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기이한 사제(師弟)들
"삼재검법(三才劍法)…… 으험! 잘 들어두어야 하느니라. 삼재
검법은 모두 세 초의 초수로써…… 험험! 말이 좀 어렵느냐?"
투명한 가을햇살을 받으며 한 그루 계수(桂樹)나무 아래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푸른 도복 차림인 것으로 보아 그들이 도사임을 알 수 있다.
조그만 평상(平床)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육십대의 노도인 하나와 헐렁한 도포 차림의 마르고 뚱뚱한 두 소년도인이 좌중의 전부였다.
이들의 생김새는 하나같이 괴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육십대의 노도인은 깡말라 해골 같은 몸매에 세 가닥의 수염을 길렀으며, 시궁창의 쥐처럼 반짝이는 서안(鼠眼)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하나의 낡은 부채를 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너무 낡아 그려진 그림조차 희미하여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는 그것을 거의 쉴새없이 얼굴에다 부쳐대고 있었다.
사실, 별로 덥다고 볼 수 없는 가을날인지라 그의 몸은 부채바람 탓으로 가련하게도 가벼운 오한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이 십오륙 세쯤 되어 보이는 두 소년도인의 모습은 더욱 가관이었다.
좌측의 녀석은 그 덩치가 어찌나 큰지 앉은키가 평상 위의 노도인보다도 두 자는 더 컸고, 주위엔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마치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쉴새없이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뿐인가? 바람난 송충이처럼 듬성듬성한 눈썹에 온 얼굴을 무차별 얽은 곰보자국.
실로 백 년에 한 번 볼까말까 한 추남(醜男)이요, 박용(薄容)이었다.
우측의 소년도인 또한 그와 비교하여 조금도 나을 것이 없는 해괴한 몰골이었다.
그는 어찌나 말랐는지 마치 여러 개의 나뭇가지가 불균형하게 짝을 맞추어 선 듯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또 거기다가 그의 입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두툼하여 멀리서 보면 그 입은 하나의 독립된 기관으로써 갈대가지에 두 장의 벌레먹은 단풍잎이 걸린 듯한 해괴한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쨌든, 지금 노도인은 거푸 말이 어렵냐고 몸과 입이 큰 소년에게 물었고, 두 소년도인은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나뭇가지 같은 소년도인의 두툼한 입술이 아래위로 마주치며 인간의 소리를 냈다.
"사부는 생각이 안 날 때마다 어렵냐고 묻고 있소. 나는 조금도 어렵지 않으니 말을 계속해 보시오."
존대인가, 하대인가?
노도인은 한차례 사나운 눈길로 마른 소년을 흘겨보았다.
하나 그는 그런 어투에 익숙해져 있다는 듯 이내 자신의 말을 계속했다.
"으험…… 좀 어렵겠지만 삼재검법은 모두 세 초식으로 나뉘어진다. 첫번째 초식은 춘풍화우(春風花雨)로써…… 험험……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춘풍화우다. 두 번째는 횡소천군(橫掃千軍)이고, 세 번째는 선인…… 흠흠…… 지나치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만…… 선인……."
거대한 소년이 무엇인가를 우물거리던 입으로 불투명한 어조를 뱉어냈다.
"지로."
갑자기 노도인의 부채질이 빨라졌다.
"험험…… 지로라…… 그렇지. 선인지로(仙人指路)가 아니겠느냐? 사부가 말할 땐 끼어들지 않는 것이 좋다. 으험험! 여하간 이렇듯 절세의 검법을 너희들이 배우고 있다는 것은…… 대무당파의 최고비전(最高秘傳)임과 동시에…… 험험…… 나는 이 비장의 검술을 무려 이십 년간 연마한 끝에 터득을 해냈으니……."
도대체가 무슨 말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두 무사는 어리둥절하여 서로를 마주봤다.
그들이 알기로 삼재검법은 결코 절세의 검법도, 무당파의 비전도 아니었다.
하다 못해 강호의 떠돌이 약장수도 이 검법을 알고 있으며, 무림세가의 자제들은 나이 사오 세쯤에 통달해내는 것이 이 삼재검법이다.
그런 하류 중의 극하류 검법이 무슨 절세 어쩌구며 이십 년 연마 어쩌구란 말인가?
"벽뢰(霹雷)야, 너는 이 가공할 신기(神技)를 어디까지 익혔느냐?"
거대한 뚱보 벽뢰는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일초."
"대단한 성취가 아니겠는가! 입문(入門) 팔 년 만에 일초를 연마해냈다는 것은 너의 재질이 백 년에 하나 볼까말까 하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
말이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 사실 두 무사는 도저히 더 이상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좌측의 무사가 성큼 앞으로 나섰다.
"저…… 실례하오만……."
순간 세 사제의 놀란 시선이 화들짝 그를 향했다.
"누…… 누군가?"
뚱보 벽뢰와 여의는 용수철처럼 퉁겨 일어나 노도인의 등뒤로 바람같이 숨어들었고, 노도인은 머리끝이 쭈뼛 솟아오른 채 떨리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노부의 이목을 속이고 이곳까지 스며들 수 있다니…… 무서운 고수들이로구나."
노도인은 생사대적(生死大敵)이라도 마주친 양, 우수를 가슴 앞에 곤두세웠지만 손끝이 마냥 달달 떨리고 있었다.
무사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심정이 되어 고소를 머금은 채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보였다.
"수업을 방해하여 외람되오만, 소생 등은 대봉황천(大鳳凰天) 순조당(巡照當) 산하 전령무사(傳令武士)인 호해(胡劾)와 당위(唐偉)이오."
노도인의 눈이 거슴츠레해졌다.
"봉황이 어쨌다고?"
"대봉황천이오."
"허어…… 대(對) 봉황이라…… 왜 봉황과 싸우나?"
대저, 고대중국의 사투리 중 동북방의 것을 상어(相語)라 하거니와, 이 상어는 특별히 딱딱한 발음이어서 대(大)와 대(對) 같은 경우는 혼동되기 십상인 것이다.
그래서 대봉황(對鳳凰)이라 발음할 경우에는 봉황을 상대로 싸운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무림에 몸담고 있는 자로서 대(大)든, 대(對)든 대봉황(大鳳凰)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될까?
대봉황, 도합 육십칠 년의 세월동안 무림의 지배자가 되어 이제는 도저히 그 명성의 고하조차 측정할 수 없는 무림 내의 최고방파가 아닌가 말이다.
시종일관 정중한 태도이던 무사 호해는 드디어 부아가 치밀었다.
"대봉황천이란 문파에서 나온 전령이란 말이오."
"흐음…… 그럼 방문객이신가?"
"그렇소!"
노도인은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가 싶더니 힐끗 마른 소년 여의에게 시선을 던졌다.
여의는 벌떡 일어나 앞마당으로 나갔다가 돌아오며 외쳤다.
"시주함에는 동전 네 닢이 들어 있었소, 사부!"
"갑을병정(甲乙丙丁)의 정급(丁級)이로군."
노도인은 세 가닥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자리에 그냥 앉도록 하시오. 정급의 방문객에겐 의자를 주지 않고 차를 대접하지 않으니 그렇게 아시오."
호해와 당위, 두 무사는 서로를 힐끗 바라본 후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용건은?"
무사 호해가 품속에서 한 장의 배첩(拜牒)을 꺼냈다.
붉은 바탕에 금색의 봉황수를 놓은, 극히 귀해 보이는 지편(紙片)이었다.
"금번 대봉황천에서는 사해대검회(四海大劍會)라는 고금미증유의 방대한 규모의 비무대회를 실시하오. 이에 귀 문(貴門)이 대회에 참가하여 자리를 빛내주기를 바라는 뜻으로……."
노도인은 자못 근엄한 표정으로 배첩을 받아들었다.
그는 그것을 읽는 둥 마는 둥 쓱 훑어본 후 말을 이었다.
"험험…… 이게 무엇인고?"
"전 중원의 문파를 모두 망라한 최고의 대회이오이다. 민북(悶北)이나 귀주(貴州)의 제소문파(諸小門派)까지 참가할 것으로 보여 이미 무림전체는 이 일로 떠들썩하오."
노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알겠소. 무당파 제삼십육대장문인 현청은 가히 그대들의 견해를 거래(去來)하며 접(接)하였으니…… 으험, 말이 좀 어렵겠지만 그렇게들 아시오."
두 무사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예를 올리기 무섭게 달음박질치듯 문 밖으로 사라져 갔다.
그들로선 이 도깨비소굴 같은 곳에 단 한시도 더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여의도인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물었다.
"사부, 거기엔 어떤 내용이 적혀 있소?"
현청도사는 사납게 눈을 흘겼다.
"이놈! 너는 사부가 이 속의 내용 따위를 알아보지 못할 줄 아느냐?"
"나는 단지 그곳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냐고 물었을 뿐이오."
"험험…… 노부로 말하자면 나이 사십에 천자(千字)를 달통한 기재이니 물론 이런 내용쯤은 쉽게 알 수 있다."
"뭐라고 적혀 있냐니까요?"
"몰라도 돼!"
그후 현청도사가 마렵지도 않은 똥을 누려고 측간에 쭈그리고 앉아 있기 시작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아랫도리를 까내린 채 배첩을 위로 아래로, 거꾸로 옆으로 수십 번을 돌리고 또 돌려 보였다.
하나 불행하게도 배첩에는 그가 알고 있는 글자가 단 한 자도 없었다.
* * *
<삼가 무당파 장문진인(掌門眞人) 귀전.
금번 시월 스무아흐렛날, 본 천은 중원제협(中原諸俠)의 친선을 돈독히 하는 뜻으로써 만천하의 문파를 망라한 사해대검회(四海大劍會)를 주최하고자 하오.
아울러 본 대검회의 우승자 및 팔위(八位)까지의 고등자(高等者)에게는 본 천의 만룡무계(萬龍武系)의 정식후계자 자격을 부여하니 반드시 귀 파의 정예를 엄선하여 주시길…….
대봉황천 천룡방(天龍 ), 대방주(大 主) 위경경(韋瓊瓊) 배상(拜上)>
"사해대검회라는 비무대회에 참석하라는 얘기로군요. 그리고 반드시 정예를 선발하여 달라는 부탁도 있습니다."
치지직―
쇠판 위에서 구워지는 것은 돼지고기다.
빨간 돈육이 기름과 엉겨 알맞게 익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현청, 벽뢰, 여의, 세 도인의 입가에 군침이 맺히고 있었다.
"그럼, 우리도 선발대회를 열어야겠구나. 그쪽 고기가 좀 탄다. 운룡(雲龍)!"
여의도인이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선발이나마나…… 우리 파의 제일고수라면 당연히 대사형(大師兄)이 아니오?"
현청도사의 사나운 눈길이 그를 향했다.
"연습과 실전은 또 달라!"
치지직―
잘 구워진 돼지고기 한 접시를 들고 한 사람이 화덕으로부터 몸을 돌렸다.
소년.
이제 나이는 십육 세쯤 되었을까?
일신에 걸친 낡은 청색도포(靑色道袍)는 몇 군데 기운 흔적이 있긴 하지만 이를 데 없이 깨끗했다.
그의 용모는 그리 준수하다곤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맑고 윤기 흐르는 피부와 드넓은 이마, 완강한 턱이며 얇고 붉은 입술은 그를 매우 사내답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십육 세의 나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장대하게 발육한 골격과 체격이 그랬고, 굳게 다물어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이 그랬다.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침을 질질 흘리고 있던 현청 등은 고기가 앞에 놓이자마자 걸신들린 걸귀들처럼 달려들어 입 속으로 처넣기 시작했다.
"최고다!"
"사형의 음식은 언제 먹어도 최고야!"
단아한 윤곽의 소년도인은 씩 웃으며 자신은 한쪽에 따로 마련해둔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밥이래야 푸성귀 몇 조각과 솔방울을 튀긴 것과 검은 보리밥 한 공기가 전부였다.
그는 그것을 매우 천천히, 그리고 꼭꼭 씹어 오랫동안 먹었다.
"그런데 운룡, 너는 대봉황천이란 문파를 알고 있느냐?"
소년도인 운룡은 고기를 한 웅큼 입에 문 채 우물거리고 있는 현청노도사를 힐끗 바라본 후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무량수불…… 이 사부도 금시초문이니…… 어쨌든 고기깨나 먹는 문파임은 틀림없나 보더라. 그 초청장 종이는 비싼 거야."
벽뢰가 히죽 웃었다.
"그렇게 고기가 많다면 우리 무당파에선 내가 선발돼야겠소."
여의가 냉큼 혀를 내밀었다.
"어림없는 소리, 그곳에는 각 문파의 처녀고수들도 많이 올 것이다. 나 정도의 우아한 기품을 지닌 사람이 아니고서야 문파 망신이나 시킬 뿐이지."
현청노도사가 두 눈을 부릅떴다.
"너희 두 놈은 꿈도 꾸지 마라! 비록 삼재검법이 절세의 검법이기는 하나 일초 정도로는 대회에 참석할 수 없다. 이번 일은 삼초를 모두 터득하고 있는 운룡이나 나, 둘 중 한 사람이 가야 돼!"
고기는 어느새 딱 한 점만이 남아 있었다.
현청노도사가 말을 하고 있는 동안 벽뢰와 여의가 재빨리 손을 뻗었다.
순간 현청노도사는 왼쪽 발로 벽뢰의 복부를 힘껏 내지름과 동시에 우수를 칼끝처럼 세워 여의의 팔을 맹렬히 내리쳤다.
"악!"
"윽!"
"험험…… 선발고수란 아무래도 육질을 많이 섭취해야 하는 법이니……."
현청노도사는 고기를 혀끝으로 몇 번이고 핥다가 입 안으로 쑥 집어넣으며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내일 새벽에는 대망의 선발대회를 열 것이니, 일찍들 자두도록 해라. 물론 이 사부도 참가한다."
* * *
운룡은 잠이 없었다.
그는 늘 미명이 돋기도 전인 새벽에 눈을 떴다.
눈을 뜨고난 후의 그의 일과는 언제나 일정하다.
먼저 약수터에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운 물로 냉수목욕을 한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것이 여름이든 겨울이든, 약수터가 흰 눈 속에 파묻혀 있어도 그는 십육 년 동안 단 하루도 이 냉수목욕을 거른 적이 없었다.
젖은 몸을 마른 수건으로 깨끗이 훔치고 난 다음 그는 쌀을 일군다.
대륙의 동북인(東北人)들은 대개 아침을 거른다.
아침이래야 우유나, 겨를 섞은 죽 정도이고 정오의 점심을 오찬(午餐)이라 하여 가장 풍성하게 먹는 것이다.
하지만 무당파의 게으른 도사들이 일어나는 시각은 대략 정오 무렵이므로 운룡은 그들을 위해 미리 밥을 짓는 것이다.
쌀을 일구면서 그는 반찬할 재료들을 간단하게 점검했다.
'사부께선 어류(魚類)를 좋아하시니까 오늘은 특별히 서호(西湖)의 초어( 魚)요리를 해드려야겠다. 벽뢰는 돈육(豚肉)지짐 정도로 하고 여의는 벽뢰의 것을 함께 먹게 하자. 이번 달은 생활비가 지나치게 많이 들어갔으니…….'
불을 지펴 쌀을 안치고 나면 반찬을 만든다.
운룡의 요리솜씨는 인근 백 리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다.
가뭄에 콩나듯 시주라는 것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기실 그의 음식솜씨 때문이었다.
누구에게 특별히 배운 것도 아닌데 그는 간을 맞추는 것과 양념의 배합 등을 기가 막히도록 해내는 재주가 있었다.
오늘은 특별히 더 멋진 음식솜씨를 발휘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이 무당파의 비무대회 참가고수를 뽑는 날이니까.
서호의 초어라는 것은 상해요리(上海料理)의 일종으로써 소주(蘇州) 일대에서도 유명요리로 꼽히는 것이다.
어패류(魚貝類)를 위주로 하되 씹는 맛이 부드럽고 질긴 맛이 없는 나물을 곁들인다는 것이 초어요리의 전통비법이다.
색깔과 모양을 감안하여 생선의 은빛 비늘은 되도록이면 건드리지 않고, 식초를 섞은 간장에 잠깐 담갔다가 생선의 비린내를 뺀다.
연후, 밑가죽을 건드리지 않도록 여러 토막을 내어 우유를 섞은 끓는 물에 살짝 데치고 알맞게 익은 생선의 속살에 생굴을 버무린 양념을 넣으면 대충 마무리가 되는 것이다.
반찬과 밥이 식지 않도록 조금 물을 부운 솥 속에 잘 갈무리를 하고난 다음 운룡은 마당으로 나섰다.
어젯밤 바람이 불 때 상수리나무, 자작나무, 단풍나무, 옻나무가 밤새 서걱서걱 마른 잎 부빔을 하더니 또 한아름의 낙엽을 지워버렸다.
보료를 깐 듯 마당을 덮고 있는 낙엽에 서리가 하얗게 앉아 있었다.
익을 대로 익은 가을, 운룡의 열여섯 나이도 저물어 간다.
아침 저녁 나절, 도포의 넓은 소매 사이로 싸하게 밀려드는 한기가 낮 햇살을 삭혀 엷게 만든다.
그러나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정갈한 물빛보다 투명해져 자꾸만 높이높이 달아난다. 영겁이나 영원의 참뜻이 그 하늘 속에 있다는 듯…….
그는 아침일과 중 마지막 과정인 마당 쓸기를 시작했다. 내당 신방돌에서부터 한 개의 티끌도 빠뜨리지 않고…….
시작된 그 일은 반각도 채 지나기 전에 끝났다.
여느 때 같으면 숙주나물 등으로 가볍게 조반을 때우고 채석장으로 나갈 시간이리라.
하지만 오늘은 어젯밤 사부의 분부가 있었으니 선발대회 준비를 해야 했다.
"비무대회라……."
운룡은 가볍게 중얼거리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 한 자루의 목검(木劍)을 들고 나왔다.
십육 세의 나이가 되도록 그는 무당산 백 리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간 적이 없었다.
'드넓은 바깥 세상…… 그곳에서 벌어지는 비무대회에는 어떤 사람들이 올까?’
운룡은 목검을 가슴에 안고 마당 한 구석에 정좌하여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한줄기 환상이 떠올랐다.
수많은 협성괴걸(俠聖怪傑)들의 함성 속에 우뚝 선 자신의 모습.
그리고 사문의 비전(秘傳)인 삼재검법으로 당대의 기라성 같은 고수들을 하나씩 무릎꿇게 하는 자랑스러운 모습.
운룡의 싱긋 웃는 입가로 설익은 아침햇살이 매달려 오고 있었다.
* * *
"누가 이길까?"
"그걸 말이라고 하니? 당연히 운룡사형이 이긴다."
"나도 알아. 우리 내기할까?"
"둘 다 운룡사형쪽인데 무슨 내길 하냐?"
"이기긴 이기되 그 시간으로 승부를 내는 거야. 나는 운룡사형이 반각 이내에 이길 거리고 생각해."
"반각? 좋아. 나는 일각이다."
그러나 장문인실의 문을 벌컥 열리며 나타난 현청노도사의 모습은 너무도 뜻밖이었다.
이미 선발고수전을 포기한 채 한쪽 나무그늘 아래 나란히 앉아 있던 벽뢰와 여의는 놀랐다.
그리고 목검을 안은 채 사부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운룡도 이 느닷없는 모습에 두 눈을 부릅떴다.
해는 이미 천중(天中)에 걸려 정오임을 알리는 시각.
투명한 가을햇살 아래 현청노도사는 눈부시리만큼 멋있는 전통적인 도사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보라! 칠보쌍봉안(七寶雙鳳眼)이 박힌 학우(鶴羽)의 도관(道冠)을 쓰고 연환표대(連還顆帶)의 당건(唐巾)을 늠름히 머리에 둘렀다.
짙푸른 청색의 도포(道袍)에다 발에는 천경결(千莖結)의 초리(草履)를 신고, 우수에는 마괴사요(魔怪邪妖)를 경번영멸(輕蒜永滅)시키는 종선(棕扇), 좌수에는 건곤(乾坤)의 골채(骨體)로 이루어진 편괴( 拐)를 들었다.
뿐만 아니라 턱 하니 마당에 내려서서 놓은 삼척능대(三尺凌袋) 안에선 소위 도가삼재(道家三財)라 일컫는 세 가지 물건, 즉 천가(千家)의 반(飯)을 담아 고신(孤身)을 만리(萬里)에 유(遊)하여 불노계(不老計)를 구한다는 표발(瓢鉢)과 구천등상(九天登上)하여 타좌(打座)해 앉는 자연포단(紫然蒲團), 그리고 봉래산상(蓬萊山上)에 그 근원을 두고 오호사해(五湖四海)에 창강(滄江)을 담는 삼촌호로(三寸葫蘆)가 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도가의 칠의삼재(七衣三財)를 친친 몸에 두르고 근엄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을 하고 나타난 저 사람이 과연 현청노도사의 진신(眞身)이란 말인가?
놀라서 입을 떠억 벌린 세 제자의 망연한 시선을 안고 현청노도사는 운룡과 삼 장의 거리를 둔 채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가을 일광을 천천히 우러러본 후, 일신에 걸치고 있던 칠의삼재를 모조리 벗어 한쪽에 놓았다.
이어 한 자루 박달나무 목검을 들어 그 무게를 가늠해 보는가 싶더니 운룡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추풍(秋風) 소슬하고 일광만건곤(日光滿乾坤)하야 바야흐로 추색(秋色)이 도도한 오늘…… 너와 나는 운명처럼 이곳에 마주섰다."
무슨 말일까?
어쨌든 거창한 문구라고 느껴졌다.
"찰나의 승부에 촌각의 목숨을 거는 무림의 검객으로서 어찌 마주친 운명을 피할 수 있겠는가……."
세 가닥 수염 사이로 새어나오는 한줄기 한숨.
"오호…… 애재(哀哉)라! 스승과 제자가 문파의 중흥을 위해 서로를 향해 검을 들다니…… 사부는 눈물을 머금고 제자를 베고, 제자는 한숨으로 그 검을 맞는 이 일장의 슬픈 승부는 무림사에 영원히 남아 모든 중생의 손수건을 눈물로 적실지니…… 아아…… 후세인들은 말할 것이다. 사부의 횡소천군 일식을 조금도 거역치 않고 일초 만에 맞고 쓰러진 제자의 가련한 효심(孝心)을…… 사부는 눈물로 쓰러진 제자를 부축해 일으킨다. 그리고 말할 것이다. 제자여, 너는 진정으로 용감했노라고."
운룡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저 말을 듣고도 자기가 그의 횡소천군 일식을 피해낸다면 자신은 천고의 불효제자가 될 것이 아닌가?
그때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여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잠깐!"
순간 현청노도사의 싸늘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만약 네놈의 입에서 단 한 마디라도 허튼 소리가 나온다면 네놈의 십구대 조상묘까지 파헤치고 말 테다!"
"아아…… 그런 말을 하고자 하는 게 아니오."
여의는 싱글벙글 웃으며 장내로 걸어나왔다.
그의 손에는 어느 샌가 한 자루의 빗자루가 들려져 있었다.
"사부의 말은 매우 훌륭했지만 그렇게 되면 나와 벽뢰는 내기에 지게 된단 말이오.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점이거든."
쓰윽―쓱―
그는 느닷없이 마당을 쓸기 시작했다.
몇 조각의 낙엽과 하다 못해 조그만 돌멩이 조각까지 모조리 다 골라낸 후에야 여의는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맨날 비무하다 지면 돌멩이를 밟아 미끄러져서 그렇다느니, 지는 낙엽이 시야를 가렸다느니 운운하며 자기의 실력은 인정치 않는 사람이 있거든. 오늘이야말로 그런 불상사가 있어서는 아니 되겠다고 생각이 들어서……."
벽뢰가 킬킬 웃었다.
"기왕이면 사부의 그 목검도 조사해 봐라. 미리 부러뜨려 놓고선 시비를 걸지도 모르거든."
현청노도사의 얼굴이 칼을 목에 댄 칠면조 얼굴처럼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그는 그것으로 성이 안 차는지 앙상한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다음 순간 현청노도사는 느닷없이 운룡의 어깨를 향해 맹렬히 일검을 쳐냈다.
막 자리로 가 앉던 여의가 다시 벌떡 일어났다.
"비겁하다!"
팍!
목검은 정확히 운룡의 좌측 어깨 위에 작렬했다.
하나 운룡의 장대한 체구는 요지부동 아예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검을 이리저리 허공에다 비춰보고 있다가 만족스러웠던지 현청노도사를 향해 싱긋 웃었다.
"자, 이제 시작해 볼까요, 사부?"
도대체가 파리 한 마리라도 앉았던가 싶을 만큼 태연한 어조.
현청노도사는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는 마치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시작을……."
'큰일났구나. 저 우직한 놈이 정면승부를 낼 모양이다. 아아…… 내 미리 언질을 주었는데도 고지식한 저 성품 때문에 눈치를 못 채고 있는 것이다. 무량수불…… 무량수불…… 내 필살의 일검이 실패를 하다니…….'
위잉―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맙소사! 그 소리는 운룡의 목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였다.
춘풍화우의 단순한 일식!
하지만 그 속에 숨은 힘은 아예 바위라도 부서뜨릴 듯 강맹한 것이었다.
"히악!"
현청노도사는 기겁하며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자, 사부님! 제이초이오."
춘풍화우에 이른 횡소천군의 제이식!
운룡의 검이 재차 허공을 갈랐다.
그가 삼재검법을 펼치는 순서는 언제나 똑같았다.
춘풍화우에 이어 횡소천군, 그리고 선인지로(仙人指路).
그는 절대 초식의 순서를 바꾸지 않았고, 그것은 속임수라고는 털끝만큼도 모르는 그의 성격을 대신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현청노도사는 그 사실을 훤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이 순간 그는 절망에 빠졌다.
힘[力].
운룡의 몸 속에 숨어있다가 목검을 통해 뻗어나오는 그 힘을 그는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무슨 조화인지 운룡은 나이 십 세에 내당 앞의 무거운 철향로를 한 손으로 번쩍 들었다.
나이 십이 세에 지고 온 나뭇짐으론 겨울 내내 땔감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고, 산사태가 일어나 굴러오는 천근(千斤)의 바위를 그는 십사 세인 나이로 받아낼 수 있었다.
지금 십육 세의 그는 오백 년 수령의 거목을 뽑아낸다.
비단, 뽑아낼 뿐 아니라 그는 그 거목을 장난감처럼 휘돌리며 놀 수도 있다.
와지끈―
팍!
도대체 어찌된 걸까?
벽뢰와 여의는 벌떡 일어났다.
마당의 자작나무 한 그루가 반 토막으로 쪼개져 있었다.
또한 현청노도사는 내당 아래의 디딤돌 앞에 거꾸로 처박혀 있었고, 그의 검은 아예 가루가 되어 그의 주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운룡은 검을 내던지고 그를 향해 황망히 달려갔다.
"사부님!"
"에구구, 에구구……."
현청노도사는 뼈마디마다 오도독 오도독 소리를 내며 부축을 받고서야 간신히 디딤돌 위로 올라앉았다.
"사부님!"
"좋아, 좋아. 네놈의 힘은 초(楚)의 항우(項羽)를 능가하고, 촉(蜀)의 황충(黃忠)을 아래에 두는도다. 좋아, 좋아…… 여의!"
네가 이겼느니 내가 이겼느니 벽뢰와 히히덕거리던 여의의 시선이 힐끗 이쪽을 향했다.
"칠의삼재를 이리 가져 오너라."
도관, 당건, 도포, 초리, 종선, 표발, 포단, 편괴, 호로, 능대의 열 종류 물건들.
운룡에게 무릎꿇고 앉으라 한 현청노도사는 한동안 산아래 계곡을 바라다볼 뿐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사해(四海)를 한눈에 넣듯 시선을 풀어놓고 가을햇살이 빛나는 홍황색의 자연을 저토록 오랫동안 보고 있음은…….
현청노도사의 퀭한 두 눈 아래 주름진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느닷없는 좌중의 숙연함에 압도되어 한쪽에 조용히 시립해 있던 여의가 벽뢰를 향해 중얼거렸다.
"이제 보니 사부도 몹시 늙으셨군."
이윽고 현청노도사는 가벼운 헛기침과 함께 운룡을 지그시 정시했다.
"가람사부로부터 문파를 승계한 지 어언 삼십 년…… 인연이 그리 되어 변변한 상좌 하나 거느리지 못하고 있으나 본 무당파는 과거 무림의 양대태두(兩大泰斗)로 불리던 명문대파(名門大派)였느니라. 내 비록 배운 바 없고 덕망이 부족하여 문파를 크게 부흥시키지는 못하였으되 지금 이 순간까지 무당출신이라는 긍지를 잊어버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느니라."
"제자도 그러하옵니다."
"집중삼매의 오랜 고행을 거쳐, 나고 죽음을 초월한 상태에서 오직 지계(持戒)를 청정하는 것이 도인의 근본이듯, 이제 나는 너에게 모든 것을 다 물려주었다. 나 또한 무림을 수행한 적이 없어 다른 문파의 무예는 잘 알지 못하나 가람사부님께서도 그 정화를 다 깨닫지 못하신 삼재검법을 너는 이토록 깊이 달통하였으니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닐까. 그만한 무예라면 강호에 나가서도 능히 업신여김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모두 사부의 은공이옵니다."
"이 모든 것을 미루어 생각해 본 바, 이제 나 현청은 운룡을 무당 제삼십칠대 장령(第三十七代掌令)으로 봉하노라."
순간 운룡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사부님!"
"장령으로 봉해지는 자가 능히 지켜야 할 두 개의 맹세가 있느니라. 그 첫째는 무당도가의 백 년 한(恨)이 서린 대적(大敵)인 도마(道魔)를 찾아내 추살함이요, 둘째는 무당의 위엄을 사해만방에 능히 떨치게 함이로다. 나는 이 무거운 짐을 분명 그대에게 내린다."
툭!
하나의 물체가 운룡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금빛!
그것은 바로 금색수실로 소나무와 학(鶴)이 정교하게 수놓인 불진(佛塵)이었다.
무당장령에게만 대대로 계승되어 온 송학천불진(松鶴天佛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운룡은 경황의 시선으로 다급히 이마를 땅에 박았다.
"사부님! 제자는 미거하오니……."
현청노도사는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빙글 몸을 돌려 앉았다.
"지금 즉시 하산(下山)하라, 운룡! 이 넓은 세상을 네 맘대로 날아 보거라."
현청노도사는 눈을 허공에 둔 채 몸을 일으켰다.
태연한 모습이었지만 깊이 숨겨진 허탈감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낡은 봉황문을 열고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사방 벽에 어지럽게 걸린 난해한 괘효(卦爻)들.
가람사부의 초상 옆으로 가물거리는 촛불이 문득 한줄기 과거지사를 불러일으켰다.
언제던가…….
산길도 끊겨 인적도 없던 그 늦은 겨울.
온통 위엄일색으로 가득찬 외팔이 사내의 손을 잡고 도관 마당으로 들어서던 아이 하나.
대여섯 살쯤 되었을까?
하얀 솜옷에 푹 파묻혀 해맑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신기한 듯 굴리던 그 모습이 마치 어린 토끼 같았다.
사내는 하나밖에 없는 손을 합장하며 말했다.
"이 아이를 진인(眞人)의 밑에 두고자 하오."
그 해맑은 눈동자며 청수한 모습이 자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아이라 생각했으나 그 아이는 곧잘 자신을 따라주었다.
그 외팔이 사내는 산아래 움막을 짓고 살았고, 이따금씩 아이가 그를 만나는 모양이었지만 무엇을 하는지 물어보지도, 굳이 캐물어 볼 생각도 없었다.
그러던 세월이 벌써 십 년 하고도 다시 한 해.
"그래……."
현청노도사는 중얼거렸다.
"그 해맑은 눈으로 늘 다른 곳을 보고 있던 놈이었지. 애초부터 우리와는 다른 세상의 녀석이었어."
마당쪽이 어수선해졌다.
벽뢰와 여의가 떠들고 있었다.
"사형, 비무하는 곳에 먹을 것이 많이 있거든 좀 싸가지고 오시오."
"사형이 없으면 그 맛있는 반찬은 누구에게 얻어먹지?"
운룡의 우렁찬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삼가 운룡은 명을 받자와 무림으로 출도(出道)하오! 부디 사부님의 만수무강을 비옵니다!"
언제부터 맺혀 있었는지 눈물 한 방울이 현청노도사의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넌 우리와는 틀린 놈이거든…… 그 넓은 세상을 네 마음대로 날아 보아라…….'
한데 참으로 뜻밖이었던 일은…….
운룡이 무당파의 산문을 나서던 바로 그 시각, 현청노도사의 초옥에선 평생 읊지 않던 한소리 계송(溪誦)이 흘러나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삼라만상이 손바닥 위에 놓인 것 같은 무한한 도의 경지를 뱃속에 가득 채워서 읊어내는, 벽계수 약수물보다도 더 시원스럽게 느껴지는 그런 계송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