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한국 양씨(梁氏)의 기원(起源)
1. 시조(始祖) 양을나(良乙那)
가. 삼성설화(三姓說話)
동서양을 막론하고 선사시대의 개국 및 건국시조에 관한 설화나 전설은 널리 유포되어 왔었고 오늘날까지 여러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개국시조이신 단군왕검을 비롯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국의 김수로왕 등의 설화나 전설들도 이같은 형태의 것이다.
즉 여기에는 하늘로부터 내려 왔다는 천강설(天降說), 알에서 나왔다는 난생설(卵生說) 등이 있는데 탐라국의 개창을 알리는 양․고․부 삼성설화(三姓說話)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다만 위의 천강설(天降說)이나 난생설(卵生說)과는 달리 지중용출설(地中涌出說)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점이 특색이라 하겠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정사(正史)인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 의하면 제주의 옛 지명을 옛날 구이(九夷)의 땅으로 도이(島夷)라 칭해 왔고 이후 동영주(東瀛州) 사라(沙蘿) 탐모라(耽毛羅) 등으로 불러왔다. 고려사 고기(古記)에 “원래 사람이 없던 이 땅 모흥현(毛興穴)에 삼신인(三神人)이 솟아 나왔는데 그 맏이(長)을 양을나(良乙那), 차(次)를 고을나(高乙那), 삼(三)을 부을나(夫乙那)”라 하였으며 “양․고․부 삼신인은 가죽옷을 입고 사냥을 하여 고기를 먹었다.”라고 하여 삼신인(三神人)의 지중용출설(地中涌出說)과 그 서열을 거증하고 있다.
효종 때 제주목사를 지낸 태호(太湖) 이원진(李元鎭 : 1594~?)이 엮은 탐라지(耽羅志) 고적조(古跡條)를 인용한 민속학자 현용준(玄容駿)의 ‘제주도 신화’에서 다음과 같이 삼을나(三乙那) 신화를 인용하고 있다.
“삼성혈은 제주에서 남쪽으로 3리 쯤 떨어진 곳에 있는데 옛 이름은 모흥혈(毛興穴)이다. ‘고려사 고기’에 이르되 애초에 사람이 없더니 땅 속에서 세 신인이 솟아났다. 지금의 한라산 북쪽 기슭에 있는 모흥굴이란 동굴이 그곳이다. 맏이가 양을나요, 둘째가 고을나요, 셋째가 부을나이다. 세 사람은 거친 두메에서 사냥을 하며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았다. 하루는 자주 빛으로 봉한 나무상자가 동쪽 해변에 떠도는 것을 보고 가까이 나아가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석함이 있는데 붉은 띠를 두르고 자주 빛 옷을 입은 사자(使者)가 따라와 있었고 상자 속에는 푸른 옷을 입은 세분의 처녀와 망아지, 송아지, 오곡의 씨앗이 들어 있었다.
이에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벽랑국의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세 따님을 낳으시고 말씀하시되 서해 중 산기슭에 신자(神子) 세 사람이 탄강하시어 장차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으시다 하시고 신에게 명하여 세 따님을 모시라고 하기에 이곳까지 따라 왔습니다. 마땅히 배필로 삼으시어 대업을 이루소서.’ 하고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사라졌습니다. 이에 세 신인(神人)은 나이 차례에 따라 세 분의 처녀에게 각각 장가들고 물 좋고 땅이 기름진 곳으로 나아가 활을 쏘아 화살이 닿는 땅을 각기 나누어 경작하였다. 양을나가 거처하는 곳을 제일도(第一徒), 고을나가 거처하는 곳을 제이도(第二徒), 부을나가 거처하는 곳을 제삼도(第三徒)라 하였다. 삼신인을 각기 차지하는 지역에 오곡의 씨앗을 뿌리고 소와 말을 기르니 날로 백성이 많아지고 부유해 갔다.”
나. 삼성사(三姓祠)
삼성사는 탐라국의 시조이고 제주도의 최초 주인인 양, 고, 부 삼신인(三神人)이 지중용출(地中湧出)하신 성지(聖地) 삼성혈에 있는 사당으로 현재 국가지정 사적지 제134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아득한 옛날 이 땅에 사람이 살지 않을 때 땅에서 양, 고, 부 삼신인이 지중에서 용출하여 수렵생활로 피의육식(皮衣肉食)을 하다가 하루는 오곡의 씨앗과 가축 등을 갖고 온 벽랑국(碧浪國)의 삼공주(三公主)를 맞아 각기 배필을 삼음으로써 제주도에 처음으로 농경생활을 비롯한 삶의 터전을 마련, 수천 년의 역사를 이어 오면서 오늘의 발전을 있게 하였다.
혈단(穴壇)내 3개의 동굴은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상당부분 매몰되어 있으나 사적지로서의 역사적 가치는 더욱 증가되어 최근에는 해마다 50여만 명의 관람객이 이곳을 찾고 있다.
삼성사에서는 해마다 세 번의 제사를 모시고 시조의 높은 뜻과 그 얼을 기리고 있는데 이곳이 성지로 지정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연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성혈의 조성은 1526년(중종 21) 제주목사 이수동(李壽童)이 삼성혈 혈단(穴壇) 둘레 280여 척에 돌담을 쌓고 북쪽에 홍살문과 혈비(穴碑)를 세워 삼성의 후예로 하여금 춘추제(春秋祭)를, 매년 동짓달 상정일(上丁日)에는 도민들로 하여금 제사를 모시도록 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1년 뒤인 1699년(숙종 25년) 정월에 대정현감(大靜縣監) 송래백(宋來栢)이 삼성묘(三姓廟) 상량문과 삼성단(三姓壇) 사우기(祠宇記)를 쓰다.
▶1702년(숙종 28년) 3월 이형상(李衡祥)목사가 가약천(嘉藥川) 동쪽으로 삼성사우(三姓祠宇)를 옮겨 짓고 상량문을 완성하였는데 위패순위를 삼신인 강생의 사적문헌과 국사 등 갖가지 기록을 널리 상고한 끝에 양을나를 제1위에 모시고 고을나를 제2위에, 부을나를 제3위에 모셔 제문을 지어 제사를 올리다.
▶1710년(숙종36년) 최계옹(崔啓翁)목사가 신위 판에 부군(府君)이라는 두 글자를 을나(乙那)로 고쳐 쓰다.
▶1740년(영조16년) 3월에 목사 안경운(安慶運)이 수직생(守直生) 40인을 뽑아 교대로 수직케 하고 도민 중에서 명망 있는 사람으로 제장(齊長)을 삼는 한편, 장의(掌議) 한사람과 유사(有司) 한사람을 두는 제도를 만들었다.
▶1772년(영조 48년) 양세현(梁世絢) 목사가 삼성사 담장을 새로 증축하고 나무를 심었으며 선흘(善屹), 조천(朝天), 와산(臥山) 등지에 있는 위토를 사들여 향청(鄕廳)으로 하여금 그 수호와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다.
▶1785년(정조 9년) 제주 유학(幼學) 양경천(梁擎天), 고경정(高擎井) 등이 임금님께 글을 올려 삼성묘(三姓廟)에 사액(賜額)을 내려주도록 청하니 모든 대신들이 의논한 뒤 왕께 아뢰어 윤허가 내려졌고 예문관에서 올린 액호 삼성사(三姓祠), 삼을사(三乙祠), 삼령사(三靈祠)중 삼성사가 낙점되어 예관 고택겸(高宅謙)을 보내어 사액하다.
▶1849년(헌종 15년) 장인식(張寅植) 목사가 숭보당(崇報堂)을 짓고 기숙생 15명을 두어 학문을 연구하게 하다.
▶1865년(고종 2년) 제주목사 양헌수(梁憲洙)가 경내에 나무를 많이 심고 용담동 등에 있는 위토를 사서 희사하는 등 크게 공헌하다.
▶1871년(고종 8년) 대원군의 사원 철폐령에 의하여 사우(祠宇)가 훼철되는 비운을 겪었다. 1873년(고종 10년) 제주에 유배와 있던 최익현(崔益鉉) 등의 상소가 있었으며 1890년(고종27년) 정언(正言) 고경준(高景晙)이 삼성후손들과 협의한 끝에 모흥단 동쪽에 사우를 새로 짓고 혈단비를 마련하니 삼성사는 훼철(毁撤)된지 19년 만에 옛 모습을 되찾고 삼을나의 신위도 다시 봉안하게 되었다.
▶1907년(순종 원년) 삼성사우 수호와 향전을 제주군청에서 주관하게 하였다. 이후 1910년 참사 양익룡(梁翼龍) 등이 삼성사 관리권을 제주군청으로부터 인계받아 사우(祠宇)와 전사청(典祀廳), 숭보당(崇報堂), 수복청(守僕廳), 담장 등을 중건하고 나무와 화초를 많이 심어 주위 환경을 일신시켰다.
▶1919년 삼성대표의 합의 하에 사우, 숭보당, 단직사(壇直舍)를 중수하기 시작하여 다음해에 준공하고 그 해 12월 재단법인 삼성시조제사재단 설립을 결의하여 1921년 11월 10일 정식인가를 받았다.
▶1964년 6월 10일 삼성혈이 국가 지정 문화재(사적 134호)로 지정되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거친 삼성사는 근년에 와서 제주시 이도동에 삼성회관까지 건립하여 삼성(三姓)의 도 종친회(道 宗親會) 사무실을 공유하기에 이르렀다.
삼성사에서는 4월 10일의 춘계대제, 10월 10일의 추계대제, 12월 10일의 건시대제 등 연 3회에 걸쳐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춘추 2회의 대제는 후손들이, 건시대제(혈제-穴祭)는 도지사를 초헌관, 그밖에 도내 기관장과 도민대표가 아헌관 종헌관을 맡고 있다.
2. 개사성조(改賜姓祖) 양탕(梁宕)
가. 건승원(乾承原)의 조성
- 1999. 10. 11. 건승원 조성기에서
여기 선택된 땅 아늑한 고지에 양문(梁門)의 뜻을 모아 근묘화실(根描花實)의 인도지상(人道之常)을 몸소 실천하시어 양문의 뿌리를 튼튼히 다진 중흥조 휘 탕(宕)선조의 위업을 기리는 건승원을 조성한다. 인지(人智)가 채 발달하지 못한 아득한 옛날에 지혜와 용기의 진취적 기상으로 신천지를 열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굽이쳐 흐르는 역사의 현장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종문의 홍업을 널리 심어주신 탐라국주 탕 선조의 위대한 업적은 양문의 전통을 이어 이제 종사(宗史)의 구심점으로 종인의 가슴 가슴에 각인되었다.
탐라국을 개국하신 양을나 성왕의 후예로서 그 위상을 드높여 자손만대의 기틀을 튼튼히 다지기 위함이다.
신화시대 이후 유장(悠長)한 세월에 걸쳐 우리 양문은 숱한 인재를 배출한 명문거족으로서 인본(人本)을 다한 것은 탕 선조의 높으신 은혜임을 마음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또한 탕조께서는 내물왕 18년(374)에 신라에 입조하시어 공적선린외교를 도모하실 때 신라왕은 탐라국주의 청고(淸高)하신 기상과 관아하신 용모에 감복하시어 환대하시고 중상작록(重賞爵祿)과 금수의관을 내리시는 한편, 사성(賜姓)의 전례에 따라 양(良)자 성을 양(梁)자 성으로 바꾸어 쓰시도록 하였다.
이제 탕 선조의 후손들은 전국에 걸쳐 살고 있으며 제주와 남원과 충주로 분관되어, 제주는 한라군 휘 순(洵)후 유격장군 휘 보숭(保崇)과 성주공 휘 구미(具美)를 남원은 병부낭중공 휘 능양(能讓), 용성부원군 휘 주운(朱雲), 대방부원군 휘 수정(水精)을, 충주는 예성부원군 휘 능길(能吉)을 각각 기세조로 모시고 있다.
여기 조성된 건승원에 후손들의 정성으로 이루어진 광덕전(廣德殿)에 위패를 모시고 다시 추원비를 건립하여 조상의 업적과 발자취를 새기는 것은 날로 퇴색되어 가는 효 사상을 되찾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드높은 도덕의 향기를 후손에게 가르치고 일깨워 삶의 지표로 전승시키자는 데 그 뜻이 있는 것이다.
이곳에 모든 종인의 예지와 효심이 한데 모아져 고금의 선대와 후대를 연결하는 혈맥(血脈)의 가교가 될 것이며 대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이 시대가 이룩한 역사의 유물로 길이 남을 것이다.
이 성지(聖地) 건승원은 양문만이 갖는 숭조 위선의 장이 아니라 만인을 위한 효와 인성교육의 도장으로 천추만대에 길이 빛날 것이다.
나. 양(良)을 양(梁)으로 바꾼 역사적 배경
모든 양씨는 탐라의 신인 양을나를 유일조로 하는 동계혈족이며 본래는 양(良)성을 쓰다가 신라 때 양(梁)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세보(世譜)에 신인 양을나는 고조선의 단군과 같은 무렵에 탐라국의 개국왕으로 군림했으며 그 자손이 대대로 왕위(군주)를 계승하여 서기 938년이 되는 고려 태조 21년에 이르기까지 탐라를 통치해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