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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장 헌금 위원 파견 목적의 설명과 연보의 바른 자세와 그 유익의 설명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예루살렘(Jerusalem) 교우들을 위한 구제 연보에 대한 관련 기사를 보도하는 제 8,9장의 일련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주로 사도직에 임하는 자신의 자세와 자신의 사도권의 정통성에 대해 변론하는 것을 본령으로 하는 고린도후서 전체의 시각에서 볼 때 본론의 중반부에 위치하면서도 화제를 잠시 바꾸어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구제 연보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 제 8,9장은 일종의 삽입 기사라 하겠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우들을 위한 구제 연보도 본서 기록 당시 그 설립자요 사도인 바울과 고린도 교회가 공동으로 직면하고 있던 교회의 주요 현안이었던 바 이는 그저 단순한 화제 전환을 위한 삽입 기사는 아니었다. 다만 제 8,9장을 전후로 한 본서의 본론들이 모두 다 바울의 올바른 사도직 수행 자세와 사도권의 정통성을 다루는 데 반해서 이 두 장은 구제 연보 문제를 다루므로 전체의 문맥 구조상으로는 삽입 기사의 성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체적 문맥하에 진행되는 제 8,9장의 일련 기사의 내용 전개를 보다 상술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8:1-5이 예루살렘 교우들을 위한구제 연보에 있어서 모범을 보인 마게도냐(Maredonia) 교우들의 실례를 제시하면서 구제 연보 관련 기사를 시작한다. 다음 8:6-15은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의 정신을 구현하는 방법의 하나로서의 당위성을 가지고 있고 또한 성도 간에 상보하는 유익도 있음은 물른 전날 고린도 교우들이 이미 자원한 바도 있는 구제 연보를 이제 실천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한편 8:16-24은 고린도 교회의 구제 연보를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 바울이 설립자요 사도로서 디도(Titus)를 위시한 삼인의 선한 헌금 위원을 파송할 것을 천명한 내용을 보도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9:1-5은 이제 바울이 헌금 준비 위원을 파송하여 자신이 당도하기 전에 미리 구제 연보를 준비하도록 조치한 사유를 밝히면서 고린도 교우들이 그들을 맞아 바을 자신의 도착 이전에 구제 연보를 미리 비축하는 방법으로 구제 연보를 실행할 것을 재삼 당부하고 있다. 끝으로 9:6-15은 연보에 임하는 바른 자세와 구제 연보가 그것을 바치는 이와 그로 인해 혜택을 받는 이에게 가져을 유익을 설명함으로써 다시금 간접적으로 구제 연보를 촉구하며 일련 기사를 종결짓고 있다.
이러한 구제 연보에 대한 일련 기사를 개관하고자 할 때에 우리는 구제(救濟)라는 주제와 연보(捐補)라는 두 큰 주제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는 바 먼저 구제에 대한 전반적 이해를 위해서는 본 주석 신명기 26장 자료노트, '구제와 자선'을 참조하기로 하고 본개관에서는 연보에 대해서만 개관하기로 한다.
한편 우리가 연보에 대해 개관할 때에도 본 일련 기사 각 단락 자체가 연보의 자세와 유익 등의 여러 측면에 대하여 직설적으로 밝히고 있으므로 그러한 세부 측면은 각 단락별 강해주석에서 다루기로 하고 본개관애서는 구속사적 입장에서 본 연보의 근본적 당위성에 대해서만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구속사의 주체이신 하나님, 곧 전역사를 통하여 그것이 마침내 우리 인생의 천국 구원과 축복으로 귀결되도록 홀로 절대적 주권을 가지시고 사역하시는 유일한 구속사의 궁극적 원동력이신 하나님은 그분 자체가 절대 초월자로서 그리고 우주와 역사의 창조자요 주권자로서 그 어떤 존재와도 상관없이 구속사를 전개해 나가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과정에서 필히 당신의 구속사적 주권에 순복함으로써 구속사의 은해에 동참케 된 성도의 사역을 경유하여 심지어는 당신의 뜻을 거스리는 자들의 행위까지도 이용하석서 당신의 섭리를 실현해 나가신다. 구속사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구속사의 객체이신 인간을 경유하여 구속사를 전개하심으로써 그 절대 주권은 궁극적으로는 오직 하나님깨 귀속되나 그 전개 과정에서 인간의 동참을 허락하시는 것은 구속사 전개의 불변하는 원칙이다.
한편 재물(財物)이란 모든 인간에게 이 땅에서의 힘과 지위, 쾌락과 번영을 가장 확실히 보장해 주는 매체이다. 따라서 인간은 생명 다음으로 재물에 집착하게 마련이다(마 6:21).
따라서 성도가 이 땅에서 자신의 소유로 허락된 것 중에서 일부를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깨 바치는 행위 연보 곧 헌금(獻金)은 이미 전우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무엇이 새로 더 필요해서가 아니라 먼저는 그 자신과 그의 소유 전체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시인함을 행동으로 증명하기 위하여, 그리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역이 확정될 수 있도록 기여함으로써 결국 그 헌금을 바칠 자가 하나님의 구속사의 확장에 공천하는 기회를 갖게 하고자 요청되는 것이다. 즉 헌금이란 구속사의 객체인 인간이 구속사의 주체인 하나님에게 전적 순복과 감사를 표시하고 나아가 구속사에 동참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의 하나로서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이러한 헌금은 결국 구속사의 은총으로 구원을 입은 우리의 의무인 동시에 구속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훗날 천국에서 더욱 큰 상급을 얻을 공로를 쌓는 한 길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헌금의 구속사적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헌금에 인색하거나 아니면 헌금을 내는 행위와 액수만 인간 앞에 과시하고 참으로 중요한 것 곧 하나님에 대한 전적 헌신은 결여하고 있지는 않은지 늘 되돌아 보아야 한다.
외울 말씀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연보 준비를 위한 헌금 위원 파견 이유
1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2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예비하였다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
3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 말한 것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4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5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구제 연보의 바른 자세와 유익
6 ○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9 기록한 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0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11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12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13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14 또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의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15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본문 & 자료노트
보감-9:6 풍부한 신앙의 결실을 위한 8대 비결
1. 물가에 뿌리를 내림(시 1:3)
예수 안에 신앙의 뿌리를 내림
2. 울며 씨를 뿌림(시 126:5,6)
불가피한 고난도 소망으로 극복함
3. 좋은 땅이 됨(마 13:23)
겸손히 순종함으로 말씀을 받음
4. 썩어지는 밀알이 됨(요 12:24)
주를 위해 희생적으로 헌신함
5. 가지를 잘라냄(요 15:2)
죄된 행실을 깨끗하게 버림
6. 많이 심음(고후 9:6)
주를 위해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함
7. 썩지 않는 씨를 뿌림(갈 6:8)
육체가 아닌 성령을 따라 의를 행함
8. 추수 때까지 기다림(갈 6:9)
낙심하지 않고 인내하며 선을 행함
원어연구-9:7, 즐겨내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로아이레오마이'( )로서. 이것은 기본동사 '프로아이레오'( )의 중간태형이다. 여기서 '프로아이레오'는 '~앞에' '앞서서', '~전에'라는 뜻의 전치사 '프로'( )와 '잡다' 또는 '취하다'라는 뜻의 동사 '하이레오'( )의 합성어로서 '앞으로 가져 가다' 또는 '앞서서 취하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중간태형으로 쓰여 질때는 '자신이 자신을 위하여 앞서서 취하다' 또는 '자신이 자신을 위하여 미리 가져가다'는 뜻으로서 '선호하다'(prefer), '의도하다'(purpose)는 뜻이 된다.
따라서 본문에서 쓰인 '프로아이레오마이'는 스스로 어떤 일이 좋아서 자신을 위하여 먼저 의도하거나 선택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따라서 본문의 '즐겨내다'는 말의 의미는 마음속에서 고민하거나 내키지 않는 상태에서 나오는 행동이 아니라 마음속에 자신이 스스로 기뻐할 만한 어떤 의도나 목적이 있어서 기쁨이나 즐거움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취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태도로 하나님 앞에 헌금할 것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처럼 성도는 거리낌이나 억지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마음 자세를 가지고 헌금을 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또 실로 헌금이 그렇게 드려질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올바른 일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도표-9:1-5 원어로 살펴본 헌금의 개념
고후 8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9:1-5 헌금의 바른 관리법
왕하 12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9:1-15 올바른 연보의 자세
1. 미리 준비하였다가 드림(4,5절)
2. 자신의 역량껏 드림(6절)
3. 마음에 정한대로 드림(7절)
4.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않음(7절)
5. 즐거운 마음으로 드림(7절)
6.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며 드림(9절)
7. 너그러운 마음으로 드림(11절)
8. 다른 성도를 섬기는 마음으로 후하게 드림(13절)
9.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마음으로 드림(13절)
10.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드림(14,15절)
보감-9:10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에게 풍성하게 주어지는 것
딛 3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9:15 하나님께 감사하는 방법 10가지
대하 29장 자료노트 참조
주요 주제-9:14, 중보 기도
고후 1장 자료노트 참조
주요 주제-9:15, 은사의 이해
고전 12장 연구자료 참조
보감-9:6-11, 구제의 태도
룻 2장 자료노트 참조
주요주제-9:7, 하나님의 속성
그랜드 종합 교리 신론 참조
9:1-5 헌금 위원 파견 이유
본장은 전장과 마찬가지로 구제 연보와 관련된 교훈으로, 그 첫단락인 본문은 헌금 위원을 파견했음을 밝힌 전장 마지막 단락(16-24절)에 이어 헌금 위원 파견 이유를 밝히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본서를 쓰기 일 년 전에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위한 구제 연보를 자원했었다(고후 8:10). 그리고 바울은 이 사실을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에 자랑했고, 이에 자극을 받은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2절)들은 자신들도 구제 연보에 동참하기로 결정하여 매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바쳤다(고후 8:1-5). 그러나 정작 먼저 구제 연보를 모금하기 시작한 고린도 교회는 아직도 모금을 끝내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을 마게도냐 교인들이 본다면 고린도 교인들은 물론 그들을 자랑한 바울까지도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3,4절). 그래서 바울은 그가 고린도를 방문하기에 앞서 헌금 위원들을 미리 보내어 구제 연보 모금을 준비케 하고자 한 것이다(5절).
그러나 바울이 헌금 위원을 미리 파송한 것은 단순히 고린도 교회나 그가 부끄러움 당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바을이 헌금 위원을 파송한 데
에는 보다 궁극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헌금 위원들로 하여금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 연보에 적극 동참하도록 유도케 함으로써 결국 고린도 교인들의 자발성이 드러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여기에 고린도 교인들을 위한 바울의 자상한 배려가 돋보인다.
한편 우리는 이상의 본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즉 헌금이란 억지가 아닌 자발적인 마음으로 드릴 때 참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강압에 의해 하는 헌금은 진정한 의미의 헌금이라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에서 목회자들이 마치 외상값이나 세금을 독촉하듯 헌금을 강요하고, 성도들은 마지 못해 헌금하는 실태를 볼 때 안타잡기 그지 없다. 헌금이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청지기적 사명으로 드려져야 하며 결코 강요나 억지로 할 것이 아니다(7절).
9:1 성도를 섬기는 일에‥‥쓸 필요가 없나니. - 전장에서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의 헌신을 예로 들어 고린도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구제 연보 모금에 동참하도록 권 면하였다. 그리고 끝부분에서는 고린도의 교인들이 그곳에 파송된 형제들을 신실하게 대접하고 그들의 맡은 바 연보 모금 사역을 홀륭히 완수할 수 있도록 협조해 주기를 당부했다. 따라서 바울은 더 이상 연보의 원리나 필요성 같은 것에 대해서 쓰는 일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고린도 교회는 이미 일 년 전에 구제 연보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어느 교회보다도 먼저 모금을 시작했었다(고후 8:10). 다만 이 모금은 고린도 교회와 바울의 관계가 악화됨으로 지연되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새삼 구제 연보를 모금하는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쓸 필요를 못느낀 것이며, 여기서는 오직 그 구체 적인 준비를 지시하려는 것이다(3절 이하).
9:2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 바울이 연보 모금의 당위성이나 필요성애 대해서 더 이상 쓰지 않은 이유이다. 즉 비록 고린도 교회는 연보 모금을 지체하고는 있었지만 어느 교회보다도 먼저 그 일을 시작했었을 뿐만 아니라 연보 모금의 당위성이나 필요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이 모금을 지체한 것은 이미 밝힌 대로 그들과 바울과의 관계가 악화된 까닭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었으므로 고린도 교회는 다시 모금에 박차를 가할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이와 같이 뜻이 있는 교회에 새삼스럽게 연보에 대하여 쓰는 것은 그들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이요 일면 강요하는 것으로밖에 인식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바울은 그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쓰지 않겠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목회자로서의 세심한 배려를 보게 된다.
아가야. - 고린도를 수도로 하는 로마 주의 하나로 그리스 남부 지역을 통칭하는 말이다. 고후 1:1 주석 참조. 여기서는 '고린도 교회'를 비롯하여 아가야 지방에 있는 일단의 교회 공동체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 되었다.
일 년 전부터‥‥자랑하였는데. - 본절의 일 년이 구체적으로 어느 시점인지 규정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가 있다. 고후 8:20 주석 참조.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포함한 아가야 지역의 모든 교회들이 이미 일 년 전부터 예루살렘 교회의 구제를 위한 연보를 예비했다는 사실을 마게도냐의 교회 교인들에게 자랑삼아 이야기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예비하였다'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혹자는 이 말을 '성취하였다'라는 말로 이해하여 바울이 정직하지 못했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라고 주장한다(Rückert, De Wette). 즉 바울은 헌금의 효과적인 모금을 위해서 마게도냐의 교인들에게 이미 고린도 교회가 상당한 수준의 연보를 모금했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고린도 교회들에게는 마게도냐 교회의 경제적 난관을 극도로 과장하여(고후 8:1-5)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을 자극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마게도냐 교인들이 이제 고린도에 도착하면 그곳의 모금 실적과 수준이 바울이 자랑했던 것에 훨씬 미치지 못할 것이 탄로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바울 자신의 신용이 실추될 것을 우려하여 바울은 그들이 고린도에 도착하기 전에 모금을 끝내주기만을 간청했다는 것이다(4절). 이러한 해석에 대하여 어떤 이는 다소 불만을 표명하며 바울을 부정직한 '술수자'로 지적하는 데에 반대하는 한편,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지나친 애증을 가진 나머지 본의 아니게 사실을 과장하는 실수를 범했다고 변명하기도 한다(Windish). 그러나 문제는 바울이 교묘한 술수를 사용해서 양쪽 지역에서 효과적으로 연보를 모금했느냐 아니면 사실을 약간 과장한 실수였느냐하는 차원이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일 년 전예 이미 모금을 완료했다는 언질을 주지 않았다. 그가 마게도냐 교인들에게 자랑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열심과 모금에 대한 그들의 진지한 자세였다. 즉 바울이 고린도 교회가 '여비하였다'고 말한 것은 헌금을 완료해서 넘겨줄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여기서 '여비'란 일을 실행할 열심, 마음의 자세를 의 미 함은 거른할 여지도 없는 것이 다(Hodge, Morris). 사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열의를 가지고서 연보에 열중해 주기를 원했었고(고후 8:10,11) 그들의 이러한 열심을 마게도냐 교인들에게 하나의 모범으로 보여 주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이러한 바울의 말에 자극을 받아 풍성한 연보를 바친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고린도 교회는 내부에 문제가 발생하여 모금 사역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했었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해결된 현 상태에서 고린도 교회는 이전에 가졌던 자발성과 열의를 회복하고 모금 사역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가야 지역에 대한 바울의 자랑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 - 여기서 '격동시켰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레디센'( )은 동기가 좋든 나쁘든 다른 사람을 '자극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좋은 의미로 사용되어 선한 경겡 의식을 조장했다는 의미이다. 즉 고린도 교회가 시작한 구제 연보 모금 사업의 소식이 각지에 전파되어 다른 지역의 교회들이 이 사업에 적극 동참케 되었음을 가리킨다.
9:3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 본절의 '이 형제들'은 마게도냐에서 사절단으로 파견된 디도와 다른 두 형제를 일컫는다. 그리고 '보낸 것은'이라는 표현은 '서신형 과거시제'이다. 고후 8:17 주석 참조. 즉 바울이 본서를 기록할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사절단의 파송은 실시되지 않았으나 고린도 교회가 이 편지를 받아 읽을 시점에서 본다면 사절단의 파송이 이미 완료되었을 것이므로 과거시제를 사용한 것이다.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 바울이 사절단을 파송한 이유가 고린도 교회에 대한 거짓된 자랑이 폭로되는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지적하였다. 오히려 바울은 애초에 열심을 가지고 모금 사업에 주력했던 고린도 교회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선한 열매를 힌기를 독려하고자 했다. 그래서 바울은 사절단을 파송하여 일시적으로 침체되었던 모금 사업을 다시 펴고 고린도 교회를 격려하고 권면하려 했던 것이다.
9:4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 본절의 '마게도냐인들'과 앞절의 '사절단'을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이들은 추후 바울과 함께 동행하며 고린도에 갈 자들이다. 바울과 동행할 마게도냐인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알려진 것은 없다(행 17:14,15). 그러나 바울이 한 도시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에는 그 도시의 사람들이 바울을 수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로 여겨졌음을 보건대 본절의 마게도냐인들도 평범한 수행원의 자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믿던 것. - 바울ㄹ이 개인적으로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가졌던 확신 뿐 아니라 바울의 자랑으로 고린도 교회의 열심을 자각하게 된 마게도냐 성도들의 확신까지도 포함하는 말이다.
9:5 약속한 연보‥‥참 연보. - '약속한 연보'는 일 년 전에 고린도 교회가 서약한 연보를 가리키며, '참 연보'는 이제 약속한 그것을 자발적으로 성취했을 때 그 헌금이 진실된 것으로 여겨질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개역 성경에서 '연보'로 번역된 헬라어 '율로기아'( )는 본래 '축복'(Blessing), '어떤 훌륭한 은사', '찬양' 등의 의미를 가진다. 특별히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축복'의 의미로 다소 축소시켜 사용하고 있는데(롬 15:29) 하나님에 의해서 유발된 경우와 인간들에 의해서 주어진 실제적이 유익을 지칭하는 경우에 모두 공통적으로 사용되었다. 본절에서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 끼친 '실제적 도움'을 나타내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연보'를 '축복'이라고 표현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연보는 받는 자는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바치는 자에게도 큰 축복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잠 11:25). 둘째, 타인을 위해서 자기의 재물을 바치는 행위 자체가 곧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영어 개역 성경(RSV)은 '축복'을 '선물'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해서는 본장 자료노트, '원어로 살펴본 헌금의 개념'을 보다 참조하라.
억지가 아니니라. - 헬라어 원어로 하면 '메 호스 플레오렉시안'( )이다. 여기서 '억지'에 해당하는 '플레오넥시아'( )는 직역하면 '탐심'이다. 이 단어는 바울의 다른 서신들에서 '탐욕'(롬 1:29), '우상 숭배'(골 3:5) 등의 의미로 나타나기도 했는데, 그 문자적인 의미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더 맡이 소유하기를 원한다'이다. 이렇게 본다면 연보는 탐욕으로서가 아니라(not as of covetousness), 즉 더 많이 얻으려는 욕심에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희생의 동기에서 바쳐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9:7-15 구제 연보의 바른 자세와 유익
본문은 고후 8:1에서부터 계속적으로 언급해 온 구제 연보에 관한 권면의 결론 부분으로, 바을은 석기서 구제 연보의 올바른 자세를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자발적인 구제 연보가 어떠한 유익을 가져다 주는 지를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결국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연보의 올바른 자세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6-9절). 이를 보면 바울은 을바른 연보의 자세를 ①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② 인색함이 없이, ③ 즐겁게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7절). 그리고 바울은 이와 같은 연보의 자세를 고린도 교인들이 모두 견지할 수 있도록 '파종의 비유'를 들고(16절). 또한 시 112:9을 인용하고 있다(9절). 그 가운데 '파종의 비유'의 요지는 인색함이 없이 자발적으로 바친 연보는 하나님의 축복을 유발시켜 연보를 바친 사람으로 하여금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시 112:9의 인용의 요지는 자발적인 선형은 결코 잊혀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파종의 비유'나 시 112:9의 인용은 다같이 자발적이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금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겠다.
다음으로 자발적인 구제 연보가 가져다 주는 유익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다(10-15절). 즉 바울은 구제 연보의 유익을 다음 세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축복을 유발시켜 더 큰 봉사의 여건과 그에 합당한 보상까지 받게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형제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넘치는 감사를 지닐 수 있게 해주며 고린도 교회를 위해 기도하게 하는 계기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 사이에 있던 반목을 깨뜨리고 형제애와 참된 화해를 이루어 온전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이루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헌금을 인색함이나 억지로 해서는 안되며 자발적으로 즐거이 바쳐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축복과 보상이 성도들의 헌금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며 그것은 헌금의 결과임을 명심하고 항상 기쁨과 진실함으로 헌금을 해야 할 것이다(름 12:8).
9:6 이것이. - 대명사 '이것'(투토 데)이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대상이 불확실하다. 이러한 용법은 바울이 중요한 교리를 밝히고자 할 때 자주 사용하는 것으로(갈 3:17; 살전 4:15) 본절에서는 연보의 일반적인 원리와 원칙, 축복의 기본 원리 등을 제시하는 도입구로 사용되었다.
적게 심는 자는‥‥많이 거둔다. - 자발적이고 회생적인 연보에 대한 보상을 강조하기 위한 인용구로 본절의 정확한 병행 구절은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잠 11:24,25과 마태복음 13장의 씨뿌리는 비유, 눅 6:38; 갈 6:7등이 본절과 유사한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이 '연보'를 '파종'에 비유한 것은 주목해야 할 일이다. 이는 파종하는 농부와 연보하는 성도가 서로 동일한 위치에 놓여 있음을 말한다. 농부가 파종한 거에서 싹이 나고 열매가 맺혀 농부의 삶을 윤택하게 하듯이 자발적으로 바쳐진 연보는 하나님의 축복을 유발시켜 그 사람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본절에 나타난 수량 부사 '적게'와 '많이'는 양적인 의미가 아닌 질적 의미를 내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농부가 밭에 뿌린 씨를 아까워하지 않듯이 연보를 바치는 사람도 '물질'이 자기에게서 나가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축복은 진정 그에게 임하는 것이다. 결국 이는 마음의 자세 곧 '인색함'과 '관대함'의 차이로 귀결된다. 다시 말하자면 기독교인들의 헌금은 철저하게 몰아성(沒我性)과 이타성(利他性)을 가지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이러한 교훈을 주시는 한편, 자발적인 희생에는 적절한 보상이 따른다는 사실을 약속하셨다(눅 6:38).
9:7 인색함. - '인색함'의 사전적 의미는 '타인에게 베풀기를 꺼림'이다. 그런데 '인색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뤼페스'( )는 '근심'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특별히 경제적 손실로 인한 근심을 지칭한다. 여기서는 연보를 억지로 하고는 돈이 아쉬워서 슬퍼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여튼 성도들이 간혹 헌금에' 대해서 인색해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이유를 분석해 보면 첫째는 헌금의 동기가 자의적이지 못하고, 둘째는 내적인 결단, 즉 신앙심의 발현으로서 헌금이 바쳐지지 못하고, 셋째는 타인을 의식한 '과시적 성격'의 헌금 약속이 오히려 과중한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헌금은 그것을 바치는 사람의 내적 결단과 자발적인 희생에서 발현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 본절은 잠 22:9의 인용구이다. 바울은 70인역(LXX) 구약 성경을 보고 본절을 인용하였는데 한글 개역 성경은 히브리어 성서의 본문을 번역하여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라고 표현하였다. 본절의 의미는 유대교적, 구약적 차원에서 이해할 때 제대로 이해된다. 헌금의 액수를 의무적으로 제정했던 구약 시대에는(말 3:8-10) 그만큼 구속력과 강제성이 부여되어 '즐겨 내는' 경우보다는 헌금을 형식적인 '의무 수행'으로 드리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잠언 기자는 이런 식의 형식적인 헌금을 우려하여 '즐거이' 바칠 것을 독려하였는 바, 사도 바울 또한 그 말씀에 근거하여 연보하는 올바른 자세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9:8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 븐절은 하나님께 즐겨내는 자가 받을 축복에 대한 언급으로 7절을 보충 설명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넉넉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우타르케이안'( )은 빌 4:11에 나타나는 '아우타르케스'(자족)와 동족 형용사로서 당시 헬라지역에 유포되어 있던 스토아 철학에서 중요시되던 개념이다. 즉 스토아 철학의 견유학파(the Cynics)는 우주 만물은 자연의 이법(理法)에 따라서 움직여 지고 인간의 운명 또한 개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숙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아우타르케이아'(충족, 만족)라는 용어를 채택하여 주어진 것 이상을 욕심내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라는 교훈을 하였던 것이다(Seneca).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스토아 철학에서 통용되던 용어를 차용하여 어떤 뜻을 나타내려 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바울이 말한 '만족'은 운명에 순응하는 내적인 자기 만족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하겠다. 왜냐하면 바울은 본절에서 실제로 기독교인들이 얻게 되는 외적인 풍성함에 대해서 역설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축복은 곧 하나님의 축복과 다름 없으며 그의 은혜의 결과임에 틀림이 없다(딤전 6:6). 그러나 이러한 물질적이고 현세적 축복을 극도로 과장하여 하나님께서 더 이상 원할 것이 없도록 충분한 만족을 주신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Grotius, Meyer) 다소 지나치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성도들에게 보장된 만족은 곧 본절 후반부의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와 긴밀하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바울과 스토아 철학자들의 용어 사용의 차이는 '만족', '충족'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외적 축복이 냐 아니면 우주의 법칙에 순응하며 살고자 하는 인간의 내적인 자세냐 하는 데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바울이 말하고자 한 바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즉 기독교인들은 자기 내부에서 발현되는 초연한 자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받아 만족하고 자족하게 되는 것이므로 그는 항상 지속적으로 선한 사역을 모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9:9 저가 흩어‥‥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 본절은 구약의 시편 112:9의 인용구로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며 하나님께 즐거이 바치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긍정적인 결과에 대해서 중거한다. 본절에서 바울이 인용하여 증거하는 바 '의'(디카이오쉬네)의 해석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제기되었다. 먼저 '의'를 '종교적인 선행', '자선' 등의 의미와 동일시하여 본절의 '의'를 마 6:1에 언급된 '의'와 같은 개념으로 파악하는 견해이다(LietBmann). 이 견해에 의하면 기도, 구제, 금식 등의 선행에 '연보'도 포함시켜서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 '선행'을 본절의 '의'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본절의 '의'를 특수한 법적 의미로 해석하여 '의롭다고 칭함받은' 성도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행위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려는 견해도 있다(Barrett). 이 경우는 '선행'을 통해서도 의롭다 함을 받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입장을 의식하고 이를 반박하기 위한 의도에서 제기된 것이라 하겠다. 한편 이러한 마찰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의'를 단순히 '도덕적인 우월성을 재고시키는 함축적 개념'으로 확대시기는 견해도 나타났는데 이 세 번째 의견이 무리가 없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Hodge). 따라서 여기서 '의'가 구원의 조건인가, 결과인가 하는 '구원론'의 해답을 얻으려는 시도는 불필요하고, 경건한 성도들의 자발적인 선행들은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는 말씀 자체의 진의에 주목하는 것이 유익하다 하겠다(잠 19:17).
9:10 심는 자에게‥‥더하게 하시리니. - 6절에 나타났던 파종과 연보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전개되면서 일면 발전하여 풍성하게 뿌린 자에 대한 긍정적 결과가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문장 말미의 동사의 시제에 주목해야 한다. '미래형'으로 기술된 본절은 장차 그렇게 될 것이라는 기원, 바람의 뜻으로 풀이 되어서는 안된다. 바울은 여기서 '소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신념에 가득찬 확신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파종하는 농부에게 파종할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듯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성도에겐 더 크게 봉사할 수 있는 여건뿐만 아니라 그에 합당한 보상까지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을 바울은 여기서 확실하게 천명한 것이다. 한편 여기서 '의의 열매'에 대해서는 ① 선행과 봉사에 대한 마땅한 보상으로도, ② 더 큰 선행과 봉사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내리시는 하나님의 공급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해석은 본질상 동일한 의미이다. 왜냐하면 선행에 대한 보상은 그 선행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Hodge).
9:11 모든 일에 부요하여. - 본절에서 '부요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플루티조메노이'( )는 '풍부하게 하다'라는 뜻의 동사 '플루티조'( )의 현재 수동태 분사이다. 문법적으로 보면 '부요하여'라는 표현에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최근의 주석 가들은 분사형의 불규칙한 사용법을 제시하여(골 2:2; 3:16) 이 용어를 미래형으로 해석하고 있다. 더욱이 10절 후반부와의 연속성을 고려해 보면 본절의 미래적 성격이 부각된다. 즉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에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므로 그들이 풍성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굳이 이 단어를 미래형으로 해석하려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계속적인 은혜'를 나타내고자 함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가 경제적으로 부한 상태에서 저절로 연보를 바치게 된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만일 고린도 교회가 아낌없이 바친다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풍성하게 갚아주시리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 본절을 미래형으로 보려는 학자들의 의도인 것이다.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저희'는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우리'는 바울과 디도를 비롯한 사역자들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본절은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에 의해 전달된 고린도 교회의 풍성한 연보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될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공동번역은 본 구절을 '우리를 통해서 그 선물이 전달될 때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라고 번역했다. 실로 바울의 연보 모금 사업은 고린도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께 헌신하고 형제를 위해 봉사하는 기회를 부여함은 물론 그것을 수납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로 하여금 풍성한 은혜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게 함으로써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었다.
9:12 이 봉사의 직무가‥‥넘쳤느니라. - 본절에서부터 본장의 마지막 절까지에는 고린도 교회가 보여줄 풍성한 연보가 끼치게 될 매우 고무적인 결과들이 기술되어 있다. 바울은 먼저 앞절(11절)을 보충 설명하는 의미에서 본절을 기록하였다. 즉 고린도 교회의 연보하는 희생과 봉사가 예루살렘의 성도들의 부족분을 보충해 주고, 연보하는 자신들을 풍요하게 할 뿐 아니라 결국에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결과를 낳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성도들의 부족을 공급하여 주는 행위를 '봉사'라고 표현하였다. '봉사'(레이투르기아)란 고대 그리스의 주요 도시들에서 비교적 부유한 중산층들에 의해 이루어진 자발적인 공공 사업에서 유래된 용어인데, 신약에서는 이에 종교적 성격을 부여하여 예배나 제사 혹은 제사장 직분 등에 적용하여 그 의미를 통용하기도 하였다(눅 1:23; 히 8:6). 그래서 인지 혹자는 '봉사'라는 말을 성만찬 의식에서 행해지는 행위들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Richardson), 어쨌든 여기서 주목할 것은 '봉사'는 특정한 의무가 수반된 강제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주관하고 있는 모금 사업에 결단코 강제성이 부여되지 않았음을 강조하려 한 듯하다. 고린도의 성도들 역시 본래 모금을 시작할 때 세금을 납부하는 것과 같이 모금 사업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모금 사역을 힐난하고 비난하는 일단의 무리들에게 다시 한번 일격을 가하면서 고린도 교회가 보여 줄 '자발적인 결단', '자발적인 봉사 행위'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봉사의 직무는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빈곤을 구제하는 수단으로서 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자발적인 헌신의 행위로도 이해되어질 수 있다(빌 2:30).
9:13 이 직무로‥‥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 본절에는 고린도 교회의 구제 연보를 수납할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이유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예루살렘 교회의 감사는 단순히 '돈을 받아 궁핍함이 해결되었다'는 이유에서 찾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예루살렘 교회는 고린도 교회가 보여줄 봉사의 직무를 통해서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첫째는 이방인들로 구성된 고린도 교회가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고린도 교회의 풍성한 연보를 통해서 고린도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의 영적인 영적인 교제가 싹트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같이 '모금 사업'이라는 외면적인 형식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소유한 신앙의 모습들과 그들이 보여 준 아낌없고 진실된 성도의 교제를 깨달아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 - 본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에피 테 휘포타게 테스 호몰로기아스 휘몬'( )이다. 문법적으로 보면, '에피'( )는 이유를 나타내는 전치사, 휘포타게( )는 순종을 뜻하는 명사, 테스( )는 정관사, 호몰로기아스( )는 고백을 뜻하는 명사, 휘몬( )은 2인칭 소유격, 즉 '너희의'라는 뜻이 된다. 이를 전체적으로 풀어보면 '너희들의 고백을 따라 순종한 것 때문에'가 된다(Hodge). 공동 번역은 이를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라고 옮겨 놓았다. 이러한 표현들은 결국 신앙 고백과 행위가 일치된다는 의미를 공통적으로 함축한다. 신앙 고백에 대한 순종이든지, 믿음을 고백함으로써 보여 준 순종이든지 중요한 것은 지금 고린도 교회는 자기들이 믿는 신앙을 그대로 실천할 것을 바울이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절에서는 이점이 우선적으로 강조되어야 한다. 사실 이방인 교회 공동체가 예루살렘의 궁핍한 성도들을 위해서 구제한 일은 자발적인 결단의 열매였지만 근원적으로 본다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의미를 수행한 것으로 간주되어진다. 이는 곧 고린도 교회의 실천 행위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명령에 대한 순종 행위로 이해되어 질 수 있다는 말이다. 어쨌든 예루살렘 교회는 고린도 교회가 보내 준 연보를 수납하면서 고린도 교회의 신앙의 일체- 믿음대로, 즉 고백한 대로 실행하는 실천하는 신앙-를 인지하고 그들을 인정하는 동시에 이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는 것이 본절의 요지이다.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 - 본 구절 역시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이유의 하나로써 제시되었다. 초두의 '저희'는 예루살렘의 성도를 가리킨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정체가 불분명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지칭하는데 이는 고린도 교회뿐 아니라 모든 교회 공동체의 봉사가 특정 대상에 국한되지 않음을 시사해 준다. 그런데 본문의 맥락에서는 그 범위를 애루살렘 교회에 한정하는 견해(Barrett)도 일면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너희의 후한 연보'는 고린도 교회가 보여 줄 열성을 나타내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없다. 그러나 '후한 연보'로 번역 된 원어 '하플로테티 테스 코이노니아( )에 대해서는 의미상의 이견이 제시되었다. 이 구절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은 '후한'으로 번역된 '하플로테스'를 '진심'으로 바꾸고 '연보'로 번역된 '코이노니아'를 '교제'로 바꾸어 직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Hodge, Lenski). 이처럼 '연보'를 '교제'로 해석하려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개인의 재산을 함께 나눔으로써 돋아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영적인 교제를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만일 '후한 연보'를 '진실한 교제'로 표현한다면 성도들 상호간의 사귐, 인종이나 지위, 신분, 성별, 지역을 초월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단일성(unity, 고전 12:12-27) -교제에 대한 깊은 인식-이 확연하게 나타날 것이다. 아무튼 고린도 교회의 풍성한 연보를 수납할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의 신령한 교제를 자각하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바울 역시도 예루살렘 교회가 고린도 교회의 연보를 통해 그들의 진실된 교제를 자각하고 이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를 기대하였고 또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9:14 또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 본절은 13절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고린도 교회가 보여줄 봉사의 직무는 실로 몇 가지의 위대한 열매를 맺을 것인데 그중 두 가지가 앞절에(13절) 언급되었고 본절에 다른 두 가지가 제시된다. 따라서 13절과 14절을 묶어서 하나로 본다면 본구절은 고린도 교회가 보여 줄 봉사의 효과 중 세 번째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하여튼 본구절의 요지는 예루살렘 교회가 은혜를 입을 자로서 은혜를 끼친 고린도 교회를 위해 열심으로 기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 교회의 물질적 도움을 이방 교회를 위해 기도함으로써 영적으로 보답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 교회는 자연히 민족과 문화, 역사 등은 서로 다르지만 한 하나님과 한 구주를 섬기는 한 공동체라는 의식을 갖게 될 것이고,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들 사이의 좋지 않은 감정(행 15:1-21)들은 해소되어 교회의 성장을 한층 빨라지게 할 것이다. 이것이 구제 연보를 통해 바울이 얻고자 한 결과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 고린도 교회가 보여줄 봉사의 직무가 맺을 네 가지 결실 중 마지막 요소가 제시된다. 즉 얘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봉사의 직무로 인하여 그들을 만나게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갈망할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는 예루살렘 교회가 단순히 경제적 도움을 받은 입장에서 '은인'을 만나고 싶어할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구제 연보를 할 만큼 믿음에 부요해지도륵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 때문에 예루살렘 성도들이 고린도의 성도들과 교제하기를 원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는 순수한 유대인들의 공동체요, 고린도 교회는 반대로 이방인들의 교회였다는 정황을 고려컨대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고린도의 성도들을 만나기를 고대할 것이라는 사실은 실로 충격이 아닐 수가 없다. 이는 오로지 교회의 단일성과 여러 지역 교회들의 형제애(brorthership)를 자각함으로써만 나타날 수 있는 결과이다.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 살아가듯이 고린도 교회 또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나간다. 이러한 사실의 자각이 그들을 하나로 묶는 촉매로 작용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지역에 위치한 교회 공동체 간의 긴밀한 유대와 영적인 교제야말로 교회의 하나됨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는 사실을 제대로 증명해 주는 본질적 요소라 할 수 있겠다.
9:15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 바울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사를 찬양하며 본장을 마무리한다. 여기서 바울이 '은사'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나타내고자 한 바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하여 논란이 제기되었다. 이 논란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데 하나는 '은사'를 본장의 문맥에 한정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은사'를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으로 보는 것이다. 전자의 견해는 본문의 문맥을 분석하여 '은사'를 고린도 교회의 봉사의 직무, 그로 인한 축복의 결과,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와의 긴밀한 유대 등으로 해석한다(Lenski, Calvin, faster). 후자의 견해는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사'는 너무나 과분한 표현이어서 고린도 교회의 활동에 적용하기에 부적당하다는 데 근거하여 '은사'를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자체에 국한시킨다(Hodge, Morris, Martin). 이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고후 8:9; 엡 5:1 등의 구절을 예로 들어 '말할 수 없는 은사'는 성도들 간의 작은 사랑과 교제에 상반되는 개념,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하신 사랑의 은사임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여기서 어느 견해가 옳다고 단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전자는 전후 문맥을 고려한 주장이고, 후자는 바을 서신의 일반적인 용법에 근거한 의견이므로 양자의 견해가 모두 일면 타당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양자의 견해를 종합하여 절충하려는 일련의 노력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Barrett). 한편 9장을 마무리 하는 대목에서 지적할 것은 후반부에 기술된 내용들이 당시의 시제를 기준으로 한다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적 사건들이라는 점이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를 칭찬했던 것이며(2절), 또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보여 줄 반응을 확신있는 어조로 설명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13,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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