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서간도 지역에서의 항일 독립 운동 답④
이 문제는 '서간도 지역의 항일 독립 운동'과 관련한 역사 다큐멘터리 기획서라고 나와 있으니, 그냥 서간도 지역에서 있었던 사실을 찾으면 되겠네요.
'이회영 일가+서간도' 지역을 조합하여 답을 찾아보세요.
서간도 지역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데 앞장섰던 단체는 신민회였습니다. 애국 계몽 운동 단체인 신민회는 공화 정체의 근대 국민 국가 건설을 지향하고 교육과 산업의 진흥을 통한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였어요. 신민회는 일제의 탄압이 갈수록 심해지고 국내 의병 운동이 약화되자 국외 무장 투쟁 노선을 채택하여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였습니다.
1909년 봄 이회영, 양기탁, 김구, 이동녕, 이승훈 등은 비밀리에 신민회 간부 회의를 열어 만주에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할 것을 결의하고 그 후보지로 유하현 삼원보를 결정하였어요.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하고 일제의 탄압으로 신민회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회원들은 삼원보에 신한민촌을 건설하고 경학사라는 항일 독립운동 단체와 신흥 강습소를 세웠습니다. 특히 이에 앞장 선 것은 이회영 형제들이었습니다. 신흥 강습소는 민족 교육과 군사 교육을 실시하여 다수의 독립군을 양성하였어요.
①, ⑤ 하와이 지역에 대한 내용입니다.
1903년 사탕수수 노동자로 하와이에 첫발을 딛은 동포들을 시작으로 미주 지역에는 한인 수가 증가하면서 동포
사회가 형성되었어요. 이를 바탕으로 대한인 국민회가 결성되었고(1910), 박용만은 하와이에서 독립군 사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대조선 국민군단을 결성하였습니다(1914).
② 일본에서 한국인 유학생들은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영향 받아 조선 청년 독립단을 결성하고 2·8 독립 선언을
선포하였습니다(1919).
③ 신한민촌은 연해주 지역에 건설된 한인 집단촌이었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1911년 독립 운동 기지인 신한촌과 자치 조직인 권업회가 조직되었습니다. 그리고 1914년에는
이상설을 정통령, 이동휘를 부통령으로 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가 조직되었어요.
④ 서간도 삼원보에 세워진 신흥 강습소(1911)는 군사 양성과 교육을 함께 하는 신흥 무관 학교로 개편되었어요(1919).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 의열단, 조선 의용대, 한국광복군의 주축이 된 이들은 신흥 무관 학교를 통해 길러졌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1910년대 국외 독립 운동 기지
국외 이주 동포들의 생활
1. 만주 이주 동포
1910년대 | 독립 운동 기지 건설 → 무장 항일 운동 준비 서간도 삼원보 - 신민회가 주도, 경학사와 부민단 편성, 신흥 강습소(신흥 무관 학교) 설립 북간도 용정촌과 명동촌 - 간민회, 중광단, 등 조직, 서전 서숙, 명동 학교 등 설립 |
1920년대 | 무장 독립 전쟁(봉오동, 청산리 대첩) 전개 → 간도 참변과 미쓰야 협정으로 희생 많음, 3부 성립과 통합 운동 |
1930년대 |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활동 약화, 길림성 만보산 사건 발생(1931), 한․중 엽합 작전 전개 |
2. 연해주 이주 동포
1905년 이후 | 한인 집단촌(신한촌 등) 형성 - 국외 의병 운동의 중심지 역할 |
1910년대 | 13도 의군(1910), 성명회, 권업회, 대한 광복군 정부(1914), 대한 국민 의회(1919) 조직 |
1920년대 초 | 볼셰비키 정권이 무장 활동 금지 → 민족 운동 약화 |
1930년대 |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1937) |
3. 일본 이주 동포
1910년대 | 산업 노동자로 취업, 1919년 2․8 독립 선언 발표 |
1920년대 | 조선 유학생 학우회(항일 민족 운동의 중심), 관동 대지진 때 학살(1923) |
중·일 전쟁 이후 | 한국인을 집단적으로 강제 연행 → 일제의 침략 전쟁 도구로 희생 |
4. 미주 이주 동포
20세기 초 |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이주 →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 조건에 혹사 동서 개발 회사(고종 시기 조선인의 하와이 이민을 위해 만든 회사(1902) -이민 공고를 내 이민자를 모집하고 이들을 하와이로 이주시킴 사진 신부에 의한 사진 결혼법은 1907년 이후 하와이에 이주한 조선인 근로자를 위한 법 |
대한인 국민회 | ◦ 미주 지역 항일 운동의 중추 기관 ◦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지원 : 의연금 전달, 애국 공채 매입 ◦ 외교 활동 : 구미 위원부 지원, 뉴욕 약소국 동맹 회의에 박용만 파견 ◦ 군사 활동 : 박용만의 국민 군단, 제2차 대전 때에 한인군 편성 |
유사 기출문제
22회 중급 45번 문제
40. 연해주 이주 동포들의 활동 답①
19세기 후반~ 일제 강점기 만주와 연해주, 중국 관내, 일본, 미주로의 한인 이주와 생활 모습, 민족 운동에 대한 문제도 종종 출제됩니다.
문제에 제시된 안내장의 내용 중 전시관에 제시된 '신한촌', '대한 광복군 정부', '카레이스키'를 통해 이곳이 연해주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는 베이징 조약(1860)을 통해 이 지역을 차지하여 우리나라와 국경을 마주대하게 되었죠. 러시아는 새로 획득한 이곳을 개척하기 위해 한국인의 입국을 허용하고 토지를 제공하는 등 편의를 제공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가난한 농민들이 많이 이주하였습니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할 무렵에는 의병들을 비롯하여 이주 한인이 증가하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곳곳에 한인 집단촌이 생겨나 국외 항일 의병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어요. 그 중에서 대표적인 곳이 신한촌이었어요. 이곳에는 한민회(1905), 13도 의군(1910), 성명회(1910), 권업회(1911), 대한 광복군 정부(1914), 대한 국민 의회(1919) 등 독립 운동 단체가 조직되어 활발하게 활동하였어요. 그리고 이들 단체들은 해조신문, 권업신문 등을 기관지로 발간하기도 했어요.
한편, 이동휘 등에 의해 한인 사회당(1918)이 조직되어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 운동이 등장하였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당국은 한인들의 무장 활동을 금지했기 때문에 독립군을 양성하여 직접 무장 투쟁에 나서는 데는 한계가 많았어요. 1937년에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소련과 일본 간의 전쟁이 발발하면 한국인들이 일본을 지원할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는 소련 당국에 의해 연해주 지역의 한국인 수십만 명이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하는 시련을 겪었습니다.
(나) 만주 이주 동포
1910년대 | 독립 운동 기지 건설 → 무장 항일 운동 준비 서간도 삼원보 - 신민회가 주도, 경학사와 부민단 편성, 신흥 강습소(신흥 무관 학교) 설립 북간도 용정촌과 명동촌 - 간민회, 중광단, 등 조직, 서전 서숙, 명동 학교 등 설립 |
1920년대 | 무장 독립 전쟁(봉오동, 청산리 대첩) 전개 → 간도 참변과 미쓰야 협정으로 희생 많음, 3부 성립과 통합 운동 |
1930년대 |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활동 약화, 길림성 만보산 사건 발생(1931), 한․중 엽합 작전 전개 |
(다) 일본 이주 동포
1910년대 | 산업 노동자로 취업, 1919년 2․8 독립 선언 발표 |
1920년대 | 조선 유학생 학우회(항일 민족 운동의 중심), 관동 대지진 때 학살(1923) |
중·일 전쟁 이후 | 한국인을 집단적으로 강제 연행 → 일제의 침략 전쟁 도구로 희생 |
(라) 상하이
1910년대: 신한 청년당이 결성(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 제출,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로 파견),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1920년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활동, 국민 대표 회의 소집(1923)
1930년대: 김구가 한인 애국단 조직,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 전개
(마) 미주 이주 동포
20세기 초 |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이주 →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 조건에 혹사 동서 개발 회사(고종 시기 조선인의 하와이 이민을 위해 만든 회사(1902) -이민 공고를 내 이민자를 모집하고 이들을 하와이로 이주시킴 사진 신부에 의한 사진 결혼법은 1907년 이후 하와이에 이주한 조선인 근로자를 위한 법 |
대한인 국민회 | ◦ 미주 지역 항일 운동의 중추 기관 ◦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지원 : 의연금 전달, 애국 공채 매입 ◦ 외교 활동 : 구미 위원부 지원, 뉴욕 약소국 동맹 회의에 박용만 파견 ◦ 군사 활동 : 박용만의 국민 군단, 제2차 대전 때에 한인군 편성 |
21회 중급 43번 문제
43. 일제 강점기 일본 지역에서의 항일 민족 운동 답⑤
대화 내용을 통해 (가)에 들어갈 지역을 우선 파악해 보죠.
1923년에 발생한 대지진 때 조선인 6,000여 명이 학살된 곳이라고 하였으니, 관동 대지진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엄청난 지진으로 사회가 혼란해지자 일본은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풀고, 일본인을 강간, 살해하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려 죄없는 많은 동포들이 일본인들에게 무참히 학살되었어요.
그럼 일본 지역에서 일어난 사실을 파악하면 되겠네요.
개항 이후 유학생들이 일본에 건너가기 시작하였어요. 이후 식민 통치 초기에 일본은 한국인의 일본 이주를 허용하지 않았으나 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일본 산업이 크게 발전하여 값싼 노동력이 필요해지자 한국인의 이주를 허용합니다.
이에 따라 생존을 위한 일자리를 찾아 노동자들의 이주가 활발해지면서 유학생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재일 한국인의 다수를 차지합니다.
이후 일제는 침략 전쟁을 확대하면서 노동력이 필요해지자 한반도에서 한국인들을 강제 징용해 가죠.
강제 징용된 이들은 일본, 사할린 등의 군수 공장이나 광산, 비행장, 해군 기지 건설 공사장 등에 동원되었는데,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강제 징용된 노무자 수는 대략 70여 만 명이 되었답니다.
또한 여성들도 근로보국대, 여자 근로 정신대 등의 이름으로 일본 등지로 끌고 가 노동력을 착취하였습니다.
이렇게 강제 동원된 재일 한국인 이주 노동자들은 민족 차별로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 환경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특히, 1923년 발생한 관동 대지진의 수습 과정에서 일본 당국과 언론은 사회 불안을 한국인에게 돌리기 위해 '조선인들이 방화, 우물에 독약을 뿌리고 일본인 살해, 강간하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려, 한국인에 대한 적개심이 고조된 일본인들에 의해 많은 재일 동포들이 무참히 살해당하는 변을 겪었습니다.
한편,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도 항일 민족 운동이 일어났어요.
1919년 일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선 청년 독립단이 조직되었고, 이들은 윌슨의 ‘민족 자결론’에 자극 받아 이광수가 작성한 2·8 독립 선언을 선포하여 3·1 운동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1932년에는 한인 애국단 소속의 이봉창 의사가 일본 천황 행렬에 폭탄을 투척하기도 하였어요.
① 청산리 전투(1920. 10)는 만주(북간도)에서 전개되었습니다.
② 자유시 참변(1922)은 소련령 자유시에서 일어났습니다.
독립군 부대들은 청산리 대첩 이후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 소련령 자유시로 이동했다가 그곳에서 적색군에 의해 무장
해제 당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자유시 참변(1921)을 당하였어요.
③ 윤봉길 의거(1932)는 중국 상하이에서 일어났어요.
김구가 결성한 한인 애국단 소속의 윤봉길은 상하이 전승 기념식이 열리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 폭탄을 투척하 일본
육군 대장 시라카와 등 많은 고관들을 살상하였습니다.
④ 구미 위원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미국에 설치하였던 기구입니다.
임시 정부는 1919년 미국 위싱턴에 구미 위원부를 두어 이승만을 중심으로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한국 독립 문제를
국제 여론화하는 데 노력하였습니다.
⑤ 일본에서는 1919년 최팔용 등 일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선 청년 독립단이 조직되었어요.
이들은 윌슨의 ‘민족 자결론’에 자극 받아 2·8 독립 선언을 선포하였는데, 이는 3·1 운동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20회 중급 42번 문제
42. 일제 강점기 미주 이주 동포들의 활동 답②
첫번째 자료는 '사진 신부', 두번째 자료는 '대조선 국민군단', 세번째 자료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적극적인 재정 지원 활동' 내용이 제시되어 있네요.
이는 일제 강점기 미주 이주 동포들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내용 설명을 쉽고 자세하게 설명하다 보니 길지만 읽어두면 뼈와 살이 됩니다.)
한인들의 미주 이주는 미국 하와이의 농장주들이 노동자를 구하기 어렵자, 대한 제국 정부에 한국 농민의 이민을 요청해 이를 허락하면서 시작되었어요. 이에 황성신문에 이민 모집 광고를 게재해 모집된 사람들을 1902년 12월에 처음으로 하와이로 출발, 1903년에 하와이에 첫발을 내딛었고, 이후 3년 만에 하와이에는 7000여 명의 동포가 살게 되었고, 일부는 미국 본토, 멕시코, 쿠바 등지로 이주해 갔습니다.
사진 신부에 의한 사진 결혼법은 1907년 이후 하와이에 이주한 조선인 근로자를 위한 법이랍니다.
하와이로 이주한 미혼 남자들이 결혼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불만이 높아지자, 농장주들의 요청으로 신랑과 신부가 사진만 보고 결혼을 결정하고 신부가 하와이로 오면 바로 영주권을 내주는 법이었죠. 이때 남자들은 결혼을 위해 젊었을 때 찍은 사진을 보내기도 하는 경우가 많아 막상 도착해 신랑 얼굴을 보고 놀라는 사람이 많았다네요. 문제에 나타낸 사진은 이러한 모습을 나타낸 것이죠.
미주에 이주한 많은 한인들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학교와 교회 등을 세우고, 자치 단체를 만들어 한인 사회를 발전시켰습니다. 1908년에 장인환, 전명운 의사가 스티븐슨(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으로 있다가 미국에 귀국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정당화하는 활동을 함)을 사살하는 의거 활동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동포 사회에 애국심이 고조되어 미주 지역의 한인 단체들을 통합한 대한인 국민회가 조직되었습니다(1910). 대한인 국민회는 샌프란시스코에 중앙 총회, 하와이, 연해주, 만주 등지에는 지방 총회를 설치하였고, 미국에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애국 성금을 전달하였어요. 미국으로 유학간 안창호는 대한인 국민회에 참여하는 한편, 1913년에 흥사단을 부활시켜 무실역행을 내걸고 군인 양성과 외교 활동을 하였으며, 1914년에 박용만은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군단을 결성하여 무장 투쟁을 준비하였어요.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미국에 외교 활동을 위해 구미 위원부를 두기도 하였어요.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독립 공채의 구매나 의연금 모금 등을 통해 독립 자금 지원을 적극적으로 하였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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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마지막문제 답이 어찌 저렇누
감사합니다 ~~
마지막 문제 답 수정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