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장 문안 인사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에 대한 감사와 칭찬
구속사적 개관:
성경 전체에는 구속의 주체인 하나님과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이었으나 타락함으로 인하여 구속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게 된 인간 그리고 이러한 인간을 구원키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구속 사역을 수행하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구원받게 되는 제반 과정, 또한 구원받은 자의 모임인 교회와 관계된 일 및 구속사의 종점인 종말에 되어질 일 등에 대한 다양한 주제가 분산되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신약 서신서는 초대 교회 당시 여러 복잡한 사정들과 관련된 사안들이 정리되고 해명되는 과정을 통하여 이러한 주제들이 보다 분명하게 표면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바, 본서 역시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는 가운데 특히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않으며 성실한 삶을 살 것에 대한 권면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 그리고 재림의 시기에 대한 교훈에 많은 강조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본서는 본서에 이어 기록되었으며 본서와 유사한 주제를 담고 있는 살후와 더불어 재림 서신이라고도 불리워지고 있다.
이러한 본서는 신약 서신서의 일반적 형식인 문안 인사와(1:1) 끝맺는 말(5:25-28)과 그 사이에 본 서신의 본론의 전반부로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칭찬과 격려(1:2-3:13), 그리고 본론의 후반부로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당면 문제였던 성결한 삶과 장차 올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 문제에 관한 기록(4:1-5:24)이 나오고 있다.
따라서 본장은 문안 인사(1:1)와 더불어 본론 전반부(1:2-3:13)의 한 부분을 이루는 내용으로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견지하고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과(1:2-4)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칭찬의 내용으로(1:5-10) 구성 되어 있다. 한편 일반적인 서신서의 서론적 성격을 띠고 있는 시작하는 말에는 발신자와 수신자를 밝히고 사도권에 근거한 축도를 함으로써 문안 인사를 한 연후에 수신자의 긍정적 상황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부족한 측면에 대한 기도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1:2-4)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칭찬이(1:5-10) 기록된 본장의 1:2-10에서도 이러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 부분을 본서 전체의 도입부로도 생각할 수 있으나 이미 밝혔던 바와 같이 본서 본론의 전반부(1:2-3:13) 전체 주제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칭찬과 격려이므로 본장 2-10절을 본서 본론 전반부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것이 더 무난할 듯하다.
이러한 문맥 하에 있는 본장 각 부분이 갖는 구속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먼저, 문안 인사를 기록한 1절은 비록 그 내용은 짧으나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즉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구속사적 사역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사도 바울은 실루아노와 디모데와 더불어 이 일을 수행하고 있다는 공동체 의식과 그리스도 안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한 형제되었다는 지체(肢體) 의식을 갖고 있었음이 암시되어 있다. 또한 신적 축복인 은혜와 평강을 기원함으로써 교회에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행위보다는 신적 축복이라는 신본주의(神本主義)적인 바울의 성숙한 신앙 면모를 보여 준다. 따라서 본서는 본서의 궁극적인 독자인 오늘날의 우리에게 이르기까지 사도와 전도자와 역사상 여러 교회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 안에서 하나의 동일한 공동 운명체를 형성한다는 구속사적 진리를 깨닫게 한다.
또한 이어지는 2-4절은 구속사의 역군으로 부름 받은 성도의 3대 덕목인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견지하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바, 이 부분에서도 성도들이 마땅히 지향해야 할 미덕이 무엇이며 구속사의 주체이신 하나님과 일꾼으로 부름 받은 성도들 상호간에 기도의 교통이 있어야 함을 암시하고 궁극적으로 이러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에 근거함을 알 수 있게 한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칭찬을 기록한 5-10절은 구속사의 원리인 복음이 단순히 말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확신을 가지고 감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는 것과, 더불어 믿는 자는 구속사를 종결짓는 마지막 날에 임하실 그리스도의 심판 때에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건짐을 받을 것이므로 소망 가운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람직한 삶을 살아야 함을 깨닫게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시기적으로 보다 가까운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날 성도 역시 그리스도와 신앙의 선각자들을 본받는 자가 될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 스스로 다른 성도들에게 모범이 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신앙의 성숙함을 지녀야 한다.
본문 & 자료노트
원어연구-1:5, 확신하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플레로포리아'( )로서 '플레레스'( )와 동사형인 '포레오'( )의 합성어 '플레로포레오'( )에서 유래한 말이다.
먼저 '플레레스'는 본래 배에 짐을 가득 실은 상태 혹은 컵에 물을 가득 채운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서 '가득찬'(full), '충만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동사 '포레오'는 '운반하다'(막 2:3), '가져오다'(마 14:11), '참다'(롬 9:22) 등의 뜻을 가진 페로'( )에서 유래한 말로 '지니다', '입다'라는 뜻을 가진다. 그러므로 '플레로포레오'는 문자적으로 '넉넉하게 가져오다'. '가득히 지니다'. '충만하게 입고 있다'라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 단어가 수동태가 되면 '어떤 사실의 확실성을 충분한 자료에 근거하여 이해시키다'(눅 1:1) '어떤 인격체에 대해 분명히 확신케 하다'라는 뜻이 된다. 한편 빌릴보서 1장 6절에서도 '확신하다'(개역 성경)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에 쓰인 헬라어는 '페포이도스'( )이다. 이것은 상대의 설득에 의해, 또는 상대의 권위에 의해 어떤 사실을 인정하고 확신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 반면에 본문의 '플로레포리아'는 그것이 내적이든 외적이든 어떤 증거들로 인하여 확신하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본문은 성도들이 구체적인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은 성령께서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큰 능력으로 증거를 보여 주시기 때문임을 말하고 있다.
도표 -1:3-10 데살로니가 교회의 모범된 신앙
1. 믿음의 활동이 뛰어남(3절) 2. 사랑의 수고가 끊이지 않음(3절)
3. 고난 중에도 소망을 가지고 견딤(3절) 4. 환난 가운데서도 주를 본받음(6절)
5. 다른 자에게 믿음의 본을 보임(7절) 6. 우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옴(9절)
7.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생활함(10절)
문안인사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
2 ○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忍耐)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교회에 대한 칭찬
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9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 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1:1 문안 인사
시기적으로 바울이 쓴 첫 서신인 본서는 당시 그리스 ․ 로마 세계에 유행하던 서신 양식과 바울이 후에 기록한 다른 서신 양식과 동일하게 발신자 ․ 수신자 ․ 축복의 기원이 포함된 문안 인사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는 단 한절로 끝남으로써 바울의 다른 서신서보다는 비교적 간략하다는 특성을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 한절에 발신자로서 자신과 더불어 함께 동역하던 다른 두 사람, 즉 실루아노와 디모데의 이름도 적시(摘示)하고 있으며 문안의 근거를 성부와 성자에게 두고, 은혜라는 헬라식 인사 방법과 평강이란 히브리식 인사 방법을 모두 사용하는 등 전형적인 바울 서신의 인사말의 형태를 그대로 취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서신서들과는 달리(롬 1:1; 고전 1:1; 갈 1:1; 엡 1:1; 골 1:1)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는 자신의 사도직이 크게 의심당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에 대한 강조를 인사말에서는 생략하고 있다.
한편 본문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사도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동역자와 이름을 병기하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 의식과 겸손함을 본받아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된 자들을 문안하되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안하는 신앙 자세를 배울 수 있다.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 데살로니가에 편지를 보내는 발신자들의 명단이 서신의 초두에 기록되어 있다. 바울 서신의 대부분이 당시 헬라 세계에서 쓰이던 서신의 일반 형식과 마찬가지로 '발신자, 수신자, 의례적인 인사'라는 양식에 따라서 기록되었는데 본 어구는 그 '발신자'예 해당된다 하겠다. 그러나 본서가 이 세 사람의 공동 저작이란 의미는 아니다. 본서는 순수하게 바울의 저작이나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잘 알고 있었던 두 사람의 동역자의 이름을 거론하여 수신자와 더욱 친밀해지려는 의도에서 이 두 사람의 이름을 첨부한 것이다. 한편 바울은 빌립보서를 제외한 그의 다른 모든 서신들에서 와는 달리 자기 이름 앞에 '사도'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간결하게 발신인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대개의 경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면서 자기의 사도직을 밝히곤 하였으나(름 1:1; 갈 1:1) 여기서 '사도'라는 직명을 생략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바울이 사도권을 주장하여 자신을 변호할 필요가 전혀 없을 정도로 이미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는 바울의 사도적 권위가 인정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같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고린도나 갈라디아 교회와는 달리 바울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음을 알 수 있다.
실루아노. - 그는 행 15:22; 17:10에 나오는 실라와 동일 인물이다. '실라'는 히브리식(式) 발음이고, '실루아노'는 로마식 발음인데 누가는 전자의 이름을(행 16:19,25,29) 바울은 후자의 이름을 사용하곤 하였다(고후 1:19; 살후 1:1). 그는 2차 전도 여행에서 요한 마가의 수행문제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의견이 대립되어 각자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되었을 때 바나바를 대신하여 바울의 중요한 협력자로서 활약하였다(행 17:4-10). 한편 그의 이름이 디모데보다 앞서 나오는 것은 연장자였을 뿐 아니라 먼저 바울 전도단에 합류한 선배였기 때문인 듯하다.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행 16:37) 유대인으로서(행 16:20) 후에 베드로와 더불어 일한적도 있는(벧전 5:12) 초대 교회의 주요 인물이었다. 실라에 대해서는 행 17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디모데. - 그는 바울의 1차 전도여행 시에 회심하여(행 14:6) 2차 전도여행 때부터 바울의 신뢰를 받는 동역자로서 헌신하였다(행 19:22; 고전 4:17). 바울은 공적으로는 그를 '형제'(고후 1:1; 몬 1:1)로, 사적으로는 '아들'(딤전 1:2; 딤후 1:2)로 부르며 갈라디아서, 에베소서를 제외한 모든 바을 서신에 그의 이름을 언급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특히 바울의 부재시에는 바울 대신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보살피기도 하였다(행 17:14). 즉 바울은 디모데를 데살로니가에 파송하여 목회를 일임시키기도 하였는데 본 서신은 이곳에서 목회한 디모데의 목회 보고서에 대한 일종의 회답 형식으로 기록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딤후 1장 연구자료. '디모데' 참조.
하나님 아버지와. - 여기서부터 '데살로니가인의 교회'까지는 수신자를 밝히는 말이다. 여기서 바울은 먼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칭하는 '부성(fatherhood)'개념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런 사상은 구약 전반에 걸쳐서 나타났는데(출 4:22; 호 11:1)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강한 선민의식(選民意識)을 그 근간으로 하여 이러한 사상을 계속 유지시켜 왔다(창 17:1-22). 이러한 구약적 배경 하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 혈통적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부성론을 가르치셨는데(마 5:16) 이처럼 구약과 신약에서 사용된 '하나님 아버지'의 개념은 본질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부성이 주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사랑하고 보호하심에 치중되어 표현되는(렘 31:9) 반면,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성령으로 거듭나 양자(養子)가 된 모든 믿는 자들의 아버지 되심을(롬 8:15) 뜻하는 의미로 확대되어 사용되는 것이다. 이처럼 신약에서는 '혈통'이 아닌 '믿음'이 강조되고 있는데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이제 더 이상 영적 이방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천명코자 하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 - '주'(퀴리오스)라는 호칭은 대체로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섭리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하는 경우에 쓰이는 용어인데 여기서는 예수를 '주'라 칭하고 있다. 이는 곧 예수가 하나님과 동격이시며 동일한 신성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주는 동시에(고후 13:13) 초대 교회가 예수께 대하여 가졌던 확고한 신앙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있어서 뿐 아니라(마 16:16) 예루살렘의 교회들도 예수를 가리켜 '주'라 고백하였던 것이다(요 20:28; 행 4:33). 이에 대해서는 요 13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예수'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히브리어 '여호수아'에서 유래되었고(마 1:21)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메시야'란 말의 헬라어이다. 이는 구약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인 왕과 제사장, 선지자가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런 의미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의 공적 이름(official name)임과 동시에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신앙 고백이 집약된 결정체적인 말이다. 따라서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칭호는(행 2:36) 선행하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표현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께 지고(至高)의 권위가 있음을 고백하는 한편(빌 2:9-11) 구원자로서의 예수를 고백하는 장엄한 찬양이라 할 수 있겠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노니. - ‘교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클레시아'( )는 '밖으로'(엑크)란 전치사와 '불러내다'(칼레오)란 동사의 합성어로서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의해 모인 집단을 의미한다. 즉 이는 당시 유대교의 모임과는 구별되는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구원받은 자의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이 구절은 편지의 수신인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하는 축도문으로서 바울은 이러한 표현을 통하여서도 깊은 기독교적 진리를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원래 전자는 헬라인의 인사법이고 후자는 히브리인의 인사법이나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이란 표현으로 기독교적인 인사로 전이시켰다. 한편 '은혜'(카리스)라는 단어는 헬라 고전 문학에서 '총애', '호의'를 뜻하는데(Homer, od. xiii. 175) 바울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값없이 주어지는 속죄의 선물, 즉 하나님의 구원을 의미한다. 이와 아울러 '평강'(에이레네) 또한 단순히 전쟁이 없는 소극적 차원의 평화를 넘어서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 교제의 회복이라는 영적인 완전함, 영적인 번영(L. Morris)으로 풀이된다. 바울은 이러한 의미의 은혜와 평강을 언급함으로써 데살로니가 교회가 복음 위에서 굳건하게 성장해 나가기를 기원했던 것이다.
1:2-10 교회에 대한 바울의 감사와 칭찬
본서 본론(1:2-5:24)은 크게 두 부분으로 분리되는바 전반부(1:2-3:13)는 소위 역사적 부분으로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현재 상황에 대한 바울의 감사와 칭찬(1:2-10), 그리고 데살로니가 전도 당시에 대한 회고에 있어서 바울의 감사와 재방문에 대한 소망을 피력함과(2:1-20) 더불어, 디모데를 데살로니가에 파견함에 대한 내용들과(3:1-10) 바울의 중보 기도에(3:11-13)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후반부(4:1-5:24)는 소위 교훈적 부분으로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실천적인 교훈을 기술한다. 따라서 본론의 전반부를 시작하는 본문에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현재 신앙 상태에 대해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고(2-4절) 교회에 대해 칭찬하는(5-10절)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바울이 본서를 집필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배경이 있다. 그는 제 2차 전도여행시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교인들을 굳건하게 세울 겨를도 없이 그 즉시로 유대주의자들의 박해를 받아서 급히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행 17:5-10). 그 후 그는 베뢰아, 아덴, 고린도 등지를 다니면서 계속 전도하던 중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것은 정치 . 종교적 탄압 가운데서도 교회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3절). 이에 바울은 저들의 신앙을 격려하며, 재림을 대망(待望)하는 가운데 더욱 경건에 힘쓰도록 촉구하기 위해 본서를 쓴 것이다. 따라서 본문 가운데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앙 상태에 대해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함과 그들에 대한 칭찬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① 우리는 자신의 신앙으로 인하여 타인이 본을 받고 칭찬할 수 있도록 성숙한 신앙을 가져야 한다(빌 3:17). 이러한 신앙은 타인에게 영향을 미쳐 그들로 하여금 영적으로 각성케 하며(고후 9:2) 결국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기여케 한다.
② 죄인을 회개시키며 하나님을 경외케 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의 택하심에서 연유한다(4절). 그러므로 성도들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더욱 큰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로서의 최선을 다함으로써(3절)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요 15:16).
1: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 바울은 거의 모든 서신들을 감사로 시작하였다(롬 1:8; 빌 1:3-11). 그의 서신중에 분노와 질책의 뜻이 담겨진 갈라디아서를 제외하면 바울이 어느 교회 공동체를 대하든지 감사하기를 잊지 않고 또 독자들을 위해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을 발견케 된다. 본절에서도 '항상'이라는 부사를 사용하여 바울이 감사하는 생활을 멈추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감사는 근본적으로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덕행과 미덕으로 인한 것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적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권면을 받기도 했기 때문이다(살전 4:11; 5:14). 그럼에도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것은 현상적인 면에 구애 받지 않고 자기 자신과 데살로니가 교회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큰 소망을 두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물론 문맥의 전개 상황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가 맺은 일련의 열매들로 인해서 바울이 감사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의 감사가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게 대한 것이 아닌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그들의 훌륭한 생활로 인하여 감사받을 만한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여하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랑이나 자기만족을 내세울 수는 없는 일이다(Harken).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 이는 바울이 비록 데살로니가 교회와 거리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기도로 교통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바울의 전도가 결실을 맺으며 그의 서신이 힘을 지니는 것은 이와 같은 기도가 항상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 내적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위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를 공동번역은 '믿음의 활동'이라 표현했고 NIV는 'work produced by faith는 'work of faith'라 번역했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 관해서 기억하는 세 가지 미덕이며 성도가 지녀야 할 본질적 속성인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는 그의 서신 가운데 여러 번 강조되었다(름 5:2-5; 엡 1:15-18). 그 중에 본문에서는 첫째로 믿음의 역사가 제시되었다. 여기서 거론된 믿음의 역사를 나눠 보면 ① 복음의 전도 사역 ② 타인을 위한 선행으로 구분되는데 이는 자칫 바울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칭의론(롬 3:21-28)과 모순되는 듯한 인상을 풍겨준다. 왜냐하면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줄곧 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강조했기 때문이다(롬 4:4-6; 갈 2:1) 한편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는 행위가 결여된 믿음을 죽은 것이라 단정하였고(약 2:17) 급기야는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의 행동에 대 해서 바울과 야고보가 서로 상반되는 듯한 해석을 하기도 하였다(롬 4:2; 약 2:21). 그러나 바울과 야고보의 이러한 외면적 차이는 대립적 차원이 아닌 전체적인 통일성 속에서 용이하게 극복될 수 있다. 믿음과 행위는 서로 구별될 수는 있지만 분리될 수 없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정한 믿음은 결코 행위를 배제하지 않고 또 믿음이 결여된 행위란 존립할 수가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믿음에 의해서 당연히 나타나는 결과, 즉 신앙인으로서의 생명력을 충분히 입증하는 신앙의 열매를 여기서 요구하는 것이라 사료된다(약 2:14-26).
사랑의 수고와. - '수고'로 번역된 헬라어 '코포스'( )는 '엄청난 노력이 기울여진 고생'을 뜻한다. 즉 앞에 언급된 '역사'(에르곤)가 이미 완료된 행동을 의미하는 반면에 이 용어는 '계속해서 경주하는 노력'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용어는 대체로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고후 10:15)의 뜻으로 사용되어 영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 근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희생적 사랑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롬 5:8). 이로 볼 때 당시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그리스도의 희생을 본받아 스스로의 유익보다 타인과 교회를 위한 희생을 기쁘게 생각하는 성숙한 신앙을 가진 듯하다.
소망의 인내를. - 바울이 본절에서 말하는 소망이란 다름 아닌 역사적 종말에 이루어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다. 이러한 궁극적 소망은 현실적인 삶 속에 내포된 고난을 인내케 할 수 있는 힘을 주는데, 여기서 인내란 좁게 보면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유혹에 대한 인내일 수도 있고 넓게 보면 성도의 일생을 통하여 마귀와 대적하는 믿음의 용기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 중 넓은 의미의 믿음의 용기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이후에 있을 그리스도의 보상에 대한 확실한 소망에서 발현됨은 두말할 나위 없이 분명하다. 이러한 종말사상은 바울 신학의 한 지류를 형성하고 있으며(고전 15:52), 본서의 주제도 바로 재림에 대비해 성결한 삶을 살 것에 대한 것이기에 본서에서는 이와 관련된 종말 사상이 무게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이처럼 바울이 본서를 통하여 종말에 대한 소망과 현실의 윤리적 삶의 역동적 관계를 조화 있게 기술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한편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을 그리스도교의 본질적 삼요소(三要素)로 제시하면서 서신에 따라서 그 순서를 다르게 나열했는데(고전 13:13; 골 1:4,5) 이는 어느 한 요소를 비교적 우위에 두기 위함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세 가지 요소들은 상호 보완의 관계를 이루는 것이며 전체적인 통일성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즉 사도 바울은 본 구절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여러 서신 가운데서도 성도들이 자기 삶의 전 영역을 통해 믿음의 역사와(약 2:18), 사랑의 수고(계 2:4), 그리고 소망의 인내(롬 5:2-4)를 조화롭게 견지해 나가는 삶을 영위하도록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 종교개혁가 칼빈(Calvin)의 생(生)의 모토(Praesentia Dei)를 연상시키는 어구이다. 즉 성도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항상 신전의식(神前意識)을 가져야 함을 나타내는 이 표현은 매우 엄숙하고 조심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내면서도 '아버지'라고 호칭이 풍기는 '부성'(父性, Fatherhood)으로 인해 친근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한편 바울은 이와 유사하게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엔 크리스토)라는 표현 형식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와의 연대, 일치를 암시하기도 하였다. 엡 1장 자료 노트, '그리스도 안에서' 참조.
쉬지 않고(끊임 없이) 기억함이니. - 이러한 표현은 2절에 나오는 '항상‥‥감사하고 기도할 때'라는 표현과 더불어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바울의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을 보여 준다.
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 이 같은 문구는 구약시대에는 선민(選民)으로 부름 받았음을 자부했던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호칭하는 이름이었는데, 초대 교회에 전수되면서(행 2:29,37)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영적인 공동체를 명명하는 이름이 되었다(눅 8:19-21). 특별히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보낸 편지(살전, 살후)를 통해 '형제'라는 단어를 20회 이상 언급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묶여진 성도들의 유대를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전 후서에서 '형제'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데살로니가전 후서가 바울의 최초의 서신으로서 그의 사랑이 강조되어 나타났었다는 까닭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인종이나 혈통의 구분을 막론하고 이방인인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완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시키고자 하는 바울의 의도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 선행 문구와 본문을 통해 바울이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택하셨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택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클로겐'( )은 신약에 약 7회 정도 등장하며 대부분 바울에 의해서 인용이 되었는데(름 9:11; 11:5-7) 그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는 과정에서 몇 가지 이론(異論)들이 제기되었다. 즉 여기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과연 태초의 예정, 즉 아담의 범죄 이전에 하나님은 특정한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결정하셨다는 예정론(엡 1:4)과 동일한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지의 여부이다. 이에 대하여 본문의 택하심이란 ①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복음을 택한 사실(Ellicott), ② 하나님의 선택은 태초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했을 때 일어났다는 것(Airhart), ③ 이는 단순히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우수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Chrysostom). ④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훌륭한 행동들이 결국은 그들의 선택을 증명하게 되었을 것이라는(Harken) 해석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력한 주석가들은 이 견해들을 반박하면서 본문 역시 창세전에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선택론을 가리키는 표현이란 사실을 지지하였다(Calvin, Morris). 즉 본절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실제적인 행동들과 무관하게 초역사적으로, 그리고 역사 이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의하여 구원받았음을 목도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이 대목에서 바울의 '선택의 사상'이 처음으로 제시되었다는 점도 유의할 만하다. 사실 선택 사상은 구약에 그 기원을 가지는 바(신 4:37) 하나님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아 특별히 구별된 민족을 일컫는 용어였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그 선택의 대상과 범위가 개인화되면서 예수를 믿는 신자들의 구원문제와 관련되어 개별적으로 적용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참고적으로 바울의 선택 사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선택은 창세 전에 일어났다(엡 1:4,5).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 일어났기 때문에 불변의 효과를 지닐 뿐 아니라 그 어떠한 인간의 저항도 용납하지 않는다(롬 8:28-30; 고전 1:27,28). 또한 선택은 특정한 민족에게 국한되지 않으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단체로서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선택된다(름 11:20; 딤후 2:10). 마지막으로 선택의 궁극적 목적은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함이다. 따라서 선택에 대하여 인간들은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을 뿐 아니라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한다(엡 1:4-6).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그랜드 종합 교리의 '하나님의 예정' 관련 부분을 참조하라.
1:5 이는. - 앞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창세 전에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밝힌데 이어 본절에서는 자기가 그렇게 단언했던 이유를 몇 가지로 나누어 밝히기 위하여 '이는'(호티)이란 접속사를 사용하고 있다. 즉 그들이 선택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첫째,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열심으로 그들에게 전도한 것(5절), 둘째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성령의 기쁨으로 그 복음을 수용한 것이었다(6절).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을 따라 복음을 전했고 그들 또한 성령의 기쁨으로 복음을 받아들였던 것인데 이러한 복음을 전하는 과정과 그 성과적인 면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예정과 섭리를 발견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복음이 . - 복음의 원어 '유앙겔리온'( )은 '좋은'이라는 접두사 '유'( )와 '소식'을 뜻하는 '앙겔리아'( )가 합성된 단어인데 '천국의 복음'(마 9:35),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고후 4:4) 등 수식어와 함께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막 1:14; 행 20:24).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소식을 의미하며 때로는 인격화되어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롬 1:2-4). 본서에는 '하나님의 복음'(살전 2:2,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살전 3:2; 살후 1:8), 그리고 '우리 복음'(살전 1:5; 살후 2:14) 등의 수식어와 함께 표현되었는데 수식어에 따라서 다소 어감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의미에는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우리 복음'이라는 표현은 자칫 바울이 복음의 창시자라는 오해를 유발할 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가 전한 복음'으로 풀어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전 15:1-11). 바울은 복음을 위탁받은 자요, 전도자일 뿐이고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름 1:11; 고후 11:7)이요 그리스도의 복음(롬 15:19; 고전 9:12)인 것이다.
너희에게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전파한 말씀은 음성을 통해서 소리로 전달되는 '말'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즉 바울의 복음 전파는 헬라 지식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수사학적 기교와 웅변적 문체 등의 형식을 구비했다 할지라도 믿음을 갖게 하지 못하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감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을 동반한 말씀 전파였다는 것이다(름 15:18,19; 고전 2:4).
또한 능력과. - 바울이 전한 복음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다. 여기서 첫째로 언급되는 '능력'은 헬라어로 '뒤나미스'( )라 표기되는데 이는 '이적'을 뜻하는 '뒤나메이스'( )와 혼동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헬라 문헌에서 이 용어는 큰 자연적인 힘을 나타냈는데 성경에 인용되면서 초인간적이고(행 8:13), 하나님으로부터 발생한 인격적 힘(고전 1:18)을 의미하게 되었다. 본문에서는 이적을 행하는 기적적인 힘보다는 복음이 확산되는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Alford).
성령과. - 성령은 앞서 나오는 복음 전파의 외적 능력이나 뒤이어 나오는 전파자들의 마음 속에 내재한 큰 확신을 가능케 하는 근본 동인(動因)이라 할 수 있다.
큰 확신으로 된 것임니라. - '능력'이 외적인 현상이라면 확신은 복음 전도자들의 내면적인 자세라 할 수 있다. 사도들은 복음 전도자로서의 확실한 소명감으로 충일되어 있었기에 결과적으로 전도의 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복음전도자는 물론이거니와 일반 성도들도 그리스도인으로서 확신을 가지고 살아나갈 것이(골 2:7; 히 6:11) 요구된다 하겠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을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 이 구절을 풀어 쓰면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여러분을 위해서 어떻게 살았는지'가 된다(공동번역), 바울은 이에 대한 대답으로써 2:1-12을 할애하였는데 여기서 그 요점을 간추린다면 데살로니가 교회의 복음화와 영적 성장을 위하여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의 희생적인 봉사의 자세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에 유행하던 헬라의 순회 철학 교사들은 웅변을 통해 철저하게 개인적 욕심을 충족시키는 상업 정신을 보였는데 반해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사랑과 정성으로 그들을 보살피며 이타적(利他的) 자세를 견지했던 것이다.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 환난이란 신앙으로 인해 받는 핍박, 외적인 고통을 가리킨다(마 13:21).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은 바울의 전도를 받아들이면서 복음에 대해서 적극적인 자세와 열심을 보였고 복음을 실생활에 적용하려고 노력하였는데,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보수적인 유대인들의 눈에는 이러한 이방인인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열심이 시기와 증오의 대상으로 보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거리의 괴악한 자들을 선동하여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핍박하도록 조장하였는데 이로 인해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나게 되었고(행 17:4-10)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복음을 믿지 않는 유태인들과 자기 동족들로부터 이중적인 핍박을 받게된 것이다(살전 2:14). 행 12장 연구자료, '초대 교회 박해사' 참조.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말씀을) 받아. -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극심한 핍박 가운데서도 성령께서 주시는(NIV, given by the Holy Spirit) 기쁨을 가지고 '도'(로고스), 즉 말씀을 받아들였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적대자들은 잔혹한 수단을 동원하여 박해하지만 성도들의 내면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은 참 기쁨을 줌으로써 원수의 박해를 극복하도록 도우신다. 실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교회'의 전형이라 하리만큼 자신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의지하는 모범적인 자세로 당면한 환난들을 기쁨으로 이겨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주를 앙모하는 신앙을 가졌을 뿐 아니라 먼저 그리스도를 영접한 바울 일행을 본받는 자들이 되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이나(고전 4:16) 빌립보 교인에게(빌 3:17) 자기를 본받는 자들이 될 것을 충고할 만큼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고 이를 본받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본받는 결과가 되었다(고전 11:1).
1: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 바울이 본 서신을 기록하던 당시에 헬라 세계는 북쪽 마게도냐와 남쪽 아가야라는 거대한 주로 분할되어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는데,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주(州)의 수도였고 고린도는 아가야주(州)의 수도로서 발전하고 있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모범적인 자세는 마게도냐를 비롯하여 기타 여러 지역에 알려질 수가 있었는데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바람직하지 못했던 태도가 전체 아가야 지방으로 확산되었던 사실과 대조되는 현상이라 볼 수 있다.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으니라. - ‘본’은 헬라어로는 '튀포스'인데 어떤 강압적 힘에 의해 찍혀진 모형(types) 혹은 화폐에 찍힌 상(像)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국(mark, 요 20:25), 형상 등의 뜻도 함축하게 되었는데 본절에서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다른 모든 지역의 성도들이 따라야할 모범이 되었음을 알리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1:8 주의 말씀이. - 데살로니가 교회가 다른 교회들의 모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들이 이하에서 전개된다. 헬라어 원문에는 '왜냐하면'이라는 뜻의 접속사 '가르'( )를 문장 초두에 놓아 그러한 본절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한편 '주의 말씀'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자신이 선포하는 말씀이 신적 근거를 가지고 있음을 밝히기 위하여 자주 인용하였던 말인데(사 38 :4) 바울 서신에서는 이 말이 두 번에 걸쳐 사용되었다(살후 3:1). 이러한 주의 말씀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기쁜 소식 즉, 복음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너희에게로부터 마케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 여기서 '들리다'(엑세케오마이)는 '밖으로'(엑크)와 '울려 퍼지다', '포효하다'(엑케오)의 합성어로서 우레 소리처럼 크고 분명하게 선포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복음이 온 헬라지역에 널리 전파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 데살로니가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마케도냐, 아가야 지역에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으며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게 되었다. 이 대목에서 학자들은 '각처'가 실제적으로 어디 인가를 질문하면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기쁘게 여긴 나머지 약간의 과장법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각처'를 문자 그대로 풀어 '온 세계 모든 지역'(every place in the world)이라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면서(Thomas, Gloag) 다만 이런 표현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데 그 중요성이 있다고 역설하였다(롬 1:8; 골 1:23), 이들의 주장은 매우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다고 평가되는 반면 '각처'라는 단어에 너무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한다. 사실 데살로니가의 지리적 조건들과 상업도시로서의 성격을 고려해보면 데살로니가의 소식은 주변에 급속도로 전파될 수가 있었고 또 이때 로마에서 돌아온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로마에까지 데살로니가의 소문이 도달했다는 소식을 바울에게 전했을 것이라는 상황을 상정해보면 바울의 표현이 단순히 과장되었다고 단정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또한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도착하는 곳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문이 들렸기 때문에 바울이 '각처'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리라고 추측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 대목에서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모범적인 자세, 즉 극심한 핍박을 기쁨으로 견디며 극복한 믿음의 모범이 주변 지역에 널리 알려졌다는 사실이 가장 큰 중요성을 가지는 것으로 사료된다.
1:9 저희가(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갔는지와. - '저희'는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위시한 '각처'에서 바울이 만났던 사람들을 말하고 '우리'는 전도자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을, 그리고 '너희'는 본서의 수신인인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각각 지칭한다. 본절에서 바울은 선행 절에서 언급했던 소문의 내용적인 면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한편 '들어간다'는 표현은 바울과 그 일행이 데살로니가라는 도시에 입성(入城)했다는 뜻과 복음이 그들의 심령에 뿌려졌다라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이는데, 본절의 표현 가운데는 바울의 전도사역이 데살로니가에서 매우 고전했음을 완곡하게 나타내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기도 하다. 즉 바울은 마게도냐의 수도인 데살로니가에 선교 본부를 구축하여 그 일대 지역을 복음화하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유대 인들의 반발로 인하여 그만 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 - 본절 전반부가 바울의 전도사역에 대한 설명이라면 이 문구와 다음 절의 기록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바울이 전파한 복음에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기술한다 할 수 있다. 즉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복음을 접하자 우상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결단성을 보였는데 여기서 '돌아오다'라는 동사 '에피스트레포'는 '~에 대하여'(에피)란 전치사와 '반대로 돌리다'(스트레포)란 동사의 합성어로서 '완전히 돌아서다'란 의미를 지닌다. 특히 여기서는 부정과거 형태인 '에페스트렙사테'로 사용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부정과거란 곧 과거에 일회적인 사건으로 일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인 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회심이 단 한번으로 이루어진 결단적인 행위임을 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우상'(에이돌론)은 '본다'라는 동사 '에이도'에서 파생되어 외적인 모양(요 5:37; 행 7:41), 이방 신(고전 8:4,7) 등의 개념으로 발전했는데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대부분 헬라계 이방인들로서 헬라계의 다신교적 우상들을 숭배하고 있었다. 물론 유대인들도 당시 데살로니가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포로기 이후에 여하한 우상숭배도 죄악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우상을 버린 무리에 속한다고 볼 수는 없으므로(Thomas) 데살로니가에서 회심한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들로 구성되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를 통해 이방인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심의 과정이 모든 이방인 개종자들에게는 필수적인 조건으로 제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행 14:15; 17:12).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 신약에서는 하나님을 당연히 참되시며 살아계신 분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이렇게 묘사하는 일은 드물지만, 구약에서 이러한 표현은 헛된 우상 숭배와 대비하여 하나님의 성격을 나타내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용어이다. 즉 이는 예언자의 메시지에서 하나의 중심 주제로 각인되었다(렘 10:8-10). 왜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만이 모든 생명체의 기반이시라는 것과 그러한 영원한 존재자이신 여호와(출 3:14)를 의지해야만 인간이 본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다는 사상으로 우상숭배의 무상함을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섬기며'(둘류오)는 종(둘로스)과 관련을 갖은 단어로서 노예의 위치에서 상전을 섬긴다는 의미를 갖는데 이는 마음으로부터의 자발적인 복종과 봉사를 의미한다(롬 12:11). 이는 곧 우상의 노예에서 이제 하나님의 자랑스러운 종이 되었음을 의미함과 아울러(요 8:34-36; 롬 8:15)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감격 속에서 자발적으로 충성하는 태도를 일컫는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우상 숭배를 단절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서 마땅히 봉사하며 고난 받을 각오까지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도 시에 강조했으며(행 17:3) 본서를 통해서도 거듭 언급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함이 분명하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언급한 이유는 다음에 이어지는 그의 재림에 대한 확고한 기대를 보증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본절에는 그리스도의 부활, 재림, 최후의 심판이라는 종말에 일어날 중요한 교리들이 매우 간략한 형태로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랜드 종합 교리, '기독론' 참조.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 바울은 9절과 10절에 걸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① 우상 숭배를 타파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일(회개) ②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일 (자발적인 복종의 자세 ) ③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는 일(종말적인 소망) 등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내용들은 바울의 루스드라 선교와 아레오바고 선교 등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는데(행 14:15; 17:22) 이 세 가지 내용이 당시 바울 선교의 전형적인 형식이었으며 내용상 그 중요성이 있기 때문에 빈번히 인용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어쨌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은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종말에의 기대로 이어진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는 데살로니가 전후서의 특징 을 이루고 있으며 (살전 2:19; 3:13; 살후 2:1-8) 본서 전반에 걸쳐 언급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초대교회에는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이며 그 사건이 일어날 시간 역시 목전에 임박했다는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는데 데살로니가 교회 역시 그러한 분위기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역사 그 자체가 이미 종말적 성격을 가진다는 점을 고려할 때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재림에 대한 기대는 현실적인 삶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와 실제 생활 속에서의 성결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 하에서 종말적인 소망에 가득차 있는 교회야말로 진정으로 현실과의 선한 싸움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고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은 인내와 확신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그분의 재림을 맞이하는 마땅한 준비를 갖추는 일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이에 대해서는 눅 17장 연구자료와 주의 재림과 종말의 때에 대하여 벧후 3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래에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건져내 주실 것에 대한 약속이다. 즉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지만(요 3:36; 엡 5:6)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이때가 곧 구원의 때가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해서 혹자는 그 강도를 완화시켜 특정한 죄에 대한 형벌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Dodd) 이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지은 모든 죄에 대한 총체적인 형벌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이러한 생각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한편 '장래 노하심'으로 번역된 원어 '테스 오르게스 테스 에르코메네스'는 직역하면 '오고 있는 노하심'이 된다. 현재분사형으로 사용된 '오고 있는'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진노가 미래에 이루어질 것임을 나타내는 동시에 지금 임박해 있다는 급박성을 한충 더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같이 심판이 임박해 있다는 구절과 대조를 이루는 '건지시는'이라는 표현은 성도들의 구원 또한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음을 예시해 준다. 이는 곧 종말은 심판을 의미하지만(마 25:31-46) 진노라는 개념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는 두려움과 공포의 의미로가 아니라 성도를 괴롭히는 악의 세력의 소멸이라는 위로와 소망의 기폭제로 여겨졌음을 의미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