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本貫)은 제안(齊安 황주(黃州))이다.
고조(高祖)의 휘는 현손(賢孫)이다.
증조(曾祖)의 휘는 세장(世章)인데, 증(贈)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이다.
조(祖)의 휘는 대림(大臨)인데, 증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이다.
비(妣)는 증(贈) 숙부인(淑夫人) 이씨(李氏)인데, 증 좌찬성 문호(文虎)의 딸이며, 장령 겸지(謙之)의 손녀이다.
고(考)의 휘는 응성(應聖)인데 이천 부사(利川府使)를 지냈으며 증 예조참판 겸 동지의금부 춘추관사이다.
비(妣)는 증(贈) 정부인(貞夫人) 장연 노씨(長淵盧氏)인데 증(贈) 우윤(右尹) 유지(濡之)의 딸이다.
공의 휘는 윤후(胤後)요, 자는 희적(希廸)이요, 호는 월저(月渚)이다.
제안 황씨(齊安黃氏)는 본래 창원(昌原)에서 나왔는데, 고려 때 을구(乙耇)라는 이가 공로가 있어 제안백(齊安伯)에 봉해지자 그대로 적(籍)을 삼았다. 여러 대를 거쳐 호조 전서(戶曹典書) 인(䄄)이 있었는데 그가 선공감 정(繕工監正) 유선(惟善)을 낳았고, 유선이 곽산 군사(郭山郡事)인 석령(錫齡)을 낳았고, 석령은 진서위사령 사직(鎭西衛四領司直) 처상(處裳)을 낳았고, 처상은 정략장군(定略將軍) 미중(美仲)을 낳았는데, 이분이 공의 5대조이다.
공은 만력(萬曆 명 신종의 연호) 정해년(1587, 선조20) 7월 4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장중하고 영특하였으며 신중하여 말이 적고 나태한 모습을 짓지 않았다. 일찍이 이웃 아이와 함께 임정(林亭)의 아래에서 놀이를 하였는데, 여러 아이들이 다투어 과원(瓜園)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고도 공은 혼자서 꼼짝않고 앉아 있었다. 이에 집의 종이 보고서 기이하게 여겨 그릇에 과일을 담아 올린 뒤에야 비로소 맛을 보았는데, 사람들이 그가 원대한 그릇이 될 것을 알았다. 태어난 지 겨우 3년 만에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찬성공(贊成公)의 종손(從孫) 이공 원련(李公元璉)이 아들이 없던 터라 데려다 기르면서 돌보아 교육하기를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하니, 공도 친부모처럼 섬겼다.
당시에 처사 최덕운(崔德雲)이 서울 사람으로 당악(唐岳 중화(中和))에 우거하면서 학도들을 모아 학문을 강론하였는데, 이공이 공을 그곳에 보내었다. 공은 뜻을 독실하게 하고 힘써 행하여 원대한 사업에 힘쓰고 문장이나 아름답게 꾸미는 그런 공부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참판공이 그때 기성(箕城 평양(平壤))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기성은 본래 번화한 곳으로 사람들이 대부분 소리와 음악으로 오락을 즐겼다. 그러나 공은 매번 성근(省覲)의 일로 그곳을 왕래하였으나 마음을 견고하게 가져 막연히 보고 듣지 못한 것처럼 하였으며 잠시라도 서책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래서 약관(弱冠)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이미 사망(士望)을 받았다. 만력 계축년(1613, 광해군5)에 진사에 1등으로 뽑히고 생원에 3등으로 뽑혔는데, 당시의 나이 27세로 재주와 명망이 한때를 휩쓸었다.
갑인년에 참판공의 상을 당하여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병이 들지 않는 한 최질(衰絰)을 벗지 않았다. 복을 마친 뒤에는 향시(鄕試)에 여러 번 참가하였다. 을축년 여름에 순릉 참봉(順陵參奉)에 천배(薦拜)되었다가 그해 가을에 문과 별시(文科別試)의 제4명에 발탁되어 겨우 관계에 진출하게 되었는데, 양모(養母) 윤씨(尹氏)가 세상을 떴으므로 삼년의 심상(心喪)을 입었다. 정묘년 난리에 관서(關西) 지방의 형세가 와해되자 공이 비분강개하여 가족을 단속하여 바닷가로 피신케 하고, 가동(家童) 수십 명 및 이웃의 장정으로 응모한 자 약간 명을 모두 모아 가지고 본부(本府)로 달려갔다. 부사 정호서(丁好恕)가 그의 의기에 감복하면서도 그의 상(喪)을 민망하게 여겨 공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지금 심제(心制) 중에 있으니 어찌 나와 거취를 함께 하겠는가.”
하였으나, 공이 따르지 않았다. 때마침 오랑캐가 평산(平山)에 이르러 화친을 맺고 물러갔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집으로 돌아와서 상소문을 지어 화친을 주장한 자를 배척하였는데, 현도(縣道)의 저지를 받아 올려지지 않았다.
무진년에 심제(心制)를 마치고 비로소 벼슬하였는데, 자궁(資窮)으로 인하여 곧바로 성균 전적(成均典籍)에 제수되었다가 바로 예조 좌랑에 이배되었다. 기사년에 황해 도사(黃海都事)에 제수되었다가 경오년에 들어와서 공조와 호조의 정랑이 되었다. 임신년에 무장 현감(茂長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호조랑 겸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으로 예조에 이배(移拜)되었다가 얼마 후에 호조로 돌아왔다. 여름에 순천 군수(順川郡守)로 나아가 청렴하고 근실하게 다스려서 3개월 만에 성과를 보게 되니,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그의 덕을 기렸다.
계유년에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에 소배(召拜)되었다. 이때부터 여러 번 헌부(憲府)와 춘방(春坊)에 들어가 장령(掌令) 또는 필선(弼善)이 되었으며, 겸 춘추관 편수관으로 《광해실록(光海實錄)》을 편수하는 데 참여하였고, 간간이 내섬시 정(內贍寺正)과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가 되었다. 당시에 공이 춘방에 오래 있으면서 보익(補益)한 바가 많았는데, 하루는 내전(內殿)이 주렴 밖으로 공을 불러들여 청사 단령(靑紗團領)을 하사하고 하교하기를,
“듣건대 그대가 내 아들을 가르쳐 보도(輔導)한 공로가 대단하다 하므로, 특별히 이것을 상으로 준다.”
하였다. 이에 공이 바로 입고 하사한 데 대해 사례를 드렸는데, 조정의 고관들이 영광으로 여겼다.
을해년에 갑산 부사(甲山府使)에 제수되었다가 바로 체차되어 성균 사예(成均司藝)가 되었다. 병자년에 재차 해서(海西)의 좌막(佐幕)이 되었다가 얼마 후에 구성부사(龜城府使) 겸 부원수종사관이 되었다. 이해 겨울에 강포한 오랑캐가 갑자기 침입했는데 여러 진에서는 방관하고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공은 즉시 수하병을 거느리고 상장(上將)의 군문(軍門)에 가서 근왕(勤王)의 계책을 말하니, 원수(元帥)가 허락하지 않으면서 “공은 서생(書生)으로 군사 문제에 익숙하지 못하니, 본부로 돌아가서 성루(城壘)를 굳게 지키도록 하라.” 하였다. 공은 부득이 물러와서 철옹성(鐵甕城)을 지키며 병사를 훈련시키고 성을 순시하는 등 날마다 병졸들 사이에서 지내면서 때로 행재소(行在所)를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옷깃을 적시니,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였다. 난리가 평정되자 흩어져 도망간 자들을 불러 모으고 유랑민을 무마시켜 성실하게 직책을 봉행하는 한편, 잔약한 자를 소생시키고 폐단을 제거하여 대부분 빗질을 하듯 말끔히 정리하였다. 그리고 아권(衙眷 개인의 친속) 한 사람도 대동하지 않았으므로, 그 당시 감사(監司)인 민성휘(閔聖徽)는 상장(上狀)하여 “벼슬살이 3년에 냉랭하기가 산승(山僧)과 같았다.”는 등의 말까지 하였다. 무인년에 통정(通政)의 품계를 그대로 지닌 채 의주 부윤(義州府尹)에 특진되었는데, 이내 다시 구성 부사에 잉임되었다.
경진년에 강계 부사(江界府使)에 제수되었는데 부임하기도 전에 재차 만윤 겸 청북방어사(灣尹兼淸北防禦使)에 제수되었다. 만부(灣府 의주(義州))는 변경의 중진(重鎭)으로 본래부터 물자가 풍부하다고 일컬어져 왔으나 병화(兵火)를 막 겪고 났으므로 수습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화친을 맺고난 초기이다 보니 수응하는 일이 더욱 번다하였는데, 공이 그 사이에서 주선하여 처치를 잘 하였다. 공적인 일을 우선으로 하고 사적인 일을 뒤로 하여 청탁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기뻐하지 않는 자가 많았는데, 얼마 후에 병으로 파직을 요구했다. 그가 돌아갈 때에 행장이 쓸쓸하니, 그 고을 사람 중에 어떤 자가 대모기(瑇瑁器)를 바쳤는데 공이 즉시 중기(重記)에 기록해 두고 갖지 않았다.
신사년에 나가서 순천부(順天府)를 맡았는데 구성과 의주에 있을 때와 같이 다스렸다. 임기가 만료되어 조정에 들어와 오위장(五衛將)이 되었는데, 세 고을의 백성들이 모두 추모하며 비를 세웠다. 갑신년에 원주 목사(原州牧使)에 제수되었다가 바로 체직되었고, 을유년에는 공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여름에 장연 부사(長淵府使)로 나갔다가 8월에 향시(鄕試)의 고관(考官)이 되었는데, 세력있는 집안사람으로 낙방(落榜)한 자의 무함을 받아 공과 여러 시관이 모두 좌천당하고 귀양 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무자년에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는데 병으로 사은숙배하지도 못하고 세상을 뜨니, 이때가 4월 25일이었다. 모월 모일에 평양(平壤) 소재지 북쪽의 자화산(慈化山) 화원동(花原洞) 곤향(坤向)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부인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는 종실(宗室)인 금평군(錦平君) 의수(義壽)의 딸로서 부인의 규범이 있었으므로 평소에 조금도 공에게 누가 미치지 않게 하였는데, 공보다 16년 후에 졸하여 공의 묘에 부장되었다.
5남 2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대요(戴堯)는 사마(司馬)로 지극한 행실이 있었으며 부모의 상에 죽을 먹으며 여묘살이를 하였고, 차남 대순(戴舜)은 생원이며, 그 다음은 대우(戴禹)와 대극(戴極)과 대일(戴一)이다. 두 딸은 이형발(李馨發)과 박석형(朴碩亨)에게 시집갔다.
대요는 3남 4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회량(誨良)ㆍ우량(祐良)ㆍ치량(致良)이며, 딸은 이일(李逸)ㆍ이유인(李有仁)ㆍ이수일(李壽一)ㆍ조지장(趙智章)에게 시집갔다. 대순은 4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기량(起良)ㆍ진량(振良)ㆍ준량(俊良)ㆍ부량(傅良)이며, 딸은 이지연(李志淵)과 권처평(權處平)에게 시집갔다. 대우는 딸 하나를 낳았는데, 노세경(盧世慶)에게 시집갔다. 대극은 1남 4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희량(喜良)이며, 딸은 남석보(南碩輔)ㆍ심송만(沈松晩)ㆍ심한백(沈翰伯)ㆍ권상현(權尙賢)에게 시집갔다. 대일은 후사가 없다. 이형발은 3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두영(斗英)ㆍ두준(斗俊)ㆍ두웅(斗雄)이며, 딸은 병사(兵使) 이후근(李厚根)ㆍ변시태(邊是泰)ㆍ박홍규(朴弘奎)에게 시집갔다. 박석형은 4남을 두었는데, 홍량(弘樑)ㆍ홍주(弘柱)ㆍ홍간(弘榦)ㆍ홍재(弘材)이다. 회량의 1남은 순승(順承)인데 행실로 천거되어 지금 명릉 참봉(明陵參奉)이고, 두 딸은 이주원(李柱元)과 세망(世望)에게 시집갔다. 우량의 2남은 순창(順昌)과 순유(順裕)이며, 1녀는 강익한(姜翼漢)에게 시집갔다. 치량의 2녀는 심담(沈湛)과 전이해(全爾楷)에게 시집갔다. 기량은 자식이 없어 부량의 아들 순정(順鼎)을 후사로 삼았다. 진량의 1남은 순장(順長)이다. 준량은 후사가 없다. 부량은 2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양자로 갔고 차남은 순항(順恒)이다.
공은 단아하고 해맑아 바라보면 신선 같았다. 젊어서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여 경전(經傳)과 성리서(性理書) 등을 두루 복습하지 않는 책이 없었으나 《논어(論語)》에 더욱 힘을 쏟아 반드시 성현이 남긴 뜻으로 실천하였으므로 몸단속하는 것이 예에 맞았으며, 일처리도 사리에 맞았다. 그리고 충(忠)ㆍ효(孝)ㆍ염(廉)으로 몸을 보호하는 병부를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관서 부자(關西夫子)라고 칭하였으니, 재주가 훌륭한 것은 나머지 일이었다.
집에 거처할 때는 꼭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빗고 의관과 의복을 반드시 단속하니 집안이 엄숙하기가 조정과 같았으며 배우기를 좋아하는 정성은 늙어 갈수록 더욱 독실하였다. 일이 없이 한가로이 지낼 때에는 도서(圖書)를 조용히 대하고서 잠자코 음미하느라고 다른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집안을 다스릴 때에는 은혜로 하고 친구를 만나면 성의를 다하며 진실하고 화락하게 하여 은혜와 의리를 두루 지극히 하였다. 사양하고 받는 즈음에는 오직 의리대로만 하였고, 조정의 잘잘못과 고을 사람의 장단점은 일체 남에게 평가하여 말하지 않았으며, 색(色)에 대한 경계를 더욱 엄하게 하였다. 그가 급제(及第)하기 전에 어떤 방백(方伯)이 그의 의중을 시험해 보려고 여러 기생에게 은밀히 명을 내리기를 “황생(黃生)의 뜻을 빼앗아내는 자에게는 상을 주겠다.” 하였다. 이에 한 기생이 술잔을 돌리면서 그의 손을 슬쩍 잡았는데, 공이 정색을 하고 쳐다보지도 않은 채 즉시 한삼(汗衫)을 절단하여 버리니, 사람들이 그의 바른 자세에 감복하였다.
그가 조정에 있을 때는 좋은 일 궂은일을 가리지 않고 오직 맡은 바 임무를 다 하였으며,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이 진퇴 여부에 관계없이 변함이 없었으므로 혹 사장(詞章)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꿈으로 드러나기도 하였다. 큰 고을을 여러 번 맡았으나 한 이랑도 늘리지 않았으며, 거처와 복식이 간략하여 마치 빈한한 선비와 같았다. 남을 구제해 주고 사물을 이롭게 해 주는 뜻이 지성에서 나왔으므로 맡았던 곳마다 그곳 백성들이 모두 사모하였다. 그가 순천(順天)에 있을 때 언젠가 꿈속에서 선묘(宣廟)를 배알하였는데, 선묘가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술을 하사하고 이르기를,
“경이 벼슬살이를 청렴하고 근면하게 하고 마음을 선량하게 가지므로 특별히 본 것이다.”
하였다. 공이 잠에서 깨어 감격하여 흐느끼다가 이어 그 일을 기록하여 자손들이 볼 수 있게 하였다.
공은 구성(龜城)에서 가장 큰 치적을 남겨 그곳 백성들이 고려조의 명신(名臣) 박서(朴犀)와 동등하게 칭송하여 같은 비각에다 나란히 비를 세워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뜻을 붙였다. 그런데 을유년에 석면(石面)에서 땀이 흘러 샘솟듯 하므로 연신(筵臣)이 상에게 진달하여 박공(朴公)의 사당을 세우고 액자를 내렸는데 공의 이름이 우연히 참여되지 않자 서관(西關)의 백성들이 모두 슬퍼하였다.
공의 시사(詩詞)는 맑고 담박하였다. 일찍이 문학으로 중국 사신을 접대하여 수창한 그의 시들이 《황화집(皇華集)》에 실려 있다. 평생 지은 글이 매우 많았는데 평소 뜻이 겸손하여 문필가(文筆家)로 자처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지은 글 대부분이 산실된 채로 수집되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은 단지 척화소(斥和疏)와 율시(律詩) 1백여 수(首)와 제문(祭文)ㆍ상량문(上樑文)ㆍ전문(箋文) 10여 편과 장옥 시초(場屋試草)뿐이다.
아, 공은 멀리 떨어진 시골의 서생으로 평범한 민간에서 기신(起身)하여 문장과 학식으로 세상에 명성을 떨쳤다. 일찍 성조(聖祖)에 발탁되어 시종신(侍從臣)으로 출입하였으며 높은 벼슬을 하여 내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니, 당시 훌륭한 사람 중에서도 공 같은 자는 더욱 뛰어난 인물이라 하겠다. 상하(尙夏)의 쓸쓸한 몇 마디 말이 공에게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마는, 삼가 가승(家乘)을 모아 대략 위와 같이 기록하여 후일에 말해 줄 사람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