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 / 최미숙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게 마련이다. 학교는 일 년에 한두 번씩 인사이동으로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한다. 올 8월부터 내년까지 내 또래가 정년을 맞는다. 드디어 우리 세대가 정년퇴임의 반열에 들어섰다. 세월이 그냥 가는 줄만 알았는데 무언가를 조금씩 바꿔 놓았다.
8월 마지막 주, 인근 학교 교장으로 있는 동창 정년 퇴임식에 가게 됐다. 우리 학교 교장과 셋이 같은 해 졸업한 관계로 가끔 만나 밥도 먹곤 했는데 나이가 한 살 많아 일 년 먼저 현직을 떠난다. 축하 꽃바구니 전하러 교장과 함께 가기로 했다. 아침부터 비가 조금씩 내렸다.
학생 수가 적어선지 학교는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다. 비에 젖은 텅 빈 운동장이 쓸쓸해 보인다. 깨끼 한복으로 곱게 차려입은 동창이 환한 얼굴로 우리를 맞았다. 교장실에서 차 한잔하며 옛이야기도 하고 꽃바구니 앞에서 기념사진도 찍었다. 시간이 돼 나오려는데 식까지 참석하고 가라며 붙잡는다. 자꾸 거절할 수 없어 나가다 말고 다시 들어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정장이라도 입고 올걸.
세월 참 빠르다. 20대 앳된 숙녀가 어느덧 60대 고령이 되어 직장을 떠난다니 실감 나지 않는다. 지나온 40년 세월이 어딘가에 그대로 저장되어 있을 것만 같다. 강당으로 갔다.
학생들과 교직원이 차분하게 의자에 앉아 교장 선생님을 기다린다. ‘아름다운 새 출발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란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가 눈에 띈다. 내빈석에 앉았다. 남자 선생님의 사회로 식이 시작됐다. 소개가 있었다. 얼떨결에 일어서서 인사했다. 교감이 친구의 약력을 소개한다. 첫 발령지를 시작으로 거쳤던 학교, 그동안 쏟은 열정을 줄줄이 말한다. 교장 선생님 말씀에 이어 퇴임 기념 영상을 보여줬다. 각 학년 선생님과 직원들이 남긴 인사말과 학생 개개인의 축하 메시지가 가득 담겼다. 행사 때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음악까지 곁들여 꽤 긴 시간 상영했다. 조금은 지루했지만 교직원과 학생들 진심이 느껴져 마음 뭉클했다. 준비하느라 고생한 직원들이 고마웠다. 동창은 감격했는지 눈물을 훔친다. 학생 대표의 편지 낭독과 교장 선생님 감사 인사로 식이 끝났다. 친구는 학생들에게 크리스마스 날 산타가 되어 학교를 다시 한번 방문하겠다고 약속한다. 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기념촬영을 한다기에 자리를 떴다. 잔치를 뒤로하고 학교를 나오는데 비는 계속 내린다.
오면서 교장과 1, 2년 후에 있을 우리 정년을 이야기했다. 예전에야 대부분 성대하게 퇴임식을 했지만 요즈음은 다들 생략하는 분위기다. 젊었을 때는 몰랐는데 40년 넘는 세월 별 탈 없이 공직을 마친다는 것은 대단하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퇴임이 내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다. 과거 선배의 퇴임식에 참석했을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도 돌아봤다. 지금 같아선 자리를 따로 만드는 건 원하지 않는다. 평소처럼 조용히 퇴근하고 싶다. 진심이 담긴 “안녕히 계세요.”와 “잘 가세요.”면 족하다.
저녁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는데 동창에게 오전에 찍은 사진 몇 장과 축하해 줘서 고마웠다는 문자가 왔다. 환하게 웃는 세 사람의 얼굴에서 세월이 보였다. 건강하게 지내고 자주 연락하자는 답장을 보냈다. 친구는 퇴직 후 목공 일과 수영을 배우려고 미리 등록했고, 골프 연습도 많이 했는지 필드에 나갈 만큼 실력이 돼 심심하지는 않을 거란다. 내일부터는 완전한 자유인이다. 느긋한 아침을 맞는 기분은 어떨까?
일 년 후면 퇴직이다. 주변에선 벌써 뭐하며 지낼 거냐 묻는다. 누군가가 ‘한 개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고 했다. 어떤 문이 열릴지 궁금하지만 남은 기간 학생들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어쨌든 퇴직하면 시간에 쫓기지 않고,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아 후련할 것 같다.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아직 계획은 없다. 천천히 생각할 참이다. 그래도 할 일 하나는 정해 두었다. 글쓰기다. 여전히 어렵지만 쓰다 보니 보이지 않는 변화가 생긴 것은 확실하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가을을 알린다. 발악하던 매미 소리와 더위가 언제 수그러질까 했는데 시간이 해결해 준다. 내게는 오지 않을 것 같던 퇴직도 눈앞이다. 자연의 이치다. 지금껏 그래왔듯 세월에 몸을 맡기면 종착지에 데려다줄 것이다.
친구를 비롯해 8월 말 퇴임하신 글동무 최 교장님, 김 원장님께도 그동안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응원한다.
첫댓글 와, 멋져요. 이렇게 올려 놓고 기한인 9월 11일까지 고치면 됩니다.
벌써 올리셨네요. 하하, 한 개의 문이 닫히는 길목에 있으시네요.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한해 잘 마무리 하셔서 기분 좋은 마무리되시길 바라며, 다음 시작은 어떻게 이어질지 궁금합니다.
저도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최미숙 선생님과 인상도 비슷하셨습니다. 오래 전 일이지만 선생님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그만큼 제게 바르게 사는 법과 잘 하는 걸 계속 하며 지낼 수 있도록 격려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김정희 선생님께서도 퇴임 전에 저에게 최선을 다해 주셨나 봅니다.
글감에 어울리는 멋진 글이네요. 제겐 퇴직이 아직 멀게 느껴집니다. 막상 닥치면 당황스러울 것 같아요. 최 선생님은 <날아라, 종현이>를 쓰신 것보고 감동 받았던 생각이 납니다. 퇴직 이후에도 멋지게 날으실거라 믿습니다.
멋진 출발을 알리는 선생님의 글이 다시금 저를 돌아보게 하네요. 다른 문이 열리는 글쓰기의 출발을 멋지게 하셨습니다.
'한 개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대단한 긍정적인 마인드 입니다. 희망을 배워갑니다. 지금까지 처럼 남은 기간도 후배들에게 자랑스러운 길잡이가 되리라 믿습니다.
역시 부지런한 선배님, 일 번으로 올리셨군요.
항상 모범을 보여 주셔서, 고맙습니다.
늦은 답글 답니다.
앞서간 이가 그리하였고, 또 우리가 따라갈 길이지요.
저도 전화 한 통만 하고, 식사 한 번 대접 못하고 황 교장님을 보내 버렸네요.
만나면 늘 환하게, 반갑게 맞아 주셔서 제게도 참 고마운 분입니다.
국민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이었던 분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은규 선생님의 성함과 모습이 사진 한 장 없는데 어제 일처럼 또렷합니다.
그 긴 시간을 한결같은 모습으로 교직에 임하셨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