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하고 안 놀아 현덕 동화/원종찬 엮음/ 송진헌 그림/ 창비
2024년 6월 4일 이정은
* 작가 소개 : 현덕 (玄德, 1909년 2월 15일 ~ ?)
일제강점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소설가, 시인, 아동 문학가. 본명은 현경윤(玄敬允) 본관은 연주(延州)
1932년 《동아일보》에 동화 〈고무신〉을 발표한 뒤, 김유정, 김기림, 이석훈, 박태원, 안회남, 이상 등과 교유하는 습작 기간을 거쳐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남생이〉가 당선되면서 정식 데뷔했다. 처녀작인〈남생이〉의 화자는 ‘노마’라는 소년이며, 노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동화를 《소년조선일보》와 어린이 잡지 《소년》에 꾸준히 발표하는 등 아동문학에 관심이 컸다. 이후 〈경칩〉(1938년), 〈두꺼비가 먹은 돈〉(1938년), 〈골목〉(1939년), 〈잣을 까는 집〉(1939년), 〈녹성좌〉(1939년), 〈군맹〉(1940년)을 차례로 발표했으나, 건강이 좋지 못한데다 태평양 전쟁 기간 중의 어렵던 시절이라 더 이상의 작품 활동하지 못했다. 그러나 광복 후 월북한 이후에는 1961년까지 〈싸우는 부두〉 등의 단편소설을 자작함으로써 작품 활동을 계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 경향은 농민과 도시 빈민의 참혹한 현실을 묘사하며 사회 구조적 모순을 인식하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현덕의 문학은 크게 소설과 아동문학으로 나누어 평가할 수 있다. 그의 작품 활동은 1930년대 후반에 집중되어 있기에, 카프와 해방 후를 잇는 교량 역할을 했다. 그의 소설은 민중의 고통과 시대의 어둠을 정직하게 응시한 결과물이다. 소작 농민과 이농민, 도시 빈민과 무직자에 대한 일관된 관심은 그의 소설이 지닌 사회적 성격을 말해준다. 그런데 현덕은 현실을 반영하는데 계급적 도식이나 주관의 전망을 내세우지 않고 현실의 모순을 한층 깊이 있게 드러내는 독특한 서술 원리를 창안함으로써 이전 시기의 문학을 계승 발전시키고 우리 근대소설의 자산을 풍요롭게 하는 데 기여했다.
* 발제
작년 어린이도서연구회 영주지회 신입회원이 되어 읽은 근현대 7대 작가 책 중 가장 인상 깊고 오랫동안 여운이 남았던 책이 현덕 작가의 ‘너하고 안 놀아’였다. 그 이후 현덕 작가의 책을 찾아 읽고 몇 권의 동화책을 아이들에게 자주 읽어주었다. 올해 신입 발제를 준비하며 현덕 작가의 책을 꺼내놓고 아이들과 함께 읽으며 작년과는 또 다른 감정들을 마주하게 된다.
‘너하고 안 놀아’에 수록된 동화는 그림책으로 출판된 것이 많은데, 아이들은 현덕 작가의 그림책을 그림을 보며 읽는 것 보다 잠자리에 누워 눈감고 작은 전등 하나 밑에서 엄마가 읽어주는 소리를 더 좋아했다. 이 책은 눈으로 읽는 것보다 소리 내어 읽을 때 글의 참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소리 내어 읽으며 반복되는 어휘와 문장, 그리고 비슷하게 진행되는 문단의 흐름 속에 같이 흘러가다 보면 작가가 어린이를 바라보는 시선에 닿을 수 있다. 문장 곳곳에 어린이의 마음을 너무나 잘 헤아리는 현덕 작가가 서 있다. 어린이를 향한 사심 없는 마음. 아이들 행동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옳고 그름, 착하고 나쁜 것을 판단하지 않으며, 더 나은 삶을 위해 교훈하지 않는 맑고 고운 눈동자. 작가의 그 시선에 나도 아이도 함께 머물게 된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다가 ‘나는 아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귀뚤귀뚤 귀뚤귀뚤.
귀뚤귀뚤 귀뚤귀뚤.
귀뚜라미가 웁니다, 응달 축대 밑에서 조용조용 혼자서 웁니다.
해 기울어 버드나무 그림자 길고, 축대 앞에서 혼자서 노마가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앉았습니다.
가만히 노마는 귀뚜라미 마음이 되어봅니다.
노마는 점점 귀뚜라미를 닮아갑니다.
귀뚜라미는 점점 노마를 닮아갑니다. (51쪽)
가만히 귀 기울인다는 것은 조용조용 그이의 목소리를 듣는 것.
그이의 마음이 되어보는 것. 그래서 그이를 닮아가는 것. 우리 서로 닮아가는 것.
나는 아이들에게, 남편에게, 친구에게. 주변의 사람들에게 가만히 귀 기울였던 것은 언제였던가? 아니 나 자신의 마음에 귀 기울인 적은 있었나? 책을 읽다 가만히 내 안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다 보니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은 나와 내 주변에 가만히 귀 기울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책을 읽으며 나는 노마가 되어본다, 밤새 삯바느질로 고생하시는 엄마 마을을 헤아려 여자 고무신을 신고 보퉁이 등에 메고 엄마 심부름을 떠나는 노마.
영이가 되어본다. 자신에게 하나뿐인 새 고무신을 노마에게 빌려주고 다 낡아 헤진 노마의 헌 고무신 신은 영이.
또 기동이도 되어본다, 그런 노마와 영이를 놀리는 해맑은 기동이.
그리고 기동이는 모르는 마음, 가난하고 절실한 이 마음을 글로 표현한 현덕 작가의 마음이 되어 본다. (여자 고무신)
부족함 없이 넉넉한 기동이와 시대의 가난을 보여 주는 노마, 영이, 똘똘이. 이들 사이에 형편의 차이는 있지만 편을 가르며 경계 짓지 않는다. 혼자서 귀한 두루마기 입고 잘난척하던 기동이도 펄펄 내리는 눈 속에서 두루마기를 벗어버리고 소매를 올려 머리에 오그려 붙이고 노마 영이 똘똘이와 함께 토끼처럼 깡총깡총 뛰어논다, 그렇게 하나가 된다. (토끼와 자동차)
작고 연약한 어린이들이지만 이들의 삶 속에는 암울했던 시대를 이겨나갈 힘이 담겨 있다. 무엇보다 진실하고 따뜻하고 소박한 온정이 가득하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그 상황이 저절로 눈앞에 그려지고, 눈감고 이야기 들으면 나만의 그림책을 그려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작은 구슬 하나에 담긴 어린이의 마음, 어른 구두 신고 아버지처럼 큰소리치고 싶은 마음, 조그만 어머니가 되어 쓸쓸한 얼굴을 하는 동생을 달래는 마음, 눈물 어린 눈 속에 모든 것이 물딱총처럼 보이는 마음, 암만 감아두 끝없는 실타래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마음, 나를 위해 내리는 눈 속 딴 세상, 딴 사람, 딴 장난을 꿈꾸는 마음, 그저 가고 싶어가는, 가고 또 가고 맨발로 가도 아프지 않은 마음... 이 모든 마음 곁에 땜가게 할아버지처럼 살며시 앉는다.
한길 땜가게 할아범은 어린 사람 같습니다. 어린 사람처럼 조그만 것을 좋아합니다. 조그맣게 저 할 일을 합니다.
... 그리고 할아범은 동네 어린아이들을 퍽 좋아합니다. 또 어린아이들은 그 땜가게 할아범을 퍽 따릅니다. 왜냐면 할아범은 어린아이들 자신처럼 어떡하면 아이들의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을지 그 묘리를 잘 알고 그대로 동내 아이들을 즐겁게 하는 까닭입니다.
...정말 한길 땜가게 할아범은 어린 사람 같습니다. 어린 사람처럼 할아범은 작고 조그만 것을 좋아합니다. (158-161쪽)
작고 조그만 것들 속에 담긴 참된 사랑을 발견하라고 나를 찾아와준 나의 딸들을 위해 시작한 어린이도서연구회. 이곳에서 함께 읽는 책들이 내 안에도 이미 참된 사랑이 가득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어린이책을 함께 읽으면서 나를 이해하는 만큼 내 주변을 이해하게 되고,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만큼 내 아이들을, 주변의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노력하게 된다.
현덕 작가의 책을 읽으며 생각나는 시 한 편.
이 시를 읽으며 어도연을 시작했던 첫 마음을 다시 새겨본다. 그리고 내 곁의 작고 조그만 친구들에게 조금 더 비켜주고 조금 더 기다려주는 존재로 함께 걸어가기를 다짐해 본다.
키 작은 꽃이 먼저 핀다
봄이 오면
키 큰 나무껍질이 열리기 전에
지구의 자궁은
키 작은 꽃부터 탄생 시킨다
들판에는
냉이꽃이 피는구나 싶으면
제비꽃 민들레 코딱지나물 주름잎나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투어 핀다
산에는
복수초 노루귀 할미꽃 양지꽃 바람꽃들이
키가 작아도 제 살 단도리 야무지다
아니다
키 큰 나무들이 기다려 주는 거다
한 쪽에 비켜 서 있는 거다
나무는 나무끼리
풀은 풀끼리
작은놈은 작은놈끼리
둥글둥글 둥근 세상 빚어 내고 있다
둥근 동네에 세 들어 사는 사람나무들
키 작은 이웃들에게
잠시만 기다려 주고
조금만 비켜서 준다면
안복수
첫댓글 2기 발제지원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