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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함평군 엄다면 엄다리 제동
자산서원은 조선 중기 호남사림의 거두였던 곤재 정개청 선생이 1589년 기축옥사(정여립 모반사건) 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병사하자 그의 문인들이 스승의 신원운동을 전개하면서 건립한 서원이다.
곤재 정개청선생은 1529년에 나주의 금성산 아래 대곡동에서 태어나 중년에 곡강 현재 동강면으로 잠시 이주했다가 엄다면 윤암산 아래 제동마을에 고성 정씨 입향조로 정착하였다.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서 이문을 얻었고 유학은 물론 역사, 천문, 지리, 역학, 산수, 약학, 복서, 전진법, 가무 등 넓은 학문의 경지를 닦았으며 특히 서원 뒷산인 윤암산에 천문단을 쌓고, 성기옥형(혼천의)을 이용하여 천체의 이치와 운행을 관측하며 천문을 연구하였다.
선조대왕도 곤재 선생을 아꼈으며 영의정 박순은 팔도 도원수에 천거하는 등 많은 재상들이 그의 뛰어난 인품과 학식을 알고 천거하였으나 선무랑 곡성현감 겸 남원진감 병마절제도위 8개월 재직을 제외하고는 모두 숙배만 하고 제동마을에 돌아와서 정사를 짓고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기축옥사라고 부르는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1590년에 일어나 서인들에 의해 많은 유림들이 죽임을 당하는데 평소 정철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관계로 서인들의 무고로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체포되어 국청에서 역적의 누명은 벗었으나 후학에게 절의와 청담의 근본을 가르치기 위해 썻던 [동한진송소상부동설]이 배절의 논문으로 지목되어 함북 경원의 아산보로 유배되어 국청에서 맞은 장독으로 객사 하셨다.
곤재 정개청 선생을 평가한 만한 말 중에 몇 가지를 소개하면 영의정 유성룡은 “호남 사람 중 더욱 명망이 높으며 학술과 행검으로 자임하였다.”고 했고, 영의정 박순은 “주정주 뒤의 한 사람.”이라며 성현의 반열에 올렸고, 고산 윤선도는 “동방의 진유로 이황에 버금간다.” 고 칭송했다. 숙종은 사제문에서 “그 덕행 순수하고 올발라서 법을 밟고 구슬을 울리며 몸을 다스리고 본성을 간직했네. 외로이 가고 용맹하게 나아가 지식과 행실을 구비 하였도다. 큰 호수 이남 땅에 하나의 참 선비로다.”라고 위로했고. 황현은 곤재 행장에서 “동방의 도학이 전하는 유래가 있으나 5현 뒤에는 이름 들리는 사람이 없더니 선생이 남쪽에서 우뚝 일어나 개연히 사도로서 자임하여 회계, 퇴계 두 선생과 더불어 이론을 세우고 일을 행함에 있어 서로 경사의 뜻을 깨달아 밝혀내게 되었으니 어찌 문왕을 기다리지 않고도 오히려 일어났다는 호걸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저서는 수수기 9권, 변례편성 2권, 우득록 3권이 있었는데 기축옥사 때 다른 책들이랑 가져갔다가 선조대왕이 우득록을 보고 “이책은 옛 글을 읽은 사람의 저술이로다 모두 본가에 돌려주도록 하라”는 명령으로 우득록은 본가로 돌아오고 나머지는 무안현에서 분실되었다.
우득록은 1689년 왕의 등진 특명으로 발간이 시작되어 1692년에 간행이 완료되고 1987년 우득록 각판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146호로 지정되었고, 1988년 향토문화총서 제25집으로 국역본을 간행하였다.
자산서원은 선조 24년에 서인의 총수격인 정철이 축출되고 동인이 집권하면서 정개청의 신원운동이 일어나고 광해군 8년(1616년) 6월 15일에 사원 설립인가와 사액을 받아 윤암(현 제동마을)의 집터에 자산서원이 세워졌는데, 서인들의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김장생의 상소에 의해 인조 2년(1624년)에 철폐되었다가 1년 만에 다시 정개청이 복위되고 사원을 복설 했다.
효종 8년(1657년)에 서인들에 의해 다시 철폐 되고, 숙종 3년(1677년)에 동인계열의 남인인 윤선도와 허목의 상소로 복설 되였으며, 경신년(1680년)에 남인 대출로 또 철폐되고,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1689년에 다시 복설 되였다가 갑술옥사로 남인이 쫒겨나자 1702년에 훼철되었다. 영조 28년(1752년)에 4차 복설되고 영조 38년에 또 훼철되었다, 정조 13년에 복설되었다가 고종5년(1868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87년 복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과 부를 위해서는 양심도 버리는 위정자들에 의해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 조선 시대도 마찬가지로 왕위는 이씨들이 이어 갔으나 왕을 둘러싸고 파생되는 권력은 정치 관료들이 붕당을 지어 뺏고 뺏기는 패거리 정치를 해왔던 것으로 이유없이 피해를 입는 서민 학자들이 부지기수였다.
자산서원과 곤재 정개청은 당쟁의 희생물로 한 많은 역사를 되풀이 하였고 거기에는 곤재의 제자들이 중앙 관료로 많이 진출하여 붕당의 소용돌이 속에 한 축을 이룬 것을 읽을 수 있다.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허목의 저서 가운데 [우득록 발간 서문]에 [숙종 6년 자산서원을ㄹ 훼철할 때 남쪽 선비 중 곤재를 추종했다고 하여 옥에 가둔 자가 50여명이요 귀양 보낸 자가 20여명이며 금고 된 자가 400여명 이었다]는 대목에서 볼 수 있듯이 서원이 훼철될 때 마다 수많은 무고한 삶들이 이유 없이 위정자들이 만든 올가미에 걸려 피해를 입었다. 선생의 제자로는 나덕준(나주, 현감), 나덕윤(덕준과 형제로 나주, 감찰), 안중묵(보성, 직장), 최홍우(화순, 별좌), 조수홍(화순), 오익창(무장), 나덕원(덕원과 형제 나주 문평면, 현감), 송제민(광주 호 해광), 배명(무안), 나덕현(나주), 유양(나주목사 몽정의 조카), 정식(전북 무장, 현감), 정인, 김세규(화순, 호 우송), 윤제(함평), 조봉서(나주), 안기현(보성), 나덕수(나주), 정지함(예조좌랑), 남이공(경남 의령 출신으로 관직은 좌의정에 이름), 종실의 화천정 이수붕 외에도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선생의 강학을 듣고자 많은 제자들이 몰려와 세거를 이룬 곳이 불암 마을이고 지금도 제자거리라고 불리고 있다. 허목이 쓴 우득록 발간 서문에 [숙종 6년 자산서원을 훼철할 때 남쪽 선비 중 곤재를 추종 했다고 하여 옥에 가둔 자가 50여명이요 귀양 보낸 자가 20여명 이며 금고 된 자가 400여명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곤재의 학풍이 선생의 사후에도 끊이지 않고 뿌리 내려 호남의 큰 산맥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첫댓글 엄다마을카페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서원이라서 잠깐 시간을 내면 다녀오실 수가 있습니다.
좋은자료 잘보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