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은퇴 생활 소고
권재기
2019년 3월 30일. 나는 30년 다니던 직장을 은퇴하였다. 한국에서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에 온 나는 짧은 영어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한 과목씩 택한 회계학으로 공인회계사(CPA) 시험에 합격한 뒤 3년 동안 학교에서 시간제(part time)로 일했다. 큰아들이 운전을 시작하면서부터는 LA 지방법원에서 회계사로 풀타임(full time) 일을 시작했다. 그때 내 나이 42세, 이렇게 늦깎이로 일을 시작했다. 회계학이 나의 적성에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일하는 것이 지루했다. 내 생활에 활력을 넣고 싶어 뒤늦게 대학원에 입학하였다. 풀타임으로 일하면서 저녁에 학교에 가는 것이 젊었을 때보다는 어려웠다. 3년 후 환갑이 다 되어 회계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무엇인가를 이루었다는 성취감에 기분은 괜찮았다. 남이 은퇴를 생각할 즈음 나는 내일을 위해더 열심을 냈다.
보통 은퇴를 이야기할 때, 리-타이어(re-tire) 한다고 농담을 한다. 100세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리-타이어라는 말이 공감이 간다. 제3의 인생을 구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 밑에서 살던 제1의 인생에서,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양육하고 직장생활을 하며 바쁜 시간을 보낸 제2의 인생을 졸업하고, 은퇴와 함께 제3의 인생을 시작한다. 75세까지 일하고 싶었지만 10년 전에 먼저 은퇴한 남편이 집에 혼자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려 예정보다 일찍 은퇴하기로 마음먹었다. 남편과의 오붓한 생활에 잘 적응해보라는 친구의 조언을 마음에 새기고 나의 정든 직장을 떠났다.
은퇴하면 그동안 바빠서 못 한 취미생활을 하고 싶은 생각에 나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온종일 남편과 함께 있을 시간에 대해서 걱정도 되었다. 아이들도 다 떠난 집에서 남편과 둘이서 사는 것에 대해 익숙해져야 한다.
은퇴한 다음 날 아침, 남편은 앞으로의 우리 생활에 대해 말했다. 아침은 서로 각자 만들어 먹고 점심 저녁은 함께 먹자고 했다. 아침에는 언제 일어나도 상관없고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종일 같이 있는 게 싫어서인가, 아니면 나를 배려해서인지 헛갈렸다. 그러나 아침을 안 만드니 좋았다. 30년 동안 아침 다섯 시 기상에 익숙해진 나는, 처음 얼마 동안은 이불 속에서 두세 시간씩 책을 읽으며 모처럼 자유로운 나만의 시간을 즐겼다. 우리는 각자 편한 시간에 아침을 먹고, 늦은 점심을 함께 먹고 나면, 저녁은 간단하게 요기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또 외식할 기회가 많아 자연스럽게 하루에 한 번 요리하는 것으로 정착이 되어 갔다. 이식(二食)을 원하던 남편이 5년을 지나는 동안 일식(一食)으로도 불평 안 하는 멋진 남편으로 변했다.
은퇴 후 내가 하고 싶은 것의 희망 목록(bucket list)을 만들어보았다. 사진, 서예, 글쓰기, 그림 그리기, 그리고 자원봉사 등을 적었다. 1년은 아무 계획 없이 멍 때리는 시간을 보내며 30년 일하느라 수고한 나에게 주어진 선물의 날을 즐겼다. 우습게도 낮에 외출하면 나는 괜한 죄의식이 들었다. 일해야 하는데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나에게 질문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직은 은퇴한 사실에 익숙하지 않았다. 일 년이 되면서 나는 하고 싶었던 것을 시작하려고 여기저기 알아보기 시작했다.
2020년 3월에 발생한 코로나-팬데믹으로 학교, 직장, 교회, 식당 등이 문을 닫았다. 매일 매스컴에서는 코로나 사망자를 발표했다. 마스크를 해도 외출하는 것이 두렵고 힘들었다. 거리두기를 철저하게 제한하여 어디를 가든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시장을 갔다 오면 제일 먼저 옷을 갈아입고, 사 온 물건을 모두 소독한 다음에 냉장고에 넣는 일이 힘들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할 수 없게 된 것이 아쉬웠지만 코로나에 안 걸리게 조심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코로나가 오래 계속되면서 매일 음식을 만드는 것이 힘이 들었다. 외식도 힘들고 시장보기도 힘들었다. 덕분에 유튜브(youtube)에 의존하여 새로운 요리를 배우고 만들어 먹었다. 유튜브를 본 아침에는 각자 아침을 먹기로 한 규칙을 어기고 별식을 만들어 함께 먹었다. 남편은 예전에는 맛이 있어도 맛있다는 소리를 안 하고, ‘맛있어?’하고 묻는 것도 듣기 싫어했다. 팬데믹을 지나면서 ‘맛있다’ ‘잘 먹었다‘라는 소리를 자주 했다. 팬데믹 동안에 내가 음식 만드는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칭찬까지 했다. 놀라운 변화다. 지난 10년 동안 혼자 밥을 먹다가 아내가 만들어 주는 밥을 먹으니 무엇이나 고마운 마음이 생긴 모양이다.
2022년에 거리 제한이 조금 풀리면서 나는 한글 판본체, 한문 예서 그리고 손 글씨(calligraphy)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림 그리기는 아직 시작 못 했지만, 서예에 접목하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꼭 배우고 싶다. 색다른 현대 서예도 배우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호기심으로 시작한 서예는 내가 외출을 못 할 나이에 좋은 소일거리가 될 것이다.
사진은 팬데믹이 되면서 줌(zoom)으로 일 년 동안 사진 이론과 포토샵을 공부했다. 포토샵을 배우면서 사진 편집 기술에 따라 멋지게 변하는 사진을 보며 나는 사진에 더 매력을 느꼈다. 요즈음 다시 남편과 함께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다. 동영상도 만들고 사진도 편집하며 몇 시간을 보낸다. 조그만 렌즈를 통해 보는 사진 세상은 아직도 나를 흥분시킨다.
글쓰기도 줌으로 일 년 너머 배우며 습작하고 있다. 잘 쓰고 싶은 부담감 때문인지 글 쓰는 것이 어렵다. 내가 제일 두렵고 힘들어하는 클래스이다. 직장에서 회계사로 일할 때 처음에는 기술적인 것을 잘하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올라갈수록 모든 의사소통은 보고서로 좌우되었다. 깔끔하게 의사 전달하는 것을 배우고 싶어 글쓰기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언젠가 내가 찍은 사진으로 요즈음 유행하는 다카시를 써보고, 사진 수필(photo Essay)도 쓸 수 있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공상해본다. 혹시 내 안에 발굴되지 못한 가능성이 있기를 희망한다,
채소밭 가꾸기는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은퇴 생활의 새로운 취미이다. 햇볕 쬐며 채소 하나하나에 아침 인사를 나누다 보면 손주들과 이야기하는 착각을 한다. 올해도 여러 종류의 채소를 심고 매일 자라는 모습을 보며 내 마음속에 평안함이 찾아온다.
올해로 은퇴한 지 만 5년이 된다. 요즈음 나의 일상에서 제일 활발한 영역이 교회 생활이다. 온라인과 줌을 통해서 다양한 성도 양육과정을 다시 들을 수 있게 된 것이 팬데믹이 가져온 가장 큰 유익이다. 그리고 내 나이 또래의 권사회에도 참석하고 있다. 좋은 말씀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교제의 시간을 갖는다. 나는 권사회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회계와 사진으로 매달 봉사하면서 보람을 느낀다.
그 이외에도 고등학교 친구들과 매주 금요일 공원에서 만나 걷고, 점심을 같이 먹으며 수다 떤다. 일상의 평범한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힐링의 시간을 가진다. 열 명의 동기생이 가까이 살며 매주 만날 수 있는 것은 노후에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다. 또 정규적으로 만나는 여섯 팀이 더 있어 심심할 시간이 없다. 내 달력에는 매달 할 일이 빼꼭히 적혀 있다. ‘나이 들면 오라고 하는 데는 주저하지 말고 다 가라’는 말에 순종하듯이 나와 남편은 바쁘게 지내고 있다. 만남은 노년의 외로움에 도움이 되고 건강에도 유익하다.
요즈음 남편과 나는 일주일에 두 번 컴퓨터 수업을 줌으로 듣고 있디. 실생활에 많이 사용하는 것을 배우며 활기찬 시간을 보낸다. 팬데믹이 오면서 시작한 줌 수업이 은퇴 후의 지루할 수도 있는 지금 우리에게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남편과 나는 다행히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 80이 넘은 남편이 항상 책을 읽고, 외우고, 배우는 일에 힘쓰는 것을 보고 남편에 대한 내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나는 호기심 대문에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데 남편이 요즈음 나를 앞서고 있다.
우리의 남은 날이 살아온 날보다는 훨씬 짧다. 관심이 있는 것을 하는 동안 우리는 나이를 잊고 몰두한다. 빠른 속도로 일주일이 지나간다. 동부에서 사는 두 아들 가족은 우리와 전화 통화하기가 어렵다고 불평을 많이 한다. 덕분에 아침 7시에 전화해서 우리의 잠을 깨우곤 한다. 행복한 고민이다. 지금은 한 해에 두세 번 만나고, 화상통화로 대리만족하고 있다.
남편과의 오붓한 생활에 잘 적응해보라던 친구의 조언에 나는 주저앉고 ‘엄지척(Thumbs up)’으로 대답할 거다. 나의 은퇴 생활을 돌이켜 볼 때 은퇴하기 전보다 여러 면에서 더 여유롭다. 제일 좋은 것은 시간 제약 없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 믿음 생활, 생활신조 등에 남편과 나는 같은 페이지에 있어 몇 시간도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을 감사한다. 아쉽게도 움직이는 것과 운동을 싫어하는 것까지 우리는 서로 닮았다. 앞으로의 희망은 운동하는데도 흥미를 느껴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며 우리의 호기심을 펼쳐 나갈 수 있으면 금상첨화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