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기업 되신 교회의 시작
주의 종의 사명을 확인 받고 난 이듬해 곧바로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성북구 길음동에 있는 양광교회를 출석하였는데 신학을 하면서 교회 교육전도사로 임명받았다.
이때 전도사로 사역하며 전도를 통해 교회에 등록시킨 새신자가 여럿 있었다.
준목 시험을 치른 후 어느 날 담임목사님께서 나이가 있으니 교회를 개척해보라는 권면을 하셨다.
또 개척하려면 당장의 재정보다는 교회를 도울 사람이 필요하다며 전도한 성도들과 함께 독립하여 목회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다.
이에 담임목사님의 권면을 받아들여 살고 있던 집을 팔고 정릉1동에 있는 2층 양옥집으로 이사를 했다.
1985년 5월 30일, 가정집 1층을 예배당으로 꾸민 개척교회에서 설립 기념예배를 드렸다. 이때 양광교회에서
개척교회로 적을 옮기며 함께 예배를 드린 성도는 10명이었다.
박낙신 장로와 곽순덕 장로 가정, 이요세 장로 가정, 서복이 집사 가정, 강릉으로 이사한 박재선 장로와
목포로 이사 간 김정국 권사 이렇게 다섯가정이 교회 개척멤버가 된 것이다.
교회 이름을 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처음에는 출애굽 후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 고통 당하다가 엘림이라는 샘에서 해갈하였던
지명을 가져와 엘림교회를 생각하였다.
하지만 고전 13장 13절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셨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교회 이름을 사랑교회로 정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 설립의 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1층 예배당을 꾸미기 위해 가지고 있던 돈이 3천만원이었는데 성전 완성 후 6백만원이 남았다.
40년 전이었으니 당시로는 꽤 큰 금액이었다. 남은 돈을 어떻게 해야 할지 한동안 고민이 되었다.
기도하던 중에 그동안 섬겨왔던 양광교회에 건축헌금으로 모두 드리기로 결단하였다.
교회를 설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남은 재정 모두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때 붙잡았던 말씀이 여호수아 13장 33절이었다.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었더라.’
주의 종으로 부르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실 것이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드렸다.
‘하나님 이제 저에게 남은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기업이십니다. 말씀대로 성취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결단을 받으신 것일까.
신기한 사실은 개척교회를 시작한 첫 달부터 지금까지 40년 동안 사례비를 못 받아보거나 밀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붙잡은 말씀 그대로 하나님이 완벽한 기업이 되어주신 것이다.
사랑교회 5대 비전과 기도 운동
마태복음 9장 36절에서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복음을 가르치고, 전하며, 병을 치료하는 일을 하셨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누가 뭐라 해도 교회의 본질은 전도와 선교이다. 교회가 생명 살리고 선교하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교회는
더 이상 존재의 가치가 없다.
크고 작은 말씀의 응답과 체험을 하며 하나님을 향한 신뢰 속에 깨달아진 믿음이었다.
사랑교회도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의 뜻을 따르기로 하였다.
이때 선포된 것이 사랑교회 5대 비전이다. 십만 성도 구령을 위한 예배실 건립, 선교회관을 세워 200여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선교지마다 선교병원을 세우는 의료선교와 성경학교를 세워서 말씀을 확산하는 다섯 가지였다.
하나님이 가슴에 담아 주신 전도하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의 원대한 비전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너무 미약했다.
이 일은 사람의 힘과 지혜로 안된다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이루고,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충만 주시도록 간절히 구하였다.
기도는 모든 것이라는 신념 아래 장목사는 매일 새벽예배를, 사모는 매일밤 자정기도회를 인도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1년에 100일 이상을 성도들과 함께 가거나 장목사 홀로 삼각산 능력봉, 백운봉에 올라가 기도를 했다.
한 달에 3일 금식기도는 일상이었고, 20일 금식기도도 네 차례나 했다.
온 교회가 뜨겁게 기도에 열중하였던 그 시절, 아내인 김정자 사모 역시 집에서 자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주택가에 있는 가정집을 개조한 교회이다 보니 아침 밤을 가리지 않는 기도 소리로 이웃들로부터 민원이 잦았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지하실에 있던 연탄광을 기도실로 개조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교회는 기도공동체로 하나가 되었고, 함께 기도하고 부르짖는 기도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러는 중에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진 아들은 끝내 천국에 갔다.
아들의 장례를 치르면서 아내 김정자 사모는 이런 편지를 썼다. ‘하나님의 아들을 내게 맡기셔서 기쁨도 컸지만
사명을 다했기에 먼저 천국에 갔구나. 엄마, 아빠를 주의 종으로 세운 너는 백년을 살다 간 사람보다 더 큰 사역을 했어.
장하다. 내 아들 문호, 천국에서 만나자.’
커다란 아픔이었지만 그렇게 언약의 관점에서 마음을 추스르며 성도들 앞에서도 강단에서도 아들을 먼저 천국에 보낸 슬픔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스승목사인 이억 목사와의 만남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하는데 가장 많은 영향과 도움을 준 분은 이억 목사였다.
교회 개척을 하고 난 후 교단에 가입을 해야 하는데 당시 방배동에 있는 대학원 연구원 과정 중이었고,
그때 신학교 연구원 원장이 바로 이억 목사였다.
이억 목사 역시 서울노회 소속이었고 장목사가 개척한 길음동에서 멀지 않은 삼양동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다.
이억 목사의 추천으로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정통)총회 산하 서울중앙노회 소속이 되었다.
스승 목사이기도 하고 교회도 가까워서 명절 때나 일이 있으면 빠지지 않고 인사를 드렸다.
그때마다 이억 목사는 장목사를 옆에 앉혀놓고 ‘장목사, 내가 이렇게 말해주지만 나는 이걸 수없이 많은 고통을
겪으면서 깨달은 거야’라고 말하며 목회에 대한 진심어린 조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목회에 대한 궁금함이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영적 멘토이신 스승 목사의 조언은 큰 힘이 되었다.
사랑교회 재직세미나를 비롯하여 여러 집회에도 오셔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푸신 고마운 분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