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경희궁(慶熙宮)의 궁궐로서의 지위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전통문화지도사 경희궁 팀
••• 차례 •••
1장 경희궁의 역사
1. 창건과 양궐체제 하의 경덕궁......2
1) 경덕궁의 창건
2) 이궁의 지위 확보
2. 경복궁 중건 이후 고종-순종 년간의 경희궁......5
1) 양궐체제로부터 배제
2) 대한제국기 경희궁
3. 식민지 시기 경희궁역의 변화......7
4. 해방 이후 경희궁의 변천......8
2장 경희궁의 공간구성
1. 경희궁의 건축적 성격.......9
2. 경희궁의 배치......10
3. 영역별 분류......11
4. 전각의 기능별 구분......12
3장 경희궁을 둘러싼 궁장과 궁문
1 경희궁 궁장......16
2. 경희궁 궁문.....16
1) 흥화문 2) 개양문
3) 숭의문 4) 무덕문 5) 흥원문
4장 외전의 영역.....21
1. 숭정문 2. 숭정전
3. 자정전 4. 태령전
5장 내전의 영역.....26
1. 융복전 2. 회상전 3. 집경당
4. 흥정당 5. 광명전 6. 장락전
7. 춘화정 8. 영취정
6장 동궁영역.....29
7장 기타 영역.....30
8장 경희궁 관련 자료.....34
※ 사진 및 참고문헌
1장 경희궁(慶熙宮)의 역사
1. 창건과 양궐 체제 하의 경덕궁
경희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2가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궁궐로 사적 27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공식명칭은 ‘경희궁지’(慶熙宮地)이다. 조선 후반기에 서궐(西闕)로 불리면서 동궐(東闕)과 함께 조선왕조 정치사의 중심무대 역할을 하였던 궁궐이다.
1) 경덕궁(慶德宮)의 창건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광해군(재위 1608~1623년)은 즉위 후 인왕산 아래, 지금의 사직단 뒤편에 인경궁을 새로 건립한다. 그러나 인왕산의 지맥에 자리 잡은 새문동 일대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왕기설을 내세워 인경궁 건립을 포기하고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의 사가에 광해군 12년(1620) 궁궐을 지으니 그것이 바로 경희궁이다.
새문동은 서북편으로 산을 등지고 동남향으로 평지를 안고 있어서 주거지로 적합했는데 광해군은 그곳 일대에 있던 조관, 종실, 사대부, 서인 등의 집을 빼앗아 그 자리에 궁궐을 지었다.(돈을 지불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광해군이 이궁의 창건을 도모한 배경에는 한양의 지기가 쇠하였으니 교하로 도읍을 옮겨야 한다는 제의를 대신들의 반대로 천도가 어려워지자 인왕산 아래에 궁궐을 지으면 길하다는 왕기설 이외에, 당시 급박한 정치사회적 여건과 도시운영의 관점에서 창덕궁과 창경궁의 기능을 보완할 또 다른 궁궐의 필요성과 궁궐 영건이라는 토목 공사를 왕위의 정통성 및 정치적 지지기반의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았다는 측면도 있다.
광해군은 1623년 경희궁으로 이어하기 위해서 그 준비를 맡길 공작청을 설치하였으나 결국 인조반정을 맞는다.
2) 이궁(離宮)의 지위 확보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가 이괄의 난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이 소실되어 경희궁에 임어하여 9년을 지냄으로써 경희궁은 이궁의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이궁은 법궁에 화재, 전염병, 혹은 변고가 생겼을 때 옮겨 가기 위해 만든 제2궁궐이다.
이에 비해 인경궁은 창덕궁, 창경궁 수리에 쓰여 궁궐로서의 면모를 잃어버린다.
이로써 임진왜란 이전의 경복궁이 법궁이 되고 창덕궁 및 창경궁이 이궁이 되던 양궐체제에서, 창덕궁 및 창경궁이 법궁이 되고 경덕궁이 이궁이 되는 새로운 양궐체제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광해군 폐정의 산물로 인식된 탓에 효종, 현종대를 거치면서 건물 일부가 창덕궁으로 이건되는 등 위축되었다.
경희궁이 양궐체제의 한 축으로 확실한 위상을 잡았던 것은 숙종 대로써 숙종은 숲이 우거지고 전각들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이곳에 머물기를 즐겨하여 경희궁에서 지은 시가 30편이 넘는다. 또 궁궐 경영을 정치적으로 밀접하게 활용하였던 숙종은 경덕궁 전각들에 대해 전반적인 공사를 벌이며 약 12년간 임어하였다.
영조는 재위 37년(1760)부터는 거처를 경희궁으로 정하고 재위 52년(1776) 승하할 때까지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아 재위 기간 중 1/3이 넘는 약 19년 동안 임어하였다.
본래의 이름은 경덕궁이었으나 원종의 시호(원종경덕인헌정목장효대왕, 元宗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 약칭 원종)인 경덕과 같은 발음이라 하여 영조 36년(1760) ‘기쁨이 넘치고 빛나는 궁’ 의미의 경희궁(慶熙宮)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광해군일기》 광해 11년(1619) 2월 21일에 ‘경희궁으로 이어할 길일을 11월로 먼저 택하여 아뢰고 속히 착실하게 감독하라’는 기록으로 보아 ‘경희궁’이라는 궁궐 이름은 광해군 때부터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희궁은 숙종, 영조 대 100여 년을 거치면서 원종의 고궁이자 인조의 잠저라는 인식을 내세워 인조 왕통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두 임금의 임어, 건물 신축, 장기간 활용 등에 힘입어 크게 발전하였다.
특히 경희궁은 영조에게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 적절한 곳으로 인식되었기에 아들 사도세자를 제거하는 대신 손자인 정조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려 할 때 경희궁에서 관례를 올리고 대리청정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세손 시절의 정조가 쓴 ⌜경희궁지⌟에 담긴 경희궁은 바로 이런 시기에 영조에 의하여 만들어진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즉위 초기 1777년 존현각 자객 침입사건을 계기로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 경희궁을 시어소로 삼지 않았으나 다만 재위기간 내내 경희궁의 건물과 궁장을 정성껏 수리하여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장소로 활용하였다.
순조는 짧은 기간 경희궁에 임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세 궁궐이 모두 소실되고 대리청정 중에 세자가 병사하는 불행을 겪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재건공사가 끝난 경희궁으로 이어하여 지내다가 회상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 순조 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궐도안⌟이 남아있어 경희궁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순조의 뒤를 이은 헌종은 경희궁에 임어한 적이 없지만 그의 재위 기간에 《궁궐지》가 증보되어 숙종, 영조, 정조대에 궁궐에서 있었던 왕들의 행적을 그들이 지은 글을 토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경희궁은 인조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머무르면서 《국조오례의》에 의한 수많은 국가적 의례가 행해졌다.
■ 경희궁 임어기간
인조 9년, 효종 1.17년, 현종 3.42년, 숙종 12.6년, 경종 0.33년, 영조 18.83년,
정조 1.42년(세손시절 포함 16년), 순조 4.5년, 헌종 1년, 철종 0.58년
■ 경희궁에서 치룬 의례들
① 탄생 : 숙종(회상전)
② 관례 : 소현세자(경현당), 정조(경현당), 효명세자(경현당)
③ 가례 : 소현세자(숭정전), 숙종과 인원왕후(예연당), 영조 전안례(영휘전)
④ 즉위 : 경종(숭정문), 정조(숭정문), 헌종(숭정문)
⑤ 승하 : 숙종(융복전), 영조(집경당), 순조(회상전)
■ 의례 행사도 중 「기사계첩」(耆社契帖)이 2019년 국보 제325호로 지정
•숙종 45년(1719) 숙종이 59세로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한 행사에(경현당에서) 참여한 관료들이 계를 하고 궁중화원에게 의뢰해 만든 서화첩이다.
•기로소는 연로한 문신을 예우하기 위해 70세 이상, 정2품 이상 직책을 가진 노년의 문관들이 들어가던 기관이다.
•당시 숙종은 기로소에 들어갈 나이가 아니었으나 태조 이성계가 60세에 들어간 전례에 따라 입소했다.
•「기사계첩」은 조선후기 궁중행사도 중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조선 숙종 45년에 열렸던 기로회의 행사장면과 임방의 서문, 왕의 시문, 전체 내용을 요약한 김유의 발문과 참석명단과 참석한 노신들의 초상 등으로 꾸민 화첩이다.
•이 계첩은 원래 12부가 제작되어 한 부는 기로소에 보관하고 나머지는 참석한 11인의 기신들이 각각 나누어 가졌던 것으로, 현재 전해지는 것은 3부이다. 국보 제325호로 지정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보물 제638호로 지정된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본과 보물 제639호로 지정된 홍완구 소장본이 있다.
2. 경복궁 중건 이후 고종-순종 년간의 경희궁
1) 양궐체제로부터 배제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던 경복궁이 고종2년(1865) 4월부터 3년여에 걸친 공역 끝에 중건되었다.
원래 경희궁에는 100여동의 전각이 있었지만 주요 전각 5개를 제외하고 모두 철거되어 경복궁의 궐내각사와 나인전 건설에 사용됨으로써 경희궁은 궁궐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
그동안 경희궁이 일제에 의해 훼손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최근에 이를 뒷받침하는 학술 논문들이 발표되면서 사실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학계를 제외하면 문화재청 홈페이지를 비롯한 어떠한 대외적인 자료에도 이러한 사실이 언급되고 있지 않아 아직도 경희궁이 일제의 만행에 의해서 파괴된 것으로 일반에 알려지고 있다.
경복궁 중건 공사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는 《경복궁영건일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서궐 내에는 숭정전, 회상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흥정당(興政堂)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나인간(內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하였다.’
한일합방 이후 일제 경성부에서 간행한 《경성부사》에 따르면 1910년 당시 경희궁에 남아 있는 전각이 숭정전, 회상전, 흥정당, 흥화문, 황학정 뿐이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경복궁영건일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경복궁영건일기》의 기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경복궁 중건이 시작된 직후인 1865년 4월에서 8월까지 경희궁 훼철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후 철거된 경희궁 부지에 대한 사후 처리에 대한 기록들이 나온다. 1868년 6월에 경복궁 중건을 마친 후 경희궁의 부지를 용동궁, 명례궁, 수진궁, 어의궁 등 4궁을 비롯한 몇몇 관청에 분배하여 개간하도록 했다는 기록과 1870년 호조와 선혜청에서 곡식 보관 창고가 부족하다면 경희궁터에 창고를 지을 것을 건의해 2년 뒤 풍년이 들면서 200칸의 창고를 지은 것과 화약 보관 창고가 들어섰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개화기에 서양인들이 남긴 여러 기록들에도 경희궁이 거의 완전히 훼손된 상황이 나타나 있다. 개화기 당시 한양에 체류한 것으로 보이는 길모어라는 서양인이 쓴 ‘서울풍물지’에 1883년 경희궁터에 뽕나무를 심고 양잠소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고, 콜로네 브라운이 작성한 지도에 경희궁 위치에 '옛 왕궁' 내지는 '뽕나무 궁궐'이란 표기가 있다.
이를 통해 경희궁은 뽕나무 궁궐로도 외국인에게 알려지기도 했으며 군사들의 조련장 또는 창고로 활용되는 등 거의 궁궐의 면모를 상실한 것을 알 수 있다.
2) 대한제국기의 경희궁
1899년 경희궁의 회상전 북쪽에 사정인 황학정이 건립되어 후일 국궁의 모태가 되었다.
1902년 고종황제 어극 40주년 기념 칭경예식 준비하게 되는데 칭경예식의 핵심인 외국의 사절을 초청한 가운데 진행될 관병식의 거행을 위해 고종은 경희궁 수리를 궁내부에 지시했고 이때 경운궁과 경희궁을 연결하는 운교(어로)가 놓이는 등 몇 가지 시도가 있기는 했으나 경희궁이 궁궐로서의 역할을 되찾은 것은 아니었다.
경희궁 주변에는 대한제국기부터 근대적 문물이 들어서서 각종 학교와 신설 관서 및 종교시설이 등장하였고 특히 서대문으로 향하는 전차의 개통은 경희궁 주변의 풍광을 바꾸어 놓았다. 1898년 경희궁 흥화문 앞에서 동대문과 서대문을 잇는 전차로 건설 기공식을 가졌고 다음 해 동대문에서 돈의문까지 우선 운행함으로써 돈의문은 전차의 종점이 되었다. 서북철도국과 협률사 가까이에는 신식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무관학교가 있었는데 무관학교는 1904년 러일전쟁 후 일본 군대가 서울에 주둔하면서 삼청동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서북철도국과 함께 대한제국이 적극 추진한 이른바 ‘광무개혁’의 실체로서 경희궁 주변 일대는 그 추진 공간이었다.
도성대지도
3. 식민지시기 경희궁역의 변화
일제 강점 이후인 1911년 6월 26일에는 경희궁의 토지와 건물 전부가 총독부에 인계되었다. 이후 경희궁은 일제의 의도에 의해 궁궐 중에서도 가장 철저히 파괴되어 궁궐로서의 모습을 상실하였다.
경희궁이 궁궐로서의 면모를 완전히 상실하고 새로운 위상이 부여된 것은 1910년 경성중학교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부터였다. 숭정전 등 일부 전각이 일본인이 다니는 경성중학교의 교사로 사용되고 앞 시기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던 공허지는 학교 운동장이 되고 만 것이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경성 거류 일본인의 수가 증가하였는데 일본인들은 그 자식들을 남대문 일대에 있던 두 개의 소학교에 보낼 수 있었을 뿐 중학교 과정을 이수하려면 일본으로 보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1909년 일진회장 이용구와 송병준이 서대문 독립관 일대에 터를 무상으로 양도함으로써 경성거류민단경성중학교가 설립되었는데 병합과 함께 경성중학교는 경희궁으로 신축 이전한다. 이로써 궁궐로서의 경희궁이 가지는 상징성이 결정적으로 훼손된 것이다.
전매국 관사를 짓기 위해 황학정이 1923년 민간유지에 팔려 사직단 북쪽으로 옮겨간 것을 시작으로 경희궁의 동쪽 21,500평이 전매국 관사를 짓기 위해 잘려 나갔다. 경성중학교 교실로 사용된 숭정전과 임시 소학교 교원양성소 교실로 이용된 회상전이 1926년과 1928년 일본계 사찰인 조동종 조계사로 팔려 나갔다.
회상전과 함께 교원양성소 교실과 기숙사로 쓰인 흥정당도 1928년 장충동에 있는 광운사로 이전되었는데 회상전은 고리(절에서 부처에게 올리는 밥이나 승려의 음식 마련하는 곳)로 쓰이다가 화재로 불탔다. 정문인 흥화문은 1932년 박문사의 정문으로 옮겨갔다.
이후에도 경희궁 부지 매각이 계속되어 이때 41,319평으로 축소하게 되었으며 1944년에는 숭정전 일곽과 회상전, 융복전 터에 방공호를 만들기도 하였다.
수천여 명 이상이 모일 수 있는 넓은 공간을 가진 경희궁은 혜화문 밖 삼선평과 홍제원 및 훈련원 터와 더불어 각종 연설회와 운동회가 개최되는 공간으로 이용되었다.
고종연간에 양잠사업과 관병식을 통해 조선과 대한제국의 ‘개화와 ’자주‘를 드러내고자 한 공간이었다면 통감부 시기에는 운동회와 연설회가 개최됨으로써 ’근대‘와 ’침략‘의 공간으로 활용된 것이다.
경희궁 애초 구역
4. 해방 이후 경희궁의 변천
경성중학교는 1945년 해방이후 국권 수복 후 폐교되었고 해방 직후 경성중학교 부지를 점유한 것은 미육군 항공부대였다. 당시 많은 학교와 단체가 이 곳을 사용하겠다는 진정을 미군정에 제출했지만 미군정령 제4호 ‘미군이 점유한 것을 제외한 모든 학교건물은 즉시 인도하여 학교로 사용하도록 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던 중 1946년 김원규가 서울공립중학교 교장으로 오면서 경희궁 부지에 개교했다.
당시 교지 총면적이 38,270평(현재 서울시 소유 3만 평 정도), 이 중 건평 4,675평, 운동장 9,015평, 정원 및 후원 24,580평이었는데 1946년부터 1980년까지 서울 중고등학교로 사용되었다.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서 있는 운동장에는 1945년부터 1946년까지 미육군 항공부대가 주둔하였으며 1950년 한국전쟁이후에는 주한 외국군 병영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일제 말기에 쓰이지 못했던 방공호가 전쟁 이후 복구 과정에서 잠시 사용되었다.
1970년대 말에 와서 강북 인구를 조절하고 강남의 학교 부족을 해소한다는 정책의 일환으로 시내 공립학교를 강남 등지로 이전하는 사업에 따라 궁터를 차지하고 있던 서울 중고등학교는 1980년 서초동으로 이전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궁터(30,603평)는 현대건설에 매각되었다. 동 그룹은 사옥과 호텔을 조성하려 했으나 궁터는 공원녹지로라도 확보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자, 서울시는 염보현 시장이 부임하면서 현대건설에 당시 매립한 구의지구(강변역 일대)의 택지 5만평과 등가교환하였다. 이해 9월 16일에 국가에서 ‘경희궁지’라고 하여 사적 제271호로 지정하였다. 현재 강변역 일대의 빽빽히 들어선 현대아파트는 경희궁의 흔적인 셈이다. 이때부터 경희궁은 서울시가 관리의 주최가 된다. 1985년에 이르러 건설부 고시 제258호에 의해 공원 용지로 지정되었으며 이어 공원을 조성하여 1986년에 개방하였다.
경희궁 서편 부지에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가 이전해오고 1987년부터 〈궁궐지〉나 〈서궐도안〉 등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단국대학교 박물관팀과 명지대학교 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에서 여러 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그 결과를 토대로 1994년 흥화문이 이건되고 숭정전 및 숭정문이 같은 해 복원된 뒤 자정전 및 자정문, 태령전까지 복원되어 2002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동시에 서울고등학교 운동장 부지 즉 전 경희궁 동궁영역에 서울역사박물관이 건립된다.
현재의 경희궁지는 비록 과거의 모습 그대로는 아니나 공원과 사적지라는 두 가지 요구를 끌어안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고 있다.
2장 경희궁의 공간 구성
1. 경희궁의 건축적 성격
경희궁의 배치 형태와 공간구성은 왕도정치 사상에 따라 좌우 대칭으로 지은 경복궁과 달리 매우 독특하다. 인왕산 끝자락의 경사진 언덕의 지형을 있는 그대로, 자연을 손대지 않고 이용하여 전각들을 배치한 궁궐로 건축사적으로도 그 의미가 크다.
경복궁이 북악산 자락을 의지해 자리를 잡고 있다면 경희궁은 서울의 우백호인 인왕산 자락에 기대어 자리하고 있다. 산줄기로는 백두대간이 북서로 길게 뻗어내려 함경남도 안변과 강원도 회양군에 걸쳐있는 철령을 시작으로 대성산 - 백운산 - 운악산 - 삼각산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의 한 지맥으로 연결되어 진다.
서쪽은 돈의문에서 인왕산으로 연결되는 성벽 아래 경사지이고 북쪽은 사직단으로 넘어가는 경사지이다. 동쪽과 남쪽이 비교적 평탄하다.
경희궁은 창경궁의 제도를 모방하여 소규모로 조성되도록 계획되었고 다른 궁궐과 달리 정문이 단층이고 전각들은 거의 모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궁궐을 구성하는 공간요소인 외전, 내전, 동궁, 궐내각사, 생활기거 공간, 후원의 여섯 공간이 갖춰져 있고 외전, 내전 등의 배치는 자연지형에 맞게 배치되었다.
궁궐을 지을 때 풍수가가 전체 터를 잡고 건물의 좌향을 결정한 탓인지 건물의 구성은 다른 궁궐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 많다. 경희궁의 정문이 동남쪽 모서리에 있어서 정문을 들어서서 서북방향으로 긴 진입로가 열리고 이 진입로 북쪽을 따라 동궁 영역과 침전 영역이 나오고 정전은 가장 뒤쪽에 자리 잡았다. 정전이 앞에 있고 그 뒤에 침전을 두는 전조후침의 일반 원칙과 다르다.
조선시대에는 경희궁에 호랑이가 침입할 정도로 인왕산과 사직단, 경희궁, 덕수궁은 거대한 녹지대로 이어져 있었다. 경희궁의 규모는 비록 작으나 주변이 숲으로 이어져 있어서 그 경치가 빼어났다.
2. 경희궁의 배치
경희궁의 정문이 동남쪽 모서리에 있어서, 정문을 들어서서 동궁의 영역과 내전 앞을 지나 서쪽의 외전인 정전 일곽에 도달하게 되는 특수한 배치와 구성을 보여 준다. 즉 경희궁을 중앙의 남쪽에서 보았을 때 오른쪽이 내전이고 왼쪽이 외전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어 정전인 숭정전 영역이 서쪽에, 침전인 융복전 • 회상전 영역이 동쪽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동남쪽 모서리에 있는 정문을 들어서면 진행방향인 서쪽으로 곧장 어도가 나있었고 금천교와 건명문을 지나 둔각으로 꺾이는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다.
건명문의 오른편에는 동궁의 영역인 경현당과 중서헌, 경선당, 양덕당, 문헌각 등이 자리하고, 건명문 왼편에는 전설사와 빈청, 마청, 시강원, 익위사가 쭉 이어져 있다.
동궁의 영역을 지나면 오른쪽으로는 내전을 구성하는 중심 전각들이 배치되는데 그 정침은 융복전이다. 융복전의 서쪽에는 회상전이 있다. 동쪽에는 별실인 융무당이 있고 주변에 벽파담이라는 연못과 죽정이 있었다. 죽정 서쪽에는 집경당이 있었는데, 다섯 개의 문이 동쪽은 금명문, 서쪽은 연경문, 또 그 서쪽은 청상문, 남쪽은 일영문, 북쪽은 개경문 등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회상전의 서쪽에 있는 덕유당도 내원의 별당이었다.
융복전의 동쪽에 있는 장락전에는 2개의 누각이 있는데 좌측에는 용비루이고 그 아래에 경의헌이 있다. 우측에는 봉상루라는 누각과 연못이 있고 그 아래에 백상헌이 있다.
그리고 내정과 외정이 나뉘는 곳에 흥정당이 있고 전후복도와 행각이 있다. 흥정당 동쪽에 규정각이, 동북쪽에 사현합, 남쪽에 친현각, 존현각과 그 아래층에 주합루가 있고 서쪽에 정시합이 있다.
그리고 내원의 별당으로 12개의 당이 있는데, 궁궐의 북쪽에 있다. 소성당, 계성당, 상란당, 어관당, 계명당, 자란당, 봉생당, 순지당, 복수당, 첨선당이 그것인데 모두 봉황정의 아래에 줄지어 있었다.
내전의 남쪽 영역을 지나자마자 어도는 오른쪽 직각으로 꺾어져 외전인 숭정전의 남문인 숭정문에 이르도록 되어 있다.
숭정문을 들어서면 외전이자 정전인 숭정전 앞에 서게 된다. 이 정전 뒤쪽에 편전인 자정전이 배치되고 자정전 왼쪽으로는 태령전이 나타난다. 태령전 서쪽에는 영렬천과 위선당이 있다.
3. 경희궁의 영역별 분류
서궐도-고려대학교 박물관
서궐도-서궐도안을 기본으로 동궐도의 채색특징을 참고하여 송규태 작가가 그린 그림이다.
1) 숭정전, 자정전 구역
공식 의례와 조회(朝會)를 하는 정전(正殿) 숭정전(崇政殿)
왕이 국정 사무를 보는 편전(便殿) 자정전(資政殿)
2) 태령전 구역
왕의 어진(御眞) 봉안하는 태령전(泰寧殿),
왕의 신위(神位)를 모셔두는 계상당(啓祥堂)
3) 흥정당 구역
내전으로 집경당(集慶堂), 흥정당(興政堂), 경륜재(經綸齋), 위선당(爲善堂), 상휘당(祥暉堂), 함춘헌(含春軒), 안희합(安喜閤), 지효합(至孝閤)
4) 회상전 및 융복전 구역
왕의 개인 생활, 침식하는 대전(大殿) 융복전(隆福殿)
왕비가 생활하는 중궁전(中宮殿) 회상전(會祥殿)
5) 장락전 구역
대비전(大妃殿) 장락전(長樂殿)
대비전 부속 건물 봉상루(鳳翔樓), 용비루(龍飛樓), 대비전 별당 어조당(魚藻堂)
6) 융무당 구역
군사훈련 시범장소
5) 경현당(동궁) 구역
세자 사무 공간 경현당(景賢堂), 세자 서재 문헌각(文獻閣), 세자 강학하는 존현각(尊賢閣), 혼천의(渾天儀) 설치한 규정각(揆政閣), 휴식 공간 청한정(淸閒亭), 춘화정(春和亭)으로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8) 집희당(동궁) 구역
동궁전 내당(內堂) 즙희당(緝熙堂), 양덕당(養德堂), 동궁전 부속 건물 중서헌(重書軒), 동궁전 별당 경선당(慶善堂),
9) 영취정 구역
영취정
춘화각
3. 전각의 기능별 구분
1) 궁궐 출입문
정문 흥화문, 동문 흥원문, 남문 개양문, 서문 숭의문, 북문 무덕문
2) 의식장소 및 정무공간
숭정문, 숭정전, 자정전, 덕유당, 사물헌(소나무와 우물이 있음)
3) 신료접견 및 강연공간
정시합 : 내시들의 사후하는 곳
존현각 : 역대 왕의 세자시절 강독 장소,
흥정당 : 1776년 정조, 흥정당을 편전, 현모문을 합문으로 용도 변경
규정각 : 선기옥형(혼천의) 안치, 영조는 숙종 조에 제작한 혼천의를 중수 후 1732년 건립한 규정각에 안치 ,혼천의는 선인의 형상을 장식하여 끌채가 굴러 다니게 되어 있었으며 영조의 서문과 액자를 함께 보관
억석랑 : 임금이 제사 시 재숙하던 장소
서화문 : 돌 위에 깃발을 꽂아 바람의 방향을 알 수 있는 풍기대 설치
친현각 : 세자 주연 장소
사현합 : 정조 세손시절 머무른 장소로 신료접견실(가까운 신하들들 만나는 곳)
홍태문 : 근처에는 계마조가 있었으며 시들었던 나무가 1661년 되살아나 숙종이 탄생하였고 이후 나무가 번성할 때마다 왕이 태어남
현모문 : 흥정당의 합문
4) 왕과 왕비의 침전
회상전
벽파담 : 1칸의 대나무 정자
통양문 : 계마조가 있음
집경당
융복전 : 1720년 숙종 승하
무일합 : 1796년 정조, 파손된 서북쪽 처마를 수리, 근처에 오동나무, 앵두나무 심어
5) 어진 봉안장소
위선당 : 1726년 태묘의 11실을 위선당 ⸱ 읍화당 ⸱ 자정전에 봉안
태령전 : 1733년 영조 어진 봉안, 뒤편에 암천 위치
6) 세자의 정치 및 교육장소
안희헌 : 휴식 전각,
양덕당 : 동궁의 내당, 혜경궁 홍씨 거처, 뒤뜰 소나무, 덕화전으로 개칭
경현당 : 세자의 강독 장소
함춘헌 : 휴식 전각
지효합 : 휴식 전각
7) 왕실 행사장소
상회당 : 1754년 세자빈의 조현례 장소
광명전 : 내전 수하연, 영조의 가례, 비빈 간택 장소, 선의왕후 빈전설치, 온돌방
8) 왕들의 유희공간
송단 : 정조가 금원에 두 그루의 소나무를 심고 단을 만듦
춘화각
영취정
9) 대비의 공간
장락전 : 인조가 즉위전 머무름, 신정왕후의 간택장소, 순조 빈전설치, 연지가 있음,
용비루 : 숙종이 자의대비에게 헌수하는 어제시 제작
어조당 : 선의왕후 승하
10) 동궁의 부속공간
집희당 : 세자의 내당으로 1744년 영조가 공경과 의리에 관한 어필을 집희당과 세자궁에 봉안, 영조의 세자시절 내당이기도
심서헌 : 세자의 궁료 접견실, 1763년부터 1765년까지 영조가 소대와 주강을 약 870년 이상 개최
11) 군사훈련 시범장소
융무당 : 군대를 시험하고 사열하는 장소, 1693년 숙종의 절구 4수 중 2수 보관
일영헌 : 1693년 숙종의 절구 4수 중 2수 보관
관사대 : 무예 ⸱ 활쏘기 시범장소
12)궐내각사
① 보관 장소
봉안각 : 청나라 칙서 보관
경봉각 : 명나라 칙서보관
이문원 혹은 내각 : 왕의 어진, 어필, 어제 교명 등을 보관. 정조의 어필로 편액 함
② 군사 관련 관청
남소 : 오위장 숙식소
내삼청 : 국왕 호위와 궁궐 수비 담당
도총부 : 궁궐 및 한양 방위사령부 같은 곳으로 숭정전 서남쪽에서 홍문관 남쪽으로 변경됨
③ 정치관련 관청
홍문관 또는 옥당 : 궁중의 문서관리 및 왕의 자문기관
예문관 : 칙명과 교령을 기록하는 관청
무겸청 또는 선전관청 : 국왕의 명령를 전달,
승정원 또는 정원 : 왕명의 출납을 관장
빈청 : 2품 이상 관리의 회의실
④생활관련 관청
일영대 : 해시계
누국 혹은 금루 : 자격루 안치
약방 : 약재 관리
서방색 : 붓 벼루 등을 관리
궁방 : 활, 화살촉을 만드는 기관
사옹원 : 왕의 식사, 궐내 음식 공급
태복시 혹은 내구 : 왕의 가마등을 관리하는 관청
마청 : 마구
전설사 : 장막을 치는 일을 보던 관청
상의원 : 왕과 왕비의 의복 제작 및 보화, 금보 등을 보관
3장 경희궁을 둘러싼 궁장과 궁문
1. 경희궁의 궁장
현재 경희궁 터는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선 자리와 그 서쪽 경희궁 공원으로 쓰이는 일대가 쉽게 눈에 들어오지만 본래의 경희궁 궁장은 이 일대를 훨씬 넘어선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다.
우선 동쪽으로 보면 서울역사박물과의 동쪽, 현재 주택지와 음식점들이 섞여 있는 지역이 모두 포함되어 있어서 경희궁의 아침이라는 주택 단지의 경계까지 동쪽 궁장이 있었다. 북쪽은 현재 성곡미술관 뒤로 사직단으로 넘어가는 곳까지 펼쳐져 있었고 서쪽은 서울 성곽의 서쪽 성벽과 경계를 함께 했는데 지금은 궁터 자리에 서울특별시교육청이 들어와 있다. 그 뒤로는 높은 경사지에 기상관측소가 있다가 지금 기상산업진흥원이라는 기관이 쓰고 있는데, 이곳은 경희궁의 가장 높은 전망 시설인 송단이 있었던 자리에 해당한다.
서울역사박물관 남쪽의 큰길 역시 일부는 궁터였다.
궁장의 형태는 굴곡이 많은 지형만큼이나 불규칙하다. 전체적으로는 타원형에 가깝지만 일직선을 이루는 곳은 거의 없고 구부러지고 휘어진 담장이 지형의 높낮이에 따라 구불구불 이어졌다.
지금도 궁장의 일부가 남아 있는데 서남쪽 궁장 일부가 지금 어느 음식점 마당 뒤에 남아 있고 ‘경희궁의 아침’이라는 주택단지와 경계를 이루는 내수근린공원의 높은 곳에 일부가 있다.
다만 궁장은 근래에 수리를 하면서 사고석으로 치장하는 바람에 토벽에 막돌을 끼워놓았던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
2. 경희궁의 궁문
궁문은 궁역의 경계이기도 하기 때문에 궁장이 훼손된 경희궁에서는 궁문이 더할나위 없이 중요하다.
경희궁의 궁장에는 모두 다섯 군데 출입문이 있었다. 동남 모서리에 정문인 흥화문이 있었고 그 북쪽 가까이에 흥원문이 있었다. 흥화문의 서쪽 현재 흥화문을 복원해 놓은 위치쯤이 일반 관리들이 출입하던 개양문 자리이고 서쪽에 숭의문이 있었다. 정문인 흥화문 다음으로 중요한 문은 북문인 무덕문이었는데 그 위치는 자정전 북쪽 담장을 넘어가면 동쪽으로 넓은 공터가 있는데 지금의 축구회관 바로 북쪽 으로 추정된다.
궐문을 지키는 군사의 수는 영조 22년(1746) 12월 29일조에 훈련도감에서 아뢰기를 ‘흥화문의 군명 1백 명을 파총, 초관 각 한 명에게 영솔시키고’라는 기사와 정조 1년(1777) 8월 6일조에 ”훈련도감에서 흥화문의 군사 1백 명을 금호문으로 옮기어 들이고 원래 내입하는 군사 1백 명을 홍화문과 숭의문으로 옮기어 들이며,‘라고 한 기록으로 보아 임금이 경희궁에 있었을 경우에 각 문에는 군사 1백 명 이상이 궁문을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희궁의 궁장 주변 다섯 출입문은 각각 운종가로 이어지거나 돈의문과 연결되기도 하고 또 사직단과도 이어지면서 도성 서쪽의 궁궐로서 주변 시설들과 크고 좁은 기운을 통해 소통하고 있었던 셈이다.
1) 흥화문(興化門)(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
흥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의 경희궁에 남은 유일한 옛 건물로 1618년에 건립되어 고종 때 문을 수리한 것 빼고는 창건 때의 모습을 충실히 간직하고 있다.
‘교화를 북돋우다’라는 의미로 다른 궁궐의 정문처럼 ‘화(化)자를 사용하였다. 궁궐의 동남쪽 즉 지금의 구세군 회관 남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정문이 모두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 비하여 이 건물만은 단층으로, 정문의 격식이 낮은 것은 경희궁이 유사시에 임금이 본궁을 떠나 피우하는 이궁으로 창건된 데 기인된다고 판단된다.
경희궁 건물 중 가장 많이 옮겨 다닌 것이 바로 흥화문이다. 1915년 경성시구개수사업의 일환으로 경희궁 남쪽 도로 확장시에 도로와 나란히 남향으로 이건되었다가 1932년에 일제는 지금의 신라호텔이 서있는 장충단공원에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사당인 박문사를 지으면서 흥화문을 옮겨가 사당의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야주개를 밝게 비추던 현판도 이등박문의 호를 따서 ‘경춘문’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조선 왕조의 몰락과 함께 일제강점기에 경희궁의 수난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흥화문은 경희궁 터로 돌아왔지만 제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문이 서 있던 자리에 이미 구세군회관이 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제자리가 아닌 궁의 남서쪽 모퉁이에 남향으로, 더구나 흥화문의 위용을 돋보이게 하던 월대와 좌우의 담장도 없이 아주 어색하게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흥화문 건물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가운데 어간의 기둥 간격 폭과 좌우 협간의 폭이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점이다. 보통 출입문에서는 어간을 좌우 협간보다 넓게 잡아 어간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여기서는 거의 차이를 두지 않았는데 그것이 어떤 이유인지는 잘 알 수 없다.
공포는 전형적인 17세기 다포식의 시대적 특징을 갖추고 있으며 같은 시기에 지어진 숭정전과 동일하다.
흥화문의 공포 모습은 공포의 가로부재인 첨차와 세로부재인 살미의 일체화나 초화문이나 운공형식 등은 동시대 일본이나 중국의 공포가 많은 다포 계통의 건축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형식이다. 건축 학자들은 이와 같은 양식은 오히려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에 나타난다며 ‘우리나라 토착적인 주심포 기법과 16세기 이후 다포형식이 가미된 것’으로 해석한다. 이는 원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다포 계통의 건축기법이 이때 와서야 비로소 우리의 고유한 형식으로 새로운 방향을 잡았다는 것이다. 흥화문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창경궁 명정전(1616)이나 창녕의 관룡사 대웅전(1618) 등에서도 이와 같은 형식이 확인 된다.
궁궐 정문을 누각식 중층으로 짓는 것은 상층에 북이나 종을 올려놓아서 시각을 알려주거나 왕의 출궁이나 환궁 때 북을 울려 왕의 움직임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는 목적도 있다. 그러나 단층인 흥화문에서는 북을 놓을 마땅한 곳이 없어서 출입문 기둥 좌우에 북을 놓았다고 한다.
옛 사진에 보면 처음 동향해 있을 때 문 앞으로 길게 월대가 마련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남향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월대는 사라졌으며 1988년 문을 지금 위치에 다시 지을 때에도 월대는 복구되지 못했다. 이전의 초석은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 가있다.
영조 때 제작된 <도성대지도>를 보면 흥화문 앞으로 운종가로 이어지는 대로변 북쪽에는 훈국신영 즉 훈련도감의 신청사가 있고 이어서 비변사 청사가 있고 조금 더 나아가면 북쪽으로 야주현이라는 고개로 넘어가는 야주개길이 그려져 있다.
훈국신영 바로 앞에서 길이 서남쪽으로 갈라지면서 돌다리를 지나면 돈의문으로 가는 큰 길이 난다. 따라서 흥화문 앞길은 흥화문 조금 앞에서 서남쪽으로 돈의문 방향으로 길이 나 있었다고 짐작된다. 그 길 중간쯤에 관상감이 있고 뒤에 경희궁의 남문인 개양문이 표시되어 있다.
현판 글씨는 본래는 당시 현감 명필 존오 이신이 쓴 것으로 전해진다. 흔히 경희궁을 야조개, 야주개 궁궐이라 불렀는데 이신이 쓴 현판의 글씨가 빼어나 밤에도 광채를 발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한경지략》(漢京지略)의 경희궁 조(條)에 ‘경희궁 동문을 흥화문이라 하는데 이것이 정문이다. 그 현판의 글씨는 이신이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판은 박문사의 정문으로 쓰일 때 경춘문(慶春門)으로 바뀌면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문앞에서는 죄인 신문, 교서 반포, 구휼을 행했다. 특히 영조는 백성에게 쌀을 나눠주는 사미행사를 자주 열었는데 보통 사미행사를 하면 사궁민(四窮民)이라고 지칭되는 환⸱과⸱고⸱독 즉 생활이 어려운 노인, 과부, 고아, 홀로 사는 사람들이 대상이었다.
영조는 재위 9년경부터 술을 금하는 조처를 취했는데 사대부가에서 이를 어기는 일이 잦았다. 영조40년(1764) 4월 26일, 왕은 흥화문 앞에 백성들을 크게 모아놓고 포도청에 명해 술 빚기를 금지한 영을 어긴 사대부들을 붙잡아 오게 해 군중 앞에서 조리돌리게 하고 서민으로 삼아 절도와 육진에 정배를 보냈다. 후에 금주령의 폐단이 많이 지적되어 술주정하는 것만 금단하게 하고 술항아리 단속은 금하였다고 한다.
1932년에 일제는 지금의 신라호텔이 서있는 장충단공원에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사당인 박문사를 지으면서 흥화문을 옮겨가 사당의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조선 왕조의 몰락과 함께 일제강점기에 경희궁의 수난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해방 후 적산사찰 제1호로 지목되던 박문사는 미군정에서 적산에 대한 점유권을 행사하여 미군이 사용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폭격 속에서 살아남은 2층 콘크리트 건물인 박문사는 전쟁 후 ‘국군영현봉안소’로 사용되었다가 1959년에 외국 귀빈을 접대하기 위해 박문사를 헐고 영빈관을 지으면서 흥화문은 그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1973년 5월에 신라호텔의 전신인 (주)임피리얼이 영빈관을 인수하면서 흥화문은 신라호텔의 정문 구실을 하다가 1988년 현재의 자리 즉 경희궁의 남문인 옛 개양문 자리이기도 하고 서울고등학교 정문 자리에 이건하였다.
흥화문 옛모습-국립중앙박물관
2) 개양문(開陽門)
궁성의 남문인 개양문 쪽에는 정당, 도총부, 내의원, 홍문관 등에 이르기까지 궐내각사가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위치와 규모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주로 조정 신하들이 모두 여기를 경유하여 출입하였으며 내시의 마필이 출입하는 문이었다. 개양문 서쪽에는 문신 • 무신 당상관으로 소임이 없는 사람들을 대우하던 중추부가 있었고 남쪽에는 방림원이 있었다. 1789년 문 밖 8보 좌우에 하마비가 설치되었다.
개양문은 남산에 있는 일본사찰 서본원사에 매각되어 정문으로 사용되었가 이후 경성방송국을 거쳐 1964년부터 성균관대학교 정문인 대성문으로 사용되어 60~70년대 성균관대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차량통행에 방해가 되어 1976년 석조교문으로 교체되었고, 이후 신라호텔로 매각되었다고 구전되나 지금은 그 행방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3) 숭의문(崇義門)
외전인 숭정전 서쪽에 있었으며 문안에는 서소가 있고 군사를 출동할 때에만 열기 때문에 항상 문을 닫아 두었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교육청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1890년대의 한 사진을 보면 성벽과 궁장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평행하게 내려오다가 경희궁의 숭의문을 지나 갈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4) 무덕문(武德門)
문의 위치는 내전의 북쪽 마지막 부분에 있다. 지대가 높아서 그 문을 나가서 북쪽으로 조금만 가면 사직단이 가까이 보여서 임금이 ‘기곡제를 지낼 즈음에는 무덕문 밖을 나아가 사직단을 바라보았다’는 기록이 실록에 자주 등장한다.
무덕문을 사용하는 것은 임금이 기곡제가 있을 때와 군사들이 궁궐을 호위하기 위해 개폐하는 경우에만 사용되었다.
5) 흥원문(興元門)
경희궁의 동쪽 문으로 흥원문 안의 북쪽으로는 상의원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궁인이 출입하는 문이었으며 주로 중궁전과 대비전 궁인들이 많이 출입하였던 듯하다. 1789년 문 밖 8보 좌우에 하마비가 설치되었다.
4장 외전(外殿) 영역
1. 숭정문(崇政門)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을 들어가는 정문으로 임금의 즉위식과 조참이 열리던 곳이다.
숭정문으로 오르는 어계의 첫 번째(하대) 기단에는 중앙의 좌우에 서수(기린 따위의 상스러운 짐승)만을 놓은 것이 좀 어색하나 두 번째(상대) 기단으로 오르는 석계 중심부에 두 마리 봉황이 새겨진 답도를 놓았고 그 좌우에 서수를 소맷돌처럼 장치하여 운치를 더한다.
발굴조사 결과 이곳에서는 어계와 석축기단, 숭정문지, 적심석 6개 및 행각의 동•서•남 회랑지 위치를 확인함으로써 원형 복원이 가능하게 되었다.
숭정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맨 아래 2단은 현장에서 발굴한 본래의 계석을 그대로 사용해 400년의 풍상을 한눈에 느낄 수 있다.
2. 숭정전(崇政殿)
바로 이 숭정전에서 “嗚呼, 寡人思悼世子之子也.”
정조가 즉위한 바로 그 날 신하들에게 내린 윤음의 첫 머리를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외쳤다. 정조 자신의 정체성을 밝힌 의미있는 공간이다.
숭정전의 남쪽은 숭정문(崇政門), 동남쪽은 건명문(建明門), 동쪽은 여춘문(麗春門), 서쪽은 의추문(宜秋門)이 있었다. 현 건물은 1988년에 복원한 것으로 중층의 월대 위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을 얹고 주심포 양식을 한 단층 건물이다. 조정에는 화강암 판석을 깔고 어도(御道)와 품계석(品階石) 등을 복원하였다. 숭정전 중층 월대의 장대석 일부와 아래층 월대 계단의 답도와 서수 등은 지난 1985년 경희궁터에서 발굴된 옛 것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현존하는 건물은 창건 공사 초기인 1618년경에 완공된 건물로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 창경궁 명정전, 덕수궁 중화전에 해당하는 정전으로 ‘숭정’(崇政)은 ‘정사를 드높인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중월대 위에 웅장하게 서있는 숭정전은 임금이 문무백관에게 조하를 받고 정령을 반포하며 외국사신을 접견하며 즉위, 책봉, 혼례 등 나라의 공식 행사를 치르는 공간인 만큼 남향으로 놓였으며 경희궁 안에서는 가장 크고 화려하게 지어진 장엄한 건물이다.
1820년대 제작된 <서궐도안>에 의하면 경희궁에는 99동의 건축물이 들어서있는데, 이 중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숭정전과 흥화문, 황학정이다.
답도에 봉황 두 마리는 아열대 지방에 사는 동물로 꼬리의 털에 오색광채가 있다 해서 오행사상과 연관지어 길하다고 생각해 궁궐마다 답도에 새긴다. 하월대 봉황은 본래의 것이나 상월대 답도는 복원한 것으로 본래의 것은 동국대 정각원에 있다.
경희궁의 건축물 중에서 가장 오래 되었으며 창경궁 명정전과 함께 조선 중기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어서 건축사적으로도 의미있는 건축물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주심포계 단층 팔작지붕 건물인데, 다포계 건물인 다른 궁궐의 정전과는 달리 주심포계 양식을 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주목을 끄는 점이다.
숭정전의 본래 건물은 1926년 일제에 의해 일본 불교의 한 종파인 조동종의 조계사로 이전되었고 일제시기 혜화전문학교가 대학으로의 승격을 준비하면서 중구 필동3가 26번지, 즉 조동종 조계사 소유지를 그 교지로 수용하면서 동국대학교의 소유가 되었다.
1963년경에는 체육관으로 사용되는 것이 확인되었고, 1976년부터 현재의 위치로 이전 복원하여 1977년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현판을 달고 개원한 이래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동국대학교 구내의 정각원이라는 법당으로 쓰이고 있는데, 내부구조가 크게 변경되어 있고 1989년부터 진행되었던 경희궁 복원 때는 너무 노후되었다는 이유로 원래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새 건물로 복원하게 되었다고 일반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89년 7월 5일 서울특별시 고건 시장이 쓴 ‘숭정전 복원 상량문’에 보면 “당초 숭정전 복원은 동국대학교내에 현존하는 원건물을 이전 복원할 계획이었으나 학교측의 반대로 신축복원하게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가장 좋은 복원은 옛 건물을 그대로 가져다가 복원하는 것이다. 목조건축의 해체했다가 다시 조립할 수 있다는 건축의 장점을 살리지 못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정전 안에서 목조로 만든 어계를 오르면 육각의 면으로 구성된 육우평상을 설치하였는데, 평상으로서의 기능이 아닌 용상과 곡병의 기능을 보조하며 지상에서의 모든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용상은 절대 권력자인 왕의 공간이다. 특히 어좌에는 <주역>의 8궤를 적용해 64개의 조각으로 제작되어 있다. 그 뒤로 어좌의 배면을 장식하는 곡병을 세웠는데 중앙과 좌우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삼(三)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듯 만물의 가장 중심이 되는 천 • 지 • 인의 공간이다. 따라서 곡병은 장식적인 기능보다는 왕의 변화무쌍한 기운이 백성을 위해 작용하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곡병 뒤에는 후벽을 세우고 일월오봉병을 설치하는데 오봉병·일월오봉병·일월오악도·일월곤륜도라고도 한다.
해는 왕, 달은, 왕비, 오봉은 우리나라 국토를 상징하는 것으로 북쪽부터 백두산, 동쪽에 금강산, 서쪽에 묘향산, 중앙에 삼각산, 남쪽에 지리산 산봉우리를 나타내며 파도는 백성, 소나무는 조선인의 절개를 상징한다.
즉 해와 달은 음양(陰陽)을, 다섯 봉우리는 오행(五行)을 상징한다. 오행은 인, 의, 예, 지, 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음양오행론과 우리 고유의 오악 신앙이 반영되어 있다. 하늘과 땅, 물이 나타나니 그것은 곧 우주를 의미하며, 우주의 생성과 변화, 운행의 체계인 음양오행을 대변하는 상징물들을 주관하는 이 그림의 주인공인 국왕은 곧 우주의 주재자, 곧 임금이 중심이 되어 국가와 모든 백성을 경영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정전, 편전, 침전, 왕이 행차하는 곳. 돌아가신 후 제궁 뒤에도 설치한다. 오봉도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오직 조선에서만 기록되고, 확인되어 조선 고유의 문화와 사상을 반영한 그림이라고 여겨진다.
천장은 소란반자로 마감하였고 한복판에 움푹 들어가게 보개천장을 만들었는데, 특히 광해군 때 제작된 국내 유일의 흑칠조룡은 검은 빛깔의 두 마리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주목된다. 현재는 복원한 것으로 장난감같이 조악하게 제작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 궁궐복원이나 숭례문 복원 사례에서 보듯 기술의 단절과 시대적 감각에도 차이가 있고, 예산이나 고증을 위한 충분한 자료 확보 등의 여러 문제를 고려해서 복원은 긴 시간과 신중함이 필요하다 하겠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용마루에 취두, 합각마루에 용두, 추녀마루에 잡상을 두루 갖추고 있어 궁궐의 정전다운 품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곳에서 소현세자와 세자빈 민회빈 강씨가 가례를 올렸고 1844년 헌종과 효정왕후의 가례가 이곳에서 열렸는데 이것이 경희궁에서의 공식적인 마지막 행사이다.
숭정전 옛 모습-국립중앙박물관
정각원
숭정전 천장 옛 흑칠조룡 현재 숭정전 천장 칠조룡
3. 자정전(資政殿)
자정(資政)’은 ‘정사를 돕는다’는 의미이다. 국왕이 신하들과 조참이나 상참을 열거나 경연을 여는 등의 일상적인 공무를 수행하던 경복궁 사정전, 창덕궁 선정전, 희정당, 덕수궁 준명당에 해당되는 편전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자정전이 높은 비탈에 위치하여 소편전인 흥정당에서 야대, 소대, 신하들의 인견을 했다는 기록이 많다. 그래서 자정전은 편전으로 썼던 기록보다 빈전이나 혼전으로 쓴 기록이 더 많은데 숙종과 인헌왕후(원종비) 인선왕후(효종비). 인경왕후의 빈전으로도 쓰였다.
왕이 돌아가시면 빈전도감, 산릉도감, 국장도감이 만들어진다. 도감은 임시관청이다. 왕릉이 조성되어 시신이 안치될 때까지 5개월간 빈전(殯殿)에 시신을 모신다. 그리고 시신이 매장되어 백(魄)이 땅으로 돌아가면 혼(魂)을 기리기 위해 신주(神主)를 3년간 혼전(魂殿)에 모셨다가 3년이 지나면 종묘에 부묘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왕실의 유교적 묘제질서이다.
숙종의 재궁을 발인하려 할 때 자정문이 자정전과 숭정전을 잇는 일직선 축에서 서쪽으로 치우쳐 있고 자정문 밖 지형의 경사가 매우 급하고 협소해서 결국 자정문 동쪽 행각을 철거하고 숭정전 내부까지 흙을 보토하여 경사로를 만들어 윤여를 설치하여 발인했다.
또 자정전은 임시혼전으로도 쓰이기도 했는데 종묘에 불천위 왕의 신위가 계속 늘어나 증축할 때 예를 갖춰 신위를 조용한 궁궐에 모시게 된다.
4. 태령전(泰寧殿)
‘만사가 형통하고 평안하다’는 의미이며 편전인 자정전의 서쪽에 위치한다. 현판 글씨는 한석봉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본래 이 건물의 용도가 특별히 지정되어 있지 않았던 때문인지 그 쓰임새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영조는 자신의 어진이 새로 그려지더니 영조 20년(1744)에 태령전을 중수하고 이곳에 자기의 초상화를 보관했다는 기록 있다. 이는 조선왕조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로, 이미 승하한 선왕의 영정을 모시는 건물은 있었어도 현 왕의 어진을 모신 전각은 이 태령전이 유일하다. 이 때문인지 영조가 승하한 후에는 혼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곳에서 정조의 첫 아들 문효세자의 전작례가 시행되었다.
태령문은 다른 전각의 문과 달리 솟을 대문으로 단일이 아닌 삼문으로 지어 사당의 문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현재 영조의 51세의 초상화의 영인본이 봉안되어 있다. 보물로 지정된 51세 때의 초상화인 영조어진은 이모본으로서, 1900년에 조석진(趙錫晉), 채용신(蔡龍臣) 등 당대의 일급 초상화가가 그린 것이다. 이때 범본이 되었던 원본은 영조 20년(1744)에 초상화의 고수(高手)였던 장경주(張景周), 김두량(金斗樑) 등이 제작한 것이다.
원본은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를 받들던 육상궁(毓祥宮)에 봉안되었다가 6·25 전쟁 때 소실되고 지금은 그 이모본만이 남아 있다.
해방 후에 궁중유물목록에 의하면 어진이 45점이상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 모든 문화재가 부산으로 피난을 가면서 부산의 광복동의 약품 보관 창고인 관재청에 보관을 하였다. 휴전 후 1954년에 정부가 서울에서 정비하고 있을 대 1월에 촛불이 넘어져서 불이 났다. 그래서 어진이 대부분 불타고 간신히 반쪽만 불에 탄 영조의 연잉군시절, 노년기 철종, 익종의 어진만 구할 수 있었다. 이 일로 유물 3,400여 점도 불에 타 재로 변했다.
5장 내전(內殿) 영역
1. 융복전(隆福殿)
임금이 생활하고 침식하는 대전으로서 회상전 일대와 집경당, 정사를 돌보는 흥정당 일대와 더불어 궁궐의 중앙부이다.
1626년 인원왕후, 1674년 인선왕후, 1680년 인경왕후, 1720년 숙종이 승하한 곳이다.
회상전 동쪽, 흥정당 북쪽에 위치하고 순조 29년에 경희궁에 큰 불이 나서 융복전과 회상전, 집경당, 흥정당 등이 소실되었다. 화재로 소실된 경희궁의 전각들을 효명세자의 의지로 이듬해부터 복원할 때의 기록인 《서궐영건도감의궤》가 남아 있다.
숙종은 탄강 장소가 회상전, 가례장소는 집경당, 승하한 곳은 융복전이었다는 점에서 숙종은 경희궁과 매우 인연이 깊다.
2. 회상전(會祥殿)
왕비가 생활하는 대내의 정침으로 본래 원종이 살았던 옛 집터이다.
현종 2년(1661) 숙종이 탄생했고 인조 4년(1626) 인헌왕후 구씨, 현종 15년(1674)에 인선왕후 장씨, 숙종6년(1680) 숙종비 인경왕후, 1834년 순조가 승하한 곳이다. 특히 인선왕후 장씨가 승하하였을 때 제2차 예송논쟁이 일어난다.
회상전-국립민속박물관
3. 집경당(集慶堂)
회상전 서쪽에 직각 방향으로 위치했으며 그 남쪽에 흥정당이 있다.
숙종과 인원왕후가 가례를 올린 곳이기도 하고 영조가 임오화변 이후 이곳에서 머물다가 1776년 승하했다.
처음에는 이름이 예연당이었으며 영조가 별칭으로 정와당, 종용당으로 불렀고 1774년 이곳에서 영조의 빠진 이가 새로 났다는 기록이 있고 1776년 승하마루와 온돌을 갖추었다.
4. 흥정당(興政堂)·
신료를 접견하고 강연을 베푸는 곳으로 내정과 외정이 나뉘는 곳에 있다. 왕이 실제로 신하들과 국사를 논의하는 일은 대부분 이곳에서 했다.
두 그루의 계마조(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말을 메어두던 대추나무)가 있었다.
5. 광명전(光明殿)
경희궁의 진면목은 광명전 주변이었다. 주로 왕실의 대규모 연회를 여는 용도로 지어진 광명전을 두고 영조는 경희궁에서 가장 잘 지은 건물이라는 평을 했다. 광명전의 서쪽에 두 개의 정자가 있는데, 하나는 영취정이고 다른 하나는 춘화정이다.
6. 장락전(長樂殿)
대비를 모시는 침전으로 융복전과 광명전 동쪽에 위치하고, 다른 궁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중층 누각이 좌우에 뻗어 있어서 독특한 외관을 꾸미고 있다.(용비루, 경의헌, 봉상루)
7. 춘화정(春和亭)
1704년 숙종 때 건립하였는데 정면 1칸, 측면 1칸에 지붕을 절병통(節甁桶)으로 마감한 사모정이다. 버드나무, 매화, 국화, 복숭아꽃 등이 심겨 있고 사방이 트여있는 시원한 구조로 멀리 관악산을 보거나 꽃을 구경하는 왕의 휴식처였다. 현재 성곡미술관 전시실 입구에 반달 연못 남아 있다.
누각 위의 봄바람이 좋아
섬돌 가에 반달같은 연못 있네.
앉아 물고기 뛰어 노는 곳을 보네
조용히 려천(戾天) 시를 읊네.
「춘화정에서 반달연못을 바라보며(在春和亭臨半輪池)」숙종(『궁궐지(宮闕誌)』 중)
'반월석조‘는 1704년 건립된 경희궁역의 정자 춘화정 앞에 있던 ‘반월형 연지’로 가로폭 150cm에 이르는 대형 화강암 통돌(全石)을 안팎으로 가공했다. 안쪽에는 두 마리 잉어가 여의주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조각하고, 연지 상단 테두리에는 세 마리의 서수를 조각했다. 서수상 아래에는 구름 형태의 모란문이 조각되어 있다. 서수의 자세와 표현방법, 문양과 조각 기법을 통해 춘화정이 건립된 1707년 경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숙종이 노래했던 ‘춘화정 반월형 석조연못’(이하 반월석조)을 자유로이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현재 반월석조는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성곡미술관에서 소장 중이지만 2017년 성곡미술관이 미국계 투자기관으로 소유권이 넘어가면서 유물의 향방을 가늠하기 어렵게 되었다.
8. 영취정
정면 4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본 건물에 작은 규모의 건물을 연결하여 ‘ㄴ’자 형의 독특한 구조를 보이는 정자이다.
영조 말년 12년 동안 매일 아침마다 수레를 타고 올라가 숙빈 최씨를 모신 육상궁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6장 동궁(東宮) 영역
동궁은 현재 서울역사박물관 자리이며 정조는 세손에 책봉된 뒤 아홉 살부터 16년간 살았다.
1. 집희당(緝熙堂) 구역
집희당은 세자의 내당으로 숙종, 영조가 동궁시절 사용했고 동궁전 내당(內堂) 즙희당(緝熙堂), 양덕당(養德堂), 동궁전 부속 건물 중서헌(重書軒), 동궁전 별당 경선당(慶善堂)이 있다.
2. 경현당(景賢堂) 구역
금천교 지나면 건명문이 나온다. 이 건명문의 오른편에는 동궁의 영역인 경현당과 중서헌, 경선당, 양덕당, 문헌각, 양심각 등이 있고 건명문의 왼쪽으로 전설사와 빈청, 마청, 시강원이 쭉 이어지는데 모두 동궁의 영역에 속한다.
세자 사무 공간 경현당(景賢堂), 세자 서재 문헌각(文獻閣), 세자 강학하는 존현각(尊賢閣), 혼천의(渾天儀) 설치한 규정각(揆政閣), 휴식 공간 청한정(淸閒亭), 춘화정(春和亭)으로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경현당
세자의 강독 장소이자 소현세자, 세손 정조, 효명세자의 관례장소이며 전각 중 숭정전 다음으로 넓고 밝으며 근처에 연못이 있었다.
정조가 세손 시절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책 한 권을 읽을 때마다 맛있는 음식을 차려 주었다고 술회한 곳이 바로 동궁의 경현당이다.
경희궁에서 처음 치러진 공식적인 행사가 1625년 경현당에서 열린 소현세자의 관례이다.
존현각(尊賢閣)
동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로 역대 왕의 세자시절 강독 장소 즉 소현세자, 영조 연잉군시절, 사도세자, 정조 세손시절, 그리고 효명세자가 독서와 경연을 하고 신료들을 접견하던 곳이다.
중층 건물로 1층은 존현각이라 하여 세자가 독서하는 곳이었고, 2층은 주합루라 하여 서적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혼천의라는 천체를 관측하는 기구를 보관하는 규정각이 바로 옆에 있다.
1777년 은전군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자객이 잠입하여 정조 살해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정조는 왕세손으로 책봉된 뒤 왕위에 오를 때까지 존현각에서 일기를 썼는데, 이를 『존현각일기』라 하며 일성록의 기초가 되었다. 『존현각일기』는 별도의 도서로 전하지는 않고, 1777년에 간행된 『명의록』에 수록되어 전한다.
안희헌, 함춘헌, 지효합 : 휴식 전각
양덕당 : 동궁의 내당, 혜경궁 홍씨 거처, 뒤뜰 소나무, 덕화전으로 개칭
경현문
문헌각
청한정
7장 기타 영역
■ 금천교(錦川橋)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하는 의미와 배산임수라고 하는 풍수지리 사상의 영향으로 궁궐에도 명당수가 흘러야 길하다고 여겨 궁궐마다 금천교가 있다. 경희궁의 금천교(錦川橋)를 비롯해서 경복궁의 영제교(永濟橋), 창덕궁의 금천교(錦川橋), 창경궁의 옥천교(玉川橋), 경운궁의 금천교(禁川橋)가 그것이다. 그런데 경희궁의 금천교 아래로 흐르는 명당수가 얼마나 비단같이 맑은 물이었던지 돌다리의 이름을 금할 금(禁)자 금천교(禁川橋)가 아니라 비단 금(錦)자 금천교(錦川橋)하고 하였다. 정조가 지은 〈경희궁지〉에도 금천교(錦川橋)라고 하였다.
창덕궁의 금천교와 창경궁의 옥천교를 참조하여 세웠다.
인왕산 아래 경희궁 뒤편에서 발원하여 경희궁 내전 북동쪽을 경유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흥화문과 건명문 사이를 가로질러 흘렀다.
금천교에는 사악한 기운을 막기 위해 돌로 만든 ‘서수’를 배치한다. 돌거북은 서울고등학교 본관 앞으로 옮겨간 것으로 추정된다.
<서궐도안>에 따르면 흥화문을 들어서면 어도가 서쪽을 향하여 일직선상으로 뻗어 있고 그 중간에 금천교를 지나면서 몇 미터 지나 남쪽으로 꺾인 다음 다시 서쪽방향으로 곧바로 나아가다가 중문인 건명문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복원된 어도 위에 놓인 금천교의 방향이 서울역사박물관을 향하여 일직선상으로 뻗어 있는 것은 어색한 것이며 그 방향은 현 흥화문 쪽을 향해 있어야 된다.
■ 용비천(龍飛川)
경희궁은 우물터가 많다. 용비천은 용이 하늘로 날아간 샘이라는 뜻으로 궁궐지에 경희궁의 우물터라고 되어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이 자리에 있던 서울고등학교 학생들이 교련수업이 끝나고 등목을 했다는 기록과 현재 금천교 아래 석판이 남아 있다.
■ 건명문( 建明門)
동궁 입구에 세워진 창덕궁의 진선문, 경복궁의 흥례문에 해당하는 중문으로 진선문처럼 신문고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무과시험도 실시하고 조참이라는 조회도 행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 앞이 넓었다는걸 짐작할 수 있다.
흥화문에서 건명문까지 길이가 상당함을 다음의 글에서도 알 수 있다.
조선 인조 5년(1627) 청나라에서 온 사신 용골대가 모화관을 거쳐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정문을 거쳐 금천교를 건너 건명문 밖에 이르렀을 때 역관에게 말하기를 ‘문을 들어와서 걸은 것이 거의 1리나 되는데, 인도하는 관원이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내일 다시 오겠다.’라는 기록이 있다.
책의 출판과 유통을 국가가 독점하고 책 속의 지식이 권력이 되던 시대에, 영조47년(1771) 100명이 넘는 책쾌가 건명문 앞에 붙잡혀 와 벌거벗겨진 채 두 손을 뒤로 묶이고 뙤약볕 아래에서 거의 죽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 운교(홍교)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경축하는 칭경기념식의 준비와 관련하여 황제가 친림할 때에 경운궁에서 대로를 거치치 않고 경희궁으로 곧장 왕래할 수 있는 전용통로로 사용하기 위해 건축되었다. 홍예 2개 밑으로 전차가 다녔다.
홍교는 1908년 교통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철거되었다.
운교
■ 서암(瑞巖)
경희궁에는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이용한 시설들도 있었는데, 현재는 암천과 영렬천만이 그 흔적을 말해 준다.
서암은 태령전 뒤 암천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곳은 단지 암천이다. 정조의 <존현각일기>에서 경희궁의 모양을 상세하게 쓰는데 ‘태령전 뒤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에 ‘암천‘이라는 샘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암이 있던 자리는 기록에 의하면 덕유당(자정전 동북쪽) 서북쪽이다. 숙종38년(1708)에 이름을 상서로운 바위라는 뜻의 ‘서암’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서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게 하였다. 현재 ‘서암’을 새겼던 사방석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 《궁궐지》에 영조가 지은 〈장락전기〉가 전하는데 ‘덕유당의 서북쪽에는 바위가 있는데 속세에서 상서로운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옛날에 ‘서암’(瑞巖)이라고 이름 짓고 선왕이 글씨를 쓰고는 돌에 새기에 했다. 나는 이곳이 작지만 확 트여 있는 것이 좋아 자주 여기에 들렀다‘는 기록이 있다.
왕암이라는 그 이름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 곳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도 있다.
■ 영렬천(靈冽泉)
태령전 서쪽에 있는 우물로 바위 틈에서 물이 나와 언제나 마르지 않고 매우 차가워 사람들은 초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돌에 있는 각자는 선조의 글씨를 집자했으며 영렬천 곁에는 혼전 건물인 영경당(1726년 태묘의 11실을 신위 봉안)이 있었다. 숙종은 영경당 서쪽의 궁장이 낮아서 바깥 길에서 안이 들여다보이는 것을 꺼려 담을 높게 쌓도록 하고 또 영경당 이름을 고쳐 위선당이라 했다. 위선당 주변은 조망도 좋고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후에 영조는 위선당 8경(爲善堂八景)을 지었다.
■ 방공호
경희궁지 내의 방공호 자리는 숭정전 동행각 동쪽의 담장지 부근으로 회상전과 융복전이 있던 곳이다.
일제가 1944년에 미국의 공습에 대비하여 통신시설을 보호하기위해서 건설하였는데 방공호 건설에는 당시 체신국 적원들과 경성중학교의 근로 보국대 학생들이 동원되었고 일제 말기에 쓰이지 못했던 방공호는 6⸱25 전쟁 후 영국군이 본관 교사 등을 점거하면서 방공호를 잠시 이용했다. 길이가 110미터, 벽의 두께가 3미터이며 50미터 들어가면 2층 구조로 되어 있다.
■ 돈의문
태종 때 서소문과 돈의문이 지맥상 왕궁에 나쁜 영향을 주므로 돈의문을 없애고 그 옆으로 북쪽에 ‘서전문’이라는 작은 문을 만들었다. 세종 즉위 이후 현재의 이화여고에서 경향신문사로 가는 언덕길 주변에 ‘돈의문’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문을 세웠다.
경희궁 앞길이 새문안길, 신문로로 불리는 까닭은 돈의문이 여러 번 자리를 옮겨다니며 최종 이곳에 올 때 새문(新門)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옛문이 아니라 새로운 문을 열었다는 의미로 당시 지명이 ‘새문동’이었다. 임금이 경희궁에 임어할 때에는 돈의문은 폐쇄되고 서소문을 통해 한양 서쪽으로 출입하였다.
일제는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한 이후부터 한양도성의 성벽과 성문들을 단계적으로 없애려 했고, 이에 따라 1915년 돈의문은 강제 철거되어 경매 끝에 205원 50전에 염덕기가 목재를 낙찰받았으며 그 외의 귀중한 부속물은 총독부에서 관리했다.
■ 잔존하는 경희궁의 현판들(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규정각기(규정각), 일신헌기(일영천), 망관악시(영취정), 양덕당, 서궐임서(경현당), 첨장락좌광명기회(광명전), 기회(사물헌), 억석년회천만, 복수당, 집희당, 상의원면복가상량기(상의원), 규정각, 교월여촉(용비루), 경봉각, 장락전기(장락전), 영광문, 건경문, 장묘고궁(회상전 추정), 유석당, 경선당술회(추모당), 창덕경희봉안각기, 규정문, 숭정전
사방석 서암
8장 경희궁 관련 자료
■ 《궁궐지》(宮嶡誌)
•숙종 연간에 만들어진 것이 있고 다시 이를 보완하여 헌종 대에 정리한 것이 있다.
•헌종 때 증보, 수정된 『궁궐지』는 5권 5책으로 제1권 경복궁, 제2권 창덕궁, 제3권 창경궁, 제4권 경희궁, 제5권 도성지(都城志)로 되어 있다.
•내용은 각 궁궐별로 궁의 창건연혁을 적고 궁에 속하여 있는 전각별로 건물의 명칭·위치·용도를 밝혔으며, 건물에서 왕세자의 출생·즉위나 왕·왕비의 죽음 등을 기록하였다
•또한 건물과 관련된 시문 등도 수록한 것이 있다. 더욱이, 편찬 당시에 이미 없어진 건물에 대하여도 명칭이나 용도 등을 밝혀 놓았다. 기사 중에 순조 34년에 경희궁의 회상전에서 왕이 죽었음을 밝혀 순조연간까지의 기록이 적혀 있음이 확인된다.
■ 〈경희궁지〉(慶熙宮地)
•정조가 세손 시절에 쓴 것으로 궁 안의 건물을 연조, 치조, 궐내각사 등 3개 영역으로 나누어 차례대로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정조가 세손시절부터 ‘궁궐제도’에 입각하여 경희궁 전체를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숙종 때 지은 원지(‘궁궐지’)를 참고했으며 존현각 일대의 주합루를 비롯한 장서 시설은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장서에 진력하렸음을 알게 해준다.
•경복궁이 없더라도 창덕궁, 창경경, 경희궁의 3대 궁만으로 정치를 하기에 부족하지 않고 더 이상 건축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경희궁의 존재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 글을 짓게 된 동기가 전각의 이름에 대한 고증, 연조 영역의 위서를 정리하여 사관도 참고하게 하려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
순조 29년에 화재로 회상전, 융복전, 흥정당, 정시합, 집경당, 사현합, 등이 소실되자
1830년(순조 30)부터 1831년(순조 31)까지 진행된 경희궁(慶熙宮)의 재건축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이 책을 통하여 당시의 영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어서 건물이 한 채도 남아 있지 않은 오늘날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 ⌜서궐도안⌟(西闕圖案)
•지금은 너무 많이 훼철되어서 경희궁의 원모습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서궐도안⌟이 있어서 경희궁의 옛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경을 그린 ⌜동궐도⌟와 마찬가지로 조선후기의 경희궁의 전체 모습을 그린 것이다.
•다만 ⌜동궐도⌟는 그 자체로 완성된 작품이지만 ⌜서궐도안⌟은 채색이 되지 않는 미완성의 그림이기 때문에 안자를 붙였다.
•이 ⌜서궐도안⌟의 제작연도는 아마도 거의 ⌜동궐도⌟가 만들어진 시기와 비슷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궐도⌟가 비단에 그려진 완성품이기 때문에 국보 제249호로 지정된 반면에 서궐도는 동궐도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종이에 그려진 미완성인 상태이기 때문에 보물 제1534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본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다.
•⌜서궐도안⌟은 제목이나 낙관이 없어서 화가와 제작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부감법(새가 높이 날아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같다하여 조감법이라고도 함)으로 그린 것인데 12폭의 종이를 이어 붙인 화폭 위에 오로지 먹만을 사용해서 그린 밑그림 형태이다.
•건물마다 지붕 용마루선 바로 아래에 건물의 이름을 적어 놓았는데 ⌜동궐도⌟에서 용마루 위쪽 여백에다 이름은 적은 것과 대조를 보인다.
•정조가 세자 시절인 1774년에 쓴 정묘어제경희궁지와 헌종 연간에 발행된 《궁궐지》와 비교분석하면 대체로 순조임금 때인 1800년~1829년에 그려진 것임을 알 수 있다.
■ 《한경지략》(漢京지略)
•조선후기 정조 연간에 수도 한성부의 역사와 모습을 자세히 기록한 지방지. 부지이다.
•2권 2책. 필사본. 저자가 수헌거사(樹軒居士)로 되어 있어 분명하지 않으나 유득공(柳得恭)의 아들 본예(本藝)로 추정된다.
•진본은 전하지 않고 1956년 서울시사편찬위원회에서 필사본인 이병기(李秉岐)본을 영인, 출판하였다. 서울시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내용
권1에 천문(天文)·연혁(沿革)·형승(形勝)·성곽(城郭)·궁궐(宮闕)·단유(壇壝)·묘전궁(廟殿宮)·사묘(祠廟)·원유(苑囿)·궁실(宮室)·궐내각사(闕內各司)·창경궁내각사(昌慶宮內各司)·경희궁내각사(慶熙宮內各司), 권2에 궐외각사(闕外各司)·역원(驛院)·교량(橋梁)·고적(古蹟)·산천(山川)·명승(名勝)·각동(各洞)·시전(市廛) 등이 수록되어 있다. 각 항목은 전거(典據)를 들어 설명하였다.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序例)
•조선 전기 신숙주(申叔舟)·정척(鄭陟) 등이 왕명을 받아 오례의 예법과 절차 등을 그림을 곁들여 편찬한 책.
•이 책은 국가의 기본예식인 오례, 즉 길례(吉禮)·가례(嘉禮)·빈례(賓禮)·군례(軍禮)·흉례(凶禮)에 대해 규정한 예전(禮典)이다.
① 길례
권1의 30개조에서 사직·종묘와 각 전(殿) 및 산천 등 국가에서 제사드리는 의식을 기재하였고, 권2의 26개조에서는 주로 농사와 관계되는 것이 많은데, 선농(先農)·선잠(先蠶)·기우(祈雨)·석전(釋奠)·사한(司寒) 등을 중심으로 기술한 국가의식 절차를 규정한 것이며, ‘대부사서인사중월시향의(大夫士庶人四仲月時享儀)’는 관료나 일반 백성의 시향행사(時享: 해마다 음력 2월, 5월, 8월, 11월에 지내는 사당제사)를 규정한 것이다.
② 가례
권3의 21개조에서 중국에 대한 사대례(事大禮)와 명절과 조하(朝賀), 그리고 납비(納妃)·책비(冊妃) 등 궁중의 가례절차와 의식을 적고, 권4의 29개조에서는 주로 세자·왕녀·종친·과거·사신·외관(外官) 등에 관한 의식인데, 그 중에서 양로연은 왕이 직접 참석하는 연의로서, 예조의 주관으로 노인을 블러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는 의식이다. 혼례는 『사례편람 四禮便覽』의 기재 내용과 비슷하다.
③ 빈례
권5의 6개조로서 중국사신을 접대하는 사대의식과 일본 등의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의식이 기재되어 있다.
④ 군례
권6의 7개조로서 친사(親射)·열병(閱兵)·강무(講武)에 관한 군사의식 절차에 대한 것이다.
⑤ 흉례
권7의 59개조로서 국장의식의 모든 절차를 기재했고, 권8의 32개조에서는 국왕 이하 궁중의 초장(初葬) 이후의 모든 의식절차를 적은 것이며, 권말의 대부사서인상의(大夫士庶人喪儀)만이 관료와 일반 백성의 의식을 기록하였다
■ 국장 절차
왕과 왕비가 돌아가시면 이조에서는 국장도감(國葬都監), 빈전도감(殯殿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이라는 임시 기관을 설치한다
국장도감은 장례를 치르는 기간(약 5개월)동안 전체 상례에 대한 재정과 문서 등을 관리하고, 재궁(梓宮, 관), 크고 작은 가마(대여(大輿) 등), 각종의장(儀仗)을 제작하며, 발인(發靷)을 총괄하는 기관이다.
빈전도감은 염습(殮襲), 성빈(成殯), 성복(成服)에 관한 업무를 하며, 장례 기간 동안 왕이나 왕비의 신주와 혼백을 관리하는 기관이다. 특히 빈전도감은 왕릉을 조성한 후 혼전도감으로 이름이 바뀌어 삼년상 후 종묘에 신주를 모신다.
산릉도감은 왕릉을 조성하는 기관으로 건물 및 석물 제작, 왕릉 자리 주변 정리 등 능 조성에 필요한 인원 관리 및 감독하는 기관이다. 보통 하나의 능을 완성하는 데에는 약 5개월의 시간이 걸리고, 능역(陵役)에 동원되는 인원은 6천명에서 많게는 1만 5천 명 정도가 필요하다.
의정부, 6조, 집현전, 춘추관에서 2품 이상의 관원들이 모여 함께 시호(諡號)를 의논하고, 시책과 시보를 만든다.
유교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혼(魂)과 백(魄)으로 분리되어 혼(魂)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魄)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조선의 임금이 사망하면 왕릉이 조성되어 시신이 안치될 때까지 궁궐 안 빈전(殯殿)에 약 5개월간 시신을 모셨다. 그리고 시신이 매장되어 백(魄)이 땅으로 돌아가면 혼(魂)을 기리기 위해 신주(神主) 를 3년간 혼전(魂殿)에 모셨다. 3년이 지나면 종묘로 옮겨지게 된다. 경복궁에는 혼전으로 문경전, 빈전으로 태원전이 별도의 전각으로 마련되어 있었으나 다른 궁궐에는 필요에 따라 빈전과 혼전을 지정했다.
<국조오례의 >홍례편국휼고명(國恤顧命)
국휼고명이란 왕이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하여 왕위 계승자를 정하는 절차이다. 왕의 병환이 위급하게 되면, 내시가 왕을 부축하여 사정전으로 모신다. 왕이 신료들을 부른 자리에서 유언을 하면, 전위유교를 작성한다.
초종(初終)
숨을 확인하는 절차로, 내시가 명주솜을 왕의 입과 코 위에 얹어 솜이 움직이는지를 살핀 후, 숨이 끊어지면 모두 곡(哭)을 한다.
복(復)
왕의 영혼을 부르는 의식이다. 내시가 임금이 입던 옷을 메고, 왕이 숨을 거둔 곳의 지붕 위로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고 돌아오란 의미로 세 번 ‘상위복’이라 외친다. 이를 마치고 옷을 앞으로 던지면 아래서 이를 받아 대행왕의 위에 덮는다.
역복 불식(易服 不食)
의복을 갈아입고 금식을 하는 절차이다. 상제들에 대한 근신의 내용을 나타내는 것으로 왕의 종친 및 신하가 관과 상의를 벗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소복을 입는다. 왕세자, 대군 이하의 왕자는 3일 동안 금식을 한다.
계령(戒令)
일을 분담하는 절차로, 병조에서는 여러 곳을 호위하고, 예조는 상례에 관련된 일을 의정부에 보고하고,
목욕(沐浴)
시신의 머리와 몸을 깨끗이 씻기고 새 의복으로 갈아입히는 절차이다. 병풍을 치고, 뜨물로 머리를 씻기고 빗질해서 수건으로 모발을 싸 묶는다. 수염을 가지런히 빗기고, 손발톱을 깎아 작은 주머니에 담은 후, 방건으로 얼굴을 덮고, 다시 이불을 덮는다.
습(襲)
시신에 수의를 입히는 절차이다. 곤룡포, 첩리, 한삼, 바지, 버선 등을 여러 벌 준비하여 차례로 입힌다.
위위곡(僞位哭)
자리를 만들어 곡을 하는 것으로, 왕세자, 대군 이하의 왕자, 왕비, 왕세자빈, 내외명부 등이 자리를 정하고 차례로 자리에 나아가 곡을 한다.
거림(擧臨)
문무백관이 곡을 하는 절차로, 조정에서 종친과 문무백관이 함께 절을 하고 곡을 한다.
함(含)
함은 시신의 입에 쌀과 구슬을 채우는 절차로 망자가 저승까지 갈 동안에 먹을 식량을 준다는 의미이다. 버드나무 수저로 쌀을 떠 입에 채우고 진주를 물린다.
설빙(設冰)
시신 아래 얼음을 넣는 절차이다. 국장(國葬)은 초상(初喪) 이후 몇 달이 소요되기 때문에 이 동안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이다.
영좌(靈座)
신위를 만드는 절차이다. 대행왕의 평상 남쪽에 혼백을 만들어 영좌를 꾸며 모시고 명정을 세운다. 시신을 대신하여 생전에 입었던 옷들인 유의를 함에 담고, 영혼을 대신하여 혼백을 놓는다.
명정(銘旌)
죽은 사람의 품계, 관직, 성씨를 기록한 기이다. 9척 길이의 붉은 비단에 ‘대행왕재궁(大行王梓宮)’이라고 금박으로 쓴다. 깃대는 대나무를 사용하고 머리에는 이무기의 머리를 새긴다.
고사묘(告社廟)
고사묘는 종묘에 왕의 죽음을 고하는 절차로 제 3일에 사직, 영녕전, 종묘에 대신을 보내어 상례와 같이 고한다.
소렴(小殮)
시신을 여러 겹의 옷과 천으로 감싸는 절차이다. 이불로 감싸되, 묶어 매지는 않는다. 4장의 교포(絞布), 19벌의 염의(殮衣)로 감싸는데, 옷섶의 오른쪽을 위로 가게 여미고 고름은 매지 않는다.
치벽(治椑)
치벽은 관을 만드는 절차로, 공조에서 만든다. 왕이 즉위한 해에 소나무로 만들어 옻칠을 1년에 한 번씩 해준다. 벽 안에는 붉은 비단으로 사방을 붙이고 녹색 비단으로 사각을 붙인다.
대렴(大斂)
5일 째에 수의로 시신을 감싸 묶고 관에 입관하는 절차이다. 이 때 입히는 수의는 90벌에 달한다. 왕세자, 대군, 종친, 문무관이 엎드려 곡을 한 후, 소렴과 같이 염하고 천으로 시신을 묶는다.
성빈(成殯)
성빈은 빈소를 차리는 절차이다. 입관이 끝난 후 빈소를 새로 짓고, 벽 안에 주작, 백호, 현무를 그려 각각의 방향에 붙인다.
여차(廬次)
대군 이하 왕비와 왕자, 왕세자빈, 내명부의 임시 거처할 장소를 마련하는 절차이다.
성복(成服)
대렴한 다음날 상복을 갖춰 입는 절차로, 왕세자, 대군 이하의 왕자, 왕비, 왕세자빈, 내외명부, 종친과 백관 등 모두가 최복이라 불리는 상복을 입는다.
사위(嗣位)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의식이다. 성복을 마치면 왕위 계승의 의식이 행해지는데, 이 때 왕세자는 상복을 벗고 면복을 입고 빈전 앞에서 국새를 전해 받고 정문으로 나아간다.
반교서(頒敎書)
왕세자가 왕위에 즉위한 사실을 공포하는 의식이다. 대소 신료들이 늘어선 정전에서 선교관이 전하의 교서를 선포한다. 의식이 끝나면 승정원에서는 교서를 받들어 각도에 나눠 보낸다.
고부 청시 청승습(告訃 請諡 請承襲)
왕위가 계승되었음을 국제적으로 인준받기 위한 절차로 승문원에서 부고를 알리고, 시호를 청하는 표문과 전문을 올리고, 의정부에서 왕위 승습을 청하여 사위를 신정하는 의식을 갖는다.
조석곡전 급 상식의(朝夕哭奠 及 上食儀)
아침 저녁으로 울면서 간단한 제사를 지내는 절차와 상식을 올리는 절차이다. 날마다 날이 밝기 전에 왕의 자리를 빈전 지게문 밖의 동쪽에 서향하여 설치하고, 왕이 곡을 하면 대군 이하의 왕자도 부복하고 곡을 한다.
삭망전(朔望奠)
초하루날과 보름날에 간단한 제사를 지내는 절차로 종친과 백관, 왕자, 왕세자, 왕 순으로 부복하고 곡을 한다.
의정부 솔백관 진향의(議政府 率百官 進香儀)
의정부에서 모든 관리들을 거느리고 제사를 지내는 절차로 문무백관, 감찰, 전의, 통찬, 봉례랑 등이 제사를 지낸다.
■ 경연
유교의 이상정치 실현이 목적으로 왕권 견제의 역할도 수행한다.
경연은 태조가 경연청을 설치하면서 제도화 되었는데 15세기 중반 이후 사림들이 중앙정치에 진출하면서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조선시대 경연 왕은 성종으로 재위 25년 동안 매일 세 번씩 경연에 참석해서 여러 정치 문제를 협의하기도 하여 경연이 바야흐로 정치의 심장부가 되기도 하였다.
세종은 즉위한 뒤 약 20년 동안 매일 경연에 참석했으며, 집현전을 정비해 경연관을 강화하였다
경연은 세조와 연산군에 의해 폐지되기도 했으나 곧 부활되어 고종 때까지 존속하였다
경연의 종류에는 오전의 조강(朝講), 낮의 주강(晝講), 오후의 석강(夕講) 그리고 불시에 열리는 야대와 소대(召對) 등이 있었는데 조강, 주강, 석강은 일정한 시간에 행해졌기에 법강(法講)이라고도 하였다.
경연관은 3정승을 포함해 학문과 인품이 탁월한 문관 중 에서 선발하였고 선조 이후 이후 재야 학자를 초빙하기도 하였다.
강의 교재는 사서오경과 역사책인 〈자치통〉·〈자치통 감강목〉이 기본서이고 〈소학〉·〈정관정요〉·〈국조보감〉 등도 사용하였다.
■ 조회의 종류
① 조하
정전의 조정에서 왕에게 하례를 올리는 의식행사
국가의 주요행사. 신년하례식. 동지, 음력 설날의 조회 의례나 왕과 왕비의 생일에 왕세자를 비롯한 모든 관원들이 참여
③ 조참
매일이 아니라 매달 5일, 11일, 21일, 25일의 네 차례였다.
동원되는 의장물이나 상징물 역시 상참보다 더 많고 화려했다.
이처럼 조참은 규모가 크고 거행시기도 드물기에 편전이 아닌 정전의 정문에서 거행되었다.
② 상참
조선시대 상참은 왕과 주요아문의 일부 관료들이 매일 아침 편전에서 만나는 조회 의례였으며, 동시에 왕의 공식적인 하루 일정에서 첫 번째 일정이기도 했다
파루 후 침전의 침실에서 기상한 왕은 해가 뜰 무렵에 상참에 참여하기 위해 침실을 떠났다. 따라서 왕이 자연인에서 지존으로 변신하는 첫 번째 경계점은 침실의 문이었다. 침실 문을 나갈 때, 왕은 의관을 정제했으며 이때 입는 옷과 모자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색과 문양으로 장식되었다.
왕이 상참에 참여할 때 입는 복장은 익선관에 곤룡포였다. 검은색의 익선관은 사모처럼 생긴 모자로서 윗부분에 두 개의 뿔 모양 장식을 부착하였다. 익선관의 뿔 모양은 매미의 날개를 상징한 것으로, 이슬을 먹고 사는 매미의 청렴과 검소를 본뜬 것이었다.
곤룡포는 붉은 색의 두루마기로서 양 어깨, 가슴 그리고 등 부분에 황금색 실로 수놓은 용무늬를 달았다. 곤룡포란 용무늬를 수놓은 옷이란 의미였다. 용무늬의 경우 왕은 발톱이 다섯 개인 오조룡(五爪龍)을, 왕세자는 발톱이 네 개인 사조룡(四爪龍)을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의 왕은 상복(常服)으로 익선관과 곤룡포, 옥대와 흑화를 착용하였다. 이를 왕의 시사복(視事服)이라고도 한다. 왕의 재위 기간 중에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입었던 복장이다. 왕뿐만이 아니라 왕세자와 왕세손도 익선관복을 착용하였으며 명나라 황제나 대한제국의 고종이나 순종도 익선관복을 착용하였다. 단지 신분에 따라 곤룡포의 색상이나 보(補)의 문양이나 개수, 허리띠 등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또 푸른색의 가리개와 부채인 산(繖)과 선(扇)으로 가려졌다. 산은 비단이나 천으로 만든 가리개로 비나 해를 가리기 위해 사용했는데, 모양이 둥근 것은 대산(大繖), 네모난 것은 방산(方繖)이라고 하였다. 선은 꿩의 깃털을 짜서 만든 부채로 중국의 무왕이 만들었다고 한다. 해를 가리거나 먼지를 막을 때 또는 바람을 일으킬 때 사용했다. 부채의 무늬에 따라 용이면 용선(龍扇), 봉이면 봉선(鳳扇) 그리고 작이면 작선(雀扇) 등으로 구분되었다.
이 같은 상참 의례와 조참 의례를 통해 왕은 자신의 권위를 높일 수 있었고 나아가 군신 간의 엄격한 질서를 확립할 수 있었다.
■ 어진(御眞)
어진 제작은 도사(圖寫)·추사(追寫)·모사(模寫)의 3종류로 구분된다. 도사란 군왕이 생존해 있을 때 그 수용을 바라보면서 그릴 때에 일컫는 말이다. 또 추사란 왕의 생존 시에 그리지 못하고 승하한 뒤에 그 수용을 그리는 경우로, 흡사하게 그리기가 가장 어렵다고 한다. 모사는 이미 그린 어진이 훼손됐거나, 새로운 진전에 봉안하게 될 때 원본(도사본이나 추사본)을 범본(範本)으로 해 신본을 그릴 때에 일컫는다.
현재 남아있는 어진 중 영조의 어린 시절을 그린 연잉군의 어진만 도사본이고, 나머지는 원본을 베껴서 그린 그림이다.
원래는 세조, 숙종, 정조 등의 어진도 더 있었으나, 6.25 전쟁 때 전국의 어진을 모아 부산의 광복동의 약품 보관 창고인 관재청에 보관을 하였다. 그러나 휴전협정이 이루어진 1년 뒤인 1954년 12월 26일 아침 6시 20분 경, 화재
이 일로 국보 3,400여 점이 불에 타 재로 변했다.
간신히 반쪽만 불에 탄 영조의 연잉군시절, 노년기, 철종, 익종의 어진만 구할 수 있었다.
왕들의 어진들은 국보 및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태조의 어진은 1987년 12월 26일 보물 931호로 지정되었다가 2012년 6월 29일 국보 제317호로 승격되었으며, 전주 경기전에서 보관 중이다. 영조의 노년기 어진은 보물 932호로, 영조의 어린 시절을 그린 연잉군의 어진은 보물 1491호로, 철종 어진은 보물 1492호로 각각 지정되었으며, 모두 국립 고궁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세종이나 이순신 등은 표준영정이라 해서 국가에서 영정난립을 막기위해 1973년 표준영정 제도를 만든 것이다.
■ 품계석
정조 1년 9월에 인정전(仁政殿) 뜰에 품계석(品階石)을 처음 세우기 시작했다.
조하(朝賀) 때의 반차(班次)가 매양 문란해졌으므로 품계에 따라 돌을 세워 반열(班列)의 줄을 정하도록 명한 것이다.
조선시대 품계는 고려와 마찬가지로 각 품을 정(正)·종(從)으로 나누어 정1품에서 종9품까지 18품으로 하고, 다시 종6품 이상의 정·종은 각각 상(上)·하(下)의 2계(階)로 나누어, 정3품 상계(上階)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은 당상관(堂上官), 정3품 하계(下階) 통훈대부(通訓大夫) 이하 종6품까지를 당하관·참상(參上)이라하고, 정7품부터 종9품까지를 참하(參下:參外)라 하여 구분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품계는 사실상 30계(階)로 나누어지고, 각 계는 종친(宗親:王族)·의빈(儀賓:왕의사위)·동반(東班:文官)·서반(西班:武官)·잡직(雜職)·토관직(土官職)별로 그품의 명칭이 있었다.
당상관은 조선시대 조의(朝議)를 행할 때 당상(堂上)에 있는 교의(交椅)에 앉을 수 있는 관계(官階) 또는 그 관원이다. 관직으로는 정1품[大臣]이 맡는 의정부의 삼정승, 종1품에서 정2품[正卿]이 맡는 육조의 판서와 의정부의 좌참찬 ·우참찬, 한성부 판윤, 팔도관찰사, 종2품에서정3품[亞卿]이 맡는 사헌부 대사헌과 사간원 대사간 및 홍문관의 대제학과 부제학, 성균관 대사성, 각도의 관찰사와 병사 ·수사, 승정원의 승지 등을 포함하였다.
■ 답도·소맷돌·석수
계단은 높이차가 심한 단을 오르내리기 위한 장치인데, 계단의 높이 차이로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기도 한다. 황제를 부르는 호칭인 ‘폐하(陛下)’라는 말은 ‘폐(陛)’ 즉 큰 섬돌(계단)의 아래란 뜻으로, 계단 아래 대령했다는 의미가 된다. 계단 위의 존귀한 신분인 상대에게 계단 아래에 있는 자신을 보아달라고 외치는 것이다. ‘각하(閣下)’나 ‘전하(殿下)’ 모두 같은 의미로 해석하면 된다.
정전 계단의 형태는 위아래 크게 두 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각 단은 다시 세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그 중 가운데 부분은 비스듬한 통 돌이 박혀 있고 계단 끝에는 큰 돌로 마감해 놓았다. 이 돌을 소맷돌이라고 하며, 가운데 박힌 통 돌을 답도라고 부른다.
답도에는 왕을 상징하는 두 마리의 봉황이 새겨 있다. 왕이 전에 오를 때는 ‘연’과 ‘여’라는 가마를 타고 오른다.
■ 박석
정전 앞마당과 종묘 월대 그리고 왕의 진입로라 불리는 ‘참도’에 깔려 있다.
화강암은 파손 위험도가 낮고, 얼핏 얼기설기 아무렇게나 배치된 것 같지만 그 속에 과학적 원리와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 있었다. 우선, 박석은 한 낮에 내리쬐는 강한 볕을 난반사하여 눈부심을 예방하고, 박석의 거친 표면이 비 오는 날 신하들의 가죽신이 미끄러지지 않게 방지하는 역할을 해준다고 한다. 마지막은, 얼기설기 설치된 박석 사이사이로 난 이음새가 장마철에는 빗물을 흘려 보내어 물이 고이지 않게 하는 배수로 역할을 한다.
■ 부시
궁궐이나 서원의 주요건물들의 처마 밑에 설치된 철망이다.
조선왕조실록 중종편에 보면 경회루의 보수와 관련하여 ‘새들의 분비물로 궁궐이 더러워지고, 단청의 색이 바래는 것을 막기위해 철망을 설치하는 것‘에 대해 논의하는 내용이 나온다.
또 둥지를 짓고 알을 낳는 것도 예방하는 기능을 했다. 새가 알을 낳아두면 그것을 먹기 위해 뱀이 들어와 살생이 일어날 수도 있어서 임금이나 왕실 어른이 돌아가시는거 이외에는 나머지 궁녀나 혹은 노환으로 돌아가실 때쯤 되면 밤에 몰래 내보내는 등 궁궐 안에서 살생이 일어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여겼기에 이러한 이유들로 부시를 설치했다.
조선 초에는 명주실을 재료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 잡상
주로 잡상은 ‘서유기’의 인물인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과 토신등을 형상화 한 것으로 액운을 떨치기 위한 의미로 쓰인다. 실제로 잡상들의 형태를 보면 서유기의 인물이라 보기에는 조금 의아한 구석이 많다.
지붕 추녀마루 위에 놓여서 아름다운 장식역할도 하면서, 동시에 초능력을 가진 서유기 인물들처럼 임금님께서 계시는 곳에 나쁜 기운들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수호한다는 주술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경회루가 11개로 가장 많고 덕수궁 중화전 10개, 숭례문(崇禮門, 1448)은 9개, 창경궁 홍화문(弘化門, 17세기)은 5개, 경희궁 숭정전(崇政殿, 17세기), 창덕궁 돈화문(敦化門, 17세기)은 7개, 수원 팔달문(八達門, 1796)은 4개,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1804)은 9개, 경복궁 동십자각(東十字閣, 1865)은 5개, 덕수궁 중화전(中和殿, 1906)은 10개여서 지붕 한쪽에 올려놓은 수가 4∼11개로 제각기임을 알 수 있는데, 여기에 대한 자세한 연구정리가 없는 실정이다.
■ 책쾌(책주릅)
걸어다니는 책방으로 불린 책쾌가 등장하는 것은 15세기 무렵으로 조선은 문치주의를 표방하고 학문을 숭상하는 나라라 했지만, 책 한권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책쾌는 그 틈을 비집고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를 연결했던 책 거간으로 조선후기가 될 때까지 책은 시장 좌판에서 소규모로 팔리거나 물물교환 형태로 거래되었다.
•<고려사>등을 통해 보면 이미 10세기부터 책을 사고파는 행위가 등장했다고 하지만, 서점에 대한 정확한 묘사는 찾을 수 없다.
•조선 중기 중종 때가 돼서야 오늘날의 서점, 책방에 해당하는 서사를 설치하자는 논의가 등장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허용되지 않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전쟁의 여운에서 벗어난 뒤 조선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나 상업이 발달하고, 이에 따라 신분제가 동요하기 시작한다. 양반 못지않게 지식을 쌓고 학문을 연구하는 신흥계층이 나타나고 중국 책을 구하기 위한 사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책을 사고파는 것에 대한 인식 또한 바뀌어 특정 계층이 지식을 독점하던 시대가 서서히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영·정조시대로 들어서며 청나라를 통해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고 낯선 문화를 갈망하는 지식인들이 개성 있는 문체로 글을 썼다.
•이옥, 박지원, 유득공, 박제가 같은 지식인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문화의 장을 새롭게 펼쳤고 정조 때 이로 인한 ‘문체반정’ 있었다.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 책과 관련된 업종 들이 급격히 부상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책쾌였다.
•책쾌는 책을 팔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당시의 책쾌들은 난해한 옛 고서까지 필사하고 해제를 달 정도로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전파하는 문화전령사 역할을 했으며 조선 최고의 책쾌 조신선이 있다.
■ 박문사
일제강점기에 서울 중구 장충단공원 동쪽,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있던 일본 조동종(曹洞宗) 사찰이다.
장충단은 본래 을미사변 때 피살된 시위연대장 홍계훈(洪啓薰)과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 등을 기리기 위해 대한제국 고종이 쌓은 제단이었다. 이곳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에 대한 항일 감정을 상징하는 장소였기에 1919년에 일제가 장충단 자리를 공원으로 바꿨다.
조선총독부는 장충단을 공원화한 데 이어 1932년에는 공원 동쪽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모하기 위한 사찰을 짓고 사찰이 자리잡은 언덕을 춘무산(春畝山)이라고 불렀다. 춘무(春畝)는 경사스럽게 한다는 의미인데, 춘무는 이토 히로부미의 호이다.
박문사라는 이름은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 이등박문(伊藤博文)에서 따왔고 이토의 23주기 기일인 1932년 10월 26일에 완공되었다
박문사는 이등박문의 원찰 격이자 동시에 일제 말기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에 대한 정신적 교화 행사의 장소이자 조선 불교계를 전쟁에 동원하는 중심 기구로 기능하였다.
‘김옥균, 이용구, 송병준 등 3인의 위령제가 박문사에서 소위 한일합방 30주년을 맞이하여 개최되다’(동아일보 1939.11.8.)
조선불교회에서 대동아전쟁황군필승국도대회를 겸한 불교도대회를 박문사에서 개최하고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발표하다. “우리들 내선불교도는 성지를 봉체하고 멸사봉공, 정전목적 관철에 힘써 대동아공영권(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이 아시아 대륙에 대한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내건 정치 표어) 건설을 위하여 솔선 정신할 것을 기함’(매일신문 1941.11.24.)
※ 사진 및 참고문헌
•고문서
『조선왕조실록』
『궁궐지』
『경희궁지』
『서궐도안』
•현대문서
종로문화원, 『경희궁』
최동군, 『덕수궁 경희궁 실록으로 읽다』, 도서출판 담디.
서울특별시, 『경희궁지 발굴조사 보고서』
이근도, 『경희궁의 복원과 역사산책』 담수원, 2004.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서울역사박물관, 『경희궁은 살아있다』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서울편 2, (주)창비.
•사진
고려대학교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e뮤지엄
첫댓글 그동안 고궁으로서 소외 되왔던 경희궁을 전반적으로 이해하는데 많은 공부가 됬습니다.
많은 자료의 정리를 체계적으로 설명을 해주신 품격있는 해설 감사합니다~~
그 어느 궁궐 보다 애착이 많이 가던 사라진 경희궁.
이번 기회에 깊이 있게 공부하게 되었군요.
감사합니다.