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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복음 안에 있는 자유
1-10절, 우리의 가진 자유
[1절] 14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사도 바울은 14년 후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간 일을 말한다. 이 일은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회의의 일을 가리킨 것 같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수리아 안디옥에 내려와 이방인들도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가르쳤다. 이런 가르침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크게 논쟁이 일어났고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위해 바울과 바나바와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보내었다.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은, 이 일을 위해 모여 많이 토론한 후,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는 등 율법의 멍에를 메우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마 이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사도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올라갔고 또 디도를 데리고 갔다. 바나바는, 사도행전에 보면, 처음에 바울을 예루살렘에 있는 원사도들에게 소개한 자이었으며(9:26),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이었고(11:24), 바울을 안디옥에 초청해 함께 그 교회를 가르쳤던 자이었고(11:25-26), 그 교회에서 바울과 함께 선교사로 파송된 자이었다(13:2-3). 디도서의 수신자인 디도는 헬라인이라는 것(3절)과 그레데에 남아 교회를 돌본 사역자라는 것(딛 1:5) 외에는 성경에서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2절]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지도적인]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안디옥 교회에서 생긴 교리적 논쟁 때문이었다고 보이지만(행 15장) 또한 하나님의 계시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 논쟁 중에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라고 직접 지시하셨다는 뜻일 것이다. 사도들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받는 자들이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목적은 그가 그때까지 이방인들에게 전파하였던 복음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원사도들이 전파했고 예루살렘 교회가 믿고 있는 복음의 내용과 같은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의 일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만일 사도 바울이 잘못된 내용을 전파하였고 또 지금도 전파하고 있다면 그의 모든 수고는 헛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가 믿고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통해 주신 바로 그 복음임을 확인해야 하고 확신해야 할 것이다.
[3절]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규례이었다. 그것은 남자의 생식기를 덮은 피부(foreskin, 양피, 포피)의 끝부분을 잘라내는 의식이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아야만 했다. 이것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내려온, 또한 율법에 규정된 하나님의 언약의 표시이었다. 율법에 의하면, 디도는 당연히 할례를 받아야 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새 언약 아래서 모든 사람은 할례와 관계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의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언약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인 할례 받지 않은 헬라인 디도를 예루살렘에 데리고 올라감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증거하기 원했던 것 같다. 특히 이방인들이 구원받기 위해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논쟁하는 시점에 사도 바울은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함으로 행동으로 그 진리를 증거하려 했던 것 같다.
[4-5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했던 이유를 말한다. 그것은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교회에 당당하게 들어오지 않았다. 그것이 마귀의 전술이다. 마귀는 자기 사람들을 비밀 첩보원처럼 가만히 교회 안에 투입시킨다. 오늘날도 기독교계 안에 많은 거짓 형제들이 들어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은 그들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들어온 목적은 사도 바울과 성도들이 가진 복음의 자유를 엿보고 그들을 율법의 종으로 삼으려고 함이었다. ‘우리가 가진 자유’라는 사도 바울의 표현은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적 내용을 드러낸다. 그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며 할례의 규례로부터의 자유이다. 그것은 구약시대의 모든 의식적 율법들, 예를 들어 성전 의식들, 제사 의식들, 절기들로부터의 자유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의를 이루셨고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누리는 자유이다.
물론 그 자유가 도덕적 율법들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복음 안에 있는 자유는 방종에 빠지게 하는 자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행하게 하는 자유이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우상숭배하지 말아야 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고 거짓 증거하지 말고 탐내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도덕법들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義) 안에서 기쁨과 자원함으로 지키는 것이지, 의를 이루기 위해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 무거운 짐을 진 심정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가만히 들어와 사도 바울과 성도들이 가진 자유를 파괴시키고 그들을 율법의 종으로 삼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 거짓 형제들은 기독교회 속에 들어온 유대교인들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유의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오해한 자들이며,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아군들이 아니고 적군들이며, 하나님의 교회의 건설자들이 아니고 파괴자들이다. 그들은 주 예수께서 피흘려 사신 형제들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고 실상 미워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긍휼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 안에 사는 자들이 아니고 아직도 사망 가운데 머물러 있는 자들이었다.
사도 바울은 그 거짓 형제들을 알아차렸고 그들에게 한 순간이라도 복종하지 않았다. 잠언 25:26은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워짐과 샘의 더러워짐 같으니라”고 말한다. 진리를 가진 자는 진리를 가지지 못한 자 앞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 거짓 형제들의 사상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 진리와 배치되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 진리 곧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이 진리가 자신뿐 아니라 자기가 전도하여 믿게 된 모든 성도들에게도 있게 하기를 원하였다.
[6-9절] 유명하다는[지도적인]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지도적인]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6절 상반절과 8절은 문맥상 삽입적 의미를 가지며 어떤 영어성경들은 8절을 괄호 안에 두었다(KJV, NASB). ‘유명한 이들’은 ‘지도적 인물들’ 즉 예루살렘의 원사도들과 그들의 인정을 받은 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사도 바울은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사람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오직 성경말씀에만 의존해야 한다. 우리의 양심은 오직 하나님께만 매여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어떤 직분자보다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형제 자매이며 한 식구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원사도들은 사도 바울에게 더하여 준 것이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계시해주신 복음은 부족함이 없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원사도들에게 주셨던 그 동일한 복음 진리를 바울에게도 주셨다. 사도 바울의 복음과 원사도들의 복음은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제출한 복음의 내용은 바로 열두 사도들이 전파하였던 바로 그 복음이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감으로써 그의 복음에 어떤 수정이나 보완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의 복음과 원사도들의 복음이 동일하다는 것이 증거되었을 뿐이다. 그들 상호간에 교리적 일치, 교훈적 일치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유대인들을 위한 사도로 삼으셨고 바울을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삼으셨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 즉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바울과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다. 이 교제의 악수는 사도 바울의 복음과 사도 베드로의 복음이 동일한 복음이라는 것을 의미하였다. 다른 말로, 이 교제의 악수는 사도 바울의 복음이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라는 것을 증거한 것이다. 이렇게 확인된 그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이 세상에 없으며, 오늘날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그 복음만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과 생명이 된다.
[10절]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에게 부탁한 것이 있다면 단지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도행전 11:29에 보면, 글라우디오 황제 때 큰 흉년이 들어 유대에 사는 성도들에게 구제헌금을 보낸 일이 있었다. 사도행전 15장 때에도 유대 지방에는 가난한 자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 구제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전부터 자신도 그 일을 힘써 행하여 왔다고 증거한다. 구제는 하나님의 명하신 뜻이며(신 15:7-11) 하나님의 백성들의 당연한 의무이다(고후 9:13).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선을 행하고 구제하기를 힘써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도 바울이 증거한 복음은 사도 베드로가 증거한 복음과 동일하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갔고 그의 복음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적 인물들 앞에 제출하였다. 그들은 바울의 복음에 더하여 준 것이 없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들인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은 바울과 바나바와 교제의 악수를 했고, 그들은 할례자들을 위해,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들을 위해 일함을 확인했다.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아 전파하고 가르쳤던 복음 진리는 동일하였다. 이 사도적 복음, 이 성경적 복음만이 오늘도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과 생명이 된다.
둘째로, 복음은 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준다.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라고 표현하였다. 그것은 법으로부터의 자유, 즉 율법의 멍에와 공포로부터의 자유이다. 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는 것(율법주의)는 잘못이다. 사람의 행위는 늘 부족하다.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자는 아무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에게 자유함을 준다. 물론, 선한 행위는 믿음의 당연한 증거이다.
셋째로, 우리는 구제와 선행을 힘써야 한다. 구제와 선행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우리가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나, 행위 없이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참된 믿음은 계명 순종과 구제와 선행으로 나타나야 한다.
11-21절, 이신칭의(以信稱義)
[11절] 게바[베드로](전통사본)6)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바울은 그를 책망할 일이 있었다. 3년간이나 주님께 직접 배웠고 성령의 은사를 받아 복음 진리를 밝히 이해하고 고난을 무릅쓰고 증거했던 베드로는 상당히 성숙한 인격이었을 것이지만, 그에게 실수가 없지 않았다. 이 세상에 온전한 사람은 없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부족이 있었다. 세상에서 완전 성화란 없다. 성도의 성화는 매우 더디다. 베드로에게 책망할 일이 있었을 때 바울은 그의 앞에서 그를 책망하였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람 앞에서 의와 겸손으로 책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훌륭한 행동이다. 잠언 27:5,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사람 앞에서 아부하고 뒤에서 비난하는 것은 나쁜 행동이지만, 사람 앞에서 바른 충고를 하고 뒤에서 함부로 비난치 않는 것은 좋은 인격의 모습이다.
[12절]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그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관습에 젖어 있는 자들이었던 것 같다. 유대인들의 관습에 의하면, 그들은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하였다(행 10:28).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야고보에게서 온 유대인들이 왔을 때 그들을 두려워해 떠나 물러간 것은 유대인들이 그에게 법을 어겼다고 비난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베드로의 행동은 누구에게나 있는 약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사람은 누구든지 칭찬받기를 좋아하고 비난받기를 싫어하고, 평안과 안정을 좋아하고 싸움과 갈등을 싫어한다.
[13절]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베드로뿐 아니라,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였고, 바울의 동료인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다. 신앙생활에는 앞선 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오늘날처럼 기독교계가 혼란한 시대에는 바른 사상과 분별력과 인격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덕스러운 처신을 해야 한다. 시도 바울은 사도 베드로의 행동을 외식이라고 판단하였다. 이방인들과 음식을 먹는 것이 정당한 일이었다면, 야고보에게서 온 유대인들 앞에서도 그렇게 행동했어야 했고, 그것이 옳지 않은 일이었다면, 그들이 없었을 때에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사람은 연약하여 때때로 외식의 죄에 빠진다.
[14-15절]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베드로]7)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베드로의 외식적 행위는 복음 진리대로 행하지 않은 실수이었다. 복음 진리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본래 죄인이었다. 그들은 본래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이 우상들을 섬기며 살았고 더러운 죄악들 중에 파묻혀 살았던 자들이었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옛날부터 관리들은 탐욕적이고 부패하였고 가난한 상민들은 눈물과 고통이 컸다. 또 아내들과 종들은 구타와 학대를 당하여도 하소연할 데가 없었고 며느리들은 종들처럼 가정 일을 해야 했다. 옛날의 우리나라뿐 아니라, 인간 세상에 참으로 진실과 공의와 정직, 사랑과 선이 넘쳐났던 때는 아마 한번도 없었을 것이다.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본절은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을 말한다. 하나님의 복음은 사람이 어떻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사람이 모든 죄악된 처지 곧 죄인의 신분과 법적 책임과 죄악된 성향으로부터 구원받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본래의 의롭고 선한 모습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선,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의는 율법을 다 지키는 것을 말한다. 신명기 6:25,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키는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세상에 참된 의인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로마서 3:11,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함이라.” 로마서 3:21-22는,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율법 외에’라는 말은 ‘율법과 별개로, 율법과 관계없이’라는 뜻이다.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과 다른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 곧 구약시대에 성막 제도와 제사 제도에서 암시된 바이었다. 또 이 구원의 방법은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적용되는 방법이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남녀노소, 빈부귀천, 유무식 할 것 없이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왜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의롭다 하심을 얻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구원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류 역사 초기부터 제사제도를 통해 암시되었다. 이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담당하셨으므로 우리가 그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로마서 3:24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하였다.
[17-18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이는]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것임이니라].
의(義)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킨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신 구속(救贖)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즉 그리스도의 구속(救贖)만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사도 바울을 속이셔서 잘못된 것을 전하여 우리로 믿게 하신 것이 되는데, 결코 그럴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그를 속이지 않으셨고 또 우리를 속이지 않으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은 하나님의 진리이다. ‘내가 헐었던 것’이란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리킨다. 바울은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될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므로 만일 바울이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죄인이 될 것이다.
[19절] [이는]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죽었음이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율법을 향해’(노모), ‘하나님을 향해’(데오)라는 원어는 관계성을 나타낸다(관계의 여격). 즉 ‘율법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는 말은 “율법의 정죄로 말미암아 율법과의 관계에서 죽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율법과의 관계에서 죽었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율법의 정죄를 받으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과의 관계에서 완전히 죽은 자가 되었다. 또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라는 말씀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산 자가 되기 위함”이라는 뜻이다.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은 우리의 죄로 인한 죽음이며 곧 우리의 죽음이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라는 말은 본래의 나, 율법 아래 정죄되었던 나, 곧 옛사람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말은 비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사람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또한 그리스도의 영께서 내 속에 거하시므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이 말을 어떤 신비주의자처럼 육신적으로, 신비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우리의 인격을 혼동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것을,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 물론, 참 믿음은 회개를 동반한다. 성도는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고(갈 2:16)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고(요 1:12) 영생을 얻는다(요 3:16). 성도의 삶은 믿음의 삶이다. 성도에게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다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
[21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의롭게 되는 것(디카이오쉬네)[의(義)]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죽으셨을 것임이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으로 죄인을 구원하심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였고 지금 그것을 변증하고 있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율법을 행함으로 말미암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이것을 이신칭의(以信稱義)라고 말한다.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자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간주된다.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여러분은 이 구원의 선물을 받았는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는가?
둘째로, 성도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삶이다. 성도에게 믿음은 의요 생명이요 평안이다. 믿음 있으면 모든 것이 있고 믿음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물론, 그 믿음은 선을 행하는 믿음이다. 참된 믿음, 생명 있는 믿음은 의와 선의 행위를 수반하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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