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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나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개역개정; 요일 2:28)
요한 일서 각장의 목차
제 1장 본서 집필 동기와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본 자세
제 2장 계명 준수의 촉구와 형제 사랑 실천 권면, 세상 죄 경계 및
적그리스도에 대한경계
제 3장 성도의 신분과 범죄에 대한 경계 및 형제 사랑의 필연적 이유, 방법, 결과
제 4장 참된 교제를 위한 진리 분별의 촉구 및
사랑의 근원, 사랑의 공효, 사랑의 실천 촉구
제 5장 참된 교제의 기초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믿음의 결과 및 성도의 견인(堅忍)
요한일서의 서론
1. 제목
본서의 한글 표제 '요한일서'는 저자의 이름과 편지 집필 순서를 반영한 것으로서 헬라어 사본 중 이오안누 에피스톨레 알파( ), 즉 '요한의 첫 번째 편지'라고 기록된 시내 사본( )의 표제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헬라어 사본 중 알렉산드리아 사본(A)이나 바티칸 사본(B)에는 이오안누 알파( ), 즉 '요한의 첫 번째'라고만 기록되어져 있으나 그 의미는 시내사본과 같다. 그리고 레기우스 사본(L)에서는 '거룩한 사도 요한의 공동 서신'이란 뜻의 표제를 붙였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의 표제에서는 ‘요한의 첫번째 편지'(The First Epistle of John)로 표기되었다.
2. 저자와 기록 연대
본서의 저자는 요한복음의 저자이기도 한 사도 요한이라는 견해가 전통적으로 지배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인 견해와 반대되는 견해들도 제시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견해는 요한2,3서의 장로 요한을 사도 요한과 다른 동명이인으로 보아 본서의 저자를 장로 요한으로 제시하는 견해이다(Hilgenfeld, Davidson). 이들은 이처럼 복음서와 요한 서신의 저자를 구분하는 근거로 ①본서의 내용이 바울 서신서와 흡사한 점, ② 사랑의 사도로 알려진 요한이 이단에 대해 과격한 표현을 쓴 점, ③ 어부의 글로서는 너무 수준이 높은 점 등을 든다.
그러나 이러한 반론에 대해 성경의 내증뿐만 아니라 외증 또한 본서의 저자가 사도 요한임을 강하게 제시하고 있는데, 먼저 본서의 외증(外證)을 살펴보면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갑(Policarp)이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본서를 스승의 저작으로 분명히 밝히고 인용하고 있으며 그 폴리갑의 제자인 이레니우스(Irenaeus)도 자신의 저서 중에서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고 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오리겐(Origen), 터툴리안(Tertullian)을 비롯한 초대 교회의 속사도들과 교부들이 본서의 저자를 '사도 요한' 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본서의 내증(內證)을 살펴보면 본서 자체 안에는 사도 요한이 저자임을 말해주는 직접적인 구절은 없으나 본서의 내용이나 사상, 언어, 문체 등이 요한복음과 현저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바 이를 통하여 볼 때 본서가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은 분명하게 입증된다. 본서와 요한복음의 공통된 사상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의 성육신' (4:2; 요 1:14), '그리스도는 생명이시요 진리이심' (1: 2; 요 5:26), '빛과 어두움'(2:9; 요 12:35),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4:9; 요 3:16), '사랑의 계명'(3:23 ; 요 13:34), '신자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2:24; 요 6:56) 등 수없이 많다. 그러므로 본서의 저자는 '사도 요한'임이 확실시된다.
본서 저자로서의 사도 요한의 인적 사항과 주요 행적에 관해서는 소위 제 4복음서라 일컫는 요한복음서론, '저자와 기록 연대 및 요일 2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한편 여기서는 그의 복음서와 서신서들에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기본 신학 사상, 문체, 어휘들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살펴봄으로써 그의 저서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사도 요한은 그의 전 저서들을 통해 기독교의 기본 진리들인 기독론, 구원론, 성령론, 교회론, 종말론 등에 대해 신약성경의 다른 책들보다 훨씬 자세하고 풍부하게 다루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기독론에 관한 언급이 매우 많이 나타나며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으로 가능해진 하나님과 성도간의 유기적 연합 관계를 자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은 이러한 자신의 신학 사상을 진술함에 있어서 문체에 직유나 은유 등의 수사법을 동원한 꾸밈이 거의 없고 구문도 매우 단순한 구문을 씀으로써 복잡하고 어려운 신학 사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간결한 금언 같은 문체로 자신의 신학사상을 매우 돋보이게 하며 히브리 문헌에서 많이 사용되는 반복법, 대조법 등을 자주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교훈을 보다 장중하게 전달하고 있다. 예를 들면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등이 있다. 그의 서신서들에서는 구약이 거의 인용되지 않고 있는 것도 그의 특징이다. 또한 독자들을 향하여 '나의 자녀들아'(요일 2:1,12,28), '사랑하는 자들아'(요일 4:1,7; 요이 1:1; 요삼 1:1,5,11) 등의 매우 부드럽고 친근한 호칭들을 사용함으로써 사랑의 사도로서의 자신의 면모를 잘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본서의 기록 연대는 요한계시록을 제일 후대작으로 본다면 요한이 박해받아 밧모 섬으로 유배되기 전 에베소에서 목회하던 시절로 보아야 한다. 또한 요한의 초기 저작인 요한복음의 저작시기를 A.D. 85-90년 이전 시기로 본다면 요한 서신들은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 사이의 기간에 기록되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서는 A.D. 90-95년경 기록되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본서의 기록 장소는 에베소이다. 또 본서의 수신자는 사도 요한이 책임을 맡고 있던 에베소 교회를 비롯한 소아시아 지역들일 것으로 추정되며 본서는 이 교회들에 회람되어 예배 시 공적 문서로서 읽혀졌을 것이다.
3. 요한일서의 기본 구성
요 점 |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참된 교제 | ||||
문 단 구 분 | |||||
집필 동기 | 하나님과의 교제의 자세 | 하나님과의 교제 시 유의점 |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의 특징 | 맺음말 | |
주 제 | 참된 교제의 근거 | 하나님과 바른 교제의 실천 | 참된 교제의 기초가 되는 믿음 | ||
문 체 | 간결체와 대조법이 많이 사용된 서간문 형식을 탈피한 서신서 | ||||
장 소 | 요한 말년에 목회하던 에베소교회에서 기록하여 소아시아 각지로 보낸 회람 서신 | ||||
기 간 | AD. 30-110년 경 |
4. 신학적 집필 동기와 배경
사도 요한이 집필한 요한의 저서들은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들을 체계화한 사도 바울의 서신들이 기록된 후에 쓰여진 것들로서 바울 서신이 기독교 교리의 기본적인 골격을 형성한 것이라면 요한 서신들은 그 모양새를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본서를 비롯한 요한의 다섯 저서(요한복음, 요한1·2·3서, 요한계시록)는 기록 기간이 20년 안팎이어서 그 기본적인 배경이나 집필 동기가 유사하다. 다만 그러한 집필 동기를 나타내는 방법에 있어서 방법과 그 소재를 달리하고 있을 뿐이다. 즉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건들에 대한 기술을 통해서 요한1서는 보다 신학 원론적인 면에서, 그리고 요한2,3서는 거짓 순회 교사와 관련된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기술을 통해서 각각 예수 그리스도가 신인 양성을 가지신 우리 구주라는 사실과 성도들은 바로 이러한 복음의 진리 안에서 하나님과 참 교제를 나누는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세부적인 사실은 각권 서론을 참조토록 하라.
이제 이런 관점에서 본서에 나타나 있는 집필 동기와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본서가 기록될 당시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교회가 설립된 지 약 50년 정도가 경과된 때로 초대교회가 대내외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때였다. 먼저 외부적으로 보면 본서가 기록된 당시로마의 황제는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A. D. 81-96)인데 그는 열렬한 이시스 신(Isis)의 숭배자로서 황제 자신도 신이라 칭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자신에게 복종치 않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극심한 박해를 가하였는데 이때 사도 요한도 밧모 섬에서 1년이 넘는 세월을 유배 생활로 보내야 했다. 이러한 극심한 박해로 말미암아 사도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성도들의 적극적인 전도 활동으로 인해 빠른 속도로 확장되어 가던 기독교는 주춤하게 되었다. 이러한 외적인 박해 외에도 초대 교회는 이단의 공격으로 인하여 내적으로 심한 갈등을 겪게 되었다. 특히 당시 교회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 영과 육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이원론적 사상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을 부인하고, 구원은 육체와 상관없으며 육체는 다만 악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육체의 타락과 죄악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도덕률 폐기론(Antinomianism)으로 기독교 윤리를 파괴하려는 영지주의(Gnosticism) 이단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이에 사도 요한은 이단 사상을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의 위협과 위험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본서를 기록한 것이다. 즉 본 서신은 그리스도는 신인양성(神人兩性)을 가지신 우리 구주가 되신다는 정통적인 그리스도론을 확립시킬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을 성도들에게 심어 주어 그들로 하여금 진리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참되고 살아 있는 교제를 갖게 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다.
5. 요한일서의 내용 전개
앞의 신학적 집필 동기와 배경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본서는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이 발흥하여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성도들을 미혹하여 경건한 삶을 파괴하는 등 소아시아지역에 있는 교회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자 그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반박하고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심어주어 교회를 굳건히 세우고자 기록되었다. 특히 본서는 '사랑의 서신' 이라 불리울 정도로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 속에서의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고 그것을 구원론적 관점에서다루고 있다. 전 5장으로 구성된 본서는 서신서 이면서도 서신서의 일반적 양식을 초월하여 앞뒤의 문안 인사를 완전히 생략하고 일종의 논문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일반적인 논문의 기본 구조에 따라 1:1-4의 서론 부분과 1:5-4:21까지의 본론 부분, 그리고 5:1-21까지의 결론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이제 이러한 구분에 따라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서론(1:1-4)
본 단락은 본서신의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요한은 서신의 일반적인 형식인 문안 인사를 생략하고 곧바로 자신이 본서를 기록한 동기에 대하여 밝히면서 하나님과 성도간의 교제를 가능케 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 양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목격한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 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성자 하나님(God, the Son)이시며,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성육신하사 인성을 취하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仲保者)이시며, 그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참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으며 이러한 복음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본서를 기록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2) 본론(1:5-4: 21)
본 단락은 본서의 주요 주제인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부로서 이 부분은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1:5-2:11에서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에 있어서의 기본자세에 대해, 2:12-29에서는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가지면서 경계해야 할 것에 대해, 3:1-4:21에서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도의 삶의 특징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ㄱ. 참된 영적 교제의 기본자세(1:5-2:11)
본 단락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과 참된 영적 교제를 나누기 원하는 자들이 교제를 하기 전에 먼저 가져야 하는 조건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 기본자세들이란 첫째, 빛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요(1:5-7), 둘째는 죄를 자백하는 것이다(1:8-10). 이는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가지기 위해서는 빛된 그분의 속성에 걸 맞는 성도의 내적 변화가 있어야 하며, 또 그러한 교제에 장애가 되는 죄는 항상 제거되어야 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할 것(2:1-6)을 말하고 이어 계명의 핵심인 형제 사랑을 실천할 것을 권하고 있다(2:711).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성도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ㄴ. 영적 교제를 가질 때 경계해야 할 것(2:12-29)
본 단락은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자들이 경계해야 할 것 두 가지를 교훈하고 있다. 요한은 먼저 세상을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경계(2:12-17)를 주는데 그 이유는 이 세상이란 마귀에게 속한 것이므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교제나 믿는 성도들 간의 교제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으므로(마 6:24) 만약 세상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과 형제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요한은 하나님과의 교제나 형제들과의 교제를 방해하는 세상과의 교제를 단절하고 참된 영적 교제를 하라고 권면한다. 다음으로 요한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음을 지적하고 이들을 경계할 것을 교훈한다(2:18-29). 요한은 먼저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밝히고(18-23절)나서 그들을 막는 방법을 제시한다(24-29절). 저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속하지 않은 자들이며(19절),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부인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하나님조차도 부인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22절). 그러므로 성도들이 이러한 적그리스도들을 물리치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을 때 들은 복음의 진리 안에 굳건히 거하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교훈한다(24-29절).
ㄷ.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도의 삶의 특징(3:1-4:21)
본 단락은 지금까지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를 위해 경계해야 할 것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적그리스도를 경계한 데 이어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갖는 성도의 삶의 특징을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면 두 가지 측면에서 제시함으로써 성도들로 하여금 그러한 삶을 살도록 교훈한다.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가지는 성도의 삶의 특징은 먼저 소극적인 측면에서는 죄를 멀리하고 불의를 행치 않는 것이다(3:1-12). 여기서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의 구별은 그 행위가 어떠한가를 보고 알 수 있음을 말함으로써 성도의 행함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다음으로 적극적인 측면에서의 성도들의 삶의 특징은 말과 혀로만이 아닌 진실과 행함으로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며(3:13-24), 그러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욱 돈독히 발전시킬 수 있음을 사도 요한은 말하고 있다(4:1-21).
3) 결론(5 : 1-21)
본 단락은 본서의 최종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서론과 마찬가지로 문안 인사를 생략한 채 하나님과의 참된 영적 교제의 기초가 되는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본서를 종결짓고 있다. 즉 1-5절에서는 참된 교제의 기초가 되는 믿음의 중요성을, 6-12절에서는 믿음의 대상인 그리스도께서 참구속주요 영생을 주시는 분이심을, 13-15절에서는 바른 믿음의 결과로서 성도들에게는 영생과 기도 응답이 주어짐을 말하고, 끝으로 16-21절에서는 죄에 빠진 형제를 위해 중보 기도할 것을 언급한 후 믿는 자는 결코 멸망치 않는다는 성도의 견인(堅忍)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6. 요한일서의 주제들
본서는 ‘사랑의 서신'이라 불리울 정도로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를 위하여 이단사설(異端邪說)을 배격하고 복음의 진리 위에 굳게 설 것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고 그것을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이러한 본서의 대주제는 ‘교제' (fellowship)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수직적 관점에서 하나님과 그리고 수평적 관점에서 이웃과의 교제 속에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제 이러한 '교제'라는 대주제하에 본서의 관련 주제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통하여 나타난다. 본서에서 사도 요한이 계속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라는 것이다. 성도들은 종종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여 종교적인 열심을 가지면서도 형제들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심지어는 자기와 의견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 등으로 미워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마 22:37-39; 막 12:30, 31; 눅 10:27)과 어긋나는 것으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형제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증명되기 때문이다(요일 4:12,20). 따라서 성도들은 입술로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되며, 형제를 사랑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② 진정한 이웃 사랑은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비롯된다. 이웃 사랑의 원천은 우리의 힘이나 재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흘러나오는 믿음에 있다. 그러므로 이웃에게 베푸는 사랑의 목적 또한 그 힘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성도들은 자신의 빛을 내는 발광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빛을 받아 세상의 어두움을 물리치는 거울과 같은 반사체임을 기억하여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어야 할 것이다(마 5:16).
③ 죄인이었던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궁극적으로 신인 양성을 가지신 중보자로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를 위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한 확신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④ 성도의 죄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파괴한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므로 죄를 용납하시지 않으시며 미워하신다. 따라서 성도가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갖기를 원한다면 죄 가운데 거하는 생활을 해서는 안 되고 빛 가운데서 행하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이웃에게 죄를 짓지 말아야 하며 만약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즉시 회개함으로 관계를 회복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⑤ 성도는 모든 영과 가르침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진리의 영인지 아니면 마귀에게 속한 거짓된 영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마귀에게 속한 영들이 진리의 영을 가장하여 성도들을 미혹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한 구원과 영생만을 믿고 이것 외에 다른 가르침을 가르치는 모든 영들을 배격해야 한다.
⑥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진리의 영이시다. 성도들 가운데 내주해 계시는 성령은 성경을 기록하신 원저자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의 진리에 대해 증거하시는 일을 하고 계신다(요 15:26,27). 따라서 성도들은 날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조명(illumination)하심을 받아 성경 말씀을 묵상함으로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대로 실천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⑦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우상(偶像)을 섬기는 것이다. 성도는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있는 특권이 있는 자는 없다. 두 주인을 섬기는 자는 마음에 정함이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종국에는 망하고 만다. 세상과 하나님,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는 자는 살아계신 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일 뿐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자신들을 지켜 진리 가운데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을 살도록 애써야 한다(마 6:24).
7. 요한일서의 그리스도
신 · 구약 성경 66권은 그 내용에 있어서 각각 다른 시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거나 아니면 서로 다른 주제의 교리들을 논하고 있다. 그리고 그 범위는 매우 광범위하고 심오하다. 또 그 문학적 형식도 율법 법전, 역사서, 예언집, 시, 격언집, 서신서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성경(the Bible)은 이처럼 그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실로 다양하지만 그 근본 주제나 목적은 모두 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한 우리 죄인의 구원(救援)이다. 즉 성경은 예수의 구속 사역이라는 한 동일한 주제의 여러 측면과 역사를 다양하게 보여 주는 책이라 하겠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 66권 모두에서 그것이 직 · 간접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진리를 발견하고자 애쓰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참된 영적 교제를 언급하고 있는 본서가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생명이신 그리스도
본서에서는 단호하게 그리스도를 태초부터 계신 생명의 주로 묘사하고 있다(1:1,2). 이는 절대적 신성을 소유하신 성자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 죄를 대속하여 주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요 구주이심을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안에만 생명이 있으며 이 사실을 믿지 않고 또 그 구원 진리를 왜곡 호도하는 이단 세력에게는 멸망과 죽음만이 있을 뿐이며 이를 믿는 자만이 참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본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仲保者)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1:3).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에 세워진 구속의 법에 따라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요 1:14; 빌 2:6-8). 이렇게 성육신(Incarnation)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자신의 몸을 대속 제물로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중보 사역을 이루신 것이다(엡 2:11-22). 그러므로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8. 요한일서의 핵심 단어, 핵심 절, 핵심 장
1) 핵심 단어: 사귐, 사랑
본서의 중요한 주제로서 요한 사도는 하나님과의 참된 사귐이 있느냐 없느냐 로서 참성도와 거짓 이단세력을 구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요한은 이단이냐 아니냐 라는 평가의 기준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정립되어 있는가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았다. 또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사귐이 있는 자는 마땅히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자라고 본다. 즉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교제가 수평적인 이웃 사랑의 원동력이며 출발점이 된다는 것이다.
2) 핵심 절:2:28
•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2:28)
3) 핵심 장 : 제 5장
제 5장은 본서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를 위하여 이단 사설을 배격하고 참 복음의 진리 위에서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을 교훈하는 본서의 기록동기를 가장 뚜렷하게 반영하고 있다. 즉 본장은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인 양성을 가지신 우리의 구주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고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만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 교제를 나눌 수 있으며 또 진정한 형제 사랑의 실천으로 죄에 빠진 형제들을 위하여 중보 기도함으로 그들을 영생으로 인도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9. 요한일서에 나타난 주요 지명들
10. 요한일서와 현대 성도
‘사랑의 사도인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이후 자신이 돌보는 교회들에게 편지로서 어두움과 빛, 오류와 진리, 죽음과 생명 등의 간명한 어휘들로 기독교의 심오한 진리들을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본서는 복잡하고도 미묘한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또한 초대 교회 당시와는 비록 그 성격이 다르지만 오히려 그 때보다 더 많은 이단 세력이 도처에서 활동하는 가운데 사는 현대 성도들에게 어떤 교훈을 줄 수 있는가? 본서에서는 무엇보다도 현대의 많은 사상들이 도전하며 의심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양성(神人兩性)에 대해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이나 인성 중 하나만 가지셨거나 또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존재가 아닌 사람의 모든 인성을 가지신 인자(人子)이셨으며 또한 구속사적 경륜(救贖史的 經綸)을 진행시키시는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의 한 분이신 성자 하나님으로서 절대 신성을 가지신 분이심을 명백히 가르쳐주고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 양성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비성경적이며 비진리임을 보여 주는 본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복음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며 또 그를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를 나눌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본서를 통해 현대 성도들이 얻을 수 있는 교훈들은 다음과 같다.
①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죄를 멀리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빛되시기에 그 앞에 서면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이 필요하다.
② 신인 양성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며 우리의 구속주가 되신다는 사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믿음을 파괴시키려는 사단의 획책은 초대 교회 시대 이후 약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교회사상 한 번도 없었던 적이 없으며 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인 바 이 믿음에 올바로 서는 일은 성도의 신앙생활에 필연적이라 하겠다.
③ 이단 세력에 빠져 있는 자들을 구원하는 길은 그들을 훈계하거나 논쟁하는 길도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 가운데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들에게 전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그들이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돌아오게 해야 한다.
④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인간의 지혜로움보다 뛰어남을 인정해야 한다. 성도는 과학 문명과 사상들이 아무리 발달하고 진보를 거듭하는 시대에 산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을 한순간에 없애 버리실 수도 있으시며 완전하게 성취시키실 수도 있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를 분별하여 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시대가 더욱 복잡해질수록 더욱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11. 요한일서의 특징
① 서신의 일반적인 형식을 탈피하고 있다. 본서에는 문안 인사가 생략되어 있으며, 내용 또한 호격의 잦은 사용으로 편지글 형식이라기보다는 교훈서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② 단순하고 평이한 문장들을 사용함으로써 영적으로 깊은 진리에 대해 보다 쉽게 이해토록 하고 있다. 또 빛, 사랑, 생명이란 단어 등을 반복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메시지를 강하게 부각시켜 독자들로 하여금 오래토록 기억할 수 있게 하고 있다.
③ 사랑의 실천(Actions of Love)을 강조하고 있다. 수직적 사랑과 수평적 사랑을 잘 설명함으로써 이웃과 형제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이단을 물리치는 무기이며 생명을 얻은 자의 마땅한 의무임을 가르치고 있다.
④ 빛과 어두움, 하나님과 사단, 두려움과 사랑 등 대조적인 어구를 사용하고 있다. 본서는 이단에 대한 경계와 진리에 대한 설명을 이러한 대조적인 어구로서 보여 줌으로써 참 진리가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⑤ 사단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즉 악한 자, 죄를 짓는 자가 속해 있는 죄의 근원, 하나님의 자녀를 완전히 정복할 수 없음, 마지막 때까지 계속 사역함 등 사단의 간교한 술책을 보여 준다.
12. 개요
○ 서론: 1:1-4/ 본서 집필 동기
○ 본론: 1:5-4:21
Ⅰ. 1:5-2:11/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의 기본자세와 방법
1. 1:5-7/ 빛 가운데서 행함
2. 1:8-10/ 죄의 고백과 용서
3. 2:1-6/ 계명 준수
4. 2:7-11/ 형제 사랑
Ⅱ. 2:12-29/ 하나님과의 교제시의 유의점
1. 2:12-17/ 세상과의 교제 경계
2. 2:18-29/ 적그리스도에 대한 경계
Ⅲ. 3:1-4:21/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도의 삶의 특징
1. 3:1-12/ 소극적인 측면에서의 특징
2. 3:13-4:21/ 적극적인 측면에서의 특징
1) 3:13-24/ 사랑의 이유, 방법, 결과
2) 4:1-6/ 거짓 진리와 참 진리의 분별
3) 4:7-10/ 사랑의 근원
4) 4:11-18/ 사랑의 공효
5) 4:19-21/ 사랑의 실천 촉구
○ 결론/ 5:1-21
1. 5:1-15/ 참된 교제의 기초로서의 믿음
1) 5:1-5/ 참된 교제의 기초로서의 믿음
2) 5:6-12/ 믿음의 대상 그리스도
3) 5:13-15/ 믿음의 결과
2. 5:16-21/ 중보기도 명령과 성도의 견인
1) 5:16-17/ 중보기도 명령
2) 5:18-20/ 성도의 견인
3) 5:21/ 우상 숭배 경계
요한 일서 서론 특별자료
영지주의(Gnosticism)의 이해
초대 교회 시대의 세계는 곧 로마 제국이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문화는 그리이스 전통 문화를 중심으로 하여 소아시아, 페르시아, 이집트, 심지어는 인도 등의 문화를 혼합시킨 소위 헬레니즘(Hellenism) 문화였다. 초대 교회는 그 순수 정통 신앙을 유지하기 위하여 초기부터 이러한 세속 이방 문화를 배경으로 한 이단사상(異端思想)의 거센 도전에 직면하여야 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소위 헬레니즘 사상이 근간으로 하고 있는 이원론적, 범신론적 우주관과 기독교 순수 신앙을 혼합시켜 만든 영지주의 (靈知主義, Gnosticism)였다.
물론 이 영지주의가 본격화된 것은 A.D. 2세기경이었으나 이미 A.D. 1세기 중엽의 초대 교회 시대부터 소위 ‘전영지주의자들'(Pre-Gnosticism)이 발흥하여 초대 교회의 순수 신앙을 위협하였다. 신약 성경 중에서 제 4복음인 요한복음, 바울의 목회 서
신들, 그리고 특히 요한1, 2, 3서와 베드로후서, 유다서 등은 이런 영지주의의 도전을
직 간접적인 배경으로 하여 쓰여졌다.
이에 사도 시대, 속사도 시대 그리고 교부 시대에 걸친 초대 교회사(初代敎會史)의
주요 배경의 하나였던 영지주의를 개략 하면 다음과 같다.
1. 정의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는 '지식'을 의미하는 헬라어 '그노시스'( )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노시스는 물론 일반적 지식을 가리키기도 하였지만 영지주의에 있어서는 특별히 신적 비의(秘義)에 해당하는 영적 지식 곧 허망한 세상일뿐인 이 육적 세상이 아닌 참 세상인 영적 세계에 대하여 비의적 계몽에 의하여 얻게된 지식을 가리켰다. 즉 세상은 저급하고 무가치한 물질세계와 영원하고 완전한 영의 세계로 이분되어 있으며 인생은 그 영혼이 육체에 갇힌 불완전한 존재인바 이제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영적 세계로 복귀함으로 소위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영적 세계에 속한 신적 의지로부터 계시된 지식이 필요한데 이것이 곧 영지이며 이런 영지를 중심으로 한 이원론적 우주관과 구원관을 가진 사상이 곧 영지주의인 것이다.
그러나 위의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영지주의'는 헬라 사상과 동방 종교들의 신비 사상, 그리고 소위 중간기 시대를 무대로 하여 생겨난 유대교(Judaism)와 기독교의 사상이 혼합된 일종의 혼합사상으로 각 시대와 지방에 따라 심지어 각 인물에 따라 그 사상과 체계가 달랐다. 때문에 영지주의가 어떤 것이라고 단정지어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다만 스스로 '영지주의자'라고 칭하면서 이원론 사상에 근거하여 물질은 무조건 악하고 영혼만이 선하며 인간이 이 악한 물질세계에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초월자로부터 계시되는 지식 곧 영지(靈知)를 소유해야만 한다는 공통된 사상에 근거를 두는 일련의 무리들을 총칭하여 '영지주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2. 영지주의의 역사
기독교 이단으로서의 영지주의가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사실 신약 성경 기록이 모두 끝난 뒤인 A.D. 2세기 초반경이다. 그런데 신약 성경은 이미 1세기 중반경부터 영지주의적 이단이 기독교 내부에 존재하였음을 증거한다. 이에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영지주의는 아직 그 교리나 체계에 있어서 완전한 형태를 가지지 못한 것이긴 하지만 2세기경의 영지주의의 뿌리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전영지주의’ (pre-Gnosticism)라고 봄이 타당하다.
한편 이러한 기독교 이단으로서의 영지주의가 생겨나기 이전부터도 '영지’를 중심으로 한 신화적 사상 체계가 존재했었다. 즉 물질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이원론(二元論) 사상에 근거하여 물질로 구성된 우주와 이 우주와 정반대되는 초월자가 존재하는 초월적 세계를 구분하고 특이하게도 영육이 합한 존재로서 이 물질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은 오직 초월자에게서 주어지는 계시에 의해서만 초월자를 알 수 있고 또 그러한 '영지’를 가져야만 물질의 세계를 벗어나 신과 합일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일련의 신화적인 사상 체계가 존재했었다. 이를 가리켜 우리는 ‘원영지주의’ (proto-Gnosticism)라고 부른다. 이 원영지주의가 기독교 사상과 접목되면서 기독교 영지주의 곧 ‘전영지주의'가 생겨난 것이다.
초대 교회의 전승(tradition)에 따르면 기독교 영지주의가 처음으로 시작된 곳은 사마리아이며 그 창시자는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서 만났던 마술사 시몬(행 8:9-24)이다. 그리고 1세기 말경 초대 교회에서 가장 활약했던 영지주의자는 케린투스(Cerinthus)였으며 그의 가현설(Docetism)은 널리 잘 알려져 있다. 3세기 초경 영지주의는 로마 제국 전역으로 확대되었으며 당시의 모든 교회가 영지주의에 오염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이 영지주의 이단은 2세기 초반경 비교적 안정된 사상 체계를 가진 이단으로 등장한 후 약 150년간 전성기를 누리다가 3세기 후반경부터 급속히 쇠퇴하였으며 4세기경에는 그 사상이 마니교(Manicheism)에 흡수되면서 한 시대를 풍미하던 사상으로서의 영지주의는 사실상 사라지고 말았다.
3. 영지주의 이단의 핵심 사상
앞에서 간략히 언급한 대로 영지주의(Gnosticism)는 철저하게 영육 이원론(靈肉二元論)에 근거하여 그 모든 사상을 전개한다. 한편 영지주의는 물론 기독교와 접목하여 기독교 이단화한 것이 그 주축 세력이긴 하였지만 어쨌든 그 자체는 기독교 이단으로서 등장하기 이전에도 존재하였고 그 이후에도 기독교와 별다른 관련 없이도 존재하였는 바 그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이제 그러한 영지주의가 기독교 사상과 접목되면서 형성된 기독교 이단으로서의 영지주의의 기본 사상을 기독교 신학 체계와 대조시켜 개략하면 다음과 같다.
① 신론(神論):
신의 세계는 최고신으로부터 우열의 등급에 따라 파생된 30개의 아이온(派生神)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고신은 물질세계와 가장 멀리 떨어진 초월적인 영적 세계에 거하며 제30위인 최하위의 신이 물질세계를 창조하였다. 그 신이 바로 유대교(Judaism)에서 말하는 창조주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을 가리켜 영지주의자들은 악한 물질세계와 가장 인접해 있다는 이유로 최고 열등한 신으로 보았으며 그 이름을 '데미우르고스’ (Demiurgos)라 하였다. 이러한 신관에 근거하여 영지주의자들은 구약의 하나님 곧 유대교의 하나님은 '데미우르고스'로서 낮고 유한하며 쉽게 노하고 복수하는 존재라고 하였으며 이와 대조적으로 신약의 하나님 곧 기독교의 하나님은 선과 진리의 근원 자체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최고의 절대자 바로 그분이라 하였다.
② 인간론(人間論):
이 물질 세계에 존재하는 인류는 모두 세 계급으로 분류된다. 그것은 곧 영적 계급(프뉴마티코이), 정신적 계급(프쉬키코이), 물질적 계급(휠리코이)이다. 여기서 가장 우위에 위치한 영적 계급은 세계의 시작과 발생의 비의 및 인간의 구원에 관한 비의인 곧 '영지'를 소유한 영지주의자들 자신들로서 초월적 세계에 들어가는 구원을 맛본다. 두 번째 지위를 차지하는 정신적 계급은 영지는 소유하지 못한 채 신앙과 실천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긴 하나 저급한 축복만을 받는다. 그리고 최하위의 자리에 있는 계급은 끊임없이 사단과 그들 자신의 욕망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으며 영원히 멸망하게 된다.
③ 기독론(基督論):
영지주의의 기독론은 크게 셋으로 나된다.
그 첫째는 '성령 그리스도론'으로서 그리스도는 30위로 구분된 신중에서도 제 1위 신인 최고 절대신으로부터 직접 나온 즉 본래 동일한 존재이셨던 성령이시며 육체를 입고 예수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가 십자가에서 육체를 제거한 후 다시 그리스도로 승천하셨다는 것이다.
둘째는 '가현설'(Docetism)로서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는 완전히 구별되는 별개의 존재이며 예수는 세례를 받는 때로부터 시작하여 십자가에서 죽기까지의 기간 동안 그리스도에 의해 사용된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 완전한 신이신 그리스도에게는 결코 죽음이 있을 수 없으므로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인간 예수일 뿐이라고 한다.
셋째는 '원인(原人) 그리스도론'으로서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30개의 아이온으로 구성된 신들 중에 하나로서 최고신으로부터 모든 권세를 부여받고 마리아에게서 탄생한 가장 원형적인 인간으로서 인간에게 구원을 위해 필요한 영지를 준 후 승천하였다는 것이다.
이 같은 영지주의 기독론은 본래 제 2위 성자 하나님이셨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시어 취하였던 인성(人性)을 부인하거나 아니면 지상에서 구속 사역을 행하시면서 주님께서 가지셨던 신성(神性)을 부인하는 것으로 결국 성경에서 가르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 양성(神人兩性)을 다 부인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영지주의 기독론을 집중 반박한 것이 요한일서이다(요일 2:18-27; 4:1-6).
④ 구원론(救援論):
영지주의에서 구원은 인간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이 물질 세계에 속박된 상태에서 해방되어 인간의 영혼이 기원한 곳인 빛의 세계 곧 초월적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 자신의 기원과 존재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영혼을 주신 초 세계적인 최고신을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 신의 계시가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최고신으로부터 보냄 받은 계시자이며 그를 통하여 인간은 구원에 필요한 영지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영지를 충만하게 소유하여 '플레로마'( ) 상태에 이르렀을 때 인간은 이 물질 세계를 초월하여 신에게 도달하게 되며 본질상 신과 합일(合一)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그것이 참 구원이다. 따라서 영지주의에는 종말론이 따로 없으며 이러한 구원이 곧 종말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부활이나 그리스도의 재림과 같은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베드로가 영지주의 이단을 공격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거듭 확증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벧후 1:1 6-21; 3:3-13).
⑤ 윤리관(倫理觀):
영지주의 윤리관의 출발점은 영육 이원론에 근거하여 오직 영과 영의 세상만을 중시하고 악한 물질로 구성된 이 세상과 인간의 육체를 경시하는 데서 비롯한다. 그러나 이처럼 동일한 근거에서 출발한 영지주의자들의 윤리관은 서로 완전히 상반된 윤리강령을 제시하는 두 극단적 형태의 윤리관으로 귀결된다.
첫째는 극단적인 '금욕주의' 또는 '고행주의'로서 영지를 소유한 자신의 순수하고 절대 선한 영(靈)이 악한 세상으로 인하여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이 세상과의 접촉을 회피하고 육체를 학대하는 것을 윤리와 도덕의 기본 강령이라고 주장한다.
둘째는 '자유방임주의', '쾌락주의'로서 영혼은 본질상 선하기 때문에 육체의 그 어떤 상태로부터도 오염될 수 없기 때문에 육체를 가지고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육체의 각종 소욕들을 맘껏 충족시켜 주는 것이 현실적으로도 그리고 영적으로도 좋으니 육체의 소욕을 맘껏 누릴 것을 추천한다. 여기서 도덕폐기론(Antinomianism)이 나왔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전혀 상반되는 것 같은 이 두 윤리관이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영지주의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특히 주의하여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서신서에는 양자 모두 다 근거 없는 모순에 불과한 영지주의적 금욕주의(골 2:23; 딤전 4:3)와 영지주의적 쾌락주의(벧후 2:2,3,14; 유 1:16)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고 있는 말씀이 여러 군데 나타난다.
4. 주요 영지주의자들
영지주의 전성기 활동지역 핵심주장
1. 마술사 시몬(Simon) 1세기 후반 사마리아 자신을 신이라 주장함
2. 케린투스(Cerinthus) 1세기 말엽 소아시아 가현설을 주장함
3. 사투르니우스(Saturnius) 125년 경 수리아 금욕주의를 주장함
4. 바실리데스(Basilides) 130년경 알렉산드리아 30개의 아이온으로된 신의 세계 주장
5. 발렌티누스(Valentinus) 150년경 로마, 구브로 〃
6. 말시온(Marcion) 150년경 로마외 기타 지역 구약의 창조주와 신약의 하나님 구분
7. 타티안(Tatian) 170년경 소아시아, 수리아 모든 영지주의 사상을 다 받아들임
5. 의의
영지주의(Gnosticism)는 표면적으로만 볼 때는 일면 기독교의 신앙 체계와 유사한 사상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 보면 그 사상은 이원론적 헬라 철학을 근간으로 하여 이집트, 페르시아, 심지어 인도 등의 동방의 신비 종교 사상을 혼합한 소위 '혼합주의(Syncretism)'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성경의 진리와 완전히 배치되는 허구적인 신화(神話)에 불과한 것이다. 이에 사도 바울은 이 영지주의자들을 가리켜 신화와 족보에 착념케 하는 거짓된 지식을 가르치는 자들이라고 했다(딤전 1:4; 6:20; 딛 1:14). 그리고 사도 요한은 그들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들', 또 '예수를 주로 시인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했다(요일 2:22; 4:2,3).
이러한 영지주의가 초대 교회 최대의 이단으로서 사도 시대를 거쳐 교부 시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에 끼친바 영향은 실로 크다.
첫째, 영지주의는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모든 교리(Dogma, 敎理)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나름대로 해답을 찾고자 했던 사실을 들 수 있다. 비록 그들이 찾은 해답은 성경의 진리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인본주의적 허구로서 초대 교회 신앙에 크게 해악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그 반대 급부로 교회로 하여금 체계적인 신학 연구 작업을 통하여 사도들의 가르침에 근거한 기독교 정통교리(正統敎理)의 체계화와 성경의 정경화(正經化)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둘째,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한 초대 교회는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교회 조직화 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교회 지도자의 권위가 크게 강화되었다.
셋째, 신약 서신서에서 자주 암시되고 있는바 비록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은 사상적인 체계를 완전히 갖추지 못했던 전영지주의자들(pre-Gnosticists)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금욕주의적 행위와 도덕방임주의 또는 도덕 폐기론으로 인하여 교회의 윤리 생활을 크게 혼란케 하였던 바 이는 기독교로 하여금 기독교 윤리 철학의 정립과 이의 실천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하였으며 또 이로 인하여 교회는 이교 사회에서 존경과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리하여 이제 전 구속사적 관점에서 조망할 때 우리 성도는 이처럼 교묘한 이단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위축되기는커녕 도리어 하나님의 진리 위에 더욱 공고히 서가며 크게 성장해나간 사실에서 우리는 기독교만이 유일한 절대 진리의 종교라는 사실을 새삼 확신하며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또한 실로 지금 이 순간도 그 옛날 헬레니즘 문화를 도구로 영지주의라는 이단을 만든 사탄(the Satan)은 지금도 고도의 물질문명을 매개로 인본주의, 물질주의 등의 이단을 만들고 있는바 믿음 안에서 늘 깨어 있음으로 우리 시대의 이단에 맞서서 기독교 정통교리와 기독교 윤리를 우리 믿음의 후진들에게 전승해 주어야 할 구속사적 소명을 재 각성한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피와 고통을 요구하는 대박해에 물론 이처럼 첨예한 각성과 고귀한 순결을 요구하는 이단의 유혹에 맞서서도 그 신앙을 보존하여 우리에게 물려주었듯이‥‥
제 1장 본서의 집필 동기와 하나님과 교제의 기본자세
구속사적 개관
본서는 A.D. 1세기 후반경에 기록된 사도 요한의 첫 번째 서신으로서 에베소 교회를 비롯한 소아시아 지역의 여러 교회들에게 보내진 것이다. 본서는 신약의 다른 서신서들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부활 승천으로 구속사의 시대가 구약에서 신약으로 갓 이전되어 이방인들이 초대 교회를 통하여 본격적으로 구속사의 지평에 동참하기 시작한 격변기를 배경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신약의 다른 서신서들이 대부분 그러한 격변기적 상황 속에서 초대 교회들이 직면한 주요 사안들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들을 제시한 반면, 본서신은 보다 신학 원론적인 차원에서 성도의 신앙 정립에 필수적인 기독교의 기본 진리들을 '사랑의 교제'(the Fellowship of Love)라는 대주제 하에 제시하고 있다.
즉 본서는 1차적으로는 신앙의 기본 진리에 대한 정립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무렵 풍미하던 각종 이단, 특히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 (Gnosticism) 이단의 준동으로 인하여 신앙적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던 초대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전신약시대의 모든 성도들에게 단순하면서도 기독교의 핵심 진리인 수직적 차원에서의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와 수평적 차원에서의 형제 사랑이라는 주제를 여러 가지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해 줌으로써 성도들이 각종 이단 사설(異端邪說)을 배격하고 복음에 근거한 바른 신앙을 정립토록 하는 책이다.
이러한 본서의 첫 장인 본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전반부 1-4절은 본서의 서론 부분이다. 본서는 서신서이면서도 여기서는 다른 서신서와 같은 전형적인 도입부 형식을 떠나 수신자와 발신자 및 문안 인사 등에 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고 곧바로 본서 본론에 대한 서론적 언급으로서의 본서 집필 동기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본서의 집필 동기가 예수 그리스도가 본래 제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1절) 태초에 세워진 구속의 법을 성취하시고자 사람이 되셔서 구속 사역을 수행하시고 우리에게 구속의 복음을 주셨던 분(2절)이라는 참된 구속사의 진리 위에 근거하여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수평적으로는 성도들간에 서로 교제를 나누며 충만한 기쁨을 누리도록 하는 데 있다(3-4절)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전반부를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개관할 때에 실로 성도와 하나님, 또 성도와 성도간의 교제의 근거는 다른 무엇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이라는 구속사의 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신인 양성(神人兩性)을 가지신 분으로서 죄로 말미암아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시키실 수 있는 유일한 중보자(仲保者)가 되신다는 것이다. 즉 그분은 태초부터 존재하셨던 절대 초월자로서 태초부터 세상 끝날까지 절대 단절 없이 연속되는 구속사의 섭리에 따라 사람의 모습으로 초림하셔서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고 구속의 복음을 주심으로 이를 믿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죄 문제를 해결 받고 그 관계를 회복되도록 하신 우리의 절대 유일의 구주(主)가 되신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수평적으로는 성도들 간의 교제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예 2:11-22). 그리고 이러한 구속사적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야말로 성도의 바른 신앙 정립에 절대 필요한 것이다.
한편 후반부 5-10절은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의 구체적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계명 준수 명령과 계명의 핵심 내용인 형제 사랑 실천 권면을 기록한 본론 전반부 1:5-2:11까지의 일련 기사의 개시 부분이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참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성도의 기본자세 두 가지로서 적극적인 측면에서 빛 가운데,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진리를 믿고 받아들이며 또 그 가운데서 행할 것(5-7절)과 소극적인 측면에서 죄의 자백을 통하여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할 것(8-10절)을 제시하고 있다. 전자가 하나님과의 교제의 법적 근거를 마련키 위한 것이라면 후자는 하나님과의 실질적인 영적 교제를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의 후반부가 우리에게 주는 바 구속사적 의의는 실로 크다. 즉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Fellowship)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궁극적인 목적임과 동시에 아담의 타락 후 곧 구속의 법을 세우시고 태초부터 세상 끝 날까지 구속 사역을 진행시키셔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성부 하나님께서 이러한 구속 섭리에 따라 주신 그리스도의 구속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자기 존재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의 계속적인 교제 속에서만 진정 자기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며 나아가 참 인생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암 3:3)라고 했던 아모스 선지자의 말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의 빛된 속성에 부합되는 빛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는 일상의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용서 받음으로써 그 관계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외울 말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본서 집필 동기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하나님의 교제를 위한 성도의 기본 자세
5 ○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본문 & 자료노트
원어연구-1:6,7, 사귐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코이노니아'( )이다. 이 단어는 '공통의', '공동의', '평범한'이라는 뜻을 가진 '코이노스'( )에서 유래한 말이다.
여기서 '코이노스'는 다른 사람과 소유권, 재산, 물건 등 물질적인 것을 공유하는 것뿐 아니라 생각, 가치관 등 정신적인 면까지 같이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단어에서 파생한 '코이노니아'의 성경적 용례를 보면 '어떤 일에 동참하는 것'(고전 10:16), '서로 물건을 나누어 주는 것'(히 13:16), 그리고 '믿는 형제들 간에 우의를 나누는 교제'(고전 1:9)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한편 본문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과 나누는 영적 교제를 가리켜 사용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는 반드시 실생활에서의 믿는 형제들 간의 코이노니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본문은 말한다. 이로 볼 때 성도의 진정한 '코이노니아'는 하나님과의 교제와 이웃과의 교제가 동시에 이루어질 때만이 가능함을 알 수 있다.
보감-1:7 빛(진리) 가운데 거하는 자에 대한 7가지 복
1. 하나님의 인도와 보로(시 43:3-5)
2. 영혼의 순결(잠 16:6; 벧전 1:22)
3. 자유(요 8:32)
4. 거룩(요 17:17,19)
5. 구원(엡 1:13: 살후 2:13)
6. 중생(엡 4:24; 약 1:18)
7. 죄사함(요일 1:7)
주요주제-1:7-9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그랜드 종합 교리 '기독론' 참조
주요주제-1:1,2 로고스의 이해
요 1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1:6 본서에 나타난 성도가 교제해야 할 대상들
1. 하나님: 그리스도를 통해 맺어진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서 교제함(1:6; 3:1,2)
2. 예수 그리스도: 모든 죄를 맡기는 의뢰인과 하나님께 대언해 주는 변호인으로서 교제함(2:1,2)
3. 성령: 상호 연합하여 가르치고 배우는 스승과 제자로서 교제함(2:27; 4:13)
4. 믿음의 지도자: 말씀으로 기르고 양육 받는 영적 아버지와 자녀로서 교제함(2:14)
5. 다른 성도: 하나님 안에서 함께 연합한 형제로서 교제함(3:14-18)
1 . 1-4 본서 집필 동기
본서는 초대 교회의 정신적 지주로. 소위 '사랑의 사도'라 일컬어지는 사도 요한이 자신이 직접 체험했던 그리스도의 사랑과 가르침을 바탕으로 기록한 그의 첫 번째 편지이다. 본서가 기록될 당시 초대 교회들은 각종 이단(異端)의 발흥으로 인하여 특히 신(神)은 육체를 가질 수 없다는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아 주님의 신인 양성(神人商性) 중 어느 한쪽을 부인하거나 아예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구주(救主)이심을 부인하며, 또 인간의 육체를 경시하는 교리로 성도들을 도덕적 방종에로 미혹하는 영지주의 (Gnosticism) 이단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영지주의 이단에 대해서는 본서 서론 특별자료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니 그곳을 참조하라. 이에 요한은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반박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본래 성자 하나님이시면서 인간 구원을 위하여 영원한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성육신하셔서 구속 사역을 성취하신 우리의 참된 구주가 되신다는 바른 구속 진리를 제시함으로써 성도 개개인은 물론 교회 공동체 전체가 올바른 신앙을 정립토록 함과 동시에(1-3a절) 성도들로 하여금 진리되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욱 심화시키도록 하기 위하여 본서를 기록하였는데(3b,4절) 본문은 바로 그러한 본서 집필 동기를 언급하고 있다. 본서의 집필 동기와 배경에 대해서는 본서 서론을 보다 참조하라.
이러한 본서의 기록 동기에 걸맞게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본서 전체에 대한 일종의 서론격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신인 양성을 가지신 참된 우리의 주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본서 서두에서 장엄하게 선포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 la절; 요 1:1), 성육신(成肉身. 1:3a절; 요 1:14), 계시성(啓示性, 2절; 요 1:18) 및 중보성(仲保性, 3b절; 요 1:12,13)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서두는 본서와 거의 동일한 집필동기 하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공생애 사건들을 통해 그분이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는 진리의 여러 측면 중 그분의 신성(神性)을 강조한 요한복음의 서두와 유사하다. 따라서 이러한 본문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요 1:1-18 강해를 참조하라.
한편 본서는 신약 성경 서신서의 일반적 형식(본서 14권 서신서 개론, 서신서의 문학적 성격과 구조적 특성 참조)을 초월하여 도입부와 종결부에서 제시하는 문안 인사 또는 수신자와 발신자에 대한 언급을 완전히 생략하고 있는데, 이는 서신서의 형식을 탈피함으로써 자신의 메시지를 보다 강렬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사도 요한의 의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성도들에게 진리를 전파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하였는가를 짐작케 한다. 이러한 열정은 실로 안이한 태도로 자신의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것에서 안수하기를 잘하는 현대의 성도들에게 절대 요청되는 것이라 하겠다. 또 요한은 긍정과 부정, 적극과 소극의 대조와 반복을 통하여 본서의 주제인 사랑의 교제를 여러 측면에서 조명해 보임으로써 독자들이 보다 친숙하게 복음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1:1 태초부터 있는. - 성경 중에서 '태초'라는 용어로 시작되는 책은 창세기와 요한복음 그리고 본서뿐이다. 이중 '태초부터 있는'(호 엔 아프아르케스)으로 시작되는 본서의 서두는 '태초에 말씀이계시니라'(엔 아르케 호 로고스)로 시작하는 요한복음의 서두와 유사하다. 이는 본서의 저자가 사도 요한이라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 그런데 본래 '태초' 라는 것은 그 개념 자체가 시간적이다. 그러나 창세기의 보편적 시간 계념과 달리 본서와 요한복음은 그 창세기의 시간적 결점을 넘어서 시간 이전의 존재성을 표현하고 있다. 즉 생명의 말씀에 창조 이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표하고 있다. 말씀은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이시며(요 1:1), 하나님은 시작이 없으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있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은 미완료 과거형으로 '태초부터 이미 있었고 지금도 있다'는 의미이고 이것은 그 말씀의 선재성(先在性)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선재성에 대해서는 요 3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그러나 요한복음의 '엔 아르케'가 분명하게 '태초 이전에'(Before the biging)를 표현하는 반면, 본문의 '아프 아르케스'( )는 막연하게 '태초부터 있는 것'을 표현한다. 이것이 요 1:1과 본절의 차이점이다. 한편 본서는 문안 인사로 시작하는 서신의 일반적인 형식을 초월하여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서신서 가운데 본서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형식으로 저자의 다급한 마음과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을 올 수 있다.
생명의 말씀. - '생명'(조에)은 신약에서 120회 이상이나 사용된 낱말로, '존재의 본질 또는 기초'를 의미한다. 그러나 요한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동일시하였다(요 1:4; 14:6). 왜냐하면 요한은 그리스도, 곧 하나님을 만물의 근원이시며 그 만물에게 생명력을 주신 생명 그 자체로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요한은 그리스도를 말씀으로 보았다(요 1: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에 참여하셨기 때문이다(요 1:3). 따라서 본문의 '생명의 말씀'은 '생명을 주는 말씀 또는 복음'이라기보다는 생명이라는 말씀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생명과 말씀은 동격으로 사용되었으며, 그것은 곧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말씀'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고스'( )는 본래 '이성', '현상계 안에 내재된 만물의 원리'를 나타내는 단어로 헬라 철학에서 흔히 사용되던 용어이다. 이러한 용어가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된 경위에 대해서는 요 1장 자료노트 '로고스의 이해'를 참조하라.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 여기서 '들은 바'(아케코아멘)와 '본 바(헤오라카멘)는 모두 완료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듣고 보는 사실이 영속적인 것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과거에도 듣고 보았고, 지금도 듣고 보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당시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들이 주장하는 가현설(假現說)처럼 가상의 환상적 존재가 아니라 실재적 존재요, 경험적 존재이기 때문에 실제로 계속해서 듣고 본다는 것이다.
주목하고 만진 바라. - '주목하고'(에데아사메다)와 '만진 바'(에프셀라페산)는 모두 부정과거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주목하고 만진 사건이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었음을 의미해 준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주목해 보았고 직접 만져 보았다(눅 24:39; 요 20:27). 아마도 요한은 이러한 사건들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기록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만세 전부터 예비되었으나 비밀로 감추어져 있다가 세상에 드러났고 사람들은 그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고 만졌던 것이다(고전 2:6-10). 한편 이상의 본절의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태초부터 있는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의 눈으로 본 것, 주목하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것인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으로, 중성 관계대명사 '호'( )로 네 가지 행위가 반복하여 연결되어 있어 강하게 강조되어 있으며, 그 네 가지는 또 생명의 말씀을 강하게 수식하고 있다. 이처럼 강조용법으로 사용된 '호'가 남성이 아니고 중성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에 대하여 혹자는 '생명의 말씀'이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Westcott, Vincent).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그리스도 자신으로 보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Calvin, Alford, Bengel, Bruce, Meyer).
1:2 이 생명이. - 헬라어 원문에는 본절이 괄호로 묶여있는데 이것은 본절이 삽입구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서는 생명이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요한은 1절의 '생명의 말씀'을 본절에서는 바로 '생명'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는 생명과 말씀이 동일한 것임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그리고 이렇게 요한이 1절에서 언급한 그 생명의 말씀을 재차 거론하는 것은 그것을 다른 각도에서 더 설명하기 위함이다. 1절에서는 태초 이전부터 선재하셨던 말씀을 말하였다면 본절에서는 그렇게 선재하셨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즉 1절에서는 영원하신 로고스를, 여기서는 역사상의 로고스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타내신 바 된지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파네로데'( )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밝혀내다', '드러내다', '확실하게 나타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생명이 나타내신바 되었다'는 것은 이미 태초에 존재하셨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드러낸 바 되었다'는 의미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지칭하는 말이다(롬 16:26; 딤전 3:16).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선 그랜드 종합 교리 '기독론', '그리스도의 성육신' 부분을 참조하라.
이 영원한 생명.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 '텐 조엔 텐 아이오니온'( )은 직역하면 '그 생명 그 영원한 것'이라는 뜻으로 관사가 중복되어 생명의 영속성을 강조하고 있다(3절; 요 10:11). 물론 여기서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성도들은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 생명을 받아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다(마 25:46).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 여기서 '보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1절의 '본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와 동일한 '헤오라카멘'( )이며, 시제도 같은 완료형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것은 1절의 네 가지 경험 사실을 간략하게 반복한 것이다. 제자들은 육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고 그렇게 경험적으로 본 예수 그리스도를 그대로 전파하였다. 이처럼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로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를 떠나 인간의 철학이 교회를 주장하게 될 때 교회는 부조화와 분열이 일어나게 된다.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 본절 상반절의 '나타내신 바 된지라'를 반복한 말로서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이 첨가된 말은 '세상에 성육신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었다'는 말로(요 1:1) 삼위일체 사상과 함께 다시금 그리스도의 선재하심을 보여 준다. 본래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셨으나 범죄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친히 자기를 낮추시어 인간의 형상을 입고 세상에 오셨던 것이다(빌 2:6-8). 이와 관련해서는 막 10장 자료노트, '예수의 성육신과 대속 수난을 통한 인간 구원의 필연성'을 참조하라. 한편 본문에서 '함께'의 뜻으로 사용된 헬라어 '프로스'( )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실 때에 정적인 공존이 아니라 동적인 교제 가운데 있었음을 나타내어주고 있다. 헬라어에는 '함께'라는 의미를 가진 전치사가 '메타'( ), '쉰'( ), '엔'( ), '파라'( ) 등 여러 개가 있다. 이들 전치사는 '함께 있는 상태', 즉 정적인 공존 상태를 나타내는 전치사이다. 그러나 '프로스'는 함께 있되 그 가운데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는 동적인 공존을 나타내어 주는 전치사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고 할 때 이 '함께'는 성부와 성자가 동적으로 인격적인 교제 중에 계셨음을 표시한다(요 17:5, Westcott, Zahn, Godet).
1:3 우리가…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 사도들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경험한 바를 증거한 목적이 제시되고 있다. 이는 모든 복음 증거의 목적이기도 하다. 여기서 '사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코이노니아'( )로 이는 '동참', '협조', '교제', '결합'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본문에서는 '교제'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우리의 사귐'(헤 코이노니아 데헤 헤메테라)은 전절의 '영원한 생명'처럼 이중 관사로 되어 있어 교제가 계속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사도들의 복음 증거의 목적이 먼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단절된 교제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재개시키되 영원한 교제로 승화시키며(롬 5:10,11), 동시에 인간간의 교제를 올바르고 견고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실로 하나님은 인간과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키기를 원하시며(벧후 3:9) 그리스도는 그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키는 능력이시다(롬1:16; 8:2). 이 사실을 담고 있는 것이 복음이요, 그것이 증거되는 곳이 교회이며, 그것이 완성되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
1: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 에브라임 사본(C), 모스크 사본(K) 등에는 본절에 '너희에게'(휘민)가 첨가되어 있어, 기쁨을 누리는 주체에 증거하는 자뿐만 아니라 증거 받는 자도 포함되어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하여튼 여기서 '우리의 기쁨'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카라 헤몬'( )은 '너희의 기쁨이 아닌 우리의 기쁨'이라는 배타적인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기쁨은 물론, 너희의 기쁨도'라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 '기쁨'은 성도들이 비록 이 세상에 살고는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귐을 통해서 얻게 되는 기쁨을 말한다(요 17:13). 따라서 이 '기쁨'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과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그의 인격과 직접 관계되어 있다. 한편 여기서 '충만'(플레로마)은 요한 문서를 비롯하여 바울 서신에서 주로 소아시아 지역에 보낸 문헌에 자주 나타나는 표현이다(요 3:29; 7:8; 12:38; 15:11; 엡 1:10,23; 3:19; 4:13; 골 1:19; 2:9; 요이 1:12; 계 6:11). 따라서 '충만'은 소아시아 지역에서 발달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어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골 1:19 주석을 참조하라. 여기서 이 말은 은혜를 받아 진리를 깨달은 성도들이하나님과의 사귐 속에서, 그리고 성도 사이의 사귐 속에서 누리게 되는 완전한 기쁨을 말한다.
1:5-10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본자세
앞 단락 1-4절에서 사도 요한은 본서 집필 동기가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에 근거한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를 심화시켜나가는 데 있음을 밝혔다. 이어 1:5-4:21까지의 본서본론의 개시 부분인 본 단락에서는 성도가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갖기 위해 취해야 할 기본자세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 어두움의 일을 버리고 빛 가운데 행하라는 것이다(5-7절). 이는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는 성도가 그리스도의 구속 진리를 믿음으로 법적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라야 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빛'은 성경에서 진리, 순결, 진실, 정의 등을 내포하는 말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을 나타낼 때 흔히 사용되는 표현이다. 반면 '어두움'은 무지, 죄악, 불신앙 등을 내포하는 말로 마귀의 속성을 나타낼 때 흔히 사용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사실은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듯이 하나님과 마귀가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는 자들은 일차적으로 마귀에게 속한 곧 본질상 진노 아래 있던 상태에서 복음을 믿음으로 빛 가운데로 들어와야만 하는 것이다(엡 2:1-10; 5:8-14).
둘째,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8-10절), 이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빛 가운데로 들어옴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시작한 자가 그 교제를 더욱 심화시키기 위하여 과거 어두움에 속했을 때에 행하던 일을 계속해서 버리지 않으면 안 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실 성도라 할지라도 죄를 범할 수 있고 그 죄로 말미암아 신앙의 침체에 빠질 수도 있다. 이때 요구되는 것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로막는 죄의 바른 자백, 곧 회개(repentance)이다. 하나님은 죄를 고백하는 자들의 불의를 깨끗게 하실 뿐더러 더욱 정결하게 하시어 성화(聖化)의 길로 이끄신다. 하나님은 실로 미쁘사 죄를 고백하면 용서 하시겠다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실 뿐만 아니라(딤후 2: 13). 또한 우리를 죄에서 깨끗게 하시어 하나님이 직접 우리 성도들과의 관계를 심화시켜 나가시며 큰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
이상의 사실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①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빛된 속성에 걸 맞는 거룩한 삶을 위하여 삶의 구체적인 영역에서 어떤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를 살펴 행하는 삶의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롬 12:1,2).
② 성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로막는 장애가 자신의 죄에 있음을 깨달아 자신의 죄를 고백하되 신실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항상 자백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교계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발전해 나가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시 51:12,13).
1: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 여기서 '저'는 영원한 생명이시며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부터 내려와(요 3:13) 하나님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전하셨다(요 8:28). 그리고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그 말씀을 증거하였다(행 1:22; 2:4).
소식이 이것이니. - 이 말은 헬라어로 '카이 에스틴 하우테 헤 앙겔리아'이며, 이를 직역하면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 소식이니'가 된다. 헬라어 원문에는 이 말이 문장의 처음에 나오는데 요한의 문체는 이처럼 문장을 도치시켜 내용을 매우 강조하는 특색이 있다. 한편 '소식'으로 번역된 헬라어 '앙겔리아'( )는 '천사'를 뜻하는 '앙겔로스'( )에서 유래한 말로 '교훈', '광고' 등의 뜻을 가지고 있으나 여기서는 '선언'(declaration)으로 번역하는 것이 다음 구절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 이 말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선언적 표현이다. 특별히 여기서 '빛'(포스)은 '사람의 빛', '세상의 빛'처럼 피조물과 관련시킨 '한 빛'(a light)도 '그 빛'(the light)도 아니다. 이는 단순히 관사 없이 사용되어 하나님의 본성 자체가 빛이심을 나타내고 있다(Vincent). 이와 관련해서는 요 1:4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본서에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선언적 표현이 두 번 나오는데 본절이 그 첫 번째요, 4:8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가 그 두 번째 표현이다.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 '어두움'(스코티아)은 '빛'과 대조되는 낱말로서 성경에서 이 말은 '죄', '불행', '무지', '불결', '불신앙', '지옥' 등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사 8:22; 마 22:13; 요 3:19 등). 즉 '어두움'은 '악과 불의'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악이나 불의가 한 점도 없으신 존재이다(벧전 1:19).
1:6 만일. - 가정적 논법이다. 요한은 이와 같이 가정을 제시해 놓고 그 가정이 확정적인 사실과 모순된다는 것을 드러내어 가정된 것이 거짓임을 밝히는 방법을 즐겨 사용하였는데 이는 본장에서만도 7절을 제외한 본절 이하에 계속 나타나며 이외에도 본서에 16회나 나타난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 하나의 가정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가정이다. 가정은 뒤에 나오는 실제적 사실과 논리적으로 부합될 때에 참이 된다. 하나님과 사귄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것이며(3절 주석 참조) 또한 진리 가운데서 행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소위 성도라 하면서'라는 의미이다.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 이 말을 직역하면 '어두운 가운데를 걸어가면'이란 의미로 7절에서의 '빛 가운데 행하면'과 대조시킨 표현이다. '어두움'은 5절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악과 불의'의 상징적 표현이다. 따라서 '어두운 가운데를 걷는다'는 것은 '악과 불의를 행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실제적 사실은 앞에서 가정된 '진리 가운데서 행한다'는 것과 모순된다.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 가정과 사실이 모순됨으로 그것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거짓은 진리와 상반된다. 사람은 이것 아니면 저것, 즉 선이 아니면 악의 편에 서야만 한다(마 6:24). 그러므로 모순 가운데 있는 자는 거짓에 있는 자요 진리에 있는 자라 할 수 없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본절의 가정과 같이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강조했으나 실천적 삶을 등한시하며 어두운 가운데 자신들을 방치하여 이러한 모순에 빠졌던 것이다. 성도의 참됨은 말에 있지 않고 그 행함으로 나타나는 것이다(약 2:14-26).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 이 말은 하나님께서 거룩과 진리 가운데 계신다는 뜻으로 5절의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 '빛 가운데 행하면'은 6절의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과 반대되는 것이다. 그런데 6절에서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과 상관되는 내용이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므로 '빛 가운데 행하면'은 '진리를 행치 아니함'의 반대, 즉 '진리를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빛 가운데 행하면'은 '진리 가운데 행하면'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진리 가운데서 행한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요 16:13)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을 말하는데(갈 2:20)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의미한다. 한편 이러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성도들 간의 친밀한 교제를 가능케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사는 자는 모두가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유기적 연합체를 이루기 때문이다(엡 2:11-22).
그 아들 예수의 피가…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그 아들 예수'(이에수 투 휘우 아우투)에서 '그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의미하므로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며, '예수'는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나타낸다. 마 1:1 주석 참조. 이는 시내 사본(א)과 바티칸 사본(B)에는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예수'로 기록되어 있으나, 알렉산드리아 사본(A), 모스코 사본(K), 레기우스 사본(L) 등 일부 사본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되어 있다. 이는 예수께서 인성과 신성을 모두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보다 강조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한편 유대인들의 관념에서 '피'는 '생명'을 나타내며 피를 흘린다는 것은 생명으로 생명을 대속함을 의미한다(레 17:11).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 곧 생명을 버려 인류의 생명을 구속하셨다. 즉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이셨으나(2절) 자기 생명을 바쳐 많은 생명을 구원하신 것이다(롬 5:15-19). 또 '죄'란 헬라어로 '하마르티아'( ) 인데, 이는 문자적으로 '표적에서 빗나갔다'는 뜻이며 철학적인 용어로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무지'를 뜻한다. 이와 같이 '죄'란 하나님의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그 진리에 대한 무지이다. 그래서 죄인은 진리를 알지 못하며 진리 가운데 행치 못하는 것이다. 한편 이와 관련해서는 그랜드 종합 교리의 '인간론' 중 '죄의 특성' 부분을 보다 참조하라. 그리고 '모든 죄'(파세스 하마르티아스)란 '원죄와 자범죄'를 다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스도의 피는 아담으로부터 이어 받은 죄, 곧 원죄(原罪) 뿐만 아니라 각자가 지은 자범죄(自犯罪)도 깨끗하게 속량해 주신다(사 1:18). 여기서 '깨끗하게 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카다리조'( )로 직역하면 '흠이 없이 정결하게 한다'는 의미이며, 이는 곧 '의롭게 한다'는 뜻이다(롬 3:25; 엡 5:26). 인간은 이와 같이 빛 가운데 행함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것이다.
1:8 만일. - 6절 주석을 참조하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 '우리'는 모든 인간을 지칭한다(롬 1:18-23; 2:1-3:8; 3:9-18). 인간은 하나도 예외 없이 죄를 범하였다(롬 3:23). 따라서 자기에게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곧 자기를 속이는 것이고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 앞에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죄를 부정하는 어떤 종교나무 신론적 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다 거짓말이요. 진리가 아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초대 교회 당시에 '영지'(靈智)를 얻으면 죄가 없다고 주장했던 영지주의자들이나 '오도'(悟道)를 얻으면 죄에서 벗어난다고 주장하는 오늘날의 불교도들은 스스로 속이는 자들이요 진리가 없는 자들이다.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므로 회개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자의 마음속에는 진리가 거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는 자 안에는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요 16:13)께서 거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진리'(알레데이아)란 일반적으로는 인간에게 구원을 알려주는 복음 및 계시를 의미하며, 존재론적 의미에 있어서는 말씀 그 자체이신(요 1:1) 그리스도를 지칭한다(요 1:18; 14:6).
1:9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 8절의 '우리가 죄 없다 하면'과 대칭되는 말이다. 요한은 범죄한 인간이 그 죄를 고백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르는 결과를 지금 설명해 주고 있다. 즉 전절에서 요한은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아니할 경우 진리되신 그리스도를 얻지 못하고 멸망에 이른다는 결론을 말해주었는데 이제 여기서는 반대로 자기 죄를 고백한다면 그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과 새로운 교제 관계에 놓이게 된다는 결론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스'( )는 복수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분명히 모든 종류의 죄를 지칭한다. 그리고 '자백하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몰로고멘'( )은 '사실 그대로'란 뜻의 '호모스'( )와 '말하다'란 뜻의 '레고'( )의 합성어인 '호몰로게오'( )의 현재 능동태 가정법으로 직역하면 '계속하여 사실 그대로를 말하면'이란 뜻이다. 이것은 성도들이 한번 죄를 자백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죄가 발견될 때마다 계속해서 자백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께 죄를 발견할 때마다 계속해서 자백하되 '사실 그대로 거짓이 없이'해야 한다.
미쁘시고 의로우사. - '미쁘시다'(피스토스)는 것은 '신실하다'는 뜻으로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인간과 맺으신 언약은 하나도 어기지 아니하신다(딤후 2:13). 그러므로 죄를 고백하면 사유하신다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신다. '의로우사'(디카이오스)라는 말은 '불의'와는 대칭되며 '진리'와는 상관되는 말로 '바르게 행동한다' 또는 '옳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며 진리의 주이시기 때문에 언제나 공의로우시다(욥 34:12; 살후 1:5). 이처럼 하나님은 신실하실 뿐만 아니라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으며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은 회개하는 자의 죄 사함에 대한 보증이 된다.
죄를 사하시며. -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이것을 '우리의 죄를 간과하시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롬 3:25).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 여기서 '모든 불의'는 세상의 여러 죄악을 가리키는 말로(고전 5:10,11; 6:9,10) 본절은 결국 회개한 자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죄들로부터 구별시켜 놓으신다는 말이다. 그러나 죄를 고백하는 자는 자연적으로 죄와는 건 상관없는 존재가 된다는 의미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이 말은 죄를 고백하면 그 이후로는 아무 노력 없이도 죄를 짓지 않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죄에서부터 자유하게 된다는 의미이다(롬 8:1,2). 성도는 그리스도의 피로 죄에서 속량을 받은 자이지만 이 세상에 있는 한 날마다 죄와 싸워 이겨나가야 하며 죄를 지을 때마다 계속 회개함으로 용서를 받아야 한다(요 3:10).
1:10 만일…아니하였다하면. - 8절의 '죄 없다 하면', 과 같은 의미의 말이다. 본절은 3결의 내용을 다시 반복하고 있으나 단순 반복이 아닌 보다 심화를 반복으로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경고해 주고 있다.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 하나님은 빛이시므로(5절) 거짓이 없으시다. 그러나 가정상 하나님이 거짓이라는 결론이 나오면 그 반대의 가정이 결국 틀린 것이다. 요한은 바로 이러한 논법으로 죄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거짓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우리 자신이 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을 그릇된 길로 나아가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마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타락 이후 모든 행동이 죄의 본성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부인한다는 것은 자신의 교만함을 드러낼 뿐 아니라 스스로 거짓말쟁이임을 인정하는 결과이며 빛이요 진리이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엄청난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를 죄 있다 하시는데(8절 주석 참조) 우리가 죄 없다 한다면 우리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요, 그것처럼 교만한 것도 없다. 나아가 그것은 자신의 본질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행동이자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한 행위로 그 안에 진리가 없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 8절의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는 말과 같은 의미의 말이다. 따라서 본구절의 의미에 대해서는 8절 주석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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