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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시험을 참음
1-11절, 시험, 지혜, 성도의 자랑
[1절]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본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라고 생각된다. 저자가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한 것은 예수님을 단지 혈육의 형으로 생각지 않고 주님으로 고백한 것이다. 즉 그는 주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절대적 순종을 고백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형이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그가 순종해야 할 주님이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요한복음 7: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그러나 후에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다. 사도행전 1:14에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은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 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19에 ‘주의 형제 야고보’를 언급하였고 또 갈라디아서 2:9에는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라고 표현하였다.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즉 수리아와 소아시아 등 여러 곳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 성도들에게 편지하였다. 유대인들은 유다 왕국의 멸망 후 온 세계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 되었고 이제 예수님 믿는 유대인 성도들은 참으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표하였다.
[2-4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본서에 19번 사용된 ‘형제’라는 말은 초대교회에서 성도 상호간에 사용된 친근한 명칭이다.3) 우리는 모두 주 안에서 형제들이다.
‘여러 가지 시험’이라는 말은 성도에게 닥쳐오는 시험이 다양함을 보인다. 어떤 때는 육체적 질병이 있고, 또 어떤 때는 실직이나 부도, 파산 등의 물질적 어려움이 있다. 어떤 때는 가족들의 질병과 사고와 죽음이 있고, 어떤 때는 친구의 비방과 배신이 있다. 어떤 때는 가정의 파탄이나 국가의 경제 공황이나 전쟁이 있다.
성도는 이런 다양한 시험을 당할 때에 그것을 불평하지 말고 그것을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한다. 그 이유는, 모든 환경이 섭리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또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인격이 되기 때문이다. 로마서 5:3-4도,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인격의 단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했다. 신앙 인격은 시험과 시련을 통해 단련되고 성숙하게 된다. 온전한 인격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가 이 세상에서 힘써야 할 성화의 목표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단련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야곱은 20년간 하란에서 외삼촌 밑에서 고된 수고를 하였고, 요셉은 약 13년 가량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모세는 40년간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 생활을 했고, 다윗은 10여년간 피신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오랜 고난의 단련을 통해 신앙 인격의 성숙을 가졌다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도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 기쁘게 받아야 한다.
[5-8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성도가 이 세상을 살면서 시험을 잘 대처하려면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에 잘 적용하는 능력이다. 지혜는 참으로 귀하다. 잠언은 지혜의 책인데, 지혜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다. 잠언 3:13-18,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만일 우리가 지혜가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 얻을 수 있다. 주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7:7-8).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 그는 그것을 후히 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때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지혜를 구하면서 의심하는 자는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고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이다. 우리가 기도 응답을 믿어야 할 이유는 주께서 기도의 응답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앞에서 인용한 마태복음 7:7뿐 아니라, 마가복음 11:24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또 지혜를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며 우리가 그의 뜻에 합한 것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일서 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9-11절]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사회적 신분이 낮거나 경제적 어려움이 있는 성도들은 존귀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광스럽고 복된 천국의 시민이 된 것을 자랑할 수 있다. 흔히 성도에게 닥치는 큰 시험거리는 물질 문제이지만, 성도들은 세상 것들이 헛되다는 것과 주 예수님 안에서 얻은 구원과 복이 지극히 크고 가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으로 만족하며 즐거워하고 자랑한다. 그러나 한편, 사회적 신분이 있거나 물질적 유여함이 있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적 부요의 헛됨을 인정하고 낮은 형제들과 교제하게 된 것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이전에 가치 있게 여겼던 세상의 것들이 풀같이 시들고 아름다운 꽃같이 없어지는 것임을 깨달았고(사 40:6-8) 거기에 더 이상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성도의 가치는 오직 천국과 부활에 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임을 고백하고 온전히 믿고 순종하자(롬 6:22).
둘째로, 우리는 시험들을 만날 때에 온전히 기쁘게 여기자. 시험은 인내를 만들고 인내는 온전한 인격을 이루는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가 지혜가 부족하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그것을 구하여 얻자. 믿고 구하는 자마다 지혜를 얻을 것이다.
넷째로, 우리들 가운데 낮은 형제들은 주 안에서 성도의 높은 신분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들은 세상것들이 헛됨을 깨닫고 자신들의 낮아짐을 자랑하자. 성도의 가치와 소망은 부활과 천국과 영생에 있다.
12-18절, 시험의 원인
[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야고보서 1장에서 ‘시험’이라는 원어(페이라스모스)(2, 12-14절)는 ‘시련’이라는 원어(도키미온)(3절)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다. 사람이 환난의 시험을 잘 참으면 온전한 인격자가 되므로 복되다(3-4절).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이라는 원어(도키모스)도 ‘시험을 받은’이라는 뜻이다. 성도들의 시험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시험이다. 그것을 잘 통과하는 자들은 그들에게 참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음이 증명될 것이다.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은 영생을 가리킨다. 면류관은 승리한 자들에게 주는 상을 의미한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승리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했다(롬 8:35, 37). 사도 요한도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말했다(요일 5:4).
영생은 행위의 대가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시험을 통과하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의 결과라는 뜻에서 상이라고 표현되었다고 본다. 영생은 성도의 정상적 신앙생활의 결과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6:22에서,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말했고, 갈라디아서 6:8에서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썩는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영생의 영광을 얻을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잘 참고 이겨야 한다.
[13-16절] [그러나]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시험의 원인은 무엇인가? 물론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작정하셨다는 진리에서 보면 모든 일의 제일 원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 진리는 하나님께 악의 책임을 전가시키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말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이런 뜻에서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친히 누구를 시험하지도 않으신다.
본문은 사람이 받는 시험의 원인이 그의 욕심 때문이라고 말한다. 각 사람은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될 때 시험에 떨어진다. 사람은 돈과 정욕 때문에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적질하고 거짓말한다. 또 돈 사랑이나 명예심이나 생의 애착 때문에 물질적 파산이나 남의 비난이나 몸의 질병으로 인해 낙망한다. 우리에게 욕심이 없다면, 그런 것들이 시험거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생의 최고 목표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면, 우리가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의 지혜롭고 공의롭고 선한 처분을 믿는다면, 또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식주의 필요와 우리의 건강을 주실 것을 믿는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들도 우리에게 시험거리가 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시험은 오직 자신의 욕심에서 오는 것이다.
욕심은 죄를 낳고 죄의 결과는 죽음이다. ‘장성한다’는 원어(아포텔레오)는 ‘끝까지 마친다’는 뜻이다. 즉 죄가 죄로 끝마치고 사람이 그 죄를 끝까지 회개치 않는다면 죽음에 이른다는 뜻일 것이다. 죄의 결과는 죽음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죽음은 지옥 형벌을 포함하는 것이다. 또 사람의 시험이 욕심에서 나는 것이므로,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욕심을 낼 때는 그에게 어떤 좋은 일이 있을 것같이 보이지만, 실상 그 결과는 죄이며 죄의 결과는 사망이다.
[17절]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천지만물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천지만물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고 땅을 정복하고 생물들을 다스리게 하셨기 때문에 사람이 땅을 정복하고 생물들을 다스리는 데 쓰이는 지혜와 능력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들이다. 사람이 발전시킨 음악과 미술, 문학과 과학 등도 다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선물들이다. 이것들은 다 위로부터 즉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왔다. 성경에서 ‘어두움’은 무지와 죄와 슬픔과 불행을 가리키고, ‘빛’은 지식과 의와 기쁨과 행복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빛들의 아버지이시다. 그에게는 참된 지식과 의와 기쁨과 행복이 있다. 하나님께서 빛이시라는 점에 있어서 그는 변함이 없으시며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
[18절]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그가 만드신 피조물들 중에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나으신 자들이다. ‘첫 열매’란 중생(重生)의 구원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된 것이었다. 요한복음 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에베소서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그것은 영광의 천국과 몸의 부활에 비해 볼 때 첫 열매에 해당한다. 로마서 8:23,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리느니라.” 영광스럽고 완전한 추수는 아직 미래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있다. 앞으로 올 새 세계를 생각할 때에 성도들의 구원은 첫 열매와 같다. 장차 만물이 새로워지고 회복될 것이다. 사도행전 3:21, “만유를 회복하실 때.” 로마서 8:20-21,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영광스런 천국과 부활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우리를 중생시키셨고 첫 열매가 되게 하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세상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지만, 시험에 지지 말고 잘 참고 이겨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자.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받지만, 중생한 자는 온갖 시험에 지지 말고 잘 이겨야 한다. 우리는 성경말씀과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온갖 시험을 잘 이겨야 한다.
둘째로, 사람의 시험의 원인은 자신 속에 있는 욕심이므로, 우리는 돈과 쾌락과 명예 등 이 세상에 속한 모든 욕심을 버림으로 어떤 시험에라도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돈과 쾌락과 명예에 대한 욕심을 다 버려야 한다. 그래야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다.
셋째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임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세상은 창조자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었다. 모든 좋은 것들은 다 그에게서 나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좋은 것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의 첫 열매로 구원하신 것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천국만 바라고 모든 시험을 이기고 그의 모든 계명과 말씀을 지켜 거룩과 의와 선과 진실을 행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우리의 참된 소망은 주의 재림과 영광의 천국뿐이다.
19-27절,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
[19-20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그러므로](전통사본)4)(KJV)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이는]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우리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해야 한다. 잠언 10:19,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언 17:27,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 우리는 말을 할 때 남에게 유익을 주는 말만 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말은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또 우리는 성내기도 더디 해야 한다. 사람이 옳지 않은 일을 보고 화를 낼 수 있겠지만, 화를 내더라도 많이 생각한 후에 내어야 한다. 우리가 성내기를 더디 해야 할 이유는, 우리가 화를 낼 때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화를 낼 때 말로 실수하거나 남을 미워하는 죄를 짓기 쉽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지혜이다. 잠언 14:29,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잠언 19:11,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잠언 16:32,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 12:16,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21절]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道)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우리는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회개이다. 구원받는 사람은 무엇보다 죄악된 생활을 회개해야 한다. 또 우리는 구원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한다. ‘도’(道)는 ‘말씀’이라는 뜻이며 그것은 복음을 가리킨다. 그것은 ‘너희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 곧 ‘구원의 말씀’(행 13:26)이다. 이 말씀은, 구약시대에 율법이 돌에 새겨졌던 것과 달리, 우리의 ‘마음에 심긴 말씀’이다(고후 3:3). 우리는 구원의 복음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한다. 온유함은 순진하고 겸손하고 부드러운 마음가짐을 말한다. 온유한 마음을 가진 자가 참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대항하지만, 온유한 마음은 그 말씀을 잘 받아들인다.
[22-24절] [그러나]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기본적이지만, 야고보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참 믿음이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고 강조한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실상 믿지 않는 자이며 자신을 속이는 자이다. 그러나 말씀을 행하는 자는 그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과 구원을 증거한다. 여기에서 행함은 우선 성급하게 화를 내지 않고 덕스러운 말을 하고 덕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부터 가리킬 것이다.
성경말씀은 거울과 같다. 그 말씀을 듣는 것은 거울로 자신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은 거울로 자신의 더러워진 얼굴을 보고 그것을 씻지 않고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듣기만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들은 후에 고칠 것은 고치고, 행할 것은 행하라고 주신 것이다.
[25절]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법]’은 복음을 묘사한 말이다. 구약의 율법은 불완전한 법이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제사 제도나 성막 제도 혹은 성전 제도는 신약시대에 다 폐지되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복음은 완전한 법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그가 이루신 의(義)를 믿는 자들에게 완전한 구원을 주신다.
복음은 또한 ‘자유하게 하는 법’이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밝히 증거된 진리이다. 바울은 그 서신들에서 복음 안에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음을 증거하였다(롬 7:6; 갈 5:1, 13). 그 자유는 죄와 사망과 지옥 형벌로부터의 자유일 뿐 아니라, 율법 제도와 율법의 멍에와 속박과 위협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라는 구절에서 ‘있는 자’라는 원어(파라메이나스)는 ‘그 안에 거하는 자’라는 뜻이다(KJV, NASB, NIV). 복음 진리를 믿고 그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고 실천하는 자이다. 즉 참 신앙은 순종의 행위를 동반한다. 로마서에서 믿음을 많이 강조한 바울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가 죄 가운데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강조해서 말했다(롬 6:1-2, 15).
또 말씀을 실천하는 자는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을 것이다. 성도가 범죄하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이지만(히 12장), 그가 의와 선을 행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아 평안과 형통을 누릴 것이다. 신명기 28장에 계시된 복의 약속은 언제나 동일하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에 약속된 복이다. 그것은 건강의 복, 자녀의 복, 재물의 복, 평안의 복, 존귀의 복, 승리의 복 등을 포함한다.
[26절]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야고보는 경건과 행위의 관계를 강조한다. 사람이 스스로 경건하고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혀를 통제하지 않아서 조심스런 말을 하지 않고 선한 말, 덕스러운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그의 경건은 헛것이다. 그가 참으로 경건하고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자신의 말부터 고쳐야 한다. 그는 서로 사랑함에 어긋나지 않는 선한 말과 덕스러운 말과 진실한 말을 해야 한다.
[27절]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야고보는 참 경건이 어떤 행위로 나타나야 하는 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고아와 과부에 대해 사랑으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이 환난을 당할 때 돌아보는 구제와 봉사의 일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불쌍한 교우나 이웃을 돌아볼 줄 모른다면, 또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에 불경건하고 죄악되고 음란한 유행과 풍조를 배격하지 못하고 따르고 있다면, 그 사람의 경건과 믿음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참된 경건과 참된 믿음이 아니다. 참된 경건은 선행과 거룩함으로 나타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은 성도에게 기본적이다. 우리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유함으로 받고 우리를 온전히 자유케 하는 그 복음 진리 안에 거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가 주신 새 계명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께서 주신 계명을 듣고 행치 않는 자의 경건은 헛것이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복이 있다.
셋째로, 우리는 무슨 말이든지 듣기는 속히 하는 것이 좋지만, 말하기는 더디 해야 하고 성내는 것은 더욱 더디 해야 한다. 말은 실수하기 쉽고 사람의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넷째로, 우리는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선행에 힘쓰고, 자신을 지켜 이 세상의 죄악된 풍조와 유행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은 돈을 사랑하고 음란하다. 우리는 그런 악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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