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인정한, 불우를 떨친 기타리스트
세계기타협회 회장이었던 스페인의 나바스코와 세고비아의 수제자 볼로틴이 감탄해마지 않았던 기타리스트. 지난 1991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나치 희생자 추모제’에서 전 세계에 자신이 만든 ‘장례곡’을 연주한 최초의 한국인.
이 정도면 그의 이름은 대한민국의 많은 이가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만하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당연히 ‘가수’ 김의철에 대한 기억은 대한민국에서 흔치 않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의 노래가 아직 우리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불리곤 하는 거다. 그것이 그에 대한 우리 기억의 전부이다.
그의 노래 ‘저 하늘에 구름따라’는 원제가 ‘불행아’(가수 김광석을 비롯한 많은 가수들이 불렀다)이다. 1970년 보성고 1학년 때 만든 이 곡은 부모님과 떨어져 삼촌 집에 얹혀 외롭고 힘들게 살아야 했던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위로하기 위해 만든 그의 넋두리였다.
다섯 살 때 지붕에서 놀다가 동네에 “광대가 온다”는 얘기를 듣고 지붕에서 뛰어내리다 다친 다리가 평생 그를 장애인으로 살아가게 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식구들의 베트남 돈벌이로 혼자 그 다리를 절단할 위기에 놓이게 된 김의철에게 기타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중3 때부터 작곡을 시작한 그는 고1 때 자신을 노래한 ‘불행아’를 만들었고, 고3 때 졸업을 앞두고 선생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만든 노래가 ‘마지막 교정’이다. 그는 고3 때부터 교내 음악모임 세션 작업에 참여했다. 작업도중 알게 된 성음레코드 사장의 권유로 음반을 내기로 했다.
그러나 장애인에, 노래 가사가 어둡고 저항의식이 있다는 이유로 그의 노래는 세상과 만날 수 있는 길을 차단당했다. 더욱이 어떤 가수는 김의철의 노래 가사와 제목을 바꿔 그의 허락도 없이 세상에 내놓기도 했다. 이후 이 음반을 듣게 된 김의철은 자기 노래가 난도질당한 사실을 알고 ‘더 이상 음반 작업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뿐만 아니라 유신체제는 그의 노래가 대학가에서 불리자 ‘창법미숙’이란 이유로 가수 활동 자체를 금지시켰다. 한편 김의철은 80년대 ‘군중의 함성’과 ‘이별가’같은 민중가요를 발표하면서 일반대중과 철저하게 격리되어 버렸다.
그는 더 이상 한국에서의 음악 활동을 포기하고 독일과 미국으로 음악 공부를 위해 떠났고 ‘김의철’은 이 땅에서 소리 없이 사라진 가수가 되었다. 독일의 일간지에서는 ‘나치가 600명의 저능아를 살해한 것을 기리기 위해 해마다 열리는 추모제에 전 세계 장례곡들 중 한국에서 온 김의철의 곡이 선정되어 91년부터 10년간 한 번도 빠짐없이 불리고 있다’고 그를 추앙했다. 미국에서도 그는 ‘American institute of guitar’의 기타 교수로 재직했다.
지금은 한국으로 돌아와 한돌 등과 함께 한국포크의 발전을 위해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대북지원단체인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의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노래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가수들의 시국선언에도 이름을 올렸다. 조국은 그의 음악을 외면했지만 그의 노래는 우리의 마음에 남았고, 그는 다시 우리 사회를 노래하고 있다. 마치 ‘불행아’처럼….
https://youtu.be/6kczsu1U3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