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쳐야 하는 것이다. 교회의 사명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수행되어야 한다(Barrett). 하지만 이 연합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바울도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2)고 고백하며 최종적인 완성의 그 재림 날을 기다린다(Brown).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함이로소이다. -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아버지께로서 오신 예수로부터 생명을 수여받았으므로(요 6:57) 하나님께서는 성자를 사랑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인들도 사랑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관되고 유일한 사랑의 논리이다(Brown). 한편 본절을 볼 때 '세상'이 아는 것은 그들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기보다(Bemard)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다(Brown), 한편 베자 사본(D)과 몇몇 라틴계 사본들은 '저희도 사랑하신 것'에서 '사랑하신'에 해당하는 단어를 '에가페사스' 대신에 '에가페사', 즉 '내가 사랑한다'라고 기록한다. 이것은 'ς'가 서기관들의 착오로 빠졌거나 아니면 지금까지 빈번하게 나타난 '아버지-아들-제자들'의 기본적인 구조를(19절 주석 참조) 의식하고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는 구조로 본문을 변경시킨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양자가 다 그럴듯한 개연성(plausibility)이 있으며 바렛(Barrett)은 이 형태(에카페사)가 원본이었을 것으로 본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상은 본서 전반에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으므로(요 15:9; 16:26) 이러한 해석도 가능하나 예수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를 받아들인 성도 역시 사랑하므로 대부분의 사본이 취하는 바와 같이 이 부분을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겠다.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 12절 주석 참조. 남성이 아니라 중성(neuter)으로 표현된데 대해 2절 주석을 참조하라.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여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 '나 있는 곳'이란 천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다락방 강화의 초두에서(요 14:3) 제자들을 위한 영원한 처소를 말씀하신 것을 상기시킨다. 그 천국에서 제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이 말씀은 누가의 최후 만찬 기록에 나타나는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라는 식탁 교제(table fellowship)의 말씀을 연상케 한다. 선택되지 못한 자들에게는 철저히 배제되고(요 7:34; 8:21) 성도들에게는 보장된(요 12:26; 14:3)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교제는 요한에게 있어 일관된 사상이었다(름 8:17; 딤후 2:11). 한편 '나의 영광'이란 부활 승귀 이후 그리스도께서 누리는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말한다(빌 2:9-11). 영원히 그 영광의 주와 함께 있게 될 때에는 영원한 빛이신 주 하나님의 은혜의 광채 아래서(계 22:5) 그의 얼굴을 맞대고 바라보게 된다(계 22:4).
17:25 의로우신 아버지여. - 전절의 '아버지여'와 함께 이러한 하나님의 호칭이 계속되는 것은 기도가 이제 결론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1절의 '아버지여' 에서 시작된 기도가 11절의 '거룩하신 아버지여'로, 그리고 다시 본절의 '의로우신 아버지여'로 온 것은 점층법적인 표현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부터 교회의 영광에 이르는 과정을 반영한다는 주장도 있다(Hoskens). 하지만 '거룩함'과 '의로움'이라는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은 혹자가 주장하는 대로(B.Schwank)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며 여기서도 반드시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영광 뿐 아니라 반드시 거쳐야 할 구속주로서의 고난도 암시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주장이 합당하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본절에서 이 '의로움'이 강조된 것은 아버지를 알고 있는 자들과 모르는 자들의 심판을 암시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Brown).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 구약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공의의 하나님에 관한 관념은(시 116:5; 렘 12:1) 신약에도 거의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는데, 그 공의의 두 측면은 ① 택한 자를 구원한다는 긍정적 측면(요일 1:9)과 ② 악한 자를 벌하신다는 부정적 측면이다. '세상'은 바로 그 부정적 측면을 대표적으로 묘사하는 단어로 등장한다(18절 주석 참조). 반면 '저희'(후토이)는 '아버지를 아는'(요일 2:13,14) 자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리킨다. '아버지를 알았삽고'의 뜻은 다음절의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가 설명해 준다.
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 6절과 12절 주석을 참조하라.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알도록 하셔야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 즉 하나님의 본성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계시(revelation)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중점을 둔 것으로 '계속되었고' 또한 그의 지상 사역 후에도 성령의 사역으로서 계속될 것이다. 이러한 계속성이 1절과 4절에서 표현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일에도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라는 표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사랑'이라는 단어가 중복되는 용법(tantology)은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짐을 강조하는 셈족어의 용법(Semitism)인 것으로 보인다(Brown). 아버지께서는 창세 전부터 아들을 사랑하셨고(24절) 이 사랑은 이제 사람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능력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저희 안에 있게 된다는 것은 특히 미래적인 계시('알게 하리니')와 연관해서 모든 성도들의 마음 속에(with in) 개인적으로 임재하신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성도들 서로의 연합된 관계 가운데(among)에도 계신다는 사실을(요 15:9,12) 강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Morris). 그리스도께서 '우리들'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요일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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