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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기도와 선행
1-8절, 기도에 대한 교훈
[1-2절]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禱告)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여기에서 앞장에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는 말씀에 연결되는 것 같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힘써야 한다. 간구, 기도, 도고, 감사는 기도의 여러 측면들을 표현한다. 특히 ‘도고’라는 원어(엔튜크시스)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라는 뜻을 가진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사람이든지 모르는 사람이든지 간에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 즉 오늘날 대통령과 국무총리와 장관들과 국회의원들과 법관들 등을 위해, 그들의 구원과 그들의 바른 직무 수행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러한 기도의 결과로, 우리는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이와 비슷하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고 하셨다(렘 29:7). 사람이 돈이 많다고 잘 사는 것이 아니고 나라가 경제만 성장하면 평안하고 행복한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에게도 사회에게도 경건과 도덕성이 중요하다. 나라의 통치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구주 예수님을 믿고 죄씻음 받고 구원 얻어 새 사람이 될 때, 그들을 통해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정치, 의롭고 선한 정치가 이루어지고 그때 나라가 평안하게 될 것이다.
[3-4절] [이는](전통사본)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것임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우리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구주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에 대해서도 오래 참으신다. 사람이 외모로 남을 판단하는 것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공의로 판단하시되, 그 가운데서 그의 주권적 긍휼에 따라 택한 죄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말씀은 율법에 있는 하나님의 일반적 의지를 증거한다. 에스겔 33:11도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했다. 모든 사람은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는 아니다. 사람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뜻은 제한적이다. 그는 만세 전에 자기 백성을 택하셨다. 그 선택된 수는 확실하고 고정되어 있고 불변적이다. 그는 그들만 구원하기를 뜻하시며 또 그들만 구원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6:39에 보면, 예수께서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5절] [이는]1)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예수이심이니라].
우리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며 그를 통해 하나님의 택한 모든 사람이 다 구원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라는 진리는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에 밝히 계시된 진리이다(출 20:3; 신 6:4; 사 43:10-11; 44:24; 46:9; 고전 8:6; 엡 4:6). 또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뿐이시다. 주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고(요 14:6), 또 사도 베드로도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하였다(행 4:12).
[6절]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贖錢)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증거될 것이었도다].
‘속전’(贖錢)이라는 원어(안티뤼트론)는 ‘대속물’과 같은 뜻으로 죗값을 의미한다.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토 말튀리온 카이로이스 이디오이스)는 원문은 ‘정한 때에 증거될 것이었다’라는 뜻이다. 그 정한 때는 예수께서 오시는 때 곧 신약시대를 가리킨다. 구약시대에는 이 사실이 예언적으로, 예표적으로, 암시적으로 증거되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실체가 되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죗값을 실제로 지불하셨다.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贖錢)으로 주셨다는 표현에 대해,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들을 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셨고, 또 예수께서는 택한 자들의 죗값만 지불하신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속전(贖錢)으로 주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성경의 명확한 진리들과 충돌되는 생각이다. 성경은 선택과 예정의 진리를 분명하게 가르치기 때문이다(요 6:39, 44; 롬 9:10-18; 엡 1:4-5, 11). 선택의 진리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의 제한성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오직 택한 자들만 구원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이 분명하다.
또 예수께서 세상 모든 사람의 죗값을 지불하셨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만일 예수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죗값을 지불하셨다면, 이제 악인들을 위한 지옥 형벌이 남아 있지 않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결국 다 구원 얻어야 할 것이지만, 그것은 성경 진리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주 예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가서 영생에 이를 자들이 적으며,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넓은 길로 가서 멸망에 이를 자들이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7:13-14).
그러면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속전(贖錢)으로 주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는 말은 대략적, 제한적 의미로 본다. 우리의 일상적 표현에서 ‘모든’은 항상 완전한 의미에서 ‘모든’이 아니라, 대략적, 제한적 의미의 ‘모든’일 경우가 많다. 예배가 끝난 후 교우들이 돌아가고 몇 명이 남았을 때, 우리는 다 돌아갔다고 표현한다. 또 물병에 물이 조금 남았을 때 우리는 물을 다 마셨다고 표현한다. 디모데전후서를 살펴보면, 바울이 사용한 ‘모든’이라는 말은 완전한 의미가 아니고 대략적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1의 ‘모든 사람’도 세상 모든 사람을 의미하기 어렵다. 4절의 ‘모든 사람’도 대략적인 의미로 볼 수 있다. 4:15이나 5:20과 디모데후서 1:15의 ‘모든 사람’도 세상의 모든 사람을 가리키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고 표현했을 때 그것은 대략적, 제한적 의미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사람들을 위해 속전(贖錢)이 되셨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사람들, 오직 그들이 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7절]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이를 위하여’라는 말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속전(贖錢)이 되셨다는 복음 진리를 위하여라는 뜻이라고 본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진리이다. 사도 바울은 그 복음을 위해 전파하는 자와 사도와 교사가 되었다. ‘전파하는 자’라는 말은 선포자, 설교자라는 뜻이다. 그는 특히 이방인들을 위해 이 진리와 믿음의 말씀을 선포하고 증거하고 가르치는 사도와 교사가 되었다.
[8절]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거나 죄를 품고 기도하면(사 1:15; 59:2)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실 것이다. 또 우리는 자신을 위해, 서로를 위해, 교회를 위해, 목사를 위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위해, 우리나라의 대통령과 국무총리와 장관들, 국회의원들과 법관들과 온 백성을 위해, 또 우리나라의 평안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얻기를 원하신다(4절). 이것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적 의지이시다. 그러나 그는 또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는 뜻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하고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해야 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5절,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 얻을 모든 사람들을 위해 속전(贖錢)이 되셨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죄인들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며 구주이시다.
셋째로,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1절). 우리는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모든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우리나라의 대통령과 장관들과 국회의원들과 법관들과 온 백성을 위해 또 우리나라의 평안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9-15절, 여자들에 대한 교훈
[9-10절]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코스미오스)[단정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바른 정신, 절제]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여성도는 단정한 옷을 입고 염치와 절제로 자신을 단장해야 한다. 단정한 옷은 음란하거나 혹은 호화로운 복장과 대조된다. ‘염치’라는 말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뻔뻔스러움과 대조된다. ‘정절’이라는 원어(소프로쉬네)는 ‘바른 정신과 절제’를 뜻한다. 그것은 생각 없이, 무절제하게 행동하는 것과 대조된다. 여자의 인격적 아름다움은 단정하고 부끄러움을 알고 바른 정신과 절제심 있는 말과 행동에 있다. 잠언 11:22는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고리 같으니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또 여성도가 땋은 머리나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자신을 단장하지 말라고 교훈한다. 여성도는 외적인 단장에 힘쓰지 말라는 교훈이다. 성도는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에 또 현세적인 것보다는 내세적인 것에 더 가치를 두어야 한다. 사실, 외적인 단장은 영구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머리와 몸을 지나치게 단장하는, 육신적이고 현세적인 단장은 성도에게 합당치 않다.
성도의 참된 단장은 선행의 단장이어야 한다. 이것은 내면적 단장이며 인격적 단장이다. 선한 마음을 가진 선한 인격이 되어 선한 말과 선한 행동을 많이 하는 것이 성도의 참된 단장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일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오직 육신적인, 물질적인 것이 가치 있는 것이겠지만, 하나님을 알고 내세를 아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헛되며 오직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선한 뜻을 실천하는 것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다.
[11-12절] 여자는 일절[일체] 순종함으로(파세 휘포타게)[온전한 순종으로] 종용히[조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조용]할지니라.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아내들이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쳤다(엡 6:24). 순종은 여자의 아름다운 모습이며 아름다운 덕목이다. 물론, 남편이 자기 아내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 의무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남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 남편이 자기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벌받을 일이지만, 여자는 그것과 상관없이 자기의 의무를 다해야 하고 여자로서의 아름다운 덕을 가져야 한다.
‘조용히 배우라’는 말은 순종을 실천하는 방식을 보인다. ‘조용히’라는 말은 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 뜻이다. 순종은 조용히 행하는 것이다. 말이 많으면 불평과 불만의 말을 하기 쉽고 그것은 순종의 태도가 아닐 것이다. 순종은 자신이 이해가 되든지 안 되든지 해야 하는 것이다. 토론과 순종은 다르다. 토론하고 변론해야 할 자리나 위치가 있고 순종해야 할 자리나 위치가 있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여성도들은 조용히 배우며 범사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한다”고 말한다. 또 그는 여성도들이 교회에서 조용히 순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은 목사의 직과 장로의 직에 해당한다. 사도 바울은 여성도들이 목사의 직과 장로의 직에서 제외됨을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을 통해 전해진 교훈, 즉 하나님의 명백하고 영속적인 뜻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도 비슷한 교훈을 했다(고전 14:34-38).
성인 여성도들을 위한 권찰들이나 어린아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한 주일학교 교사들은 목사와 당회의 감독 아래 있는 보조자들이므로 이 교훈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본다. 물론 이런 목회 협력자들은 목사의 성경적 교훈과 당회의 바른 치리의 권위를 거슬러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질서이며 목사와 장로들에게 주신 권위라고 본다.
오늘날 우리는 본문의 교훈이 지켜지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주위에는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허용하는 교회들과 교단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일이다.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칙이다.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세우는 것은 어떤 이유와 변명을 든다 하더라도 신약성경의 명백한 교훈을 어기는 잘못된 일이다.
[13-14절]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두 가지 이유를 말한다. 첫 번째 이유는 창조의 질서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남자를 먼저 만드시고 그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고 또 그가 여자를 만드신 목적은 그로 하여금 남자를 돕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창세기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이 창조의 질서와 여자 창조의 목적은 적어도 이 세상에서 지켜져야 한다. 그러므로 아내는 자기 남편을 가르치거나 다스리려 하지 말고 조용히 배우며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여자의 범죄 때문이다. 인류의 타락은 여자의 범죄 때문에 왔다. 여자가 뱀의 꾀임을 받아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범죄했고, 그 열매를 자기 남편에게도 줌으로 남자도 범죄케 되었다. 창세기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인류의 타락은 첫 사람 아담의 아내 하와의 실수에서 비롯되었고, 여자는 그 일에 큰 책임을 가진다. 그러므로 여자가 먼저 범죄하였고 또 자기 남편을 범죄케 했기 때문에 이제는 여자가 나서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있다. 즉 여자는 범죄에 대한 책임 때문에 남자를 가르치거나 다스리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5절]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바른 정신, 절제]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자녀 출산은 여자의 의무이며 특권이고 여자가 할 수 있는 매우 복된 일이다.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은 문맥적으로 볼 때 여자의 지위의 회복을 가리킨다고 본다. 여자는 창조의 질서 때문에 또 범죄의 책임 때문에 조용히 배우며 남자에게 순종해야 하지만, 여자가 만일 바른 정신과 절제함으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그 지위가 회복될 것이다. 그것은 경건하고 도덕적인 좋은 자녀들의 출산과 양육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경건한 어머니는 경건한 자녀들과 남자들을 길러낸다. 이 사실은 여자의 지위의 회복을 증거한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여자는 남자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 소망을 둔 여성도들은 머리나 장신구들로의 외모 단장보다 내면적 단장을 힘써야 한다. 그들은 단정한 옷을 입고 염치와 절제로 또 선행으로 자신을 단장해야 한다.
둘째로, 여자의 목사직과 장로직은 허용되지 않는다. 교회에서 여자가 성경말씀을 가르치거나 다스리는 것, 즉 목사직과 장로직을 행하는 것은 창조의 질서 때문에와 범죄의 책임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일이다. 여자들은 오직 조용히 배우며 순종해야 한다.
셋째로, 여자는 절제함으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그 지위가 회복될 것이다. 여자가 자녀를 출산하여 키우는 일은 작은 일이 아니다. 훌륭한 남자의 배후에는 훌륭한 어머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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