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이 순정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지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배낭 앞 고리에 걸어 놓은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나왔다. 형배는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렸다. 등산로 입구는 상춘객으로 붐볐다. 만개한 흰색과 연분홍색 꽃 터널이 하늘을 가렸다. 형배 마음도 봄바람에 흔들리는 벚꽃 마냥 살랑거렸다. 지난겨울은 유난히 길고 매서웠다. 방송에서는 30년 만에 찾아온 한파가 한강을 통째로 얼려 버렸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혹독한 날씨를 견딘 꽃 들이었다. 힘든 날을 회상하며 주름진 눈을 감았다. 여생은 꽃길만 걷길 기대했다. 구부정한 등을 곧게 펴며 기지개를 폈다.
“고목에도 순이 돋는 다더니”
80세를 바라보는 형배는 요즘 자신에게 일어나는 변화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닫혀 있던 기억 상자에 틈이 생겼다. 잊고 있었던 추억들이 떠올랐다. 며 칠 전에는 호박 된장국을 먹다 문득 중학교 때 돌아가신 이모가 생각났다. 이모가 끓여 주던 애호박 된장국은 정말 맛있었다. 후각도 다시 돌아왔다. 빌라 복도를 타고 올라오는 치킨 냄새도 맡을 수 있다. 감각들이 살아나니 모든 것이 새롭고 시끄러워졌다.
형배는 1년 전 아내를 암으로 떠나보냈다. 아내가 사라지자 모든 것이 멈췄다. 집 안에 있던 물건들은 생기를 잃었다. 거실을 가득 채웠던 화초들도 아내와 함께 죽어갔다. 집안은 커다란 무덤이 되어 갔다. 슬픔은 잠시였다. 아내 빈자리는 형배의 몫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손길이 필요했다. 빈둥거리는 만큼 빨래와 설거지가 쌓여갔다. 자식들도 엄마가 없어진 집에 오지 않았다.
말라 죽어가던 형배를 구해낸 것은 빌라 3층 후배였다. 그는 같은 빌라에서 30년을 같이 살았다. 아내가 살아 있을 때 부부 여행도 몇 번 간적도 있었다. 친동생 보다 가까운 후배다.
“형님 맨날 텔레비전만 끼고 있으면 밥이 나와유 고기가 나와유 이리 나와유”
후배에게 이끌려 마지못해 나왔다. 등산도 가고 여행도 다녔다. 형배도 숨통이 터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남들에게 들킬까 조심했다. 이웃들에게 아내를 잊지 못한 애처가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서울역은 건너편 도로는 전국으로 떠나는 관광버스들이 가득했다. 세대도 다양했다. 등산을 하는 차량에는 사•오십대가 많았고 둘레길이나 꽃구경은 육십 대 이상이 많았다.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관광버스는 마술 같은 장소였다. 버스에 오르면 형배는 냄새나는 뒷방 노인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대학교수 출신이 되기도 하고, 돈 많은 임대업자가 되기도 했다. 누가 우스갯소리를 하면 큰 소리로 웃었다. 착한 가면을 벗고 그가 원하던 가면을 썼다.
형배는 늘 같은 여행사만 이용했다. 특별한 인연은 없었지만 여행 첫 날 가이드는 형배를 ‘동백’이라는 톡 방에 초대했다. 그 뒤부터 관광 코스에 상관없이 늘 동백여행사를 예약 했다. 처음에는 형배 옆 자리는 항상 비었다. 추레한 행색 때문에 같이 앉는 것을 꺼려하는 것 같았다.
형배는 고가 브랜드 골프 웨어를 샀다. 옷을 바꾸자 형배 옆 자리가 메워졌다. 기분이 좋아졌다.
봄이 되자 꽃구경 여행 버스는 만원이 되었다. 그날 출발 시간이 넘었는데 버스는 출발하지 못했다. 예약한 한 사람이 오지 않았다며 가이드가 안절부절 했다. 조금 후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자가 헐레벌떡 버스에 올랐다. 버스 타는 장소를 잘 못 알아 늦었다며 연신 인사를 했다. 그녀는 빈자리로 남아있던 형배 옆자리에 앉았다. 알 수 없는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형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오랜 만에 느끼는 두근거림에 기분이 좋아졌다. 찰밥 아침식사가 끝나 자 술렁거리던 버스는 이내 잠잠해졌다. 버스가 속도를 냈다. 커튼 사이로 들어 온 아침 햇살이 그녀 얼굴을 비췄다. 눈가에 주름이 보였다.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생기를 잃지 않은 피부였다.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 머리를 매만졌다. 그녀가 형배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곁눈질하는 형배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형배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겸연쩍어 하는 형배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딱히 떠오르는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몇 학년 몇 반이요”
형배는 말을 뱉자마자 후회했다.
“몇 학년 몇 반 같아요?”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물어왔다.
“육학년 일반”
앞자리에 앉아 있던 두 여자가 어깨를 들썩이며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김순임 이라고 했다. 세 번째 같은 버스를 타고 난 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서로 말이 통할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고향도 달랐고, 서로 살아온 곳도 달랐다. 순임은 공무원 남편을 50년 동안 모시고 살았다고 했다. ‘모시고’라는 단어에 힘이 들어갔다. 경제적으로는 별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남편과의 관계는 순탄해 보이지 않았다. 공통점도 있었다. 그녀도 남편과 사별했고, 형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고등어 찜을 좋아했다. 아내는 비린내가 싫다며 먹지 않았던 음식이었다. 순임과 갖는 시간이 늘어나자 길고 지루했던 하루가 짧아졌다.
꽃 터널을 지나자 만남의 광장 호수가 보였다. 한쪽 벤치에 순임의 가녀린 어깨가 보였다.
“순임씨”
“어머 박 선생님”
고개를 돌리는 순임 머리카락이 얕은 여울을 타고 내리는 은빛 물결처럼 찰랑거렸다. 형배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뻐근하게 조여 오는 아랫도리를 진정시켰다. 젊은 시절이 다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형배는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박 선생이 뭐에요 형배씨 라고 부르라고 했잖아요. 형배씨”
“호호호”
순임은 손을 가볍게 입을 가리고 벚꽃처럼 웃었다.
“이 여사 이분이 말씀하시던 그 박 선생님 이시군요!
느닷없는 낯선 목소리에 아련했던 봄기운이 흩어졌다.
“아! 박 선생님 이분은 전에 제가 말씀드렸던 서예동아리 천 선생님이세요. 인사하세요?
순임은 옆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천만석이라고 합니다. 이 여사를 통해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허허”
이른 점심시간이었지만 지하철역 근처 식당은 손님으로 붐볐다. 일주일을 설레며 기다리던 순임과 등산은 불청객 때문에 망쳤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다. 형배는 시간이 지날수록 불판위에서 빨간 양념을 뒤집어 쓴 주꾸미처럼 쪼그라졌다. 몇 시간 전 씩씩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노인네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 집이 맛 집 이래요 박 선생님이 강추했어요”
순임은 표정이 없어진 형배 얼굴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순임은 점점 자신을 마누라 대하듯 하는 형배의 태도가 불쾌했다. 과한 친밀감이 부담스러웠다. 순임에게 형배는 여행 중에 만난 남자 이상은 아니었다. 몇 번 선을 그었다. 그럴수록 더욱 추근거렸다. 극약 처분이 필요했다. 천 선생과의 의도된 동행도 순임의 계획이었다. 순임은 형배가 의기소침해진 모습을 보이자 쐐기를 박아 버리듯 자극을 했다. 순임이 젓가락으로 주꾸미를 집어 올려 만석의 입에 넣어주었다.
“천 선생님 드세요 주꾸미는 살짝 익어야 맛있어요. 호호”
순임의 작은 몸짓과 말투가 형배의 가슴을 후벼 팠다. 순임 보다 그 옆에 남편처럼 행세하는 만석에게 화가 났다. 형배는 소주를 시켰다. 소주병이 반쯤 비어가자 형배는 괜한 만석의 이름을 가지고 시비를 걸었다.
“천형은 이름이 만석이라 놀림 좀 당했겠시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 이름 때문에 어릴 적에 많이 놀림 당했죠 하하”
“아버님께서 만석 부자가 되라고 나름 좋은 의미로 지어주셨는데 친구들이 많이 놀렸죠 하지만 지금은 이름대로 되었지 뭡니까 놀리던 친구들도 부러워하죠 하하”
만석은 너스레를 떨며 은근히 부자 티를 냈다. 송파에 건물이 세 채가 있다고 했다. 관악구에 작은 빌라 한 채가 전부인 형배에게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더구나 만석의 해박한 지식은 공업고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인 형배에게는 더 주눅 들게 만들었다. 불판 위에 볶음밥이 볶아 질 즈음 형배의 혀가 꼬였다. 가끔 알아 들을 수 없는 욕을 했다.
“이제 그만 하시죠 어느 정도 드셨으니 일어나요”
순임은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불안했다.
“그러시죠 오늘은 이만 하시고 다음에 또 만나시죠” “이건 제가 계산 할게요”
만석이 순임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급히 자리에 일어났다.
“어이 천씨 내가 계산 할 거야 나도 이 정도 낼 수 있어 까불지 말고 앉아”
형배가 만석의 손을 잡으며 외쳤다. 순간 형배는 중심을 잃었다. 만석이 휘청거리는 형배를 붙잡았지만 때는 늦었다. 형배는 큰 소리를 내며 식당 바닥에 넘어졌다. 식당 안이 술렁거렸다. 형배는 창피했지만 다리가 풀려 일어나지 못했다. 모든 것이 만석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형배는 험악한 얼굴을 하며 만석에게 말했다.
“어이 천씨 당신 나 좀 봐”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골목길에 고성이 오갔다. 머리가 하얀 두 노인이 서로 멱살을 잡고 있다. 여자를 사이에 두고 혈투가 벌어졌다.
“순임은 내꺼야 내가 먼저 찜했다고” 형배는 혀 꼬인 소리를 했다.
순임은 일이 커진 것도 당황했지만 형배의 말에 화가 났다.
“누가 당신 꺼야 이 노인네가 노망났네! 노망났어! 순임이 바락바락 대들었다.
“이 놈이 정신 못 차리고 어디다 행패야! 병풍 뒤에서 향냄새 맡게 해줄까”
만석도 순임과 맞장구치며 형배를 밀쳤다. 형배는 힘도 쓰지 못하고 시멘트 바닥 위에 내던져 졌다.
“어이쿠 천가 이놈! 오늘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형배는 바닥에서 소리만 고래고래 질렀다.
“박 선생님 정신 차리세요 내가 박 선생님 에게 말상대라도 해준 것은 처지가 같아 불쌍해서 그런 거지 당신한테 마음이 있어 그런 것 아니에요”
순임이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순임이 당신이 나에게 이럴 수 있어 당신이 먼저 나에게 꼬리쳤잖아”
형배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뭐요 내가 꼬리를 쳤다고?” 순임은 어이가 없다는 듯 팔짱을 끼며 말했다.
“정말 이 양반이 실성을 했나 내가 뭐가 아쉬워 꼬리를 쳐”
순임의 앙칼진 목소리와 사이렌 소리가 골목 안에 뒤엉켰다.
경찰서 철장 안에 갇힌 형배는 오줌 마려운 강아지 마냥 안절부절 했다. 만석도 한 풀 죽어 있다. 온 몸이 욱신거렸다. 몸이 아픈 것 보다 순임의 말이 더 아팠다. 형배는 무엇을 잘못해서 순임이 화가 났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경찰서에 도착한 지 서 너 시간이 지났다. 아무도 말을 시키지 않았다. 형배는 침묵이 불안하게 만들었다. 형사 대기실에 젊은 남녀가 들어왔다. 둘은 술이 취해 있었다. 남자는 옷이 찢어지고 핏자국이 여기 저기 남아 있다. 여자도 머리가 헝클어지고 검은 눈 화장이 볼 아래까지 흘러 내렸다.
“야 아까 전화한 그 새끼는 누구야? 씨발 년 나 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씨발”
“미친 놈 내가 누굴 만나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새끼야”
“내가 니 꺼니? 내가 니 물건이야? 미친.”
“왜 내가 다른 새끼 만나니 좆같지 병신새끼” 젊은 여자는 악을 썼다.
형사들이 몇 번이고 조용히 하라고 제지했으나 그들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처럼 싸웠다.
“말끝마다 병신이래? 야 시발아 니가 먼저 사귀자고 해놓고 단물 빠지니 딴 남자 만나냐”
“내가 언제?” “야 내가 언제 너에게 사귀자고 했어” “너랑 나랑 사귀기는 했니 병신아”
“야 이게 니가 웃으면서 술 한 잔 사달라고 했잖아 씨발아”
“병신 술 사달라는게 사귀자고 한거냐?”
“말을 걸기만 하면 다 너한테 마음이 있어 그런 거로 보이니 병신.... 좆 달린 새끼들은 똑같아 단세포 같은 놈들 쯧쯧” 여자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젊은 여자는 형배와 눈이 마주쳤다.
“뭘 봐요 싸우는 것 처음 봐요”
형배는 아무 이유 없이 한 방 먹었다. 하지만 젊은 여자에게 대꾸할 기운도 없다.
형배는 젊은 여자 말이 모두 자신에게 하는 말로 들렸다. 순임이 먼저 사귀자는 말을 한 사실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꾸 순임의 악다구니가 형배 귀 속에 맴돌았다. 형배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나이의 순정을 몰라주는 순임이 야속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정식으로 고백하리라 다짐했다. 그 순간 순임은 형배의 전화번호를 삭제하고 있었다. 창 밖에는 봄비가 내렸다.
첫댓글 사나이순정 제목에서 내용이 궁금해지네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너무 재밌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대구에 경상감영공원 근처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요. 거기가 바로 노인들의 놀이터였어요. 야근을 해서 깜깜한 밤에 길을 나서는 날이면 간혹, 노인들이 애정행각을 벌이거나 큰 소리로 사랑싸움을 하는 장면들을 보고는 했어요. 이 글을 읽으니까 그때가 생각이 나더라고요.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