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i-cheonkyungmimi4155
이 글은 2009년 7월 지적공사 정기지 <땅과 사람들>에 실린 배우리 회장의 글을 옯겨 실은 것입니다.
090700 지적공사 기고 15매 땅기 땅과 사람들 땅이름 이야기 04 `인천
인주이씨 왕비로 인해 얻은 고을 이름
≡ 고려 시대에 명문 지역으로서의 입지 굳힌 7대어향 ≡
한국땅이름학회 회장 배 우 리
수도권의 가장 큰 항구인 인천은 8구 2군 1읍 19면 123동을 관할하는 우리 나라 5대 도시의 하나로, 현재는 국제공항과, 국제항만, 송도신도시 등 미래에 대한 희망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 대도시이다.
한국문화 형성기로 보아서는 북방과 남방의 중간지대로, 가장 먼저 근대사의 여명을 맞이한 고을이다. 예부터 대륙의 문물이 한반도에 전파되고, 한반도의 문물이 해외로 나가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인천 일대는 5,6천년 전부터 인간이 거주하고 있었다. 문학산과 계양산 부근, 만석동 일대의 해안지대에서 돌도끼·돌칼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고, 지금도 문학동, 학익동, 주안동 등에 고인돌이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이를 짐작할 수 있는데, 이는 이 고을의 비옥한 땅, 풍족한 물 때문이었을 것이다.
1. 고을 최초의 이름 미추홀은 '물골'의 뜻
인천 최초의 명칭은 미추홀(彌鄒忽). <동국여지승람>에 백제 시조 온조왕의 형인 비류(沸流)가 현재의 인천에 정착하여 미추홀로 명명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 이전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것은 없다. 즉, 고구려의 왕자 비류가 불굴의 개척정신으로 문학산 부군에 도읍을 정하고 미추홀을 세웠으니, 이것이 인천 고을 발전의 토대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에는 각국의 격전지였던 인천 지역은 고구려 영역이었을 때는 '매소홀'이라 하였다.
미추홀과 매소홀은 모두 '물의 고을'의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보인다. 미추홀의 '미'나 매소홀의 '매'는 물(水)의 뜻이기 때문이다. '홀'은 성(城)이나 골(고을)로 해석되며, '추'나 '소'는 모두 사잇소리 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매소홀이라 불리던 인천은 후기 신라의 경덕왕 16년(757)에 이르러 소성현(邵城懸)이 된다. 경덕왕이 신라의 제도나 관직을 중국식으로 고치고, 토박이말로 땅이름을 모두 한자어로 바꾸었던 때의 일이다.
소성현은 고려 숙종(1095~1105)에 이르러 경원군(慶源郡)으로 개칭, 승격되었는데 이는 인천이 숙종의 어머니 인예(仁譽) 순덕태후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 인종(1122~1146) 때에는 왕의 어머니 인천이씨 순덕왕후의 고향이라 하여 인주(仁州)로 또 승격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인천은 우리 나라 역사의 중심지에 서게 된다.
왕의 어머니와 왕비를 배출한 고을이 되면서 명문지역으로의 입지를 굳힌 인천은 '7대어향(七代御鄕)'이란 칭송까지 듣고 고을도 승격되며 관할구역도 넓어진다. '7대어향'이란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 동안 인천이 왕의 외향이거나 왕비의 고향임을 말한다.
조선 초 태종 13년(1413)에 이르러 '인주가' '인천'으로 바뀐다. 모든 군이나 현에 '주(州)'가 들어 있는 고을을 모두 '산(山)'자나 '천(川)'자로 바꾸는 과정에서의 일이었다. '인산(仁山)'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이 고을은 물에 가까워 '인천'이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인천'이란 이름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천이란 명칭은 인천이씨 왕비의 관향인 인주(인천)에서 유래된 것이며, 한자 뜻인 '어진내(仁川)'에서 비롯된 것이 절대 아니다.
2. 부평과 인천에서 한 글자씩 따서 '부천'을 만들고
인천은 지금은 관할구역이 엄청 넓지만, 전에는 지역이 지금과 같지 않았고, 인접 구역과의 병합-분리도 꽤 심했다.
조선 11대 중종 21년(1526)에는 수원진을 인천에 옮겼는데, 19대 숙종 14년(1688)에 요망한 승려 역적 여환이 난 고을이라 하여 현으로 강등하였다. 같은 24년(1698)에 복구되어, 부내, 조동, 신현, 전반, 황등천, 남촌, 원우미, 다소, 주안, 이포, 영종, 용유, 덕적의 13개 면을 관할했다.
26대 고종 32년(1895) 지방 관제 개정에 따라 인천부가 되어 인천, 부평, 김포, 양천, 시흥, 안산, 과천, 수원, 남양, 강화, 교동, 통진의 12군을 관할하다가, 그 다음 해(1896)에 다시 인천군이 되었는데, 그 이듬해(1897) 3월에 경인철도 시설 공사를 시작함에 따라 일인들이 몰려들어서 요지는 모두 차지하여 왜식으로 송판, 화방, 지나, 해안, 중정, 본정, 산수, 항정, 산근, 용강, 경정, 사정, 궁정, 빈정, 화정, 도산, 부도, 유정이라 하여 새로 일인촌을 만들었다.
1914년 3월 1일 부군 폐합에 따라 조동, 신현, 전반, 황등천, 남촌, 다문, 주안, 영종, 용유, 덕적의 10개 면을 부천군에 넘겨 주고, 부내면의 금곡, 우각, 화촌, 만석, 내동, 외동, 용동, 답동, 화개, 신창, 율목의 11개 동리와 다소면의 수유, 독각, 장천, 송림, 송현, 신촌, 화도의 7개 동리를 병합하면서 관할 구역의 큰 변동이 있었다. 이 때, 인천에는 송판정 1~3정목, 해안정 1~4정목, 본정 1~4정목, 산수정 1~3정목, 항정 1~2정목, 화정 1~3정목 등의 왜식 지명이 다수 자리잡았다.
1936년 10월 부천군 다주면의 일부와 문학면의 몇 개 리를 편입하고, 1940년 4월 구역 확장에 따라 부천군 문학면, 다주면, 남동면, 부내면, 서곶면 등을 편입하여 동명을 거의 모두 왜식으로 고쳤다.
1947년 2월 왜식 동명 변경에 따라 1정목, 2정목, 3정목 식의 이름을 1가, 2가, 3가 식으로 바꾸고 '○○정(町)'식의 이름들은 '○○동(洞)' 식으로 고쳤다.
현재 인천 관할에 속한 부평(富平)도 조선시대에는 '부평도호부'였을 정도로 큰 고을이었는데, 1895년에 부천군으로 되고, 일제 강점기인 1914년에 인천부, 강화군, 남양군, 각 일부 지역과 통폐합되는 등의 변화를 겪었다. 부천시는 바로 '부평'과 '인천'이란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인천은 현재 동쪽은 경기도 부천시와 시흥시, 남쪽은 시흥시, 서쪽은 바다 건너 옹진군, 북쪽은 김포군에 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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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인천시(仁川市) -미추홀, 매초홀, 소성, 경원, 인주- 【광역시】
1. 구역과 지명 변경
본래 미추홀국. 고구려 관할일 때 매조홀현. 신라 제35대 경덕왕이 소성으로 고쳐 율진군에 딸린 현.
고려 8대 현종 9년(1018)에 수주(부평)에 넣었는데, 15대 숙종 때 인예왕후(제11대 문종의 왕비) 이씨의 고향이라 하여 경원군으로 승격.
17대 인종 때 또 순덕왕후(16대 예종의 왕비) 이씨의 고향이라 하여 인주로 고쳐서 지주사로 하였다가, 제34대 공양왕 2년(1390)에 7대의 임금의 고향이라 하여 경원부로 승격하였다.
조선 태조 원년(1392)에 인주로 강등하고, 3대 태종 13년(1413)에 인천군으로 고쳤다가, 7대 세조 6년(1460)에 소헌왕후(세종의 왕비)의 어머니(심온의 부인)의 고향이라 하여 도호부로 승격.
11대 중종 21년(1526)에 수원진을 이곳에 옮기었는데, 19대 숙종 14년(1688)에 요망한 중 역적 여환이 난 고을이라 하여 현으로 강등하였다가, 같은 24년(1698)에 복구되어, 부내, 조동, 신현, 전반, 황등천, 남촌, 원우미, 다소, 주안, 이포, 영종, 용유, 덕적의 13개 면을 관할.
26대 고종 32년(1895) 지방 관제 개정에 따라 인천부가 되어 인천, 부평, 김포, 양천, 시흥, 안산, 과천, 수원, 남양, 강화, 교동, 통진의 12군을 관할하다가, 그 다음 해(1896)에 다시 인천군이 되었는데, 그 이듬해(1897) 3월에 경인철도 시설 공사를 시작함에 따라 일인들이 몰려들어서 요지는 모두 차지하여 왜식으로 송판, 화방, 지나, 해안, 중정, 본정, 산수, 항정, 산근, 용강, 경정, 사정, 궁정, 빈정, 화정, 도산, 부도, 유정이라 하여 새로 일인촌을 만들었다.
1914년 3월 1일 부군 폐합에 따라 조동, 신현, 전반, 황등천, 남촌, 다문, 주안, 영종, 용유, 덕적의 10개 면을 부천군에 넘겨 주고, 부내면의 금곡, 우각, 화촌, 만석, 내동, 외동, 용동, 답동, 화개, 신창, 율목의 11개 동리와 다소면의 수유, 독각, 장천, 송림, 송현, 신촌, 화도의 7개 동리를 병합하여 금곡, 화평, 만석, 내리, 용리, 외리, 율목, 송림, 송현, 신화수의 10개 리와 왜식으로 송판정 1~3정목, 화방정 1~3정목, 해안정 1~4정목, 중정 1~3정목, 본정 1~4정목, 산수정 1~3정목, 항정 1,2정목, 화정 1~3정목, 지나, 산근용강, 사정, 궁정, 빈정, 도산, 부도, 유정의 34개 정목으로 개편 관할.
1936년 10월 1일 부령 93호에 의하여 부천군 다주면의 구월, 간석, 십정의 3개 리와 문학면의 학익, 승기, 관교, 옥련의 4개 리를 편입하고, 1940년 4월 1일 구역 확장에 의하여 부천군의 문학(도장, 문학, 연수, 청학, 동춘 5개 리), 다주(사충, 도화, 장의, 용정 4개리), 남동(논현, 고잔, 와우, 도산, 발산, 장수, 운연, 서창, 만수 9개 리), 부내(부평, 하리, 가현, 신대,화전, 작천, 도두, 후정, 갈월, 효성, 청천, 산곡, 마분, 대정, 항동 구산 16개 리), 서곶(가정, 신현, 포리, 고작, 고잔, 가좌, 백석, 검암, 시천, 공촌, 연희, 심곡 12개 리)의 4개 면을 편입하여 동명을 왜식으로 고쳐서 사충을 주안, 도화를 앵정, 장의를 대화, 용정을 일지출, 구월을 정지, 간석을 목월, 십정을 대도, 승기와 관교를 합하여 원정, 도장을 무학, 동춘을 원정, 옥련을 송도, 고잔을 일향, 와우를 오보, 도산을 신도산, 발산을 수정, 서창을 낭연, 부평과 신대를 합하여 소화, 하리를 대정, 작천, 화전, 가현을 합하여 작전, 도두를 동서, 후정을 소립, 갈월을 길야, 효성을 서정, 청천을 천상, 산곡을 백마, 마분을 명치, 대정을 용운, 항동을 향취, 구산을 이등, 가정을 천대전, 신현을 현무, 포리를 구수, 고작을 촌상, 고잔을 이가, 백석을 운양, 검암을 과생, 시천을 춘일, 공촌을 흑전, 연희를 정상, 심곡을 일진으로, 그 나머지 금곡, 우각, 화평, 만석, 내리, 용리, 외리, 율목, 송림, 송현, 신화수, 논현, 장수, 운연, 만수, 문학, 연수, 청학, 가좌의 19개 리는 리를 정으로 고쳤다.
1947년 2월 1일 왜식 동명 변경에 따라 송판정1~3정목을 송월1~3가로, 화방정1~3정목을 성북1,2가로 지나정을 선린으로, 해안정1~4정목을 해안1~4가로, 중정1~3 정목을 중앙1~3가로, 본정1~4정목을 관동1~4가로, 산수정1~3정목을 송학1~3가로, 항정1,2정목을 항동1,2가로, 산근정을 전동으로, 용강정을 인현동으로, 내정을 서경동으로,외정을 경동으로, 욱정을 답동으로, 신정을 신포로, 궁정을 신생으로, 빈정을 사동으로, 화정 1~3정목을 신흥 1~3가로, 도산정을 도원동으로, 부도정을 선화동으로, 대화정을 숭의동으로, 일지출정을 용현동으로, 원정을 관교동으로, 오보정을 남촌동으로, 신도산정을 도림동으로, 수정을 수산동으로, 소화정을 부평동으로, 대정정을 계산동으로, 동서정을 서운동으로, 소립정을 삼산동으로, 길야정을 갈산동으로, 명치정을 부개동으로, 용운정을 용동으로, 향취정을 일신동으로 고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전 이름으로 복구했다.
1949년 8월15일 인천부를 시로 고쳤고, 1962년 5월 21일 중부, 북부, 동부, 남부, 남동, 문학, 부평, 주안, 서곶의 9개 출장소를 두어,
중부출장소는 중앙1~4가동, 해안1~4가동, 항동1~가동, 관동1~3가동, 송학1~3가동, 신흥1~3가동, 북성 1~3가동, 송월 1~3가동, 사동, 신생, 신포, 답동, 선화, 유동, 율목, 도원, 선린, 인현, 전동, 내동, 경동, 용동의 44개 동회를,
북부출장소는 송현1~3동, 송월1~3가동, 화수1~3동, 만석, 화평의 11개 동회를,
동부출장소는 송림1~4동, 금곡1,2동, 창영동, 송현 4동의 8개 동회를,
남부출장소는 숭의1~4동, 용현 1,2동, 학익동, 옥련동의 8개 동회를,
남동출장소는 논현 1,2동, 만수, 장수, 남촌, 수산, 도림, 서창, 운연, 고잔의 10개 동회를,
문학출장소는 관교, 문학, 선학, 연수, 청학, 동춘의 6개 동회를,
부평출장소는 부평1~3동, 계산1,2동, 십정2동, 부개, 일신, 구산, 산곡, 청천, 효성, 학전, 서운, 삼산, 갈산, 작전의 16개 동회를, 주안출장소는 주안1,2동, 도화 1,2동, 석간, 구월, 십정 1동의 7개 동회를,
서곶출장소는 연희, 백석, 시천, 검안, 경서, 공촌, 심곡, 가정, 신현, 석남, 원창, 가좌의 12동회를 관할.
1963년 1월 1일 부천군의 작약도를 동구 만석동에 편입하고, 1968년 1월 1일 중부 출장소와 북부출장소의 송월 1~3가동을 합하여 중구로, 북부출장소 가운데 송월1~3가동을 제외한 8개동과 동부출장소를 합하여 동구로, 남부, 남동, 문학, 주안의 4개 출장소를 합하여 남구로, 부평출장소와 서곶출장소를 합하여 북구로 지정하는 동시에, 남구 남동출장소와 북구 서곶출장소를 두었으며,
1973년 7월 1일 동구 월미도를 중구에 편입하고, 1981년 7월 1일 인천직할시가 되어, 4구, 2출장소, 99동, 85동회, 1,675통, 9,675반을 관할했다.
동쪽은 경기도 부천시와 시흥시, 남쪽은 시흥시, 서쪽은 바다 건너 옹진군, 북쪽은 김포군에 닿아 있다.
2. 개관
동경 126도 37′ 북위37도 28′에 위치.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이다. 리아스식 해안으로 해안선이 길고 복잡하며 섬이 많다. 151개의 섬이 있으며, 그중 112개가 섬이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를 인천이 품고 있다. 또한 국제공항과, 국제항만, 송도신도시등 미래에 대한 희망과 비젼을 가지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고구려의 왕자 비류는 불굴의 개척정신으로 문학산 부군에 도읍을 정하고 미추홀을 세웠다.
삼국시대에는 각국의 격전지로서 '매소홀', '소성' 등으로 불리다가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인천은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지에 서게 된다.
고려 때는 왕의 어머니와 왕비를 배출한 명문지역으로 '7대어향(七代御鄕)'이란 칭송을 듣는다. 이런 이유로 '경원', '인주' 등으로 승격되며 관할구역도 넓어진다.
조선 태종 13년(1413)의 지방제도 개편 때 비로소 '인천'이란 이름이 역사에 등장한다. 여기에서 미추홀의 "미"나 매소홀의 "매"는 물(水)의 뜻이고, "홀"을 성(城)이나 골로 해석되며, '추'나 '소'는 모두 사잇소리 으로 풀이하고 있다.
고구려 시대에 매소홀이라 불리던 인천의 후기 신라의 경덕왕 16년(757)에 이르러 소성현(邵城懸)이 된다. 경덕왕이 신라의 제도나 관직을 중국식으로 고치고, 토박이말로 땅이름을 모두 한자어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고려 숙종(1095~1105)에 이르러 소성현은 경원군(慶源郡)으로 개칭, 승격되었는데 이는 인천이 숙종의 어머니 인예(仁譽) 순덕태후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 인종(1122~1146)때에는 인종의 어머니 인천이씨 순덕왕후의 고향이라 하여 인주(仁州)로 또 승격되었다.
고려 말에 와서는 인천이 더 높은 고을이 된다.
공양왕 2년(1390)에 이르러 인천은 경원부로 개칭, 승격된다. 이는 인천이 7대 어향(御鄕)이었기 때문이다. '7대 어향'이란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 동안 인천이 왕의 외향이거나 왕비의 고향 고을임을 말한다.
조선 초 태조 원년(1392)에 인주로 환원되고, 태종 13년(1413)에 이르러 모든 군이나 현에 '주(州)'가 들어 있는 고을을 모두 '산(山)'자나 '천(川)'자로 바꾸는 바람에 이 고을이 물에 가깝다 하여 '인천'으로 바뀌게 된다.
따라서 인천의 명칭은 '어진내(仁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인주이씨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간추린 인천사
고 대
신석기시대의 중간기인 금속병용기에 사람이 산것으로 추정(인천 각지방의 고인돌과 문학산, 계양산에서 각종 석기들을 발견)
삼국시대
백제를 세운 비류가 문학산에 도읍을 정하고 미추홀이라 부른 것 이 처음(옹진: 고구려의 용천, 부진이 강화:참성단, 삼랑성, 고구려혈구군 설치)
미추홀이 치정구역으로 등장한 것이 고구려 장수왕(413-491)때 고구려(475)백제를 침공하여 한강 유역 미추홀지역에 매소홀현을 두었다.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6년(757) 매소홀현을 소성현으로 개칭 율진군(현과천)에 소함(부평: 장제군, 옹진:폭지군, 강화: 해구군으로 개칭, 원성왕 6년 혈구진 설치)
고 려
고려 현종 9년(1018) 소성현이 (수주:현 부평)에 소속됨. 숙종조에 이르러<경원군>으로 승격
인조때 다시 인주로 승격 (부평:수주로 개칭(940), 의종 4년(1150)안남도호부 설치, 고종 2년(1215) 계양도호부로 개칭, 충렬 왕 34년(1308) 길주목으로 승격.
옹진:태조 23년(940) 옹천을 옹진으로 개칭, 백령진 설치, 강화: 태조23년 강화로 개칭, 현을 둠(995), 고종 19년(1232)강화천도군으로 승격, 우왕 3년(1377)강화부로 승격
공양왕 2년(1390)에 7대 어향이라 하여 경원부로 승격.(옹진:백령진 혁파, 강화: 유수부로 승격)
조 선
조선왕조 태조1년(1392)에 인주로 변경(옹진:태조 6년 옹현진에 진 설치)
태조 13년(1413)에 군이나 현에 주자가 들어있는 곳은 산이나 천으로 고치게 되어 인천군으로 재편하므로서 인천이라는 말이 등장.(부평:부평도호부설치. 옹진:병마사 현령 겸임, 세종 5년(1423) 첨절제사로 변경강화 :가오하호부로 개칭)
세조 6년(1460) 인천도호부로 승격(강화:인조5년(1627) 강화유수부로 승격)
숙종14년(1688) 현으로 변경
숙종 24년(1698) 도호부로 복구(옹진: 숙종45년(1719).황해수영 설치, 옹진현 - 도호부로 승격)
근 대
고종 12년(1875)운양호 사건 (강화 : 고종 3년(1866)병인양요 강화성 함락.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고종 11년(1812) 강화포대 설치, 고종 13년(1876)강화도조약 체결)
고종 19년(1882) 화도진에서 한미수호조약 체결
고종 20년(1883) 1월에 개항하므로서 통상사무를 권장하기 위한 감리서 설치
1885년 감리서 폐지되면서 인천부로 개편 (부평:인천부에 속함, 옹진: 해주부 옹진군 강령군으로 개편 호아해도로 이속)
1896년 지방제도를 개편함에 따라 경기도 인천부 (부평: 부평군으로 개편, 강화: 건양1년 강화부로 변경)
1899년 국내 최초의경인철도 개통
1906년 인천이사청 설치로 인천부윤이 감리사로 직무수행
(부평:부천군에 편입(1914), 옹진:강령군이 옹진군에 편입(1909), 백령도 장연군에 편입(1914). 강화:강화군으로 변경(1906), 교동군 편입(1914)
1936년 2차로 문학, 남동,부내, 서곶등 4개면이 편입되어 부평군 대부분이 인천으로 편입
1949년 인천시로 개편(옹진:벽석군 일부외 벽령도 편입(1945) 1949년 경기도로 이속(1949)편입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실시
1963년 부천군 작약도 편입 (옹진:백령면 대청 출장소 설치(1962), 부천군 도서 6개면 편입(1973), 대청면 신설(1974), 강화:강화읍 승격) 1981년 직할시 승격 (옹진:자월면 신설(1983), 강화:양오리 송해면 편입(1983))
1989년 김포군 계양면과 옹진군 영종면, 용유면 편입
1995년 강화군, 용진군, 김포군 검단면 편입으로광역시로 개칭
면적이 954.10제곱킬로미터로 3.56배 늘어서 현재 서울보다 면적이 1.5배된다.
4. 역사문화의 특징
* 미추홀왕국(彌鄒忽王國)의 개국(開國)정신
선구적 개척정신의 뿌리는 비류(沸流)의 개국정신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백제의 건국설화중 비류설화(沸流說話)를 보면 비류는 새로운 신천지를 개척하기위해 수천리 생소한 땅을 찾아오다 이곳 인천 문학산에 도읍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야심만만한 개국의 꿈을 키우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을 설득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선구자적인 예지에서 우러난 확신이며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온갖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의지와 용기 그리고 실천적인 행동은 바로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내고자 하는 개척정신이었다. 이 정신은 오늘날 인천이 세계속의 국제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적인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 인천 최초의 항구 능허대(凌虛臺) 개척
옥련동 해안 조갯골에 위치했던 능허대는 서기 372년 우리 고장 최초의 국제적인 항구가 개척된 곳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대립하여 서로 밀고 밀치는 적대관계로 발전하게 되자 백제는 대륙과의 육로 교통이 단절되는 고립속에서 고심하던중, 중국 대륙과 가장 교통이 편리하고 가까운 항로를 개척하게 된 것이다. 이는 당시 이 고장 선조들이 어려웠던 시련과 도전을 슬기롭게 극복해낸 창조적인 정신의 발현이 었으며 새로운 해상교통을 선구적으로 개척한 슬기였다.
* 운하(運河)개척의 선구지 김포굴포(金捕堀逋)
김포굴포계획은 서해바다 인천과 한강을 연결하는 선구적인 대운하(大運河) 건설 계획 이었다.
이 계획은 고려시대에 최이가 처음 창안했으나 여러가지 기술부족으로 착수치 못했고 조선 중종시대 다시 이 계획을 다시 추진했으나 완성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웅대한 계획을 추진하던 흔적은 오늘날까지 뚜렷하게 남아있다. 이 계획은 8. 15이후 1970년대까지 경인운하계획(京仁運河計劃)으로 발전되어 왔으며 이제 이의 실현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처럼 이 고장 인천은 운하개척의 선구지로서 무엇인가 새롭게 발전하려는 선구정신이 이어져 내려왔던 곳이기도 하다.
* 녹청자 도요지(綠靑磁 陶窯址)
녹청자 도요지는 인천이 자랑할 수 있는 문화재(文化財)중 가장 값진 유적 (遺蹟)이다. 녹청자란 토기에서 청자로 발전하는 중간과정의 것으로 매우 소중한 문화재이다. 이러한 도요지는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일본에만 두 곳이 남아 있어 일인들이 이를 세계적으로 자랑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1966년 우리 고장에서 녹청자 도요지가 발견됨으로서 일본의 원형이 한국에서 전파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처럼 이 고장은 천여년 전부터 녹청자 개척의 선구지로서 창조적인 슬기가 이어져 내려온 곳이라 할 수 있다.
* 선구적으로 개척된 역사/문화 도시
인천은 개항과 함께 실질적인 국제항구로 등장하면서 근대 서구 문물이 제일 먼저 밀고 들어온 관문이었다.
그러므로 선구적 개척지 구실을 하였을 뿐 아니라, 선구적인 인물 또한 많이 배출된 곳이기에 이를 아래에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인천은 우리나라 최초로 개설된 역사적인 사실들이 많다.
- 서울과 인천간 우리나라 최초의 전신업무가 개시됨.(1885. 9. 28)
-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만국공원이 생김(현 자유공원)(1888년)
-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이민이 인천항을 통해 이루어 졌음(1902년, 하와이)
- 우리나라 최초의 경인간 민간전화 개통(1902. 9. 20)
* 선구적인 근대문물(近代文物)의 수용
= 지계설치
- 1883년 9월 30일 "인천일본지계조약" 성립됨. 중앙, 관동 7,000평.
- 1884년 4월 2일 "청국지계조약". 선린동 5,000평.
- 1884년 10월 "각국지계". 송학, 송월, 북성동 140,000평
- 30년간 존속하다 1913년에 철폐됨.
= 구미각국상사(歐美各國商社) 진출
- 개항당년 영국 상선회사인 "이화양행" 출장소 설치.
- 1884년 독일 "세창양행"
- 1885년 미국 "타운센드양행"
- 1896년 영국 "홈링거상회"
- 1906년 "광창양행"
= 인천 ~ 상해간(上海間) 정기운항선 1883년에 개설, 매월 1~2회 운항.
= 근대적인 우편제도(郵便制度)
- 1884년 한성우정총국 설치
- 11월 17일 인천분국 개설
- 분국장 이상재(李商在)
= 경인철도(京仁鐵道) 개통
- 1897년 3월 22일 우각현 기공
- 1899년 인천 ~ 노량진간 210리 개통
- 1900년 7월 8일 한강철교 준공 후 260리 개통
- 1965년 9월 18일 경인선 복선
- 1974년 8월 15일 전철화(電鐵化)
= 경인간 전화(電話) 개통
- 1898년 1월 28일 인천 ~ 서울간 전화선 가설
- 1900년 7월 경인간 시외전화 개통
- 1902년 3월 시내전화 개설
= 경인간 전신업무(電信業務)
- 1885년 7월 "한청전선조약" 체결
- 1885년 10월 3일 전신 업무 개시
- 1885년 11월 19일 한청(韓淸)간 국제 전신 개통
= 영미연초공장(英美煙草工場) 담배 생산
- 1889년 12월 인천 청국지계 내에서 생산
= 첫 기독교 포교지(基督敎 布敎地)
- 1885년 감리교 내리(內里)교회 설립
= 각국 공원(各國公圓) 설치
- 1888년 11월 9일 현 자유공원 설치
= 인천해관(仁川海關) 설치
- 1883년 6월 16일
= 인천 기상관측소 설치
- 1896년 인천해관 내
- 1904년 4월 응봉산(應峯山)에 설치
* 선구적인 인물(人物)
= 우리나라 고고학(考古學)을 개척한 > 고유섭(高裕燮)
= 여성 교육의 총본산인 이대(梨大) 총장 -> 김활란(金活蘭)
= 민주당 시절 내각제(內閣制) 국무총리 > 장 면(張 勉)
= 한국화(韓國畵)의 거장(巨匠) -> 이당(以當) 김은호(金殷鎬)
=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점자 발명(點字發明) > 박두성(朴斗星)
* 근대적 서구문물의 관문구실도
인천은 1620여년전 능허대 개항 이후, 경인운하계획과 경서동 녹청자 도요지의 설치, 그리고 1883년의 근대적 개항을 통한 서국 문물의 도입 등으로 이미 선구적 개척지로서의 위상을 다져왔다.
그러므로, 21세기 미래의 인천은 신국제공항의 개항과 더불어 "열린 지구촌 시대"를 향한 한국의 가장 희망찬 관문 도시가 될 것이다.
* 최초의 외국상사(外國商社)가 진출한
개항과 더불어 많은 외국상사가 상륙함으로서 급격히 국제 무역항으로 발전하였다.
1883. 8. 19. 인천에 통상업무(通商業務)를 처리 할 감리를 설치하였다.
인천은 부산이나 원산항과 달리 개항과 더불어 청.일을 필두로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등의 외국상인들이 지계를 설정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상관(商館)을 설치운영하게 되었으며 이들이 중심이 되어 서구의 새로운 문물이 도입되었고 각종 상품이 서울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확산 보급되었다.
이들은 상업이나 무역뿐 아니라 해운, 광업, 철도, 정미업, 대금업에 이르기 까지 손을 댔으며, 일인들은 제일국립은행 인천출장소까지 중앙동에 개설(1883)하는등 근대적인 상공업의 선구지로 발전했다.
이러한 외국자본 세력의 진출에 자극받아 향토민의 자주적 민족자본세력이 형성되어 1885년 인천 객주회(客主會)가 설립되어 인천항 조선인 상업 회의소(朝鮮人 商業會議所)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 정치(政治), 외교(外交), 군사(軍事)활동의
1883년 인천이 개항되자 청(靑), 일(日), 미(美), 불(佛), 로(露)와 같은 열강(列强)들이 서로 다투어 이 고장에 영사관을 개설하고 그들의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각 국의 지계(地界)를 만들어 정치, 외교, 경제의 발판을 구축하고 그들의 실력을 겨루려 했다.
특히 청,일,로국의 각축전(角逐戰)은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고장 인천은 이들 삼대세력이 다툴 때마다 각국의 전함이 집결하고 군대가 상륙 하는 등 군사적인 요충지가 되기도 했으며, 각국 정치 요인이 출입하는 수도의 관문으로서 정치, 외교활동의 선구지 구실을 해왔다.
* 육·해상교통(陸·海上交通)의 선구적인
수도의 관문인 인천은 우리나라 육상, 해상교통 발전의 선구지로서 한국 최초의 경인철도 (京仁鐵道), 경인고속도로, 전철(電鐵)이 개통된 육상교통의 개척지이며, 해상 교통면에서도 우리나라 최초의 갑문식 '도크'를 비롯해 최초의 해상 정기항로(1883: 상해, 장기, 부산)가 개설되는 등 자랑스런 역사의 현장이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다.
* 천일제염(天日製鹽)의 선구적
인천 주안역뒤에서 동암역 중간지역에 이른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염전 개척의 선구지이다. 1907년 1정보(一町步)규모의 천일제염 실험의 성공을 계기로 우리나라 서해안일대에 많은 염전에 개설 확장되었다.
5. 인천의 변천사
^미추홀(彌 鄒 忽) ^백제 비류왕이 도읍 ^고구려 ^매소홀(買 召 忽) ^고구려 장수왕 한강유역 진출 ^통일신라 ^75소성현(邵 城 縣 ) ^경덕왕 16년에 통일신라의 제관직의 한화정책(漢化政策)
^고려
^1018 ^1095~1105 ^1122~1146 ^1390
^수주(樹州) ^경원군(慶源郡) ^인주(仁州) ^경원부(慶源府 ) ^태조 왕건의 고려 건국 인예순덕태후이씨의 고향 ^인종의 어머니 순덕태후이씨의 고향 ^공양왕 2년 인천이 7대에 걸쳐 왕의 ^외가 또는 왕비의 고향인 칠대어향
^조선
^1392 ^1413 ^1460 ^1688 ^1698
^ 인주(仁州) ^인천군(仁 川 郡 )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 ^인천현(仁 川 府 )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 ^ 태조 이성계의 조선건국 ^태종 13년 지방제도 개편 ^인천이라는 고을 명칭이 처음 등장 ^세조의 어머니 소헌왕후심씨의 고향 ^숙종14년의 여환등 11인의 역모사건 ^역모사건의 10년 경과후 환원
^근대
^ 1895 ^ 인천부(仁 川 府 ) ^ 행정개편
^현대
^ 1949 ^1981 ^1995
^ 인천시(仁川市 ) ^인천직할시(仁川直轄市 ) ^인천광역시(仁川廣域市 ) ^ 행정개편 ^행정개편 ^행정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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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무대 최인훈의 <광장 >
이데올로기…사랑, 그 애달팠던 인천부두
연안부두
소설가 최인훈의 <광장>은 바다로부터 시작해 바다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190여 쪽에 걸친 이야기가 흘러가는 동안 바다, 그 물빛의 이미지는 내내 책갈피 주변, 혹은 행간을 머뭇거린다. 광장 속에 등장하는 그 바다는 '인천'이다. <광장>에는 '이데올로기와 사랑이라는 암초에 걸려 자살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한 지식인의 외로운 자기성찰이 그려져'(평론가 김현)있다.
해방 뒤 이념 문제로 고민을 하던 주인공 이명준이 전쟁 뒤 남과 북 어느 쪽도 아닌 중립국으로 목적지를 택한 뒤 인도로 가는 배 위에서 옛 일을 더듬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소설에는 인천을 비롯해서 서울과 북녘 땅도 나오지만 인천바다는 주인공 이명준의 삶에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주는 주요한 무대이다. 밀수선을 타고 북으로 간 곳이 인천부두이고 무엇보다 '젊은 사람이 할만한 가장 좋은 것 중의 하나'라 했던 '사랑'에 이명준이 진지하게 빠져드는 곳도 바로 '인천'이다.
꼭 반세기 전에 살았던 한 젊은 청년이 고뇌했던 이념과 사랑의 문제를 담아내기에 그 시절, 인천바다 만큼 속 깊은 장소는 없었던 모양이다. 인천에는 명준의 첫사랑 윤애의 집이 있었다. '인천거리를 북으로 빠진 변두리,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윤애네 집'으로 가기 위해 명준은 모터사이클을 타고 경인한길(지금의 경인국도)을 달린다. 북으로 간 아버지 문제로 경찰서에 불려갔다 온 뒤 마음을 수습하기 위해 그는 '조용하고 오붓한 시골' 인천에서 한여름을 보내게 된다.
"윤애한테 말하지도 않고, 혼자서 곧잘 거리를 걸어본다. 부두를 낀 거리를, 맥고모자를 눌러쓰고 기웃거리는 시간에, 그는 즐겁다. 윤애도 없고, 때리던 형사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비린내나는 어시장에서 얼음에 잠긴 물고기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그저 때를 보내는 게 좋다. 얼음에 차갑게 잠겨서, 눈을 번히 뜬 채, 지붕에 박힌 빛 받이 창문으로 내리비치는 햇살아래, 은색 비늘의 깨끗한 조기를 보고 있으면, 미술이라는 일이 짜장 가난하게만 느껴지는 사무치는 울림이 있었다. 물건 살 사람 같지는 않은지, 모른 체 해주는 그곳 사람들이 좋다."
'비린 내 나는 살갗 검은 여자들이 꼬챙이로 고기를 꿰어 광주리에 옮기면서, 한나히요, 두흘이요, 서어히요 하고 목쉰 소리로 셈을 외치는 어시장'을 천천히 거닐고 '기름이 떠돌고, 나뭇조각이며 빈 병이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선창'을 걸어보며 그는 목숨을 묻고 싶은 '광장'의 실체에 대해 고민했다.
항구의 붐빔 속에서 무작정 떠돌다가 '바다에 서면 그대로 어디로든 가고 싶다'던 윤애와 함께 노란 파라솔 아래서 이야기를 나누고, 바닷가 모래분지에서 초롱초롱 별이 보이기 시작할 때까지 하염없이 앉아 사랑과 삶과 청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오늘은 선창 말고 다른 데로 가요." 그는 머리만 끄덕인다. 선창을 끼고 올라가서 오래 걸었다. 명준은 이럴 때 남자가 두 사람 사이를 이끌어야 되려니, 생각한다. (중략) 그들이 다다른 곳은 왼편에 마을이 보이는 언덕진 땅 생김이 분지를 이룬, 움푹한 자리다.
오른편으로 멀리 바라보여야 할 선창과 거리는, 막아선 늙은 느티나무의 한 무리 때문에 보이지 않았고, 앞으로만 트인 눈길 앞에, 선창의 붐빔을 금방 보고 온 눈에는 기이할 만큼 빈 바닷가에, 모래만 허허하게 기운 한낮의 햇살을 되 비치고 있다.
느긋하면서 두근거리는 힘이 흥건히 속에서 괴어오르고, 명준은 누구에겐가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들은 그 분지에서, 조용함을 즐기듯 한참 서서 바다를 내다보고 있다가,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는다. 바다에는, 배 그림자도 없다. 탐스럽게 푸짐한 뭉게 구름만, 우쭐우쭐 솟아있다. 이천일년 인천의 겨울부두 … 명준이 단골로 찾던 전망좋은 술집이 있었음직한 만석부두 풍경주인공이 살았던 때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이천일년의 메마른 이 겨울, 이명준이 모터사이클을 타고 달렸던 경인한길을 지나 인천항에 발을 딛어 보았다.
먼지 나는 비포장도로 위로 아스팔트가 깔리고, 명준의 색안경 너머로 휙 달려오는가 하면 금세 뒤로 빠지던 '들'과 '뫼'가 있던 자리엔 아파트 숲과 건물들이 삐죽삐죽 들어서 있다.
한적한 어촌마을쯤으로 묘사됐던 인천부두는 이제 옛 흔적을 한 오라기도 걸치고 있지 않다. 거대하고 말끔하게 단장한 인천항은 국제항으로의 도약을 꿈꾸는 세련된 모습으로 쉴새없이 수출입물량을 잔뜩 실은 화물선을 들여보낸다. 항구에 특별한 볼일이 없는 한 들어가기도 까다로우니, 바다냄새라도 맡자면 부득이하게 만석부두나 연안부두 혹은 월미도로 가야하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만석부두는 공장 담벼락과 담벼락 사이 좁은 골목 끝에 숨통처럼 매달려 있다. 원래 부두가 있던 자리는 매립이 되어 마을이 섰고, 한 오백 미터쯤 더 걸어나가야 바다에 닿는다. 철지난 부두엔 초소의 해경들이 사람이 그리운 얼굴로 서있고, 배 댄 일이 언제였나 싶을 만큼 낡아빠진 방파제엔 겨울파도만 차갑게 내리친다.
찾는 이 없어 반쯤 문을 닫아놓은 부두 앞 구멍가게 주인아낙은 "그래도 봄, 가을이면 낚시 배들 땜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라며 말상대가 그리웠던 투로 반긴다. 명준이 단골로 찾던 창 밖 전망 좋은 선술집이 이 부근 어딘가에 있었을지 몰라. 마룻장 밑에서 바다가 철썩거리던 그 목로주점에서 산새 울음소리 같은 뱃고동 소리를 듣곤 했던 명준은 그 선술집 주인을 통해 이북으로 다니는 밀수선에 대한 소리를 들었었지. 이곳에서 이명준이 찾고자 했던 '광장'의 흔적을 찾아보려 애쓰는 작업은 부질없어 보인다.
예전 같지 않은 것은 부두풍경 뿐만 아니다. '광장'이 발표된 때가 1960년이었으니 꼭 41년이 흘렀건만, 소설이 세상에 던진 화두는 여전히 유효하다. 여태, 우리는 분단시대의 한복판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만, 분위기는 몰라보게 달라져 반세기 동안 헤어져 살아온 남과 북의 가족이 만나고, 금강산을 자유로이 여행하는 세상이 됐다.
인천 역시 팽팽한 긴장이 감돌던 대치의 현장에서 북으로 가는 길목으로 통일시대의 중심지가 될 꿈 에부풀어 있다.
이 즈음에 읽는 '광장'은 평화와 화해의 시대에 '이념'이란 과연 무엇인가, 생각하게 해준다. 민족을 남북으로 가른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에 대해 공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이 소설 속에서 앞으로 맞이할 우리의 미래를 가늠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리라.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분단상황이 해소되고 이데올로기로부터도 해방되고 나서도 '광장'은 여전히 읽힐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어느 시대, 어느 정황에서나 인간이 살아있는 한 의무로서 지워질 사랑의 운명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평론가 김병익)." 바다바람을 좀 더 쐬어 볼 겸 연안부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70년대에 매립이 된 이곳은 명준 시절엔 그저 맨 바다였다. 벤치며 가로등이며 한껏 멋을 낸 부두 앞 공원엔 칼바람이 일지만, 젊은이들은 항구 쪽을 향해 서서 바람을 맡고 있다.
사랑을 하는데 날씨가 무슨 상관이냐는 투로. 이천년 대의 젊은이는 이념과 사랑 앞에 늘 그렇게 당당하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바다는, 이데올로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고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해준 은혜와 그의 뱃속의 딸과 만나기 위해 명준이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찾아간, 바로 그 '바다'이다. 그러고 보니, 명준의 시대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아니 변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바다, 그 물빛이리라.
6. 인천 계양구 땅이름
부평군 군내면
계산동(桂山洞) -부평읍, 부평구읍-
부평 도호부가 있어서 부평읍, 부평구읍.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고양골, 주막거리, 살나리를 병합하여 하리라 해서 부천군 부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4월 1일 인천부 구역 확장에 의하여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대정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따라 계양산(인천-) 밑이 되어 계산동으로 고치고, 1962년에 계산동을 갈라서 계산1, 2동. 1977년에 계산1동은 계산, 계산2동은 서운동회의 관할
부평군 서면
작전동(鵲田洞) -까치우물, 까치물, 까치말, 작전-
큰 우물이 있으므로 까치우물, 까치물, 까치말 또는 작정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작천리라 해서 부천군 부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화전리와 가현리를 합하여 작정과 화전의 이름을 따서 왜식으로 작전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정'을 '동'으로 고치고, 1962년에 작전동회가 됨.
서운동(瑞雲洞) -길머리, 도두머리, 도두리-
마을이 길의 머리쪽이 되므로 길머리, 도두머리, 또는 도두리라 해서 부천군 부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동서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서운동으로 고치고, 1977년에 계산 2동을 합하여서 서운동회가 됨. (계산동 참조)
부평군 동면
임학동(林鶴洞) -예막골, 이막골, 임학골, 임학동-
고성산성(경기-)밑이 되어 막이 있었으므로 예막골, 이막골 또는 임학골 임학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임학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됨.
박촌동(朴村洞) -박말, 박촌-
박씨가 많이 살았으므로 박말 또는 박촌이.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마가묘, 송현동을 병합하여 박촌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방축동(防築洞) -박죽안, 방축동-
앞에 방죽이 있으므로 방죽안 또는 방축동이.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방축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병방동(兵房洞) -병방-
부평도호부 때 병대가 주둔하였으므로 변방이.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병방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용종동(龍宗洞) -용마루, 용종-
본래 부평군 동면의 지역으로서, 마을이 산 내룡의 마루가 되므로 용마루 또는 용종이.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용종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임학동(林鶴洞) -예막골, 이막골, 임학골, 임학동-
본래 부평군 동면의 지역으로서, 고성산성(경기-)밑이 되어 막이 있었으므로 예막골, 이막골 또는 임학골 임학동이.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임학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부평군 마장면
효성동(曉星洞) -새벼리, 새별, 효성-
원적산(인천-) 밑에 큰 벼랑이 있으므로 새벼리, 새별 또는 효성이.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안말, 넘말, 아나지를 병합하여 효성리라 해서 부천군 부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서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도로 효성동으로 고침.
부평군 당산면
귤현동(橘峴洞) -굴재, 굴현-
굴재 밑이 되므로 굴재 또는 굴현이.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황어면의 노오지리 일부를 병합하여 귤현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 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부평군 황어면
장기동(場基洞) -황어장터, 황어장, 장터, 장기-
본래 부평부(군) 황어향(면)의 지역으로서, 황어시장이 있으므로 황어장터, 황어장, 장터 또는 장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장기라라 하여 부천 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계양면의 중심지로서 면사무소, 경찰 지서, 학교, 시장, 우체국 들이 있음.
노오지동(老吾地洞) -노오지-
벌판이 되므로 노오지.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노오지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다남동(多男洞) -금륜, 역골, 역말, 역동, 다남-
조선 때 금륜역이 있었으므로 금륜, 역골, 역말, 역동 또는 다남이.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다남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둑실동(纛室洞) -둑실-
본래 부천군 황어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둑처럼 생겼으므로 둑실이.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성황당, 바래벌을 병합하여 둑실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목상동(木霜洞) -나무서리, 목상-
뒤에 있는 계양산(경기-)에 나무가 많아서 나무 서리를 하므로 나무서리 또는 목상이.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목상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선주지동(仙舟之洞) -선주지-
예전에 큰 장마 때 배가 이곳에 들어 와서 수재민들을 구했으므로 선주지.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선주지라 하여 부천군 계양 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오류동(梧柳洞) -오리울, 오릿골, 오류동, 오류울-
오리나무가 많았으므로 오리울, 오릿골 또는 오류울, 오류동이.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김포군 노장면 당하리 일부를 병합하여 오류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이화동(梨花洞) -배곶, 배고지, 배꼬지, 이화-
본래 부평군 황어면의 지역으로서, 벌판 가운데 배처럼 곶으로 되었으므로 배곶, 배고지, 배꼬지 또는 이화.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김포군 노장 면의 당하리 일부를 병합하여 이화리라 해서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부평군 당산면
동양동(東陽洞)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당미, 양지편, 모통말, 동녘말을 병합하여 동녘말과 양지편의 이름을 따서 동양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상야동(上野洞) -윗벌말, 상야촌-
벌판에 마을이 위, 아래로 둘이 있는데, 위쪽이 되므로 윗벌말 또는 상야촌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상야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평동(坪洞) -벌말, 평리-
벌판이 되므로 벌말 또는 평리.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평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하야동(下野洞) -아래벌말, 하야촌-
벌판에 마을이 위아래로 둘이 있는데, 아래쪽이 되므로 아래벌말 또는 하야촌이.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남구
주안동(朱安洞)
본래 인천부 다문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충훈동, 소뎅이, 독점, 석바위, 상나무배기, 서낭뎅이, 사거리, 못머리, 사미, 고인돌, 솔안말, 잿말, 다수골, 양지께를 병합하여 사미와 충훈의 이름을 따서 사충리라하여 부천군 다주면에 편입되었는데,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주안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주안동으로 고치고
도화동(道禾洞)
본래 인천부 다문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도마다리, 자골, 대지기, 화동(숫골), 소댕이, 오목골을 병합하여 오마다리와 화동의 이름을 따서 도화리라 하여 부천군 다주면에 편입되었는데, 1936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앵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도로 도화동으로 고치고
숭의동(崇義洞) -장의리-
본래 인천부 다문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장천리, 여의리, 독각리를 병합하여 장천과 여의의 이름을 따서 장의리라 해서 부천군 주다면에 편입되었는데,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대화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숭의동으로 고치고
용현동(龍峴洞) -비랭이, 비랭이고개, 비룡현, 비룡, 용현-
본래 인천부 다문면의 지역으로서 비랭이 고개밑이 되므로 비랭이고개, 비랭이, 비룡현 꼬는 비룡, 용현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비룡리와 독정리를 병합하여 용정리라 해서 부천군 다주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일지출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용현동으로 고쳤으며
학익동(鶴翼洞) -학골, 핵굴, 학익굴, 학동-
인천부 구읍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학의 날개처럼 생겼다 하여 학골, 핵굴 또는 학익굴, 학동, 학익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노적산, 제운이를 병합하여 학익리라 해서 부천군 문학면에 편입되었는데,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외식으로 학익정이라 하다가
북성동(北城洞) -북성-
본래 인천부 부내면의 지역으로서 북성 포대가 있으므로 북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왜식으로 화방정 1,2,3정목이라 하여 인천부(시)에 편입되었는데,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북성동 1,2,3가로 고치고
송월동(松月洞) -솔울, 송산-
본래 인천부 부내면의 지역으로서 소나무가 많았으므로 솔울 또는 송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왜식으로 송판정 1,2,3정목이라 하여 인천부(시)에 편입되었는데,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송월동 1,2,3가로 고치고
송학동(松鶴洞)
본래 인천부 부내면의 지역으로서산 위에 새로 된 마을이므로 왜식으로 산수정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갈라서 산수정 1,2,3정목이라 하여 인천부(시)에 편입되었는데,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중앙동회의 관할
신흥동(新興洞) -꽃굴, 화개동-
본래 인천부 부내면의 지역으로서 꽃이 많이 피므로 꽃굴 또는 화개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신창동을 병합하여 왜식으로 화정 1,2,3 정목이라 하여 인천부(시)에 편입되었는데,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신흥동 1,2,3가로 고치고
항동(港洞) -제물포항, 이천항, 항구-
본래 인천부 부내면의 지역으로서 제물포항이 있었으므로 제물포항 또는 인천항, 항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왜식으로 항정 1,2정목이라 하여 인천부(시)에 편입되었는데, 1947년 왜식 동면 변경에 의하여 항동 1,2,3,4,5,6,7가로 고치고, 1977년에 모두 합하여 중앙동회의 관할이 됨.
해안동(海岸洞) -바닷가, 해안-
본래 인천부 부내면의 지역으로서 바닷가가 되므로 바닷가 또는 해안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왜식으로 해안 1,2,3,4정목이라 하여 인천부(시)에 편입되었는데, 1947년 2월 1일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해안동 1,2,3,4가로 고치고, 1977년 모두 합하여 중앙동회의 관할이 됨.
북성동(北城洞) -북성-
본래 인천부 부내면의 지역으로서 북성 포대가 있으므로 북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왜식으로 화방정 1,2,3정목이라 하여 인천부(시)에 편입되었는데,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북성동 1,2,3가로 고치고, 1977년에 북성동 1,2,3가와 선린동을 합하여 북성동회가 됨.
연수동(延壽洞)
본래 인천부 서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부수지, 고촌말, 솔안말, 새터말, 장승배기, 마리, 구레매기, 머그미, 새말, 갱고지, 배꼽부리, 함박매를 병합하여 연수리라 해서 부천군 문학면에 편입되었는데,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연수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정을 동으로 고치고, 1977년에 청학동을 합하여 연수동회가 되어, 남구에 편입됨.
동춘동(東春洞) -동촌, 동춘-
본래 인천부 서면의 지역으로서 청량산(인천-) 동쪽이 되므로 동촌 또는 동춘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쇠미, 풀무골, 각골, 자앞, 도굴, 동막을 병합하여 동춘리라 해서 부천군 문학면에 편입되었는데,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원정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동춘동으로 고치고 1968년 남구에 편입되어 동춘동회가 됨.
서구
가정동(佳亭洞) -가정-
본래 부평군 모월곶면의 지역으로서 고려 말에 숙위공 조 반이 이곳에 살면서 석호가정을 세웠으므로 가정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돌고지, 각골, 되린곁, 싱아굴, 봉우재, 산저동을 병합하여 가정리라 해서 부천군 서곶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천대전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가정동으로 고치고, 1977년에 서곶출장소 석남동회의 관할이 됨.
가좌동(佳佐洞) -가재울, 가좌리-
본래 부평군 석곶면의 지역으로서 가재가 많았으므로 가재울 또는 가좌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감중절, 건지굴, 보도진과 마장면의 산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가좌리라 해서 부천군 서곶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천대전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가좌동(회)으로 고침.
석남동(石南洞)
본래 부평군 석곶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번작리, 바그뫼, 고잔, 독굴, 옻우물, 명각굴을 병합하여 고잔과 번작의 이름을 따서 고작리라 하여 부천군 서곶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촌상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면 변경에 의하여 전 석곶면의 남쪽이 되므로 석남동으로 고치고, 1977년에 가정, 신현, 석남의 3개 동을 합하여 석남동회가 됨.
부평구
갈산동(葛山洞) -갈울, 가월, 갈산-
본래 부평군 서면의 지역으로서 가울 또는 가월, 갈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사근다리를 병합하여 갈월리라 해서 부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길야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갈산동으로 고치고, 1977년 삼산동을 합하여 갈산동회가 되어 북구에 편입됨.
부평동(富平洞) -부평, 부평읍내-
본래 부평군의 지역으로서 부평 군청이 있었으므로, 부평, 부평읍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신용동, 동수정, 신트리, 소반재말, 신촌을 병합하여 부평리라 해서 부천군 부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신대리를 합하여 소화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부평동으로 복구하고, 1962년에 부평동을 갈라서 부평 1,2,3동회로 하였다가, 1968년에 부평 1동을 갈라서 부평 1동 동부동, 중부동회로 하였는데, 1970년에 부평 1동 동부동을 또 갈라서 부평 1동 동부동과 서부동회로, 부평 2동을 갈라서 부평 2동과 부평 2동 동부동회로 하였다가, 1977년에 부평 1동 동부동을 부평 4동으로, 부평 1동 중부동을 부평 5동으로, 부평 1동 서부동을 부평 1동으로, 부평 2동 동부동을 부평 6동으로, 부평 3동과 십정 2동과 산곡동 일부를 합하여 부평 3동회로 고쳐서 북구에 편입됨.
산곡동(山谷洞) -뫼꼬지, 뫼꽃말, 산화촌, 산곡, 마장, 백마장-
본래 부평군 마장면의 지역으로서 산이 곶으로 되었으므로 뫼꼬지, 뫼꽃말 또는 산화촌, 산곡이라 하며, 또는 조선 때 말을 먹이던 곳이므로 마장, 백마장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장끝 말을 병합하여 산곡리라 해서 부천군 부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백마정이라 하다가, 1977년에 2동 일부를 부평 3동에 넘겨 주고, 그대로 1동, 2동회가 되어 북구에 편입 됨.
십정동(十井洞) -열우물, 십정, 십정리-
본래 인천부 주안면의 지역으로서 우물이 열이 있으므로 열우물 또는 십정, 십정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삼거리, 꽃밭골, 안터를 병합하여 십정리라 해서 부천군 다주면에 편입되었다가, 1936년 10월 1일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대도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십정동으로 고치고, 1962년에 갈라서 십정 1동, 2동회로 하였는데, 1977년에 십정 1동을 십정동으로, 십정 2동을 부평 3동과 합하여 부평 3동회가 됨.(부평3동 참조)
청천동(淸川洞) -맑은내, 청천-
본래 부평군 마장면의 지역으로서 맑은 시내가 있어서 말을 먹였으므로 맑은내 또는 청천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마장리를 병합하여 청천리라 해서 부천군 부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천상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청천동으로 고치고, 1977년에 산곡동 일부를 합하여 청천동회가 됨.
동구
송림동(松林洞) -송림-
본래 인천부 다소면의 지역으로서 소나무가 많으므로 송림 또는 송림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새말, 매하지, 장승거리, 샛골, 활터고개를 병합하여 송림리라 해서 인천부(시)에 편입되었는데, 1936년에 왜식으로 송림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정을 동으로 고치고, 1962년에 갈라서 송림 1,2,3,4동회가 되고, 1968년에 송림 3동을 갈라서 송림 3동 동부동, 서부동으로 하고, 1970년에 송림 4동을 갈라서 송림 4동과 궁현동회로 하였다가, 1977년에 송림 3동 동부동을 송림 5동으로, 서부동을 송림 3동으로, 궁현동을 송림 6동회로 고침.
송현동(松峴洞) -솔고개, 송현-
본래 인천부 다소면의 지역으로서 소나무가 많은 고개였으므로 솔고개 또는 송현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절굴을 병합하여 송현리라 해서 인천부(시)에 편입되었는데, 1936년에 왜식으로 송현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정을 동으로 고치고, 1962년 5월 21일에 송현동을 갈라서 송현 1,2,3,4동회로 하였는데, 1977년 시 조례 175호에 의하여 송현 4동을 화수 2동회에 넘겨주어 현재 송현 1,2,3동회가 됨.
화수동(花水洞)
본래 인천부 다소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신촌리, 화도동, 수유리를 병합하여 3마을의 첫자를 따서 신화수리라 하여 인천부(시)에 편입되었는데, 1936년 왜식으로 화수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정을 동으로 고치고, 1962년 화수동을 갈라서 화수 1,2,3동회로 하였다가, 1977년에 화수 1동과 3동을 합하여 화수 1동으로, 화수 2동과 송현 4동을 합하여 화수 2동회로 고쳐서 동구에 편입됨.
첫댓글 배우리 회장님은 인천뿐 아니라 전국 어느 곳의 땅이름이든 잘 알고 계시는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