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장 6절~8절
“6.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8.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우선 로마서 1장 6절에서 ‘그들’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바로 앞 구절을 보아야 한다.
로마서 1장 5절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이 구절에 의하면 예수님으로부터 사도의 직분을 받은 바울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서 순종하게 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 구절인 ‘그들 중에서’라고 되어 있으므로, 여기서 ‘그들’이라 함은 바로 <이방인>을 가리킨다.
따라서 로마서 1장 6절은, ‘우리도 이방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다’ 라고 하는 뜻이 되는 것이다.
혹자는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의 것> 그러니까 소유격으로 번역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성경은 무슨 번역판을 사용해야 한다면서 여러 방법으로 강력하게 주장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주장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적지 않게 의문이 든다.
이와 같은 경우는 외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미국에서는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성경인 NIV라는 성경에 대한 오류를 출판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글 성경은 물론 번역본이기에 지금까지 개정을 거듭해왔으며 이후에도 언어나 문화의 변천에 따라 변경사항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이미 널리 검증된 성경이라고 한다면 이에 대한 비판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 학습과 복음 전파에 힘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로마서 1장 6절의 경우 한글 개역개정이나 일본 신개역 2017에 의하면 역시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본서에서도 이를 그대로 인용하고자 한다.
로마서는 이름 그대로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현재 이탈리아 로마 쪽에 눈을 돌리면 바티칸도 있고 큰 교회들도 있는데, 엄밀히 본다면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다.
로마서를 집필하고 있을 무렵, 바울은 아직 간 적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즉 로마서의 수신자인 로마에 있는 교회는 바울이 세운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방지역인 로마에 교회가 세워지고, 그리고 바울이 어떻게 이를 알고 로마에 서한을 보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썼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리고 그 내용이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서의 로마서라고 하는 점 또한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바울은 로마서 1장 6절 말씀에서 로마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우리가 본다면 그다지 감동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유대교 때까지만 하더라도 율법이나 성경은 이방인들에게 전해져서는 안 되는 가르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다 하더라도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 있어서는 어딘지 모르는 열등감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있었다고 여겨지나, 이 점에 대해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이방인 성도들에게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라고 하는 말은 크나큰 힘과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사람이든 일본 사람이든 간에 우리는 육적으로는 유대인이 아니나, 영적인 유대인,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 영적인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분명 그리스도 예수님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예수님의 것인가.
혹자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을 살펴본다면, 그 중에서 우리가 직접 만든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즉 소유자와 제조자는 분명 구분하여야 하며, 물건을 제조하였다 해서 소유자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서 우리의 물건이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제조한 것이 아니라 값을 치르고 그것을 구매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기 것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을 지불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것 만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거나 하더라도 그것은 내 것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요한계시록 5장 9절~10절
“9.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값을 치르셨다. 무엇으로 값을 치르셨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피로 값을 치르고 우리를 사셨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즉, 예수님께서는 죄악 속에 있는 우리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흘리신 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것이요, 또한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슬퍼해야 하는가. 절망해야 하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로마서 1장 7절
“7.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이제 우리 스스로 애를 쓸 필요가 없다. 주님의 품 안에서 기뻐해야 하며, 주님의 품 안에서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넘쳐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요 예수님의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는다면 은혜와 평강이 넘친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예수님을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것, 우리가 예수님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것, 예수님의 것이라고 한다면, 그냥 가만히 기뻐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다.
이사야 5장 1절~2절
“1.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하나님께서는 극상품 포도나무, 샤인 머스캣이나 거봉 같은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다. 뿐만 아니라 그 극상품 포도나무가 튼튼하게 자라기 위한 모든 환경을 조성해 주셨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결과는 들포도가 맺히고 말았다. 최고급 포도나무를 심었으나, 모든 정성을 기울여서 키었으나, 결국 맺힌 열매는 짐승 사료로도 쓸 수 없는 들포도 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겠는가.
이사야 5장 4절~6절
“4.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5.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이를 엄벌로써 심판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밭의 모든 환경을 조성해 주셨다. 그리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으셨다. 이것이 무엇인가.
예를 들어서 어떤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그런데 큰 빚을 졌다. 도저히 갚을 수가 없을 정도의 빚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사업을 할 수가 없고 취업도 할 수가 없다. 그런 사람을 누가 써주겠는가. 결국 파산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이 사람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법적으로 볼 때 개인파산, 자기 파산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됐는가. 그렇다. 채무가 면제된다. 모든 빚이 해결된다. 그러면 이제 그 사람은 다시 일어날 수가 있다. 즉 이 사람이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모든 채무가 면제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 죄인이었다. 작은 죄를 지은 죄인은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죄를 지었는지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수도 없이 반복해서 죄를 지어온 사람들은 어떠한가. 이는 자신이 무거운 죄인인지 아닌지 조차도 알지 못하게 되고 만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지은 죄를 알지 못한다. 하물며 오늘 당장 세상을 떠나도 천국에 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외인가. 우리도 또한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모르고 살고 있다. 얼마나 많이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얼마나 많이 가족이나 이웃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모른 채로 살아왔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내 죄, 어둠 속에 있을 때에는 알지 못했던 내 죄가, 어두울 때에는 안 보이다가 햇빛을 쬐면 드러나듯이 점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이제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나는 구원 받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셨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십자가에 못박히고 피를 흘리시면서 우리의 죄를 모두 완전히 해결해 주신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 예수님이라고 하는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으셨다.
그렇다면 당연히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다면 극상품 포도가 맺혀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포도가 맺혔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하는 포도밭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극상품 포도를 맺기 위해서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태초에 에덴에서 일어난 사건을 생각해본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에서 쫓겨났을 때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이 무엇이었는가.
창세기 3장 23절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우리는 우리의 근원인 우리 마음의 땅을 갈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신다. 그렇다면 땅을 갈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여기서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과 말씀과 행함인 것이다.
첫째로는 믿음이라고 하는 고백이 필요하다. 그저 막무가내 식으로 땅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마음이라고 하는 밭을 갈아서 주님께서 주시는 나무를 심기 위해 바치겠다고 하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는 땅을 갈기 위해서는 도구가 필요하다.
골로새서 2장 8절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땅을 갈기 위해서는 이를 위한 올바른 도구, 바로 괭이가 필요하다. 아무리 이 세상에 있는 지식이나 경험으로 있는 힘을 다 해서 갈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우리 마음의 땅을 올바로 갈기 위해서는 올바른 말씀,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인 성경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갈아야 하는 것이다.
이제 믿음이라고 하는 고백, 성경말씀이라고 하는 도구가 준비되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그렇다. 행함이라고 하는 경작이 필요하다. 아무리 훌륭한 고백과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밭을 가는 일이란 한 두 번 괭이질로 끝나는 것이 아닌 아침이고 밤이고 반복적인 작업을 필요로 한다.
부지런히 괭이질을 하게 되면 이제 단단했던 땅이 조금씩 부드러워진다. 그리고 그 때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크고 작은 바위나 돌멩이들이 튀어나온다. 잡초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런 것들을 그대로 놔두면 아무리 좋은 씨를 심어도, 아무리 좋은 나무를 심어도 다 말라 죽어버리고 만다. 이런 바위나 돌멩이나 잡초들을 쑥쑥 뽑아서 내버려야지만 보들보들하고 기름진 옥토가 되는 것이다.
우리 마음이 이와 같은 옥토가 되면, 이제 극상품 포도를 심으면 극상품 포도가 나고, 극상품 야채를 심어도 극상품 야채가 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서는 안 된다. 포도를 심었더니 포도나 나서 이를 먹은 것으로 끝난다면, 몇 년이 지나서 포도나무가 죽게 되면 이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게 되고 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그렇다. 교배를 시켜서 늘려가야 하는 것이다.
로마서 1장 8절
“8.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아무리 좋은 물이라 하더라도 작은 컵에 담아서 내버려 두게 된다면 머지않아 악취가 나고 썩어 버리고 만다. 아무리 우리가 좋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만 가두어 놓게 되면, 이는 살아있는 믿음이 아니라 죽은 믿음이다. 믿음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이웃에게, 그리고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겉으로는 믿음이 좋은 것처럼 행세를 해도 마음이 완악하고 단단한 사람.
기도도 많이 하고, 방언도 많이 하고, 금식도 많이 하고 예배도 많이 드리고, 꿈이나 환상과도 같은 일에는 집착을 하는데 정작 그 마음 안에 성경 말씀이 없는 사람.
이렇게 된다면 그 마음은 단단해져서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그러나 올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을 보면 항상 그 마음이 대단히 온유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극상품의 포도는 언제나 입에 달기만 한 포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고난이라는 포도를 주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시련이라는 포도를 주시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극상품의 포도라는 것이다.
그 마음을 항상 성경 말씀이라고 하는 괭이로써 매일매일 부지런히 행함이라고 하는 괭이질이 된 온유한 땅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극상품의 고난이라는 포도를 심어도 극상품 은혜라는 포도 열매가 맺히고, 극상품 시련이라는 포도를 심어도 극상품 평강이라고 하는 열매를 맺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극상품 고난과 극상품 시련도 주신다.
욥기 23장 10절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야고보서 1장 2절~3절
“2.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이와 같은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더욱더 강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극상품 선물인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신 우리는 성령님께서 함께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요 예수님의 것이다. 우리 앞에 좌절은 없다. 절망은 없다. 오로지 은혜와 평강이 넘쳐날 것이다.
믿음의 고백과 말씀의 괭이로써 우리의 마음을 갈면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크고 작은 불신의 바위나 돌멩이들, 이 세상 근심걱정이라는 잡초들을 모두 깨끗하게 뽑아내 버리고는, 우리 일생 속에서 예수님이라고 하는 극상품 포도를 열매 맺고, 예수님이라고 하는 극상품 포도를 우리 이웃에게, 그리고 전세계에 널리 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