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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4장 바울을 율법 모독자로 고소하는 더둘로의 논고와 바울의 변론 및 벨릭스 총독의 선고 연기와 새 총독 베스도의 취임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넓게는 21:17-28:31에 이르는 일련기사 곧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당시 제국의 수도 로마(Rome)에 이르게 되는 소위 바울의 로마 여행 과정을 기록한 일련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또한 좁게는 바울이 소위 유대교(Judaism)의 오류에 빠진 광신적 유대인들과의 갈등으로 무고히 체포된 때부터 마침내 가이사(Caesar)에게 직접 판결받기 위하여 미결수(未決지)의 신분으로 로마 여행을 시작하기 직전까지의 B.C. 58-60년까지의 대략 2년간의 과정을 기록한 21:17-26:32의 일련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즉 본의 아니게 예루살렘에서 유대주의자들과 충돌하여 소요를 일으켜서 유대 율법 모독 및 사회 소요죄로 기소된 바울이 체포 직후부터 유대 군중 전체와 유대 공회 및 당시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던 유대 땅을 대리 통치하던 헤롯 가문의 분봉왕(分封王)과 로마 총독들 앞에서 수차 예수의 복음과 이를 전하는 자신의 사역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변론하다가 마침내 자신이 가진 로마 시민권(Roman Citizenship)의 특권의 하나인 가이사 곧 로마 황제에게 직소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한 결과 미결수의 신분으로 로마 여행을 떠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일련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이 21:17-26:32까지의 일련 기사는 사소한 세부 내용의 차이는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유대교의 오류에 빠져 주의 복음과 이를 전하는 초대 교회를 곡해한 유대주의자들로부터 율법모독자 및 로마 식민 사회의 파괴자로 무고히 기소당한 바울이 수차에 걸쳐 주의 복음과 자신의 사역을 변론하다가 마침내 가이사에게 상소한 결과 로마로 이송되게 되는 과정을 묘사했다는 점에서는 그 전체적 맥을 같이한다. 이에 본고(本稿)에서는 먼저 이 일련기사의 전반적 내용전개를 요약하고 그 전체적 배경과 전반적인 구속사적 의의만 요약하기로 한다. 따라서 본장 자체의 내용과 그 세부적 의의에 대해서는 본장의 해당 강해주석을 보라.
이제 21:17-26: 32까지의 내용 전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21:17-40은 이제 마지막 선교 여행이었던 제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귀환한 바울이 본의 아니게 소동에 휘말렸던 사실을 보도한다. 즉 바울은 우리 주 예수 안에서 구속사의 시대가 구약 시대에서 신약 시대로 바뀐 상황에서 구약을 성취 확장한 신약을 이방인에게 전하는 자신의 사역을 구약의 일부 내용에 인본주의적 전승(tradition)까지 가미하여 유대인들만의 지상 구원을 주장했던 유대교의 오류에 빠져 곡해한 나머지 하나님과 구약 율법을 모독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핍박하고자 하는 일부 광신적 유대인들의 오해를 구약 율법에 규정된 결례(缺禮)를 행함으로 무마하려고 하였다. 본문은 바로 그런 결례의 과정중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바울이 이방인을 성전 경내로 끌어들여 성전을 모독한 것으로 속단한 유대 군중들에 의하여 큰 소요(賢擾)에 휩싸임으로해서 본의 아니게 소요의 주역으로 로마 천부장에 의하여 체포된 과정을 보여 준다. 그리고 22:1-21은 바울이 체포직후 유대 군중들 앞에서 행한 변론을 보도한다. 다음 22:22-23:11까지는 군중들이 계속 소요하자 바울의 문제를 유대 민족내의 종교 문제로 파악한 천부장이 유대 공회(Sanhedrin)의 소집을 요청하여 일단 바울을 유대 공회 앞에 세우자 이에 바울이 다시 한번 공회 앞에서 변론하는 중에 특히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리적 견해 차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신앙 곧 복음의 도를 교묘히 변론하고 나아가 유대주의자들의 견해 차이를 더욱 노출시킨 사실이 보도된다. 다음 23:12-35은 일부 광신적 유대인이 바울 살해를 결심하자 로마 천부장이 일단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바울을 당시 관할 총독이 거주하던 가이사랴(Caesarea)로 이송한 과정을 보도한다. 그리고 24:1-21은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당시 유대 총독 벨릭스 앞에서 벌어진 변사(辯士) 더둘로의 바울 고소와 이에 대한 바울의 변론을 소개한다. 다음 24:22-27은 일단 바울에 대한 선고가 유예되고 마침 이때에 벨릭스 총독과 베스도 총독이 교체되었음을 보도한다. 다음 25:1-12은 바울이 재차 신임총독 베스도 앞에서 자신을 거듭 고소하는 유대인들에 대항하여 변론을 행하였음을 보도한다. 25:13-26:29까지는 신임 총독 베스도가 헤롯 가문의 잔존 분봉왕으로 당시 갈릴리 북부 지방을 다스리던 헤롯 아그립바 2세(Herod Agriba II, A.D.48-70)에게 바울 사건에 대한 조언을 부탁한 결과 다시 바울이 아그립바 앞에서 길게 예수의 도(道)와 자신의 사역이 종교적으로도 순수하며 더욱이 정치적으로도 로마 식민 정부에 대항하려는 것이 아님을 변론하였던 사실을 보도한다. 끝으로 26:30-32은 베스도 총독과 헤롯 아그립바가 바울의 무죄를 판정하였으나 바울이 기왕에 자신의 로마 시민권상의 특권을 이용하여 가이사에게 직접 상소(上訴)하였고 또한 바울을 석방하는 것보다는 로마로 이송하는 것이 당시 바울을 강력히 고소하는 유대주의자들과의 충돌을 피하는 길도 될 수 있을 것이어서 바울의 로마 이송을 최종 결정하였음을 보도한다.
이상의 문맥으로 전개되는 이 21:17-26:32까지의 일련 기사의 배경 또는 그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제 막 구속사(救贖史)의 시대가 구약에서 신약으로 전환된 과도기적 상황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구약을 온전히 계승한 초대 교회 기독교와 당시 선민(選民) 유대인의 종교였으면서도 구약의 일부 내용에 인본주의적 요소까지 가미하여 정통 구약 신앙을 변질시킨 유대교(Judaism)와의 갈등을 이해하여야 한다. 물론 본문을 보면 바울을 직접 체포한 것은 로마군이었으나 이는 그 당시 유대가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바울을 유대 율법의 모독자로 규정함으로써 유대 땅을 소란케 한 바울은 로마 정부의 적이기도 하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시사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또한 정황상으로도 이는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지만 바울은 분명히 정치법으로 보다는 종교법으로 기소(起訴) 되었었다. 사실 바울의 경우는 오히려 종교법인 동시에 정치범으로 처형된 예수의 경우보다 더 종교법의 비중이 강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사도행전 전체의 과정에서 볼 때에 다른 사도들보다도 더욱 이방선교에 힘썼던 바울(롬 11:13; 갈 2:8; 딤전 2:7)의 체포는 초대 교회와 유대교간의 갈등의 일환이요 그 결정적 사건으로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바울의 체포 사건 전·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히 초대 교회 기독교와 유대교의 갈등을 이해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제 21장 구속사적 개관에 약술하였는바 이를 꼭 참조하라.
한편 우리는 이상의 바울의 체포 이후 로마 이송까지의 기사를 전반적으로 고찰할 때 다음 두 가지의 구속사적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예수의 복음(福音)과 이방 선교 사역으로 인하여 대략 2년여에 걸친 투옥생활 중에 수차의 심문을 당하였지만 바울은 내내 추호의 흔들림없는 확신을 피력하며 오히려 그런 기회를 복음 증거의 기회로 삼았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행 16:25-34; 26:27-29; 28:23-31). 이 짧지 않은 기간 중에 바울은 수차 생명의 위협을 당해야만 하였었다. 더욱이 그 자신이 유대인이기도 하였던 바울은 선민의 후손인 유대인으로서 유대인 사회로부터 축출되는 것이 곧 최고의 영원한 저주라고 생각되었던 그 시기에 전유대인들로부터 격렬한 규탄을 당해야만 하였었다. 그러나 바울은 나사렛 예수와의 만남 이후 성령의 인도로 태초부터 종말까지 이어지는 구속사의 섭리를 응축(凝縮)한 복음의 절대성과 진정성을 확신하였는바 인간이 가하는 그 어떠한 육체적 사회적 핍박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천국 구원이라는 절대 영원의 진리와 은혜를 확신한 자는 잠시동안 사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동요됨 없이 천국(天國)을 향하여 매진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롬 8:31-39).
둘째, 사도 바울이 이처럼 복음을 곡해 내지 핍박하는 유대주의자들에 의하여 무고히 갇혀 고통받은 것은 이 당시만으로는 다만 패배와 굴욕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전체와 나아가 초대 교회 역사 전체와 비교해 볼 때 이러한 바울의 고난은 먼저는 초대 교회 복음의 정당성을 전교회를 대표하여 변증하는 기회가 되었다. 나아가 바울이 미결수 신분으로나마 당시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에 이르게 된 것은 궁극적으로 로마 교회(Church of Rome)의 기틀이 공고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우리에게 위기를 통하여 오히려 구속사를 더욱 확장케 하는 하나님의 섭리의 오묘함을 깨닫게 해 준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복음과 이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구속사는 세상의 핍박을 능히 이기고 극복할 힘이 있다는 구속사의 생명력을 실증해 준다. 실로 바울 사건 이후에도 더욱 격화되어 갔던 전로마 제국의 엄청난 박해에도 불구하고 세속적 관점에서는 비천하고 유약한 무리에 불과하였던 자들이 나사렛 예수를 믿었던 신앙 곧 기독교(Christianity)는 단순히 살아남은 것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로마 제국 전체를 복음화 시킴으로써 결국 박해를 이겨내었었다. 이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은 그저 단순한 신앙의 힘이니 기적이니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만다. 그러나 바로 그처럼 엄청난 핍박을 이겨낸 믿음의 선진들이 전해준 복음을 듣고 성도가 된 우리에게 이는 그 이면(面)에 살아 숨쉬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곧 구속사의 실체를 확립시켜 주는 산 증거인 것이다.
외울 말씀
15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16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행 24:15,16)
바울을 율법 모독자로 규탄하는 더둘로의 송사
1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니라
2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송사하여 가로되
3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 무지하옵나이다
4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6 저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7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8 우리의 송사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9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바울의 논리적 변론
10 ○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
11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 이틀 밖에 못되었고
12 저희는 내가 성전에서 아무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과 또는 성중에서 무리를 소동케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13 이제 나를 송사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저희가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14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15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16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17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18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저희가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19 저희가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송사하였을 것이요
20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21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바울에 대한 선고의 연기
22 ○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가로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23 백부장을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며 친구 중 아무나 수종하는 것을 금치 말라 하니라
벨릭스 총독의 퇴임과 베스도 총독 취임
24 ○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26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27 이태를 지내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본문 & 자료노트
도표-24:1-9 바울이 당한 비난들
1.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행 17:6)
2. 가이사의 명을 거역한 자(행 17:7)
3, 율법과 전을 훼방하는 자(행 21:28)
4. 세상에서 없이 할 자(행 22:22)
5. 죄수(행 23:18)
6. 염병(행 24:5)
7. 유대인을 소요케 하는 자(행 24:5)
8. 나사렛 이단의 괴수(행 24:5)
9. 성전을 더럽히는 자(행 24:6)
10. 선을 위해 악을 행하라 한 자(롬 3:8)
역사배경-24:1-27 신약에 반영된 로마법
행 27장 자료노트 참조
주요주제-24:5-21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
행 서론 특별자료 참조
도표-24:14,15 성도가 영적으로 소망할 것들
1. 하나님(시 71:5; 146:5)
2. 하나님 나라의 확장(마 6:10)
3. 예수 그리스도(요 14:6; 살전 1:3)
4. 마지막 날의 부활(행 24:14,15)
5. 하나님의 영광(롬 5:2)
6. 그리스도의 재림(롬 8:22-25)
7. 사랑의 은사(고전 12:31; 13:1-3)
8. 성령 충만(엡 5:8)
9. 복음에 합당한 생활(빌 1:27)
10. 의의 면류관(딤후 4:8; 약 1:12)
11. 영생(딛 3:7)
12. 천국(히 11:15,16)
원어연구-24:16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다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아스코 아프로스코폰 쉬네이데신 에케인'( )이다.
먼저 '아스코'의 원형은 '아스케오'( )인데, 이 단어는 '그릇' 또는 '도구'를 뜻하는 '스큐오스'( )에서 파생된 것으로 원래 '(그릇이나 도구를 만들기 위해) 정교하게 다듬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사람에 대해 쓰이면 비유적으로 '훈련하다' 또는 '노력하다'라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이는 바울이 하나님께서 쓰시는 그릇이(도구가) 되기 위해 스스로 다듬는 훈련을 계속했다는 말이다.
무엇을 훈련했는가? 본문에서 '아스코'의 목적어는 '소유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에코'( )의 부정사인 '에케인'( )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을 소유하기'를 훈련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소유하고자 했던 것은 '아프로스코폰 쉬네이데신'이었다. '아프로스코폰'은 '걸려 넘어지게 하다' 즉 '실족(케) 하다'(요 11:9)라는 뜻의 '프로스코프토'( )에 부정적 불변사 '아'( )가 접두되어 형성된 단어이다. 그러므로 '아프로스코폰'은 '죄를 짓지 않는' 또는 '범죄하게 하지 않는'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또한 '쉬네이데신'은 '도덕적 지각' 혹은 '양심'을 뜻하는 '쉬네이데시스'( )의 목적격으로 '양심을'으로 해석된다. 그러므로 본문을 직역하면 '범죄(케)하지 않는 양심을 갖기 위해 나는 스스로 훈련했다'가 된다.
그러나 이처럼 범죄하지 않는 양심을 갖는 것은 스스로 결심하는 것만으로 금방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에 습관화된 육신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한 양심을 갖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노력, 혹은 훈련이 지속적으로 요청된다 하겠다.
도표-24:1-23 벨릭스 총독 앞에서의 바울의 무죄 주장
변 론
1. 반역죄(5절): 예루살렘에 머무른 것이 겨우 12일밖에 안되므로 그 기간 동안 소요를 일으킴은 불가능함 주장(11-13절)
2. 종교적 이단(7절): 산헤드린의 어떤 회원들보다 자신이 구약의 가르침 대로 믿
는 정통 신앙인임을 주장(14-16절)
3. 성전 모독죄(6절): 성전 결례률 범치 않았으며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이를 증거함(17-23절)
역사배경-24:3,27 총독 벨릭스와 베스도
유대인들의 고소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사도 바울이 다시 가이사랴로 호송되어 재판을 받을 때에 등장하는 총독이 바로 벨릭스와 베스도이다. 따라서 이 두 총독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당시의 역사 배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1. 벨릭스(Marcus Antonius Felix)
A.D. 52-60년까지 유대 주재 로마 총독이었던 벨릭스는 플라우디우스(Claudius. A.D. 41-54) 황제 때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인이 된 자이며, 당시 로마 정부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팔라스(Pallas)의 동생이다.
벨릭스는 잔인한 폭군이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에 의하면 '그는 노예의 마음을 가지고 왕의 권세를 누린 자'였다. 그는 로마에 대해 적대감을 가진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였으며 당시의 대제사장이었던 요나단을 살해하었다. 사도 바울이 벨릭스 앞에서 변론하면서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해 강변했을 때 그가 두려워했던 이유도 자신의 강포함을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24,25절).
그러나 벨릭스는 바울에게 뇌물을 받기 위해 계속해서 심문하는 음흉한 자였을 뿐만 아니라(26절)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신이 총독 임무에 대한 실책으로 네로 황제 앞에 소환되기까지 약 2년간에 걸쳐 바울을 구금해두었다(27절).
2. 베스도(Porcius Festus)
A.D. 60-62년까지 네로 황제(Nero, A.D. 54-68)에 의해 벨릭스의 후임으로 유대 총독이 된 베스도는 전임자에 비해 매우 능률적으로 유대를 통치한 유능한 인물이었다.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그는 전임자 벨릭스의 실정으로 인해 부임 초기에는 매우 고전했으나 주민들을 약탈하고 살해했던 반란자들을 성공적으로 진압함으로써 통치에 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그는 그렇게 덕망있는 정치가로 평가받고 있지는 못하며 정치적인 출세욕 때문에 비굴했다고 한다. 베스도가 로마 시민권을 소유한 바울의 청을 수락하여 그를 로마로 호송케 한 것(행 26:32)도 할 수 있는 한 로마인들에게 호의를 보임으로 인기를 얻고자 했던 그의 출세욕의 한 반영이라 볼 수 있다.
역사배경-24:22,23 로마의 군대 조직
행 23장 자료노트 참조
역사배경-24:1-27 팔레스틴에 대한 로마의 식민통치
본서 14권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 참조
주요주제-24:15, 성도의 부활
고전 15장 자료노트 참조
24:1-9 더둘로의 고소
앞장(행 23장)에서는 유대인들이 합법적인 방법으로 바울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암살할 음모를 꾸민 사실과 바울 암살 계획을 알게 된 천부장에 의해 바울이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 관저로 이송된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장에서는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고소와 그에 대한 바울의 변른을 소개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본문은 바울이 총독에게 이송된 지 5일 후에 예루살렘에서 소위 원고인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내려와 바울을 고소하는 장면이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더둘로라는 변사를 시켜 그들의 고소 내용을 대변케 하였는데(1,2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더둘로의 논고는 먼저 벨릭스에 대한 아첨의 말로 시작된다(3,4절). 즉 더둘로는 보다 효과적으로 바울을 공박하고 총독 벨릭스의 환심을 사서 재판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온갖 미사 여구를 동원하여 벨릭스를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당시 벨릭스는 매우 포악하고 잔인한 통치자로 악정을 베풀어 유대인들의 미움을 산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더둘로의 말이 오직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꾸며낸 간교한 언사요 거짓말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더둘로는 그의 논고의 본론으로 들어가서 바울을 개인적, 정치적, 종교적인 세 가지 죄목으로 고소하였다(5-9절). 먼저 개인적인 죄목이다. 그것은 바울이 염병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바울을 유독한 존재로 고소한 것으로, 그 근거는 바울이 가는 곳마다 소요가 일어 났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더둘로의 고소는 제국 내의 평화 유지를 가장 중요시한 로마 정부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실제로 소요를 일으킨 것은 바울이 아니라 유대인 자신들이었다는 점에서 이 고소는 가당치도 않은 것이었다. 둘째, 정치적인 죄목이다. 그것은 바울이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는 것이다. 이는 얼핏 종교적인 문제인 것 같지만 실상은 비올을 내란 음모죄로 고소한 것이었다. 즉 당시 유대에는 스스로 메시야라 하는 자들이 나타나 반외세, 반로마를 외치며 민족 혼을 일깨워 로마에 대항케 하는 일이 번번이 일어났는데, 바울 역시 일전에 스스로 왕이라 자처 했다가 처형된 나사렛 예수의 사상을 계승한 나사렛 당의 우두머리로 유대인을 선동하여 로마에 반역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치적으로 심각한 범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을 선동치도 않았으며. 또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것이지 이 세상의 왕으로서의 예수를 전한 것은 아니었다. 셋째, 종교적인 죄목이다. 그것은 바울이 성전을 더럽힌다는 것이다. 이는 로마법이 아니라 유대법의 사형에 해당되는 죄목이었다. 당시 로마는 제국내의 각국에 종교의 자유를 주었고 또한 고유한 특권을 주었다. 그리고 로마 정부는 유대인의 율법에 관계된 일이면 되도록 관여하려 하지 않았으며 종교적인 문제로 유대인들이 사형 판결을 내리면 인준해 주기도 했다. 더둘로는 바로 이 사실을 이용해 바울이 유대법의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지었다고 고소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죄목은 앞의 두 죄목과 달리 바울을 현장범으로 물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바울의 처형을 강조한 듯한 인상을 준다. 하여간 더둘로는 지금 바울이 로마법이나 유대법의 사형에 저촉되는 중범죄자임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율법을 누구보다도 잘 지킨다고 하면서 율법을 철저히 무시하고 파괴하는 유대인들의 완악함을 보게 된다.
한편 우리는 이상의 사실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즉 법을 운용하는 자나 법에 호소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양심과 진리의 법인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검증해 보아야 하며. 나아가 최고의 재판장이시며 마지막 때의 최후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거짓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마 25:31-33; 계 20:11-15).
24:1 닷새 후에, - 본문의 '닷새 후'라는 날짜에 대해서 바울이 예루살렘을 떠나 가이사랴로 출발한 지(행 23:23-35) 닷새로 보는 견해(Meyer, Robertson, Hervey)와 바울이 가이사랴에 도착한 후 닷새로 보는 견해(Alford, Bruce, Knowling, Longeneker)가 있다. 여러 정황에 비추어 볼 때 후자의 견해가 보다 타당성 있게 받아들여진다.
아나니아가‥‥변사 더둘로와 함께. -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유대인 장로들 몇 사람과 또한 바울에 대한 소송을 제기함에 있어 자신들의 주장을 유리하게 대변해 줄 변사와 함께 벨릭스 총독을 찾아 왔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이미 예루살렘 산헤드린 공회에서 바울의 입을 치라고 외쳐 바울로부터 '회칠한 담'이라는 면박을 받은 잔인한 성격 을 가진 사람이었다(행 23:2,3). 그리고 본문의 '변사'(레토로스)라는 것은 원래 '공적인 연설자' 혹은 '웅변가'란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법적인 문제에 정통한 일종의 법리사 내지는 변호사를 의미하는 바 신약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언급되어 있다. 이렇게 바울에게 집요한 중오심을 갖고 있는 아나니아는 효과적인 소송 제기를 위해 변사 '더둘로'를 대동하여 왔다. 한편 '더둘로'(Tertullbs)는 로마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헬라 사람의 이름이다(Bruce). 그가 유대인인지 헬라인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추측컨대 헬라파 유대인(행 6:1; 9:29)으로서 법률적인 처리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자로 그와 관련된 일에 종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나니 아는 그가 열렬한 유대주의자였기 때문에 그를 변사로 선택한 것으로 여겨진다(Longeneker).
24:2 바울을 부르매‥‥송사하여. - 로마인들의 재판 절차 역시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먼저 피고인에 대한 고소인의 고발이 있은 다음 양측이 같이 법정에 배석한 가운데 심문이 시작되는 것이 통례였다(행 25:16). 그래서 바울이 법정에 불려 나오자 바울에 대한 더둘로의 고소가 시작된 것이다.
24:3 벨릭스 각하여‥‥태평을 누리고. - '각하'라는 칭호에 대해서는 23:26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변사 더둘로는 바울을 효과적으로 공박하고, 벨릭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미사 여구의 찬양과 아부의 말로써 벨릭스를 칭송하고 있다. 그 아첨의 첫 번째 내용은 벨릭스의 뛰어난 통치로 말미암아 유대 백성들이 태평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나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벨릭스의 악정과 상습적 잔혹 행위를 비난하고 있어 더둘로의 말이 모두 거짓인 아첨으로 드러나고 있다.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 더둘로의 두 번째 아첨의 내용이다. 여기서 '선견'(프로노이아스)이라는 말은 본래 신의 예지(豫知)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는 '사전에 고려한다'는 뜻으로 롬 13:14과 이곳에서만 사용되었다. 이는 곧 사리 판단에 밝거나 앞일을 예견하는 통찰력이 뛰어난 것을 가리키는 바벨릭스에 대한 더둘로의 아첨이 얼마나 극한 것이었나를 보여 준다.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 더둘로의 세 번째 아첨 내용이다. 여기서 '개량'은 '올바르게 놓다'(디오르도오)는 의미를 지닌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성공적인 행위'나 '바른 행위'를 의미한다(Hervey). 즉 더둘로는 벨릭스가 유대 민족을 위하여 계속하여 시행한 개혁 정책으로 인해 자신들이 장기간의 평화를 누리고 안전할 수 있었다고 아첨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이처럼 터무니 없는 아첨을 한 이유는 먼저 잔인하고 탐욕많은 벨릭스 총독에게서 호의를 얻고, 또한 당시 벨릭스가 유대인들에 대하여 지니고 있던 반유대 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24:4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 본문의 '괴롭게'(엥코프토)라는 말은 '끼어들다' 혹은 '말참견하다', '방해하다'라는 뜻으로 신약의 여러 곳에서 사용되었다(롬 15:22; 갈 5:7; 살전 2:18). 이 말은 일차적으로 총독 벨릭스에게 고소의 내용을 간략하게 언급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당신의 통치 업무에 방해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이는 실로 교묘하게 벨릭스의 기분을 북돋워 주는 노련한 언변(言辯)이 아닐 수 없다. 즉 더둘로는 이같은 말로써 바쁜 벨릭스를 번잡스럽게 하지 않겠으며 이번 재판의 최종 판결자는 어디까지나 벨릭스임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대강‥‥관용하여. - '대강'(쉰토모스)이라는 말은 신약에서 이곳에서만 언급되는 말로 '간결하게', '간단히'라는 말이다. 이는 곧 불필요한 얘기는 생략한 채 핵심만 진술하겠다는 의미이다. 다음으로 '관용하여'(테 세에 피에이케이아)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당신의 인자하심으로'라는 의미이다(고후 10:1). 이는 곧 비록 듣기 지루하거나 거북스러운 점이 있다 할지라도 너그럽게 들어 달라는 의미이다(공동번역). 이 역시 입에 발린 더둘로의 아첨의 말이다.
24:5 이 사람은 염병이라‥‥소요케 하는 자요. - 더둘로는 총독 앞에서 모두 세 가지 차원에서 바울을 고소하였다. 그 첫 번째는 본절에 나타난대로 개인적인 혐의로 바울이 '염병'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 '염병'(로이몬)이라는 것은 일종의 '장티푸스'나 콜레 라 같은 전염병을 가리키는 말이다. 결국 바울을 염병으로 표현한 것은 바울의 전파하는 바가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로마인들에게도 치명적으로 악영향을 끼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더둘로는 바울이 가는 곳마다에서 소요가 일어났음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혐의는 아마도 바울이 전도 여행을 다니는 중 여러 곳에서 유대인들과 빚은 갈등에 기초한 것일 것이다(행 13:45-50; 14:1-7; 17:5-9; 18:12-17 ; 21:27-36; 22:22,23). 사실 로마인들은 제국의 '평화'를 뒤엎는 것은 무엇이든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더둘로의 고소는 벨릭스를 분노케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소요를 일으킨 것은 바울이 아니라 유대인 자신들이었다는 점에서 이 고소는 가당치 않은 것이었다. 과거에 예수님도 유대인들에게 이러한 고소를 당한 적이 있으시다(눅 23:1,2,5). 어쨌든 생명의 복음을 죽음의 전염병인 염병에다 비유하여 혐오 감정을 나타낸 것은 실로 유대인들의 완악한 심정의 발로였다.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 바울에 대한 두 번째 고소의 내용은 바울이 '나사렛 이단'(Nazarene)의 주모자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이단'(하이레시스)은 '자력으로 취하다'(하이레오마이)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본래 '종파'(Sect)나 '당파'(Party)를 가리킨다(Bruce). 따라서 '나사렛 이단'이라는 것은 일반인들의 시각에서 볼 때 기독교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예수의 고향이 나사렛인 점(마 2:23)과 관련하여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이단 집단'이란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괴수'(프로토스타테스)라는 말은 '첫째'(프로토스)란 말과 '서다'(히스테미)라는 말의 합성어로 '주모자'나 '장본인'을 뜻한다(Robertson). 그러므로 바울에 대한 더둘로의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는 고소 내용은 일종의 종교적인 문제인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바울을 내란 음모죄로 고소한 것이었다. 즉 당시 유대에는 스스로 메시야라 하는 자들이 나타나 반외세, 반로마를 외치며 민족혼을 일깨워 로마에 대항케 하는 일이 번번히 일어났었다. 그런데 바울 역시 일전에 스스로 왕이라 자처했다가 처형된 나사렛 예수의 사상을 계승한 나사렛 왕의 우두머리이며, 유대인을 선동하여 로마에 반역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치적으로 심각한 범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을 선동치도 않았으며, 또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것이지 이 세상의 왕으로서의 예수를 전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주님께서 유대인들로부터 친히 당한 모함과도 유사하다(눅 23:2).
24:6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 이제 더둘로의 마지막 고소 내용은 행 21:28의 내용과 동일한 것으로 성전 모독죄를 언급하고 있다. 이 고소 내용은 사실 문제의 시발점이자 중차대한 사안이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 모독죄는 사형에 처할 수 있었으므로(행 21:28,29) 잘못하면 바울에게 사형도 선고할 수 있는 죄목이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 하여금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자 마음먹게 한 결정적인 요인도 바로 성전에서 일어난 문제 때문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막 11:15-19). 그러나 이 죄목이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중차대한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법정에서는 고소거리가 될 수 없었다. 때문에 더둘로는 제일 마지막으로 이를 간략하게 언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로마는 제국내의 각국에 종교의 자유를 주었고 또한 민족 고유의 특권도 주었다. 그래서 로마 정부는 유대인의 율법에 관계된 일이면 되도록 관여하려 하지 않았으며 종교적인 문제로 유대인들이 사형 판결을 내리면 인준해 주기도 했던 것이다. 결국 더둘로는 이를 이용하여 바울을 성전 모독죄로 고소한 것이다. 따라서 더둘로의 이러한 고소 내용도 잘만 하면 벨릭스로 하여금 바울에게 충분히 극형까지 내리게 할 수 있는 죄목이었다.
24:7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에는 6절과 본절 사이에 다음과 같은 맡이 첨가되어 있다. '우리가 그를 우리 율법대로 재판하려고 했지만 천부장 루시아가 와서 그를 우리 손에서 강제로 빼앗아 갔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고소하는 사람들에게 각하께 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공동번역). 이 말을 첨가하는 것이 옳다면 본절의 '그'란 바울이 아닌 루시아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이는 벨릭스가 루시아가 올 때까지 재판을 연기한 점(22절)에 의해서도 어느 정도 뒷받침된다. 그러나 보다 짧은 본문이 더 원본과 가까운 것이라는 일반적인 사본 비평 원칙에 따라 이같은 삽입 구절의 진정성에 대하여 의문을 품는 학자들이 많다. 더군다나 전후 문맥상 더둘로가 바울을 고소하다가 급작스레 루시아를 들먹일 상황도 아니다. 때문에 이를 생략하고 있는 사본들에 의거할 때 본절의 '그'란 루시아가 아닌 바울을 가리키는 것으로 봄이 더 타당하다. 즉 더둘로는 지금까지 자신이 바울을 고소한 내용이 참인지 아닌지는 벨릭스 총독이 친히 바울을 심문해 보면 판명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장담하고 있는 것이다(Bruce).
24:8 우리의 송사하는‥‥아실 수 있나이다. - 벨릭스 총독이 친치 피고인 바울을 심문하면 자기의 고소 내용이 사실인 것을 알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둘로가 이처럼 호언 장담한 까닭은 아마도 바울이 권세자 앞에서 위축되어 혐의 사실을 모두 시인하리라고 착각한 때문인 것 같다. 아무튼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라는 말은 벨릭스에 대하여 더둘로의 그칠 줄 모르는 아첨하는 모습을 잘 드러내 준다.
24:9 유대인들도‥‥옳다 주장하니라. - 여기서 '유대인들'은 장로들(1절)을 제외한 또 다른 사람들을 가리킨다. 즉 아나니아는 바울의 건에 대하여 증언할 많은 사람들을 대동하고서 벨릭스를 찾아온 것이다. 한편 '이에 참가하여'(쉰에페덴토)라는 말은 '~와 함께'(쉰)와 '위에 놓다'(에피티데미)의 복합어로 '함께 공격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옳다'(후토스 에케인)는 말은 '그처럼 생각했다'라는 의미의 일반적인 관용어구이다. 더둘로는 이처럼 자신이 바울을 고소한 내용에 대하여 유대인들도 옳다고 동의하자
말을 마치고 있다. 그런데 더둘로의 고소는 처음에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벨릭스에게 아첨함으로 장황하게 시작한 것(3,4절)과는 달리 결론은 너무 무기력하게 끝나고 있다. 이와 함께 변사 더둘로의 전체 고소 내용을 파악해 볼 때 바울의 죄목을 조리 있게 제시하기 보다는 총독에게 아첨하는 말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그의 고소 내용이 외양으론 그럴싸하지만 그 내면은 거짓으로 팽배해 있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24:10-21 벨릭스 앞에서의 바울의 변론
본문은 변사 더둘로의 지식적이고 능란한 고소(1-7절)에 대하여 바울이 확실한 사실에 기초하여 담대한 태도로 논리 정연하게 변론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바울의 변론은 더둘로가 고소한 3개의 항목, 즉 소요죄, 나사렛 이단의 죄, 성전훼손죄에 대해 조목조목 해명함으로써 자신은 그러한 죄가 없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본문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소요죄에 대한 변론으로, 바울은 이를 전적으로 부정한다(11-13절). 즉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온 지 불과 12일밖에 안되었으며 그중 5일은 옥중에 있었으므로 그 짧은 기간 동안에는 사람을 소요케 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과, 또한 그가 성전에서 사람을 선동하거나 소요케 한 사실을 본 목격자나 중거가 없으니 더둘로의 고소는 분명 모함이며 누명임을 밝헌다. 두 번째로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는 고소에 대하여 바울은 더둘로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그가 믿고 있음을 인정함과 아울러 그 도는 결코 이단이 아니며 유대교와 같이 구약과 하나님을 믿으며 또한 부활의 소망까지 믿는다고 밝힘으로써 그가 전하는 복음이 참신앙임을 변증하였다(14-16절). 셋째로 성전 훼손죄에 대하여 바울은 결코 자신은 성전을 더럽힌 일이 없으며 다만 민족을 위하여 구제 헌금을 가져왔고, 민족의 전통에 따라 결례를 행했을 뿐임을 밝힘과 아울러 자기가 만일 성전에서 소동을 일으켰다면 그 자리에 있었던 아시아에서 은 유대인들이 고소인의 자격으로 이 재판에 참석해야 했으나 그러한 일이 없음은 그것이 모함임을 의미한다고 변론하였다(17-21절).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에 기초한 바울의 논리 정연한 변론은 결국 벨릭스의 호의를 얻게 되었고, 바울을 해하려는 유대인들의 음모는 다시 한번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22, 23절).
한편 이상의 본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① 양심에 거괴낌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 쓴다고 했다(16절). 그와 같이 우리들은 과연 얼마나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양심에 거리낌 없는 삶을 살고 있는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모두 온전하고 진실한 삶, 이것이야 말로 참신앙인의 두드러진 특징인 것이다.
② 진리에 대하여 굽힘이 얼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비록 그를 대적하는 무리들에 의해 에워쌈을 당하고 있었지만 그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결코 부인하지 않았으며 오치려 더욱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여 복음이야말로 사람을 구원얻게 하는 참도임을 밝혔던 것이다.
24:10 머리로 표시하여. - 총독은 바울에게 변호하라는 지시를 머리로 표현하였다. 즉 '머리로 표시하여'(뉴오)라는 것은 '머리를 끄덕이다' 혹은 '고갯짓으로 지시하다'는 의미이다. 아마도 벨릭스는 총독으로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말로써가 아닌 이러한 고갯짓으로 지시를 내리는 오만한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기쁘게 변명하나이다. - 바울의 변론 내용은 고소자 더 둘로가 아첨으로 시작하는 것과는 달리 간단하고도 진실되게 벨릭스 총독이 정확한 판단을 내릴 만큼 유대의 상황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언급함으로 시작하였다. 실제로 벨릭스가 총독이 된 것은 A.D. 52년이고, 또 바울이 제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 A.D. 58년이기 때문에 벨릭스가 여러 해 전부터 민족의 재판관된 것을 알고 있었음이 사실이다. 따라서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벨릭스가 유대 총독으로 부임한 지 6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바울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그의 변호 내용을 잘 알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바울은 이 기회에 벨릭스에게도 복음을 중거할 수 있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변론에 임했을 것이다.
24:11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이 유대인들을 선동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배하러 간 것임을 밝힘으로 예루살렘 방문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더둘로가 정치적 소요죄로 자신을 고소한 데 대해서(5절) 바울은 예배를 드리기 위한 종교적 목적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을 밝힘으로 더둘로의 고소를 논박하고 있는 것이다.
열이틀 밖에 못되었고. - 계속해서 바울은 자신이 수년 동안이나 예루살렘을 떠나 있었다는 사실과 오순절을 맞아 최근에 예루살렘에 도착했고, 그것도 도착한 지 열이틀 밖에 지나지 않음을 설명함으로 정치적으로 유대인들을 선동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사실을 들어 더둘로의 고소 내용을 논박하고 있다. 실제로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이후의 시간과 행절에 대해서는(행 21:15-23:35) 본서에 대단히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즉 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행 21:17) 이튿날에 야고보 및 장로들을 찾아뵈었다(행 21:18). 그리고 서원자들과 함께 7일간의 서원 기간을 지켰다(행 21:23-27). 그리고는 체포되어 10일째에 산헤드린 공회에서 증언하였으며(행 21:27-23:11) 그 다음날에 바울을 살해하려는 유대인들의 음모가 있다(행 23:12-22). 그리고 가이사랴로 이송되어 벨릭스 앞에 서게 되었으니 곧 열 이튿날인 것이다(행 23:32-35).
24:12 변론하는 것이나‥‥소동케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바울의 계속되는 변호는 아첨과 과장된 말만을 늘어 놓은 변사 더 둘로와는 달리 매우 논리적으로 진행되었다. 즉 바울은 자신이 성전에서 사람들과 변론하거나 회당 혹은 성중에서 무리들을 소동케 한 것을 목격한 자가 고소자들 중 아무도 없다는 것을 밝힘으로 5절과 6절에서 제시된 더둘로의 고소 내용이 거짓된 것임을 입증하고 있다. 물론 성전에서 소동이 있었긴 하나 그 원인자는 바울이 아닌 유대인들이었으니(행 21:27-36) 바울의 주장은 지극히 정당하다. 한편 이러한 바울의 자세에서 우리들도 악인들의 아첨과 모함에 대해서 단순한 혈기로 대처하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신앙적으로 그리고 냉철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음을 배우게 된다.
24:13 저희가 능히‥‥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 더둘로의 거짓된 고소에 대해 바울은 조목조목 증거를 제시하여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입중하고 있다. 즉 자신이 종교적으로 유대인들을 미혹시켰거나 정치적으로 로마인들에 대항해 어떤 종류의 모반도 주도한 혐의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 허위 고소자들이 물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함을 분명히 했다. 즉 바울은 더둘로가 자신을 고소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증거를 제시하여야 하는데 전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음을 들어 자신의 무죄와 무혐의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24:14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 바울은 솔직하게 더둘로가 이단이라고 고소한(5절) 기독교를 자신이 믿고 있음을 시인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저들이 말하는 '나사렛 이단'(5절)이 아니라 '도'(텐 흔돈)라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도'란 사람이 마땅히 따라야 할 참된 가르침을 가리킨다. 그리고 유대교와 기독교가 다같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공통된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바울은 기독교가 유대교의 '이단'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라고 주장한다(Robertson). 즉 기독교는 유대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에서 벗어난 이단이 아니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독생자를 증거하고 있는 것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15절). 이러한 시사는 이미 행 14에서 밝힌 바 있다.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 바울은 이미 바리새인으로서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깨끗한 양심을 지켰다'(행 23:1)고 밝혔었다. 따라서 본문과 이 사실을 고려할 때 바울은 비록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모세와 율법과 선지자들과 그의 조상들의 종교에 대해서 불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구약 성경이 장차 오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증거하고 있으니 그 말씀에 기초하여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오셨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바울이 이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참도를 굳게 붙들고 있는 자임을 새삼 더 말할나위 없다.
24:15 하나님께 향한 소망‥‥의인과 악인의 부활. - 이번 재판정에 참석한 유대인 중 일부는 바리새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이 다시금 자신에 대한 고소가 타당한지를 재고해 보기를 바라면서 부활 문제를 거론한 듯하다(행 23:6). 물론 당시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지만(행 23:8)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부활에 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요 11:24). 그리고 바울 자신도 똑같이 그러한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유대인들과 종교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변호하고 있다. 이 사실은 이미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도 천명하였고(행 23:6), 후에 로마에서도 분명히 하였다(행 28 . 30). 한편 여기서 바울이 부활과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동일시하는 가운데서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음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논란의 핵심은 바울 서신서에서는 '의인의 부활'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음에 반해(고전 15:12-58; 살전 4:13-5:11; 살후 2:1-12) 본문에서는 '악인의 부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 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바울이 그의 서신서에서 '악인의 부활'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서 악인의 부활이 부정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바울이 그의 서신서에서 특히 고전 15장에서 부활에 관한 교리를 언급할 때에 그가 강조한 내용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형상을 좇아 부활할 성도들의 부활이긴 하나 악인도 부활하여 하나님 앞에서 영벌의 심판을 받게됨은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바이다(계 20:12). 그리고 주님의 가르침 가운데에도 '의인의 부활'(눅 14:14)과 '불의한 자의 부활'(요 5:29)에 대해서 동시에 언급되고 있다.
24:16 이것을 인하여‥‥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 본문에서 '이것을 인하여'(엔 투토)라는 말은 행동의 원인과 근거를 제공하는 '이런 원인 때문에'라는 말로, 이 것은 앞절의 부활로 말미암는 소망을 말한다(Hervey). 그리고 '거리낌이 없기를'(아프로스코폰)이란 말은 부정 접두어 '아'와 '치다' 혹은 '넘어지게 하다'(프로스콥토)라는 말의 합성어로 '~에 대하여 넘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또한 '힘쓰노라'(아스코)란 말은 신약에서는 유일하게 이곳에만 언급되는 말로, '늘 습관적으로 연습하고 훈련한 다'는 뜻인 바 바른 생활을 위해 항상 자신을 훈련시키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절은 바을 자신의 삶이 일관된 목적, 곧 부활로 말미암는 신앙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거리낌이 없이 살려고 노력하였다는 사실을 양심이 중거한다고 담대히 피력하고 있는 구절이다(행 23:1). 실제로 바울은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처럼 위선적인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서 거짓된 의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마땅히 가져야 할 의로운 삶을 위해서 거짓됨이 없이 살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고전 9:27; 15:31). 바울의 이러한 부활 신앙에 입각한 삶을 통한 복음의 증거는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참다운 신앙의 표본이다. 사실 믿는 것과 삶을 통해 중거하는 삶이 분리된다는 것은 거짓된 신앙 자세이다. 더욱이 악인이 부활을 통해 그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의인은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점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온전한 삶을 살아야 한다(마 16:27; 고후 5:10).
24:17 여러 해 만에. - 이는 문자적으로 '여러 해가 지난 후'(디 에톤 플레이오논)라는 말로 2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방문한 때로부터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방문한 현재까지 4-5년이 경과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 본 구절은 본서에서 바울이 이방 교회들로부터 거둔 구제금을 예루살렘에 가져왔다는 유일한 언급이다. 물론 본서 저자 누가는 이것이 그의 주요한 관심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강조하지 않았지만 바울의 서신에는 자주 언급될 만큼 바울에게는 중요했다(롬 15:25-28; 고전 16:1-4; 고후 8:13,14; 9:12,13; 갈 2:10). 이처럼 바울은 비륵 여러 방문 목적 중의 하나이긴 해도(행 19:21 주석 참조)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이방 교회들이 모금한 구제금을 전달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 이는 곧 자기 민족을 위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로 도리어 유대인들로부터 고소를 당한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임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바울이 '제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왔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는 그가 유대인들의 관례를 좇아 '제물을 드리려고 성전에 들어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Toussaint). 그리고 또한 본문의 '제물'(프로스포라스)이란 말이 바울이 행 21:26에서 자신과 각 사람들을 위하여 드렸던 제물이나, 희생을 말하는 '제물'과 같은 말인 것으로 보아 서원 기간이 끝났을 때 정결례를 행하고 제물을 드린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목적 가운데는 오순절 절기에 참여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기 때문에(행 20:16), 오순절에 참여한 그가 율법을 준수하여(14절) 전례대로 제물을 드리려 한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Robertson).
24:18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 - 바울은 다시 자신이 무리들의 소요를 야기시킬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음을 논리적으로 변호하고 있다. 그것은 곧 당시에 바울이 7일 동안 지속되었던 서원 기간을 지키고 있었으며, 그때 네 사람의 서원한 사람들이 같이 있었을 뿐 아니라(행 21:23) 자신이 선동할 군중들도 없었으며 소동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소동을 일으킨 자들은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로(행 21:27) 이러한 사실은 유대인 자신들이 더 잘 아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더둘로의 고소가 사실 무근인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바울의 이러한 변호는 가장 강력한 변론의 요점이었다(Bruce), 당시 로마법은 고소를 포기하는 고소인에게는 도리어 중형을 가하도록 되어 있었고 고소자가 법정에 불참하는 것은 곧 고소의 철회를 뜻하였다. 따라서 바울에 대하여 고소하고자 벨릭스 앞에 서야 할 사람들은 더둘로가 아니라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이어야 했다. 왜냐하면 거짓으로 바울이 성전을 모독했음을 목격했다고 소리치면서 맨 먼저 소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이들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법정에 나타나 바울을 고소하지 않은 것은 바을 자신에 대해 비난할 것이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19,20절).
24:19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 만일 바울을 붙잡기 위해서 소동을 일으켰던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행 21:27)이 바울을 정식으로 고소했다면 마땅히 고소인의 자격으로 재판장에 출정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이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은 곧 바울의 무죄 뿐만 아니라, 앞선 더둘로 변사의 고소 내용이 모두 허위라는 사실을 반증해 주는 것이라는 게 바울의 논지이다(Longeneker). 바울의 이러한 논리적이고 정정당당한 변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거짓없이 신앙의 양심을 따라 행한 그의 소신에서 비롯된 것으로(16절; 행 23:1) 오늘날 성도들의 삶에 중요한 한 모본이 된다.
24:20 공회 앞에 섰을때에‥‥말하라 하소서. - 바울은 더 논리적으로, 자신의 고소에 대해 참다운 증인이 될 수 있는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법정에 출정하지 않았음에 대하여 한 가지 사실을 더 밝히고 있다. 즉 그것은 앞전에 자신이 공회에 섰을 때(행 22:30)에도 저들이 자신의 죄될 만한 행동을 지적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로써 바울에 대한 더둘로의 고소는(2-9절) 모두 거짓임이 분명히 드러나고 만 것이다.
24:21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 덧붙혀서 바울은 자신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진술한 내용은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것인데 그로 인해서(행 23:6)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사이에 분쟁이 있게 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사실을 책잡으려면 몰라도 자신은 그 어떤 것도 죄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력히 증거하고 있다. 이는 하나의 의미심장한 풍자였다(Bengel). 왜 냐하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바울의 계속되는 주장은 유대교의 전통적인 신앙과 일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러한 내용은 실제로 로마 법정에서는 종교적인 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에 소송거리가 될 수 없었고 죄목도 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바울의 논리적이고 또한 분명한 부활 신앙에 입각한 변론은 더둘로를 비롯한 유대인들의 고소가 터무니없는 것으로 드러나게 해주고 말았다.
24:22-27 벨릭스의 간교함
앞선 두 단락(1-21절)에서는 바울에 대한 변사 더둘로의 고소와 그에 대한 바울의 변론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더둘로의 고소와 바울의 변론에 따른 총독 벨릭스의 조치 및 그 이후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약 10여 년을 팔레스틴 지역에서 계속 생활해 온 벨릭스는 유대인과 바울이 대립하게 된 원인이 단순히 그들의 종교적 견해 차이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는 천부장 루시아가 올 때까지 재판을 연기함을 선포하고 바울에게는 많은 자유를 허용하였다(22,23절). 이것은 바울이 무죄함을 벨릭 스가 확신 했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릭스가 바울을 즉시 석방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그의 재임 기간 동안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소요를 염려했기 때문이다. 둘째,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함이다. 셋째, 바울에게서 뇌물을 받기 위함이었다. 결국 이러한 이유로 해서 바울은 무죄 판결을 받았음에도 활구하고 2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옥중 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벨릭스의 임기가 끝나고 베스도가 부임해서도 석방되지 못한다(27절). 여기서 벨릭스의 간교함이 다시 드러나고 있다. 물론 벨릭스는 이러한 간교함에도 바울과 복음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즉 그는 바울에게 많은 자유를 허용하여 복음을 자유롭게 전하게 함은 물론 그 역시 바울을 불러 복음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24절). 하지만 그의 사특한 마음은 결국 회개를 촉구하는 바울의 권면을 외면함으로써 그는 끝내 구원의 반열에서 멀어지고 만다(25,26절) .
이상의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된다.
① 하나님과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공과 의를 향하기보다 자신의 이해 득실을 추구하기에 더 급급하다는 것이다.
② 회개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회개를 외면하는 자는 결국 영원한 멸망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벨릭스는 회개를 촉구하는 바울의 권면을 끝내 외면함으로써 악인의 반열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③ 신앙인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불의와는 타협해서는 안되며 담대히 진리를 외쳐야 한다. 바울은 벨릭스에게 뇌물을 주면 석방될 수 있는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진리를 선포하고 벨릭스의 회개를 촉구했던 것이다.
24:22 벨릭스가‥‥더 자세히 아는 고로. - 벨릭스 총독이 바울의 '도' 즉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에 대하여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그의 아내인 드루실라가 헤롯 가(家)의 일원이었기 때문에(24절 주석 참조) 그녀를 통해서 알게 된 것으로 추정할 따름이다. 아니면 유대 총독으로서 유대 지방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기에 유대인들의 종교 문제와 관계된 이 정도의 소식은 정보통들을 통해 접하였을 수도 있다(Toussaint). 어쨌든 천부장 루시아의 서신 내용과(행 23:25-30) 변사 더둘로의 고소 내용(2-9절) 또한 바울의 변론 내용이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벨릭스는 루시 아로부터 더 확실한 사실을 알아보고자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재판을 연기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울의 무죄 변론에서 명백히 드러난 것 뿐만 아니라, 천부장 루시아의 편지 내용도 이미 바울의 사건에 대하여 소상히 밝히고 있으니(행 23:25-30), 바울은 그 즉시로 무죄 석방되어야 마땅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벨릭스의 이와 같은 재판 연기 사유는 하나의 핑계임이 분명하다. 그러면 왜 벨릭스가 정치적 선동이라는 명목으로 위장하여 유대인들이 바울을 책잡으려 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풀어 주지 않고 재판을 연기하였는가?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그의 임기 기간을 별탈 없이 채울 후 후임자인 보르기오 베스도에게 총독의 지위를 물려 주길 원했기 때문(27절)으로 보인다. 즉 벨릭스는 바울을 풀어줌으로써 야기될 유대인들의 반감을 우려했던 것이다. 둘째, 바울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를 허용하면서(23절) 계속 불러서 뇌물을 받고자 원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26절). 어쨌든 바울이 무죄임에도 불구하고 재판을 연기한 채 계속 구금하는 것은 오늘날의 불의한 권력자나 압제자들이 저들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흔히 쓰는 수단과 방식과도 동일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모든 인간적인 술수와 계략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통한 복음 전파의 역사는 중단될 수 없는 것임을 보게 된다.
24:23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며. - 본문의 '자유'(아네시스)는 문자적으로는 '편히 쉼' 또는 '이완' (relaxation)을 의미한다(Longeneker, Hervey). 이는 곧 바울이 구금 상태에 있긴 하였으나 상당한 활동의 자유와 함께 사람들의 시중을 받을 수 있고 면회도 자유로이 허용된 상태였음을 말해 준다. 바울이 이렇게 대우를 받은 것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데 대한 합당한 처우였을 뿐 아니라 벨릭스 총독이 바울에 대해 어느 정도 무죄를 인정해 준 것을 나타내 준다. 후에 시돈에서 백부장 율리오도 바울에게 이와 비슷한 자유를 허용한 적이 있다(행 27:3). 한편 이때 바울을 수종든 사람은 본서 저자인 누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바울의 조카(행 23:16)와 가이사랴에 있던 전도자 빌립(행 21:8) 등도 종종 바울을 방문하고 수종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24:4 드루실라. - 루실라(Drusilla)는 유대 왕 아그립바 1세(Herod Agrippal .A.D. 39-44)의 셋째 딸이자 아그립바 2세(A.D. 48-70)의 누이로서 A.D. 38년 경에 태어났다. 그녀는 플레오파트라의 손녀, 그리고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한 여인에 이은 벨릭스의 세 번째 아내로서 벨릭스의 유혹에 넘어가 아메사(Emesa)의 왕인 아지주스(Azizus)와의 결혼을 파기하였다. 그녀는 처음에 콤마게네(Commagene)의 왕자 에퍼파네스(Epithanes)와 약혼했으나 에피파네스가 유대교로 개종하는 것을 거부하여 파혼하였다. 그리고 후에 오빠의 중매로 아지주스와 결혼했는데 그때 그녀의 나이 15세였다. 그러다가 그와의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벨릭스와 결혼했는데 그녀 나이 18세 때의 일이다. 그녀와 벨릭스 사이에 아그립바(Agrippa)라는 아들이 있었으나A.D. 79년 베스비우스(Vesvius) 화산 폭발 때 모자(母子)가 같이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편 드루실라는 유대인으로서 당시에 기독교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실제로 서방의 여러 사본들이 벨릭스보다 먼저 그녀가 바울을 만나고자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Bruce).
24:25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 - 바울을 청한 벨릭스와 드루실라(24절)는 그에게서 강론을 들었다. 바울은 이때 벨릭스와 드루실라의 환심을 사 석방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바울이 행한 강론은 그들의 잘못된 과거와 현재와 거기에 따른 미래의 심판을 증거함으로 그들의 양심을 자극하고 당혹케 했다. 즉 바울이 저들의 과거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의'(디카이오쉬네)를 강조한 것은 벨릭스가 노예 출신으로 로마 황실의 왕자 팔라스의 후광을 힘입어 불법적으로 유대 총독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독한 정치를 한 과거의 행위를 꿰뚫어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절제'에 대하여 강론한 것은 드루실라와의 결혼이 합법적이 아닌, 남편이 있는 여인과의 결혼이라는 불법적인 면을 지적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하여 강론한 것은 그러한 삶들로 인해 장차 당할 심판의 명백성을 경고함으로 저들의 잘못을 예리하게 파혜친 것이다. 이는 실로 자신의 안위를 돌보기 보다는 불법을 지적해 깨우쳐 주기를 마지 않은 바울의 진정한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두려워하여. - 바울이 자신의 생활 속에 가장 수치스러운 문제를 화제로 삼았기 때문에 벨릭스는 두려워하여 강론을 그만두게 하였다. 이는 과거에 세례인 요한으로부터 자신의 불법적 결혼에 대하여 책망받은 헤롯 안디바가 세례 요한에게 행한 행동과 유사하다(마 14:3,4).
24:26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 본절로 보아 벨릭스는 바울의 강론으로 인해 마음에 가졌던 찔림과 두려움도 잠시 뿐(25절) 돈에 대한 탐심을 버리지 못하고 바울을 자주 불러 만일 석방되기를 원한다면 자신에게 돈을 바칠 것을 은근히 종용한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주께서 원하시면 자신을 감옥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했음이 분명하다(행 12:7과 16:26 비교). 어쨌든 벨릭스의 이와 같은 행위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며 그 결국은 영원한 멸망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기에 충분하다(딤전 6:10), 한편 벨릭스가 바울에게 뇌물을 요구한 것으로 보아 당시 바울이 얼마간의 돈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바울이 얼마의 돈을 가지고 있을 수 있었던 근거로는 다음과 같은 가능성들이 제시된다. 즉 그가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는 이방 교회들의 구제금을 가지고 있었거나(17절), 여러 방문객들로부터 돈을 받았을 수도 있었으며(23절), 또한 람세이(Ramsay)의 주장대로 부모의 유산을 받아 지니고 있었다고도 추측할 수 있다. 어쨌든 바울이 감옥 생활과 자신이 불법 감금당한 데 대한 소송을 제기하려면 비용이 필요했으므로 다소간의 재정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당시에는 돈을 받고 죄수를 풀어주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이를 위반한 관리들은 재산 몰수와 함께 관직에서 물러나야하는 엄한 규정(Julian Law)이 있었다(Robertson, Bruce). 그런데도 바울에게서 돈을 받기를 바란 벨릭스의 행위는 탐욕에 눈이 먼 인간의 극한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24:27 이태를 지내서. - 이 말은 바울이 연기된 재판을 받기 위해 감옥에 투옥된 지 '2년이 경과하였다'는 말이다. 천부장 루시아가 오면 판결을 하겠다는 언질(22절)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2년이 지나도록 재판이 열리지 않은 것은 분명히 바울을 의도적으로 구금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렇게 장기간 구금한 것은 바울의 석방으로 인해 겪게 될 유대인들의 비난과 반감을 예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22절 주석 참조. 한편 이 두해가(A.D. 58-59년경으로 추정됨) 바울에게는 매우 지루한 시간이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시간들이 그에게 있어서 단순한 허송 세월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기간은 우선 3번에 걸친 전도 여행으로 말미암아 누적된 피로를 풀 수 있었고, 그의 영적 상태를 재정비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내를 배우게 되었으며, 이것으로 인해 로마 전도를 위한 준비 시간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기에는 모든 것이 불리하고 무익하게 생각되는 것도 후일에 생각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에 순복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보르기오 베스도가‥‥소임을 대신하니. - 이 년이 경과한 후에 벨릭스가 퇴임하고 보르기오 베스도(Porcius Festus, A.D. 60-62년)가 새로운 총독에 임명되었다. 벨릭스의 퇴임은 당시 가이사랴에 있던 유대인들과 헬라인들 간에 생긴 적대 감정 때문이었다. 즉 그들은 서로가 가이사랴 시민으로서 주도권을 주장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경제적인 주도권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숫적으로도 헬라인들보다 많았다. 이런 가운데서 저들은 유대인이었던 헤롯 대왕이 가이사랴를 재건시켰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들의 주도권을 주장하였다(행 23:23 주석 참조). 이에 비해 헬라인들은 로마 정부의 지지를 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가이사랴가 항상 이방인의 도시였다는 점을 내세워 주도권을 주장했다. 이에 벨릭스는 자신의 지휘 아래 있던 수리아 군대를 개입시켜 유대인들에게 군사적인 보복을 감행했다. 그 결과 많은 유대인들이 죽고 감옥에 투옥되며 재산을 몰수당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로마 정부에 탄원하여 벨릭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였으니 결국 벨릭스는 네로 황제에 의해 로마로 소환되고 베스도가 새로운 유대 총독이 된 것이다(Longeneker). 한편 베스도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것이 없다. 그는 총독이 된지 2년만에 죽었는데 벨릭스에 비해 비교적 선량한 치리자였으며 온화한 성품으로 선정을 베풀려고 노력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주니라. - 바울의 무죄가 증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벨릭스가 퇴임하면서까지 바울을 석방하지 않은 이유이다. 여기서 '마음을 얻고자 하여'(델론 테 카리타 카타데스다이)라는 말은 '내려놓다', '위탁하다', '신뢰를 지니고 맡기다'(카타티데미)란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호의를 얻기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즉 벨릭스가 퇴임하면서 계속해서 바울을 구금한 것은 그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려는 의도에서 였다. 아마도 벨릭스는 로마로 소환되어 가면서 필경 황제의 문책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 그에 대한 반감을 누그러뜨려 그에 대해 긍정적인 보고를 해주리라 여겼던 것 같다. 이로 인해 바울은 부당하지만 계속해서 감금 상태에 머물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주께서 처음 바울을 사도로 부르셨을 때 그가 복음을 위해 육대인들과 이방인들 손에 의해 많은 고난을 받게될 것이라고 경고하신 말씀이(행 9:15-16) 성취되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그러나 주님은 이 기간을 분명히 로마에서도 복음을 중거하길 원했던 바울의 열망을 이루시기 위한 준비 기간으로 섭리하셨다(롬 1:8-13). 그런즉 바울의 이러한 구금 생활을 통해서 우리는 요셉의 감옥 생활을 연상할수 있다(창39-41장). 따라서 이를 모두의 경우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손길을 보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 언제 어떠한 환경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바라보며 항상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을 지녀야 할 것이다(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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