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原郡 13面中의 하나 本來 忠州郡의 地域으로 乷味谷의 이름을 따서 乷味谷面 乷味面이라 하고 木伐, 文旨, 大化, 新堂, 才五介, 武陵, 新陵, 新潭, 公耳梅南, 乃化, 甫沙, 雪云, 倉洞, 大香山, 小香山, 斗應의 12個 洞里를 관할 하다가 1914年 郡面廢合에 따라 柳等面의 八峯里 一部를 倂合하여 木伐, 文化, 才五介, 新堂,武陵, 公耳, 新梅, 乃沙, 雪云, 龍川, 洗星, 香山의 12個里로 改編管轄함.
[대림산 창골] 살미면 향산리 대림산성 서편에 창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고려 고종 때 내습한 몽고군이 충주성에 임박할 때 일이다. 수성장을 맡고 있던 우종주(宇宗柱)는 몽고병의 수가 많은 것을 보자 모든 백성들을 남한산성과 대림산성으로 모아가지고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서 대항할 전략을 세웠다. 이 작전을 알게 된 몽고병은 우선 대림산성을 포위하고 풀지를 않았다. 그러니까 산 밑에서 포진을 하고 성 안과의 교통을 차단해서 무기와 식량의 공급을 막은 것이다. 따라서 성안에서는 밖으로 나갈 생각도 못하고 40여일이 지나니 이제는 먹을 것도 떨어지고 사기도 떨어져 최후의 수단밖에 남지 않았다. [자결이냐, 항복이냐]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수성장은 상대를 확인하려 들자 노인은 조용한 어조로 그를 따라 오라고 말하고 남쪽 성벽을 빠져 나갔다. 얼마쯤 가더니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한 골짜기에 이르러 큰 돌더미를 가리키며 [이곳을 헐어보면 앞으로 100일 동안 살 수 있는 식량과 적병 3천병을 도륙할 수 있는 무기가 들어 있으니 용기를 내서 최선을 다하시오.] 했다. 수장이 놀라워서 황급히 [대체 누구시냐?]고 물으니 미소를 지으며 [나는 이 산천을 지켜오고, 지켜가는 산신이오]라고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수장이 그 돌벽을 헐어보니 과연 산의 암벽을 뚫어 창고를 짓고 그 안에 물건을 넣어 두었는데 창검을 비롯한 무기, 식량 등 풍족한 물자였다. 이 사실이 전해지자 병사들은 의기가 충천해서 마침내는 몽고군을 격파하기에 이르렀다. 그곳을 지금도 [창골]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길에서도 안 보이는 협곡으로 천연의 요새지라고 하는 곳이다.
[세개의 선돌] 수몰전 살미 초등학교가 있던 마을을 선돌백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곳 [이재황]씨 대문밖에 있던 입석 때문에 불리우는 명칭이다. 이곳에 있던 입석의 크기는 키가 약 2m쯤 되고 폭은 아랫편이 약 1m쯤 되는 거대한 돌로 오래된 것은 틀림없으나 그 연대나 유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곳의 입석은 이뿐만 아니라 또 다른 장소에도 두개가 있는데 그 하나는 [매내미]마을 이재운씨 집 뒤안에 있었고 또 하나는 살미초등학교 쪽으로 [대문산]이라는 산 위에 있다고 한다. 이곳 촌로들이 말 하기를 학교옆에 있던 선돌은 남편 돌이고 [매내미]마을에 있던 선돌과 [대문산]에 서 있는 선돌은 아내 돌 인데 [대문산]에 있는 돌이 본실인데 멀리서 내려다 보고서 있는 형국이며 [매내미]마을에 있던 선돌은 가까이서 바로 맞바라 보고서 있는 형국이다. 그리고 이 세개의 돌은 위치가 일직선 위에 놓여 있었는데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 일직선상에서 선돌의 사이를 방해하는 것은 모든것이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특히 이 일직선상에다 집을 짓거나 묘소를 쓸 경우 패가 한다는 풍수설 때문에 아무도 이 설을 어기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시회의 쌍효각] 수몰 전 살미면 신당초등학교 앞에 쌍효각이라고 현판한 정문이 있었고 수몰로 인하여 동량면 대전리 배일부락으로 옮겼는데 다음과 같은 효자이야기가 전해진다. 지금으로부터 260년 전에 이 곳 상로라는 마을에 조촐한 초가 삼칸에 노부모를 모시고 두 형제가 살았다. 형의 이름은 이시희, 동생의 이름은 이시걸이라고 했으며 관향은 연안이었다. 이 형제는 효성이 지극해서 효종대왕께서 형에게는 승지, 동생에게는 장사랑이란 벼슬까지 내린 일이 있고 경종대왕 2년(1723)에 왕명에 의해서 쌍효각이 건립되었다. 이 형제는 이을 나가도 항상 번갈아 가며 부모 곁을 비우지 않고 지성으로 봉양했으므로 이들의 효행은 항간에 칭송이 자자했다. 어느 겨울날 이야기다. 모친이 병환으로 눕자 명약이란 모두 구해서 써 봤으나 별 효과가 없어서 의원에게 물어보니 잉어가 좋다는 말을 듣고 [벽대소]에 가서 얼음을 깨고 애를 써봤으나 원래 깊은 물에 잡힐 리가 없었다. 형제가 갖은 방법을 써봤으나 도리가 없어 번갈아 얼름위에 가서 기도를 올리기로 했다. 어는 날 무릎자국의 얼음이 녹아서 구멍이 뚫리면서 잉어가 뛰어 올라와 약으로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더 기이한 이야기는 어느 엄동에 부친께서 병이 나셨는데 백약이 신통치 않고 꼭 산딸기가 약이라고 해서 노력했으나 구할 도리가 없어 또 다시 험한 비탈에 가서 모든 것을 금기하고 기도를 올리니 별안간 훈풍과 함께 딸기 송이가 주렁주렁 나타나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 등이 있어 효성에 하늘이 감동한 탓이라고 명성이 인근에 자자했다. 세월은 흘러 부친은 이미 돌아가시고 늙은 모친을 모시느라고 효성을 다하였다. 중환으로 실시한 때는 손가락을 베어 피를 뽑아 마시게 하므로 위기를 모면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읻 형제는 정성을 다하여 봉양하였으나 원래 노쇠한 지라 중태에 빠지고 말았다. 하루는 큰아들이 모친의 병이 낫도록 해 달라고 산신에 기도를 올렸다. 별안간 소복을 한 선인이 나타나 하는 말이 [네 정성은 가상하나 치병의 방법은 한가지밖에 없다. 즉 연소한 인(人)고기를 삶아 복용하는 길밖에 없다.] 깜짝스런 꿈을 깨니 꿈이 아닌 산속의 순간이었고 노인은 간 곳이 없었다. 그 당시 이시희에게는 6살 되는 아들이 월악산 [덕주사]에 가서 글을 배우느라 통학을 하고 있었다. 이 날부터 두 내외는 고심과 초조 속에 뜬 눈으로 2-3일이 지났다. 마침내는 결심을 했다. [자식은 또 두면 된다. 어머님은 살려야지] 산 기슭에다 솥을 걸고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돌아오는 어린 것을 부둥켜안고 솥 앞에 서자 차마 어린 것을 넣을 수가 없어 아들대신 자기가 솥 속으로 뛰어들어 가려는 순간 갑자기 뇌성이 요란하더니 눈앞에 먼저의 신선 노인이 서있고 자신이 부둥켜 안은 아들은 사람이 아니고 산삼이었다고 한다. 노인은 [내가 네 정성을 시험해 봤노라, 장하도다 하늘이 감동할 효자로다.]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이 산삼을 봉양하니 그 모친의 병도 쾌유하고 장수했다고 전해진다.
[재오개의 유래] 살미면 재오개는 마을 이름도 되고 고개 이름도 된다. 어느날 재고개 밑을 지나가던 늙은 선비 한 사람이 외딴집을 보고 찾아가 냉수 한 그릇을 청했다. 아낙네가 나와 물을 떠 주었는데 그 부인이 잉태하고 있었으므로 산월을 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 집을 떠나면서 이르기를 [아기를 낳게 되면 재고개의 정기와 금봉산의 기를 받아 범상치 않은 인물이 태어날 것이니 아무쪼록 조심해서 기르시오.]했다. 그런데 그 노 선비는 고갯마루에 서더니 다시 한 번 주면 산천을 살피고 나서 길게 한숨을 내쉬며 혼자말을 했다. [애석한지고 그 기운에 요절기가 있단 말이야...] 그런지 얼마 후에 그 분이 몸을 풀었는데 재고개에서부터 산실까지 무지개가 이어졌다. 그런데 보통 무지개색은 5색으로 보인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한 가운데 검은 색을 띠고 있었다고 한다. 아기는 나면서부터 비범했다. 석 달 만에 말을 하고 세 살짜리가 쌀 한 짝을 들고 재주도 비상해서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았다. 그러자 소문이 그 인근 뿐만이 아니라 원근에까지 퍼져 가족이나 동리에서 장한 아이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이것이 관가에까지 알려져 조정에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때마침 풍수지리에 능한 지관이 충주를 살피고 간 후에 충주 땅에 왕의 기운이 있으니 조심해야 된다하고 재오개 땅에서 비상한 인물이 크고 있으니 재오개에다 혈을 질러야 할 것이라고 주장을 하였다. 조정에서는 명을 내려 철창대를 지르기에 이르렀는데 그 때 그 철장대를 지르던 사람은 피를 토하며 죽었고, 산천 초목이 시들더니 기어코 그 장사 아이도 죽고 말았다. 이 장사 아이가 죽을 때 [내가 죽거든 나를 꼭 이 마을 동구에다 묻어 주세요]하고 유언을 했으므로 그에 따라 동구에다 묻었는데 그 날부터 이 재오개에는 이변이 일어났다. 바람이 불면 슬프고 원한에 찬 소리가 바람을 타고 원근에 퍼지므로 지방민이 모두 애통해 했다고 한다. 이 소리는 아기장사가 요절한 원한의 소리하고 해서 모두 모여 제단을 만들고 동제를 지내주었더니 그 후로 그 소리가 멎었다. 그 다음 해 이 아기장수를 묻었던 곳에서 한 느티나무가 싹이 트더니 무럭무럭 자랐다. 그 후 동민들은 이 나무에도 동제를 지내 주고 있는데 잎이 잘 돋고 하는 상황에 따라 풍작과 흉작을 점치고 있다는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재주 있는 아기 장사가 다섯 살 때 죽었다는 뜻으로 [재오개(才五介)]라고 지명을 붙였다.
[혈지른 투구봉] 살미면 문화리에 있는 457m의 산이 투구봉이다. 이조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원군을 이끌고 조선에 나온 이여송이 이 곳을 지나다가 주변의 산세를 보니 수려하기 이를 데 없어 이곳에서 하룻밤을 주둔하기로 하고 밤에 잠을 자는데 어디선가 괴이한 소리가 나므로 귀를 귀울였다. 분명 군마가 달리는 소리였다. 이여송은 재빨리 투갑을 차리고 밖으로 나가 소리나는 쪽으로 눈과 귀를 집중시켰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북쪽에서 한 줄기 별빛이 산정을 향해서 흘러 내리고 있는데 그 산정에서 군마가 달리는 소리가 나는 것이다. 이여송이 지켜보고 있자니까 별빛이 사라지고 군마의 소리도 멎었지만 이 곳이 예사로 볼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그 산을 살펴보니 산의 형국이 대장군 상인데다가 산의 정기를 받다 불원간 절세의 용장이 출현할 것이 분명했다. 이영송은 그 길로 서둘러 철장을 만들어 산정에 올라 혈을 질렀다. 그 후로 이 산을 장수산이라고 불렀고 산의 모양이 투구를 쓰고 있는 장군을 연상케 하므로 [투구봉]이라고 부르고 있다 한다. 또 어느 하루는 이여송이 무심코 방골 뒷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니까 한 바위 뒤에서 용마 한 마리가 나타나 방골 뒷산을 향해서 소리치고 있는 모습이 발견되었다. 이여송은 역시 산천을 깊이 살피더니 그곳에서도 장수가 태어날 조짐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따라서 그곳에도 서둘러 철장을 가지고 올라 서니 한 곳에서 바위가 들먹들먹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이여송은 그 바위 위에 혈을 내리지르고 바위 옆으로 칼을 찔렀는데 산천초목이 떨며 바위 틈에서는 선혈이 흘러 나오고, 용마가 산을 향해서 슬피 울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고 전해진다.
[왕다래기] 살미면 토계리에 [왕다래기]라는 마을이 있다. 그 어원을 찾아보면 왕답(王踏)이란 말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조 철종 때의 이야기다. 어느 해 더위가 극심해서 왕은 근처에 피서할 만한 적지를 알아봤으나 마땅치가 않았다. 그런데 왕이 어느날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게 되었다. 푸른 물이 시원하게 넘실거리는 강가에 앉아 발을 물에다 담그고 있는데 수려한 산봉 여덟 개가 물 속에 비치고 기암절벽 밑에는 수달이 왔다 갔다 하는 꿈이었다. 왕은 영의정에게 꿈 이야기를 하면서 혹 그와 같은 장소가 있는 가 찾아 보라고 명령하였다. 그래서 궁내 재상들을 모아놓고 꿈 이야기를 하며 그런 장소를 탐지하였는데 이조 판서가 말하기를 [그런 장소란 충주 수주팔봉이라는 곳이 있는 줄을 압니다]하고 하자 즉시 충주 목사를 시켜 수주팔봉의 형상을 그려 올리라고 했더니 한 폭의 그림이 올라왔다. 왕이 그 그림을 보고는 꿈에서 본 형태와 비슷하다고 하여 드디어 행차를 하게 되었다. 유주막 나루터에서부터 배를 타고 팔봉으로 들어 가는데 그 경치가 자못 신비로울 정도로 수려하므로 왕은 몇 번이나 감탄을 하면서 칼바위 밑에 이르러 주위를 살피더니 [바로 이곳이다]하며 크게 기뻐하였다고 한다. 꿈에 본 곳과 똑같은 위치를 찾아 발을 담그고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리고 다시 주변 산천을 돌아 보며 참으로 절경이라고 칭찬을 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왕이 밟고 다닌 곳을 왕답(王踏)이라 불렀고 올라가서 경승을 전망한 산은 왕답산(王踏山)이라 불렀으며 왕이 발을 담그던 곳을 어림포라고 불러 온다.
[장수 죽인 명마재 골] 살미면 문강리 문라산 기슭에 명마재라고 부르기도 하고 용마곡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골짜기가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때는 이조 말엽이었다. 자손을 못두고 명산을 찾아 치성을 올리기 위해서 초가삼간을 짓고 사는 내외가 있었는데 괴산군 소리실에서 이사를 왔으므로 소리실 집으로 불리고 있었다. 치성의 덕분인지 어느덧 임신이 되어 크게 기뻐하고 있었는데 10개월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기색이 없었다. 주위 사람들이 수군대었고 두 내외도 몹시 고민을 하였다. 어느날 밤에 그 아내가 꿈을 꾸었는데 문밖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어 자기가 낳은 아이의 얼굴이 희고 몸집이 거대한 장수라고 하며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그 장수 아기는 큰 말을 타고 있었는데 그 말이 앞발로 방문을 부수고 들어와 자기 배를 밟는 바람에 놀라서 소리를 질렀는데 그와 동시에 잠도 깨고 해산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밖에서 불을 때고 있던 남편이 아내의 고함소리를 듣고 황급히 달려 들어와 보니 아내는 신음을 하고 있었고 방 윗목 선반 위에는 웬 난데 없이 벌거벗은 큰 아이가 하나 올라 앉아 있었다. 20개월만에 탄생한 아기였다. 그 어머니가 정신을 차리고 자세히 보니 그는 자기 꿈에서 말을 타고 들어온 장수아이의 얼굴 그대로였다. 두 내외는 자못 당황하다가 마침내 처치해 버리기로 결정을 내렸다. 옛날엔 민간에서 장수가 태어나면 역적으로 몰려 온 집안이 멸망지환을 당하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선반에 올라 앉은 어린 아이를 안아 내리는데도 남자 하나의 힘 만으로는 안되었다. 이웃 사람들까지 동원되어 목을 졸라 죽인 뒤에 정성껏 뒷산에 묻고 산제를 지내 주었다. 바로 그 때였다. 뒷산 바위가 무너지면서 용마 한 마리가 나타나서 큰 소리로 울며 그 소리실집을 빙빙 돌다가 다시 어린 장수의 무덤에 가서 또 다시 돌아다니며 울어댔다. 이때 이 마을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천하 장수로 태어났다가 시대를 잘못만나 용마 한번 못 타보고 요절을 하다니 앞으로 닥쳐올 국난을 어찌한단 말이요]하고 탄식을 하며 마을 사람들에는 [저 용마가 나온 곳을 정성껏 제사 지내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동민들의 용마가 나온 골짜기에 가서 고사를 지내주니 용마는 마을앞 밭둑에서 가서 하늘을 보고 슬피 울며 죽어 갔다.그래서 이 골짜기 이름을 말이 울었다고 [명마재골]이라고 부르고 말이 죽은 밭둑을 [말밭둑]이라고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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