瑞興金氏 연원(淵源)과 계보(系譜)
고문(顧問) 김판영(金判永)
서흥김씨(瑞興金氏)의 시조(始祖)는 고려중기 19대왕 명종대(明宗代)의 명장(名將) 휘(諱) 보(寶) 이시다. 보공(寶公)은 신라시대의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34세손(世孫)이오 경순대왕(敬順大王)의 넷째아들(第4子)이신 보국대안평장사(輔國大安君平章事) 휘 은열(殷說)의 5세손(世孫)이시다.
보공(寶公)은 그 부친 휘 세우공(世羽公)의 장자(長子)로서 1183年(명종13年)에 탄생하셨으며 일찍이 무과(武科)에 급제하시고 32세 나이에 관직이 금오위정용중랑장(金吾衛精勇中郞將)에 이르시니 무장(武將)으로서의 명성이 높았던 분이시며 그의 주자(胄子) 휘 덕인(德仁)도 부친보다 이른 연세에 무과에 등제(登第)하여 관직이 좌우위정용장군(左右衛精勇將軍)에 오르셨다.
서흥김씨가 득관(得貫)하게 된 것은 시조(始祖) 보공(寶公)의 주손(胄孫) 휘(諱) 천록(天祿)에 이르러서이다. 천록공(天祿公)은 고려代의 대표적 명장(名將)으로서 1270년(원종11년) 「삼별초(三別抄)의 난」이 일어나자 김방경(金方慶)장군과 더불어 출정, 난평정에 훈공을 세우는가하면 충렬왕(忠烈王) 6년(1280년) 려원연합군(麗元聯合軍)이 일본정벌을 할 때 대공을 세움으로써 본국에서는 광정대부첨의시랑찬성사상장군판판도사사(匡靖大夫都僉議侍郞贊成事上將軍判版圖司事)를, 또 원조(元朝)에서도 충현지위관군총파(忠顯枝尉管軍揔把)라는 대작(大爵)을 내렸다.
이로 인하여 고려조에서는 천록공(天祿公)에게 서흥군(瑞興君)이라는 봉작(封爵)을 내렸는데 천록공(天祿公)은 자신이 시조(始祖)가 되심을 송구히 여겨 조부(祖父)이신 보공(寶公)을 시조(始祖)로 모시게 되었으니 이로부터 오족(吾族)은 관향(貫鄕)을 「서흥(瑞興)」으로 쓰게 되었다.
서흥군(瑞興君) 천록공(天祿公)의 주자(胄子) 휘(諱) 세구(世丘)는 봉익대부판도판서(奉翊大夫判圖判書)요, 주손(胄孫) 휘 봉환(鳳還)은 복주판리(福州判吏)로서 선정을 베풂으로서 복주읍호(福州邑號)를 안동부(安東府)로 개칭, 승격케 한 계기를 만드셨고 관직은 정순대부성균관대사성(正順大夫成均館大司成), 안동대도호부안집사(安東大都護府安集使)에 오르셨으며, 주증손(胄曾孫) 휘 선보(善保)는 공민왕대에서 문과에 급제, 봉순대부판서운관사(奉順大夫判書雲觀事)를 지내셨다.
시조(始祖) 보공(寶公)에서 6세손(世孫) 선보공(善保公)까지의 제위(諸位)는 고려조 사환(仕宦)을 하신 분들이며 선보공(善保公)은 3형제분을 두셨으니 휘(諱)가 각각 중건(中乾), 중곤(中坤), 중인(中寅)이시며 모두가 조선초(朝鮮初)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하시어 사환에 나아가시니 이로부터 자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오종(吾宗)은 비로소 분파(分派)를 하기에 이르렀다.
장자(長子)이신 중건공(中乾公) 휘 인재(仁齋)는 조선조 태조대(太祖代)에서 문과에 급제(及第), 세종대(世宗代)까지의 4代를 섬기면서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 삼도도사(三道都事),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와 형조판서(刑曹判書), 예조판서(禮曹判書)등 내외요직을 두루 거치시면서 청백리(淸白吏)로도 그 명성이 일세(一世)에 높았다.
이 분이 경기파(京畿派 - 혹은 판서공파判書公派라고도 함)의 중 조(中 祖)이시다. 차자(次子) 중곤공(中坤公 號 의재義齋)은 중건공(中乾公)과 함께 태조대(太祖代)에 문과급제(文科及第_, 이후 세종(世宗)까지의 4代에 걸쳐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시고 통정대부예조참의(通政大夫禮曹參議)에 오르셨는데 퇴관후 서울에서 경북의 현풍(玄風)으로 이사(移徙)를 하심으로써 영남파(嶺南派)의 중조(中祖)가 되셨다. 3자(三子) 중인공(中寅公 號 예재禮齋)은 태종대에(太宗代)에 문과급제후 관직이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에 오르셨는데 이 분이 초계파(草溪派)의 중조(中祖)이시다.
다시 경기파 중조(中祖)이신 중건공(中乾公)이 형제분을 두시니 장자(長子) 휘 계술(啓述) 생원봉훈랑(生員奉訓郞), 차자(次子) 휘 순손(順遜) 참의공(參議公)은 경기파를 계대(繼代)하셨으나 3자(三子) 삼원(三原) 예조좌랑(禮曹佐郞)은 평안도 숙천(肅川) 지방을 중심으로 분산 거주하게 되었으니 소위 숙천파(肅川派)라 한다.
영남파(嶺南派) 중조(中祖)이신 중곤공(中坤公)의 자(子) 휘 소형(小亨) 세종대봉훈랑의영고사(世宗代奉訓郞義盈庫使) 휘 유(紐), 휘 총(總), 휘 진(縉) 삼형제분을 두시니 장자(長子) 유공[紐公-세조대 무과등제,어모장군행충좌위사용(禦侮將軍行忠佐衛司勇)]은 영남파(嶺南派)를 계대(繼代)하시고 차자(次子) 총공[總公-무과급제 충찬위어모장군용호위부호군(忠贊衛禦侮將軍龍護衛副護軍)]은 호남파(湖南派)의 중조(中祖)가 되셨다.
이상 서흥김씨(瑞興金氏) 분파상황(分派狀況)을 개괄하면 시조(始祖) 보공(寶公)이후 7세대(대체로 서기15세기초)에 이르러 종세(宗勢)가 확장되어 일차로 경기 숙천(京畿, 肅川) 8세대, 영남초계(嶺南草溪)의 4개파로 분파(分派)되고, 그후 9세대에 이르러 영남파(嶺南派)에서 다시 호남(湖南), 해남(海南) 2개파가 새로 분파되어 총6개파를 형성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전국각지에 반거(盤據)하면서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 가문을 빛내고 국가에 충성하는 많은 현조(賢祖)들을 배출했다. 그중에서도 시조(始祖)의 10세손(世孫) 휘(諱) 굉필(宏弼)은 성리학(性理學)과 실천도학(實踐道學)으로 2세(世)에 우뚝솟은 거유(巨儒)이시다.
공(公)의 호(號)는 한훤당(寒暄堂), 시호(諡號)는 문경공(文敬公)이시니 시조(始祖) 보공(寶公)의 10세손(世孫)으로 단종(端宗)3년에 서울 정동사저(貞洞私邸)에서 탄생하시어 당대의 사림파(士林派) 거유(巨儒) 점필재(岾畢齋) 김종직(金宗直)선생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 특히 소학(小學)연구에 심취(心醉)하시어 순천리(順天理) 정인륜(正人倫)의 대도(大道)를 궁리실천(窮理實踐)함으로써 마침내 동방도학(東方道學)의 비조(鼻祖)가 되시고 유림간(儒林間)에서 선생으로 추앙(追仰)을 받기에 이르러셨다.
그러나 불행히도 형조좌랑(刑曹佐郞)으로 봉직(奉職)하시던 45세시 무오사화(戊午士禍, 연산군4년)에 연계(連繫)되어 평안도 희천(熙川)으로 부처(付處)되셨다가 다시 갑자사화(甲子士禍, 연산군10년)시에 전라도 순천(順天)으로 이배(移配)되시어 극형(極刑)을 당하시니 선생나이 51세(1104년)이셨다.
그러나 중종반정(中宗反正)후 동왕2년에 신원(伸寃)됨과 동시에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우의정겸연경연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라는 증직(贈職)까지 내려졌으며, 다시 선조(宣祖) 8년에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라는 증직(贈職)이 추가됨과 아울러 「문경(文敬)」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그후 잇달은 팔도 유생(儒生)들의 상소(上疏)로 드디어 광해군(光海君) 2년(1610)에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퇴계 이 황(退溪 李滉) 제현(諸賢)과 함께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시니 오현(五賢)의 수현(首賢)으로 불리기도 하며 문묘내에서는 조선조14현(朝鮮朝14賢)의 首位에 계신다. 이로써 오종(吾宗)은 선정(先正)의 후예(後裔)라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
선생의 문하에서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 사재 김정국(思齋 金正國), 탄수 이연경(灘叟李延慶), 원정 최수성(猿亭 崔壽城), 신당 정붕(新堂 鄭鵬), 서봉 유우(西峯 柳藕), 자암 김구(自庵 金絿), 돈옹 성세창(遯翁成世昌)등 뛰어난 재자(才子)가 배출되니 모두가 혹은 도학(道學)으로 혹은 문장(文章)으로 당대에 족적을 남긴 거유(巨儒)들이었다.
선생을 제향(祭享)하는 서원(書院)은 경북 달성군 구지면 도동의 도동서원(道東書院)을 비롯하여 전국각처 도합 14개 원(院)이 있다. 문집(文集)으로는 경현록(景賢錄), 속경현록(續景賢錄), 속보경현록(續補景賢錄)등이 전해진다.
한훤당(寒暄堂) 선생은 4형제분을 두셨으니 장자(長子) 휘 언숙(彦熟) 선무랑부장.증승의랑군자감부장(宣務郞部將.贈承義郞軍資監主簿 )은 영남장파(嶺南長派)의 피조(派祖)요. 차자(次子) 휘 언상(彦庠) 내자부직장사헌부감찰군위군수(內資部直長司憲府監察軍威郡守)은 영남중파(嶺南仲派)가 되셨으며 3자(三子) 휘 언서(彦序)는 조졸(早卒)하시고, 4자(四子) 휘 언학(彦學) 선무랑돈녕부주부(宣務郞敦寧府主簿)는 영남계파(嶺南季派) 파조(派祖)이시다.
지면관계로 상기(詳記)를 생략할 수 밖에 없었으니 조선조중기이후에도 서흥김씨(瑞興金氏) 후손들가운데에는 각파에서거유( 巨儒)와 현관(顯官) 그리고 임란(壬亂) 호란(胡亂)등 국난(國難)을 당하여 공을 세운 창의장(倡義將)등이 배출되었고 현대에서도 각분야에서 선조(先祖)의 유훈(遺訓)에 따라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가풍(家風)으로 삼아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