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상주시! 상주시에서도 奧地에 속하는 중동면 금당리 235번지, 속명으로 “질 말”(길마을)이란 동네가 나의 安胎고향이다. 낙동강이 가로 놓여 상주에서는 “섬나라”라고 이름한 외진 곳이다. 東으로는 의성군과 서북쪽으로는 예천군과 접하고 있는 산골 마을이다. 금당리는 이웃 동네 “동막”과 “다래”를 합하여 “금당리”의 행정구역이다. 하지만, 마을 앞으로는 작은 도랑이 흐르고 그 갯가에는 복숭아, 살구나무가 있어 봄이면 도리행화(桃李杏花) 만발하여 홍난파 곡의 “고향의 봄” 노래만 불러도 아득한 그때 그 시절의 향수를 잊을 수 없다. 또한 마을 입구에는 800년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마을의 수호신으로 어릴 때는 매년 정월에 소를 잡아 제물로 하여 洞祭를 지냈으며, 단옷날에는 그네를 달아서 그네뛰기 대회를 열었던 곳이다. 아낙네들은 치마폭을 날리면서 담 넘어 있는 샘(우물)이 보이면 그네가 멀리 올라갔으니, 그네를 뛰면서 “샘 봤니”라고 하기도 했다. 그 선생님은 바로 내 집 우물이었는데, 아버지께서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동네에서 한 채 밖에 없는 기와집을 사 이사 오고, 살던 집은 형님에게 물려주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이곳 느티나무 아래에는 여름철엔 어른들의 쉼터였고, 아이들에게는 놀이터였다. 지금은 아이들이 없으니, 어른들의 쉼터일 뿐이다. 느티나무는 지금도 예나 다름없이 여름이면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나무에 비하면 인생 100년도 수유(須臾) 이던가! 그리고 뛰어놀던 뒷동산, 물놀이하던 앞 시냇가, 비가 많이 와서 홍수로 집안이 온통 물바다가 된 일들, 앞동산에 모여 단체로 줄지어 학교 가든 追憶은 그때 그 시절에만 있었던 풍경이리라.
질 마을(길마을)에는 礪山(여간)宋가 일족만으로 60여 호가 30 世를 이어져 사는 전통적인 씨족 마을이다. 씨족사회의 단면은 이웃하고 있는 “신암리”에는 순흥안씨 집성촌이며 윗마을 “다래”에는 “김 씨”의 집성촌이다. 그래서 모두가 할아버지, 아저씨, 형 조카 등 혈족으로 항렬을 이룬다. 항렬로 돌림자는 증조부는 “會”. 조부는 “必”. 父는“燮 또는” 達“字를 썼으며 나는” 善“字이니 할아버지께서는 끝 자” 祥“字를 제게 지어 주시어 내 인생을 宋善祥으로 살아오게 하였다. 농촌의 생활은 농사가 전부였으니 당시로서는 가난을 면치 못했을 뿐 아니라 春窮期를 겪어야 하는 困窮한 생활 그 자체였다. “동무 동무 씨동무 보리 나도록 사세”라는 노래를 부른 것도 그때쯤이었다. 일 년에 한 번씩은 “동네 공사”라 하여 마을 총회가 열리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크게 싸우듯 고함소리 요란하여 진행도 무질서하여 서로 자기주장만을 앞세우다 보니 결론 없는 말다툼으로 회의를 끝내곤 하였나 보였다.
닷새 만에 한 번씩 열리는 시골 장날에는 별 볼 일 없이도 장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이 장가니 거름 지고 장에 간다”는 속담이 딱 들어맞듯 이웃집 “철수” 할아버지는 “라이터 돌” 사러 장 간다고 하며 사람들은 놀려 대곤 하였는데 아마도 장날이면 으레 두루마기 걸치고 장 보러 다닌 것이다. 또 看過 할 수 없는 장면은 장이 서는 날 저녁 풍경이다. 해 질 무렵 장을 보고 돌아오다 거나하게 술에 취한 취객들의 행태 또한 온 동네를 시끌벅적하게 요란스레 소란을 피웠다.
평소 삶에 지친 촌부들은 술의 힘을 빌려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그렇게 술 좋아하시던 아저씨 할아버지들 육십도 되기 전에 일찌감치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다. 음력 정월의 세시 풍습은 일 년 중 가장 풍성하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농악놀이였는데 꽹과리, 징, 북 등 악기가 동원되어 동네는 시끌벅적 큰 잔치를 벌인다. 아이들 좋아라! 그 뒤를 따르고 집마다 방문하여 福을 빌고 豊年을 祈願하는 한바탕 풍악 놀이를 펼친다. 농악꾼 중에는 재주가 뛰어나 열두 줄 상모 줄을 돌리는 것은 단연 인기 독차지다.
* 할머니를 추억하다.
나에게 있어 할머니에 대한 추억은 거의 없다. 아버지가 나의 배다른 형님을 낳고 또 여자아이를 출산 했다는데 아마도 출산과 함께 아이도 아내도 잃어버린 슬픔을 겪었다. 그래서 막내 아들인 나의 아버지를 돌보느라 할머니는 우리 집에 계셨고. 나는 아버지가 서른여섯 살 나이에 태어나 온갖 사랑을 받으며 귀하게 자랐다. 내가 아장아장 걸을 나이에 할머니 등에 업혀 놀다가 입에 물고 있든 꼬챙이에 찔려 울었던 기억은 어렴풋하다. 할머니는 朱 씨 집안에서 시집와서 할아버지 宅號를 “반말네”라고 불렀는데 아마도 할머니 사시던 동네의 俗名이 아닌가 생각된다. 내가 네다섯 살쯤 되었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喪輿가 집을 나가 저만치 갔을 무렵 울면서 뒤 쫓아갔는데 고종사촌 누나인 “순자” 누나가 나를 업고 달래준 기억은 아득한 전설이 되고, 나의 할머니는 지금은 그 누구의 기억에도 없는 잊힌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일 년에 한 번이라도 할머니 산소에 벌초하고 성묘하기를 나의 할머니에 대한 작은 孝心이라 생각되어 實踐하려 자기만 맘대로 되질 않음은 나의 정성이 부족함이라 자책하곤 한다.
- 天主敎 信仰과 幼年 시절 -
할아버지는 30대 나이에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고 아버지로부터 들어 왔다. 정확히 언제 어떻게 세례를 받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할아버지는 삼 형제분이었는데 위로 형님이 한 분 있으며, 아래로도 동생이 있었는데 형님인 큰 할아버지는 상주시니, 근교에 살고 있었는데 아마 형님으로부터 세례를 권유받으시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는지 아니면 할아버지가 먼저 세례를 받고 큰할아버지가 나중에 세례를 받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할아버지 형제들은 모두 거의 같은 무렵에 세례를 받아 천주교에 입교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형제를 비롯하여 자녀들은 당연히 세례를 받았으며, 할아버지 출생이 1870년생(?)으로, 어쩌면 30세 되시기 전에 세례를 받은 것으로 추정해 본다. 나의 아버지가 1906년생으로 幼兒 洗禮를 받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해서 할아버지의 가족들은 아들 며느리 할 것 없이 천주교 신자가 되어 교리 공부는 물론 신앙생활로 엮인 가족공동체로서 정서적으로도 信仰은 중요한 위치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그 바쁜 농번기에도 주일(主日)이면 할아버지 사랑채에 모여(30~40명) 주일 첨례(瞻禮)를 바치곤 하였으며 겨울철에는 사랑방에 모여 “要理問答”(교리서의 하나)을 외우느라 골몰했다. 글 모르는 며느리가 시집을 오게 되면 할아버지 사랑방에 와서 늦도록 한글 공부(당시에는 언문이라 함)를 해야 했다. 어머니께서도 무학이었지만 한글을 어느 정도 해독하시어 그 긴 기도문을 잘 잘도 암송했다. 저녁기도는 식구들 다 함께 잠들기 전에 했는데, 기도 중에도 졸음이 와서 꾸벅꾸벅 졸기는 일수 였다. 특히 아버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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舍廊채에서 나와 함께 기거(起居) 하였는데 새벽일찍 나가서 소죽을 끓이면서 아침기도를 하곤 하였는데. 새벽의 고요를 깨우는 祈禱 소리는 나의 자장가 였으며 아버지를 追憶하는 鄕愁로 남아있다. 주일마다 公所(공소-神父가 없는곳)에는 기도문 朗誦이 이웃에게 들릴만큼 크게 들려서 이웃 비신자들은 “신구믿는 소리”라 비아냥 대기도 했다. 공소에는 신부(神父)가 없기에 봄,가을로 판공성사(判功聖事)를 하였는데 그때 공소신자(公所信者)들은 큰일을 치르는 어려움(?)을 감내해야 했다. 察考라 하여 교리시험을 구두로 치러는 형식으로 교리에 대한 지식을 묻는 것이다. 어른, 아이 다들 가슴 두 근 하여 신부 앞에서 초조했던 것은 아득한 그때의 초대 교회 풍습으로 신앙생활의 한 斷面이었다. 나는 신부가 오는 날에는 학교에도 가지 않고 신부님의 뒤를 따라다녔다. 왜냐하면 신부님은 사냥총을 가지고 와서 뒷산으로 사냥하러 가곤 하였다. 물론 저녁때에 가서 “판공성사”를 주었으니까, 또래 사촌들과 함께 꿩사냥 하는 신부님의 뒤를 쫓으며 한 마리 잡기를 기대해 보지만 잡은 기억은 없다. 판공성사가 끝나고 저녁에는 어린이들을 불러 놓고 “나비야 이리 날라 오너라.”의 동요를 가르치곤 하였는데 어린 시절 신부님과의 추억은 아득하지만 새롭기만 하다.
이러한 信仰生活 속에서 자란 나로서는 객지 생활인 중학교 留學 시절(고향 집에서 40여 리 떨어진 상주시네) 에서도 週日이면 성당에 가 미사에 참여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그때 堅振聖事(견진성사)를 보았다. 견 견성사를 집도한 이는 대구교구“서정길” 대주교였는데 키는 육척장신에 깡마른 체구로 주교 복장으로 미사를 집전했던 모습은 한마디로 偶像이었다. 철없던 나이에 견진성사가 무엇 인도 모르고 성사를 보았으니, 지금으로는 가당찮은 일이기도 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 원서를 서울에 있는 소신학교인 성신고등학교에 지원했다. 시험일을 며칠 앞두고 나보다 13살 위 형님께서 나의 하숙집으로 오셨다. 그 당시 사촌 형님께서는 面議員을 하셨고, 정치적으로 천주교 탄압이 심했던 터라 큰집에는 경찰서의 형사가 거의 날마다 찾아와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집안의 동태를 살피곤 하였다. 이에 怯을 먹은 형님은 신학교 가는 것은 집안에 큰 禍가 될 것이라고 만류하셨다. 나 역시 신학교에 대한 進學의 확신이 없었기에 쉽게 형의 뜻을 따라 시내 가까운 고등학교로(지금의 상주대학) 진학하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되어 온 신앙의 뿌리는 130여 년의 시간 속에서도 綿綿이 이어져 와 후손들은 물론 많은 지인들로, 하여금 신앙으로 인도 하였으며 몇 해 전에는 從孫 子가 神品을 받아 聖職者가 되는 榮光도 얻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사랑채에 書堂을 열어 젊은 청소년들에게 천자문, 소학 명심보감 등 가르쳤다. 내가 유치원 다닐 나이쯤 되었을 무렵 할아버지 서당에는 글 읽는 젊은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웃 몇 개 동네에서 젊은이들이 몰려왔으며, 수업료로는 여름철에는 보리 한 말, 가을에는 나락 한 말 정도였다. 저녁 후에는 손자들을 불러 천자문과 붓글씨를 가르치시곤 하였는데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들에게 먹(墨)을 갈게 하거나 담배를 넣는 일을 곧장 시켜서 나는 먹 가 는 것이 엄청이나 지루하고 싫었던 것이었다. 천자문을 공부할 때도 붓으로 쓰도록 가르쳐 주었으며 공부가 끝나고 나면, 으레 숨겨둔 과일(배, 감)이나 먹을 것을 주셨는데 나보다 2살 위인 사촌 형을 더 많이 챙기곤 해서, 어린 나이에 기분이 별로였는데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사촌 집은 사는 게 우리보다 어렵게 지내는 것을 어여삐 본 모양이다.
나는 6-7세 무렵 천자문을 다떼고 나니 어머니 께서는 책걸이 떡을 해서 할아버지 서당으로 가져왔다. 그이후 할아버지 서당에서 더 이상 배우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며, 또 할아버지 년세도 80고령이였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국어시간에 한글을 가르쳤는데 이시간은 나에게 엄청이나 지루하고 따분한 시간이였다. 천자문을 다외운 것은 한글공부도 덤으로 했기 때문에 학교에서의 국어시간은 또래들과는 배울게 없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삼학년때 84세를 일기로 돌아 가셨다.
* 소꼽 친구들
날이 새면 함께 뛰어놀던 친구들이란 한 살위 혹은 아래 형 조카들이다. 놀이터는 뒷동산, 앞 시냇가,겨울철이면 앞논에서 얼음치치기로 시간 가는줄 모르고 놀다보니 손에 凍傷걸리기도 하였는데, 동생과 함께 늦도록 스케이트 타고 와서 화롯가에 손녹이니 손이 뚱뚱부어 凍傷이 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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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져서 아버지는 온갖 민간요법으로 동상 치료에 고생하였다. 콩주머니에 넣기도 하며, 소의 胃 주머니에 담그기도 하였지만 완치되지 않아 손가락이 굵어지고 말았다. 그로 인해서 원인지 동생은 관절염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학교에 입학하고 나니 새로운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신동국민학교다. 학교를 중심으로 남쪽 동네는 신암리, 동쪽으로는 우물리(이곳은 하회 류씨가 살던 곳), 그리고 북쪽의 내가 사는 금당리이다. 아마 금군이 있어서 지어진 이름인가 했지만, 금 굴은 없는가 보니 그 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우물리에 사는 친구들은 학교에 올 때 “자라”를 잡아 오기도 하였는데 강을 건너서 오기 때문에 강가에서 잡아 온 것이었다. 학교생활은 즐거운 놀이터였지만 학교를 마치면 곧바로 집으로 가서 집안일을 도와야 했다. 소꼴을 뜯는다거나 소를 몰고 소먹이로, 들로 가는 것이 유일한 일손을 돕는 것 중의 하나였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에는 수꼴을 베여오거나 소먹이로, 야산으로 가서 방목하였다가 해가 질 무렵이면 집으로 오는 것이다. 우리 집 소는 큰 황소로 아주 잘생긴 멋진 놈이었는데 친구는 자기 소가 더 좋다고 자랑하다 그러면 싸움 붙여 보자고 해 정말 “청도 소싸움 못지않은 싸움을 붙였는데 결과는 친구 소가 도망가 승리의 기쁨을 맛 보았다. 친구는 나보다 한 살 위였는데 싸움도 잘하고 친구들 사이에 대장 노릇을 한터라 그날은 자존심이 엄청이나 상했는지 애무한 소에게 화풀이로 회초리로 갈기며 사라졌다.
학교에서 2km 떨어진 곳에 비행기 사격장이 있었는데 비행장 가까이 사는 친구들은 그곳에 가서 美軍 人들이 쓰다 버린 물건들을 가끔 보여 주곤 하였는데, 도루코 면도날이라든가 쪼크렛, 껌 등 생활용품들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가난한 시절이라 그들이 쓰다 남은 것도 한국 사람 둘에게는 당시에는 귀한 것들이었다.
어느 날 安某 한 반 친구는 조그만 쇠뭉치를 가져와 두드리다 폭발해서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 후 담임 선생님은 비행장 근처에 가는 것을 말라 했는데, 어느 날 낙동강 모래사장에 경비행기가 불시착 하여 점심시간에 7~8명이 구경하러 갔다가 돌아와 담임 선생님께 엎드려뻗쳐서 해서 엉덩이를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은 “선생님 무척 禍 많이 나셨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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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주눅이 들고 말았다. 돌이켜 보면 철없던 시절이었다.
* 나의 아버지! 나의 할아버지는 슬하에 4남 4여를 두었는데 나의 아버지는 네 아들 중에 막내로 태어났으며 위로는 형님 세 분과 누나 한 분이다. 아래로 여동생 두 분이 나의 고모님 되는 분으로 “예천 고모”님과 “풍양고 모”님이다. 우리들(사촌들)끼리는 그렇게 고모님의 호칭을 불렀고, 언제나 다정하게 이뻐해 주시는 고모님을 잘 따랐다. 어느 날 사촌 누나인 “정선(선숙)”이 누나는 나보다 4~5세 위인데 십여 리 이상이나 되는 풍향 고모 댁에 놀러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철없이 따라나서 고모 댁으로 간 적이 몇 번이나 된 듯하다. 그때마다 고모님은 몇 푼의 용돈을 주었는데 우리는 그 돈으로 가게에서 군것질하거나, 포켓 깊숙이 간직 하기도 하였다. 아마도 사촌 누나는 고모님의 용돈 주시는 것 때문에 고모를 잘 따른 것도 같다. 장터 입구에 자리한 고모님 댁은 시장 보러온 사람들과 장사꾼들이 오가는 길목이어서
장날이면 더욱 붐비는 곳이다. 구석에는 마소들이 꼬삐메어 여물통을 흩고 있는가 하면, 대청마루 봄볕에는 아지랑이, 벽에 걸 바인 괘종시계는 정오를 알리는데 열두 번의 치는 소리를 나는 세워보고 시계가 신기하기도 했다.
또 예천의 큰고모는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불행한 젊은 시절을 사신 분이다. 20세쯤 결혼 하여 아들 하나를 낳고 고모부가 돌아가서 靑孀寡婦로 살게 되었다. 생계가 막막한지라 친정집에 자주 와서 도움을 요청했는데, 아마도 나의 아버지께서도 사랑하는 여동생의 안타까움 때문에 물심양면으로 약간의 도움을 주었다.. 내가 서너 살 무렵 고모님의 외아들인 고종사촌 형님은 방학 동안은 으레 외갓집인 우리 집에서 보냈으며 심지어는 대학(고려대학교) 친구들까지 데려와 며칠간을 묵고 가기도 했다. 대학 등록금 때문에 고모는 아버지께 많은 도움을 바랐을 것으로 생각한다.
고모님은 집에서 밀주를 담가서 파는 술장사를 하였는데 술단속을 나온 술조사원이 들어 닥쳤으나 마침 방학이라 집에 내려와 있던 고려대학생 아들을 보고 그냥 돌아 갔다고 하는 逸話는 대학생인 형님의 간곡한 설득인지도 모른다. 든든한 아들 하나를 둔 고모님께서는 얼마나 자랑 스러워 했을까 ! 홀로 아들 하나만을 믿으며 온갖 어려움 다 겪고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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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온 고모를 나는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당시로서는 서울대학교 보다 더 인기 있었던 고려대 학생을 둔 어머니는 어려움도 어려운 모르고 아들 잘 둔 즐거움으로 살았겠다고 여겨진다. 시골 촌놈이 서울의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학원 석사학위와 박사 학위까지 취득한 아들을 둔 엄마로서 외아들 홀로 키우며 많은 모진 고생 그 얼마나 컸을까? 그래서 나의 고모이기 전에 한 여인으로서 삶이 존경스럽다. 아들이 서울 某 대학의 敎授에서 대학원장으로 퇴직할 때까지 고모는 평생을 한 번도 아들 집에서 신세를 지지 않고 고향 예천에서 구십 세를 넘기면서도 정정하게 사시다가 타계하였다. 아들을 지극히 사랑한 나머지 아들에게 신세 지지 않으려고 홀로 지낸 어머니의 표상을 나의 고모에게서 본다. 타계 하기 십수 년 전 80 고령에도 친정 조카를 찾아와 이틀 밤을 보내고 가던 뒷모습은 지금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로서 모두를 다 주고 간 것이다.
아버지는 누이동생에 대한 애정도 컸지만, 형제지간의 情 또한 남달라서 가난했던 둘째 형님과의 사랑은 “管鮑之交” 이상 그것이었다. 큰아버지는 젊은 시절 附子(부자)를 잘못 복용해 하체가 痲痺(마비) 되고 말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형님(나의 큰아버지)의 온갖 수발을 들게 되었는데, 원거리 갈려면 말꼬 삐자고 말에다 형님을 태워서 마부 일 하였으니 힘든 일을 할 때마다 직접 와서 도와야 했기에 다른 형제들보다 함께한 날이 많았다. 그뿐만 아니라 손재주가 뛰어났던 큰아버지는 목수일 뿐 아니라 金銀 細工일 대장간 풀무에서 연장 만드는 일등 뛰어난 재주꾼이었다. 그래서 큰아버지 댁은 많은 사람들로 언제나 붐볐다 하지만 가난은 면치 못하여 아버지는 가끔 보리쌀이나 밀가루 등을 가져다주었다. 때로는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함께 가기도 하였는데 아버지에게 나는 특별히 귀한 아들이었으리라.
* 李 相三 선생님을 追憶하다.
지면 姪女 벌이지만 우리는 소꿉친구였다. 세월이 흘러서 그때의 옥화가 무척이나 보고 싶다. 이리저리 수소문해 봐도 알 길이 없으니, 맘속에만 남아있는 추억 속의 소녀일 뿐이다. 옥화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에다 酒癖이 심하여 아침 밥상을 마당에 팽개치기 일쑤였으니 어린 어린 옥화는 어머니 마져 일찍 여의고 계모 밑에서 숱한 설움 견디며 살아온 착하디착한 어린 소녀다. 옥화의 마음 ! 그 상처 얼마나 컸을꼬! . 하지만 밖에 나와서는 그런 티 하나 없이 밝은 모습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철없던 내가 너무나 부끄럽고, 미안할 따름이다. 풍문에 의하면 시집가서 서울에 살고 있으며 남편 잘 만나서 열심히 살아온 덕에 아주 부자로 잘 산다고 한다. 부디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어릴 때의 보상이라도 받아야 되지 않겠니 ? “ 언제나 성실했던 옥화는 잘 살거야 ”라고 믿어본다.
내가 육 학년이 되었을 때 선생님은 인사 발령을 받고 “낙동 서부 초등학교”로 轉勤을 갔다. 선생님과의 이별은 나뿐 아니라 반원 전체가 설움과 아쉬움으로 惜別의 情을 나뉘었다.
그 후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선생님의 고향인 낙동면 용포리 골짜기를 찾아 선생님을 뵌 적이 있었는데 차도 다닐 수 없을 만큼 오지 마을이었다. 사모님은 나를 따스하게 맞아 주었으며, 손님으로 맛있는 음식과 친절로 대해 주었다. 그토록 대구 시내로 轉勤 오고 싶으셔 하였지만 끝내 尙州 시내에서 교직을 끝으로 停年을 마쳤다. 오랫동안 소식을 끊고 지내든 어느 날, 내 나이 오십팔 세 일 때다. 초등 동기생인 여자 친구가 선생님의 근황을 알려 왔는데, “대구의 가까운 병원”에 무릎 수술받고 입원 중이란 것이었다. 너무 반가워 단숨에 달려가서 오십여 년 만에 재회의 기쁨을 가졌다. 金一封 외에 과일 등으로 예를 표하니 선생님 또한 깊은 感懷에 할 말을 잊은 듯 한동안 손만 잡고 침묵이 흘렀다. 이게 선생님과의 마지막이었다 몇 번의 전화를 했으나 목소리 들을 수 없었으며 다만 사모님과 통화할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요양병원에 계신다는 것이었다. 나의 腦裏에는 언제나 멋진 모습으로, 나의 어린 시절을 잘도 보듬어 주신 恩師님이었으며 때 묻지 않는 교육자로서의 表象을 보여 준 분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삼학년 교실, 라이락 향기 풍기는 따스한 봄날, 쉬는 시간이라 창 밖을 보고 있노라니, 멀리 운동장안으로 멋진 청년 한분이 씩씩한 걸음으로 걸어 와 교무실로 들어 갔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분이 나와의 오랜 因緣을 맺게된 이상삼 선생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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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좀 늦은 나이에 대구 師範학교를 졸업하고 우리 학교로 첫 부임 하시게 되었는대, 나와는 4학년이 되어서야 담임으로 뵙게 되었는데, 선생님은 20대의 멋진 청년 선생님이 셨다.
학교에는 여자 선생님도 한 분 계셨는데 예쁘긴 하지만 정숙해 보이지는 않았다. 교장선생님과는 잘 만나는 듯했지만, 멋쟁이 이 선생님과는
거리를 둔 듯 보였는데 어느 날 이선생님은 자기보다 나이 많은 여자 선생
을 좋아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다소 경계의 대상인 것처럼 네게 얘기한 적이 있다. 해가 바뀌어 4학년이 되었을 무렵 선생님은 우리 동네, 나의 옆집에 방을 얻어 自炊를 하게 되었다. 자취 생활 몇 개월이 지났을 무렵 선생님이 손수 자취생활 하는 걸 안타까이 본 나의 부모님은
우리 집에 와서 기거하라고 청하여 흔쾌히 허락하였으며, 어머니는 빈방을 내주었다. 식사는 거의 나와 겸상했는데 처음에는 불편했으나 선생님은 언제나 편안하게 대하여 주었기에 잘 지낼 수가 있었다.
학교에 갈 때는 으레 도시락 두 개를 싸 가서 교무실에 가져다드리고는 했으며, 학교를 마칠 때에도 선생님의 이런저런 심부름을 하며 기다렸다가 함께 귀가 하곤 하였다. 선생님은 언제나 내 이름을 끝 자 한자만 “祥아!”라고 불러주어서 더욱 情感을 느끼게 하였다. 선생님은 어린 나에게 동화 이야기라던 지 만화에서 본 애정 스토리도 들려주었는데, “난 옥 씨 백 년을 같이 살아요! 아니요, 천년만년을 ! ” 이렇게 애정 섞인 만화 이야기를 자주 해 줄 때는 홀로 외롭게 지내는 청춘이 쓸쓸해 보이기보다는 나와 놀아주는 시간이 즐거웠다. 내가 어렸으니까 !
앞집에 사는 “옥화”와 나는 같은 반이라 자주 만나서 선생님의 자취방을 방문 하였는데, 그때 옥화는 제법 살림을 할 줄을 아는 소녀였다. 그래서 선생님의 방 청소도 하고 반찬도 챙겨다 주고는 하였다. 어느 날 선생님이 심한 몸살로 누워 앓고 있었는데, 나와 옥화는 뜻밖의 병시중을 맡게 되었다. 선생님 홀로 自炊 방에서 앓고 있는데 대야에 물 떠와 수건으로 적시어 이마에 대고 열을 식히고, 간병을 극진히 하였다. 선생님은 며칠간이나 앓고 나서 쾌차 하였는대 언제나처럼 옥화를 이쁘해 주셨다. 옥화는 나의 앞집에 살았기 때문에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와서 어머니에게도 이쁜 소녀였다. 뜨개질 솜씨가 있어 겨울철에는 양말을 떠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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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하고, 방학이 되어 집에 있을 때는 우리 집에 와서 많은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寸數로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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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였다. 作故 하였으리라 생각되지만 내 마음에는 언제나 나의 스승으로 남아있다. 마음으로라도 삼가 선생님의 靈前에 꽃 한 송이라도 올려 드리고 저세상에서 회복하시라 冥福을 빌어본다.
* 나의 형님 - 나의 부모님은 膝下에 3남 3녀를 두었다. 위로는 나보다 열세 살이나 많은 형님이, 아래로 여동생 셋에다 남동생 하나로 1950년대 출산율로 는 적당한 자녀를 둔 가정이다. 산아제한 없던 시기라 십 남매를 둔 가정도 허다했던 때였다. 그야말로 여자는 결혼하고 나면 십수 년 동안을 출산의 연속이라 할 수 있었으니 그 고통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부모님은 여느 가정처럼 자녀들을 성장기에서부터 출가할 때까지 온 정성 다해 자녀들 뒷바라지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 하면 농사일이나 하던 시절에 상급학교 진학시켜 뒷바라지하신 부모님께 감사한다. 아버지는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尊敬하고 싶은 表象이었으며 말보다는 행동으로 模範을 보임으로써 자녀 교육을 실천하신 분이다. 형님은 아버지의 첫 장가를 가서 얻은 아들이며 나를 비롯한 아우들은 아버지가 상처하고 새장가를 가 얻은 자녀들이다. 어머니는 시집와 첫 번째 자식이 나이고 두세 살 터울로 여동생, 남동생 또 여동생 둘을 두어 우
리는 오 남에다 배다른 형님을 포함해 삼남 삼녀가 되어 대가족이 되었다. 형님은 내가 여섯 살 무렵 결혼하였는데 형수 되는 새색시는 족두리를 쓴 채 연지 붉게 바르고 큰방에서 고개 숙여 있었는데 잔치 손님 틈에서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2학년 되었을 때 아버지는 형님 대신 새로 집을 사서 분가를 했다. 그 집은 동네에서 한 채뿐인 기와집이었으며 대문도 대갓집처럼 큰 대문이 달려 있어 사람들은 대문집, 혹은 기와집이라고 불렀다. 또 형님은 체구가 다구 지고 성격도 원만하여 어린 동생들을 잘 챙겨 주었는데 특히 나에 대한 애착이 크셨던 것 같다. 물론 장가를 간 후로는 슬하에 자녀들이 생기고 나니 나에게서 점점 멀어 지기는 했지만, 형제지간의 우의는 남들 못지않게 두터웠다. 하지만 성년이 된 후로는 賭博에 빠져 부모님의 속 썩이는 날이 많았다. 농한기가 시작될 즈음이면 또래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다니면서 화투 도박을 하였는데 농가의 토지문서를 놓고 벌일 정도로 그 규모가 말로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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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으리만치 대단한 것이었다. 동네에서만이 아니고 이웃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하는 遠程賭博으로 하루가 멀다고 꼬박 날이 새는 경우도 많았다.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도박 빚을 갚아주느라 나락 두지(벼 창고)를 열어 절도(?) 행각을 벌여야 했다. 당시 도박은 어느 농촌 할 것 없이 성행하였으나 나라에서도 무방비 상태로 방치하였다. 아버지 還甲 잔치를 하루 앞두고 형님과 사촌 형, 그리고 나, 셋이 시골 장터에 가서 돼지 한 마리를 사 리어카에 싣고 오는 도중에 “미주 굴”이란 동네 주막에 들른 형님은 또 도박꾼들과 어울려 한판을 벌인 것이다. 해가 저도 오지 않자 찾아갔더니 돈뭉치를 앞에 두고 열전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만두고 가자 했지만, 형님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뒤로 한동안 잠잠했지만, 완전히 도박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병역 문제로 신체검사에서 乙種 불합격을 두 번 받고 그다음 合格통지를 받았으나 忌避하는 바람에 도망자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날마다 형사가 찾아와 아버지를 못살게 굴기도 하고, (이때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이 였다) 이리저리 탐문하기도 하였지만 형님은 낮에는 뒷산에서 밤이면 몰래 집으로 들어와 불안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이러한 逃避 生活은 1961년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國土建設 隊에 입대하여(철도 공사) 나라 부역 일을 하고 나서야 병역의무를 마칠 수 있었으니 병역 문제로 십여 년간을 맘고생, 몸고생하며 사신 것 같다.
이후 가정생활뿐이 아니고 동네에서도 열심히 한 젊은 시절을 보내셨다. 기계에 손재주가 있었던 지라 여름철이면 양수기 고장으로 형님을 부르는 곳이 많아 바쁘게 다녔고, 그로 인해 술을 많이 마시는 바람에 위 탈꼬 마저 생겨서 병원 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통통 방앗간을 운영하였는데, 동네는 물론 이웃 마을에서도 찾아와 방앗간은 성시를 이루었다. 하지만 통통 방아는 잦은 고장을 일으켜 수리하느라 고생하는 경우도 많았다. 사촌과 나는 사랑채에서 함께 기거하였는데 겨울철이면 드럼통에 수수료로 모아둔 쌀을 몰래 퍼다가 이웃집 구멍가게에다 주고 군것질을 하기도 하였지만 한 번도 아버지나 형님에게 들키지는 않았다. 형님은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으며 열심히 노력한 결과 농촌에서 유복한 노후를 보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