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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문안 인사와 시험 중의 성도의 신앙 자세 및 말씀 안에 거하는 신앙생활 권면
구속사적 개관
본서는 A.D. 46-49년경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최초의 감독이며 우리 주 예수의 친동생이었던 야고보가 로마 제국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공동체 곧 디아스포라(Diaspora)의 유대인 출신 성도들에게 보낸 공식 서한이다. 본서는 물론 1차적으로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부활 승천으로 구속사의 시대가 구약에서 신약으로 갓 이전된 과도기에 스데반이 순교한 A.D. 30년 후반 경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기독교(Christianity)에 대한 유대교(Judaism)의 박해를 피해 본향 예루살렘을 떠나 로마 제국 각 지역에로 흩어졌던 유대인 출신 성도들, 또는 그 무렵에 사도 바울을 비롯하여 다른 많은 전도자들에 의해 복음을 듣고 개종한 유대인 출신 성도들에게 그들이 처했던 삶의 상황에서 당해야만 했던 여러 가지 시련들, 곧 동족인 유대주의자들의 박해와 이방인들의 핍박 및 사도들과의 오랜 교제 단절로 인하여 신앙이 성숙되지 못한 성도들 간의 여러 가지 갈등, 그 중에서도 특별히 빈부의 격차로 인한 갈등 등의 시련들을 인내로 이겨낼 것을 격려하고 성숙된 신앙 자세로 교회 공동체의 공고한 결속을 도모하도록 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실천적 교훈들을 준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교훈을 담고 있는 본서는 세속주의와 인본주의가 팽배하고 신본주의적인 그리스도인의 신앙 윤리가 퇴색함으로 인하여 성도 개개인의 윤리적 각성은 물론 교회 공동체의 일치단결이 절실히 요청되는 20C 말 현대 교회에게 더욱 적절한 교훈을 주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본서를 개시하는 첫 장인 본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전반부 1절은 바울 서신의 도입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본론에 대한 일종의 서론격에 해당하는 시작하는 말을 완전히 생략한 채 간단한 문안 인사만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중반부 2-18절은 성도 개개인이 여러 가지 시련을 믿음과 인내로 이겨내고 성숙된 신앙 자세로 교회 공동체의 공고한 결속을 도모하도록 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실천적 교훈들을 제시한 본서 본론 1:2-4:17까지의 일련 기사 중에서도 보다 기본적인 교훈들을 기록한 본론 전반부 1:2-2:26까지의 일련 기사의 개시 부분이다. 그리고 후반부 19-27절은 성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절대 유일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을 밝히고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맥락하의 본장의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반부 1절의 문안 인사에서는 발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이며 수신자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즉 로마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공동체 곧 디아스포라의 유대인 출신 성도들임을 밝히고 있다.
중반부 2-18절은 다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된다. 그 중 2-12절에서는 성도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받게 되는 두 종류의 시험 중 환난과 핍박과 같은 외적인 시련 중의 성도의 신앙 자세에 관한 일련의 교훈들로서 시련은 성도의 신앙을 온전케 하는 것이므로 인내로 극복할 것(2-4절)과 시련 극복을 위해 하나님의 지혜를 믿음으로 구할 것(5-8절), 시련 중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하늘의 신령한 축복을 사모하며 겸손하기를 힘쓸 것(9-11절), 시련을 극복하여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12절) 등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13-18절에서는 또 다른 한 가지 시험, 즉 성도들을 죄에 빠지게 하는 사단의 유혹에 대한 성도의 자세에 대한 교훈으로서 세상에 속한 것들에 대한 욕심 때문에 사단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하늘의 신령한 은사와 축복을 사모하라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전반부와 중반부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개관해 볼 때 우리는 다음의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성도(聖徒)라면 누구나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한 번 이상은 어떤 형태로든 필연적으로 시험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이 단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멸망의 심판 가운데서 구원 얻는 데서만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은 자들로 온전하게 성화되어 구속사 중에 당신의 뜻과 영광을 높이 드러내도록 하기 위해 믿음의 연단을 위한 시련(test, trial)을 주시기 때문이고, 둘째는 이 세상의 공중 권세자인 사단(엡 2:2, Satan)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훼방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성도들이 죄에 빠지도록 유흑(temptation)을 주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성도들이 온전한 모습으로 당신 앞에 나아오도록 하기 위해 시험을 주시지만 사단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멀어지도록 하기 위해 시험을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이든 사단이 주는 유혹이든 간에 성도는 이를 철저한 신앙의 자세로 극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즉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을 통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를 살펴 보다 온전한 데로 나아가야 할 것이며, 사단이 주는 유혹을 통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버려야 할 세상에 속한 것들에 대한 자기 욕심이 무엇인지를 살피며 또 그러한 욕심대신 보다 신령한 하늘의 은사와 축복을 얻기 위해 매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실로 구속사(救蹟史)의 노정 중에 수없이 많이 만나게 되는 이러한 시험들을 극복할 때마다 진정 우리 성도들은 각자가 다다러야 할 구속사적 푯대(빌 3:13,14)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는 것이며 종국에는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이다(12절).
한편 후반부 19-27절은 성도의 신앙생활의 기초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 곧 믿음의 도 안에 거하는 생활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한 마음으로 듣고(19-21절), 들은 말씀을 구체적으로 삶 가운데 실천하는 생활(22-27절)을 하라는 권면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후반부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대할 때 우리는 하나님 말씀은 성도의 신앙생활의 절대 유일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Bible)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 전체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한 죄인 구원에 관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 복음을 믿는 성도들이 천국 구원에 들어가기 이전까지의 신앙생활에 관하여 구속사적 진리와 교훈을 주고 있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전 66권의 책이다(딤후 3:14-17). 이러한 성경은 마땅히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살아야 하는(롬 12:1) 성도들에게 그 앞길을 비추어 주는 빛과 같은 것이다(시 119:105). 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우리 성도들은 이 말씀을 삶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 말씀을 겸손히 듣고 이 말씀에 비추어 우리의 잘못된 마음과 생각을 고치며 또 마땅히 우리가 해야할 바를 말씀을 통해 깨달아 실천해야 할 것이다. 실로 하나님의 말씀은 구속사의 한 노정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참 지표가 되는 것이라 하겠다.
본문 & 자료노트
외울 말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1:5)
문안인사
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시련 받을 때의 성도의 신앙의 자세
2 ○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5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搖動)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9 ○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 부(富)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衰殘)하리라
12 ○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사탄의 유혹에 대한 극복방법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메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長成)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 그가 그 조물(遣物)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말씀 안에 거하는 생활 권고
19 ○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實行)하는 자니 이 사람 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 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 것이라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원어 연구 - 1:8, 정함이 없는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카타스타토스'( )이다. 이 단어는 부정접두어 '아'( )와 동사인 '카디스테미'( )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여기서 '카디스테미'는 일차적으로 물건을 어디 위에 '놓다'. '두다'라는 뜻인데 이것이 사람과 관련해서 쓰일 때는 그 사람에게 어떤 책임과 역할을 주기 위하여 '임명하다'(마 24:47), '세우다'(눅 12:14)라는 의미가 된다.
이런 의미의 '카디스테미'에 결집을 나타내는 부정 접두어 '아'가 결합된 '아카타스타토스'는 어떤 특정한 역할이나 책임이 주어지지 않았거나 또는 주어진 역할이나 책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불안정한', '일정하지 않은', 또는 '침착하지 못하고 들떠 있는', '소란스러운'이란 뜻을 가진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정함이 없는'은 성도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신의 신분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의 마음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두지 않고 딴 생각을 갖는다는 뜻이다.
이처럼 비록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일을 염려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맡기지 못하는 성도는 모든 일에 흔들릴 수밖에 없고 또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간구하여도 그 응답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1:1 문안 인사
본서는 신약 성경의 다른 서신서들과 마찬가지로 당시 서신서의 일반적인 형식을 따라 발신자와 수신자를 밝히며 문안 인사로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자면 본서가 서신서의 체제를 갖춘 것은 본문뿐이며 본서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 수훈(마 5:1-7:27)을 연상케 하는 하나의 '윤리서'와 같은 느낌을 준다. 즉 본서는 문안 인사로 시작되는 도입부와 어떤 문제에 대한 논의와 귀결된 원칙에 입각한 구체적 권면이 주어지는 본론부, 그리고 결언 및 축도로 서신을 끝맺는 종결부로 이루어지는 서신서의 일반적인 형식 중, 도입부는 압축된 형태로 나타나고 곧바로 본론으로 이어지며 종결부에 가서는 결론적 권면만 주어지고 문안 인사는 생략된 채 끝나고 있다.
그런데 특히 본서의 본론부는 신앙의 실천적인 면을 강한 어투로 교훈조로 기록하고 있다. 때문에 본서는 '신약의 잠언' 혹은 '신약의 아모스'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이러한 본서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였던 주의 형제 야고보(행 15:13)가 스데반 순교 이후 거세게 불어닥친 예루살렘 초대 교회에 대한 유대교의 대대적인 박해(행 8:1)를 피해 로마 제국 각 지역으로 흩어진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출신 성도들과 본래부터 이방인 지역에 거주하다 개종한 유대인 출신 성도들에게 시련 가운데서 인내하도록 격려하고 행함을 통한 신앙의 성숙과 교회 공동체의 공고한 결속을 도모하도록 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서론을 참조하라.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 본서의 발신자에 대한 언급이다. 여기서 본서의 저자로 언급되는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성경에서 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마 10:2; 눅 6:14), ➁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 10:3; 행 1:13), ③ 주의 형제 야고보(마 13:55; 갈 1:19), ④ 사도 유다의 아버지 야고보(눅 6:16) 등 모두 4명이 나타난다. 이중 본서의 저자는 주의 형제 야고보로 여겨진다. 이와 관련해서는 본서 서론, '저자' 부분을 보다 참조하라. 그리고 본서의 저자인 주의 형제 야고보에 대해서는 본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한편 본서의 저자 야고보는 그의 서신의 첫머리에서 자신의 신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여기서 '종'(둘로스) 이라는 말은 당시 헬라 사회에서 자주적 의사 결정권이 없는 비천한 노예나 농노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따라서 저자가 자신을 하나님과 예수의 종으로 표현한 이유는 자신의 삶이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의 뜻만을 행해야 하는 위치에 있으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본 서신을 기록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또한 야고보는 자신의 신분을 명확하게 공개하지 않는데 이는 초대 교회의 교인들이 그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었음을 시사한다(갈 2:9). '예수 그리스도'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마 1:1주석을 참조하라.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 본 서신의 수신자에 대한 언급이다. 여기서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란 본래 팔레스틴을 제외한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스 9장 연구자료, '디아스포라의 이해'를 참조하라. 그러나 여기서는 초대 교회 당시 대박해로 인해 각지로 흩어진 유대인 출신 성도(행 8:1) 및 본래부터 이방지역에 거주하다가 개종한 유대인 성도들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Alford, Mayor. Manton). 따라서 본서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성도들을 대상으로 하여 쓰여졌다고 볼 수 있으며 포괄적으로는 이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이방인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서신의 첫머리에 발신자와 수신자를 밝히고 문안 인사를 하는 것은 당시 서신의 일반적 형태로 신약 성경 서신서의 대부분이 이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본서 제17권 서신서 개론, '서신서의 문학적 성격과 구조적 특성'을 참조하라.
1:2-12 시련 중의 성도의 신앙 자세
간단한 문안 인사(1절)로 본서의 도입부가 끝이 나고 본문에서부터 본서의 본론부가 시작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본론부는 주제상의 뚜렷한 구분이나 어떤 체계를 갖추지 않고 일련의 실천적 교훈들을 나열식으로 언급한다. 이는 로마 제국 각처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 출신 성도들이 삶 속에서 직면하게 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한꺼번에 다루면서 교훈을 주고자 한 야고보의 의도에 따론 것이다. 하지만 편의상 굳이 본론부를 구분해 보자면 교훈들의 특징에 따라 보다 기본적인 교훈을 제시하고 있는 전반부인 1: 2-2:26과 구체적인 세부 교훈을 주고 있는 후반부 3:1-4:17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 하에 본문은 시험과 관련된 몇 가지 일련의 교훈들을 주고 있는 1:2-18 중 그 전반부로서 환난과 핍박과 같은 외적인 시련(trial) 중의 성도의 신앙 자세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2-4절은 성도에게 있어 여러 가지 시련은 인내(忍耐)를 통한 영적 성숙을 가져오는 것이라는 시련의 의의에 대해, 마지막 12절은 시련을 극복한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으로서 주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5-11절은 시련과 관련된 부차적인 주제로서 성도가 시련을 극복하고 영적으로 성숙되어 온전함에 이르기 위해 믿음으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것(5-8절)과, 시련 중에 물질적인 궁핍함으로 고생하는 자들은 하늘의 영적 축복을 자랑하고 물질적으로 부요한 자들은 자신을 낮추어 겸손함에 이르도록 힘씀으로써 결과적으로 영적인 부요함에 이를 것(9-11절)에 대해 권면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시험'과 관련한 보다 구체적인 사항은 출 15장 자료 노트와 본장 13절 주석을 참조하라.
야고보서 기자가 본서 서두에서 이렇게 시련과 관련된 일련의 교훈들을 준 사실에서 우리는 본서 수신자들이 당시 처해 있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즉 본서 수신자들은 흩어진 유대인 공동체인 디아스포라(Diaspora)의 유대인 출신 성도들로서 유대주의자들로부터 상당한 박해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기독교에 대한 유대교의 박해는 A.D. 30년 후반경 스데반의 순교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디아스포라 지역에서도 이러한 박해는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에 대해서는 행 12장 연구자료, '초대 교회 박해사'를 참조하라. 뿐만 아니라 타향에서의 삶 속에서 겪게 되는 여러 형태의 고난이 있었던바 이로 인하여 수신자들은 신앙적으로도 상당히 실의 상태에 빠져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에 야고보서 기자는 다른 교훈들을 주기에 앞서 성도들이 받는 그러한 시련의 의미와 시련 중의 바른 신앙 자세를 일깨워주기 위해 이 같은 교훈을 준 것이다.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교훈들을 발견하게 된다. ①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어떤 형태로든 필연적으로 시련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시험을 받을 때에 유독 자기 자신만이 시련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절망하거나 좌절하기보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그 같은 시련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없을 때에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시련의 분명한 이유를 알 때에 우리는 인내할 수 있고 또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 부족한 부분을 채워 영적 성숙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롬 5: 3-5).
② 시련 중에 성도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 있는 믿음이다. 이것이 있을 때 하나님께 필요한 것을 간구할 수 있고 또 간구한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된다(막 11:34; 요일 5:15).
③ 시련 중에 성도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이 세상 물질이 아니라 하늘의 영원한 축복이며, 성도가 진정 추구하여야 할 것도 물질의 부요함이 아니라 영적 부요함이다(벧전 1:6,7).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인식할 때 우리는 시련 중에 물질을 다 잃는다 할지라도 절망치 않으며, 또 물질이 부요하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 않을 수 있다. 이는 배금주의 사상이 팽배한 현대의 성도들에게 참으로 적절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1:2 내 형제들아. - 이 표현은 신약의 기자들이 기독교인들을 호칭할 때 즐겨 사용했던 말로(롬 1:13; 고전 1:10; 벧후 1:10; 요일 3:13) 저자의 수신자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깃들어 있다. '형제'(아델포스)라는 말은 본래 육친의 형제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창 4:2) 유대인들이 동족을 부를 때 이와 같이 표현하면서(출 2:11; 신 15:2), 신약 성경에서는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 공동체에 가입한 성도들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행 1:15; 롬 1:13; 엡 6:21. Ropes).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기쁘게 여겨라. - '시험'(페이라스모스)은 예기치 못한 시련(trial)을 의미한다. 초대 교회 당시의 유대인 출신 성도들은 이방인의 경멸, 동족의 약탈 등 갖가지 시련을 당했었다(고후 11:23-28; 히 10:34; 약 4:7-10; 벧전 1:6). 본서 저자는 이러한 시험에 부딪혔을 때 성도들이 오히려 기쁘게 여길 것을 교훈하고 있다. 특별히 본절의 '기뻐하다'(카우카오마이)라는 동사는 자랑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기쁨, 즉 기쁨으로 충만된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데 성도들이 이처럼 '시험' 앞에서 기뻐해야 할 이유는 그 시험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뿐 아니라 시험을 인내로 이긴 신자에게는 영광과 칭찬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롬 5:3-5). 한편 성경에 나타나는 '시험'에는 성도들의 믿음을 연단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test)과 성도들을 실족케 하여 멸망케 하고자 하는 사단에게로부터 주어지는 시험 (temptation)이 있다. 이중 전자는 시련(trail)으로 나타나고 후자는 유혹으로 나타난다. 본절에서의 시험은 전자에 속한다. '시험'과 관련해서는 출 15장 자료노트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니 그곳을 보다 참조하라.
1:3 이는 너희 믿음의‥‥너희가 앎이라. - 성도들이 시험을 온전히 기쁘게 여길 수 있는 이유에 대한 언급이다. 즉 성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시련을 기쁘게 받을 수 있는 것은 그 시련이 성도들의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해주는 '인내'(휘포모네)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특별히 여기서 '시련'(도키미온)이라는 말은 금, 은 등을 불 속에서 제련하여 순수한 것으로 만드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던 말로, 이는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의 목적이 성도들을 실족케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더욱 연단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고자 하는 것임을 시사한다. 한편 여기서 '인내'라는 말은 중압 아래 머물러 버티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이는 단순히 외부적 환경에 수동적으로 대처하거나 고난에 단련되어서 무감각해지는 상태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고난을 이기려는 태도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롬 5:4 주석을 참조하라.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 시험으로 인해서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 다시 적극적인 자세로 인내할 것을 말한다. 여기서 '온전히'(텔레이오스)는 '완전히', '흔들림 없이', '끝까지'라는 의미가 있는데 이는 성도들의 인내가 중도에 좌절됨이 없이 끝까지 지속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그런데 저자가 이처럼 서신의 앞부분에서부터 인내를 강조하는 이유는 초대 교회의 많은 신자들이 시련을 끝까지 인내하지 못하고 신앙을 포기한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야고보는 이점에 유의하면서 고난 앞에서 신앙을 포기하지 말고 지속적으로 인내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온전하고 구비하여. - 여기서 '온전하고'(텔레이오이)는 일의 목적이 완성된 완전성을 나타내며, '구비하여'(홀로클레로이)는 '전체'를 뜻하는 '홀로스'( )와 '몫', '부분'을 뜻하는 '클레로스'( )의 합성어로 모든 부분에서 완비된 완전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절은 시공간적으로 모든 것에 있어서의 온전하여 짐을 나타낸다. 이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하는 성도들의 성숙 목표(엡 4:13)이기도 하다. 바로 이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으로 야고보는 인내를 제시한 것이다.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 시험 중에 인내하라고 권고한 저자는 그 인내가 성도 자신의 힘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음을 알았다. 그래서 인내에는 신실한 영적 생활과 함께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함을 말해 주고 있다. 한편 이 문장은 헬라어 원문을 보면 가정법으로 표기되어 있는바 이는 ① 성도들 스스로에게는 시험을 이길 만한 지혜가 부족함을 강조 긍정하며 ➁ 모든 성도들이 지혜가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 정도에 차이가 있음을 시사해 준다(Manton).
모든 사람에게‥‥하나님. - 성도들의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서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은 하나님의 관대함과 은혜로운 성품을 잘 보여 주는 말로, '후히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그 구하는 것을 주신다는 의미이며, '꾸짖지 아니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기도에 대해 인색한 태도나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시지 않고 관용의 태도를 취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실로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결코 무시하시지 않으며 성도들의 기도에 대해 인색하지 않고 아무런 조건 없이 그 구하는 것을 들어 주시는 자비와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시험을 당할 때 참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시도록 열심으로 구해야 한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라고 하신 주의 말씀과 그 맥을 같이 하는 말이다. 이처럼 본서에는 주의 말씀을 연상케 하는 말씀이 자주 나온다.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 하나님께 구하는 자의 기본자세로, 마 21:21; 막 11:23 등의 교훈과 그 맥을 같이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서 일찍이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구할 것을 명령하시는 동시에 또한 그 구하는 것을 주실 것을 약속하였다(마 7:7; 요 14:14). 따라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성도들은 또한 하나님께서 그 구한 것을 주실 줄로 확신해야 한다. 한편 여기서 '의심하다'(디아크리노)라는 말은 '사이'를 의미하는 '디아'( )와 '분리시키다'를 의미하는 '크리노'( )의 합성어로 신앙과 불신앙, 신뢰와 주저 사이에서 헤매는 마음의 상태를 나타낸다. 이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며 하는 기도는 응답받을 수 없다.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물결 같으니. - 의심하는 자의 마음 상태를 묘사한 멋진 말이다. 즉 의심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자신의 사고와 감정의 지배를 받아서 마치 바다 물결이 출렁이는 것처럼 그 마음도 안정되지 못해 참된 평화와 안식을 얻지 못하는 비참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사 57:20).
1:7 이런 사람은‥‥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 '이런 사람'은 6절의 의심하는 자, 즉 두 마음을 품은 자를 말한다. 이들은 믿음이 없는 기도에 힘쓰면서 그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이 소망은 스스로 자기를 속이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행위이다(갈 6:9).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의 기도가 응답되지 아니하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함을 야고보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1:8 두 마음을 품어‥‥정함이 없는 자로다. - 불신앙의 두 가지 특징에 대해서 말한다. 첫 번째 특징은 두 마음을 품는 것이다. 여기서 '두 마음을 품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프쉬코스'( )는 '두 번'을 의미하는 '디스'( )와 '마음', '영혼'을 의미하는 '프쉬케'( )의 합성어로, 이는 사람이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 세상과 하나님 사이를 오가는 것, 즉 하나님과 세상이라는 두 주인을 섬기는 것(마 6:24)을 가리킨다. 한편 이 단어는 오직 본서에서만 두 번 나타나는바(약 4:8) 야고보가 만들어낸 단어로 보인다(Robertson). 두 번째 특징은 '정함이 없는' 신앙생활이다. 여기서 '정함이 없는'(아카타스타토스)이라는 말은 '불안정한', '변하기 쉬운'이란 의미로 신앙생활에 일관성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러한 불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은 세상사에 있어서 기대와 근심, 소망과 두려움 사이에서 쉽게 기뻐하고 쉽게 침울해지는 특성이 있어 항상 삶이 불안정하다.
1:9 본문에서부터 11절까지는 부의 무상성(無常性)을 논하는 부분으로 얼핏 보면 시험에 대해 교훈하고 있는 1-18절의 내용과 무관한 듯 보인다. 그러나 이 부분은 8절과 연결되어 하나님과 재물, 두 곳에 마음을 두는 것을 경계함은 물론,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는 2절과 연결하여 부한 성도가 시험으로 그의 모든 재물을 잃고 낮아지는 경우에 도 그리스도인으로서 갖는 신령한 지위에 만족하며 도리어 기뻐할 것을 권면하는 말이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 '낮은'(타페이노스)은 성경에서 주로 겸손함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는데(마 11:29; 롬 12:16; 벧전 5:5) 여기서는 물질적, 사회 적으로 비천한 처지를 의미한다. 특별히 본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한 핍박과 고난에 의해서 발생한 가난함을 가리킨다(Manton). 야고보는 이처럼 그리스도로 인하여 낮아진 성도들에게 그들의 낮아진 상태를 자랑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것은 성도들의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셨으며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후사가 되었다는 증표이기 때문이다(롬 8:17). 또한 종말에 누릴 하나님의 축복에 근거해 볼 때 성도의 현재 고난은 오히려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이기 때문이다(롬 5:3).
1:10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 본 구절은 '부한 형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먼저 '부한 형제'를 전절의 '낮은 형제'와 대비되는 개념으로서의 '부한 성도'로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를 취하면 본 구절은 '육적으로 부한 자들은 믿음 때문에 낮아진 것, 곧 겸손하게 된 것을 자랑하라'는 의미가 된다(De Wette, Mayor, Ropes). 다음으로 '부한 형제'를 '부한 자'로 해석하여 믿음과 관계없는 불신 부자로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를 취하면 본 구절은 '부한 자들은 장차 심판 때 낮아진 것을 자랑하라'는 비꼬는 말이 된다(luther, Alford, Weiss). 이상의 견해 중 문맥의 흐름상 전자가 자연스럽다. 한편 여기서 '낮아짐'은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모두 포함한다. 즉 부한 자들은 믿음으로 시험을 만나 육적으로 낮아짐은 물론 그 마음 역시 겸손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 본절과 다음 절은 부자가 낮아져도 자랑할 이유에 대한 언급으로, 부의 무상함을 잘 나타내고 있다(사 40:6-8). 사실 세상의 부와 영예는 화사하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것은 잠시 피었다 시들어 버릴 들풀의 꽃과 같다. 설령 세상의 부와 영예가 계속된다 할지라도 세상에 속한 인간의 생명은 곧 시들어 버리는 들꽃과 같이 사라지고 만다. 결국 이 세상에 속한 것은 어느 것도 영원한 것이 없으며 사라지고 만다. 이러한 유한한 세상의 것을 믿음을 위해 사용하고 그 대신 신령한 하늘의 복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과연 자랑할 만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1: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 - '뜨거운 바람'(카우손)은 기온이 높은 중동 지방에서 일출할 때 사막에서 불어오는 건조한 동풍인 열풍을 일컫는다(겔 17:10). 이 바람은 주변의 모든 식물을 마르게 해 종종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으로 비유됐다.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 여기서 '행하는 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레이아'( )는 '여행하다'라는 의미의 '포류오'( )에서 유래한 말로 장사를 위해 사막을 여행하는 대상들에게서 나온 관념어이다. 그러므로 '그 행하는 일'이란 부자들이 자신들의 부를 쌓기 위해 진지하고 지칠 줄 모르는 열심으로 행하는 모든 일을 말한다(고전 13:6,7). 그런데 당시 대상들은 사막을 여행하면서 갑작스런 돌풍에 죽는 일이 허다했다. 이러한 사실은 들에 핀 꽃이 열풍에 말라죽는 것과 좋은 비교가 된다 할 것이다. 이처럼 세상의 부는 화초와 같이 화려해 보이지만 결국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유한한 것이라는 점에서 또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 재물에 연연해서는 안되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것에 감사해야 한다.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마 5:10)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한편 여기서 '시험'(페이라스모스)은 2절의 '시험'과 같은 단어로 믿음의 연단을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시련(trial)을 가리킨다. 또한 '참다'(휘포메노)는 참을성 있게 매우 오랜 시간 동안 꾸준하게 견디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성도들이 신앙생활로 인해 발생하는 시련과 고난을 이길 때 복이 있음을 의미한다. 시험이란 당할 때는 괴롭고 슬픈 것이나 그것을 이기고 승리하면 곧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히 12:11).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 본절은 모든 시험을 이기고 승리한 자가 받을 궁극적인 축복에 대한 언급이다. 여기서 '인정함을 받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키모스'( )는 '여겨지다', '보이다'를 의미하는 '도케오'( )에서 유래한 말로 '인정된', '연단된'이란 의미로 광석이 용광로에서 제련되어 순수한 금이 분리하여 나오는 것처럼 시험에서 승리하여 그 믿음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것을 말한다. 한편 '생명의 면류관'은 '썩지 않는 면류관'(고전 9:25), '의의 면류관'(딤후 4:8), '영광의 면류관'(벧전 5:4)과 같은 표현으로, 시험을 이기고 승리한 자에게 주어질 상급이다. 특별히 여기서 '생명'(조에)이라는 말은 현세의 삶을 가리키는 '비오스'( )와는 달리 성도들이 하나님 안에서 누리게 될 가장 높고 좋은 삶을 가리킨다(Trench, Thayer). 따라서 '생명의 면류관'이란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영광되고 영화로운 삶을 가리킨다.
1:13-18 사단의 유혹을 이기는 비결
본문은 시험과 관련된 몇 가지 일련의 교훈들을 주고 있는 1:2-18중 그 후반부로서 하나님께서 성도의 믿음의 연단을 위해 주시는 시련과 달리 성도를 죄에 이르게 하는 사단의 유혹을 이기는 비결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즉 본문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범죄에 빠진 경우를 하나님께로부터 시험을 받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기록된 것으로 성도를 죄에 빠지게 하는 시험(temptation)의 궁극적인 주체 및 그러한 시험에 빠지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 그리고 그러한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한 성도의 자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에 본문의 내용을 상술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13절은 성도들을 유혹하여 죄에 빠지게 하는 시험의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언급한다. 이는 결국 사단이 그 주체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어 14-16절은 성도가 죄에 빠지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은 성도 자신의 '욕심'(慾心)이며, 그 욕심을 끝까지 좇는 자는 사망에 이른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그리고 17,18절은 사단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각양 좋은 은사와 선물을 사모함으로 세상 것을 향한 욕심을 버릴 것을 교훈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에서 야고보서 기자는 성도를 범죄에 빠뜨리는 궁극적인 주체인 사단(Satan)에 대해서는 암시적으로만 언급할 뿐 직접적으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다만 성도가 시험에 빠지는 보다 직접적인 원인으로서 인간의 욕심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이는 시험에 대한 체계적인 교리를 이해시키기보다 이미 9-11절에서도 언급했거니와 성도가 세상 것을 향한, 즉 물질적인 풍요나 명예, 권세 등을 향한 욕심 때문에 범죄치 않고 하늘의 신령한 은사와 축복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신앙의 성숙을 이루는 데 있어서 성도 자신의 책임과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상의 본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① 성도들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 늘 자신을 영적으로 무장하여야 한다(엡 6:10-17).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사단의 유혹은 필연적인 것으로, 언제 어떠한 상황으로 사단이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궤계를 꾸밀지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에 항상 그에 대비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➁ 성도들이 사단의 유혹에 빠져 범죄케 되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세상 것에 대한 욕심,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며(요일 2:16,17) 이의 결과는 사망이다(롬 6:21).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항상 이 같은 범죄의 직접적인 원인과 결과를 분명히 깨닫고 하늘의 신령한 은사와 축복을 사모하는 신앙으로 그 원인들을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이다.
③ 성도들은 법적으로는 의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성화의 과정 중에 있는 불완전한 죄인이기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사단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지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롬 7:22-24). 그러나 이러한 때에 중요한 것은 속히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구하고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마 26:69-75; 요일 1:9) 그리고 다시 동일한 범죄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자신의 신앙을 재점검해야 한다.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는 신앙인이 죄의 유혹을 받을 때를 가리킨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모두 '시험'으로 번역되나 헬라어 원문이나 영역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시련으로서의 시험(test)인 '페이라스모스' (περασποs)와 사단으로부터 오는 유혹으로서의 시험(temptation)인 '페이라조'( περαζω)로 분명히 구분하고 있으며 본절의 '시험'은 후자의 경우다. 따라서 본절은 사단의 시험에 빠진 경우에 있어서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지 말라는 말이다. 이는 당시 성도들이 자기 욕심 때문에 범죄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갖기는 커녕 그 책임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그릇된 행위를 막기 위해 주어진 교훈이다. 한편 하나님은 성도들을 직접 시험하시기도 하지만 결코 사단처럼 인간이 죄를 짓도록 유혹하시지는 않는다. 다만 성도들을 올바로 인도하고 믿음을 연단하시기 위해 시험하실 뿐이다(신 13:3). 인간이 유혹을 당하여 죄를 짓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를 멸망케 하려는 사단의 간계에 의한 것이며, 또한 인간이 스스로 갖고 있는 죄악된 본성의 욕망에서 발생하는 것이다(14절). 출 15장 자료노트 참조. 여기서 하나님에게로부터 오는 시험과 사단으로부터 오는 시험의 차이를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시험(test) | 사단의 시험(tempataion) | |
근원 | 하나님 | 사단 |
진행양상 | 고통에서 환희 | 달콤에서 슬픔으로 |
동기 | 하나님의 은혜 | 사람의 욕심 |
목적 | 믿음의 연단 | 실족 |
방법 | 시련 | 유혹 |
결과 | 영생 | 멸망 |
하나님은 악에게‥‥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아페이라스토스)는 직역하면 '유혹받을 수 없고'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유혹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으신 분인 것이다. 또한 그 하나님은 다른 누구를 유혹하시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악을 알지도 못하시기 때문이다. 본장 자료노트 참조.
1:14 오직 각 사람이‥‥미혹됨이니. - 시험(temptation)의 출처에 대한 언급이다. 저자는 시험의 출처가 하나님이 아니요 자기 자신이며,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밝혀 자신들이 유혹을 받고 죄를 짓는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죄를 합리화하려는 자들의 태도를 일축한다. 여기서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헤카스토스 데 페이라제타이) 이라는 어휘 속에는 비록 이 서신이 믿음의 형제들에게 쓴 글이지만 비 신앙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죄의 유혹을 받고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 '욕심'(에피뒤미아)은 '~을 갈망하다'라는 뜻을 지닌 '에피뒤메오' ( )에서 유래한 단어로 선 또는 악에 대한 열망(롬 7:7; 빌 1:23)을 나타낸다. 본절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어 죄악된 인간의 본성을 나타낸다. '끌려 미혹됨'(엑셀코메노스 카이 델레아조메노스)은 사냥 또는 낚시에서 온 용어로 현재분사형으로 사용되어 시험이 진행되어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특별히 '끌려'(엑셀코메노스)는 '끌어내다'라는 의미의 '엑셀코'( )의 수동형으로 마치 물고기가 낚시밥의 꾀임에 빠져 자신의 은신처 밖으로 나온 것처럼 사람이 죄의 유혹을 받아 죄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나타내며, '미혹됨'(델레아조메노스)은 '미끼로 물고기를 잡다', '올가미로 사냥하다'라는 의미의 '델레아조'( )의 수동형으로 마치 미끼에 속은 물고기가 낚시 바늘에 걸리듯 죄의 유혹을 받은 사람이 마침내 죄에 사로잡히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본절은 결국 인간이 시험을 받는 원인이 바로 자신들의 마음에 있으며 타자(池者)에게 그 원인을 돌릴 여지가 전혀 없음을 잘 보여 준다. 따라서 신앙인들은 항상 자신의 마음을 살펴야 할 것이며 항상 마음을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잠 26:8).
1:15 욕심이 잉태한즉‥‥사망을 낳느니라. - 여기서 '잉태한즉'에 해당하는 헬라어 '쉴라부사'( )는 '함께 붙잡다'를 의미하는 '쉴람바노'( )의 제 2부정과거 능동태 분사로 여성의 임신을 나타내는 말이나 여기서는 개인의 의지가 죄된 본성과 합치되는 과정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즉 죄된 인간의 본성이 사람의 마음을 죄악의 길로 인도하여 결국 그 길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 상태를 가리킨다. 이러한 상태는 구체적인 사고와 행동이 밖으로 표출되는데 이것이 바로 '죄'(하마르티아)이다. 그리고 '죄가 장성한즉'(헤 하마르티 아 아포텔레스데이사)은 죄된 행동이 인간의 마음과 의지를 완전히 장악하여 이 행동이 습관적이고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행해짐을 의미한다. 이러한 죄의 결국은 '죽음'(다나토스)이다(롬 6:23). 특별히 여기서 '낳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퀴에오'( )는 정상적인 출산과 비정상적인 출산, 즉 유산 모두를 나타낸다(Hort).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Robertson). 즉 죄는 이미 죽음을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
1: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 야고보 사도는 본서의 수신자들의 잘못된 생각과 행위를 꾸짖으면서도 '사랑하는 형제들아'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에게 지속적인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한편 '속지 말라'(메 플라나스데)가 지적하는 구체적 내용은 ① 13절에 언급된 잘못된 사고와 ➁ 14절의 자기의 욕심에 따른 삶이 가져다주는 일시적 기쁨이나 만족에 속지 말라는 것이다.
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 13절에 나타난 수신자들의 잘못된 견해에 대해서 저자는 믿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설명함으로써 그 견해를 올바로 수정한다. '좋은 은사'(도시스 아가데)에서 '좋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사단이 주는 시험과 대조하기 위해서이다(고전 4:4). 또한 이 은사의 구체적인 내용은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신령한 복(엡 1:3)을 말한다. 그리고 '온전한 선물'(도레마 텔레이온)은 중생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계속되는 신앙생활에서 온전히 성화(santification)에 이르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Manton).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시험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며 인간의 각양 좋은 것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다는 것이다(약 3:11). 즉 믿는 자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시험하시지 않을 뿐더러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빛'은 일월성신(日月星辰)을 가리키는 말로서, '빛들의 아버지'(투 파트로스 톤 포톤)란 창조주로서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유대적 표현이다.
빛들의 아버지께로서‥‥그림자도 없으시니라. -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설명한다. 여기서 '변함'(파랄라게)은 행성들의 공전과 자전으로 인해서 그 밝기가 변함을 말한다. 또한 '회전하는 그림자'(트로페스 아포스키아스마)는 지구의 회전으로 인한 태양 또는 달의 위치에 따라서 사물의 그림자가 크게 혹은 작게 보이는 현상을 말한다. 그러므로 본절은 우주의 모든 만물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수시로 변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은 결코 변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즉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변함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1:18 그가‥‥우리를 낳으셨느니라. - 저자는 본절에서 하나님과 성도들과의 관계를 밝혀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유혹하여 실족케 하는 분이 아님을 확증하고 있다. 전절에서 하나님을 '빛들의 아버지'로 묘사한 저자는 본절에서는 '성도들의 아버지'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전절의 '빛들의 아버지'라는 표현이 '우주의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현인 반면, 여기서의 '성도들의 아버지'라는 말은 '성도들의 구주'로서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들을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을 나타낸다. 한편 여기서 '낳으셨느니라'는 말은 하나님의 첫 창조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재창조,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을 거듭나게 하신 것을 가리킨다.
조물 중에‥‥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거듭나게 하신 목적이다. '첫 열매'라는 말은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첫 아들, 짐승의 초태생, 곡식의 첫 소산 등을 하나님에 바친 데서 온 말이다(출 22:29; 23:19). 이것이 신약에 이르러서는 그 의미가 확대되어 죽은 자 중에 먼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적용되었고(고전 15:20), 또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롬 16:5; 고전 16:15). 즉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모든 피조물 중에서 택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나게 하신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유혹하여 실족케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거듭나게 하신 방법이다. 여기서 '자기의 뜻을 좇아'는 하나님께서 그 어떤 것으로부터 속박이나 강요를 받지 아니하시고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바탕으로 성도들을 거듭나게 하셨음을 나타내며(요 1:13; 엡 1:5; 골 1:10), '진리의 말씀으로'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킨다(막 4:14; 벧전 1:25).
1:19-27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는 신앙생활 권고
본 단락은 시험 중의 성도의 바른 신앙 자세에 관한 교훈을 준 앞 단락 1:2-18에 이어 성도의 신앙생활에 있어 기초가 되는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는 신앙생활에 권면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본문의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절에서는 말하고 성내기보다 듣기에 힘쓰라는 경구(警句)로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의 중요성을, 20,21절에서는 모든 악을 버리고 신앙의 성숙을 이루기 위한 기본 단계로 먼저 하나님의 도를 듣고 온유함으로 받아들일 것을 언급한다.
이어 22-25절에서는 하나님의 도를 듣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그 도를 행할 것을, 끝으로 26,27절에서는 행함의 구체적 방법으로서 고아와 과부들을 돌아볼 것을 권면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① 성도들은 먼저 자신의 말을 내뱉고 또 자신의 감정 때문에 분노하기보다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듣는 일에 힘써야 한다. 성급하게 내뱉는 말이나 분노는 결국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심으로 인하여 교만해 있다는 증거가 된다. 이러한 교만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 있어서나 사람들과의 교제에 있어서 절대적인 장애물이 되는 것인바 우리는 이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잠 11:2; 19:11).
➁ 하나님 말씀은 마치 거울과 같아서 그 말씀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볼 때 우리의 부족함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또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야 할 바를 알게 된다. 즉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 대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절대 유익한 것인 바(딤후 3:16,17) 이를 우리 삶의 유일한 지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③ 성도들은 어린아이처럼 젖을 먹는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말씀을 삶의 구체적인 현장 속에 적용하여 실천하기를 힘써야 한다(시 109:101,106; 히 6:12-14).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말씀을 듣는 것에서 멈추어서는 안되며 듣는 것을 행하는 자여야 하는 것이다.
1:19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 이제 야고보는 수신자들에게 신앙적인 삶의 구체적 내용을 말한다. 먼저 '듣기는 속히 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 말씀을 듣고 이행할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권고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자원하는 마음과 늘 그 말씀을 듣는 일에 부지런하라는 말씀이다. '말하기는 더디 하라'는 말은 ① 하나님의 말씀을 설파할 영적 자질이 갖추어지지 않은 자에 대한 경계(마 12 :36)이자 ② 신앙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공론하거나 지나친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말라는 권고이다(Manton).
성내기도 더디 하라. - '성냄'(오르게)은 분노(wrath)을 의미한다. 이는 순간적인 감정에 사로 잡혀 자신을 완전히 자신의 감정에 내어 맡기는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 구절은 그 순간을 참고 넘겨 어리석음을 나타내지 말라는 권고이다. 이상 본절의 세 가지 권고는 총체적으로 신앙인들에게 그들 자신의 '욕망과 계획'(desire and design)에 너무 쉽게 따르지 말 것을 권고하는 윤리적 가르침이다.
1: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 성도들이 성내기를 더디 해야 할 이유이다. 즉 사람의 성내는 것은 사람의 이해타산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 의 의를 이루는 데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물론 사람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거룩한 분노를 발하는 경우가 없지 않으나(민 25:6-15) 그것은 극히 드문 경우이며, 보편적으로 사람의 성냄은 비록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 하에 행해진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는커녕 오히려 방해만 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하나님의 의'(디카이오쉬네 데우)는 인간이 행해야 할 하나님의 요구(마 6:33)로서의 계명 준수를 가리키는지(Burdick),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전자가 적합하다.
1:21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 본절과 다음절은 전절에 언급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성도들이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한 언급이다. 여기서 '더러운 것'(파산 뤼파리안)은 본래 몸에 불결하게 생긴 상처나 신체의 정상적 작동을 방해하는 질병 또는 옷에 붙어 있는 더러운 때를 가리켰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신학적으로 죄와 관련되어 육체의 정욕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벧전 3:21). 또한 '넘치는 악'(페릿세이안 카키아스)은 마음속에 잠재하였던 육체의 정욕이 밖으로 표출된 구체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한편 '내어버리고'(아포데메노이)는 '벗다'라는 뜻을 지닌 '아포티데미'( )의 제 2부정과거 중간태 분사로 본래 세례 의식에서 온 용어이다. 즉 세례 시에 세례를 받는 사람은 자신이 입었던 옷을 벗어 버리고 새 옷을 받아 입음으로써 자신이 새사람이 되었음을 나타냈다. 그러므로 본 구절에는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은 자신이 이전에 지니고 있었던 나쁜 행실을 버리고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에 맞는 행실을 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고후 5:17).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 '마음에 심긴 도'(엠프톤 로곤)는 스토아 철학 관점에서는 본래 인간의 마음속에 본유적(innate)으로 존재해 있는 이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진리의 말씀'이나 '생명을 구원한 하나님 말씀'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Martin). 그리고 '온유함으로'(엔 프라우테티)는 '겸손하고 복종하는 마음으로'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성도들이 생명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책임 있게 응답하며 실행해야함을 강조한 말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옛 모습을 버리는 소극적인 면에서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다.
1:22 너희는 도를 행하는‥‥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 말씀의 실천을 강조한 구절이다. 즉 저자는 말하기를 더디 하고 듣기는 속히 할 것(19절)을 권면한 데 이어 본절에서는 말씀을 듣는 데 그치지 말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도록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행하다'(포이에오)라는 말은 말씀을 받아들여서 자신의 삶의 빛(시 119:105)으로 여겨 그 말씀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는 삶을 말한다. 이와는 반대로 '듣기만 하다'(아크로아오마이)라는 말은 말씀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고 실천은 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야고보는 이처럼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를 가리켜 스스로 '자기를 속이는 자'(파랄로기조메노이 헤아우투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자기를 속인다'는 것은 자기의 논리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사여구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켜 스스로를 기만하는 행위를 말한다. 자기 책임을 수행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참여할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기만하는 것이 분명하다(마 7:21). 그리스도는 이러한 신앙인에게 더 큰 책망을 하셨음을 성도들은 기억해야할 것이다(눅 6:49).
1:23,24 누구든지 도를 듣고‥‥곧 잊어버리거니와. - 저자는 본문에서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치 않는 자를 거울로 자기의 얼굴을 보고도 돌아서면 금방 자기의 얼굴을 잊어버리는 어리석은 자에 비유하고 있다. 여기서 '자기의 생긴 얼굴'(토 프로소폰 테스 게네세오스 아우투)은 '자기의 태어날 때의 얼굴'이란 뜻으로, 사람의 평상시의 자기 얼굴을 말한다. 인간은 거울을 보면서 제 얼굴의 얼룩을 발견하여 얼굴을 단정히 한다. 그런데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본질적 모습을 발견하게 하는 일종의 거울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말씀을 깊이 알면 알수록 그 말씀으로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그 말씀으로 자신의 삶에 죄된 모습을 발견하여 자신의 삶의 태도를 바꾼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는 자는 말씀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의 죄악을 발견하고도 그 삶에서 돌이키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얼굴의 얼룩을 발견하고도 지우지 않는 사람과 같이 계속해서 하나님이 없이 부끄러운 죄악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1:25 자유하게 하는‥‥일에 복을 받으리라. - 전절(23,24절)과 대조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에 대한 언급이다. 여기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문자적으로 '완전한 율법이요 자유의 율법'이란 뜻으로 완전치 못하고 사람을 속박케 하는 모세의 율법에 대조되는 '믿음의 법'(롬 3:27), '생명과 성령의 법'(롬 8:2) 등으로 불리는 '그리스도의 복음'(고전 9:12)을 가리킨다. 실로 그리스도께서는 오셔서 사망의 종 노릇하던 우리를 자유케 하셨고(요 8:32; 갈 5:1),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셨다(마 5:17). 한편 여기서 '들여다보고 있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큅사스'( )는 '몸을 구부려서 들여다보다', '곁에서 주의 깊게 지켜보다'를 의미하는 '파라퀴프토'( )의 제 1부정과거 능동태 분사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자세히 관찰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란 ① 하나님의 말씀을 성의를 다해 연구하는 자세를 가진 자요, ➁ 자신이 받은 말씀을 성실히 지키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 자를 가리킨다(시 119:101). 이와는 반대로 '듣고 잊어버리는 자'(아크로아테스 에필레스모네스)란 말씀을 듣고 실행치 않는 자를 가리킨다. 하여튼 참 신앙이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이다. 한편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는 말은 행함으로 복을 얻는다는 말이 아니라 행함 그 자체가 복이라는 말이다.
1:26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이 사람의 경건은 헛 것이라. - 지금까지 말씀을 듣는 것과 행하는 것에 대하여 논함으로 말씀의 실천을 강조한 저자는 이제 다시 19절로 돌아가 말하는 것과 관련하여 교훈하고 있다. 본절에는 특별히 '경건'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먼저 나오는 '경건'(드레스코스)은 '종교적', 또는 '신앙심 깊은'이란 뜻이며, 뒤에 나오는 '경건'(드레스케이아)은 '기도', '예배 참석' 등의 '종교 준수 의식'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본절은 '만일 누가 자신을 종교적 또는 신앙심이 깊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삼가 하지 않고 남을 비판하며 비방하고 다닌다면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기만적 행위로 그의 종교 행위는 헛된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를 갖는다(눅 18:9-12). 결국 본절은 외식하는 자에 대해 주의 깊은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한편 여기서 '혀를 재갈 먹이지 않는 행위'는 구체적으로 ① 거짓 맹세를 하고(전 9:2) ② 저주를 하는 행위(창 27:29) 등을 가리킨다.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 전절에서는 그릇된 경건을 언급하였고 이제 본절에서는 참된 경건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라는 말은 참된 신앙심은 사람들이 보이는 가시적인 상황에 의해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 즉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판단하실 수 있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판단되어질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에 의해 인정받는 경건을 야고보는 두 가지로 나타내고 있다. 첫째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돌아보고'(에피스케프테스다이)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위로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Manton). 특별히 야고보는 돌보아야 할 대상을 두 계층으로 한정했으나 그 의미는 환난에 처한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둘째는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세속은 신약에서 보통 '세상'이라고 번역되는데 '세상의 정욕'(요일 2:16), '악한 세상 풍습'(롬 12:2)등 거의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야고보의 권고는 수신자들이 자신들의 악한 본성이나 당시에 유행하는 사조(思潮)를 따르지 말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야고보가 이처럼 이웃 사랑과 거룩한 생활을 함께 강조한 이유는 신앙인의 참된 신앙이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성도 각자의 생활 가운데서 드러나는 것임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야고보-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은 자
1. 인적 사항
① '야고보'는 '발꿈치를 잡음' 또는 '추종자'라는 뜻.
➁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예수의 친동생(마 13:55; 막 6:3).
➂ 예루살렘 교회의 초대 감독(행 12:17; 15:13; 21:18).
2. 시대적 배경
A.D. 30-62년경에 주로 활동, 이 시기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함께 태동한 초대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여 사마리아와 팔레스틴과 로마 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어 가던 때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구약 시대에서 신약 시대로 갓 이전된 과도기로서 구약과 신약과의 관계,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등 여러 가지 신학적 문제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조직도 거의 미비된 상태여서 많은 혼란을 겪던 격변기였다. 또한 이 시기에 로마 제국은 디베료 가이사(A.D. 12-37년), 칼리굴라(A.D. 37-41년), 글라우디오(A.D. 41-54년)를 거쳐 네로(A.D. 54-68년)의 통치 시대를 맞고 있던 때로서 기독교에 대한 유대교의 종교적 박해에 이어 서서히 로마 제국의 정치적 박해가 가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주의 형제 야고보는 당시 초대 교회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 교회의 초대 감독으로서 그 직무를 수행하였던 실로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이었다(갈 2:9,12).
3. 주요 생애
*. 예수 부활 이전
1) 출생
2) 나사렛에서 성장
3)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불신함 A.D. 27-30년 요 7:1-10
4) 예수의 죽음을 목격함 A.D. 30년
*. 예수 부활 이후
1) 예수 부활을 목격 A.D. 30년 고전 15:7
2) 예수를 영접, 성령을 체험함 A.D. 30년 행 1:14: 2:14
3)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됨 행 15:13-21
4) 야고보서를 기록함 A.D. 46-49년 약 1:1
5) 공회에서 돌에 맞아 순교한 것으로 전해짐 A.D. 62년경
4. 성품
① 예수의 생전에는 그분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다가 부활을 목격한 후에야 인정하고 주님으로 영접하였던 완고한 성격의 소유자(마 13:57; 막 3:21,31).
② '약대의 무릎을 가진 자'라는 그의 별명이 전승으로 전해진 것으로 보아 철저하게 주의 권능에 의지하며 기도에 힘쓴 자.
③ 그가 기술한 서신의 내용을 볼 때 실천적인 믿음의 행위를 매우 중시한 자.
④ 자신을 주님의 혈육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단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주님 영접 후에 매우 겸손해진 자(약 1:1).
5. 구속사적 지위
① 자신의 친형제인 예수를 메시야로 증거함으로써 예수가 단지 혈육으로 난 인성(人性)만이 아니라 신성(神性)까지도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 누구보다 확증적으로 보여준 자.
➁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구약 시대에서 신약 시대에로, 유대인 중심에서 세계 만민에게로 구속사의 시대와 그 대상이 막 전환되던 과도기에 교량적 역할을 한 자(행 15:13-21; 갈 2:9).
6. 주요 업적
①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됨(고전 15:7).
② 예루살렘 교회의 초대 감독으로 활약함(행 15:13; 21:18).
7. 주요 실수
①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를 불신함(막 3:21,31).
8. 평가 및 교훈
① 자신의 형제라는 인간적인 선입견과 고정 관념에 의해 예수의 메시야 됨을 불신했던 야고보는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고서야 비로소 메시야 됨을 믿었고, 이후 철저한 그리스도의 추종자로서의 삶을 살아갔다. 이러한 야고보의 회심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가진 성도들에게 큰 용기를 준다. 즉 이는 예수께서 살아계실 때 믿지 않았으나 결국 주를 영접한 야고보처럼 지금은 어떤 선입견과 편견으로 주를 믿지 않는 가족이 있다 해도 우리가 계속하여 기도할 때 언젠가는 변화되어 주님을 영접하도록 주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실례가 되는 것이다.
② 야고보가 구약 시대에서 신약 시대에로 갓 이전된 과도기에 갖가지 산적되어 있던 어려운 문제들을 잘 감당함으로써 초대 교회 신앙의 기초를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은 무릎이 낙타의 무릎처럼 될 정도로 철저하게 주께 기도하는 삶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이는 실로 주께서 맡기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할 신앙 자세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를 잘 보여 주는 것이다.
③ 그의 서신의 내용을 통해 볼 때 야고보는 겸손의 사람, 기도의 사람, 거룩한 삶을 살아간 실천적 믿음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신앙의 지식은 나날이 늘어가되 그 생활은 오히려 형식적이 되고 믿음의 열매가 없는 현대의 성도들에게 큰 도전을 주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진정한 믿음은 알고 깨닫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생활로 선하게 나타나야 하는 것임을 깊이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약 2:22).
9. 핵심 성구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갈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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