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임운조화(任運造化)
1. 정유년(丁酉年 1897)으로부터 조선(朝鮮) 팔도(八道)를 유력(遊歷)하시고,
경자(庚子, 檀紀 사천이백삼십삼년 1900)년에 고부 본댁으로 돌아오시어 가라사대,
이사를 하리니 준비하라 하시며 이삿짐을 챙기시니,
마을 사람들이 이삿짐을 저다주려고 모여들어 한짐씩 짊어질세,
참으로 성의를 다하는 사람은 일찍와서 짐도 매고 그중에 중요한것을 자기가 소중히 저다 주려고 잘 매서 짊어졌으나
성의없는 사람은 체면상 할 수 없이 오되 늦게오니 이미 이삿짐은 다 짊어지고 없거늘,
짊어저다줄 이삿짐이 없다고 핑계하며 섰으려니까
상제(上帝)께서 가라사대,
짐이 없는 사람은 두엄자리에 두엄이라도 퍼서 짊어지라고 명(命)하시거늘,
짊없다 떠들던 사람이 두엄을 퍼서지고 따라 가더라.
객망리(客望里)를 떠나서 말목장터(현 이평면 소재지)에 이르니,
상제(上帝)께서 가라사대, 우리 여기서 쉬어가자 하시거늘
모두 지게를 받치고 한참동안 쉰뒤에 여러사람을 향하여 가라사대,
그대들이 짊어진 대로 자기집으로 돌아가서 그 물건들을 요긴하게 쓰라하시며
나는 이길로 이사를 작파(作破)하고 가노라하시고
어디론가 떠나시니 짐을 저다주던 마을 사람들이 하는수 없이 자기집으로 짊어진 대로 돌아가더라
이때에 가볍고 허름한 물건을 골라서 지고 가던 꾀많은 자들이 말하여 가로대
같이 한짐씩 짊어졌거늘, 나는 쓸모없는 것뿐이라 후회하더다 하니라
[解]
우리들도 오늘날 짐을 지고 상제님을 따라 가는바 성의가 있고 없음이
그때(其時) 그일(其事)과 같아서 다음에 자기 찾이가 얼마나 될는지 각자 짊어진대로 찾이할 수 밖에 없으리라
2. 신축년(辛丑 1901) 유월 십육일 고부(古阜)로부터 모악산(母岳山) 대원사(大願寺)에 당도하시니,
그 절 주지는 강원도 금강산(金剛山)에 있다가 열세살에 대원사에 이르러 성장하여
이제 주지가 되어있는 오십여세의 단정한 중으로서 반갑게 맞이하더라.
상제(上帝)께서 칠성각(七星閣)을 가리키시며 가라사대
"내가 저곳에서 머무르고자 하니 그대는 허락하겠느뇨" 하시니 주지(主持)가 승락(承諾)하거늘,
이로부터 대원사(大願寺)에 계시게되어 주지 박금곡(朴錦谷)의 시봉(侍奉)이 시작되었으며
정남기(鄭南基 상제님의 처남)의 아들 정영태(鄭榮珆)가 쌀을 짊어저다 드리니라.
(永學으로부터 부채를 뺏은 사람이니라)
3. 대원사 칠성각(七星閣)에 계실세, 하루 밤에는 폭풍우가 크게 일어나서 정신차릴수 없거늘,
금곡(錦谷)이 밖을 내다뵈 칠성각 위 공중은 환한데,
칠성각(七星閣)에서 상제님의 호령소리만 크게 들리고 있을 뿐이더라.
이때에 워낙 폭풍우가 심함으로 그대로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니,
칠성각에 봉안된 진묵대사(震黙大師)의 영정(靈幀)이 마당 바닥에 떨어져있고,
칠성각 건립좌향(建立坐向)이 바뀌어 있는지라.
금곡이 깜짝 놀라 상제님께 칠성각의 방향이 바뀌어진 사실을 고하니,
그러하더냐 하시였을 따름인데 대답하시는 순간 칠성각의 좌향(坐向)이 원상대로 바로 놓여져 있더라 하니라
4. 하루는 금곡을 부르시더니 엽전 열푼을 주시면서 술을 사오라 하시거늘
사다 올리니 한참 후에 또 술을 사오라 하시거늘 이르시는데로 술을 사다 올리니 또 한참 후에 부르사 술을 사오라 하시니라
금곡이 속으로 불평하기를 유월 난방염천(暖房炎天)에 무더위를 무릎쓰고 오리(五里)가 넘는 곳까지 달려가서 술을 사다 드리는 고생을 생각하지 아니하시고 하루에도 수삼차 술 심부름을 시키신다고 생각했더니
그 다음에는 엽전 너돈(四錢)을 주시며, 술을 사오라 하시거늘
금극이 속으로 진작에 그러하실 일이지 하며 내려가 술을 사들고 오면서
이와같이 한꺼번에 사다놓고 잡수시면 오직하나 편한가 하며
바위 옆을 도는 순간에 술병을 부딪쳐 깨지니 남아있는 술이 엽전 열푼 어치밖에 아니 남았더라.
하는 수 없이 상제님께 사실대로 고하니 책망치 아니 하시니라
다음부터는 전과같이 엽전 열푼씩만 주시거늘 받아 들고 내려가며 생각하되 심부름 길이 열푼 길이로다 하고,
그후로는 하루에 여러번 심부름을 시키셔도 조금도 불평한 생각을 내지 아니하였다 하니라
5. 어느날 금곡이 가로대 이 절의 감나무는 무슨 까닭으로 싱싱하게 살아 있으면서
감 한개가 열지 않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로다 하며 스스로 군담(窘談)을 하더라.
곁에 계시던 상제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감나무는 성하면서 감이 열지 않음은 필시 괴변이 아니더냐. 모든 일에는 곡절(曲切)이 있느니라.
이는 지난날 진묵이 뒤에 있는 무량암(無量庵/水王寺)에서 공부하고 있을때
이곳을 오르내리며 밥을 얻어 먹더니
진묵이 공밥(空飯) 얻어 먹는 것을 싫어한 중들의 괄시(恝示)가 심하여 진묵의 식한(食恨)이 붙은 연고이니
도인의 괄시(恝示)로 인한 식한(食恨)이 수백년을 가는구나"하시며
"내가 명년부터는 감이 잘 열리도록 하여 주리라"하시였을 뿐인데
그 다음해 부터는 감이 넘치게 열렸다 하니라
6. 하루는 무슨 말씀끝에 우연히 금곡(錦谷)이 말하기를
"내 평생 이절에 그냥 있었으면 참으로 좋겠는데"하고 군담(窘談)을 하니
곁에 앉어계시던 상제께서 "그렇게 하여주마"하시고 승락하시는지라
금곡이 거듭하여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장수하는 것이 좋을 지니,
나는 아흔한명(九十限命)을 살았으면 하고 군담이 나오니,
또 가라사대, 그도 그렇게 하여주마. 승낙하시고
이어 가라사대, 그대가 살다가 죽을때에는 본래 가지고 있는 본병이 도저서 죽으리로다 하시더니
과연 죽을때까지 한 평생 대원사 주지로 있었으며
아흔살(九十) 먹던해에 젊어서 다친 허리에 병이 도저서 죽었다 전하니라
7. 하루는 식전에 금곡(錦谷)을 부르시더니 분부하시기를
이 길로 고부 객망리 나의 집을 다녀오라.
내 집에 당도하여 주는 대로 가지고 오는 도중에 떼어보지 말고 당일로 돌아오라 명(命)하시거늘
금곡이 아침밥도 아니 먹고 식전에 떠나며 생각하되
먼 길을 떠나는 데 여비 한푼도 아니 주시며 다녀오라 하니 참으로 답답한 양반이로다 하고
길을 재촉하며 어림잡아 십리쯤 왔으리라 생각하며 걷다보니,
문득 황소리(黃牛里) 동네를 지나려 할 즈음에 느닷없이 김대연(金大連)이 나타나더니,
대사(大師)오래간만이요 하면서 자기집으로 안내하더라.
따라가보니, 간밤에 자기의 친기(親忌 부친의 祭祀)를 모셨다 하면서 술과 밥을 가져다 주거늘,
금곡(錦谷)이 생각지도 않은 아침을 잘 대접받고 길을 나서 고부 본댁을 찾아가더라.
어느듯 객망리에 찾아들어 정부인(鄭夫人)을 뵈옵고나니 한 봉서(封書)를 주시거늘
그 봉서(封書)를 받아다가 상제님께 올렸다 하니라
8. 계묘년(癸卯年 1903)여름에 전주 김병욱(金秉旭)이 세금독리(稅金督吏)로 남원에 가서 있더라.
그때에 조정은 친로파(親露派)가 득세할 때이므로 병욱을 잡아들이라는 명(命)이 떨어지니,
이는 병욱이 전날에 친일파(親日派) 박영효(朴泳孝)의 무리들과 상종(相從)하고 있었으므로,
그들과 같은 당파로 연루되어 조정에서 김병욱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져
한양으로부터 많은 순검대원들이 병욱을 잡으러 올세,
상제께서 미리 알으시고 남원에 행차하사 병욱을 데리고
남원성(南原城)밖으로 나와 가죽신을 벗기고 짚신을 신게하신후, 앞서 걸으시니 병욱은 따를 뿐이더라
어느덧 병욱의 선산 밑에 이르러 쉬시며 가라사대
그대의 선산으로 가는 길이라 하더니 선산은 어디쯤이뇨?
대답하여 가로대, 저곳이로소이다 하고 병욱이 자기의 선산임을 알려드리니,
물으시기를 그대의 선산의 혈명은 무엇이라하느뇨?
와우혈(臥牛穴)이라 하나이다 하고 아뢰니 (원문에 臥牛形으로 나온다.)
가라사대, 와우형(臥牛穴)일진데 반드시 소(牛)의 울음소리가 나야하리라 하시며 쉬시더라
이때에 산 밑에서 소 우는 소리가 들리거늘 병욱이 가로대, 저 밑에서 소우는 소리가 들리나이다 하고 아뢰니
가라사대, 먼 데서 우는 소리는 소용이 없느니라 하시고 계시더니
한참 후에 한 사람이 소를 몰고 병욱의 선산 밑을 지나가더라
이때에 문득 큰 소리로 소가 울거늘 가라사대, 이제 혈음(穴陰)이 동(動)함이로다 하시며
병욱(秉旭)을 거느리고 재실(祭室)로 들어가시니라.
9. 계묘년(癸卯年/1903년)에 친제(親弟) 영학(永學)이 구릿골에 와서 문후(問候)를 드리며 가로대
소제(小弟)도 도술(道術)을 통하도록 하여주소서 하며
또 전과 같이 소원(所願)하니,
상제께서 부득하여 부채에다 학(鶴) 한쌍을 그려서 영학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 부채를 부치면서 칠성경을 읽되
칠성여래(七星如來) 대제군(大帝君)으로부터 시작하여 무곡파군(武曲派君)까지만 읽고
이어서 대학(大學)을 읽으면 도술(道術)을 통하리라 하시니라.
영학(永學)이 부채를 가지고 귀가하다가 김제군 초처면(草處面) 내주평(內住坪) 사돈댁(정남기의 집)을 찾아가니,
정남기의 아들이 부채를 보고 탐내어 보여달라 하거늘,
영학이 주었더니 가지고 돌려주지 앉는지라.
부채를 얻은 사연을 말하며 돌려달라 하되 종시 주지 않으니,
할수 없이 부채를 빼앗기고 그 길로 집에 돌아가 여러가지 술서를 읽고 있더라
10. 갑진년(甲辰年 1904) 2월에 칠보(七寶) 굴치(屈峙)에 계실세,
영학(永學)에게 기별하여 "대학(大學)을 읽으라"명하셨으나 종시 듣지 아니하고
황주죽루기(黃州竹樓記)와 엄자능묘기(嚴子陵廟記)를 읽는다 하거늘 들으시고
탄식하여 가라사대, 영학을 미구(未久)에 못 보게되리로다. 하시며
이르시기를, 죽루기(竹樓記)란 죽는다는 말이니 대죽(竹)을 바꾸면 죽을(死)대란 말이며,
묘기(廟記)라 하는것은 죽은 자를 위한 묘당(廟堂)의 글이 아니더냐 하시고,
글을 써서 이도삼에게 전하라 하시니
,그 글에 가로대
骨暴砂場纏有草(골병사장전유초)하고
魂返故國弔無親(혼반고국조무친)이라 하였더라
영학(永學)은 이글을 보고도 깨치지 못하고 있더니, 곧 병들어 위중하다 전하거늘,
본댁으로 돌아오시어 영학의 입에다 엄지손가락을 대시고 가라사대,
내가 이 손가락을 떼면 곧 죽으리라 그러니 너는 마음에 있는바를 다 털어 말하라 하시니
영학(永學)이 정신을 차려 양친께 유언하거늘 인하여 엄지손가락을 떼시니 명(命)이 지더라 하니라
[註1] 황주죽루기(黃州竹樓記)
송(宋)나라때에 왕우이(王禹儞)가 황주(黃州)에 누락(樓閣)을 짓고
대나무로 지붕을 이어서 죽루(竹樓)라 이름 하니라.
[註2] 엄자능묘기(嚴子陵廟記)
(생략)
11. 어느날 상제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은혜에 감사하여
자기 부녀(婦女)에게 인절미(引絶味) 떡을 준비해 놓고 상제님을 모시고 대접하려 하니
그 사람과 같이 그의 집으로 가시어 토방밑에 서시더니 가라사대
나에게 인절미를 대접하려면 해놓은 그대로 다 들어다 이 앞에 놓으라 하시거를
주부(主婦)가 그 말씀을 듣고 함지에 담은 인절미떡을 전부 가져다 토방(土房)에 놓아 드리니
이때에 상제께서 두손으로 인절미를 들어 어깨에 넘겨 허공으로 연신 던지시니,
주인이 깜짝 놀래어 마당을 뛰놀며 허공으로부터 떨어지는 인절미를 받으려고 하드라
그러나 땅바닥에 떨어지는 인절미는 하나도 없으므로 한참을 헤메다가 멍하니 서서 구경만 할뿐이더라.
이와같이 한참 동안 인절미를 주서 던지시니,
한 함지의 인절미가 허공으로 다 날아갔드라.
주인을 돌아보시며 가라사대,
너희 인절미를 참으로 잘 대접받았노라 칭찬하신후 돌아서 가시드라고 전하니
후인들은 이 공사의 뜻을 모르드라
12. 갑진년(甲辰年 1904) 8월 상제께서 익산군 만중리(萬中里) 황사성(黃士成)의 집에 이르시니
어떠한 사람이 노기(怒氣)를 띠고 있다가 문을 홱 닫고 밖으로 나가더라.
문을 세게 닫는 바람에 벽이 무너지니, 이 광경을 보시고 형렬을 데리고 정춘심(鄭春心)의 집으로 가시어 계시더라.
그날밤에 황사성 부자가 정춘심의 집으로 상제님을 찾아와 뵈옵고 아뢰어 가로대,
오늘 낮에 젊은 사람은 전주 용진면 용바위 황참봉(黃參奉)의 자제로서 전날에 황참봉에게 빚을 졌더니,
황참봉은 죽고 그 아들이 빚 갚기를 독촉하며 만약 갚지 않으면,
경무청에 고소하여 옥에다 넣고 받으리라하니 이를 어이 하면 좋으리까
이 화액을 면할 길이 없아옵니다 하고 끌러주시기를 애걸하니,
가라사대 벽이 무너짐은 이 일이 풀릴 징조니라 하시며
여러 법을 쓰시어 황사성(黃士成)의 관액(官厄)을 풀어 주시니라
13. 안필성(安弼成)이 동학(東學) 혁명군(革命軍)을 따라 청주(淸州)까지 출전하였더니,(정정, 원문에 安弼性으로 나온다)
동학군이 패전하여 죽음의 위기에서 형렬과 헤매다가 다행히 상제님의 구출을 받아 전주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심으로
이로부터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패망한 동학은 뜻이 없고 야소교(耶蘇敎 예수교)를 따르더라
그리하여 야소교 권사로 있으면서 야소를 독신(篤信)할세
상제(上帝)께서 항상 가라사대, 그대가 신봉하는 야소를 버리고 나를 따르라.
그러면 그대는 천수(天壽)를 다 누리지 못할지언정,
그대의 후손들은 자자손손이 영화를 누릴 것이니라.
만약 그렇지 않고 계속 야소(耶蘇)를 신봉하면 그대는 백수(百壽 91세부터 백수라함)를 누릴것이나
그대의 후예들은 미미(微微)하며 손자에 이르러 참혹(慘酷)함이 겹치리라 하시더라.
안필성은 생전에 세 아들의 손(孫)이 모두 비명으로가 가문에 참화가 미치니,
필성이 탄식하여 가로대 내가 증산 생전에 그분 말씀을 듣지 아니함이
오늘의 가환(家患)의 근본이 되었음이로다.
이에 이르러 무엇을 원망하리요하며 탄식부지(歎息不止)하더라 전하니라
14. 어느해 봄 식전에 안필성(安弼成)이 씨나락을 오장치에 담아서 짊어지고
구릿골 앞들(現 금평저수지)로 나가는데 상나무쟁이(現 銅谷입구) 주막거리에 이르니,
상제께서 홀로 주막에 앉아 약주를 잡수시다가 안필성을 보시고 부르시거늘,
필성이 대답하여 가로대 씨나락을 뿌리려고 바뻐서 못 들어 가나이다하며
지나치려 하니 친히 나오시어 길을 막아 서시며 가라사대
나와 더부러 술한잔 하자는데 하시니 필성이 가로대
해뜨면 바람이 일것이라. 그러면 씨나락을 고루 뿌리기 어려우므로
해뜨기 전에 뿌리려하니 다음에나 술을 주사이다 하고 사양하니
지겟다리를 잡고 이리 들어오게 하시며 당기시니,
지게가 뒤집히면서 씨나락 오장치가 땅에 나동그라져
찰볍씨 메볍씨가 뒤범벅이 되어 흩어지니라.
그래도 손목을 잡고 끌어들여 주막에서 술을 강권하시니,
개고기 안주로 대취하도록 마시고 해질 무렵에 씨나락 오장치를 버려둔체 주막을 나서며
안필성이 가로대 금년 농사는 이제 다 지였다 하니 들으시고
가라사대 염려마라. 씨나락은 내가 진즉에 논에다 뿌려 놓았느니라 하시더라
안필성이 다음날 새벽에 잠이 깨여 생각해보니 참으로 낭패로다 생각하고
어찌할바를 몰라하며 주막거리를 나가보니,
오장치도 없고 지게도 없으며 길바닥에 엎질러진 나락씨도 한알 없으므로
하릴없이 모자리판으로 가보니 씨나락이 뿌려져 있는데
그 간격이 일정하여 자기는 그와같이 고르게 뿌릴수 없겠더라.
그제서야 한숨을 쉬고 돌아오며 생각하니,
큰 오장치에는 메나락씨를 담았고 작은 오장치에는 차나락씨를 담았는데,
섞어서 뿌렸을터이니 금년은 찹쌀이 섞인 밥을 먹겠구나 하며 술마신 일을 후회하더라
그러나 그해 가을 나락이 익을 때 보니 검정 차나락(속칭 돼지차나락)만 논한 귀퉁이에 심어져 있더라
필성이 뒷날 여러 사람들에게 가로대,
흘린듯하여 그해 일년 동안을 그 쌀로 찧은 밥을 먹으며 생각해 보면
내가 과연 쌀밥을 먹는것인가,
모래를 먹으면서 증산에게 홀려있나 하고 생각한 때가 많았다고 이르더라
15. 어느해 여름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안필성이 방문을 열어놓고 밖에 내리는 비를 보고 무료히 앉았는데
뜻밖에도 상제께서 억수같은 비를 맞으시며 들어오시니 그 모습이 흡사 물에 빠졌다 나온것 같더라
안필성이 깜짝 놀라 일어서며 가로대,
우장도 없이 폭우를 불구하고 오시니 무슨 급한 일이 있으시니까?
속히 방으로 드소서하며 맞으니 상제께서 방에 드시어 도포를 벗으시는데
도포에 물 한방울도 젖지 않으셨더라.
마당으로부터 들어 오실때 물이 줄줄 흐르던 옷에 물 한방울 없음을 보고 더욱 유심히 살피나
의관이 깨끗하여 비맞은 흔적도 없으시더라 전하니라
16. 어느날 안필성이 함열(咸悅) 밑 함라(咸羅)에 사는 김참봉(金參奉)을 방문하고 집으로 오다가
금구(金溝)에 이르러 주막에서 술 한잔을 마시고 쉬어서 집에와 보니
담배 쌈지와 담뱃대를 깜박 잊고 주막에다 두고 왔거늘,
하는 수 없이 담배를 피우지 못하고 앉았으니 이십리 밖에 두고 온 담뱃대 생각이나서 아무 일도 못하겠더라
이때 문득 생각나기를 상제께서 평소에 필성에게 가라사대
"그대가 나를 보고 싶거나 또 일상생활에 있어서 나에게 특별히 청할 일이 있으면
웃목에 볏짚이나 백지 한장을 깔고서 청수 한 그릇 떠다 모시고
내 이름을 세번 부르며 원하는 바를 고하면 그대의 소원이 이루어지리라"하시던 생각이 떠오르거늘
필성이 그대로 청수를 모시고 고하였더니
금구 주막에 두고온 담배쌈지와 담뱃대가 문갑(文匣)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더라하니라
(안필성은 야소교인이면서 술과 담배를 하였음)
그후로는 안필성이 상제님을 뵙고 싶거나 뵈올일이 있을 때는
그와같은 방법을 간혹 사용했다고 필성 자신이 수차 말하더라.
17. 어느날 상제께서 태인(泰仁)을 행차하시는데 안필성이 동행하게 되었더라
도중에 비를 만나게 되어 걱정하니 쓰시고 가시던 삿갓을 벗어들고,
허공을 향하여 세번 두르신 후 가시니 태인까지 비 한방울 맞지 않고 가시었다 하며,
그후로도 비오는 날 길을 가실때 비를 맞지 안는 이적(異蹟)을 안필성이 많이 목격(目格)했으며
또 추운날 상제님을 모시고 동행하면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하니라
18. 어느해 봄에 안필성이 구릿골 논에서 논일을 하고 있는데 상제께서 임어하사 가라사대,
그대는 피곤하지 아니하냐 논일은 나중에 하고
나하고 방죽에 가서 고기잡아 안주삼아 술 한잔하세 하며 권하시니
필성도 그리할 양으로 논에서 나와 방죽으로 따라가니라.
논 옆에 있는 방죽에 가시더니,
담뱃대를 방죽에 담구어 낚시삼아 고기를 낚어 내시는데
담뱃대를 방죽에 담그었다 드시면 고기가 물려 나오고
또 방죽에 담그었다 드시면 고기가 물려 나오고 하여
그 고기로 안주해 술을 잡수셨다 하며 그 후에도 그와같은 이적을 많이 보여 주시었으며
또는 담뱃대로 날피리를 낚어서 도로 물 속에 놓아 주시는 적도 많이 목격했다하니라
19. 또 어느날은 상나무쟁이 술집에서 술을 잡수시고,
필성과 담소하시다가 멍석위에 누우시며 가라사대
내가 지금 물위에 누워 있노라. 저기 나무가지까지 물이 찰것이며,이 물에 배도 뜨리라 하시더니
과연 그곳에 금평저수지를 막으니 말씀하신지
오십오년되는 임인년(단군기원 사천이백구십오년 1962년)동짓달에 완공하여
그 나무가지가 물이 출렁일때 마다 달듯 말듯하고 누워 계시던 주막마당은 완전히 물 속으로 침수되고 마니
이를 본 뒷 사람들이 말하기를,
참으로 신기한 일이로다.
어찌하면 물차는 지점까지 알 수 있으리요 하며 감탄부지(感歎不止)하더라
20. 어느해 여름에 상제께서 안필성 가에 임어하사 술을 잡수시다가 가라사대,
날씨가 가무니 해갈(解渴)이나 시키고 쌍 무지개나 구경시켜줄까하고 물으시거늘
필성이 대답하여 가로대 그리만 할 수 있다면 오직이나 좋으리까 하고 아뢰니
그렇다면 냉수 한 그릇을 떠오라 이르시거늘,
이르시는 대로 대령하니 상제께서 어지(御旨 손가락)에 물을 찍어 가지고 주문을 외우시며
공중을 향해 퉁기시기를 세번하시니
맑던 하늘에 먹구름이 덮이면서 소낙비가 쏟아져
순식간에 빗물이 마당을 미처 빠져 나가지 못할 정도로 내리어
저 멀리 냇물 소리가 요란하거늘 이만하면,
하시면서 손을 들어 극락산(極樂山)쪽으로 휘 젓으시니
일시에 소낙비가 변하여 보슬비로 내리며,
극락산으로부터 용방골(龍房谷) 골짜기에 꽂쳐서 쌍무지개(雙虹)가 황홀하게 떠있어 그를 구경했다 하니라
21. 어느날은 안필성이 생각하기를 항상 술을 많이 얻어 먹었으니,
상제님을 만나면 이번에는 내가 술을 대접하리라 하고 생각했더니,
느닷없이 만나지거늘 필성이 가로대
오늘은 내가 술을 대접하리니 팟정(太亭)이 주막으로 가사이다 하고 아뢰니
가라사대 그대가 술을 사겠다면 안주는 내가 작만해야 하리라 하시며
장대에 새끼를 매시더니 못을 뽑아 새끼에 매달고 논으로 가시여 논 물코에다 못을 담그시더라
조금후에 장대를 채시며 "었따 이놈 크다"하시기에 필성이 바라보니 큰 붕어가 물렸거늘
필성이 받아 뀜을 만들려고 뀜꽂이를 찾아 다니면서 보아하니,
못 끝을 논물에 담그고 잠시만 있다 장대를 들면 큰 붕어가 물려 나오고
또 못(釘)을 물에 잠시 담그었다 장대를 채치면 붕어가 물려 나오고 하여 연신 고기를 낚아 내시며
필성에게 가라사대 "낚음 보다 뀌임이 더디더냐" 하시였다 하니라
이리하여 필성이 술을 대접하며 붕어회를 먹어보니,
여전한 물고기 맛이로데 넌지시 물어보기를 "이것이 필시 붕어회오니까?"하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허허 네입은 고기맛도 모르더냐"하시더라 하니라
22. 필성에게 가라사대, 너는 장차 나의 제사(祭祀)를 받아 먹으리라 하시였다 하며
필성은 치성에 와서 주효를 대접받을때 항상 말하여 가로대,
증산이 나를 보고 내 제사를 받아 먹으리라 했으나
그때는 건성으로 들었을뿐이더니, 이와같이 여합부절(如合符節)할 줄이야 누가 짐작했으리요.
진실로 증산은 만고(萬古)에 드문 신인(神人)이라
내가 우둔하여 옆에다 천신(天神)을 두고 그때는 신기하다 생각했을뿐
다른 생각없이 지냈으나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참으로 나는 박복한 사람이니라.
그대들은 복인(福人)이니 잘 믿으라하며 교인(敎人等)들의 신심(信心)을 독려했다하니라
23. 안필성은 상제님 재세시(在世時)에 시봉한 일이 없고
종도가 아니로되 멀리 하지 않으시고 항상 친구와 같이 대하시며
만나면 농담을 하시고 지내시니 필성이 경오생(庚午生)으로서 한살 위더라
농하실때 간혹 이르시기를
나하고 혜어진 후 오십년만에 만나세 하시였으니,
이제 증산께서 오십년 만에 오시리라 하더니
50년되던 신축년(辛丑年 단군기원 사천이백구십사년, 1961)음력 정월에 안필성이 사망하니라
24. 갑진년(甲辰年 1904)에 김덕찬(金德贊)이 전주에서 장보기를 해 가지고 돌아올세,
용머리고개에 이르니 주막에 상제께서 계시는지라.
반갑게 인사를 올리니 "무슨 일로 왔느뇨?"하시고 물으시거늘
"선모(先母)의 면례(緬禮)를 하려고 장보기를 해 가자고 오는 길이올시다" 하고 고하니,
가라사대,"그대의 선모(先母)의 면례 계획은 폐기되리라.
선천에는 백골을 묻어서 장사(葬死)했으나
후천에는 불매백골이장지(不埋白骨而葬地)니라 하시더라.
덕찬이 난처해 하며 집으로 돌아와서 예정대로 면례를 행할세,
지사(地師)가 점혈(點穴)한 곳을 파니, 뜻밖에 큰 개미집이 나오거늘
다른 곳을 점혈하여 파니 또 큰 개미집이더라
비로소 용머리 고개에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
하릴없이 면례를 작파(作破)하고 초빈 하였다 전하니라
25. 을사년(乙巳年 1905) 4월에 전주 용머리 고개(龍頭峙)에서 공사를 보실세,
일진회원(一進會員)과 아전(衙前)들이 서로 다툼에 일촉즉발이거늘,
돈 엿냥으로 행인에게 술을 사주시면서 종이에 글을 써서,
문고리와 문돌쩌귀에 연결하시어 일진회(一進會)와 아전(衙前)간에 화해되였으나
그후로도 관부(官府)에서는 계속하여 일진회원을 검속(檢束)하는바
어느날은 일진회원 한사람이 순검에게 쫒겨서 상제님계시는 주막으로 숨어들거늘,
그를 보시고 가라사대
그대들이 이같이 고난을 겪으며 하릴없는 지경에 빠저드니 무슨 죄가 있음이더냐
일진회원이 대답하여 가로대, 저희들이 무슨 죄가 있으리까, 아무 죄도 없나이다
그말을 들으시고 불상히 여기시어 가라사대,
그렇다면 내가 그대들을 위하여 관부의 검속을 면하게 하여 주리라 하셨을 따름이요
특별한 법을 쓰신바 없으나 그후로는 순검들이 일진회원을 보아도 검속하지 않고 놓아두니라
26. 병오년(丙午年 1906) 2월에 상제께서 종도들을 데리고 서울에 가시어 여러날 계시며 공사를 보실세,
관헌들이 장안(長安)을 탐색하더니,
하루는 상제계시는 여숙(旅宿)에 관헌(官憲)이 이르러 조사를 할세 이때에 관헌들의 태도가 매우 불손하더라
상제께서 종도들을 가리키시며 가라사대
저 사람들과 한양 구경 왔노라 하시며 관헌들에게 술을 사주시고
그들에게 훈계하여 가라사대
그대들도 조선사람이요, 나도 조선사람이니 우리는 동근(同根)이라.
하등의 혐의가 있으리요"하시니 그들이 수긍하여 두말않고 돌아가더라
장안에 여러날 계시니 비용이 적지않은지라.
종도들이 속으로 걱정을 하거늘, 미리 알으시고 상제께서 종도들을 불러 가라사대,
그대들이 여비가 부족함을 걱정하느뇨.
내 좋은 계책을 세우리라 하시며
오의관(吳議官)의 시료(施療)를 베푸시니 오의관이 천냥 폐백을 받쳐 비용이 넉넉하더라
[註]
의관(議官): 이조 고종때 새로 만든 중추원(中樞院)의 벼슬
27. 정미년(丁未年 1907) 초가을에 모든 종도들이 모여서 술을 대접할세,
가라사대, 앉은 순서대로 시조를 부르라 하시니 차례대로 부르더라
이때에 시조를 못하는 사람은 막노래도 부르며 순서가 돌아가던바 안내성은
태인 대각교(大覺橋)에서 뵈옵고 시봉을 시작한 후로 지금까지
방에 들라는 명이 계시지 않으므로 공사에 참여치 못하고 밖에만 있더니
그 날은 안내성(安乃成)을 처음으로 방에 들어 앉히시므로 내성은 황공히 앉았더라
급기야 안내성의 차례가 되어 전에 듣고 배워둔 임천가(林泉歌)를 하였더니 들으시고 가라사대
내성은 촉석루를 언제 다녀왔느뇨"하시니
내성은 깜짝놀라 속으로 생각하기를 '진실로 선생께서는 신인이시로다.
내가 왕년에 촉석루에서 이 노래를 배운줄 어찌 알 수 있으리요'하고 탄식 했다하더라.
이 때에 박공우는 종도들의 시조 솜씨를 들어보니,
모두가 시조 한가락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고
경석 형렬 광찬등이 평시조를 흉내낼 따름이요,
그외는 막노래도 제대로 못 부르니,속으로 생각하기를 옳지 참으로 좋은 기회로다.
내가 본래에 문자를 배우지 못한고로
무식하여 중인(衆人)의 이목을 끌지 못하므로 항상 열등을 면할 바 없더니
오늘은 내 시조로써 방중(房中)의 이목을 집중하여 앞으로 동료들간에 월등함을 인증받고
또한 상제께서도 내 시조 솜씨를 들어보시면 앞으로는 대우가 다르리라 하며
고대(苦待)하여 차례를 기다리더라.
순서대로 시조(時調)를 불러 급기야 공우의 옆 사람의 시조가 끝나고 공우가 시조를 부르려할때
상제께서 "고만"하고 어수(御手)를 드시어
공우의 시조를 막으시며 가라사대
공우의 시조야 들어 보나마나 잘 하니까 하시고 시조 부르던 일을 그치게 하시었다하니라
그후 종도들이 말하기를 시조를 부르게 하신 깊은 뜻을 모르겠으나,
다만 알수 있는 바는 시조를 못하는 사람은 부르게 하시고
잘하는 사람은 못 부르게 하시니, 이는 우열을 고루시는(均調)법인 듯 하다고 이르더라
<참고자료> 임천가(林泉歌) | |
임천(林泉)은 초당(草堂) 삼고 만고일월(萬古日月)을 곁에 두고 금주(金主)야 술 부어라 거문고 비파(琵琶) 양금에 새 줄을 골라 남풍가(南風歌)로 화답(和答)할 때 만고강산(萬古江山)이 모두 지상선(地上仙)이로구나. 임 잃고 임 생각할 제 밤마다 꿈 몽(夢)자요 생각 념(念)자 탄식 탄(嘆)자 하니 어깨 너머 눈물 루(淚)자 우리도 언제나 정든 님 만나서 웃음 소(笑)자 즐거울 락(樂)자로 세월을 보낼거나. 바람 불고 비 오실 줄 알면 학창의(鶴氅衣) 지어 줄에다 걸까 임이 정녕 오실 줄 알면 문을 걸고 잠을 잘까 차후로 임 오신다는 소식이 풍월에 일러 들리거든 유문장등(留門長燈)하고 자리 보존하고 저 달이 떳다 지도록 기다리소. | 萬里歸來只一身(만리귀래지일신) 西風吹拂素衣塵(서풍취불소의진) 林泉却是憐收我(임천각시련수아) 金馬元非解送人(금마원비해송인) 露稻登場輕杵玉(로도등장경저옥) 霜鱗入網細分銀(상린입망세분은) 縱然年少譏長大(종연년소기장대) 猶向滄州作逸民(유향창주작일민) |
28. 구릿골 감자현의 집에 계실세 자현에게 가라사대
내가 고부 문공신의 집에서 수일간 대접을 받았으니
문공신을 네 집에 청하여 잘 대접하도록 함이 옳으리라 하시니
자현은 그리 하겠나이다 하고 대답을 올린 후 실행치 못했더라
그러던 차에 어느날 자현에게 가라사대
내가 전날에 너에게 공신을 대접하라 하였거늘 어찌하여 실행치 아니하였느뇨.
이후로는 공신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대접하려 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하신더니
과연 그후로는 종시 못만났다 하니라
29. 어느날 종도들과 더불어 행단(杏檀)에 이르사 가라사대,
운암강 물줄을 돌려 김만경 하류에까지 여한 없이 하리니,
이 물이 대한불갈(大旱不渴)이라 하시고 앞산을 가리키시며 저곳에 콧구멍이 둘이로다.
후일에 저 콧구멍으로부터 물이 나와 불을 쓰게 되리라 하시고
종이에 무엇을 그리시어 불사르시더라 하니라.
뒷날에 보니 여수(麗水)로 흐르는 섬진강 물을 막아서 운암(雲巖)에다 저수(貯水)하여
행단(杏檀)앞산을 뚫어 김제 만경(金堤萬頃)으로 흘려보내며
그 물의 낙차를 이용하여 발전을 하니 이것이 칠보(七寶) 수력 발전소니라
이 칠보 발전소가 생기므로 콧구멍 두개가 뚫리듯이
산에다 굴을 뚫어서 수통(水桶) 둘을 놓아 물을 뽑아다 발전하니 흡사 콧구멍과 같은 형상이더라.
30. 무신년(戊申年/1908년) 7월달 변산에 있는 개암사에서 개벽을 잠깐 보이실세
청수 한그릇을 떠놓게 하시더니, 신원일을 무릎 꿇게 하시고
당(唐)성냔갑에서 성냥 세개비를 내어 청수 그릇에 넣으시고
손가락으로 청수를 찍어 부안(扶安) 석교(石橋)방향으로 뿌리시니,
문득 그쪽에서 검은 구름이 일어나더니 큰 비가 쏟아지고 개암사(開巖寺)에는 청명하더라
이때에 신월일을 보시고 "네 집에 다녀 오도록하라" 하시므로
원일이 명을 받고 곧 출발하여 자기집을 가보니
대홍수로 인하여 원일의 동생의 집이 쓸려가고 동생의 가솔들이 자기집에 모였음을 보고
돌아와 고하여 가로대 "참으로 천지의 재앙이 이다지도 참혹할 수 있아오리까?" 하며 슬퍼하거늘,
상제께서 가라사대
네가 개벽을 원하더니 어찌 이러하느뇨?
개벽이란 이렇듯 오히려 쉬운 바라.
천하를 물로 덮고 우리만 살아서 복될바 있으리요
濟生醫世聖人之道(제생의세성인지도)요
災民革世雄覇之術(재민혁세웅패지술)이라
천하가 웅패에게 시달려온지 오래로다.
이제 만약 청수 한동이를 떠놓고 당성냥 한갑을 청수 동이에 넣으면 이제 천하는 물바다가 되리라
내개 상생의 도로써 천하만민을 교화하여 세상을 편안케하려 하노니,
새 세상을 보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요
네 마음을 고치기가 어려운 것이라.
이제부터 마음을 잘 고치라.
대인을 공부하는 자는 항상 남 살릴 생각을 하여야 하나니,
어찌 억조창생을 멸망케하고 나 홀로 잘 되기를 도모함이 옳으리요"하시니
원일이 이로부터 두려워하여 상제께 무례한 청을 못했다 하니라
31. 대흥리에서 종도 십여인을 뒤에 세우시고 고부인(高夫人)과 앞서시어
대흥리 안통을 한바퀴 돌고나서 백지에 글을 써 불사르신 후 가라사대
지금의 이 공사는 포정공사(布政公事)니라. 하시고
포정도수(布政度數)를 부치는 법을 여러가지로 쓰신후 가라사대
훗날 두고보라. 大興하리라 하시였다 하니라
32. 어는 그믐날 임피(臨陂) 이서방(李書房)의 집에서 하룻밤 주무시게 되었더니,
그 집 주인이 들어오며 가로대, 사방이 캄캄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다. 하며
달빛이 있으면 오직이나 좋을까 하니 들으시고 가라사대
달빛이 있으면 좋겠느냐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대 참으로 좋겠나이다 하니,
그러면 달 보러 가세. 하시며 주인을 데리고 성산(聖山)에 오르시어
동쪽을 바라보라. 하시거늘 이르시는 대로 동쪽을 바라보니
과연 둥근달이 환하여 참으로 휘황찬란하더라.
이로써 정신을 잃고 달만 바라보고 있으니,이때에 상제께서 가라사대
달 보았느냐? 예 보았나이다.
항상 이와같이 밝으면 오직이나 좋겠나이까"하니 대답하지 않으시고
달 보았으면 돌아가자. 하시며 앞서가시기에 따라와 집 앞에 이르니
또 다시 캄캄절벽이 되어 암흑이더라 전하니라
33 김경학(金京學)에게 가라사대
장차 오는 세상은 태을주太乙呪)로써 사람을 많이 건지리라. 하시더니,
샹제께서 화천하신 후 종도들이 흩어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헤메다가
경학은 훌륭한 선생을 찾아서 사방으로 돌아다니다,
경술년(庚戌年 1910) 이월에 집으로 돌아오니,
자기의 노모가 급병으로 사망하여 모든 상구(喪具)를 준비하느라 경황이 없거늘,
하도 망극하여 외쳐 울며 말하기를
내가 만고에 없는 대신인을 따르다가 노모의 임종에 종신도 못하게 되었음을
내 어찌 일찍이 생각인들 했으리요. 하며 대성통곡하다가
아무런 생각없이 전에 하던 습관대로 상제께 빌기를
선생이시여, 제자의 화악을 끌러주사이다.하며
우연히 태을주를 외우게 되었더라.
염습을 해놓은 노모가 꾸물거리며 살아나거늘, 이로써 생각해보니
"태을주로 세상사람을 많이 건지리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나고
자기에게 신의(神醫)의 화권(化權)을 주심이라 생각하니,
자신이 생겨 원근의 병자(病者)를 찾아 다니며,
오직 태을주(太乙呪)로서 병을 고쳐주니 경학(京學)을 세상에서 신의(神醫)라 부르더라
34. 하루는 구릿골 약방(藥房)에서 동구(洞口)를 가리키시며 가라사대,
저곳에 물이 차서 못이 될 것이며,
내가 출세할 때에는 금산사로부터 물 찬 못사이에는 너희들이 살지 못할 것이니라 하시더니
구릿골 동구(洞口) 수리개봉 밑을 건너 막어 지금의 금평(金坪) 저수지가 되니라
이로써 미루어 볼진데,
금산사(金剛山) 밑 용화동(龍華洞) 일대는 장차 사람이 살지 못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겠더라
35. 어느날 종도들과 구릿골 어구에서 용화동(龍華洞) 을 굽어 보시며
저곳이 나의 기지(基地)라.
일후(日後)에 인성(人城)이 쌓이라나하시니,
병욱이 대답하여 가로대 너무 좁지 아니하나이까 하고 아뢰데 ,
제비산(帝妣山)을 가리키시며 가라사대, 저 산만 없애면 되지 않겠느냐 하시니
병욱이 놀래며 저와같이 큰산을 무슨수로 없애겠나이까 하고 아뢰였더라.
그것은 쉬운 일이로다하시며 가라사대,
그 때에 벽력신장(霹靂神將)을 두엇 불러서 사방에 불칼질을 하면 뒤 빠져 나오리라.
또 아뢰기를 빠진들 그 큰산을 어데로 옮길수 있으리까.
응 김만경(金萬頃) 릉제(菱提) 방죽에 옮겨 놓으면 꽉 찰 것이니라 하시였다 하니라
36. 어느날 종도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희들이 시루떡이 익는 이치를 아느냐 하시니 아무도 대답이 없거늘
가라사대 시루떡을 찔때에 짐이 시루 가상으로 부터 오르나니,
그 떡이 가상으로부터 익어 들어가 시루떡 중앙된 곳은 맨 마지막에 익은 법이라.
중앙만 다 익으면 시루의 떡 익히는 소임은 다한 바니라.
이어서 가라사대,
세상에 시루만큼 큰 그릇이 없나니 황하수 많은 물을 길어다 붓어 보아라.
아무리 길어 붓어도 시루에 물을 못 채울 것이로다.
이로써 미루서 볼진데 시루는 황하수를 다 먹었으나 오히려 차지 않으니
천하의 그릇중에 제일 큰 그릇은 시루니라 하시었다 전하니라.
37. 상제께서 아드님과 따님을 두었던 바 용자(容姿)가 뛰여나 어여쁘거늘,
유덕안(兪德安)이 사랑하며 어여쁘다 칭찬하니 들으시고 가라사대,
너무나 지나치게 사랑하지 마라. 장차 사람 노릇 못하리라 하시더니
과연 아드님은 네살에 요절하고, 따님은 열세살에 요절하였다 하니라
38. 기유년(己酉年 1909) 본댁에 오시어 계실세,
내촌(內村)을 가시었다, 쌍정리(雙亭里)를 거쳐 오시면서 나무가지를 꺾어 휘초리를 만들어 드시고
좌우로 흔들어 저으며 걸으시니 흡사 무엇을 몰고 가는 모습과 같드라.
이와같이 저으시며 영택(永澤, 石幻의 生父)의 집으로 가시어 영택을 보고 가라사대,
네가 나를 대신하여 내 집을 돌보자면 수고가 많으리라.
고목에 장차 꽃 피리라. 하시고 본댁으로 오시니 가권이 뫃이는지라,
돌아보고 가라사대 每事不待自然來라 하시였다 전하니라
39. 고부(古阜) 본댁에서 주야로 이레 동안을 도끼로 다듬잇돌을 두드리시며 가라사대,
"금강석 나오니라 금강석 나오니라" 하시며 다듬이돌을 두드리면서 공사를 보시더니
후일에 강석환을 상제님의 후계로 양자 들이게 되어
석환(石幻)의 이름과 금강석(姜石) 나오라는 공사가 如合符節하였으니
금강석(石)은 금강석(金姜石)인 까닭이요 도끼는 부(斧)니라.
그때에 도끼로 두드리시던 다듬잇돌이 지금도 전한다 하니라
40. 하루는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천지화권(天地化權)도 일유설문(一由舌門)이라 하시니
이 말씀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으니라
[譯]
천지화권(天地化權): 천지의 모든 조화권도(造化權度)도
일유설문(一由舌門): 말(言)이 출입(出入)하는 문(門)이 한(一) 혀(舌)로 좇아(由) 이루어 지느니라.
41. 상제께서 네폭의 병풍을 만드시어 종숙씨(從叔氏, 聖會)에게 주셨든바,
후일에 입계자(入繼子) 석환(石幻, 聖會氏孫)씨가 병풍이 노후(老朽)하여 새로 만들려고 해체할때,
병풍(屛風)속(裡)에서 글이 나오니 이러하니라
五家養白學(오가양백학)이요
飛去月蘆夜(비거월노야)라 하였으니
飛去月蘆夜(비거월노야)의 밤야(夜) 자(字)가 사람인(人) 변(邊)이 없으므로 무슨 글자인지 모르나
사람인(人)을 붙이면 밤야자(夜)가 됨으로 야(夜)자로 읽어보니라.
42. 안필성(安弼成)은 교인(敎人)이 아니면서도 치성때면, (원문은 安弼性으로 나온다. 대순전경에 安弼成)
반드시 성전에 이르러 헌작을 올리고 사배하니 교인들은 종도님들을 대하듯이 대접하니라
그럴때면 필성이 술을 들며 가로대,
내 본래 동학군에 종사했다가 야소교를 신봉하여 술을 먹지 못하더니,
증산님(甑山任)으로 부터 배운바라 사양하고 아니 먹으면 양손을 모아잡고 강제로 먹였으며,
한번 손을 모아쥐면 그 힘이 어디로부터 나오는지 꼼짝할 수 없었느니 하며 또 말하기를,
개고기도 증산으로부터 배웠네 그리고 증산은 한자리에서 큰 개 한마리를 다 자셨으니,
이는 사람이 먹는 것이 아니요, 아마도 신(神)이 먹는듯 하더라고 전하니라
43. 하루는 임피(臨陂) 강모의 집에 가시니 집주인이 안질(眼疾)로 고통하고 있거늘,
병자에게 물어 가라사대 어찌하여 그와같이 고통하느냐 하시니 대답하여 가로대,
안질로 수십일 고통중이온데 이와같이 계속 아플진데 未久에 논이 멀듯 하나이다 하고 아뢰니 가라사대
시키는 대로하면 낫으리라 하시거늘 낫는다면 무엇이든 하오리다.
더우기 一郡의 중책을 맡은 몸이오니 속히 낫게 하여 주시기를 소원하나이다.
가라사대
一身之中有眼目은
天地之間如日月이라 하시고
이어서 가라사대, "네 눈을 낫게 하려면 술과 닭고기를 먹어야하리라" 하시니
병자가 속으로 생각하되 '스스로 잡수시려고 그러는구나' 하며
"집에 닭도 있고 술도 있나이다" 하며 하인을 불러 '닭을 잡아 술을 올리라' 이르거늘,
가라사대 "집에 있는것은 소용없다" 하시며 "사서 먹어야 하느니라" 하시니,
병자가 고하기를 "그러하다면 사오라 이르겠나이다" 하며 하인에게 지시하거늘 가라사대,
"집을 나가서 먹어야 되리라" 하시거늘,
병자가 고하기를 "저의 안질이 극심한 데 어찌 갈수 있으리까?"하니
"사람의 부축을 받고라도 가자"하시거늘 병자가 하는 수 없어
하인의 부축을 받고 비녀의 집에 가서 닭을 잡아 주안상을 차려 드리며,
"잡수시고 속히 낫게 하여 주소서"하니 "같이 먹세"하시거늘 병자가 놀래며 고하기를
"안질에 어찌 술과 닭고기를 먹으라 하시나이까,
어서 드시옵소서"하니 "그렇다면 나도 먹지 않음세"하시며 잡수시지 않으시더라.
병자가 하는 수 없이 먹는 체 한즉 가라사대,
"배불리 먹어아"하시며 고춧가루를 가져오라 하여 닭국에 많이 타서 먹게 하시더라.
병자가 어찌할 수 없어 지시하시는 대로 먹고 집으로 돌아오니,
눈이 더욱 아퍼서 견딜 수가 없더라.
더 아프다고 고통하니 가라사대, "조용히 자라"이르시며
"내일 아침 일찍 동쪽을 향하여 해를 보라.그러면 알리로다"하시니라.
그 말씀 후에 곧 잠들어 잘 자고 다음날 이른 아침에 말씀하신 대로 동쪽을 향하야 해를 바라보니,
두 눈이 전(前)과 같이 환하고 그리고 심히 아프던 눈이 씻은듯이 낫았더라하니라
44. 어느날 정읍(井邑)으로 가실세 마을에서 어떤 사람이 나와 절하며 가로대,
저희집에 내환(內患)이 금지(今至) 사경(死境)이온데 듣자오니
신인(神人)께서 지나신다 이르기에 달려나와 무례(無禮)하게도 간청(懇請)하오니
잠깐 우거(寓居)에 드시어 병자(病者)를 살려주소서 하고 앞을 막으니 불쌍히 여기사
따라가시어 병자를 보시고서 가라사대 약지어온 것을 가져오라 하시더니
손수 약탕관에 약과 물을 붓고 봉지로 봉한 후 봉지위로 약탕관을 싸쥐시고 부채로 화로불을 부쳐 약을 달이시니
약(藥)이 끓어 손가락 사이로 뜨거운 김이 솟아오르나
조금도 뜨거워 하시는 기색이 없으시며 약을 달여서 짜주시며 병자에게 먹이라 하시니
주인이 약을 받아들고 방으로 들어간후
상제님의 어수를 보니 조금도 이상이 없었다 하며
병자(病者)는 그 약을 먹고 곧 회생(回生)했다. 하니라.
45. 하루는 김준상(金俊相)이 달려와 아내가 흉복통으로 방지사경임을 고하며 살려주기를 청하니,
상제님께서 사성음(四聖飮) 한첩을 지어 주시며 농속에 갊아두라 하시거늘
그대로 하였더니 항상 복발(復發)하던 흉복통(凶服痛)이 없어지니라.
사상음(四聖飮)을 주신지가 이십년이 지났으나 약첩(藥帖)을 펴보면
좀도 아니먹고 방금 지은 약과 같이 신선하므로 그대로 갊아두었다 하더라
46. 하루는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우리 나라가 오랫동안 중국을 보고 대국이라 칭한 연고로
중국 인종이 우리나라 사람들 보다 큰것이니라
그러나 대국위에 더 큰 특등국(特等國)이 있나니,
그는 곧 서양 나라로서 그 인종들이 세계에서 제일 크니라
그러나 앞으로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제일 가는 일등국이 될것이요
세계 일등국(一等國)의 칭호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그때는 너희들이 키가 커져 세계에서 제일 큰 인종이 될것이니라 하시였다 하니라
47. 또 어느날 종도(從徒)들에게 가라사대, 장차 이 나라가 세계의 선생국(先生國)이 되어,
너희들이 세계만방에 돌아다니며 타국 사람들을 가르치게 될것이니라.
그런데 선생국의 인종이 서양 사람들 보다 키가 적어서야 쓰겠느냐
이로써 내가 너희들의 키를 저들 보다 더 크게 하기 위하여
여섯자 여섯치로 쭉욱 늘려 뽑아서 세계에서 제일 큰 인종을 만들리라 하시였다 하니라.
48. 하루는 가라사대 천하를 가르치자면 농사 짓는 것과 같으니
가득한 잡초를 다 매 버려야 불멸(不滅)의 결실(結實)을 거둘수 있듯이
참으로 성의(誠意)를 다해서 그 이치(理致)를 말해 줌으로써
동서남북 사방이 복종(服從)하지 않을 바 없으리로다 하니라
49. 어느날은 원평(院坪)에서 공사를 행하시고
농기구 스물네 가락에 개정국을 묻혀 김제 수각(水閣)에 사는 김상국(金相國)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는 이 농기구를 가지고 가서 김제(金堤) 장에 팔아오라 하시며 그 농기구를 팔아오게 하시였다 하니라
50. 하루는 가라사대, 금산사(金山寺) 황금대맥(黃金大脈)은 천지대용맥(天地大龍脈)이니
누구든지 감히 범접(犯接)하지 못하리라 하시였다 하니라
그후 왜정(倭政) 치하(治下)에 일인(日人) 광업자 죽전(竹田)이라하는 자가
금산사 뒤의 비장골(鼻壯谷)에서 금맥(金脈)을 발견한 후
광산(鑛山)을 설치하려고 철근을 운반하여 접근하니
청천백일(淸天白日)에 뢰성도 없이 모악산(母岳山) 중간 골짜기로부터
번갯불이 내려와 광산 철근을 치니 철근 건물이 박살이 나니라.
그래도 일인(日人)은 여러달 후에 또 광산을 재건하고 작업을 계속하더니
또 어느날 번갯불이 내려쳐 광산이 박살이나 완전히 패망하여 그후로는 감히 범하는 자 없었다 전하니라
51. 하루는 종도들을 경계하여 가라사대
고량진미(膏粱珍味)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은 소채(蔬菜)의 신선한 맛을 항상 생각하게되고
도성(都城)에서 사는 사람은 한적한 전원에 돌아가 살기를 원하나니,
이는 사람들의 생활이 풍요한 물질에만 있지 않은 까닭이라 하시였다 하더니,
오늘날 시대의 현상과 사람들의 희구하는 바가 말씀과 꼭 같이 돌아가더라
52. 하루는 종도들을 거느리시고 구릿골로부터 원평(院坪)으로 내려가실세
물방앗간 모퉁이에 이르기 전에 오른편 소리개봉을 가르키시며 가라사대,
봉(峰)을 소리개봉이라 이르나 소리개봉이 아니요 수류개봉(水流開封)이니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곳을 방앗간 모퉁이라 이르나
방앗간 모퉁이가 아니요 방한간(防旱間) 모퉁이니라 하시더니
후일 그곳에다가 금평 저수지를 막음에 세상사람들이 이르기를
참으로 증산은 神人이시라.
과연 수류개봉(水流開封)이요, 방한간(防旱間)이 적실(的實)하다 하면서 찬사부지(讚辭不止)하더라
53. 구릿골에 계실세 하루는 김갑칠(金甲七)에게 명(命)하사,
낚시대에 굵은 노끈을 달으라하여 못을 매달어 드시고 갑칠에게 가라사대,
우리 고기잡으로 가자 하시며 구릿골 앞들로 나오시어 논둑에 앉으사,
논바닥에 못을 맨 낚시대를 드리우고 앉아 계시며 "어이쿠 물였구나 "하시면서
낚시대를 연신(連新)채치니 붕어가 낚이어나올세, 갑칠은 받아서 꿈지에 뀌드라
이와같이 연신 잡아내시며 가라사대 "거참 물도 좋다" 하시였다 하며
그때에 낚시를 드리우고 앉아 계시던 논까지 물에 잠기었다 전하니라
54. 하루는 대흥리(大興里)에서 공사를 마치고 구릿골로 오실세,
길을 버려두시고 논과 밭을 가리지 않으며 앞서가시니, 수행하는 종도들은 따르지 못했더라
사람들이 보고 말하기를,
논틀로 밭틀로 헤매는 꼴이 우습다고 비웃는다하니 그 말을 들으시고 가라사대,
나는 바삐 일하는데 흉보고 비웃는 자들은 한가한 자나 할 일이로다 하시니라
그 후에 신식(新式) 도로(道路)가 나니, 꼭 상제께서 걸어가신대로 길이 크게 터져
오늘날에 그 길로 왕래 하니라(이는 天下大道路 開拓公事니라)
55. 정읍(井邑) 대흥리(大興里) 새술막 술집에서 종도(從徒)들과 술을 잡수시고 계실세,
어떠한 사람들이 이르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은 상복(喪服)을 입은 상주(喪主)일러라
술을 다 잡수시고 종도들과 경석의 집으로 돌아오시니 그들도 뒤를 밟어 따라오더라.
마루에 앉아 계실세 그들이 들어오니,
앞에 앉으라고 하신 후에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계시는데,
그들이 어깨를 움직이기 시작하여 발끝을 움직이더니 마침내는 일어나 춤을 추거늘
바라보시다가 호령하여 가라사대 "상주(喪主)가 되며는 행실을 삼가하여 근신함이 옳거늘
가락이 없는 춤을 추니 어인 변괴인고" 하시며 노여워하시니,
춤추던 사람들이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는지 황급히 멈추면서 미안한듯 사과하고 돌아가더라.
이때에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저 사람들은 큰 술객들인데 나를 시험하고자 찾아왔노라" 하시고
선천 술법 걷는 공사를 보시며 이르시기를
"이로써 선천 술법의 모든 기운을 걷어 버리노라"하시었다 전하니라
56. 상제(上帝)께서 하늘(天上)의 일을 종도들에게 이르시면,
김형렬(金亨烈)이 항상 마음속으로 '한울님 뵈어지이다'하고 소원하더니
하루는 형렬에게 안경을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을 쓰고 나를 따라오라"하시거늘 형렬이 따라갈세,
문득 화려한 삼층 누각이 나타나기에 자세히 보니, 이 세상에서 이르는 바 옥경(玉京)이더라
이때에 상제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 곳에 있으라" 하시며 아래층에 남겨두고
삼층에 오르시니 선관선녀(仙官仙女)와 만조백관(文武百官)들이 호위하여 좌정하사
"위징(魏徵)을 데려오라" 명하시니 위징이 대령하더라
상제께서 위징에게 크게 꾸짖어 가라사대
"그대는 어찌하여 낮에는 당태종을 섬기고 밤에는 옥황상제를 섬겼다하니
이는 두가지 마음이 아니리요" 하시며 위징을 꾸짖으니 위징이 크게 사죄하는지라
형렬이 이 광경을 보고난 후로 모든 종도들에게 말하여 가로대,
한울님이 선생님이시요 선생님이 바로 한울님이시라고 하였다 전하니라
57. 하루는 전주 우림면(雨林面) 절용리(節龍里) 이직부(李直夫)의 집에 이르시니,
상제께서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직부의 집으로 몰려와 사랑방이 가득하도록 앉았더라
한 사람이 청하기를 "저희들이 술을 올려 대접할까 하오니 선생님께서는
저희들에게 안주를 먹게하여 주소서.
안주가 좋기로는 도미회가 제일이라하니
저희들이 지금까지 맛본바 없는 도미회를 안주하여 술 먹어 보기가 소원이로소이다"하며 청하니
방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여출일구(如出一口)로 소원하거늘
처음에는 거절하시다가 가라사대
"여러 사람이 소원하니 할 일이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의 원을 풀어주리라"하시며
"곧 문을 열어보라"하시거늘 방문을 여니 큼직한 도미가 있더라.
가라사대 도미를 죽이지 말고 예리한 칼로 껍질을 잘 벗기고,
뼈가 상하지 않게 살만 포 떠낸후 껍질을 그대로 덮어 밖에 내놓으라 하시는지라.
지시하신대로 하여 도미뼈를 밖으로 내놓고 밤이 깊도록 도미 안주로 술을 마시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려고 밖에 나와 보니 문 앞에 내놓은 도미뼈가 간곳이 없었다하니라
58. 하루는 종도들을 거느리시고 전북 진안군(鎭安郡)에 있는 솟금산(束金山-馬耳山)에 가시어
종이로 크게 연을 만들어 놓고 연(鳶)공사를 보실세
김병선(金炳善)에게 연(鳶) 속에 들어가 앉으라 명하시거늘,
김병선이 명하시는대로 연 속에 들어가 앉으니 글을 써서 불사르신 후에 가라사대
그만하면 되었느니라 하시고 연을 들어 불사르시였다 하니라
59. 어느날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수천년 동안 억눌렸던 여자들이 천하사(天下事)를 한번 해볼려는 소리가 천지(天地)에 사무쳤으니
장차 여자들의 세상이 되려한다 하시더니,
한동안 계시다가 가라사대,
"그러리라. 큰 일이야 남자가 할 수 밖에 없으리라" 하시였다 전하니라
60. 하루는 백암리(白岩里) 최창조(崔昌祚)의 집에서 명일 출발하리라 하시며,
벽력표(霹靂表)를 묻으메, 즉시 뇌성(雷聲)이 크게 일어나 천지가 진동하거늘,
곧 걷으시고 익일 구릿골로 돌아오시니,
신원일(辛元一)이 백암리(白岩里)에서 뇌성벽력(雷聲霹靂)을 쓰시던 조화를 말하다가 여쭈어 가로대
옛적에 진묵(震默)은 이레동안 북두칠성(北斗七星)을 가두었다 전하는데,
가히 그와 같을 수 있나이까 하고 아뢴데 가라사대,
그러하더냐 이제 내가 시험하리라 하시고 이날부터 북두칠성을 삼개월간 가두시고 가라사대,
현세에 천문을 본다는 자들이 많다하되 나타나지 않음을 말하고 발표하는자 없도다 하시더라 전하니라
61. 어느날 차경석(車京石)에게 가라사대
"동학은 차정(車政)으로 亡하니라"하시니
차경석이 말씀의 의취(意趣)를 못 깨쳤다 하니라
62. 하루는 대흥리(大興里)에서 경석(京石)에게 가라사대,
너희집은 전주이가(全州李哥)로 인하여 패망하게 되리라 하시니라.
그후 이십년이 되는 무진년(戊辰年 1928)에 이르러,
경석의 처 이씨(李氏)가 영안(靈眼)을 통하여 보니,
상제께서 푸댄임에 삿갓을 쓰고 성전에서 삼황오제신(三皇五帝神)에게 쫒겨나고,
삼황오제신(三皇五帝神)은 경석의 망부(亡父) 차지구(車致九)라는 망설(妄說)을 듣고나서 생각할때,
상제(上帝)께서 천지운도의 개척될 기운을 몰아서 자신에게 주었으니,
그 도수(度數)가 돌아오면 천자의 위에 등극할 것을 믿으며,
경신년(庚申年 1920)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허사가 됨에 원망하다가
갑자년(甲子年 1924)을 기다려도 안 되고 마니
처 이씨의 말을 믿고 삼황오제신을 받들며 신로(信路)를 유교로 변경하니 말씀대로 되었더라
63. 하루는 하운동(夏雲洞)에 사는 박성태(朴成台)를 보시고 가라사대,
앞으로 저 제업장골(帝業創谷)에 날로 백여명의 사람이 빈번히 왕래할 것이라.
그러나 아무 여지가 없을 것이며 끝이 좋지않네 하시였다 하더니,
그후 서백일(徐白日)이란 사람이 제업창골(帝業創谷)에 용화사(龍華寺)를 짓고
용화불교(龍華佛敎)를 설립하여 교세가 장히 대단하메,
날로 백여명씩 그 골짜기로 왕래하더니 관청에 고소되었다가 보석으로 나왔으나
교인의 원한서린 칼에 쓰러지고,
용화불교(龍華佛敎)는 사양(斜陽)하여 결국 불교종단 조계종에 흡수되고 말더라.
64. 전주 용머리 고개에서 김덕찬(金德贊), 김준찬(金俊贊) 등 종도들을 거느리고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끝마친 후 출발하려 하실세
밖에 윷치는 잡기군들이 모여들어 윷판을 벌려놓고 유인하려 하거늘,
상제가라사대, 저자들의 원하는 바를 성취하게하여 줌도 이 또한 해원이라 하시며
돈 오십냥을 놓고 윷을 치시더라.
윷을 치기 시작하여 경각에 그자들의 돈 여든냥을 다 따신 후에
이것이 품삯이라 하시며 닷돈을 남기고 일흔 아홉냥 닷돈을 그들에게 돌려주시며 가라사대,
이는 불의한 짓이니 버리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 직업을 구하여 안정하라 하시니,
그들이 크게 감복하여 돌아가드라
이때에 종도들이 윷치는 법을 물으니 가라사대,
더(加) 치는 법을 일정히 하여 변경치 아니하면 그와같이 되나니 이것도 또한 일심(一心)의 법(法)이니라
또 일러 가라사대,
현금 조선(朝鮮)의 정세(政勢)가 실업자들이 여증(與增)하여
도박(賭博)으로 업을 삼는자가 계속 나오리니 일후에 그 법(法)이 엄정하여지면
저들은 굶어 죽을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므로 이제 저들에게 살 수 있는 식녹(食祿)을 붙이었느니라 하시였다 하니라
65. 어느날은 안내성(安乃成)에게 명하시기를
"너는 집에서 나오지 말고 봉두난발(蓬頭亂髮)로 지내며 수련하라"하시거늘
내성이 명하신 대로 머리를 올리지 못하고 집에 들어앉아 독공(篤功)하더니
어느날 내성의 집으로 찾아오시어 가라사대,
"오늘은 네 두발(頭髮)을 성례(成禮)시키리라 하시며 머리감고 오라 하시거늘,
그대로 하였더니 친히 어수(御手)로써 내성의 머리를 올려 상투를 틀어주시며
가라사대 "천하 상투가 다 잘리어도 네 상투만은 남으리라"하시더니,
왜정치하(倭政治下)에 일본인들이 천하의 상투를 다 잘랐는데,
안내성만은 보발(保髮)한 채로 해방후 기축년(己丑年 1949)까지 살았으니
내성의 나이 83살(단군기원 사천이백팔십이년)에 선화하였다 하니라.
이로써 천하(天下) 보발잔존(保髮殘存) 도수(度數)를 정하사 현금에도 간혹 보발한 자가 있느니라
66. 대흥리(大興里)에서 계실세 어느날 고부인(高夫人)에게 가라사대,
김제(金堤)로 가자하시며 재촉이 성화같은지라.
고부인(高夫人)은 어쩔 수 없이 행장(行裝)을 수습(收拾)하시었더니
다시는 말씀이 없으시므로, 잊고 계시는데 수일후에 다시 채촉 만 하시고 아무 말씀없으시더니
또 다시 수일 후에는 교자(轎子)를 설비하여 놓고 가자하시며 이르시기를,
"밥 한그릇 가지면 둘이서 먹고도 남는데, 챙피 볼것 없지"하시고
잠시후에 가라사대 "이만하면 관세음(觀世音)이라"하시고
또 가라사대 "그대가 여기 있으면 몸이 커지려니와 가며는 그 몸이 부서진다" 하시니라
67. 어느날 상제(上帝)께서 김광찬(金光贊)을 거느리고 임피(臨陂)에 가시어 수일동안 계시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자식(子息)을 살려주시라 애걸하거늘 들으시고 가라사대,
그대의 자식은 본래 명이 단소하여 어찌 할 수 없노라 하시니,
노구(老軀) 울며 가로대,
이 몸이 대신 죽어 자식을 살려주시면 어떠하오리까 하며 가지않고 울부짖으니
불쌍히 여기사 광찬(光贊)에게 가라사대,
병자(病者)를 억지로라도 끌고 함열(咸悅) 숭림사(崇林寺)를 찾아가
노장호승(老丈胡僧)을 보고 재배(再拜)하며 조문(弔問)한다 이르고
묻는 말에 대답지 말고 돌아오라 하시거늘
광찬(光贊)이 노구를 데리고 병자(病者)의 집에 가서 자세히 지시하고 왔더니,
병자(病者)의 가권(家眷)들이 병자를 끌고가서 그대로 실행하고,
그 길로 돌아와 완쾌하여 수일후 노구가 자식을 대동하고 찾아와
폐백주찬(幣帛酒饌)을 드리며 백배사례(百拜謝禮) 하니라.
그후 전하기를 조문 받은 호승(胡僧)은 그 즉시 열반(涅槃)하였다 하니라
68. 하루는 종도들을 거느리고 고부(古阜) 거무실 방죽을 지나시며 가라사대
이 방죽을 거무실 방죽이라 이르므로 이 방죽은 없어져야 하리라 하시드니,
우연히 물이 줄어들어 밭과 논으로 변하고 지금은 옛날의 방죽의 흔적(痕迹)도 없이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